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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탄핵론 논쟁에 대한 소감

현장에서 미래를  제104호
전성식

‘민중탄핵론 논쟁’에 대한 소감


전 성 식

민의련 회원, 한노정연 연구원




1 논쟁은 “봉(封)”되었다. “‘논쟁’의 격렬함에 거북해 하고 당혹해 하는 일부 회원”에 속했던 사람으로서 논쟁이 “봉(封)”되었다는 ‘알림’에 우선 반가움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이것은 연구소의 회원으로 소장님과 부소장님이 서로 “적대”하며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평소 두 분 모두의 실천 활동과 이론 활동 모두를 존경하던 사람으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도하지만 무엇인가 개운하지 못하고 논쟁의 과정에서 들었던 여러 생각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고 맴도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은 논쟁의 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동시에 전개된 여러 정황에서 기인한다. 사실 나를 포함한 “일부 회원”을 더욱 혼란시킨 것은 그 정황 속에서 보였던 것들이었다.

이번 논쟁은 “‘탄핵정국’에서의 노동자계급의 대응” 즉, 노동자계급의 전술과 관련하여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채소장님은 탄핵 직후 “‘하일 노무현!’을 저지해야”(3.13)라는 글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지금 노동자․민중의 선진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민주노총․전농․민노당 대표의 ‘3․13 공동성명’처럼 “대통령 탄핵사태를 접하며 ...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거나“수구보수부패 정치집단의 탄핵사태 규탄”이니“수구보수부패 척결투쟁”운운하는 식으로 대중추수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온 국민이 떨쳐나서서 정치폭거 탄핵사태, 민생파탄 보수정치를 심판하자!”는 식으로 대중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다. 수구보수세력에 대한 규탄․공격은 저들 ‘개혁세력’의 그것만으로도 이미 넘치고 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현 정치적 상황은 저들 ‘개혁세력’의 권력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도발한 것이며, 그들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집행자로서 반노동자․반민중의 핵심세력임을 대중 앞에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들의 ‘개혁’이야말로 오늘날 민중의 생존권을 파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구현임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명백히 하는 것이다.1)

또한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2004.3.17)라는 토론회 정리 글에서 역시 같은 주장을 한다.

현재의 정세 형국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다툼·이해대립이 마치 전 국민의 혹은 전 계급의 결정적인 이해의 대립이라도 되는 것처럼 포장되어 선동되고 있고, 그 광기가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향해서 줄달음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앞에서 발제했던 분들이 규정하는 것처럼, ‘3·12 쿠데타‘라고 합시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기획하고 연출했습니까? 기본적으로 노무현·열린우리당의 총선작전이요, 권력강화 음모 아닙니까?2)

이와는 별도로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에서는 다양한 전술이 제출되었다. 그 중 하나가 “민중탄핵론”이었는데 “탄핵무효” 등의 슬로건에 반대하는 경향의 사람들이 이 전술로 수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전술에 대한 비판적 견해인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2004. 3. 23.)3)이 제출되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현재의 탄핵정국은 대부분 인정하듯이 다가올 선거에서 의회 다수권력을 빼앗길 상황에 처해있던 수구세력이 몰락의 위협, 그 공포를 과장한 나머지 자행한 합법을 가장한 의회쿠데타 이자 설익은 ‘테르미도르의 반동‘기도이다.

그리고 “민중탄핵론” 제기는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 힘들며, 현재 사태를 바라보는 정세관, 나아가 실제로 전략 전술을 세워 정세 개입적 차원에서 운동을 전개하는 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고 비판한다. 그리고 길지 않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론과 예를 들어가며 논거를 제시하고 자신들의 전술이 옳음을 주장한다.

이후 논쟁은 진행된다. ‘민중탄핵논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논쟁은 한쪽의 일방적인 비판과 다른 한쪽의 일관된 무대응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4) 채소장님은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과 그 ‘비판’에 대해서”5), “노동자계급 속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서”6),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운동의 독자성-‘민중탄핵’ 논쟁의 재검토, 그리고 확인해야 할 전술원칙-”7) 등을 계속 발표하며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과 남부소장님의 다른 글들 -“보수-중도-진보 그리고 운동의 정치”8), “민주주의 문제와 신자유주의 지배전략에 대하여”9)-을 비판하였다. 이들 글에 대한 간략한 비판이 토론회 이후 남부소장님에 의해 제출되었다.10) 마지막으로 벌어진 토론회에서 남부소장님의 비판에 대한 채소장님의 반비판문11)이 제출되었고 토론이 있었으며, 현재 논쟁은 “봉(封)”되었다.

논쟁은 종결된 것이 아니라 “봉”된 것이고, 이는 “‘현상태’에 변화를 가하는 어떤 요인이 발생”하게 되면, “다시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기에 지금 쓰는 나의 글이 “어떤 요인이” 되어 “봉인”을 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까 우려가 된다. 그런 일이 발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에게는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즉 “‘현상태로도’, 혹은, 같은 말이지만, 지금까지의 전개로도 관련 쟁점들이, 미진하긴 하지만, 사실상 명확히 해명되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논쟁이 “봉”되었지만 “‘현상태’에 변화를 가하는 어떤 요인”의 발생은 언제나 가능할 것이기에, 또 다른 상황에 의해 비슷한 논쟁이 반복될 수 있을 것이기에, 논쟁의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당시에 또 지금 다시 드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논쟁의 내용적인 부분을 거의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관련 쟁점”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명확히 해명되었”고 나는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또한 “관련 쟁점”의 판단이나 섣부른 해결 노력은 “어떤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논쟁의 과정에서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정황과 관련된 것만을 다룰 것이다. 또 한 가지 변명; 논쟁의 쟁점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언급된 “물론 맑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가가 그 자체로도 중요한 것이 아니며, 맑스가 이야기하였다고 그 자체가 진리인 것은 아니다.”12)라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론은 교조가 아니라 행동의 지침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옳다고 혹은 잘못이라고 검증된 어떠한 이론과 경험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이 제시되었던 구체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적용하려면 커다랗고 수많은 오류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13)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글의 대부분을 이른바 원전의 인용으로 채울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지금은 ‘교조의 과잉’이 아니라 ‘공상의 과잉’으로 또 ‘역사적 경험의 무비판적 적용’ 보다는 ‘역사적 경험의 부인’에 의해 고통스러운 시기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까닭은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의 특수성인데, 이에 대한 답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알고 있는 진부한 진술의 나열과 반복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2 논쟁이 격렬해진 것에는 논쟁의 ‘내용적 쟁점’ 때문만은 아니다. 소위 ‘논쟁의 성격’(‘적대적 논쟁’인가? ‘동지적 논쟁’인가?) 때문에 논쟁은 극단적으로 격렬해졌다.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동지들 사이의 논쟁이 분명하고 또 그랬어야만 해야 할 논쟁이라는 생각, 즉 ‘동지적 논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이 그렇게 흘러가지 못하는 상황, 즉 ‘적대적 논쟁’으로의 진행은 많은 사람을 거북스럽고 당혹스럽게 하였다.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에서는 ‘민중탄핵’ 혹은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경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좌익공론적”, “정치적으로 유해하고 무책임 한 것”, “좌익소아병적”, “이론적으로 오류이자, 실천적으로 위험한 것”, “좌파이론을 퇴보시키고, 고립을 자초하는 그래서 실천적으로 정치적 자살로 이어지는 관점”, “노동자 운동을 가두는 협소한 노동자주의”, “몰계급적 관점”, “반동적 사회주의” 등의 격렬한 규정을 동원하여 비판하였다. 이는 명백히 적대적 규정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채소장님은 “당구풍월”, “야마시 기질, 즉 사기꾼 기질”, “돈키호테의 돌진”, “그러한 사고와 ‘비판’은 물론 그들의 소부르주아적 존재조건에 의해서 규정된 것”등으로 규정하고 반비판하며 “그들에 대한 나의 이러한 규정과 태도 역시 명백히 적대적이다”라고 한다.

에두르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문제에 다가가자. ‘동지적 논쟁’과 ‘적대적 논쟁’은 무엇이 다른가? 남부소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다른 입장들을 제시하고 비판하는 과정은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고, 오류를 수정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최소한 동지적 관점에서 이견과 다른 관점에 대해 분명한 논지를 가지고 전개되는 비판과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상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경청하고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14)

이 문장 자체에 대해서는 채소장님도 의견을 같이 한다.15) 그러나 그는 여기서 두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견, 즉 다른 “주장을 눈감고 넘어가는 것은 정치적 범죄행위라고 생각”한다는 것과 이것은 남부소장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가정이 그 한 걸음이고 아래의 주장이 나머지 한 걸음이다.

3) 양쪽의 이러한 적대성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양쪽 가운데 어느 한 쪽, 혹은 양자 모두가 정치적․이론적으로 철저히 잘못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양자 모두가 정당할 수는 없다.

둘째, 따라서 양자는 ‘동지적으로’ 결코 공존할 수가 없다. 물론 공존을 위한 일체의 문을 닫아거는 것은 아니다.

셋째,‘동지적 공존’을 위해서는 오직 하나의 길만이 있다. 그 오류와 적대에 상응한 철저한 자기비판과 보증,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의‘인품 있는’소부르주아적인 ‘자기비판’즉‘적당한 사과나 유감 표명’이 아니라 자기 주장과 행위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재검증을 포함한 자기비판이 그것이다.

4) 이 외의 어떠한 형태․형식의 공존 모색도‘해결’이나 전진이 아니며, 소부르주아적 조직 분파주의의 표현 이외의 어떤 것일 수 없을 것이다.16)

우리는 다행히 이 문제에 대한 답의 단초를 구하는데 과거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레닌은 이렇게 주장한다.

그렇다! 우리는 동지애의 의무를, 모든 동지를 지원할 의무를, 동지들의 의견에 관대히 대할 의무를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동지애의 의무는 러시아 및 국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의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사회민주주의 강령으로부터 후퇴하며, 동지들이 노동운동의 제과업을 협애하게 만들고 기형화하고 있다고 우리가 확신한 이상 완전히 명백하게 남김없이 자기의 신념을 발표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라고 우리는 간주하는 것이다!(레닌전집, 제4권, 제2분책, 67쪽)17)

스탈린은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부하린그룹의 몇몇 동지들의 연설에서 개인적인 요소들이 다소 뚜렷한 부분을 차지한다 해도 그것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소한 문제이고, 사소한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부하린은 나와의 개인적인 서신교환에 대하여 말했다. 그는 몇 통의 편지를 읽었는데 그것을 통해 비록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아직도 친구 사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정치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내용은 우글라노프(Uglanov)와 톰스키(Tomsky)의 연설에서도 발견될 수 있었다. 그들은 늙은 볼셰비키인 우리가 갑작스레 다투고 있으며 어떻게 서로서로를 존경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가라고 한다.

나는 이 모든 신음과 비탄이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조직은 가족 서클도 아니고 개인적인 친구들의 연합체도 아니다. 노동 계급의 당이다. 우리 대의의 이해보다 개인적인 우정의 이해를 앞세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동지들, 만약 우리가 단지 늙었다는 이유만으로‘늙은 볼셰비키’라고 불린다면 모든 것이 서글픈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늙은 볼셰비키들은 늙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에서 영원히 새롭고 결코 늙지 않는 혁명가들이기 때문에 존경받는다. 만약, 늙은 볼셰비키가 혁명의 길에서 이탈하거나 타락하여 정치적으로 실패한다면, 나이가 백 살이라 해도 자신을‘늙은 볼셰비키’라고 부를 권리가 없으며, 당이 자신을 존경할 것을 요구할 권리도 없다.

더욱이 개인적인 우정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와는 동등하게 놓여질 수 없다. 흔히들 말하듯이 우정은 정말 좋은 것이지만, 의무가 일차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노동계급에 봉사한다. 만약 개인적인 우정의 이해와 혁명의 이해가 충돌한다면, 개인적인 우정은 이차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볼셰비키들은 다른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없다.18)

답은 너무나 명확하다. 우리의 동지애의 의무는 또한 개인적인 문제는 노동자계급운동에 대한 의무와 정치문제에 종속된다. 당연하게도 의무가 일차적이다. 때때로 마음 아픈 일을 만들겠지만 우정은 이차적이다. 그리고 동지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우리는 이에 대해 “완전히 명백하게 남김없이 자기의 신념을 발표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상황과 내용에 따라 ‘동지적 관계’는 ‘적대적 관계’로 전화할 수 있고, 그 논쟁의 형식과 내용은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적대적’일 수 있다.19)



3 채소장님의 다음과 같은 권고는 여러 사람을 참으로 곤혹스럽게 하고 부끄럽게 하였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논쟁’ 혹은 ‘사태’에 대해서 연구소의 일부 구성원들 사이에 ‘굉장히 불편해 하는’ 분위기, 혹은 심지어 ‘혐오스러워 하는’ 분위기까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분들한테 나는 감히 “이것은, 즉 이러한 내부 사상투쟁을 불편해 하고 혐오하면서 ‘조직이 조용히’운영되기를 바라고, 그리하여 이 사태가 원만히 봉합되기를 원하는 것은, 혹시 소부르주아적 분파주의 아닌가” 자문해 볼 것을 권고하고 싶다. “이러한 내용과 형태의 싸움이 우리 조직, 그러니까 연구소의 누군가와 우리와 정치적․이론적 대립․투쟁 관계에 있는 어떤 단체나 인사 사이에 벌어졌더라도 이렇게 불편해 하고 혐오했을까”, 혹은 사실은“과거에 그러한 유사한 ‘논쟁(들)’이 벌어졌을 때에도 내가 지금 취하고 있는 태도를 취했던가” 자문해 보기를 권고하고 싶다. 혹은 (글 쓰는 인품이나, 맨 정신에 사람들과 대면하는 인품은 높아서) 글로나 대면해서는 아니겠지만, “나와 정치적․이론적으로 대립․투쟁․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내 평소의 언행은 어땠는가” 자문해 보기를 권고하고 싶다. 그러면서 “혹시 내가 정치적․이론적인 올바름보다는 조직 분파주의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자문해 보기를 권고하고 싶다. 감히 그렇게 권고하고 싶다.20)

솔직히 나는 당시 분명히 그러한 “조직 분파주의”에 빠져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러한 정치적 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레닌은 이러한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나의 의견을 매우 솔직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 문제에 관한 볼세비키 내에서의 몇몇 논쟁이 현재로서는 아주 불가피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분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노동자 정당내에서 일정한 전술의 채택을 확고히 하기 위해 블록을 형성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견 없이 이들 전술을 추구해 왔읍니다.(유일한 의견 차이는 제3대 두마의 보이코트에 관한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첫째로, 분열의 징조로까지 이끌어질 만큼 그렇게 첨예하지는 결코 않았읍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것은 유물론자와 마하주의자들 사이의 이견에 대응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자로프와 같은 마하주의자가 보이콧에 반대하는 데 나와 함께 했으며, 이에 관해 ꡔ프롤레타리ꡕ에 장문의 논설을 기고했었기 때문입니다.).

유물론이냐 마하주의자냐의 문제에 관한 논쟁 때문에 노동자 정당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전술의 적용을 방해받는 행위는, 나의 의견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일 것입니다. 우리는 당의 한 분파인 ꡔ쁘롤레따리ꡕ와 볼셰비키가 그것으로 인해 영향 받지 않는 그러한 방식으로 철학에 관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여기에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문학비평, 정치평론, 순문학 등등의 중립적인(즉, 철학과 관련이 없는) 문제들에 관해 ꡔ쁘롤레따리ꡕ에 기고함으로써 도울 수 있습니다.(원문 그대로-글쓴이)21)

친애하는 A. M. !

나와 마하주의자들과의 싸움에 관한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며 존중하는 바입니다. 페테르부르그의 친우들에게서도 그 비슷한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잘못이라고 확신합니다.

당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어떤 설교가 극히 옳지 않으며 유해함을 일단 확신하였을 때에는 그것을 반대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여야 하며 또 물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A. M.!

도대체 여기에 어떠한 타협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 우스운 일입니다. 전투는 절대로 불가피합니다. 그리고 당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호도하거나 훗날로 미루거나 회피하거나 하기에 노력할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필요한 당 사업이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기에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당신은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 볼셰비키의 10분의 9는 이점에서 당신에게 극진한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어떻게 이 일을 할 것입니까? 중립으로서 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서는 중립이란 있을 수 없으며 또 없을 것입니다.

                (A. M. 고리끼에게 R. M.-치에게 사신 1908년 3월 24일)22)

조직 내 어떠한 내용이든, 즉 그것이 철학적 문제이든 이견이 있는 경우 이것을 둘러싼 “논쟁”은 “아주 불가피”하고 “전투는 절대로 불가피”하며, 이를 저지하려는 행위는 “잘못”이고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분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전술의 적용을 방해받는”, “용서받을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되며, “실천적으로 필요한 (당) 사업이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기에 노력해야” 한다. 비록 우리의 경우는 ‘철학 논쟁’이 아니라 ‘전술의 적용’과 관련한 문제이긴 하지만 레닌의 이러한 언급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이런 지적이 있을 수 있다. 레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환주의자들과 최후통첩주의자들을 볼셰비키에서 제명하였고, 청산주의와도 피나는 투쟁을 벌인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전자는 당내 하나의 분파로서 볼셰비키가 통일성을 견지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었고23) 후자의 경우, 즉 청산주의와의 투쟁은 청산주의가 “일단의 인텔리 당원들을 대변하여 현재의 당조직을 청산하려는, 즉 해산하고, 파괴하고, 폐지하고, 폐쇄하려는 시도”라는 의미에서 우리에게 직접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직 분파주의’가 옳지 못한 정치적 태도라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자신의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자주적으로 참가하기를 원하는 노동자라면 논쟁을 회피해서는 안 되며 비록 그 논쟁이 첫눈에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진실을 찾을 때까지 진지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진실을 찾을 것인가? 모순된 견해와 주장의 혼돈 속을 뚫고 어떻게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주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면, 논쟁자들이 한 발언에 자신을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실과 자료를 조사하고, 입증할만한 어떤 증거가 있는지 그리고 이 증거는 믿을만한 지를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 들어본 적이 있는 것, 보다 “공공연하게” 주장된 것 등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훨씬 “쉽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만족해버리는 사람은 “천박”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될 것이며, 아무도 이런 사람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찾아질 수 없다. 그리고 당연히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실 자체의 밑바닥까지 파헤쳐서, 사실과 자료, 입증할만한 증거를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겠다고 결심한 그런 노동자들 하고만 말을 할 것이다.24)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해결되지 않고 해명만 된 쟁점을 연구를 통해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문성․현장성․계급성’의 확보를 기본 목표로 삼고 있고,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발전을 위한 이론․정책을 생산하고자”하고 “노동자 대중 실천의 무기가 될 이론․정책 개발을 중심사업으로”하는 우리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4 뜬금없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며 소감을 정리하겠다. 노동자계급에게 통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노동계급은 통일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모든 계급의식 있는 노동자들이 자기 조직의 결정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통일된 조직만이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 문제를 토론하고 이견을 표현하고 청취한 후, 조직된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다수의 견해를 확정하고 이 견해를 대표에 의해 채택된 결정의 형태로 표현하고 진지하게 이를 실행하는 것-이것이 전세계 모든 현명한 사람들이 말하는 통일이다. 그러한 통일이야말로 노동계급에게 무한히 소중하고 무한히 중요하다. 통일되지 않으면 노동계급은 아무것도 아니다. 통일되면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25)

노동자들은 정말 통일을 요구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들 이외에 그 누구도 그들에게 통일을 “주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도 그들이 통일을 성취하도록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통일은 “약속”될 수 없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공허한 자만, 자기기만일 것이다. 통일은 인텔리그룹 사이의 “협정”으로 “창조”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슬프고, 순진하고, 무식한 환상이다.

통일은 쟁취되어야 하며, 노동자만이, 계급의식 있는 노동자 자신만이-완강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그것을 쟁취할 수 있다.

“통일”이란 단어를 긴 문장으로 쓰는 것보다, 그것을 약속하고 자기 자신을 통일의 옹호자라고 선언”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진 노동자, 즉 계급의식 있는 모든 노동자의 노력과 조직에 의해서만 통일을 추진할 수 있다.

조직 없이 통일은 불가능하다. 다수에 의한 소수의 복종 없이 조직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것들은 논쟁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누구도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유일하게-유일하게!-남은 일은 이를 실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노력과 인내, 계급의식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단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노동계급의 통일에 대해 말해 보아야 헛일이다.26)


어떤 종류의 통일이건 그 의미와 달성의 조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두 견해의 차이를 파악하는 것은 극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두 견해가 “통일 위기”의 발전 과정에서 뒤엉키고 혼동되어 그 사이에 선명한 경계선을 긋지 않을 경우 이 위기에서 우리 자신의 올바른 방향을 잡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일에 관한 하나의 견해는 “기존의 인물, 그룹, 단체들”의 “화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당사업, 당사업의 방향에 대한 그들 견해의 자기 정체성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의견의 차이에 대해서는 애써 침묵을 지켜야 하며 의견 차이의 대의와 의미, 객관적 조건을 밝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과 그룹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공통의 정책수행에 합의할 수 없다면, 그 정책은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공생공존. 이것은 결국 종파적 외교로 이끌릴 수밖에 없는 속물적 “화해”이다. 불일치의 원천을 “틀어막고” 그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갈등”을 “조절”하고, 갈등하는 조류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이것이 그와 같은 “화해”의 주요관심이 이끌리는 방향이다.

…

통일에 대한 또 다른 견해가 있다. 그것은 (총회에서, 총회에 제출된) “기존의 인물, 그룹, 단체들”의 특별한 구성과는 별도로, 오래전부터 변화해온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오랜 두 개의 주요 분파에 있어서, 많은 심오한 객관적 원인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이 원인들이-때로는 몇몇 “기존의 인물, 그룹, 단체들”은 바라지도 않았고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통일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조직적 기초를 창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은 러시아의 부르주아적 발전의 현재 시기에 기초하고 있는데, 현 시기는 부르주아 반혁명과 부르주아군주주의 방식에 따라 전제주의가 재구성을 시도하는 시기이다. 동시에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은 노동계급운동의 성격과 구성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변화를 야기하고, 사회민주주의운동의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과업의 변화와 함께 사회민주주의적 전위의 유형과 특징의 변화를 야기한다. 따라서 청산주의(=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 편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반[半]자유주의)와 소환주의(=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 편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반[半]무정부주의)를 낳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의 영향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개개인의 악의적인 고안도, 어리석음도, 실수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객관적인 원인의 작용 결과이며, “토대”와 분리될 수 없는 현 시기 러시아 전체 노동운동의 상부구조상의 운동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위험의 현실화, 노동운동에 대한 이 양 분파의 비사회민주주의적 본질과 유해성의 현실화는 다양한 분파요소들 간의 화해를 낳고 “모든 장애를 형성함에도 불구하고” 당의 통일로의 길을 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당의 통일은 곤란, 동요, 주저, 퇴보를 겪으며 천천히 진전될 것이며,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거할 때, 통일은 “기존의 인물, 그룹, 단체들” 사이에서 진전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인물에 관계없이, 그들을 차치하고 객관적인 발전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이해하길 원하지 않는 새로운 인물들을 육성하고 끌어 들이면서 변화를 일으키고 낡은 분파, 조류, 편향을 내부에서 개조하고 재조직함으로써 진전되는 것이다. 또한 통일은 청산주의, 소환주의와 같은 편향의 출현, 발전, 성장과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이러저러한 문헌의 논쟁의 특별한 문장들 간의 우연적 연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로 묶여있는 내적인 확고한 연계에 의해서 성숙되는 것이다.27)


연구소는 새롭게 분열되었는가? 아니다. 연구소는 이미 분열되어 있었다. 그것이 이번에 드러난 것뿐이다.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다행스럽게 “봉”되었지만 그것은 연구소 내의 일시적인 “봉”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소는 통일을 노력한다. 논쟁과 이후 노력이 그것의 증명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논쟁이 끝까지 수행되지는 못했더라도 연구소에서 벌어진 이번 논쟁은 통일의 시작으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이 논쟁이 애초부터 연구소 내의 논쟁이었는가? 또 이 분열이 연구소만의 분열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비록 연구소의 소장과 부소장이 연구소의 기관지와 게시판을 매개로 논쟁하였지만, 그래서 연구소의 집안싸움으로까지 언급되었다지만 이 논쟁의 본질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운동의 다양한 분열의 한 표현이다. 노동자계급운동은 다양한 분열로부터 고통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극복하는 것, 즉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이다. 어쩌면 이러한 논쟁이 발생한 것이 한국사회의 부르주아적 발전에 의한 한국사회의 객관적인 조건의 변화가 노동계급운동의 성격과 구성에서 변화를 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고, 노동자계급운동의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과업의 변화와 함께 노동자계급운동의 전위의 유형과 특징의 변화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논쟁은 “기존의 인물, 그룹, 단체들”의 특별한 구성과는 별도로, 또 “몇몇 기존의 인물, 그룹, 단체들은 바라지도 않았고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통일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조직적 기초를 창출”하는 첫걸음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번 ‘민중탄핵 논쟁’이 우리에게 남긴 정치적 의의이고 우리가 발전시켜 가야할 과제이다.

한/노/정/연


1) 채만수, 「‘하일(Heil) 노무현’을 저지해야」(2004.3.14),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97호, 2004년 4월, pp. 5-6.

1) 채만수, 「‘하일(Heil) 노무현’을 저지해야」(2004.3.14),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97호, 2004년 4월, pp. 5-6.

   (http://www.another0415.net/bbs/view.php?code=reformisnotrevol&id=2&page=4)


2) 채만수,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2004. 3. 18),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제97호, 2004년 4월, pp. 9-10.

2) 채만수,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2004. 3. 18),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제97호, 2004년 4월, pp. 9-10.

   (http://www.another0415.net/bbs/view.php?code=reformisnotrevol&id=20&page=3

   (http://www.another0415.net/bbs/view.php?code=reformisnotrevol&id=20&page=3

   http://www.another0415.net/bbs/view.php?code=reformisnotrevol&id=19&page=3)


3) 남구현․이해영․최형익,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2004. 3. 23.),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제98호, 2004년 5월, pp. 85-93.

3) 남구현․이해영․최형익,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2004. 3. 23.),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제98호, 2004년 5월, pp. 85-93.

   (http://www.another0415.net/bbs/view.php?code=reformisnotrevol&id=26&page=2

   (http://www.another0415.net/bbs/view.php?code=reformisnotrevol&id=26&page=2

   http://www.another0415.net/bbs/view.php?code=reformisnotrevol&id=27&page=2)


4) 이러한 이유를 채소장님은 “그리하여 교수님들께서는 친절하시게도 [우리의 비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좌고우면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으셨으니, 나로서는 정말 더 이상은 좌고우면할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분들의 [올바른 접근]과 ‘비판’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당구풍월(堂狗風月), 곧 서당개 풍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고, 남부소장님은 “사실 지금 제출되고 있는 몇몇 비판적인 글들은 민중탄핵 관련 좌파의 대응에 대해 공식적인 검토를 거친 글들이 아니라 다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오독과 곡해에 가득찬 글들이어서 대응을 해오지 않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5) 채만수, 「국민발의권․국민소환권 운동과 그 ‘비판’에 대해서」,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98호, 2004년 5월, pp. 19-30.


6) 채만수, 「노동자계급 속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99호, 2004년 6월, pp. 17-31.


7) 채만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운동의 독자성-‘민중탄핵’ 논쟁의 재검토, 그리고 확인해야 할 전술원칙-」,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102호, 2004년 10월, pp. 152-191. (http://kilsp.jinbo.net/bbs/view.php?id=semi_notice&page=1&sn1=&divpage=

7) 채만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운동의 독자성-‘민중탄핵’ 논쟁의 재검토, 그리고 확인해야 할 전술원칙-」,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102호, 2004년 10월, pp. 152-191. (http://kilsp.jinbo.net/bbs/view.php?id=semi_notice&page=1&sn1=&div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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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남구현, “보수-중도-진보 그리고 운동의 정치”,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제98호, 2004년 5월, pp. 4-7.


9) 남구현, 「민주주의 문제와 신자유주의 지배전략에 대하여」, ꡔ노동자의 힘ꡕ 제57호, 2004. 6. 25., p. 64. (http://pwc.or.kr/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

9) 남구현, 「민주주의 문제와 신자유주의 지배전략에 대하여」, ꡔ노동자의 힘ꡕ 제57호, 2004. 6. 25., p. 64. (http://pwc.or.kr/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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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남구현, 「채소장의 글에 대하여」,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제102호, 2004년 10월, pp. 192-196. (http://kilsp.jinbo.net/bbs/view.php?id=semi_notice&page=1&sn1=&divpage=1&sn=

10) 남구현, 「채소장의 글에 대하여」,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제102호, 2004년 10월, pp. 192-196. (http://kilsp.jinbo.net/bbs/view.php?id=semi_notice&page=1&sn1=&divpage=1&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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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채만수, 「이른바 ‘민중탄핵론 논쟁’과 관련하여 -파렴치한 변명․궤변과 모함․기만이 설 곳은 없다-」, 한노정연 게시판. (http://kilsp.jinbo.net/bbs/view.php?id=semi_notice&page

11) 채만수, 「이른바 ‘민중탄핵론 논쟁’과 관련하여 -파렴치한 변명․궤변과 모함․기만이 설 곳은 없다-」, 한노정연 게시판. (http://kilsp.jinbo.net/bbs/view.php?id=semi_notice&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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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남구현, 「채소장의 글에 대하여」,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제102호, 2004년 10월, p. 193.


13) “사회민주주의자의 전술은 그것의 기본적인 원칙을 정의하거나 원칙(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명제)의 어떤 것이 포함되었고 왜 포함되었는가를 밝히지 않아도 항상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 즉 사회민주주의자의 전술은 당면시기에 당면한 투쟁의 목표(즉시 가능한 결과)나 그 시기 적용될 투쟁방법을 명확히 하지 않아도 항상 최대한의 결과를 보장하기 위해 고안된다고 말하는 것, 우리의 전술이 대중역량을 강화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공개적인 투쟁과 미덥지 못한 통치에 대한 적대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하는 활동에 대한 자명한 이치를 되풀이하는 것-이런 것의 모든 결점은 불을 보듯 명백하며 전반적인 논지를 불필요하고 무용한 자갈로 변화시킨다.” 레닌, 「어느 정치평론가의 노트」,ꡔ러시아 반종파투쟁-1908-14년의 좌우익 기회주의ꡕ, 미래사, 1990, pp.47-8.


14) 남구현, 「채소장의 글에 대하여」,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제102호, 2004년 10월, p.192.


15) 물론 그러한 주장을 하는 남부소장님의 태도를 “적반하장”, “위선을 딛고 선 또 다른  비방과 중상”이라고 비판을 하지만 말이다.


16) 채만수, 「이른바 ‘민중탄핵론 논쟁’과 관련하여 -파렴치한 변명․궤변과 모함․기만이 설 곳은 없다-」, 한노정연 게시판.


17)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ꡔ마르크스주의자의 품성ꡕ, 이성과 현실, 1990, p.16.


18) 스탈린, 「C.P.S.U.(B.)내의 우익 편향」,ꡔ스탈린 선집 1ꡕ, 전진, 1988, pp.309-10.


19) “모순과 투쟁은 보편적․절대적이지만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 즉 투쟁형식은 모순의 성질이 다르면 달라진다. 공공연한 적대성을 가진 모순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모순도 있다. 사물의 구체적 발전을 근거로 원래 비적대적이었던 모순이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있지만 원래 적대적이었던 모순이 비적대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것도 있다.

19) “모순과 투쟁은 보편적․절대적이지만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 즉 투쟁형식은 모순의 성질이 다르면 달라진다. 공공연한 적대성을 가진 모순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모순도 있다. 사물의 구체적 발전을 근거로 원래 비적대적이었던 모순이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있지만 원래 적대적이었던 모순이 비적대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것도 있다.

   공산당 내의 올바른 사상과 잘못된 사상의 모순은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계급이 존재할 때에는 계급모순의 당내로의 반영이다. 이 모순은 처음에는 개별문제로 곧바로 적대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계급투쟁의 발전에 따라 이 모순도 적대적인 것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소련공산당사가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레닌․스탈린의 올바른 사상과의 모순은 처음에는 적대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중에 적대적인 것으로 되었다. 중국공산당사에도 이 같은 상황이 있었다. 당내의 많은 동지들의 올바른 사상과 진독수․장국도 등의 잘못된 사상과의 모순은 처음에는 적대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중에 발전하여 적대적인 것으로 되었다. 현재, 우리 당내의 올바른 사상과 잘못된 사상과의 모순은 적대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지만 만약 오류를 범한 동지가 오류를 고치지 않는다면 적대적인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은 반드시 한편으로 잘못된 사상에 대해서 엄숙한 투쟁을 전개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잘못을 범한 동지에 대해서 자각의 기회를 충분히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지나친 투쟁은 명확히 부적당하다. 그렇지만 오류를 범한 인간이 오류를 견지하고 확대한다면 이 모순도 적대적인 것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모택동, 「모순론」,ꡔ중국혁명과 모택동사상ꡕ, 석탑, 1986, pp.175-6.


20) 논쟁의 와중에 의도를 알 듯 모를 듯 한 짧은 글이 ꡔ노동자의 힘ꡕ에 실렸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채소장님과 남부소장님 모두 “노동자의 힘”회원이기에 미묘한 파장을 만들었다. 내용에 관해 할 말은 참으로 많으나 논평은 삼가겠다. 어느 곳에 배치해야 할 것인가를 몰라서 이곳에 둔다. 전문을 옮겨 놓겠으니 읽고 판단하시길.

20) 논쟁의 와중에 의도를 알 듯 모를 듯 한 짧은 글이 ꡔ노동자의 힘ꡕ에 실렸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채소장님과 남부소장님 모두 “노동자의 힘”회원이기에 미묘한 파장을 만들었다. 내용에 관해 할 말은 참으로 많으나 논평은 삼가겠다. 어느 곳에 배치해야 할 것인가를 몰라서 이곳에 둔다. 전문을 옮겨 놓겠으니 읽고 판단하시길.

   “힘 이야기 : 다시 한번 종파주의에 대하여

   “힘 이야기 : 다시 한번 종파주의에 대하여

   전 세계적으로 20세기 좌파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해방과 변혁을 위한 몸부림과 헌신의 이면에 적지 않은 추악함이 도사리고 있다. 그 대표적인 해악은 교조주의, 관료주의, 종파주의, 분열주의 등인데, 그 가운데 종파주의의 해악이 가장 파괴적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20세기 좌파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해방과 변혁을 위한 몸부림과 헌신의 이면에 적지 않은 추악함이 도사리고 있다. 그 대표적인 해악은 교조주의, 관료주의, 종파주의, 분열주의 등인데, 그 가운데 종파주의의 해악이 가장 파괴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에서 비롯된 노동자계급운동의 역사적 분열이 갖는 정치적 의미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독선과 아집, 교만과 비양심은 동지를 적으로 몰아붙이는 그릇된 관행을 좌파조직과 운동에 정착(?)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에서 비롯된 노동자계급운동의 역사적 분열이 갖는 정치적 의미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독선과 아집, 교만과 비양심은 동지를 적으로 몰아붙이는 그릇된 관행을 좌파조직과 운동에 정착(?)시켰다.

   다수파의 독선과 전횡, 소수파의 피해의식과 극한적 무한분열은 제정파가 난립하는 운동판에서 수많은 활동가들을 운동에서 이탈시키고, 적지 않은 수의 개인을 불행 속에 몰아넣었다. 운동은 해방의 희망이자 삶의 의미가 아니라, 끝없는 긴장과 부담, 동지에 대한 의심과 자기에 대한 혐오의 원인이 되었다.

   다수파의 독선과 전횡, 소수파의 피해의식과 극한적 무한분열은 제정파가 난립하는 운동판에서 수많은 활동가들을 운동에서 이탈시키고, 적지 않은 수의 개인을 불행 속에 몰아넣었다. 운동은 해방의 희망이자 삶의 의미가 아니라, 끝없는 긴장과 부담, 동지에 대한 의심과 자기에 대한 혐오의 원인이 되었다.

   정파적 질서를 뛰어넘는 단결과 연대는 21세기 좌파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되어야 한다. 대중적으로 이미 극복된 종파주의가 선진적(?) 활동가들 사이에서 활개치는 한, 그 운동은 미래를 향한 운동이 아니라 여전히 과거의 운동일 뿐이다. 20세기 좌파운동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21세기 운동의 미래는 없다.” ꡔ노동자의 힘ꡕ, 제65호, p.1.


21) 레닌, 「막심 고리끼에게, 1908년 2월 25일」,ꡔ레닌의 문학예술론ꡕ, 논장, 1988, p.241.


22)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ꡔ마르크스주의자의 품성ꡕ, 이성과 현실, 1990, p.121.


23) “그러나 하나의 파로서, 즉 당내에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결합체로서 우리는 근본문제에 대한 통일성 없이 사업할 수 없다. 분파로부터의 이탈이 당으로부터의 이탈과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파로부터 이탈한 사람이 당내에서 사업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자유기고가], 즉 분파의 아웃사이더로 남을 수 있으며, 당사업의 일반 상황은 그를 끌어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려 할 것인데-그들이 독자의 색깔을 가진 의견과 전술을 옹호하고 발전시키려 한다면 분파 형성은 그들의 정당한 권리이다- 이 경우 당 전체가 이러한 경향, 앞에서 우리가 그것의 사상적 의의를 평가했던 경향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레닌, 「청산주의의 청산  」,ꡔ러시아 반종파투쟁-1908-14년의 좌우익 기회주의ꡕ, 미래사, 1990, pp.87.


24) 레닌, 「쟁점 : 공개 정당과 마르크스주의자들」,ꡔ러시아 반종파투쟁-1908-14년의 좌우익 기회주의ꡕ, 미래사, 1990, pp.181-2.


25) 레닌, 「노동계급의 통일」,ꡔ러시아 반종파투쟁-1908-14년의 좌우익 기회주의ꡕ, 미래사, 1990, p.208.


26) 레닌, 「통일」,ꡔ러시아 반종파투쟁-1908-14년의 좌우익 기회주의ꡕ, 미래사, 1990, pp.211-212.


27) 레닌, 「어느 정치 평론가의 노트」,ꡔ러시아 반종파투쟁-1908-14년의 좌우익 기회주의ꡕ, 미래사, 1990, pp.128-131.


2004-12-01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1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