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민중운동의 뿌리 |
현장에서 미래를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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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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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 제 ◦ 노 ◦ 동
필리핀 민중운동의 뿌리
- KMU운동에 대한 비판적 검토
이 철 순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대표)
필자 소개
‧ 1953년 출생
‧ 1973~83년, 천주교 전주교구 노동사목 사무국장
‧ 1973~1978년, 카톨릭 노동청년회 북부연합회
교육부장
‧ 1988~1994년, 아시아 여성위원회(Committee for Asia
Women) 집행위원장
‧ 현재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대표, 외국인노동자
대책협의회 공동대표
80년도에 필리핀에 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어느 곳을 가던 농성과 파업의 깃발들이 여기저기에서
나부끼고 백화점과 공장 뿐 아니라 은행과 보험회사 앞에도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담은 대자보를 붙이고 천막을 만들어
며칠씩 밤샘 장기농성을 하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빠짐없이 이런저런 항의집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항의집회는 로란도 올라리아(Rolando
Olalia, KMU 의장)가 피살되었을 때라고 생각한다.
나도 86년 11월 13일 KMU 의장인 로란도 올라리아가 피살되어
필리핀 대학에 안치되었다가 발인하는 날 노동자 집회에
참여했다. 아침 7시 30분, 로란도 올라리아가 안치되어 있는
학내성당에 도착했을 때 2~3일 동안의 공동작업으로 완성한
커다란 만장들과 대형 그림들을 보고 참 놀라워 했었다. 아침
8시에 필리핀 대학에서 출발한 시위대들은 택시로 약 1시간
거리인 보니파치오 안드레아 (Bonipacio Andrea) 광장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걷는 동안 군중들은 늘어났고 9시쯤되자
시위대는 엄청나게 불어나 50만명에 달했다. 우리가 보니파치오
안드레아 (Bonipicio Andrea)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였다. 도착 후 NDF의 지도자들 중 한 분인 오-캄포 씨가 나와
10분 연설을 하고 시위대들은 대통령궁을 향해 떠났다.
KMU의 건설과 필리핀 노동운동
많은 이들이 필리핀 민중운동의 역사는 ‘보니파치오
안드레아’로부터라고 한다. 필리핀은 400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아 왔는데 보니파치오 안드레아는 ‘가빗테’라는 항만도시의
담배재배 노동자와 신발, 출판, 항만 노동자들의 지도자였다.
그는 1872년 사회민주주의, 민족해방을 외치며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조직하였다. 이 파업은 가톨릭 신부 3명도 가담하였던
대규모 집회였고 필리핀에서는 처음 있었던 시위였다. 이를
‘가빗테 항쟁’이라고 한다. 이 항쟁 후 3명의 신부들은
반역자로 몰려 스페인에 의해 교수형을 받았다.
1900~1946년 미국 식민지 시대를 맞으면서 이들은 임금문제와
사회문제를 중심으로 계속 투쟁하였다. 1902년 5월 1일, 1만
명의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외자 자본 반대, 미군기지 반대를
주장하며 투쟁할 때, 미국은 이런 요구를 주장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하에서는 민족해방운동가들을 반역자로,
그리고 미국 식민지하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몰아 구속 또는
사형시켰다.
1946년 필리핀은 정치적으로 독립을 맞는다. 그러나 그 후
임금인상, 미군기지 철수, 미국정책 반대 요구가 커지자
요구하는 집단 즉 노조, 인권단체 등을 공산주의자로 몰뿐
아니라 민주인사 투옥, 학살, 연행이 잇따르면서 민중단체들은
1968년 지하조직으로 들어가게 된다.
1969년 민족주의(Nationlists)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의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미국정책 반대를 외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1972년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75년 10월 24일 500여 명의 라톤데니나(The La Tondena) 공장
노동자들이 44시간 동안 공장에서 파업을 했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파업금지법 폐지를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했던 사건이다. 그리고 마르코스 정권의 계엄령과 긴급조치법을
반대한 최초의 데모였다고 한다.
이 라톤데니아 노동자들의 파업은 빈민, 학생, 종교,
민중해방운동가들의 연대를 만들어 냈다. 계속 커져가는
데모대를 보고 마르코스는 대통령령 823호를 선포하여 모든
집회에 대한 금지와 노동부의 허가없이 하는 모든 행위를 금하는
특별령을 발표한다. 특별령(Presidental Decree) 823호가
발표되자 노동자, 빈민, 학생, 종교단체를 비롯하여 모든
민주단체들은 일제히 비난과 반대를 표명한다. 이러한 정국에서
11월 23일,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모여 필리핀노동자연합(BMP;an
Alliance of Progressive Workers)를 조직한다. 이때 주류를
이룬 그룹은 9개 노동조합이었으나 곧 50개 노동조합으로
늘어났다.
1975년 12월 6일 8,000여 명의 노동자, 학생, 종교단체,
도시빈민들이 BMP 집회에 참가했고, 12월 17일 대통령은
강렬해지고 있는 항의집회를 막기위해 노동자들에게 1년에 한달
분의 성탄 보너스를 지급하도록 기업주에게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또 하나의 이슈를 제공한 결과가 되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이에 항의하는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라톤데니아 파업 이후 1년 동안 108건의 파업이 있었고 BMP의
노동조합 수도 150개로 늘어났다. 그 후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군인들의 폭력과 탄압이 심해지자 BMP는 지하조직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77년 새로운 노동단체가 결성된다. Kapatiang Anak - Pawis
(KAP) 전진노동자연합(Progressive Labor Association)은
선진노동자들의 일치와 단결을 목적으로 결성되어, 주요사업으로
‘진정한 정신에 대한 교육과 세미나’(Genuine Trade Unionism
& Seminar) 등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노동자들은 더욱 심각해지는 경제악화 조건 속에서 노력과
정열을 다하여 노동자가 결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드디어 1980년 5월 1일 KMU가 결성되기에 이른다. KMU는
National Federation of Labor Unions(NAFLU), Philippin
Alliance of National Labor Organization(DANALO), National
Federation of Labor(NFL) 등 100여개의 노동조합들이 모여
결성하였다. 그 후 KMU는 다른 민주단체들과 함께 노동자 파업과
복지 뿐 아니라 토지 개혁, 정치범 석방, 계엄령해제 등의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였다. 1981년 1월에 KMU는
공식적으로 지면을 통해 계엄령과 단체행동 금지 등을 반대하고
해제를 요구한다. 이런 요구를 담아 5월 1일 계엄하에서
처음으로 최대 규모인 40,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하는
대집회가 개최되었다.
86년이라고 생각되는데 한국에서 어느 노동단체 지도자가
필리핀과의 교환 프로그램에 참석차 방문하였다. 그 때 마침
KMU와 다른 노동조합 공동주최의 집회가 보니파치오 광장에서
있었다. 우리도 이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이 때 필리핀
노동자들의 집회를 지켜보던 한국 노동자의 첫 마디가 “무슨
집회가 이래? 꼭 놀러 나온 사람들 같다.”라고 하며 “우리도
경찰들의 공포 분위기나 연행하는 사태없이 집회할 수 있다면
누구든, 매일 집회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이 나라는 우리처럼 경찰력이 동원되어 긴장감을 조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 어느 곳에서 누구에 의해 총에 맞을지
모르는 위험속에서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86년 코리 아키노 정부가 출범한 후 노동법 개정과 같은 정책적
변화가 시도되었다. 노동단체들은 노동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요구를 모아 정리하였다. KMU도 참여하여 정리한
요구는 파업의 자유와 조직의 자유, 공무원들의 노동조합 조직의
권리 인정이었다. 또한 IMF의 요구인 임금인상 동결(Wage
Freeze)과 자유 무역정책의 철폐, 모든 억압적인 법의 철폐,
토지개혁 등을 노동부 장관과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1986년
11월 정치적으로 코리 아키노와 싼 체스가 추진하려던 개혁에 큰
시련을 맞게 되었고, 다시 군부정치체제 스타일로 후퇴하면서 또
다시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KMU의 의장인 로란도 올라리오가 피살되어 산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많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살해되거나
구속되고 고문을 당했다.
여성노동자 운동의 전개와 노동운동 참여에 대하여
여성노동자들이 스스로 모이면서, 자신들의 소식을 나누고
의식화를 위한 모임과 교육장소조차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1983년 여성센터가 만들어졌다. 여성센터에서는 여성노동자들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실과 노동조합 회의실 등을 두고
독서와 회의, 토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센터는 실질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의 의식을 높이는 역할을
충실히 하였고, 84년 3월 8일 이들 의식화된 여성노동자들과
공업여성노동자회(Women Industrial Workers Alliance)가 함께
WIWA를 결성하였다.
WIWA회원 중 일부는 지하조직으로 들어갔고, 일부 WIWA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제조업 노동자들 뿐 아니라 서비스 등 다양한 업종,
직종에 있는 여성노동자들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1985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을
기해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집회를 가졌다. 이 집회에서
‘Women Workers Movement’ 즉 KMK를 결성하게 된다.
이 날은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직장안에서만 해왔던 농성과 파업을
공장밖으로 끌어낸 최초의 날이었다. 참석한 여성노동자들은
“우리는 살기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할
권리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하였다.
KMK는 ‘여성이 계급적․성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여성노동자 자신의 단결과 투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목표를 가지고 조직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KMK는
활동을 통해 조직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설정하게
되었다.
1) 생산 노동에 여성의 참여를 보장하고 평등한 교육기회와
지도력, 조직운동에서 여성의 잠재적 가능성이 완전히 발휘되는
것을 통해 성적 불평등과 억압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한다.
2) 모든 성차별을 추방하고 민족적, 과학적, 대중지향적, 성차별
없는 문화와 교육을 실현한다.
3)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서비스 제공을 통해 이중
노동으로부터 여성의 해방을 꾀한다.
4) 출산과 모성 기능에 대한 권리 보장 및 혜택을 확보한다.
5) 모든 정치운동에서 여성의 완전한 참여 확보 등을 위해
싸운다.
이러한 목표를 설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KMK는 여성노동자문제
즉 KMK의 조직 목적에 충실하기 보다는 노동조합을 조직하는데
주력했고 KMK를 강화하는 보조작업을 수행하였다. KMK는 KMU
여성부를 대변하고 있었고 KMK의 의장과 사무국장이 KMU의
중앙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90년 초까지 KMK는 KMU의
일선에서 노동자 조직에 열중하였고, KMU의 투쟁과 조직에 늘
함께 하였다. 탄광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할 때 KMK는 KMU의
가족투쟁조직을 도와서 노동자 부인들의 교육활동을 지원하는 등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KMK는 1년 후인 86년부터 시작된 토론을 통해 그 이듬해 KMU와
합병한다. 즉 KMK는 KMU 여성부 역할을 하면서, KMU의
가입단체가 된다. 회원수도 점차 늘어나 5,000여 명에서 90년 초
20,000여 명에 이르렀고,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회원들을 중심으로 탄광촌 여성노동자들과 광산노동자
부인들까지도 조직하게 되었다.
KMU는 이렇게 많은 주변조직의 격려와 협력 뿐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가 전개한 많은 투쟁을 통해 창립되었고, 필리핀
노동운동을 지도해 왔다. 그 결과 10개의 연맹이 가맹하였고
조합원은 100만명 가까이 되었다. 조합원 수는
필리핀노동조합회의(TUCP)의 조합원수 150만에 비하면 적은
숫자이지만 큰 힘을 갖고 있는 조직이었다.
연대운동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우리는 필리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구라파나 미국에 가면 아주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있고,
NDF와 KMU 연대그룹들이 필리핀에서 파견된 사람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의 활동은 NDF의 입장과 활동, 그리고 필리핀의
사회․정치문제를 알리는 선전 역할을 주로 한다.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은 모금운동이다. 내가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필리핀
지원 그룹을 만났을 때 그들은 일인당 50~100불(US달러)의
지원금으로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활동가 한명의 활동비를
보조하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 그룹은 2년에 한번씩
필리핀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불러서,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필리핀 현지 현황을 보고하도록 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KMU는 국제적인 노동조합조직들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소속
연맹들은 이들 국제조직에 가입하고 있다. KMU가 국제조직에
가입하지 않는 이유는 국제 조직들이 변색되어 노동자를 위한
진정한 노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조직에 가입하기 보다는 구라파와 선진국의 진보적인
운동단체와 동등한 위치에서 연대하면서 KMU의 입지를 넓히는
연대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KMU는 세계 노조운동을 강화하는데
제3세계 노동조합이 갖는 역할이 크다고 보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자들의 국제 협력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노조운동의 새로운 방향과 새로운 동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90년 초에는 새로운 국제 노동조합조직의 꿈을
안고 기존의 국제 노조에 대해 비동맹 노선을 걷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노동조합연맹(COSATU), 브라질의
전국노동조합연맹(CUT)과 ICFTU에 가입되어 있는 호주 서부
노총 등과 매년 회의를 갖고 의견교류와 연대를 해왔다. 한국의
전노협도 93년부터 참관단체로 참여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회의 명칭은 The Indian Ocean Rim Conference 였다.
KMU는 이 연대회의가 지구의 남쪽 노동자 연대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남쪽의 노동조합들이
힘을 갖게 될 때 미국의 신세계 질서로부터 노동자와 민중을
보호할 수 있고 새로운 국제 노동조합조직들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KMU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진보적 노동조합들의
발전과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노동자연대를 증진시키는데
호주의 진보적인 노동조합들이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KMU의 구체적인 국제연대 방식은 노동자들의 투쟁 소식을 널리
알리고 노조탄압에 대한 연대정신을 표하는 한편, 재정적으로
이들의 투쟁을 돕고 있으며, 정부와 자본의 공격에 대하여
반대하고 압력행사를 전개하는 세력들을 조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노동자와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경험을 교류하여 선진국 노동자의 의식을 높이는 사업도 전개할
방침이었다.
노동운동의 위기와 비판적인 시각
400년 간의 식민지와 미국의 지배 하에서,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과 암살이 횡행하는 상황속에서도 조직을 꾸준히
유지․발전시켜 온 필리핀의 민족민주운동노선의 일선에서
노동자운동을 전개한 KMU!
전세계적으로 사랑과 기대, 지원을 한몸에 받았던 이 거대한
조직이 90년에 들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80년대에 그 많던
집회와 해마다 실시해 오던 ‘5월 국제연대집회’를 소집조차
하지 못하고 모든 활동이 마비된 지 벌써 4~5년이 되어 가고
있다. 86년 2월 대선에서의 행동방침이 현재의 KMU로 오게 된 한
요인이 되었다.
86년 2월 대선에서 KMU와 NDF 등은 보이콧 방침을 선언하고,
거리와 벽에 보이콧 방침을 선전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반면 교회와 다른 단체들은 이 방침을 거부하고
선거에 적극 참여했고 교육․선전활동과 선거감시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나갔다.
KMU와 NDF 등의 보이콧 방침은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자신들의
영향력하에 있는 대중적 세력과 다른 정치세력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거나 완전한 무방침, 무실천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늦은
오후에 투표장소에서 여러 형태의 가능성과 국민의 적극성을
보면서 지하 조직의 조직원들은 개별적으로 투표에 참가했다.
선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자 민중들은 NDF와 KMU가 상황을
바로 보지 못했다고 비판을 하게 되었고 자체내에서도
책임추궁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NDF지도자들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아주 강했다. 그해 11월 올라리아 KMU의장의 장례 집회에
NDF의 지도자인 오 캄포씨가 처음으로 대중들앞에 등장했다.
한편으로 그때 나도 그 대열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모습은
아주 강인하면서도 유머가 있었다. 물론 NDF단원들에게 경호를
받고 있었으나 가는 곳마다, 심지어 빌딩에서도 “오 캄포!
사랑해요!” 등이 외쳐졌고 열광하는 군중을 대하며 그가 얼마나
민중들의 기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한편 아키노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하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공개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NDF내부에서도 산에서 내려와
정상적인 생활과 합법적인 투쟁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지하조직
운동가들이 늘어났다.
반면에 네그로스섬, 과민단나오섬 등에서는 휴전 협정을
무시하고 무장투쟁전략을 고수하며 정부군과 무력충돌을
계속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NDF와 CPP 안에 뚜렷한 두 개의
노선 - 공개운동 중심의 노선과 무력투쟁 중심의 노선 - 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노동조합운동 내부에서의 비판
그동안 KMU는 노동조합의 현장 활동을 지도하였지만 일상활동을
통한 변화를 시도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발전했지만 노조의 일상활동에 대한 지원 부족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환경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1990년 6월 한국과 필리핀 여성노동자들 간에 교류프로그램을
진행하였는데, 10일 동안 필리핀의 현장 방문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한국 참여자들은 “그들의 정치의식은 상당히 높으나
그들이 일하고 있는 현장, 작업장의 문제들은 그대로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노동자들의 작업장 문제들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생활임에도 항상 정치적인 이슈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86년 이후 증가하는 단위노조와 연맹들에 대한 의식화
교육 등 조직관리를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 KMU와의 교류
회수는 많았지만 교육 담당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KMU의 기본
교육에는 시청각 교육이 많았으나 효과적이지 못했다. 시청각
교육은 주로 초보자 교육용으로 사용되었고, 강의 방법은 절반
이상이 교육실에 녹음기를 틀어 놓고 강사없이 강의를 몇 시간씩
듣는 식이었다.
숫자를 늘리는 데 급급해서 노동자들의 의식수준 향상과
내부조직 강화를 위한 사업에는 소홀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농성장이나 노조사무실을 방문해도 대외관계를 하는
사람이나 간부들 외에는 이야기하기를 꺼려하고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생각들을 원활하게 현장에 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훈련이
부족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것들은 1989년 중국
천안문사태에 대한 KMU 지도부가 행한 행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에 대해 KMU는 즉각 그들의
입장을 발표했다. 그들은 중국 정부에 대한 행위에 지지성명을
발표했고 이 발표 이후 노동자들의 불만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비난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컸다. 그럼에도
KMU는 또다시 중국 정부에 대한 지지의지를 발표했다. 이에
파문은 더욱 커져 갔다. 심지어 국외에서는 KMU에 보내던
후원금까지 중단하였고 국내에서는 학생들과 KMU하부조직들이
KMU본부에 몰려가 항의집회를 갖고 지도부의 사과와 발표 철회를
요구하는 강력한 항의를 함으로써 비민주적인 KMU의 지도체계에
대한 비판을 노골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비판을 받으면서
KMU는 그들의 입장을 변경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받은 타격은
컸다.
그 후 KMU가 주관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인원이 줄었을 뿐 아니라
단위 노조들의 조합비 납부 거부라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졌다.
86년 이후 KMU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KMU가 주도하는 총파업에
참가해 왔던 조직들과 참가는 하지 않아도 지지성명을 발표하며
연대해 온 노조들이 KMU와의 연대를 단절하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심각하게 분열되어가자 KMU는 당분간 내부조직 결속에
힘을 쏟겠다는 방침과 함께 92년 말에 조직 다지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런 지도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벌어진 관계는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KMU 조직은 NCL(National Confederalion
of Labor), BMP(필리핀노동자연합) 등 3개의 조직으로 갈라지게
된다.
NCL(National Confederation of Labor)은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비민주적인 KMU 조직과
지도부에게 더 이상 노동자 조직을 맡길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이 말하는대로 나 자신을 잊어버린 채 맹종하며
따라가지 않겠다.” 그들은 비민주적인 KMU의 지도부를 비판하며
민주적인 자주노동조합을 건설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BMP의 조직원은 대체로 마닐라에 있는 노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BMP는 필리핀공산당(CPP)의 정치노선을 반대하며
노동자층으로부터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마르크스
이념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로서 전체 조직원이 100만명도 채 되지 못했던 KMU 조직이
3등분되었다. 조직규모를 보면 KMU가 가장 크고, 그 다음이 NCL,
BMP 순이라고 한다. 분열은 단지 노동운동에서만이 아니었다.
농민, 학생, 문화 등 모든 부문운동이 분열되었다.
분열 후 KMU의 자세
조직분열 후 NCL과 BMP는 사안별로 연대하여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NCL과 BMP는 1994년 초 TUCP와 함께 GATT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KMU는 NCL과 BMP에 대해
“어용노조인 TUCP와 손잡은 두 연맹은 어용노조와 같다”고
비난하면서 “이런 조직과는 절대로 연대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두 단체를 결코 만날 수 없는 적으로
치부했다. 이런 KMU의 행동들은 주변 연대단체들에게 실망을 줄
뿐이었고, 이후 KMU 활동에 동력이 붙지 않게 되는 요인이기도
했다.
KMU에 대한 연대의 문턱은 아직도 높다고 한다. 그들은 다른
조직들의 조직가들에 대해 감시와 비난을 하고 있는데, 이런
행위는 노동자를 더욱 멀어지게 할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KMU에 대한 교육지원을 하던 EILER(Ecumenical Institute for
Labor Education and Research, 노동자 교육과 연구를 위한
연구소) 등도 KMU를 위한 교육보다는 미조직노동자 등을 위한
교육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도 하였다.
KMU의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낮은 관심
필리핀에서는 여성들이 수많은 각종 단체들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KMU에서도 여성들이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왔으나 KMU가 여성노동자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조합원의 70%가 여성노동자들임에도 여성 중앙의원은 단 4명
뿐이었다. 중요한 의사결정기구에 여성의 참여가 너무 낮다는
비난에 KMU의 부위원장은 남성우월주의와 봉건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여성 스스로가 가정 위주의 의식(가정중심의 사고,
가정에서의 역할을 1차적인 본연의 임무로 사고하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KMU가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KMU에 대해 여성조합원이 과반수를 넘게 차지하는데도
여성지도자를 발굴, 육성하기 위한 아무런 계획도,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미혼이었다면 80년에는 거의 기혼자들로
바뀌었다. 노조는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 무관심함으로써
여성노동의 변화와 흐름에 따른 정책대안들을 세워내지
못했다.
여성노동자들은 노조활동 참여에 장애가 되고 있는 가정과 육아,
출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요구했지만, KMU에서는
항상 무시되어 왔다.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KMU가
여성노동자들에게 남성과 동등하게 노조활동에 참여하라는 것은
아이를 업고 경기장에 나와 경주를 하자는 것과 같은 논리라고
말한다.
20여년의 청춘을 지하조직에 몸담고 민족민주운동을 전개해 온
한 친구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그녀는 20대에 교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NDF에서 조직과 교육활동에 전념해 온 사람이다. 그는
NDF나 CPP가 각 단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들이 정하는 모든 정책과 계획이 각 공개 단체에 미치는
영향은 마치 조개껍질과 조갯살과 같다. 조개껍질이
공개조직이고 그 안에 있는 살이 NDF다. 조직안에 3~5명의
회원이 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그러기에 지하
조직안에서의 정책변화를 통해 여성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되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 3년후 아이를 갖게 되자 출산휴가를
받았으나 그 후에도 도와주는 부모가 없으면 아이 때문에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이를 3년 동안 키우고 조직에
돌아오니 자신과 함께 시작한 동지는 높은 자리에 있었고 본인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처지를 자신이 체험하면서 여성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탁아사업이 아주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조직에 요청하였으나 번번이 외면당해 왔다고 한다. 별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작은 규모의
탁아소를 설립하여 운동가들의 아이들을 12~24시간 동안 맡게
되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탁아소가 너무 없다 보니 이
탁아소가 정부의 표적이 되어, 탁아소의 아이를 통해 부모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지하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색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KMK가 산전산후 유급휴가와 부모휴가 등을 요구하며 싸울
때도 KMU는 힘을 싣지 않았다.
그 후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KMU가 여성부를 92년에
설립하게 되면서 KMK는 KMU조직에서 독립해서 나오게 된다.
그때부터 KMK는 KMU에 조직된 노동조합 활동을 KMU의 여성부에
넘기고, 미조직 사업장과 TUCP 등에서 여성노동자를 조직하고
의식화하는데 힘쓰고 있다.
물론 아시아에서 KMU는 여성문제에 그래도 힘을 기울이고 있는
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제일 잘하고 있다는 평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KMU는 국내외 단체 특히 여성단체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조직 분열 후 NCL과 BMP는 여성부를 강화하였고, 여성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남성조합원 교육에 여성문제를 결합시키고 있다고
한다.
노동조합이 계속 여성노동자가 겪고 있는 문제를 무시하거나,
여성노동을 둘러싼 주변 상황의 변화와 흐름에 둔하게
대처한다면, 그리고 여성노동자 문제에 대한 정책적인 사고와
조직적인 사업의 전개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부분운동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성노동자 사업에 대한 목적의식적인 사업과 조직내부에서의
정책적, 조직적, 재정적인 지원이 적극적으로 실시되지
않는다면, 결국 노조운동 전체의 힘이 약화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실제로 구라파에서는 노조조직 내부에서 여성사업에
대한 소극성으로 인해 조직원이 감소되자, 이러한 현실을
진단하면서 노조 조직 전체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여성노동자
문제에 대해 힘을 싣는 정책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또한 조직되어 있는 사업장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영세하청의 미조직 노동자들의 요구 또한
주의깊게 받아들이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 힘을
실어야 할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노조운동의 발전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평등을
구현해 나가는 과정이었고, 이러한 인간성의 회복은 소외되고
차별받는 여성들이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서 다시 서고, 남녀가
차별과 대립이 아닌 협력과 우애의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세계사적인 흐름속에서 이제 여성노동자의
어려움에 귀기울여 진정한 동지애를 갖고, 여성노동자의
조직화와 여성사업에 대한 방침과 관점을 수립하고 조직, 정책,
인력, 재정에서 과감한 배치를 아끼지 않는 그런 노동조합운동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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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06-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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