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와 협력의 노사관계 모델 비판 |
현장에서 미래를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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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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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료
참여와 협력의 노사관계 모델 비판
남 구 현 (연구위원, 한신대 교수, 사회복지학)
이 글은 지난 6월 8일 민주금속연맹에서 실시한 ‘신노사관계
구상’과 관련한 교육에 제출한 교안을 필자가 직접 보완한
것이다.
신노사관계구상에 따라 노사관계 개혁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신노사관계구상은 노조의 자주적, 민주적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권위주의 시대에나 통용되던 노사관계를
정비함으로써, 그간의 노사 대립을 지양하고 21세기에 걸맞는
협력하는 노사관계를 형성하자는 것이다. 노개위는 노동계,
재계, 학계 등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하여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기관으로, 복수노조 및 제3자 개입 금지조항,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조항 등 이제까지 쟁점이 되어 왔던 사안을
위시해 노사와 관련된 다양한 쟁점을 검토하고 있다. 지금의
노개위는 그러나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내기 위한 논의의
장이라기보다는, 4.24일 청와대 노사대회에서 소개되었던 배무기
교수류의 협력적 노사관계론이 관철되면서 대국민적으로 선전,
홍보되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4월 24일 행한 ‘21세기 세계일류국가로의
도약을 위한 신노사관계 구상’이라는 연설의 골자는 노사가
자율적으로 대화와 협상을 통해 동반자 관계를 만들어 고능률,
고복지의 생산공동체로 기업을 만들고 인간중시의 노사문화와
인력개발형 노사관계를 만들어 세계화 시대에 유연하게
대처하자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노사정 모두
환골탈퇴의 각오로 대타협, 사회적 대합의를 이끌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배무기교수는 당일 ‘세계화 시대의 노사관계
개혁을 위한 제언’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같은 내용을
설명하였다. 이글에서는 노개위의 상임위원인 배무기 교수의
4.24일 발제문을 중심으로 참여와 협력의 노사관계 모델에 대해
검토해보기로 한다.
1. 대립에서 협력으로?
무엇보다도 문제되는 것은 사회적 합의주의 모델을 보는 그의
시각이다. 그는 그의 글에서 노사관계를 대립으로만 보는 낡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협력관계로서 노사관계를 바라보아야한다며
이미 미국을 위시해 독일, 북유럽제국 등 세계의 모든 나라가
새로운 협력적 노사관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예시하고 있다. 마치
온 세계가 이제까지는 대립만해오다가 최근에는 협력만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세계적인 유행에 따라 우리나라도 낡은
투쟁양식을 버리고 협력하는 세계적인 조류에 합류해야한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노자 관계를 협력관계로 바라보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초기에서부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서 유포되어 왔다. 노동자 운동 내에서도 라쌀레,
카우츠키, 베른슈타인 등에 의해 노자 사이의 협력주의적 관점이
제시되었으며, 실제로 부르주아지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그러한 합의가 완성된 형태로
변함없이 유지된 적은 없었다.
우리가 2차대전 후 70년대 초까지의 케인즈주의적인 사회적
합의주의를 염두에 둔다면, 이 역시 80년대를 넘어서면서 부터는
신보수주의적인 반동(대처주의, 레이거노믹스)으로
손상당하였고, 최근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대중투쟁의
활성화는 다시 이에 대한 반작용임을 알 수 있다. 즉,
노사관계는 투쟁에서 협력으로 단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하는 양자간에 항상 위기적인 방식으로 해당시기의
세력관계가 반영되는 수준에서 합의가 일어나며, 이렇게 도달된
사회적 합의는 완전하고 굳어진 것이 아니어서, 세력간의
힘관계의 변화에 따라 다시 합의의 수준이 결정되며, 심지어는
파기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오직 노동자운동의 ‘투쟁력’이
전제되어야만이 일정 선상에서의 ‘합의’가 가능하고, 이루어진
합의가 유지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배교수는
독일의 경우 경제성장 둔화와 실업자 급증에 대응코자 노사정
간에 ‘고용 및 경쟁력 강화를 위한 연대’에 합의하였다고 예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올 4월말 콜 총리가 ‘성장과 고용을
위한 프로그램’을 발표 97년에 7백억 마르크(35조 7천억원,
독일 GDP의 2%)에 달하는 공공지출액을 삭감하여 공공부분의
임금을 동결하고 복지혜택을 축소함으로써 독일경제의 저하된
국제경쟁력과 400만에 이르는 사상최대의 실업자 문제에
대처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함으로써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지난해 11월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고용을 33만명으로
늘린다는 내용의 타협안을 제안, 노조 내부에서 강력한 비판과
함께 콜 총리의 지지를 받은 바 있던 독일 금속노조 위원장
츠비켈마저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미
알려져 있듯이 지금 독일에서는 공공부분노조와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부분적 경고파업을 하는 등의 노동자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배교수가 이야기하듯이 노사가 대립관계 극복을
위해 노사간에 공유가치에 대한 협약을 맺고 인간본위의 경영을
실천해 나가고 있다기 보다는 미국기업들의 새로운 축적전략의
변화에 따른 대량 해고가 사회적 문제로 나타나고 있으며,
미국의 조직 노동자운동을 대표하는 미국노동총연맹
산업별회의(AFL-CIO)는 지난해 16년 만에 협조주의적인 지도부가
투쟁적인 지도부로 교체된 바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에
지난 수년간 복지삭감에 반대해서 프랑스에서 벌어진
노학연대투쟁과 올해 신보수주의적인 우파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진 이태리에서의 노동자투쟁을 예로서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에서 마치 파라다이스처럼 묘사되고, 이제는
투쟁을 멈추고 참여와 협력을 하고 있다는 선진국들에서의 지난
수년간 진행된 노동자투쟁은 역사적 사실로서 대립에서
협력으로라는 그의 세계관을 반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적 합의주의의 실험은 어떠했는가. 일찍이
92년도에도 대선을 앞두고 신노동정책의 이름 아래 복수노조
허용과 함께 변형시간 근로제의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발표가
각기 7월과 11월에 나온 바 있으며, 이는 총액임금제를 통한
임금억제정책과 노동의 인간화, 성과배분제의 이름 아래 새로운
노동통제전략이 구사되는 것과 맞물려 있었다. 문민정부의 등장
이후에는 이인제 노동부 장관이 앞장서서 노동법 개정을 포함한
노동개혁을 시도하다가 보수정치세력의 반발로 인해 좌절된 바
있다. 한편 문민정부의 등장과 함께 한국노총을 상대로 93년과
94년도에 시도되었던 한국판 `사회적 합의주의'는 노경총
밀실합의라는 대중적 비판에 직면하였으며, 노총탈퇴운동의 결과
많은 수의 노조가 한국노총을 이탈하여, 민주노조운동은 대중적
토대를 강화할 수 있었다. 무쟁의 원년과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고통분담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현장에서의 연대투쟁을 불러
일으켰고, 노경총 임금가이드라인은 연대파업투쟁을 통해
부정되었던 것이다. 이제까지의 사회적 합의주의의 시도는
반어용노총 전선을 오히려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문민정부의 노동정책은 성장하는 민주노조운동을 공권력을
동원해 물리적 폭력으로 탄압하는, 말 그대로 구태의연한
권위주의시대에나 통용되던 방식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한국노총을 상대로 사회적 합의주의를 시도하는 한편에서는
동시에 94년도에는 철도 및 지하철 노동자에 대해 그리고
다음해에는 한국통신 노동자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던
것이다.
지금 민주노총을 상대로 시도되고 있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실험도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 권위주의 시대에 구속되고 해고된 노동자들은 석방,
복직되지 않고 있으며, 구속, 해고 노동자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공동으로 타결을 유도한
한국합섬에서 조차 지도부가 구속되고 있으며, 최근에 연달아
터지는 조직 사건들,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에 대한 공권력 동원
등이 개혁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탄압의
예이다.
노자간에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사라지기 까지는 대립하고
있는 양자간의 합의는 세력간의 힘관계에 의해 합의의 수준이
결정되며, 항상 위기적이고, 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합의는 대립의 반대물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물이자 새로운
대립을 위한 조건의 변화 이상의 것이 아니다.
2. 과연 생산과정에서는 대립을 지양하고 협력적일 수
있는가?
그의 글에서는 기업이 고능률의 생산조직으로 규정되고 있다.
분배국면에서는 노사간에 역할 상반과 대립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생산국면에서는 쌍방이득과 협력을 전제로 하고 있어,
노사관계는 일상적으로 협력관계로 만들 수 있으며 단체교섭
때에만 대립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자본주의를 보는 그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적 생산은 무엇보다도 최대한의
잉여가치(자본가에게는 이윤으로 현상)의 생산 자체가 목적이
된다는 점에서 특징지워 진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가치증식과정과 노동과정의 통일로서 최대한의 이윤을 위한
생산성의 증대는 모든 자본의 절대명제이다. 배무기 교수는 이를
고능률의 생산조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지,
그가 빠트리고 있는 점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즉, 자본과
노동 사이의 결합은 모순적이며, 자본이 생산수단의 소유에
기초하여 이윤을 사적으로 취할 수 있는 권리를 (하나의
계급으로서)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관계는 착취관계라는 점이다. 착취관계로서 자본과
노동사이의 관계는 노동과정에도 영향을 미쳐서, 노동과정은
자본가의 지도아래 수행되고, 노동자는 생산의 한 요소로서
대상화되며, 노동자는 기계의 부속품이 되고, 노동을 하는
주체인 노동자와 객체인 기계 사이에는 주객 전도가 일어난다.
즉, 생산과정 자체가 모순성에 의해 각인되어져 있다는 점이다.
생산과정에서 생산된 가치가 분배과정에서 이윤과 임금으로
나뉘는 메카니즘을 보자. 자본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을 구입하여 생산에 투입함으로써만이
자기가치증식이 가능하다. 노동력 상품의 소유자인 노동자는
다른 모든 상품소유자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판매하여 제공하는
노동력의 가치부분을 임금형식으로 되돌려 받으며, 자기가
되돌려 받은 만큼 이상의 노동을 하는데 바로 이 잉여노동이
자본에 의해 사적으로 전유되는 것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생산하는데 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으로서, 그것의 재생산비용, 즉 노동자의 노동력을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생필품 및 서비스의 가치로
계산된다. 임금은 이때 노동력 가치의 가격형태이다. 임금은
마치 전체 노동의 대가인 것처럼 현상하지만, 임금협상에서
최저생계비(또는 표준생계비)를 기준으로 논란이 벌어지듯이
실제로 지불되는 임금의 기준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드는
비용(노동력의 가치)이지 노동을 한 결과에 대한 대가(노동의
가치)가 아니다. 임금은 그러나 산술적으로 규정된 변할 수 없는
값이 아니며, 사회적인 역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노동과정의
주체로서 노동자는 인격을 가진 집단주체로서 자본가에게
대립하며, 임금의 결정과정에 집단적 주체로서 협상(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아가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쌍방이 서로
계약을 맺고 하나의 생산단위(기업)내에서 모순적으로 결합하기
이전에 각기 사회계급으로서 전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재생산된다. 즉, 생산과정에서의 자본관계의 재생산은 순환과정
속에, 즉 계급관계 속에 이미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적인 운동방식에 이미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대립의 불가피성은 이와 같이 내재적으로
주어져 있어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속되는 한 이 투쟁은
약화될 수는 있을지라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주로 경제적인 임금투쟁,
복지투쟁을 내용으로 조합주의적 형태로 일어나고 있지만,
계급투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체교섭시에 나타나는 대립이 생산에서 분배에
이르는 전체 과정에 걸쳐 자본과 노동사이의 내재적 모순이
표현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단체교섭시 나타나는
쟁점은 산재 추방 등 노동조건 개선(배교수에 따르면 생산
국면)에서 부터, 임금인상, 기업복지 확대(배교수에 따르면 분배
국면) 그리고 실업, 교통, 환경, 복지, 교육, 문화 등과 관련된
전 사회적 쟁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전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주의적 관계의 재생산은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 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모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쟁점들은 생산국면에서 협력하다가 분배국면에서
단체교섭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전 사회적
재생산과정으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제 계기에 존재하는
모순들이 집단적 주체로서의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계약(또는
합의)을 맺을 당시에 나타났을 뿐인 것이다.
분배국면에서의 대립과 갈등으로부터 분리되어 생산에서의
참여와 협력이 가능하다는 배무기 교수의 주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것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모순을 은폐한 채, 또 전
사회적 재생산과정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니고 있는 제
측면들을 사상한 채, 단순히 고능률의 생산조직인 기업
경영이라는 수준에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3. 그의 주장은 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도덕적 요청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의 주장에는 노동자들이 생산성 향상에 협조해야한다는 도덕적
요청이 반복되고 있을 뿐, 현실 모순과 그 모순의 지양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없애고자
하는 대립이 왜 생기는지, 그 대립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노사가 생산에만 눈을 돌려 참여와 협력으로
경쟁력을 강화시킨다면 대립과 갈등이 없는 신세계가 열리고
근로자들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보람의 일터로 작업장이 바뀔
것인가.
만약 한 나라의 모든 기업의 노동자가 노사화합을 이루고
고능률의 생산조직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적 생산이
남아 있는 한 자본끼리의 경쟁을 통해 도산하는 기업이 생겨날
것이다. 노동자가 생산성 향상에 동의하고 자본과 함께 대화와
협력으로 생산에 임했는데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실업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배교수에게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논의를 기업내의 문제로 환원하고
있으며, 더군다나 고능률의 생산이 가능한 대기업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세계의 모든 기업들이 이러한 모델을
채택할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어서, 온 세계의 노동자가
노사협조주의적으로 일한다 하더라도 역시 극소수의
‘고능률적’인 기업들만이 살아 남고 대다수의 노동자는 실업을
하게 될 것이다.
자본가들 끼리의 경쟁은 최대한의 잉여가치(이윤)을 향한 자본의
내적 속성이 관철되는 외적 형식이다.(세계 시장에서의
무한경쟁) 모든 기업이 고능률의 생산성을 보이고 노동자들이 전
사회적인 총 잉여가치를 늘이는데 협조한다고 하더라도 총
잉여가치중에 누가 더 많이 가져가는가 하는 자본가끼리의 싸움
속에서도 도산하는 기업이 생긴다. 실제로 이제까지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삼성이나 노조탄압을 병영식으로 해오던 현대는
이제까지 고속 성장을 해 왔다. 배교수의 말에 따르면, 고능률
생산조직으로 기능해 온 것이다. 오히려 노사협조주의적으로 한
가족처럼 운영되어 오던 수 많은 중소기업이 대량도산해왔다.
우리나라와 같은 천민적 자본주의 하에서는 고능률적이고
생산성이 높은 기업들보다는, 오히려 땅투기나 하고, 비자금이나
바치는 기업들이 계속적인 성장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문제가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전문경영과 구분되는) 자본을 타인
노동의 결과물을 아무런 대가없이 착취하는 것으로서
이해한다면, 가장 비생산적인 것은 자본 그 자체일 것이다.
노사정이 환골탈퇴의 각오로 정부는 노사의 자율적 합의를
가능하도록 중립적으로 대처하고, 사측은 전근대적인 노사관을
바꾸고, 노동자들은 투쟁적인 자세에서 참여와 협력하는 자세로
바뀜으로써,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생산조직으로 기업문화를
바꾸어 나가자는 그의 요청에서 무엇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사측과 정부측의 대응자세의 변화이다. 그러나 과연 경영자와
정부의 태도 변화는 실질적으로 가능한가. 민주노총은
노사개혁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과거
권위주의적인 노동악법조항의 적용으로 구속되고 해고된 수많은
노동자들에 대해 아무런 조치가 없을 뿐더러, 구속 및 해고자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지금 현안이 되고
있는 노동악법의 개정을 재계가 입을 모아 반대하고 있는데
자본가들의 의식을 건전한 노사관을 가지도록 어떻게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대기업중 해고자를 복직시키지 않는
유일한 기업으로서 최근의 유기용제 중독사건이 보여주듯이
노동자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있는 기업인 LG를 배교수가 그의
글에서 가장 이상적인 기업으로 예를 들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리는 배교수의 참여와 협력의 노사관계 모델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도 않고, 그럴듯한 대안이 될 수도 없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사실 이미 지적하였듯이 배교수류의 주장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지금 현안이 되고 있는 노동악법조항은 지난
수년간 노동계가 개정을 요구해 왔으며, 국제사회에서도 개정할
것을 요청해왔고, 심지어 현정부도 선거공약으로 개정하겠다는
약속을 한 부분으로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어서, 이제까지의
민주노조운동의 주장을 받아 법개정을 하면 되는 사안이다.
그렇다면, 각계의 의견 수렴을 위한 노사개혁위원회니 국민적
합의 도출을 위한 논의니 하는 복잡한 과정과 함께, 대기업
위주의 기업협조주의를 내용으로하는 배교수의 이론이 왜 지금
시점에서 전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우리의 대안으로서
유포되고 있을까.
지금 시점에서 다시금 참여와 협력의 노사관계 모델이 다시금
주장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민주노총의 출범으로 변화된
노동운동의 지형을 고려해 민주노총을 제도권안으로
끌어들이자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배교수의 주장이 실제로
설명력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은, 그가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듯이,
핵심사업장이라고 일컫는 몇 몇 대기업에 국한되고 있어서,
대기업 위주의 노사협조주의 모델이 우리의 21세기를 대비하는
노사관계로 정착될 경우, 노동자운동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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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06-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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