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본론을 이렇게 읽는다” 1월17일 강좌를 듣고 |
현장에서 미래를 제1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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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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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후기
“나는 자본론을 이렇게 읽는다”
1월17일 강좌를 듣고
콩!!!
기획강좌 한노정연 2006년 제1차 기획강좌. 이 글은 기획강좌의
2주제: 나는 자본론을 이렇게 읽는다 - 1.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총체적 비판(강사 남구현) 강좌 후기입니다.
를 들으면서 나름의 목적과 원칙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 원칙 중
하나가, 꼬박꼬박 주요 내용과 생각들을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두는 것입니다.
그걸 여기에 올리는 것은, 저를 비롯한 참여자들께서 ‘청중’에
머물지 않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후기들이 이어지면 좋겠고, 매번 강좌에서 쌓여갈 부족한
점들을 ‘그러려니’하고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자본론 읽기모임을 갖고 계신 분들이 아니라면,
‘자본론 읽기’의 목표나 방식에 대한 공감대(꼭 일치하지
않더라도)를 바탕으로 나중에 자본론 세미나팀까지 함께 할
동지들이 바로 여기 참여자들 속에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 강사는 자본론의 1권은 잉여가치에 대한 규명, 2권은 그
잉여가치가 어째서 자본에게는 이윤으로 자리매김하는지에 대한
규명, 3권은 계급으로 이어지며 발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런
점에서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총체적 비판’이라는
것이 강사의 결론이며, 그 비판으로부터 다시 ‘무계급사회로의
전망’으로 나아가는 ‘자본론 읽기’를 제안했다.
* 또한 발제문에는 ‘자본론을 읽으면서 도그마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유방식을 읽어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강사는, ‘자본론에서 맑스는 변증법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구사하고 있다. 철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고
있다’고 부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본론 읽기”
역시, 읽기 그 자체가 아니라(이른바 ‘완독’의 신화화,
신비화), 실천으로 남기는 데 자리매김,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 강사는 엥겔스의 사례를 들어 오독의 문제에 대해, 오독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동시에, 스스로 바꾸고 변형시키는 적극적인
읽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강사는 ‘사유의 구체성’에 대해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추상적 범주 규정이 과학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그 예로 사회양극화라는 현실을
설명하는데 ‘총인구수’나 ‘연령’ ‘성별’ 등의 범주를
사용하는 경우, 맞지 않거나 불충분함. 추상 범주로서는
존재하지만, 구체로 상승하기 위한 ‘사유의 구체성’이
부족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들었을 때는 이해한 것
같았는데, 하루 지나고 보니 이해가 덜 된다.
* 강사는 ‘맑스의 저작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적었고, ‘이것으로는 모자라지 않을까’하는
초조함에 대해, ‘자신이 아는 진리를 백퍼센트 채우는 데
집착하면 끝이 없다’고 평하고, 그게 아니라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실천적인 시도, 즉 내가 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시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럴
때 비로소 생활/삶과 ‘자본론 읽기’가 만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동의한다.
다만, 이런 말에도 불구하고, ‘자본론 완독’의 신화화/신비화
요소가 남아있다고 느꼈다. 얼마 전 소책자를 만들면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을 다 담도록 노력하자’는 의견을 담기
위해 애쓰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일상 속의 구체적
활동으로 담지하기’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나의 깨달음을
넘어서 나와 우리의 생활/삶 속에서 그런 시도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운동일 터, 자칫 ‘깨달음의 어려움, 지난함’에
압도되지는 말아야겠다.
* 맑스가 ‘이제 철학의 땅을 떠난다’고 말하였다면서, 이는
철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철학이 작동되는 토대의 한계를 비판한
것이라고 했다. 강사는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기능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기능하고 있다’라고 해석하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이데올로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 강사는 ‘전망없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무계급사회로의
전망’이 맑스의 큰 공적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은 무계급사회에
대해 ‘자본주의 모순이 해결되는 경우에는 이런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해석했다고 말하면서 ‘이미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의 모습에서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노동운동 안에서 이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을 지양하고 있다거나, 가족 안에서 작동하는
노동과 분배의 원칙 등을 예로 들었다.
‘능력껏 일하고 필요껏 분배하는 가족’에 대해 나중에 짧은
토론이 있었는데, ‘예시의 의도는 알겠으나 한계가 있다’는
비판을 제기한 이들 역시 ‘비판의 의도는 알겠으나’ 그 초점을
잘 전달하는데 실패했거나, 포기했다고 느꼈다. 하여 이 토론은
‘예시의 의도는 알겠으나’라고 전제한 비판 의견들이 그
뒷말의 초점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강사는 그들의 전제를
듣지 못하고 ‘예시의 의도’를 되풀이 말하면서, 토론은 다소
공전되었다.
나는 ‘가족은 자본주의가 갖는 모순들을 은폐하는 도구나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구실로 쓰인다’는 맥락의
비판을 들으며 다음과 같이 메모했다. - 자본주의가 가족을
활용하는 지점을 포착하고 지양하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본다.
혈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우리의 지향인가. 가족 또는
‘가족적 책임’의 전제가 혈연과 본성이라고 규정하고, 그런
전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을 용납하지 않는 것, 그래서
절대화시킨 그 본성 위에 각종 굴레를 씌우는 자본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 강사는 공산주의는 미래에 도달할 ‘상태’가 아니라
‘현실운동’이라고 말하면서 예수가 ‘천국은 너희 마음에
있다’고 했던 말도 그렇게 재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의 믿음이란 ‘예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나의 의견과 비슷하다고 본다. 살아오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사람을 낚는 어부’,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음’ 등의 구절들을 계속 새롭게 재해석하게 된다.
자본을 읽고 나면, 다시 한 번 성경을 읽으리라고
마음먹어본다.
이런 생각과 함께, ‘건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메모했다. -
건강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운동, dynamics를 말한다.
강좌를 들으러 가기 전, 몇몇 자료들을 읽으면서 자본이
‘고성과와 건강’ 따위로 재해석/재전유하려는 시도에 참
집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저들은 이미 건강의 운동성(정태가
아니라 동태라는 점에서)을 흡수하여 그들 나름의 실천적인 시도
속에 녹이려 하고 있다. 우리의 시도들이 더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건강론은 터무니없이 허술하다. 건강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구사’하는 역할은 다른 누구에게 맡기고
기다릴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가 하기로
한 일임을 상기하자.
* 무난했고, 그 무난함이 문제라고 굳이 각을 세우고 싶지
않았던 강좌였다. 그러기에는 내가 이 강좌에 두고 있는 일정한
거리감이 있을 것이다. 나와 한노보연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많이 건진 강좌였다. 이 강좌에는 강사 뿐 아니라 그의
말을 듣고 재해석할 나를 비롯한 참가자들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이 강좌를
듣는 나의 목적은 ‘자본론을 어떻게 읽을까?’에서 ‘자본론을
이렇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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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7 18: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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