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하여 |
현장에서 미래를 제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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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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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하여
이 진 우
회원
지난 5월 서울남부지원에서 한 판사가 종교상의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를 무죄로 판결했다. 판결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헌법에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병역법에도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하지 아니하거나 소집에
불응한 자만을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대 병역거부자들은
진정한 양심상의 결정에 따른 행위를 한 것으로 판단되고, 이는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어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판결
이후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따랐다.
그러나 7월 15일 대법원은 원심을 뒤집고 유죄를 선고했다. 양심
형성의 자유와 양심상 결정의 자유는 마음속에 머무르는 한 이를
제한할 수도, 제한할 필요성도 없다는 점에서 절대적
자유이지만, 그 양심의 실현 과정에서 다른 법익과 충돌할 수
있고, 이 때에는 필연적으로 제한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병역 의무는 궁극적으로는 국민 전체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피고인의 양심의 자유가
위와 같은 헌법적 법익보다 우월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하여
가치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한다.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한 동안 제법 시끄럽게 각종 일간지 방송
등에 오르내리던 ‘헌법정신’이니 ‘양심’이니 ‘인간의
존엄성’이니 ‘평화’니 하는 흰소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한 소란을 보면서 우리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
양심의 자유라고?
헌법 제19조 ;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양심의
자유라고? 대법원의 유죄판결이 나오자 한 시민운동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양심의 자유라는 부분을 헌법상 법조문이
아닌 실재화시켜 가야 하고 이번에는 그런 기회를 만들 수
있었는데 놓쳐버려 실망스럽다.” 이 사람은 정말 양심의 자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재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노동하는 사람은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하는 사람은 노동하지
않는 것을 사회운영의 원칙으로 하는 사회! 사회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평생을
허리 굽히고 살아가야만 하고, 돈이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걸음마를 배우면서부터 살인적
경쟁에 내몰리는 양육강식의 적대적 사회에서 정말 ‘보통
사람’들이 양심대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양심대로 사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가진 양심이란 지배계급의
양심일 것이다. 경쟁, 양육강식, 지배, 착취관계를 영원한
사회적 관계로 내면화한 지배계급만이 자신의 양심대로 살 수
있고, 헌법은 오직 그들의 양심의 자유만을 보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의 자유는 착취의 자유이고 억압의 자유일
뿐이다.
이렇게본다
헌법이란 우리들의 무기가 아니고 저들의 손에 들린 저들의
무기이다. 헌법은 양심의 자유만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평등, 인간적 존엄, 신체의 자유, 직업의 자유, 교육,
심지어 양성평등과 건강까지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한다고 헌법은
주장한다. 신용불량자 400만 시대에, 빈곤자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세상에 이 무슨 사기이고 기만인가? 문구대로만 본다면
헌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국가는 거대한 사기극일 뿐이다. 그러나
이 사기극이 힘을 가지는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같은 보통
국민들은 이 헌법을 해석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이
해석을 독점하고 있고 국가권력만이 집행할 수 있다. 그래서
대법원의 판결에서 볼 수 있듯이 저들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양심을 짓밟을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성을 파괴하고,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면서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용병이 될 수 있다.
매우 적법하게! 대법원의 판결자체가, 그리고 저들의 판결만이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법정신 운운하면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운동의 근거를 찾으려는 시민운동과 일부 진보운동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르주아 헌법이 말하는 자유
평등 평화는 부르주아사회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폭로해야 한다. 우리의 운동은 절대로 저들의 무기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운동은 말과 법조문이 아니라 바로 현실의 운동
그 자체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
군대문제에 대하여
돈키호테적인 한 판사의 행위에 의해서 촉발되기는 했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주장이 한동안
상당한 사회적 설득력을 가지기도 했다. 이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첫째, 북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자신감이다. 북한보다 몇 배나
되는 국방비를 쓰고 있고, 여기에 더하여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하여
미군까지 있는 마당에 북한의 위협은 이미 그다지 큰 걱정거리가
아니다. 더디 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북평화가 진전되는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한 여론조사를 보면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미국을 꼽고 있을 정도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병역거부를 잠시 동안이나마 논의할 수 있는
사회적 여유가 생긴 것이다. ‘북한의 위협도 크지 않고 군사
수만이 아니라 첨단무기가 군사력을 결정하는 시대에 모든
국민이 직접 총을 들지 않더라고 안보에 커다란 지장을 주지
않는다’라는 원심판결문의 주장은 이를 반영한다.
둘째, 제국주의 전쟁과 이라크 파병문제를 둘러싸고 반전과
평화에 대한 흐름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대부분이지만 2001년
12월 불교신자이자 평화운동가가 병역거부 선언을 하고 불교
신자를 비롯해 개인적 정치적 동기에 의해 병역거부를 선언한
사람이 12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간에 진행된 논의들은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대체복무를 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에서 대안을 찾고 그쳐버린다.
종교적 이유로 총을 들기를 거부한다면, 평화를 위해서 군대를
거부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이른바 ‘국가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주장이다. 이들의 논의는 그 전제로 군대와
군사력을 필요한 어떤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정말 대법원
판결문에서의 주장처럼 “병역 의무는 궁극적으로는 국민 전체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일까?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군대가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소위
말하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인가? 그렇다! 그러나 자본으로
전화하는 노동자민중의 생명, 노동력을 지킨다. 한줌도 되지
않아 끝없이 산업전선으로 내몰리게 만드는 쥐꼬리만한 재산을
지킨다. 이것이 저들이 지킨다는 노동자민중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의 실재 내용이다. 동시에 군대는 자본가들의
거대한 재산과 억압적 국가권력을 지킨다. 군대가 지키는 것이
우리 사회이고, 우리 이렇게본다
사회는 바로 착취사회이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군대는
착취사회를 유지하는 자본과 권력의 물리력이 되는 것이다. 분명
자본의 군대는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힘과 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힘뿐이다. 평화도 병역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평화란 전쟁을 도발하는 세력을
분쇄할 때 가능하다. 평화세력도 조직되고 무장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본의 군대를 거부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보다
실천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자본의 군대를 민중의 군대로
어떻게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자본의 군대에서 민중의
군대를 어떻게 훈련시키고 준비할 것인가? 다음과 같은 엥겔스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병역기간을 최대한 단축시켜서
사병들이 자본의 용병들인 직업군인들과 닮아가는 것을
최소화하는 것. 군복무를 통해 무기를 다루는 방법과 군사전략과
전술을 익혀 민중의 군대를 준비하는 것.
더불어 자본의 용병인 직업군인 수를 최소화하고 군비를
축소하고, 사병들 내에 민주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생활을
개선하는 조치들이 취해지도록 노동자민중들은 강제할 필요가
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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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3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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