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사민당과 독일노동조합연맹의 개량주의 |
현장에서 미래를 제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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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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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받고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
-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
Ⅰ. 독일 사민당과 독일노동조합연맹의 개량주의
Ⅱ. 민주노총의 중앙 지도부에게는 노동현장이 있는 것인가
여기저기서 민주노총과 민주노조운동의 이른바 ‘위기’가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올해 임단투에서 무척이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은 혁명의 전망을
잃어버렸고, 자본주의는 개량의 토대를 잃어버렸습니다.
발악하는 자본의 공세 앞에서, 전열이 흐트러지고 투쟁의
의지마저 약해진 노동자계급은 삶의 전망이 어둡습니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이론적 무기인 마르크스주의를 버릴 때,
그것은 혁명의 꿈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자본에
투항하는 것, 곧 노동의 재앙이었습니다. 첫째 글은 독일의
사민당과 독일의 노동조합운동이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개량주의에 경사되면 노동자계급대중을 배신하는 역사를
추적하는 글입니다. 두 번째 글은, 올해 6, 7월에
최저임금투쟁과 노사정위원회 참여 논의에서 나타난 민주노총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한/노/정/연
Ⅰ
독일 사민당과 독일노동조합연맹의 개량주의
정 병 기
연구위원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 한다’는 명제는 국가
권력이 한 개인에 집중되어 있을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사회적 이념구도의 한 진영을 특정 집단이 비경쟁적으로
지배하며 집단 내의 논쟁구도를 특정 정파가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독일 사민주의의 발전도
이러한 일반성의 예외가 아니다.
‘공산주의 정당은 개량주의적 이념에 근거하지 않는 혁명
정당’이라고 한 맑스의 「공산당 선언」의 명제는 독일
사민주의를 질타하는 말인 듯 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독일 사민당은 수정주의 논쟁을 거쳐 라쌀주의로 회귀함으로써
혁명적 계급정당 노선을 이탈해 갔기 때문이다.
독일 노동조합운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민당과의
관계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분업론을 수용한 이후 라쌀의
국가의존적 사회주의 노선에 포섭되기 시작했고 2차 대전
이후에는 관료화된 이원적 산별노조체계에 의해 정치성을
잃어갔기 때문이다.
독일 사민당과 독일노동조합연맹의 개량주의
독일 노동운동의 개량주의와 관료주의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현재 어떠한 상태에 있고, 그 끝자락에 희망이
보인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알아본다.
1. 독일 사민당
: 의회주의적 계급정당에서 민족적 경제정당으로
1) 라쌀주의 전통 지속과 맑스주의 접목의 실패
독일 사민주의에 대해 국내에 소개된 설명들은 독일 사민주의가
맑스의 선구적 이론을 라쌀적으로 계승했다거나, 일정한 이념적
갈등 속에서도 맑스적 이념과 라쌀적 실천이 관철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맑스주의적 원리주의와 라쌀주의적 현실주의가
이념적으로 갈등하나 실천적으로는 조화를 이루었다는 설명이며,
후자는 양자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모두 갈등하면서 끝내는
라쌀주의적 현실주의가 승리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1차대전을 전후한 수정주의 논쟁을 거쳐 2차대전 후
국민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라쌀의 사민주의 정치에 대한
영향은 지속적으로 작용해 왔다. 독일 사민주의의 변화는 맑스의
전통에서 혁명적 성격을 수정해 온 결과가 아니라, 라쌀의
전통에 맑스를 이론적으로 접목하려던 과정이 실패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수정주의라는 말의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정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혁명적 계급정당 노선을 창당하고 이끌었던 베벨과
리프크네흐트의 후예들 중 일부가 라쌀 진영으로 특집
항복해 들어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국에서 페이비어니즘의
영향을 받아 개량주의적으로 전환해간 장본인인 베른슈타인이
“라쌀을 재발견”했다고 스스로 자인했던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2) 라쌀의 정당활동과 국가관
라쌀과 맑스가 활동하던 1860년대의 독일은 봉건질서의 타파라는
시민혁명의 문제와 국가통일이라는 민족문제 및 노동자 권리
확보라는 노동문제가 병존하던 시기였다. 그에 따라 라쌀은
노동자정당 건설을 통해 보통‧직접선거제를 획득하며
노동자들의 생산조합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보통‧직접선거권 획득은 의회 진입을 목표로 한
것이었으며, 생산조합 건설도 국가가 지원하는 형태를 의미했다.
라쌀의 활동을 규정지은 것은 바로 헤겔과 피히테의 영향을 받은
국가관이었는데, 그에게 있어 국가는 ‘자유로 향하는 인간
계발을 수행하는’ 절대적인 존재로서 결코 지양될 수 없는
것이었다. 라쌀은 실제 비스마르크가 추구한 국가통일을
‘메시아적 기대’를 가지고 반기며 협력하기도 했다.
반면 맑스는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서 무계급사회가
도래하면 반드시 사라져야 하고 또 사라질 존재이다.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노동자 계급의 실천은 혁명을 수반하며 혁명
이후에는 일정 기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국가가 소멸된
무계급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독일 사민주의와 관련해
라쌀주의와 맑스주의가 갈등해 온 핵심은 바로 이러한 국가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스마르크가 사회보험과 사회주의자탄압법이라는 ‘채찍과
당근’ 정책을 사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회보험이 산업화
추진전략과 지주세력에 대항하는 동맹전략의 수단으로서
노동자들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사회주의자탄압법은
라쌀의 의회주의적 노동운동에 맑스의 혁명적 노동운동이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독일 사민당과 독일노동조합연맹의
개량주의
것이었다. 국가통일 정책뿐만 아니라, 이러한 양면 전략에도
라쌀은 저항하지 않았다. 당시의 상황에서 그의 목표와 실천
전략은 맑스주의와 결합될 수 없었던 것이다.
3) 맑스주의의 성장과 라쌀주의의 지속
국가통일이 이루어지고 프로이센의 경제가 성장을 거듭했음에도
탄압 정국은 오히려 노동운동전반으로 확대되었다. 노동자들의
혁명적 요구가 성장하는 조건이 창출된 것이며, 그에 따라
사회주의자탄압법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는 오히려 강화되어
갔다. 1869년 베벨(Bebel)과 리프크네흐트(W. Liebknecht)가
맑스주의적 사민주의노동자당(SDAP)을 창당한 데 이어
1875년에는 라쌀의 전독일노동자협회(ADAV)와
사민주의노동자당(SDAP)이 합당하여 사회주의노동자당(SAP)이
건설된 것이다. 더욱이 독일 산업과 무역이 세계 2위에 진입하던
시점인 1891년에는 사민당으로의 개명과 함께 적어도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라쌀주의가 배제되고 맑스주의로 무장한 에어푸르트
강령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맑스주의의 승리가 예견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맑스주의 이념으로 창당된 SDAP조차도
보통‧직접선거권을 강령의 중요한 요구로 설정하였으며,
라쌀주의 정당과 합당한 SAP 또한 보통‧직접 선거권과
국가지원의 생산조합을 요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에어푸르트
강령도 카우츠키가 작성한 이론부분에서조차 새로운 사회의
특성과 사회주의 혁명 방법 등 맑스주의의 혁명적 핵심을
외면하였으며 베른슈타인이 집필한 실천부분에서도 라쌀주의의
부활을 보는 듯한 개량주의적 요구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후부터
1차대전을 전후한 시기까지 이어진 수정주의 논쟁이 잉태된
것이었다.
특집
4) 수정주의 논쟁기 라쌀주의 강화와 공산주의의 분리
수정주의 논쟁기 독일 사민주의는 다수파를 구성했던
카우츠키(Kautsky)/베벨(Bebel)의 중앙파와
베른슈타인(Bernstein)의 수정주의파 및
룩셈부르크(Luxemburg)/리프크네흐트(K. Liebknecht)의 혁명적
좌파로 나뉘어졌다.
혁명적 좌파가 맑스의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반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파는 맑스 이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제창했다. 베른슈타인은 “국가 속에서의 모든 개량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운동이라 규정짓고 최종목표에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운동을 강조하며 “사회의 각 부문과 조직의
꾸준한 성장을 통한 사회주의의 점진적 실현”을 정치적
대안으로 내 놓았다. 카우츠키를 중심으로 한 당지도부의 입장도
혁명적 수사를 고수하기는 했으나, 실천적으로는 개량주의를
취했다. “사민당은 혁명적 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라는 카우츠키의 표현은 이른바 ‘혁명적 대기주의'의
압권이라 할 만하다.
한편 1914년과 1917년 기간 사민당 내에서는 1차대전 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라쌀적 국가관이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정주의를 통해 더욱 강화된 상태에서 논쟁의 귀결은
자명한 것이었다. 사민당 다수파는 노조와 함께 ‘성내 평화'를
선포하여 전쟁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그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국제연대에 입각한 공산주의자들의 분리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결국 리프크네흐트와 룩셈부르크 등은 전쟁
참가를 반대하며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하였고 1918년
공산당으로 발전해 갔다.
5) 1959년 강령개정과 국민정당화
2차대전 종전 후 독일 진보진영의 구도는 사민당과 공산당의
분리 및 동서독의 분리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라쌀주의 정당과
맑스주의 정당이 합당한 후 독일의 이념구도가 특정 독일
사민당과 독일노동조합연맹의 개량주의
정당에 의해 비경쟁적으로 대변되기는 했지만, 라쌀주의가
지속되는 가운데에도 맑스주의적 접목이 시도되었기 때문에 독일
진보진영의 퇴보가 그리 쉽사리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1차대전에 즈음해 공산당이 분리해 나가고 2차대전 종전 후에는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이 동독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서독의
진보진영과 당내 논쟁구도는 사민주의에 의해 독점되었다.
그에 따라 사민주의 내의 논쟁은 더 이상 맑스주의와 라쌀주의간
갈등에서처럼 혁명적 목표를 포함하는 이념 논쟁이 아니라
라쌀주의의 틀 내에서 집권전략을 둘러싼 논쟁으로 전화함으로써
진보진영을 벗어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갔다. 원리주의와
현실주의간의 논쟁이 현실주의 내의 논쟁으로 전화한 것이다. 그
첫 번째 변화는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개정이었다.
고데스베르크 강령 개정은 계급정당의 포기와 국민정당화로
요약된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사회주의가 맑스주의의 핵심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강령적‧실천적으로 대변하는 계급정당의 테두리
내에서였다. 그러나 중간계층의 성장과 노동자내부의 다양화 및
자본주의 발전의 지속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현실주의 노선은
계급정당으로서는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제 원리보다는 현실적 집권가능성이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새 강령은 케인즈적 총괄조정, 즉 시장기제, 자본, 이윤 및
축적을 용이하게 하지만, 공공선을 지향하고 사회적 분배 정의에
적합한 국가개입이라는 대안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결과적으로 사민당의 집권에 이바지한 것으로 보이며, 집권 후
정부 정책에 반영되기도 했다. 1966년 기민당과의 대연정을 통해
집권한 사민당은 1969년 주도정당으로 재집권한 이후까지
연방은행과 노사정 대표가 참여하는 ‘협주행동’을 통해
케인즈주의적 조합주의 정책을 편 것이다. 국민정당화로의 전환
속에서도 친근로자적 성격을 유지함으로써 좌파의 명맥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사민당을 일컬어 이른바
‘친근로자적 국민정당’ 또는 ‘좌파 국민정당’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특집
그러나 국민정당화한 사민당은 집권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됨으로써 득표율 신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회 집단들의
이해관계 대변을 소홀히 하는 폐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소수
저변층을 외면하는 이른바 ‘중도통합정당(catch-all-party)’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노동운동의 한 축으로서 노동자해방을
사회의 진보와 인간 전체의 해방으로 연결시키는 고리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6) ‘신중도’의 민족적 경제정당화
1980년대 말 이후 1998년 집권에 이르는 10년 동안은 독일
사민주의의 또 한번의 중요한 노선변화 시기이다. 신자유주의
노선과 케인즈주의적 개입국가라는 전통적 사민주의 노선,
양자를 모두 거부하는 ‘중도 개혁’을 통해 심각한 경제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는, 현 쉬뢰더 총리로 대표되는 ‘개혁 우파’의
‘신중도’ 노선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선거 전략상 전문인, 지식인, 젊은 기업가 등 신
중간층의 표를 흡수하고자 했던 이 노선은 강령적 차원에서
‘좌파 국민정당’에서 ‘현대 경제정당’으로의 변화를
의도했다. 쉬뢰더가 강조하는 ‘현대성’은 선별적으로
공급부문을 집중 지원하는 슘페터적 국가인 최소 국가로서의
‘민족적 경쟁 국가’를 지향한다. 곧 탈규제, 개방, 복지삭감,
민영화 정책 등을 통해 중심부 독점자본의 위기 탈출을 돕고
초국적 자본의 축적 운동을 도모하는 통화주의 탈규제 정책의
선택이다.
신자유주의적 전환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노선은 쉬뢰더 정부의
대표적 정책인 ‘미래프로그램 2000’으로 표방됐는데, 그
핵심은 연금삭감과 실업기금의 축소를 통해 국가부채를 독일
사민당과 독일노동조합연맹의 개량주의
줄이는 한편 기업에 대해서는 조세 경감을 통해 자본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실제 1960년대 서독 전체 조세 수입의
20%가량이었던, 자본에 부가된 조세 수입은 적녹연정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경감되었고 현재에는 5%에 불과하다.
7) 라쌀주의 뿌리와 독점적 이해관계 대변이 빚어낸
신자유주의적 전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독일 사민주의는 맑스주의가 특수한
정치경제적 조건에서 시도했던 진입이 외견상의 성공을 거두었을
뿐 라쌀주의가 뿌리에서부터 작동해 왔고 결국은 되살아나는
궤적을 밟아 왔다. 또한 라쌀주의 정당과 맑스주의 정당이
통합한 이후 라쌀주의의 우위 속에 공산당이 분리해 나감으로써
사민주의는 독일 진보진영을 비경쟁적으로 대변하는 한편 당내의
논쟁구도도 독점함으로써 자기비판력을 상실하고
선거전문정당화하여 신자유주의의 우경화 추세에 매몰되고
말았다. 정당구도의 다원주의와 당내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2. 독일노동조합
: 국가의존적 사민주의와 관료화된 이원구조의 질곡
1) 산별노조 건설의 역사
독일 노동조합의 역사는 1849년 인쇄공조합의 건설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담배, 섬유, 금속, 광산, 재단, 제빵, 제화
및 건설 부문 노동자들도 속속 조직화를 시작했다. 당시에 이
조직들은 직업단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1860년대에는
명실상부한 노동자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당근과
채찍’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는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여
노동자들의 국가의존성을 높이는 한편,
‘사회주의자탄압법’으로 사회주의 세력을 절멸시키고자
했다.
특집
그렇지만 비스마르크의 이중 정책도 독일 국민의 국가의존도를
심화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자를 궤멸시키거나
노동운동을 심각하게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사민당 세력이
오히려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1892년에는
할버슈타트(Halberstadt)에서 최초의 상급조직 건설에 합의하는
성과가 나타났다.
특히 이 토론에서는 이후 독일 노조운동의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항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우선
‘지방분권주의자’와 ‘중앙집권주의자’ 간의 논쟁에서 후자의
입장이 관철되었다. 보다 효율적이고 강력한 노동자 이해 대변을
위한 상급조직 건설의 필요성에 대해 다수가 동의한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결정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임금과 관련된
보다 구체적 이해관계의 대변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자
직종을 포괄하는 산별노조 원칙을 수용한 것이다. 이는 당시 한
사업장 내에 여러 노조가 존재하여 이해관계 대변의 혼란을 겪고
있던 금속과 목재 부문에서 특히 강력하게 주장된 사항이었다.
산별조직 원칙은 ‘한 사업장 내 한 개의 노조’라는 원칙으로
보다 구체화되었다. 당시에는 직업별 조직이 지배적인
상황이었지만, 머지않아 경제발전 추세와도 맞물려 광산업과
화학, 전기 부문 등에도 중앙집중적인 산별조직 건설이 확대되어
갔다.
2) 맑스주의와의 거리두기와 사민당과의 관계
독일 노조운동 내에 맑스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경향은 기독교 정파와 사회적 자유주의 정파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이들은 기독노조와 ‘히르쉬-둔커
노조연맹(Hirsch-Dunckersche-Gewerkvereine)’을 조직하였는데,
특히 히르쉬-둔커 독일 사민당과 독일노동조합연맹의
개량주의
노조연맹은 한때 9만 명이 넘는 조합원들에게 영향력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 이미 68만 명을 넘는 독일노동조합운동
본류인 독립노조들에 비하면 그다지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독립노조들도 일찍부터 맑스주의적 강령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는 다른 노조와의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맑스주의와는 본질적으로 거리가 있었던 라쌀의
국가의존적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민당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민당내 수정주의 논쟁이 일자, 독일 노동조합들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팔’로 자부하는 정당에 대한 기대와
의지를 가지고 더욱더 사민당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어 간
것이다. 1916년부터 전쟁에 대한 반대기운이 확산되기도 했으나,
노조지도자들 대부분은 수정주의 노선변경을 지지하며
사회개혁과 민주화를 반대급부로, 사민당이 참여한 정부의
전쟁수행을 지원하였다.
3)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활동과 파시즘 시기의 노조 해산
제1차대전이 끝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는
단체협상이 이루어지고 8시간 노동제가 실시되는 등 가시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독립노조들은 전후 복구를 명분으로 경제
질서의 재편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자들의 평의회
운동을 저지했다. 결국 1920년 제정된 직장평의회법은 평의회
민주주의적 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직장 내 사회정책과
해고 문제에서 공동결정의 가능성이 확대되었지만, 직장평의회는
종업원들의 이해를 대변하나 경영진에 충성해야 할 의무도 가진
이중성을 띠게 되었다.
물론 기독노조나 히르쉬-둔커 노조가 이를 반긴 것과 달리
자유노조들 내에서는 이 법을 두고 논쟁이 크게 일었다. 비판적
입장에 선 활동가들은 이중적 충성을 의무화한 직장평의회가
머지않아 ‘사용자 경찰’이 되어 갈 것이며 결국 사업장내
노조의 영향력을 근절시킬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특집
한편 이러한 와중에도 1918년 조직된 상급조직인
일반독일노조연맹(ADGB)의 조직원은 꾸준히 증가하여 1929년에
5백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1923년이 되자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고 노조도 자신들의 몫을 획득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29년 이후의 경제공황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황금기는
종식되고, 대량실업과 연립정부 붕괴 등 사회와 정치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히틀러의 나치즘 정권이 들어선 후 노조는 재차
정치적으로 분열하고 지도부는 무능력해졌다. 1933년 ADGB
지도부는 나치 정권에 순응하는 ‘노조연합
지도부(Führerkreis der vereinigten Gewerkschaften)’를
결성했고, 기독노조와 자유주의(liberal) 노조들도 해체된 후
전통적 조합주의에 흡수되어 갔다. 저항적 활동가들 중 대부분이
처형되었으며, 화를 면한 지도자들도 망명하여 조직적 저항을
형성해 내지 못했다.
4) 독일노동조합연맹(DGB)의 건설
: 외세와 부르주아 정치인의 압력
제2차대전 이후 독일노련(DGB, 1949년)의 건설은 노동운동의
통일이라는 시대적 투쟁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기보다,
외부적으로 영국과 미국, 특히 미국의 군정세력과 독일 부르주아
정치인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이자, 내부적으로는 독일
사민주의 이념이 이를 수용한 결과였다.
단일통합노조로 노조운동을 정치로부터 중립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이해와 맞닿아 있었고,
사민당으로서도 파시즘 치하에서 이렇다할 저항을 형성해 내지
못한 원죄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에서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서는 노조 내 좌파의 약진을 반길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민당이 독일 사민당과 독일노동조합연맹의 개량주의
1차대전 중 연립정권에 참여하여 공산당을 탄압했던 사실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군정 또한 공산주의와 전통 사회주의 경향의 좌파
노동운동세력의 형성을 막고 더 나아가 노조의 통합된 정치적
역량을 차단하기 위해, 단일통합노조를 건설하되 정치적
섭외권을 비롯한 상급노조의 권한을 무용화시키고 산별노조에
모든 실질적 권한을 부여하되 단협투쟁에 묶어두고자 했다.
망명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귀국한 일부 노조지도자들과
공산당 및 사민당 좌파지도자들은 과거와 같은 실질적 영향력을
가진 상급조직과 산별체계를 주장했으나 우파와 군정의 압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5) 독일 노동조합의 조직원칙
독일노련(DGB)은 무엇보다 독일 내에 유일한 상급노조라는
단일성과 국가‧정당‧종교로부터
독립적‧중립적이고 모든 정파를 조직 내에 아우르는
통합성을 갖는 단일통합노조를 목표로 건설되었다. 그에 따라
노조정책과 단협정책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개입과
남부유럽에서와 같은 정파노조의
정당정치적‧이데올로기적‧종교적 경향과 영향력이
배제되었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사무직노조(DAG)가
가입하지 않았으며 기독노련(CGB)이 따로 조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민당과의 연계가 아직 논쟁이 되고 있어
단일통합노조의 목표가 온전히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독일노련이 단일통합노조로서 갖는 의미는 독일
조직노동자들의 80% 이상을 포괄하고 정파성을 구체적으로
선언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독일노조체계의 두 번째 조직원칙은 기업 내 노조의 단일성을
의미하는 산별조직원칙이다. 산별조직원칙이란 1892년 최초의
합의사항과 동일하게 한 기업 내에 하나의 노조만 조직한다는
‘한 기업 내 하나의 노조’ 원칙을 뜻하는 것으로 기업 내의
다양한 직종과 업무에도 불구하고 종업원들은 당해 기업의 산별
소속에 따라 일괄적으로 하나의 산별 또는 부문별 노조에
가입한다는 것이다. 이 때 모든 노동자들은 개인 자격으로 직접
산별‧부문별노조에 가입하므로 산별‧부문별노조가
단위노조가 된다. 물론 이러한 원칙은 DGB 내에만 적용될 뿐,
DGB에 가입되지 않은 사무직노조(DAG)에 가입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에 따라 사무직 노동자들은 사무직노조에 가입할
수도 있어 한 기업 내에 사무직노조와 DGB 산하
산별ּ부문별노조가 공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특집
6) 중복된 이원구조의 질곡
독일노조의 두 가지 조직원칙은 산별노조로 하여금 임금 및
노동조건과 관련된 단체협상에서 강력한 권한과 교섭력을
갖추도록 하였으나, 경제외적 교섭이나 현장장악력 면에서는
독일 노동조합체계의 구조적 한계로 작용하는 중복된 이원구조를
결과했다. 즉, 전국과 산별 차원에서 상급노조 DGB와 단위노조인
산별ּ부문별노조의 이원구조, 그리고 사업장 차원에서
노동조합과 직장평의회라는 이원구조가 각각 현상한 것이다.
DGB와 산별노조의 이원구조는 상급노조인 DGB가 단협체결권을
갖지 못하고 국가, 정당 및 각종 사회단체와의 섭외권과 법률
상담, 직업교육 등 일정한 비단협적 특수업무만 수행하며, DGB
산하 단위노조인 산별‧부문별노조만이 단체협상을 비롯한
각종 노동자 이해대변의 실질적 권한을 갖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산별 차원에서 중앙집중적인 조직체계로서 세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독일 산별노조도 전국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및 사회 개혁투쟁뿐만 아니라 산별노조간
연대에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는 1952년
공장법 제정으로 정치적 파업이 금지되면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럼에도 조직구조상 이미 투쟁 중심부의 공동화를 노정한
독일노조는 독일 사민당과 독일노동조합연맹의 개량주의
실제 그에 대한 적극적 저항을 조직해 내지 못했다.
반면 노조와 직장평의회의 이원구조는, 사업장 내에서
노동조합이 각 작업단위별로 선출되는
‘노조신임대의원들(Vertrauensleute)’을 통해 조직의 입장을
전달하며 노동자 개개인의 의사를 다시 조직에 반영하고 있으나,
사업장 내에서는 노동자 이해 대변상 어떠한 구체적 권한도 갖지
못함을 의미한다. 직장평의회(Betriebsrat)는 사업장 내에서
산별 단체협약의 이행여부를 감시ּ감독하고 노동자
개개인의 구체적 이해관계와 고충을 대변하는 기구로서,
비노조원들까지 포괄하여 전체 종업원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노조와 직장평의회의 이원구조는
노조의 권한을 제한함으로써 그 현장 장악력을 현저하게
약화시키는 구조적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3. 독일 노조-정당관계와 노동운동의 전망
독일의 노조-정당 관계에서 노조는 전통적으로 ‘사민당을 위한
예비 또는 충원학교’로 해석되었고 그에 따라 노조활동은
‘시지푸스의 도로(徒勞)’로 간주되었다. 노조활동은 사민당의
당원을 충원하고 대중적 교육과 동원의 대상과 수단이 되며,
당의 지도를 받지 못하면 노조 활동은 공허한 헛수고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라쌀의 국가의존적 사민주의에 의해
깊숙이 각인된 독일노동운동은 사민당의 의회주의적 개량주의를
신뢰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독일 노동운동이 자본주의적 선거민주주의에서 의회
중심적 전략이 가져올 좌파정당의 탈계급화를 막지 못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최근
사민당의 신중도 노선이 ‘경제정당화’로 치닫고 적녹연정이
슘페터의 ‘민족적 경제국가’를 지향하여 신자유주의적
탈규제정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닌 것이다
특집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더욱 급물살을 타게 됨에
따라 독일 노동운동에서도 그동안 움츠려 있던 비판적 흐름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비판적 노조활동가 모임이 산별노조의
관료화를 지적하며 새로운 노조 건설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0년이 지난 현재에도 아직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국가의존적 사민주의에 포섭된 독일 노동운동 지형을 볼 때
이러한 움직임은 결코 경시할 만한 흐름은 아니다.
독일 노련 차원에서도 일정한 변화가 없지 않았다. 1990년대
초중반 콜 정권에 대해 과거와는 달리 보다 적극적인 정치적
대응의 자세를 보였고, 적녹연정에 대해서도 비판의 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수의 경향은 여전히 적녹연정의
신자유주의 정치를 수용함으로써, 사민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더욱이 비판적 그룹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지금의 정치적 움직임조차 또다시 굴절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일 노동운동의 미래는 이제
비판적 활동가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 정치적‧계급적
대변자를 잃어버린 독일 노동자들에게 그들은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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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3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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