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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리포트] 미완의 투쟁, 철도해고자 복직싸움

현장에서 미래를  제107호
조연호(철도 해고자)

2000년 철도역사 100년을 넘어 철도노동자들의 투쟁에 역동성을 보여준 시기가 시작되었다. 일제의 암울한 식민지배를 넘어 해방공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핵심 사업장이었던 철도가 전평총파업의 역사에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진 이후, 54년 만에 침묵을 깨고 철도를 멈추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시기였던 것이다.
이시기부터 정부는 철도구조개혁에 대한 밑그림을 밀어붙이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당시 정부는 100년의 철도 역사를 바꾸는 철도구조개혁의 일환으로 철도민영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국제자본은 신자유주의를 무기로 하여 거스를 수 없는 파도처럼 한국자본을 삼키는 약탈의 시기이다. 특히 한국의 기간산업인 발전, 가스, 철도는 집중 공격대상이었다.

희생의 징검다리를 놓으며 전진한 철도해고자의 역사

철도에는 이미 88년 기관사파업과 94년 전지협의 역사적 파업, 98년 단위지부 최대의 투쟁이었던 서울동차사무소의 불량 구리스 사용, 보수품 유용 등에 맞선 투쟁이 있었다. 그리고 철도노동자의 투쟁의 대미를 장식하고 54년 어용의 심장을 강타하는 2000년 공투본 투쟁으로 오늘의 민주철노가 탄생하였다. 전평이후 50년 어용의 치하에서 숨죽여온 철도노동자들의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투쟁의 열기는 철노 민주화로부터 시작되어 대정부 투쟁의 파고를 넘어 철도구조조정을 막아내는 투쟁의 불씨가 만들어졌다. 또한 이 투쟁은 많은 사람들이 희생의 징검다리를 놓으며 나아간 결과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난한 투쟁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철도노동자의 좌절과 아픔 그리고 울분과 한이 점철되어있다. 철도청과 어용노동조합이 한통속이 되어 자행되었던 철도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어용노조에 반기를 드는 민주파에 대한 보복조처로 활동가들의 전출과 조직징계는 필수였다. 어용노조의 가장 커다란 무기인 철도청의 민주파에 대한 파면과 전출이란 무기는 가히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여주었으며 소중한 생명까지 앗아가는 비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해고가 되어도 정든 일터로 돌아오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철노가 민주화되기 전에는 이는 불가능한 절대불멸의 진리요 바꿀 수 없는 정말 더러운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한계라는 것은 깨지기 위하여 존재하는 법, 어용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철도청의 철권적인 노동자 탄압은 영원할 수 없었다. 이러한 탄압의 광풍 속에서도 철도노동자의 투쟁의 불씨는 여전히 어용노조를 위협하였고 철도청의 부당함에 칼끝이 조준되어 있었다.
장기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획득한 철노민주화투쟁의 성과, 그러나 다가올 철도구조조정의 폭풍에 맞서야 하는 철도노동자의 투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철도구조정 한판 싸움은 철도노동자의 대량해고를 불러왔으며 대량해고는 철도노동자의 새로운 투쟁의 과제를 남겨주었다.

열차는 더 이상 다니지 않았지만 과제를 남겨주었다.

2002년 2월25일 마침내 철도가 멈추고 더 이상 열차가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철도노동자의 목소리가, 철도노동자의 한이 전국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의외로 국민들은 철도파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당시 언론은 국민의 불편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국의 노동자들은 4시간 시한부 파업으로 철도노동자투쟁을 엄호하였다. 철도노동자의 3일 파업은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고, 철도노동자를 잠에서 깨어나게 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철도민영화를 일방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해고자에 대한 복직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접고, 현장에 복귀하자 철도청은 철도노동자 25명을 파면?해임하는 자행을 저질렀다. 일부의 중앙간부와 선진적인 지부장을 중심으로 솎아내기식 징계를 한 것이다.

그리고 철도노동자들은 2003년 4월20일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투쟁을 다시 해야만 했고, 파업전야 극적인 합의 결과, 철도민영화를 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아내고 파업대오는 철수하여 현장에 복귀했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을 소중히 생각했던 철도노동자들의 믿음은 너무나 순진하고 어리숙하다는 점을 것을 알게 되었다. 정부는 6월1일 공청회를 시작으로 계획적이고 신속하게 철도공사화를 밀어붙이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노조가 철도공사화를 약속한 것처럼 일방적으로 선전해대며 철도노동자가 먼저 약속을 어겼다는 왜곡된 선전을 자행하면서 사기극을 연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총파업은 해고자에게 또 다른 투쟁을 요구한다.

2003년 6월 철도노동자들은 급작스런 정부의 공세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당장 연금에 대한 불안, 고용에 대한 불안, 철도노동자의 미래에 대한 불안, 정부의 철도공사화를 통한 공공성의 파괴에 대하여 투쟁이냐 아니면 방기냐를 결정해야 했다. 마침내 철도노동자는 철저하게 훼손될 철도공공성과 철도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결정하고 2003년 6월28일 다시 열차를 멈추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은 강고했고 철도구조개혁법은 통과되었다. 법이 통과되자 혼란의 틈새를 파고드는 파업 파괴자들의 준동은 심해지고 조직에 대한 고민 속에 지도부는 선 복귀, 후 협상이라는 카드를 가지고 현장으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이후 철도청은 사상유래가 없을 정도로 노조 초토화를 위한 탄압을 진행한다. 중앙간부 지부장은 물론이고 아무책임이 없는 조합원에게까지 파면과 해임 그리고 감봉?견책?경고를, 마치 벼 포기를 베듯 살벌하게 낮을 휘두르며 철도노동자들을 징계하기 시작하였다. 510명에 대한 징계처분, 44명 형사고발조치, 75억원 손해배상, 8천131명 경고조치, 그리고 아무런 직책이나 파업에 책임이 없는 단순파업 참가자까지 원칙도 없고 일관성도 없이 79명에 대한 해고를 단행한다. 오로지 노동조합을 말살하겠다는, 상식을 뛰어넘은 책동으로 현장을 초토화시켜 지부, 지방본부, 중앙까지 간부를 채우지 못하는 극단의 상황에 이른다.

법의 사각지대 기능직 공무원

헌법에도 보장된 노조, 그러나 아무런 법에도 보호받지 못하는 기능직 공무원들, 예전의 선배들이 파면되고 해임되었던 시절처럼 철도노동자의 말은 어느 곳도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정부기관인 소청심사는 형식적이고 자의적이었다. 철도청의 말 한마디에 따라 징계의 양정이 줄어드는 고무줄 같은 소청이 이뤄졌다. 지방노동위원회나 중앙노동위원회는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힘없는 기능직 노동자의 아픔을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외면하였다.
지방노동위원회나 중앙노동위원회는 노동조합이 합법적으로 보장된 기능직 공무원의 신분을 보호하기는커녕 묵묵부답으로 외면하고 단 한 번도 철도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없었다.
거리로 내몰린 이러한 철도노동자는 현재 88명이다. 철도공사는 2004년 특별단체교섭에서 그것도 체제전환의 역사적인 시기에 단 5명을 복직시키는 알량한 시혜조치로 철도해고자를 우롱하였던 것이다. 누가 철도해고자들을 서울역에 불러 모았는가? 철도공사의 알량한 선심은 철도해고자를 서울역으로 모이게 하였고 서울역에서 62일간 노숙농성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서울역 농성 62일은 철도공사 노무정책의 결과이다.

철해투는 대량해고 된 6.28이후 다양한 투쟁을 통하여 조합원과 밀착하고 철도청에 압박을 가하는 투쟁을 진행하였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 2004년 여름 서울역 광장에서 진행된 천막농성은 자동차 배기가스를 마시며 더위와의 한판 싸움 속에 100일간 진행하였다. 그리고 철해투는 철도노동조합의 특별단체교섭투쟁 엄호를 위하여 부산에서 서울까지 각역을 돌며 자전거순례 전국투어를 진행했다. 조합원을 만나며 해고자 문제와 철도노동자의 생존권적 문제를 함께 공유하였다.
그러나 특단협이 마무리 된 시점에서 철도해고자들은 철도공사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한해의 마지막 겨울을 차갑게 보내야 하는 운명에 직시하게 되었다. 확실한 투쟁이 없이는 복직의 꿈은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2월27일 한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추운겨울, 신정과 설날 등 모든 휴일을 농성투쟁에 매진하는 준비를 하게 된다. 분주한 서울역, 국유철도를 마감하고 새로운 체제로 출범하는 철도공사의 그들만의 잔치를 철해투는 용납할 수 없었다.
드디어 서울역사 안에 거점을 확보하고 해고자 복직과 명예 회복을 위한 노숙농성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역의 역사 안 노숙농성은 철해투가 처음 시작한 방식으로 철도공사의 도덕성에 타격을 가하는 일대 전기를 마련한 투쟁이었다. 철해투는 수많은 철도노동자를 학살하고 건교부 차관으로 영전해간 김세호 전 철도청장의 책임을 요구하며 해고자 복직과 원상회복을 요구하였다.
또한 농성장 주변에 직면한 철도문제와 해고자들이 해고되는 과정, 철도공사의 부당함을 알리는 다양한 대자보를 부착하여 지나는 시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마침 이 기간 중 대구지하철 참사 2주기를 맞아 대구지하철 참사 사진전을 전시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안전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민의 관심은 철도청의 부담이 되어 돌아왔으며 전시회를 철거해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해프닝도 연발하였다. 처음 서울역사 안을 밀고 들어가 진행된 서울역 노숙농성의 시작은 철도공사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이다. 또한 철해투는 노숙농성 중간에 배치된 건설교통부 앞 집회, 대전 철도공사 앞 집회와 전국의 지방을 순회하여 다양한 집회전과 투쟁을 하였다.

시작은 없다! 투쟁은 끝이 없기에

철도해고자들은 철도발전을 위하여, 그리고 철도를 국민이 편안하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 철도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다. 철도구조조정 또한 사회적 합의를 거쳐 진행하기로 한 약속을 정부가 파기하면서 희생된 사람들이다. 당연히 철도해고자의 명예는 회복되어야 하며 원직복직 되어야 한다. 철도해고자들은 이러한 요구를 걸고 서울역 농성을 62일간 진행하였다.
서울역 농성은 철도 해고자들과 그리고 조합원, 서울역을 지나는 수많은 시민과 함께 만들어낸 농성이었다. 농성 내내 지지하고 엄호해 주었던 조합원과 각 사회단체의 방문으로 농성장 대오는 흐트러질 수 없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의 성원과 관심으로 농성장 분위기는 외롭지 않은 투쟁을 진행할 수 있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충전을 할 수 있었다.

투쟁의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잠시 소강국면이다. 철해투는 지금 서울역 농성을 임시로 풀고 철도공사측과 협의 중이다. 철도공사가 해고자의 원직복직과 해고자들의 명예와 원상회복 등 철해투의 요구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또다시 시간을 끌며 철도해고자의 가슴에 난 상처에 피고름을 짜려할지 알 수는 없다.
철해투는 철도공사측에 62일간의 투쟁의 성과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보다 더 다양하고 확실한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철도공사는 해고자 투쟁의 끝과 시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단 한 명의 해고자 없이 복직하는 날까지 미완의 투쟁은 계속 될 것이다. 설사 모두가 복직한다 해도 더 이상 해고자가 발생하지 않는 철도를 만들 때까지 미완의 투쟁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2005-05-09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