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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놈은 겨울 그 자체가 투쟁이다.
 이정하의 세상 이야기

현장에서 미래를  제115호
이정하

노동자민중세상: 이정하의 세상 이야기


없는 놈은 겨울 그 자체가 투쟁이다.

이정하 / 노동자


내가 한참 잘 나가던 현역 군인시절 3,4월 봄은 참 신명나는 계절이었다.
아직 채 눈도 녹지 않은 봄날 서둘러 아침을 챙겨먹고 근무교대를 위해 288고지를 신명나게 올라가다 보면 양지바른 언덕에 어느새 파란 원추리 싹이 돋아나는 걸 볼라치면 괜히 마음은 흥분되고 어깨는 근질근질 하곤 했다 조금 더 올라가 고지 바로 밑에 가면 옹달샘 같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물이 아주 맑고 시원했다. 땀을 쭉 흘리며 올라가서 수통에 물을 채우고 물속에 있는 개구리 알을 떠서 후루룩 마시면 어찌나 시원한지 지금도 그곳은 가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어릴 적 나는 봄을 많이 탔다. 괜히 봄만 되면 몸이 근질근질하고 막 뛰고 싶고 해서 열 대 여섯 층이나 되는 계단밭을 마구 뛰어 오르내리곤 했다.
따뜻한 봄날 움푹 들어간 골짝 노란 잔디위에 팔베게를 하고 누워 일렁이는 아지랑이 사이로 하얀 구름을 볼라치면 부르지도 않아도 종달새가 같이 노래불러준다. 봄은 좋은 기억만 있는 게 아니다. 없는 놈의 봄은 고통의 시작이요 움직이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허리 아픈 기억을 갖게 하는 계절이다.

나는 여름도 괜찮다.

없는 놈은 겨울보다 여름이 났다고 하질 않던가? 하여튼 여름은 견딜 만하다. 어릴 적 여름은 지겨움 지루함 인상 찡그리는 뜨거운 태양 그런 것 이었다. 학교 갔다 오면 어김없이 뜨거운 땡볕아래에서 지겨운 바랭이 풀과 싸워야 했다. 동네 어른들이 ‘쟤들은 착하다 이 더위에 꾀병 안 부리고 밭에서 일하는 것 봐라’ 할 정도로 무더운 여름날 나는 많은 일을 했었다. 그 덕인지 나이든 지금은 어지간한 더위는 그냥 넘길 만하다. 현장에서 같이 일하던 동지가 옷이 흠뻑 젖은 채, 너는 땀도 안 흘리고 지독한 놈이라고 할 때면 나는 웃으면서 그런다. ‘어디 비라도 오느냐? 옷이 젖게. 땀 안 나게 천천히 움직여라 땀 안 흘리려면 천천히 움직이면 된다. 땀 안 날정도로 천천히 움직여라’ 한다. 하여튼 여름은 견딜 만하다. 먹을거리도 많고 없는 사람은 물이라도 뒤집어쓰면 조금은 시원하지 않은가?

나는 가을도 많이 탄다.

여름에 뾰쪽하던 턱이 가을날 고구마 살이 오르면 조금은 도톰해져 보인다고 어머니는 가을되면 말씀하시곤 했다. 없어 못 먹인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프셨으면 그러셨을까 생각하면 지금은 내 마음이 아프다. 가을은 남성의 계절이라지만 나는 가을을 많이 탄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쓸쓸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길가에서 은행나무 잎을 털어내는 청소하시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면 짜증도 나기도 한다. 왜? 저래야 하나 그냥 놔두고 보면 안 되나? 길가에 낙엽이 쌓이면 어떤가? 더 좋은 것 아닌가? 일부러 털어내는 가을은 겨울을 재촉하는 것 같아 더욱 싫다. 어릴 적 먹을거리가 많아 마냥 좋기 만하던 그런 가을은 이제 없는 것 같다. 땡볕아래서 김 맬 일이 없어 해 가는 줄 모르고 마냥 즐겁게 놀기만 하던 그런 가을은 이젠 없는 것 같다.

가진 것 없는 놈은 겨울 그 자체가 투쟁이다.

또다시 군대시절, 추운 겨울 아침 기상 시간이 되면 부산이 고향인 정식이라는 고참은 매일 일어나기 전 누워서 손을 들어 내무반 공기를 확인하곤 했다.
만약 공기가 냉랭했다 하면 어김없이 그 주먹과 내 머리가 만나야만 했다.
요즘은 내가 출근 시간이면 어김없이 공장 굴뚝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난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공장굴뚝의 연기가 기울면 어이구 오늘도 바람이 부는구나 하는 생각이 그냥 스쳐간다. 나는 추위도 잘 견디는 편이다. 아마도 없이 살다보니 추위에 대한 훈련을 많이 한 탓이리라 생각되긴 하지만, 없는 놈이 덜덜 떠는 모습 보여주기 싫어 이를 악물고 참는 오기도 있다. 추위는 투쟁의 대상이다. 없는 놈에겐 추위와의 싸움이 바로 생존 전략인 것이다. 추위를 즐기려는 가진 자들과는 매서운 추위의 의미조차 다르다니 참 한심한 세상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2주전 억수로 추운 날.
투쟁하는 공무원노조 지지방문을 가려고 술 한통 안주조금 가지고 구청에 갔다가 허탕을 쳤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그날 텐트를 정리하고 없었다. 같이 갔던 형님들하고 그 추운 날 길가에서 언 안주 펴놓고 술 한 잔 마시니, 아 ~ 이건 술이 아니라 없는 놈의 서러움 일세. 아 ~ 춥다!
올해는 유난히 춥다. 날씨도 춥고 마음도 춥고….

2005-12-28 18:11:2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1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