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경과 속에 나타난 2005년 현대자동차 울산 비정규직 투쟁 쟁점: 정규직-비정규직3 |
현장에서 미래를 제1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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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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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정규직-비정규직3
투쟁경과 속에 나타난 2005년 현대자동차 울산 비정규직 투쟁
서인혁 / 노동자
1. 불법파견 진정 사업 실시
경과
03년 12월 23일 금속연맹 정기대대에서 금속연맹 상반기
주력사업으로 ‘릴레이식 금속연맹 사업’으로 결의됨에 따라
불법파견 진정사업이 진행되었다.
비정규직노조와 금속연맹 공동으로 불법파견 진정서를 접수(04년
5월 27일)하였고, 8월 20일 현대차노조가 불법파견 진정서를
접수하였다.
상황
비정규직노조에 가입한 조합원 400여명, 조합비 납부 조합원은
200명 정도였다. 비정규직노조는 불법파견 진정을 시급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늦어질수록 사측의
대응으로 불법파견이 엄폐되고, 파견 판정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결집이 빨라질 수 있다는 등이었다.
현대차노조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며 진정서 제출이
당장이 어렵다고 했다. 그 이유는 몇몇 업체가 아니라 전 업체를
조사해야하므로 방대하고, 진정판정을 얻기 위해 구체적인
실사를 들어가야 한다는 등이었다.
결과적으로 비정규직노조는 5월에, 현대차노조는 8월에, 각각
불법파견 진정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2. 불법파견 판정 이후
경과
04년 9월에 불법파견판정이 남에 따라 공정분리 및 배치전환
금지 지침(현대차노조)이 내려지고, 현대차 연대회의(정규직,
비정규직 단위 회의체) 구성이 본격화되었다.
상황
비교적 풍부한 현장조사로 인해 불법파견 이후 현대자본이
일방적으로 공정을 변경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자본은 일부 개인을 배치 전환하는 조치를 취함에 따라
‘공정분리 및 배치전환 금지 지침’이 내려졌다. 현대자본은
개선계획서를 제출했지만, 말뿐인 립 서비스 수준이었다.
비정기적으로 현대차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소통구조를
가져갔지만, 정기적이고 공식적인 구성은 아니었다. 진정서 제출
직후인 8월 20일 현대차 연대회의가 구성되고, 불법파견 판정
이후 진행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나 현대차노조와 비정규직노조의 불신은 이미 깊어질 때로
깊어진 상황이었다. 비정규직노조의 불신의 이유는 현대차노조가
비정규직 투쟁에 의지가 없다는 것이었고, 현대차노조의 불신의
이유는 비정규직노조가 현대차노조 발목잡기식으로
비정규직투쟁을 하고 선명성 선언만 한다는 것이었다. 두 노조의
불신은 정파적 문제와 감정적 문제까지 겹쳐 극복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 시기부터 불법 파견된 집회를 비정규직노조 중심으로
진행했고, 현대차 연대회의는 성명서와 기자회견 등을 진행했다.
이 시기는 폭넓은 대중투쟁을 조직하기보다 선언적 투쟁이
상정되었다. 비정규직 조직화 방안에 대한 의견들이 조심스럽게
나타났지만, 이것이 대중적으로 공개되고 토론되지 않았다.
3. 2004년 1월 잔업거부 투쟁과 최남선 분신
경과
대중집회가 진행되었지만, 실제 현장을 장악하는 투쟁이
전개되지 않았다. 2005년 1월 20일 비정규직노조는
잔업거부투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18일 5공장에서 현대자본의
폭압적인 노무관리에 대한 반발이 전공장 잔업거부투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4일만에 잔업거부투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22일(토)에 최남선동지가 현대차노조 사무실에서
분신했다. 24일 현대차 임시대대에서 현대차 연대회의가
공식기구로 구성되었다.
상황
비정규직노조는 지속적으로 선도투로 인한 불파투쟁의 확산을
주장했고,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이 조직화되지 않았고, 현대차
조합원의 불파투쟁에 대한 이해가 낮은 상황에서 선도투는
현장을 냉각시킨다는 주장을 했다. 의견이 조율되지 못하고
비정규직노조는 잔업거부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정규직 노조
집행부에 의해 비교적 현장 조직이 잘되어 있었던 5공장
중심이었다.
현대자본이 5공장에서 잔업거부에 대비해 일용직을 고용하는
것이 확인되었고, 반발한 비정규직노조 대의원이 해고되었다.
18일 급박하게 잔업거부투쟁이 전공장으로 확산되었다.
현대차노조는 ‘대체인력투입금지’ 지침을 내린 상황이었고,
‘대체인력투입금지’ 지침이 사업부별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사측의 대응에 비해 조직투쟁력이 약해 3일만에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5공장 투쟁의 경우 라인을 정지하지 못하고 밀려나자,
옥쇄파업에 돌입했다. 투쟁전술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비정규직 집행부는 불파투쟁을 확대하기 위해 선도적인 투쟁을
확대해야 한다고 했고, 현대차노조는 무리한 선도투는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5공장의 투쟁은 고립되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현대차노조와 비정규직노조의 대립뿐
아니라, 비정규직노조 집행부(5공장 중심)와 반집행부 세력(1,
3공장 중심)의 대립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월 잔업거부가 실질적으로 파괴된 주말(22일) 최남선동지가
현대차노조 사무실에서 분신했다. 최남선 동지가 밝힌 분신의
이유는 ‘잔업거부 투쟁이 파괴되는 상황에서 투쟁동력이 다시
올라오는 것과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원해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최남선동지의 분신은 결국 투쟁의
도화선이 되지 못했다.
현대차 연대회의 힘을 싣기 위해 현대차노조 공식기구를 추인
받는 것이 공론화되었다. 현대차노조는 책임지는 단위는
현대차노조밖에 없다는 이유에서
공동투쟁·공동결정·공동책임을 제기했고, 비정규직노조는
현실적 힘이 현자노조에 있는 상황에서 공동책임이라는 것은
비정규직노조의 발목잡기 혹은 자주적 권한을 침범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공동투쟁·공동결정·공동책임의 기조하에
현대차노조 임시대대를 통해 현대차노조 연대회의가 공식기구로
추인되었다.
4. 현대차 연대회의 공론화와 비정규직 조직화
경과
1월 잔업거부투쟁 이후 현대자본은 불파투쟁 관련자에 대한
폭력, 해고, 고소·고발을 가했다. 비정규직노조는 5공장
옥쇄파업 중심으로 활동을 진행했지만, 현장은 쉽게 조직화되지
않았다. 현대차노조는 활동가 대상 간담회를 중심으로 한 정규직
대상 교육사업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현대차 연대회의에서
불파투쟁의 전술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경로에
대해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5월이 돼서야 조직화사업이
본격화되어 약 2000명(울산공장)이 조직되었다. 현대차
연대회의는 불파특별교섭을 현대자본에 요구했으나, 현대자본은
교섭대상이 아니라면서 불참했다.
상황
현대자본은 1월 잔업거부투쟁을 계기로 현장탄압을 노골화했다.
비정규직 주요 활동가에 대해 해고를 가했고, 정규직 활동가는
고소·고발 등 징계를 가했다.
특히 5공장 옥쇄파업자에 대해서는 무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실질적인 감금상황으로 변했다. 해고자를 중심으로 천막투쟁을
시작했으나, 5공장은 기존의 옥쇄파업을 지속했다. 이로서
비정규직노조 내부의 대립은 더욱 표면화되었고, 힘은
분산되어갔다.
현대차노조는 대의원 대상 교육과 민주노총 일정 중심으로
움직였다.
현대차 연대회의는 비정규직의 폭넓은 조직화사업이 대두가
되었다. 비정규직노조는 대규모 집단가입을 통한 조직화사업이
힘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다고 했고, 현대차노조는 투쟁단으로
조직을 해야 정규직노조의 조직력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3~4개월 논의 끝에 투쟁단으로 조직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에 따라 5월부터 조직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각
사업부 대의원회가 중심이 되어 조직화 사업을 진행했는데,
1공장대의원회는 비정규직노조 가입과 동시에 조직화사업을
진행함에 따라 조직화 사업은 비정규직노조 가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공장대의원회의 조직화사업은 전공장으로 확대되었다.
울산공장 2000여명, 현대차 전공장 3000여명이 조직화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맹점이 하나 있었는데, 불파투쟁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 조직이라기보다 직면한 고용유지를 위해 가입한 인원이
다수였다.
곧바로 이 맹점을 어떻게 보완하느냐가 비정규직노조의 화두가
되었다. 비정규직노조 집행부는 투쟁동력이 소멸되기 전에
직접적인 현장투쟁을 주장했고, 반집행부 세력은 집행체계 전면
선거와 함께 가입인자에 대한 재조직화 사업을 주장했다.
비정규직노조는 임시대대를 통해 집행부 선거를 제외한 대의원
선거만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5. 현대차 노조 임단투와 산발적 투쟁
경과
조직화 사업진행과정과 직후, 현대차 임단투와 불파투쟁의
결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각 주체들의 의견이 통합되지
못하고, 각계약진하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상황
조직화사업이 진행되는 시기와 함께 현대차노조는 임단투 시기로
접어들었다. 현대차 임단투와 불파투쟁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폭발되기 시작했다. 이 때 각 주체의
상황에 따라 제기되는 주장이 상이했다.
현대차노조는 임단투와 불파는 별개의 문제이며, 현대자본을
불파특별교섭에 이끌어내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비정규직노조는 임단투가 종결되면, 불파투쟁에 힘이 실릴 수
없다며 임단투 시기 강력한 투쟁을 요구했다. 전주하청지회는
대중투쟁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며, 정규직·비정규직의
공동대중투쟁을 주장했다. 각 주체간의 의견조율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요일정을 공동진행하는 정도로 논의는 마무리되었다.
비정규직노조는 조직화 사업과 대의원 선거 이후 7월 쟁의행위에
돌입하면서 노동부에 쟁의조정신청서를 제출했다.
쟁의조정신청서 제출에 대한 반론이 일어났는데, 현대차노조는
현대차 연대회의의 공동투쟁·공동결정·공동책임 정신이라고
비판을 가했고, 비정규직노조 반집행부세력은
쟁의행위조정신청이 투쟁을 조직하기보다는 현대자본의 반격의
기회만 높여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8월초 현대차 여름휴가 전까지 현대차노조 임단투와 불파관련
집회가 이어졌다. 각 집회에 비정규직 700여명이 꾸준히
참여했는데, 주야맞교대를 감안하면 조직화 인원 70%정도가
결합하는 성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과 함께 하는 집회여서, 이것이 불파투쟁의
현장투쟁 동력이 될 수 있는가는 미지수였다. 현대차노조는
불파투쟁을 임단투일정에 포함하면서 진행을 했고,
비정규직노조는 가시적인 투쟁계획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휴가
전까지 반복되었다. 여름 휴가 이후 투쟁동력이 감소하는 것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현대차노조는 8월 여름휴가 이후 임단투 쟁의행위 수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불파투쟁이 힘이 모아지지 않았지만,
비정규직의 내제된 힘이 폭발하면서, 고용과 관련된 문제로
3,4공장에 투쟁이 폭발했다. 그러나 이 투쟁이 모아지지 않고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말았다.
비정규직노조는 현대차부분파업보다 2시간 먼저 부분파업에
돌입하는 지침을 내렸으나, 1월 잔업거부 투쟁만큼의 생산타격을
가지지 못했다. 1월 잔업거부와는 달리 정치근무 파업이라는
부담감, 산발적으로 진행될 뿐 모아지지 않는 투쟁,
현대차노조의 임단투 몰입, 비정규직노조 내부의 입장차이 등
여러 가지가 원인이 된 것이었다.
6. 류기혁열사 자결과 현대차 임단투 종결
경과
9월 4일 비정규직노조 사무실에서 류기혁열사가 자결했다.
열사규정논란이 일어났으나, 오히려 현대차 내부는 조용했다.
9월 8일 불파특별교섭 진행 합의를 포함해 현대차 임단협은
잠정합의 되었다.
상황
불파투쟁은 임단투와 함께 폭발시켜내지 못함으로 패배감이
팽배하기 시작했다. 현대차노조는 불파특별교섭을 이끌어내는
것에 주력했고, 비정규직노조는 실질적인 투쟁계획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조직화된 인원은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추석휴가가 다가옴에 따라 임단협 타결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9월 4일 류기혁 열사가 비정규직노조 사무실에서 목을 매고
자결했다. 그러나 유서가 발견되지 않고, 유가족이 가족장으로
치루는 것을 원하는 등 류기혁열사의 죽음 앞에 ‘열사냐
아니냐’는 논란이 가속되었다. 현대차노조는 열사논쟁에서 발을
빼는 모습(열사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고,
비정규직노조는 현대차노조에 모든 공을 넘겨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열사규정논란이 증폭되었지만, 어떤 실질적인 힘으로
결집되거나 조직되지 못하면서 임단협 종결과 함께 불파투쟁의
한 단락이 정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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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7 02: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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