국가보안법이 무엇이기에
최 창 우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
1. 국가보안법의 본질
국가보안법 하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으스스하다”거나
“기분이 왠지 그렇다”고들 말한다. 아마 독재정권의 정권
안보용 법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독재 정권이 악용한 법률, 또는 반통일 악법, 또는 반인권 악법
같은 규정을 하긴 쉽지만 이 법이 없어지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시원스럽게 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을 것 같다. 국가보안법 전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도 많지 않은 것 같다.
혁명운동이 성공하면 국가보안법 폐지로 이어지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 같은 제도개선 투쟁엔 별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종종 있다. 나는 이 말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전체 운동과 함께 가야
하지만 별도의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사는 한국의 국가보안법 현실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국가보안법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건 사상탄압법이다. 모든
진보의 역사에 사상탄압 법률이 있었고 사상탄압 법률을
무력화시키는 과정이 곧 진보의 과정이기도 했다. 일제 때
조선치안유지법이 그러했듯이 국가보안법도 사상을 통제함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지배하고 변혁운동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사상탄압의 목적은 기득권 체제 수호이다. 본질을 숨기기 위해
국가안보라는 이름을 빌고 있을 따름이다. 한국 기득권 체제를
보호하는 핵심기제가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친미 자본가 계급과
냉전․수구 세력에 있어 국가보안법은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 왔다. 90년대 초에 정주영씨가 현대 중공업 파업 때
노동자들이 머리에 두른 빨간 띠를 다른 색으로 바꾸면 협상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자본가 계급이 국가보안법
질서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00년대 말 독일의 비스마르크 철권통치 때 사회주의자 탄압법,
1940~50년 대 미국의 메케런법, 스미스 법 등의 국가보안법,
1950년대의 서독의 결사법 등이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 같은
역할을 했지만 민중들의 투쟁을 통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2. 국가보안법의 내용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 구성죄, 목적수행죄,
자진지원‧금품수수죄, 잠입‧탈출죄,
찬양‧고무등죄(제7조), 회합‧통신죄, 편의제공죄,
불고지죄 등을 두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 개념을 중심으로 사형시킬 수 있는
규정을 무려 46가지나 두고 있고 무거운 형량은 상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한선을 두고 있다.
열린마당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라는 개념이 핵심이다. 2조에서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 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가
바로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를 참칭한다는
표현을 통해 북한은 자동적으로 '반국가단체'가 된다. 3조에서
반국가단체 구성죄, 가입죄, 가입권유죄, 예비음모죄를 두고
있다.
다음으로 민중운동 단체와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시달리는 7조를 보자. 이른바 이적단체와 찬양 고무 조항이다.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 7조에는 찬양고무죄,
이적단체 구성가입죄, 허위사실 날조유포죄, 이적표현물 소지죄
등이 규정되어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반국가 단체 개념을 뼈대로 북한을 자동적으로
반국가단체가 되게 하고 북한 이외에도 사노맹 같은 조직을
‘자생적인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다음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모든 행위’를 처벌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반국가단체가 매우 애매할 뿐 만 아니라 유엔가입을 통해 국가적
실체로 인정받고 있는 북한을 '괴뢰'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초현실적이다. 이 애매한 ‘반국가 단체’에 근거를 둔 이적단체
또는 이적행위, 이적표현물, 찬양 고무 동조라는 말은 또 얼마나
규정되기 어려운 개념인가!
바로 이러한 악법을 민중투쟁을 통해 없애고 민중의 마음과 몸의
족쇄를 걷어낼 때, 바로 그 때만 사회가 바른 길로 진보하고
창의성이 넘치고 민중들 사이에 비판적인 상호소통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됨은 물론 분단도 극복하고 평화통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이기에
3. 국가보안법의 역사
국가보안법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박원순 변호사는
국가보안법은 일제 때 치안유지법에 뿌리를 둔 법으로 자구 하나
토씨 하나 똑같은 조항들로 가득 찬 법률이라고 밝혔다. 일제는
을사조약을 체결한 직후 의병전쟁이 크게 일어나고 국내 언론
매체가 활성화되는 흐름이 멈추지 않자 1906년 신문지법과 함께
보안법을 제정한다. 일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도 1925년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조선 치안유지법을 제정한다. 치안유지법은
사회주의자 탄압을 내세웠지만 적용대상은 매우 광범위해서
조선어학회 사건 때도 치안유지법을 적용한다. 사회주의자는
물론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인 법률이 치안유지법인
셈이다.
해방 후 점령국 미국을 등에 업고 "반공"을 통해 살아남은 친일,
친미 지향의 지주와 자본가 세력이 일제 때 치안유지법을 본떠
만든 법률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그해 발생했던 4.3항쟁과 여순항쟁 같은 '반란을 진압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제정되게 된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친일파를 보호하고 친미 자본가 분단 독재
체제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이다. 법이 제정된 직후인
1949년 1월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는 걸
확대 조작하여 국회 내 진보적인 의원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하게
된다. 그 결과는 친일파 청산 임무를 맡게 된 반민특위 와해로
연결된다. 이는 곧 요즘 쟁점이 되는 친일파 청산의
좌절이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뒤 단 1년 만에 118,621명이 투옥되고,
132개의 정당, 사회단체가 강제 해산되었다. 분단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독재악법임을 실증한다. 최근에 밝혀진 일이지만
한국전쟁이 나자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해서 옥살이를 하고
있던 사람들을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재판도 없이 감옥에서
꺼내어 총살한다.
열린마당
진보당을 결성한 조봉암 선생은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216만표 (유효투표의 30%, 이승만 504만 표)라는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 총선에서 적어도 20석은 얻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시점이다. 진보당의 진출에 놀란 이승만
정권은 1958년 진보당과 조봉암 선생을 제거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개악한다. 개악된 국가보안법에 의해 평화통일을
추구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보당은 해산당하고 조봉암 선생은 사형
당한다. 그러고 나서 이승만은 부정부패와 부정선거에 의한
집권하는 데 성공했지만 재집권한 직후 그는 민중의 혁명에 의해
몰락하게 된다.
이후 집권한 박정희가 ‘반공을 국시의 제 일의로 삼고’ 얼마나
많은 간첩사건과 공안사건을 조작했고 민중을 공포정치로
탄압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박정희는 국가보안법으로
부족하다고 느낀 나머지 반공법을 도입한다. 바로
찬양‧고무죄는 이 때 생기게 된다. 박정희는 국가보안법
상 악명 높은 불고지죄를 마음껏 활용한다.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점은 4‧19 혁명 직후 동아일보 보다 부수가 많이
나가던 신문 민족일보를 박정희는 폐간시키고 사장 조용수
선생을 사형시켰다는 점이다.
전두환 정권은 반공법에 대한 국내외 비판여론이 높아지자
국보위라는 쿠데타 기관을 동원하여 반공법을 국가보안법에
흡수하는 개악을 하게 된다. 그 법률이 오늘의 국가보안법의
뼈대를 이룬다. 따라서 전두환 쿠데타 정권이 만든 오늘의
국가보안법은 원천적으로 무효이다. 이후 이른바 북방정책을
추구하던 노태우 정권은 사회주의 국가와 교류에 걸림돌이 되는
조항을 개정하고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언적 문구를
삽입하는 기만적인 개정을 하게 된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이기에
4. 변화되는 정세
국가보안법 질서는 6월 항쟁 이후 흔들려 왔고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다. 그 구체적인 계기는 열린우리당의 다수당 획득과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미선이‧효순이 촛불집회 때 민중의 진출과 그 힘을
디딤돌해서 탄핵정국을 뒤집을 때 드러난 민중의 힘 때문에
국가보안법 질서는 흔들리는 것이다. 역사에서 민중의 진출 없이
법률과 제도가 변화된 역사는 없었다.
우리 역사에서 미선이‧효순이 촛불 집회는 매우 의미 있는
진보이다. 4‧.19에 버금가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국가권력이 있었지만 현행법으로 분명히 법률 위반인 촛불
집회를 어떻게 할 수 없었고 민중은 자발적인 힘으로 성장하여
광화문 네거리와 미대사관 앞에 진을 칠 수 있었다. 기존의
친미‧반공‧냉전 질서에서 통용되던 국가보안법과
민주권리를 제약하는 집시법 같은 악법 질서가 마구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미선이‧효순이 추모를 넘어 미군철수가
이야기되었고 반미는 하나의 거대한 민중의 흐름이 되었다. 이
때 이념적 장벽을 힘차게 뛰어넘은 민중은 탄핵정국 때 반민주
세력의 폭력을 온몸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 힘이 바로
열린우리당의 다수의석 확보와 민주노동당의 진출로
표현되었다.
그 결과 이념적 지형은 상당히 바뀌었다. 법률은 그대로이지만
국가보안법 질서는 흔들리고 국가보안법 정세는 유리한 상태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추세가 그렇다는 것이지 구체적인
흐름이 어떻게 잡힐지 확신하기 이르다. 근본적으로는
시민사회단체와 민중의 투쟁 준비가 잘 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이고 정치권만 한정해서 본다면 노무현 정권이 불철저하고
열린우리당에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이 철저한 의원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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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의 흐름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의 흐름을 살펴보자.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6월 항쟁 직후와 김대중 정권이 시작된 시점에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권이 후반기 들어서는 시점에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를 구심점으로 활발히 전개되던
국가보안법 폐지 연대 투쟁도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지난
3~4 년 동안 시민‧사회단체가 거의 모두 참여한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라는 연대단체가 있었지만 국가보안법
연대 투쟁은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중요한 것은 소강상태를 보인 건 사실이었지만 끊임없이 대중의
여론과 참여를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하고 공안세력을 끊임없이
압박하며 투쟁해온 세력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연대투쟁이 소강상태로 변화된 사이에 끊임없이 조직사건은
터졌고 한총련과 범민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활동에 발목이
잡혔고 진보의련 사건에서 보듯이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의료인들이 의료분야의 사회개혁을 하자는 요구조차
국가보안법으로 탄압 받게 된다
특히 한총련의 구성원들과 가족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이
시기는 조직 사건이 터질 때마다 조직사건 대책위가
만들어졌지만 그 모임 역시 연고가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거나
가족들이 죽을 고생을 하는 과정을 겪었다.
왜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은 사람의 문제가 그 사람의
지인들만의 문제가 되거나 그 사람이 속한 단체와 친한 단체가
참여하는 문제로 축소되고 가족의 문제로 되어버려야 한단
말인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국가보안법 투쟁에 좌파그룹은
대개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좌파그룹 사이에는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은 민족해방을 중시하는 단체나 사람들이 하는 운동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렇게 하는 사이 민족운동을
하는국가보안법이 무엇이기에
단체들 대표들 소수와 민가협에 계신 어머니들이 죽을
고생하면서 국가보안법 투쟁 전선을 지켜왔다는 점을 우리는 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년 말에 터진 송두율 교수 사건은 변혁운동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이 우리사회의 사상탄압 현실을 바르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자아내게 했고, 한국의 운동세력이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대해 제대로 연대해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거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를 들게 만들었다.
37년 만에 귀향한 반유신 투쟁을 한 망명객이 입국하고
국가보안법으로 곧바로 구속되고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색깔공세에 만신창이가 되고 한 가족의 인권은 땅바닥에
팽개쳐지고 있는 현실을 겪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연대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연대투쟁은 접어두고 성명서를
내어 공안기관과 수구 냉전적인 극우 파시스트 세력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낸 단체도 별로 없었다. 특히 조선노동당 가입 등의
이야기가 나오자 냉소 분위기가 흘렀고 공안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때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말하며 권력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이후 송두율 교수 대책위가 구성되어서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벌였지만 제대로 된 연대투쟁의 모습은 아니었다.
바로 이 땅에 숨쉬고 사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서 송교수가 항소심의 결정에 따라 석방된 이 시점에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는 그 때 무엇을 했는가?
이번 항소심에서 담당 판사가 말한 것처럼 시대의 변화와 남북
관계의 변화는 사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힘차게 진행되었어야 했던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다.
열린마당
중요한 건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잠깐 말했지만
국가보안법 폐지 연대투쟁은 정치지형의 변화를 맞을 때마다
불붙다가 구체적인 성과를 보기 어렵다는 예상이 될 때
소극적으로 변화되거나 지지부진해지는 과정이 되풀이 되었다.
바로 이점이 문제다.
주체적인 입장에서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을 조직하고 정치권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전개하는 생각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세를 갖지 않을 때 정치권의 결정에 목을 매게 되고
정치지형이 바뀌면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악순환을
밟아왔다.
변혁운동을 하면 곧 국가보안법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약화시키거나 없애면 변혁운동이 큰 걸음 도약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직도 민중들은
국가보안법을 대체로 두려워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에 걸려
패가망신이나 하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냉전의 그림자는 쉽게
걷힐 수 없는 것이고 독재의 잔재는 곳곳에 남아 살아 있는
자들을 괴롭히는 역사가 반복되는 모습이다. 박정희 추모나
박근혜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촛불시위와 탄핵정국을 뒤집는 과정에서
민중들이 크게 진출한 것이 사실이고 국가보안법 정세의 변화는
그 힘으로 이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힘이 곧바로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킬 수는 없다.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변혁과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과
세력들이 밥 먹고 물먹는 일처럼 생각하고 구체적 행동계획을
가지고 개별적으로는 물론 연대투쟁을 활발히 진행할 때 커다란
성과를 얻게 될 것이다. 제도상으로 국가보안법을 폐지시키지
못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은 사문화되어 반인권, 반민주의
상징으로서 국가보안법 질서는 무너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은 국회 앞에서 지난 해
5월부터 지금까지 "국가보안법폐지 릴레이 1인국가보안법이
무엇이기에
시위"를 시민들의 참여 속에 진행하고 있다. 시민 사회단체가
거의 모두 참여하고 있는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와
인권단체들은 오는 9월 정기국회에 모든 힘을 집중시키는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국민연대는 100만 명 서명운동을 일부 진행하고
있고 며칠 전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한국청년단체협의회는
국민연대와 함께 전국 도보순례를 시작했고 통일연대도 여러
가지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투쟁 역사에서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는 없었다.
민중이 직접 참여할 때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이 제대로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이 함께 하는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이 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이다.
노동현장과 농사현장에 있는 활동가들이 노동자들과 국가보안법
토론회를 열고 교육프로그램을 조직하고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위원회 같은 조직을 꾸려서 다양한 행동을 함께 해나간다면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고 노동자,
민중이 우리 사회의 진보를 주도하는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투쟁의 초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폐지하면 형법이 있기
때문에 안보에 지장이 없다는 방어적 자세를 넘어
국가보안법으로 그동안 고통받아온 모든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복권하는 조치를 취하고 국가보안법에 의한 국가기관의
탄압을 조사하는 (가칭) “인권탄압조사위원회”를 만들고
나아가 인권범죄엔 시효를 없애는 “인권기본법”을 제정하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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