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주의에 의한 인민의 기만에 대하여 |
현장에서 미래를 제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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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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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에 의한 인민의 기만에 대하여
레닌,ꡔ프롤레타리ꡕ제25호, 1908년 3월 12일
한노정연 홈페이지 ‘세미나 전체알림판’ 14번 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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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시각 : 2004-10
자료Ⅱ
한노정연 홈페이지
게시글
-07 12:24:06
작성자 : 민희유아빠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최근의 런던대회에서,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태도에 관한 문제가 심의되고 그에 대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 대회에서 특별한 논쟁을 야기한 것은 이 결의
중에서 자유주의자에 의한 인민의 기만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 당의 우익의 사회민주주의자는 이 부분이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결의 속에서 자유주의자에
의한 인민의 ‘기만’을 이야기하는 것, 즉 국민 중의 특정의
층이 특정의 정당(이 경우에는 카데트당)에 동조하는 것을 이들
층의 계급적 이해에 근거하여 설명하지 않고 국회의원, 변호사,
문필가 등의 이러저러한 그룹의 ‘부도덕한’ 정치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고까지 언명하였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차려입은 이 그럴듯한
논거의 배후에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주성을
약화시키고 그들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게 (사실상)
종속시키려는 정책이 은폐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카데트의 신사들은 그들을 추수하는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옹호하려고 하지 않고, 정부나
10월당이나 짜르전제의 ‘역사적 권력’에 추파를 던지고, 또한
그들과 거래한다는 정책에 의하여 그것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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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자본주의국가에 있어서 사회민주주의파의 전술의
기본문제의 하나인 이 문제를 새로운 사실로써 해명하기 위한
대단히 흥미있는 재료를 주고 있는 것은, 현재 수행되고 있는
프로이센 주의회의 보통선거권을 목표로 하는 투쟁이다.
독일사회민주당은 이 투쟁의 깃발을 내걸었다. 베를린의
프롤레타리아트, 나아가 베를린에 이어서 독일의 모든 대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가두로 진출하고, 수만을 헤아리는 민중의
장대한 시위를 조직하여 광범한 대중운동의 단서를 열었다. 이
대중운동은 이제는 이미, 이 운동의 당초에 이미 입헌권력의
폭력행위를 불러일으키고 군대의 사용과 무기를 갖지 않은
대중의 살상을 불러일으켰다. 투쟁은 투쟁을 낳는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은 자랑스럽게, 대담하게 이
폭력행위에 맞섰다. 그러나 여기서, 선거권을 목표하는
투쟁에서는 민주주의적 (및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표면에 나왔다. 이 문제를
둘러싼 독일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와 기회주의자 (독일에서
소위 수정주의자) 사이의 논쟁은 자유주의자에 의한 인민의
기만이라는 논제에 대한 우리 사이의 논쟁과 매우 유사하다.
독일사회민주노동당의 중앙기관지인
ꡔ포어베르츠ꡕ는 이것에 대한 주장을 싣고 있는데,
그 내용과 기본사상은 ‘선거권을 위한 투쟁은
계급투쟁이다!’라는 표제에 확실히 표현되어 있다. 당연히
예기된 바와 같이 이 논문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진리만을 긍정적인 형태로 서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회주의자는 이것을 도전장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도전에 응했다. 자치체사회주의의 분야에서 유명한 활동가인
쥬테쿰동지는 단호하게 이 ‘분파주의적 전술’,
‘프롤레타리아트의 고립’, ‘사회민주주의자의
흑백인조’(반동파와 독일인은 보다 부드럽게 말하고 있다)‘에
대한 원조’를 공격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와
자유주의자와의 공통의 사업에 계급투쟁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이 독일의 기회주의자에게 있어서도 흑백인조에 대한
원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에서 현행의 3급선거권
대신에 보통선거권을 실시하는 것은 어떤 한 계급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쥬테쿰은 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것은 “대지주에 반대하는 도시주민의 사업이며,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의 사업이며, 지주에 반대하는
농민의 사업이며, 동프로에센에 반대하는 서프로이센의”(즉
국내의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부분에 반대하는 공업적,
자본주의적으로 앞선 부분 일반의) 사업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그 외의 문제에서 개혁의 친구들이 아무리 분열해 있어도
이 한 점에서 모든 개혁의 친구들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독자가 보는 바와 같이 이 모두는 극히 잘 아는 논거이며, 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특정분자(‘도시민주주의파’, 농민
등)의 경제상태와 이해를 보여주는 것에 이르기까지 엄밀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의장을 걸치고 있다는 것, 독일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신문이 체계적으로 이미 수십년 동안
이러한 이야기를 계속해왔다는 것, 분파주의라든가 흑백인조에
대한 원조라든가 반동파를 고립시킬 능력이 없다라든가 하면서
사회민주당을 비난해왔다는 것을 덧붙일 필요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어떠한 논거로
이러한 논의에 반박하였는가? 우리는 독자가 ‘제3자의
입장에서’, ‘흥분하거나 편파적이 되는 일 없이’ 독일의
문제를 비판할 경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소와 시기의
특수한 조건의 지적인가, 그렇지 않으면 마르크스주의의 일반
원칙의 지적인가를 분별할 수 있도록 그들의 기본적인 논거를
전부 들어보자.
ꡔ포어베르츠ꡕ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로이다. 우리나라의 자유사상가들은 그들의 강령 속에서
보통선거권을 ‘요구’하고 있다. 그와 같이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지금 특히 열심히 미사여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개혁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반대로
참으로 인민적인 운동, 가두시위, 대중속에서의 광범위한 선동,
대중에 대한 고무․격려가 그들 사이에 은폐해버릴 수 없는
공포와 혐오와 극히 드문 최선의 경우에도 무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부르주아 정당의 강령, 자유주의적 출세주의자가 연회 석상이나
의회에서 하는 연설과, 현실의 인민투쟁에의 그들의 현실적
참가와는 확실히 구별되어야 한다. 모든 의회국가에서 모든
부르주아 정치꾼은 입에 발린 말로는 항상 민주주의를 위해 힘을
다했지만, 그것과 동시에 숨어서는 민주주의를 배신하고
있었다.
ꡔ포어베르츠ꡕ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로이다. “자유주의 정당(자유사상가)과 중앙파의 내부에는
의심할 바 없이 보통․평등의 선거권에 관심을 갖는 분자가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정당을 지도하고 있는 것은 이들
분자가 아니다. 소(小)수공업자도 아니고 반(半)프롤레타리아도
아니고 거의 영락한 농민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속에 숨어서
반동파와 타협하고 그들의 계급의식을 타락시키고 사실상 그들의
이익을 지키려고 하지 않고 그들을 투쟁으로부터 갈라놓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를 추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자를 보통선거권을 목표로 하는 투쟁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들속의 계급의식을 일깨우고, 그들을 동요하는
부르주아 정당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 필요하다.
“자유주의적(자유사상가) 정당의 내부에서는, 보통선거권에
관심을 갖는 이들 분자는 언제나 많은 약속을 부여받고 그리고
언제나 기만당하는 무력한 소수파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분자의
정치적 역량은 완전히 마비되어 있다. 그리고 만약 자유사상가
또는 중앙파로부터 이러한 유권자의 표를 거둬들이겠다고
위협함으로써 그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양보를 강제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바로 부르주아정당을 약화시키는
계급투쟁이야말로 동요하는 부르주아지를 좌익으로 밀어붙이는
유일한 수단이다.”
왜냐하면 자유사상가들에게는 반동파는 사회민주당만큼이나
가증스럽지는 않다는 것을 정치상의 여러 사실이 일찍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부르주아 정당의
모든 죄업을 가차없이 통렬하게 규탄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선거권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모든 배신이 이들 정당의 계급적
성격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리나라의 카데트가 그들의 강령속에 내걸고 있는 민주주의적
요구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이런 요구를 내걸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자를 따르는
소시민과 농민을 10월당에게 팔아넘기기 위한 것에 불과한가라는
문제는 이 문제가 혁명의 진행중에 몇 차례나 제기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만간에 몇 번이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앞에
제기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당의 누구이든간에
ꡔ포어베르츠ꡕ의 논거를 잘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추기. 우리가 ꡔ레치ꡕ신문 제52호(3월 1일자)에서
이 신문의 베를린 특파원 K.D.씨의 논문 ꡔ독일자유주의의
위기ꡕ를 읽었을 때, 이 논문은 이미 인쇄에 넘겨져
있었다. 이 필자는 우리나라의 자유주의적 위선자다운 한결같은
어투와 한결같은 태도로 ꡔ포어베르츠ꡕ와 쥬데쿰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필자는 양측의 논거를 서술하는 것이나
정확한 인용을 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식의 ꡔ포어베르츠ꡕ는
이단자에게 즉각 오명을 뒤집어씌우고 더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도전적인 어조를 띠고 있는 점에서 극히 호감이 가지 않는 그
표제논문에서, 이단자의 무지와 이단자가 당의 교조를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잊어버린 것을 비난하고 있다.” 카데트가
그를 이러한 방식으로 옹호해주는 것이 쥬데쿰 자신에게 있어서
‘호감이 가는’가 어떤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마음으로부터의 ‘승인’을
부르주아지로부터 받는 것은 이미 모든 나라의 수정주의자의
운명이다. 쥬데쿰 등과 스트루베씨 등의 동맹 -우리 입장의
올바름을 확증하는 데 있어서 이 이상 ‘호감이 가는’ 것을
생각해내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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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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