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사회적 합의’는 가능한가 독일 노사관계에서의 '사회적 합의’가 한국에 주는 시사점 |
현장에서 미래를 제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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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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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합의’는 가능한가
독일 노사관계에서의 '사회적 합의’
- 한국에 주는 시사점 -
강 수 돌 (고려대 강사, 경영학)
1. 머리말
이 글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독일에서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있었던 ‘사회적 합의’의 이론적, 역사적 맥락을 짚어보고,
이것이 최근 한국의 ‘신노사관계 구상’에 주는 시사점을
꿰뚫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아래에서는 1966~67년의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나온 1967년의 노사정 ‘대타협
조치’(Konzertierte Aktion)와 그 뒤 약 30년이 지난 1996년
초에 1차 합의된 ‘일자리와 생산입지를 위한
동맹’(Bündnis für Arbeit und
Standortsicherung)이라는 노사정 합의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이것이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어떠한 시사를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1967년의 노사정 ‘대타협 조치’(Konzertierte Aktion)
나찌즘의 발흥 및 이것과 독일 독점자본의 결합으로 발생했던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자본주의에 심각한 치명타를 가하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온갖 물적자원이 잿더미화되면서 비롯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비롯한 온 국민들의
반나찌적, 반전쟁적, 반자본주의적 일반 정서 때문이었다.
그러나 물질적 폐허와 정당성 위기의 딜렘마 속에서도 독일
자본주의는 두 가지를 주춧돌로 삼아 다시 일어섰다. 그것은
한편으로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의
구축이고, 다른 편으로는 ‘노사
공동결정제도’(Mitbestimmungssystem)의 구축이었다. 사회적
시장경제란 한마디로, 자유주의적 연합국의 지원 아래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복지국가의 건설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사 공동결정제도는 한 마디로, 독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비교적 동등한 발언권을 줄 터이니 제발 자본주의
자체만은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주춧돌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울타리를 넘어
서지 못하게 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참여와 협력’을 하도록 이끌어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1949년이 지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들어 서면, 독일 경제는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듯 엄청난 성장을
경험한다. 예컨대 1956년에서 1965년 사이의 10년간
국민총생산액은 매년 평균 5.65%를 기록하였다. 1956년에 4%이던
실업률이 1961년에는 0.8%로 떨어져(임금노동자의 수는 320만명
증가) 1966년까지 완전고용 수준을 나타냈다. 또한, 이 기간
중에 독일 상품의 해외수출도 무려 232%나 증대하였다. 이것은
독일은 물론이요, 다른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전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외연적 성장이 노동력 부족 등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나아가 독일 노조가 노동시간 단축과 휴가증대 등을
강력히 요구하는데다, 생산성 증대도 약간씩 감소세를 보이자
독일 경제는 서서히 내포적인 경제구조로 전환해 나가기
시작한다. 발전된 과학기술을 생산과정에 의식적으로 대량투입한
것이 그 예이다. 1950년대에 총설비투자는 매년 평균 4.7%
정도의 증가를 보였음에 비해, 1960년에서 1967년 사이에는 평균
6.9%의 증가를 나타낸 것이다. 국민총생산에서 총설비투자가
차지하는 비중도 24.3%(1957~1961년 사이)에서
26.4%(1962~1966년 사이)로 늘어나서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기도 했다. 나아가 노동자들의 실질임금도 눈에
띄게 올랐다. 1956년에서 1960년 사이에는 실질임금이 매년 평균
4.6% 올랐으며, 1961년부터 1965년까지는 연평균 5.3%씩
상승하였다. 물론 이것은 1955년 이후로 독일노조가 ‘적극적
임금정책’을 펴면서, 실질임금 인상은 물론, 노동시간 단축,
휴가 확대, 사회보장의 확대를 줄기차게 요구한 결과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서독에서의 자본집중도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50대 기업의 매출액이 총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만 보아도
1954년에 25.4%이던 것이 1960년에 33.5%, 1963년에 36.2%,
1966년에 38.9%, 그리고 1967년엔 42.2%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성 상승과 설비투자의 증대도 1960년대 후반,
총경제의 성장이 상대적으로 둔화되면서 정체하기 시작한다.
역설적이게도 엄청난 설비투자를 통해 생산이 증대하면 할수록,
또 더욱 효율적으로 생산하면 할수록, 결국에는 과잉축적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즉 기업 입장에서는, 한편으로는
설비과잉, 다른 편으로는 노조의 실질임금 인상투쟁 등으로
이윤은 더욱 줄어들 위험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1966~67년의 공황이다. 그
대표적인 지표가 국민총생산과 2차산업 순생산의 폭락이다.
이전에는 경기순환으로 인해 전반적인 상승곡선 위에서도
조금씩의 굴곡은 있었으나, 이제는 구조적인 하락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즉 국민총생산이 1966년에 전년 대비 16.6% 증대했던 데
비해 1967년엔 0.9% 증대(당해 물가기준)로 나타나,
실질적으로는 (1962년 불변가격 기준) 전년 대비 -1.2%의 성장을
나타냈고, 2차산업 순생산은 전년에 비해 2.8%의 감소를 나타낸
것이다. 60년대 들어 66년까지 완전고용 수준을 보이던
노동시장에 67년 들어 갑자기 수십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실업률은 0.8%에서 무려 2.1%로 급등)하는 등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 공황에 대해 독일 자본주의의 대응은, 한편으로는 보수
기민련과 사민당의 ‘대연립정부’(große Koalition)
수립(1966년말)이고, 다른 편으로는 노사정 사이에 경제위기
타개를 목표로 한 ‘대타협 조치’(Konzertierte Aktion)로
나타났다(1967년). 대연정체제에는 기민련의 쿠르트 키이징거가
수상을 맡고, 사민당의 카알 쉴러는 경제부 장관을,
기민․기사련의 요셉 쉬트라우쓰는 재무부 장관을 맡아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 대연정은 고용촉진과 경제성장을
다시 이루기 위해 국가가 연방은행의 돈을 빌려 투자활동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맥락에서 이뤄진 ‘노사정 대타협
조치’(Konzertierte Aktion)는 노조는 경제부흥에 일조하기
위하여 노동쟁의와 파업을 자제하고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기업들도 노동자의 임금삭감이나 복지비 삭감,
대량해고가 노사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이를
자제해야 하며, 정부 또한 이러한 경제난국 타개를 위해 노사간
중재를 할 뿐 아니라 독자적인 국가적 투자를
촉진한다(‘케인즈주의적 신경제정책’)는 구상을 핵심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이 구상에 따르면, 노조가 임금인상을 하더라도
이것을 생산성 향상을 통해 상쇄시켜 제품원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는("kostenneutral") 범위에서 하도록, 또한 정부의
경기정책에 부응할 수 있도록 요구받았다. 따라서 국가가 직접
노사간의 임금협상에 개입하게 되었고, 헌법에 보장된 전통적
‘노사자치주의’(Tarifautonomie)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나마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분은 한편으론
물가상승으로, 다른 편으론 소득세상승으로 상쇄되어 실질임금
인상이 정체되었다.
결국은 2차대전 이후 고성장을 구가하던 독일 자본주의는
1966~67년 공황을 ‘좋은’ 계기로 삼아 점점 나빠져 온 자본의
축적 조건(인력난, 노조 강화,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휴가증대, 사회복지비 부담 증대, 설비과잉, 이윤율저하 등)을
현저히 개선시키게 된다. 이러한 경제위기의 타개를 위하여
동원된 방식은 생산설비의 폭력적 감가상각, 임금억제,
수출촉진, 국가의 투자확대 등 다양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른바 ‘노사정 대타협 조치’였던 것이다. 이 맥락에서 신규
투자의 붐이 다시 일어나 1969년에만도 33%의 투자증대가,
그리고 1970년에도 17%나 투자증대가 이뤄진다. 그 결과
실업자도 1967년에 45만 9천 명이던 것이 1970년에는 14만 9천
명으로 현격히 줄게 된다. 물론 이러한 신규투자의 붐이
1966~67년 공황의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었음이 나중에 드러나는데 그것이 바로
1974~5년 공황이다. 실업자도 70년도에 최저선을 그린 이후에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71년엔 18만 명, 72년엔 24만 명,
73년엔 27만 명 등 지속적으로 상승하다가 74년에 58만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듬해 75년에는 무려 100만명을 초과하고
76년 전반기에만도 114만명(실업률 5.0%)의 대량 실업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 1974~5년 공황은 사실상 2차 대전 후의 구미
각국에 널리 퍼진 포디즘적, 케인즈주의적 축적모델의 한계를
뚜렷이 드러낸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노사정 대타협 조치’를 기반으로 한 부분적
경제회생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게는 별다른 일자리 보장이나
소득보장책이 나오지 않게 되자, 1969년 9월에 전국적 파업의
물결이 독일을 뒤덮게 된다. 이러한 ‘대타협 조치’는 노동자의
눈에는 한편으로 노조와 노동자를 온순하게 길들이며, 다른
편으로는 기업의 경쟁력과 이윤만 향상시켜 주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결국 1969년 말에는 기민련이 야당으로 물러 나고,
사민당과 자민당의 사회-자유 연립정권(sozialliberale
Koalition)이 탄생한다. 이 정권은 1982년에 기민련의 헬무트
콜, 현재 수상이 주도하는 연립내각에 정권을 내줄 때까지 10여
년을 통치하게 된다. 이 사회-자유연립정권은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저항을 무마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생산에 동원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추진하게 된다. 그것은 한편으론 1974년부터
‘노동생활의 인간화’ 프로젝트를 통해 테일러주의적으로
파편화된 작업조직을 혁신하여 작업과정을 보다 매력적으로
만든다는 것과, 다른 편으로는 1972년의
‘작업장노동자대표법’(BVG)과 1976년의 ‘신공동결정법’을
통해 노동자들의 경영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1967년의 ‘노사정 대타협 조치’는 노사정간의 균형잡힌
의사결정과 분배가 아닌 노동에 대한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여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3. 1996년의 ‘일자리와 생산입지를 위한 동맹’(Bündnis
für Arbeit und Standortsicherung)
독일에서 1996년 초에 ‘일자리를 위한 동맹’(Bündnis
für Arbeit)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0년에 이뤄진 독일 통일의 시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물론 독일에서는 70년대 말부터 80년대를 거쳐 오면서
투자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거나 기술혁신이 다른 나라에 비해
더디게 진행된 문제도 있다. 나아가 80년대 초의 경기불황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득세하면서 노동소득
분배율(국민소득 중 임금소득의 비중)이 1980년의 75.8%에서
1990년의 53.2%로 급감했다. 임금소득의 감소는 국가에 의한
사회안정 유지비의 상승을 가져 와, 예컨대
사회부조금(Sozialhilfe) 지출은 1980년의 150억 마르크에서
1990년에 340억 마르크로 늘었다. 공공부조 수혜자도 1981년에서
1991년 사이에 80%가 늘어, 전체 인구의 6%인 370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제․사회적 후퇴의 물결에 또 하나의
커다란 물결이 가세했는데 그것이 바로 1990년의 독일
통일이었다.
독일의 통일과정은 한마디로 서독 자본주의가 동독 사회를
병합하는 과정으로, ‘3차원의 정화사업 프로젝트’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토지나 건물, 기계, 원료 등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나 산업구조 전체를 서독 자본의 필요에 맞게 바꿔
내고(‘시장경제’라는 경제적 차원), 둘째로 이와 맞물리면서
노동자의 내부구성, 세력관계, 사회적 의사결정의 구조를 완전히
새로 짜맞추며(‘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차원), 셋째로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행위방식과 같은 일상적 삶의 방식을
서독의 기준에 맞추어 바꾸는(사회적 차원) 다차원의 프로젝트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어떻게 재정적으로
지원해 내는가 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이른바 ‘통일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사회보장제도의 감축, 긴축재정, 공공부문의
민영화, 잉여인원의 대량감축과 같은 수단들이 동원된다.
그 결과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량실업의 발생과
고용위기이다. 독일의 실업자는 1980년에 약 90만 명이었는데,
이것이 꾸준히 증가하다가, 통일 뒤인 1993년에는 340만 명으로
늘었고, 1994년 1월에는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400만 명 선을
넘었다. 지난 96년 2월에는 공식 통계만으로도 420만 명을
넘었다고 보도되었다. 여기에 정식 실업자로 노동청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과 임시직이나 불완전고용층, 실습생, 정년퇴직자
등을 감안한다면 실제 실업자는 600만에서 7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 지경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장기실업,
대량실업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통일 후 4년간
임금노동자의 수는 860만에서 600만 명으로 260만 명이 줄었다.
동독에서는 노동자의 약 절반 이상이 노동시장으로부터 배제된
것이다. 1990년대 이후로 독일 산업계에서도 이른바 ‘군살빼기
생산방식’을 도입하여 인원감축, 비용절감, 작업조직 재편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꾀하고 있다. 이 와중에 필연적으로 나오는
문제가 일자리 감축이고 보면, 앞으로 세계시장에서의 이 경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경쟁력 강화를 외치면 외칠수록 일자리 문제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로 쉽게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독일 정부의 재정 상태는 통일 후 경기침체와
임금소득자의 소득 감소로 인하여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세출은
늘고, 국채도 증가했다. 동독 사회를 재편하기 위한 프로젝트
비용이 엄청난 부담을 안겨 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1993년
공공재정 적자는 국내총생산의 5% 수준인 1600억 마르크에
달했다. 여기에 연방신탁청, 연방철도, 연방체신에 필요한
대출과 그 밖의 공공재원 수요를 합치면 2,300억
마르크(국내총생산의 7.5%)에 달한다. 세출의 51.5%가
공공지출이며, 통일 전과 비교해 무려 6%나 상승한 것이다. 통일
후 누적된 국채는 10조 마르크에서 15조로 증가했다. 94년의
부채를 합한 국채 규모는 통일 뒤 5년간 두 배로 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정부가 실질적인 공공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독일 정부와 경제계의 대응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그 하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전략’의 강화인데, 이것은 정부 주도로 사회보장 지출감소나
공공부문 합리화를 통해 재정적자를 감소시키는 전략이다. 즉
정부는 1997년 예산에서 약 7백억 마르크(약 35조원) 정도의
사회복지비 삭감과 지속적 공공부문 합리화 및 민영화를 통해
재정적자 감소와 독일 경제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사회복지를 남용하거나 사회보장 제도에 의해
군기가 빠진 노동자들을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길들이겠다는 것이다. 특히 공공부문 노동자들에 대해 2년간
임금동결, 질병 및 휴일수당의 감소, 실직수당에 대한 엄격한
제한, 퇴직연령 연장 등을 계획하고 있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전면적 저항에 직면해 있다. 두 번째 전략은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 노동자들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고, 동시에 실업자를
비롯한 사회적 피해자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신코포라티즘적 전략’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일자리를 위한 동맹’(Bündnis für
Arbeit)’이다. 물론 이것은 1995년 11월 초에 금속노조(IG
Metal) 위원장인 쯔비켈이 정부와 기업가를 상대로 제안한
것이었다. 그 핵심은 정부와 기업이 대량실업, 고용위기(동서독
공식 실업자만 420만 명, 동독 16%, 서독 9%의 실업률)를
타파하기 위해 가시적인 고용창출과 고용안정을 위해 노력을
한다면 노조는 실질임금의 동결과 기업의 고용유연화도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이 마침내 성사되어 1996년 1월
23일, 콜 수상의 주도하에 노사정 사이에 ‘일자리와 생산입지를
위한 동맹’을 위한 1차 합의가 이뤄지게 된다(여기에 대해서는
이승협씨의 글, “일자리를 위한 연대?”,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1996년 4월호 참조). 그 내용은 대체로 ①
2천년까지 실업률을 절반으로 낮추고 ② 이를 위해 임금인상을
억제하며 ③ 위험수위에 이른 재정적자를 줄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1차 합의가 독일에서 새로운 ‘노사정 사회적 합의’의
완결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정책변화나 노사정 사이의
태도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1차
합의만을 보고 독일에서도 노사정 사이의 사회적 합의가 잘
이뤄지고 있다고 성급히 판단하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실제로 이
1차 합의 뒤 4개월만인 5월에 들어서 이 ‘일자리와 생산입지를
위한 연대’가 비판의 홍수 속에 휘말려 있음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독일 노동자들은 “이 합의가 정부의 배신으로
휴지조각이 되었으며, 노동자를 기만하기 위해 짜여진 음모에
불과했다”고 성토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 3월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콜 정부가 태도를 강경하게 바꾸어 4월달에 “고용과
성장을 위한 계획”을 의회에 제출하여, 실업축소 대책은 전혀
없이 정부와 사용자의 입장과 이해만을 대변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분노는 더욱 거세게 일고
있다(여기에 대해서는 이번 호 ‘국제노동’에 실린 정병기씨 글
참조).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노조의 자발적 제안에 의해
‘신코포라티즘적 전략’이 채택되고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볼 때 노조가 경제위기나 고용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대안을 새롭게 추진할 능력과 의지를 상실하고,
단지 그 위기들로부터 발생하는 부정적 폐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소극적 태도에 머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 더욱
중요한 사실은 노조가 경제호황기에 높은 임금인상과 많은
휴가를 요구하는 것이나 불황기에 고용안정을 대가로 임금동결을
약속하는 것 등 모두 다 마찬가지로, 노조의 이러한 행위
논리(전략)가 더 이상 자본과 시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이
사회를 민주적이고 생태적으로 재편하는 데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4. 독일의 두 차례 사회적 합의가 한국의 ‘신노사관계 구상’에
주는 시사점
독일의 두 차례 사회적 합의는 비록 그것이 30년 정도의 시차를
갖고 있긴 하지만 서로 엇비슷한 점이 있다. 하나는 둘다
경제위기나 고용위기를 배경으로 해서 노사정 사이에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 위기를 타개하는 데에 동참하자는 생각을 기조로
깔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노조가 비교적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이 타협의 결과가
노동자에게는 가시적인 혜택을 안겨다 주지 않고 오히려 점점
노동자 개개인이나 노조에게 불리한 효과만 초래했다는 점이다.
노사정 가리지 않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난국을 타개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올바른 일이나,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하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세계시장에서 우리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고
이를 통해서라야만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임금을 인상하며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다는 패러다임 하에서는 이 지구상의 그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생명력이 길지 못하고(길어 봐야
30년이다. 그리고 그것도 항상적인 긴장과 갈등 속에서만
유지된다), 오히려 이 합의는 ‘부메랑’이 되어 노동자들의
가슴팍으로 돌아 온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노동자의 인격과
건강, 창의력과 자율성, 대자연의 생태계, 이 모든 것이
범지구적인 경쟁의 과정 속에서 체계적이고, 또한 엄청나게 빨리
파괴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파괴를 대가로 증대시키는
생산성을 과연 바람직한 ‘생산성’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논리는 한국의 ‘신노사관계 구상’에 상당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대개 한국에서 ‘신노사관계 구상’이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OECD가입을 위한 전제로서
노동개혁의 필요성이며, 다른 하나는 1987년 이후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한 민주노조운동을 노동생산성과 국가경쟁력의
범주를 벗어 나지 못하게 ‘건전한’ 사회운동으로 통합해 내기
위한 필요성이다.
선진국 대열에 나란히 들어가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단순한 몇 가지의 수치로 표현된
지표들(예컨대 국민총생산 대비 복지비용, 교사 1인당 학생수,
가구당 자동차수, 의사 1인당 환자의 수 등)이 아니라,
선진국다운 ‘삶의 질’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실로
선진국다운 ‘삶의 질’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노동을 가능한 한 적게 하고 또 이런 노동을
점차로 개선할 뿐 아니라, 보다 많은 자기계발과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자연과 인간의 내면적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조화롭게 발전하도록 촉진하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종이나 국적, 합법성 여부, 학력이나 숙련도, 남녀 등의
기준으로 어떠한 차별도 행하지 않으며 서로 돕고, 나아가
타인과 지배자에 의해 종속받지 않는 그러한 자율적이고
책임있는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경쟁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세계시장에서의
‘상품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경쟁, 그 속에서만 생존이
보장되는 경쟁은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대타협’을 하기
전에 ‘무엇을 위한 대타협인가?’를 물어야 한다. 진실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대타협인지, 아니면 ‘눈가리고
아웅’하기 위한 대타협인지를 지혜롭게 가려낼 수 있는
통찰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독일의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위기는 우리의 밖에서부터 저절로 온 것인가, 아니면
우리도 같이 만들어 낸 것인가?’라는 질문을 시간나는 대로
자주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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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05-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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