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노정연 > 현장에서 미래를 > 글읽기 ]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의 비판에 답한다
 반제반세계화운동 관련 다함께 비판에 대한 반비판

현장에서 미래를  제118호
정병호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의 비판에 답한다.

정병호 / ‘다함께’ 서울대 모임 회원




지난 ≪현장에서 미래를≫117호에 실린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이하 학사정연)의 ‘다함께’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고자 한다. 본격적으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지적해야할 것이 있다. 토론과 논쟁을 제대로 하려면 정확한 사실 관계에 기초해야 한다. 그런데 학사정연의 ‘다함께’에 대한 비판은 기본적인 사실 관계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지레짐작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문맥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말꼬투리 잡기 식으로 비판하는 구절도 있다.(자세한 내용은 글 중간에 지적하도록 하겠다.) 이런 식으로는 합리적인 논쟁이 될 수 없다.

현재 학사정연과 우리와의 논쟁 구도는 크게 4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듯하다. 반부시·반아펙 투쟁의 성격,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위상과 영향력,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관계, 인민전선과 공동전선 등이 쟁점에 속한다.

반부시 투쟁은 민족주의적인가

학사정연은 ‘다함께’가 반아펙 시위에 열성적으로 참가하여 반부시 슬로건을 강조한 것에 대해 민족주의적 실천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반부시 투쟁을 다 싸잡아 민족주의적이라 할 수는 없다. 반부시가 ‘미국 반대’와 동일어는 아니다.
민족주의는 지배자와 피억압 대중을 구분하지 않고 단일 민족이라는 공통점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는 반제 투쟁에서 두 가지 그릇된 실천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자와 그 나라 피억압 대중을 동일시하여, 둘 모두에 반대할 위험이 있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무고한 민간인을 그 대상으로 포함한 테러리즘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그보다는 정도가 심하진 않지만, 추상적인 ‘미국 반대’ 슬로건 또한 노동 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저해할 수 있다. 민족주의는 설령 저항적 민족주의이더라도 민족 구분과 국경을 넘어선 노동 계급의 단결을 저해할 위험이 있다.
둘째, 민족주의는 민족 구성원 간 이해 관계의 공통점이 존재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노동 계급으로 하여금 지배 계급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즉, 계급 협력 전략인 인민전선의 위험이 있다. 가령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 관계 문제에서 지배 계급 내 일부 분파와 동맹을 맺으려 하는 것이 그러한 예다.
학사정연이 주장하듯 반부시 투쟁 그 자체가 민족주의적이라면, 이와 같은 두 가지 오류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부시에 반대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남한 지배 계급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부시 반대’는 미국 국민 전체에 대한 반대로 느껴질 만한 구호도 아니다.
물론 반부시 투쟁을 건설했던 주요 단체들 중에는 좌파 민족주의 단체들이 많았다. 그러나 반부시 투쟁 내부의 일부 경향이 민족주의적 한계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반부시 투쟁 전체를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반부시 투쟁은 민족주의이기는커녕, 국제 연대 운동의 상징이다. 심지어 미국 내에서도 작년 9월 24일 30만 명의 시위대가 워싱턴에서 반부시 시위를 벌였다. 칠레, 영국, 남한, 아르헨티나, 인도 등 부시가 가는 곳이라면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부시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런데도 반부시 투쟁이 민족주의적인가?
좌파 민족주의적 관점은 반부시 투쟁의 일부일 뿐이다. 좌파 민족주의와 달리 민족 분단이 아니라 계급 분단을 근본적 대립으로 여기는 맑스주의자들은 반제 투쟁에서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자와 그 나라 피억압 대중을 구분하여 접근한다. 맑스주의자에게 전자는 타도의 대상이고, 후자는 연대의 대상이다.
그리고 특정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다른 제국주의 국가나 자국 지배 계급에 의존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 모두 제국주의 위계 체제의 사슬에 긴밀히 연결돼 있으므로, 타도의 대상이긴 마찬가지다.
‘다함께’는 이러한 맑스주의적 국제주의 관점에서 반부시 투쟁을 건설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작년 9월 24일 워싱턴에서 열린 30만 반부시 시위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널리 알리려 했다. 반전 국제 행동 조직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도 노무현 정부의 파병 시도에 맞서 가장 앞장서서 싸워왔다.
학사정연은 ‘다함께’더러 “민족주의자”라고 비판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반부시를 민족주의와 동일시하는 학사정연의 논리야말로 지배자와 피억압 대중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좌파 민족주의적 관점의 거울이미지에 불과하다.

반제국주의 투쟁과 반부시

학사정연은 또 다른 측면에서 반부시 슬로건이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한다. 반부시 슬로건이 올바른 슬로건이 되려면 “전쟁과 세계화의 수혜자는 오로지 부시정권과 미국이며, 이를 제외한 제반의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은 모두 미국과 부시의 꼭두각시라는 조건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반부시 슬로건이 환원주의 아니냐는 식이다.
그러나 좌파 민족주의처럼 모든 문제를 ‘미국 탓’ 하는 식의 환원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해야만 반부시 슬로건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맑스주의자들은 좌파 민족주의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반부시 슬로건을 강조할 수 있다. 맑스주의자들은 좌파 민족주의자와 달리 제국주의를 경쟁하는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불균등한 위계체제로 여긴다. 모든 문제를 미국 탓이라고 끼워 맞출 수는 없겠지만, 맑스주의적 관점에서도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위계적 성격 때문에 그 정점에 있는 소수의 제국주의 강대국들을 가장 주된 적으로 규정한다. 이 때문에 ‘다함께’는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 동네 깡패에 지나지 않는 아류제국주의 국가인 이라크를 침략했을 때, 양비론적 관점이 아니라 미국의 패배를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수장 격인 미국 제국주의의 지배자들이 주된 투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맑스주의자들은 좌파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운동에서 미국과 경쟁하는 다른 경쟁 제국주의 국가나 자국 지배자들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투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함께’는 <다함께> 신문을 통해 유럽·러시아·중국·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수많은 폭로 기사들을 다뤘고, 러시아의 체첸 억압과 중국의 홍콩 투쟁단 탄압,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맞선 항의 행동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아펙 반대 투쟁에서도 ‘다함께’가 노무현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학사정연의 근거 없는 왜곡과 달리, ‘다함께’는 노무현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했다. ‘다함께’는 <다함께> 신문과 ≪아펙과 제국주의≫라는 소책자를 통해 아펙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폭로했고, 아펙이 노무현 정부의 아류제국주의적 야심과 관련돼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학사정연은 “부시를 때려 잡으면 전쟁과 세계화를 막아낼 수 있[냐]”면서 반부시 슬로건을 반대하기도 한다. 물론 워싱턴의 정권 교체 자체가 전쟁과 신자유주의의 영구적인 종식을 뜻하지는 않는다. 전쟁과 착취는 오로지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함으로써 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미국 제국주의의 수장이자 전쟁과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부시의 퇴진은 세계적 차원의 계급 세력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부시의 퇴진은 당장 미국 지배자들을 곤혹스러운 처지에 내몰 것이다. 부시의 퇴진은 부시가 추진했던 전쟁과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 대한 대중의 심판을 의미한다. 따라서 설령 근본적 사회 변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른 지배자를 백악관에 앉히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 자는 매우 운신의 폭이 좁을 것이다.
또한 이쯤 되면 부시의 친구, 블레어와 노무현도 꽤 위기에 처할 것이다. 다른 경쟁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자들 또한 자신이 부시와 똑같은 놈으로 보일까봐 대중의 눈치를 봐야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지배자들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그들 사이의 분열도 격심해질 것이다.
반면 대중 운동의 압력 때문에 부시가 물러나게 된다면, 대중들의 자신감은 걷잡을 수 없이 고양될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은 대중 행동을 더 광범하게 불러일으킬 것이다. 각 나라에서 저항이 분출하고, 지배 계급과의 공공연한 충돌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근본적 사회 변혁으로 나아갈 지는 미리 결정돼 있지 않다. 아마 변혁 정치 조직이 얼마나 노동 계급과 피억압 대중 운동 속에 뿌리내리고 있느냐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시 퇴진은 대중 운동의 거대한 전진을 뜻한다는 점만큼은 명백하다. 이러한 상황은 혁명적 좌파에게도 커다란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다. 물론 학사정연과 같이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에 대해 초좌파적 종파주의로 일관하게 된다면, 그러한 기회를 놓치고 운동에서 주변부로 전락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반전 운동의 중요성 문제

한편, 학사정연과 우리와의 논쟁은 현 정세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쟁점도 포함돼 있다. 먼저 반전 운동의 영향력 문제를 논의해보자.
학사정연은 ≪현장에서 미래를≫ 116호(‘반전-반세계화운동 이대로 좋은가?’-편집자)에서 반전 운동이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유인즉슨 현재의 이라크 전쟁이 1차 세계대전 당시와 같은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또한 현재의 제국주의 위기의 정도가 1차 세계 대전 당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지금은 수년 내에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 발발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 강대국 간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베트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과 같은 제국주의 전쟁은 사회 위기와 갈등을 첨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핵심 논지였다. 그런데 학사정연은 전쟁이 사회 위기와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리의 주장을 두고, ‘다함께’가 “가까운 미래에 혁명이 임박했다는” 식의 “파국론·붕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곡해한다. 학사정연은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의 세계 대전과 같은 ‘혁명적 위기’가 아니면, 제국주의 체제의 위기는 거의 없고 오직 운동의 ‘퇴조기’만 존재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들의 글에는 ‘모 아니면 도’, ‘전부 아니면 전무’ 하는 식의 비변증법적 사고가 판을 치고 있다.
현재의 제국주의 체제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분열 심화와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반제국주의적 저항의 등장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 때문에 저항 운동이 더욱 성장하고 갑작스런 투쟁이 분출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대체로는 갑작스런 투쟁의 분출이 단기간에 혁명적 위기를 창출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혁명적 정치 조직의 취약함 때문에,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다시 일시적 기저 상태에 빠졌다가 또 새로운 투쟁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과정이 한 동안 반복될 가능성이 꽤 높다. 그럼에도 결정적 패배를 겪기 전까지 대체로 이 운동은 성장 추세에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이라고 볼 수 없었던 베트남 전쟁도 미국 지배자들의 극심한 정치 위기를 낳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유럽과 북미 등에서 대규모 반란을 낳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프랑스의 경우는 학생 반란이 노동자 투쟁의 방아쇠 역할을 하면서, 당시 대통령 드골이 국외로 피신하는 준 혁명적 상황까지 나아갔다.”(‘다함께’ 서울대 모임, ‘반제국주의 투쟁은 사회주의 활동의 핵심 고리다’, 2006년 1월 12일) 학사정연은 우리의 지난 글에 있는 “문제는 정세가 아니라 정치다”하는 문구를 끄집어내어 ‘다함께’가 정세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쓴 이 문구는 학사정연이 제국주의 강대국 간 전쟁이라는 ‘정세’가 조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전 운동을 폄하한 것에 대해 반박하는 과정에서 쓰여진 것이다. 즉, 베트남 전쟁 때도 ‘정세’는 준혁명적 상황까지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었고, 그 기회를 제대로 부여잡지 못했던 것은 개량주의 ‘정치’의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맥락에서 쓰여진 문구였다. 학사정연이 이러한 맥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갑자기 정세에 무관심하냐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엉뚱한 꼬투리 잡기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우리의 비판에 대해 학사정연은 부정직하게 대응하고 있다. 학사정연은 현재의 전쟁이 제국주의 강대국 간의 전쟁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전 운동의 중요성을 폄하했다. 그런데 우리가 베트남 전쟁 사례로 반박하자, 그에 대한 답변은 회피한 채 또다시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다르다는 논리를 들이대고 있다.
미국 지배자들과 부르주아 언론들조차 이라크 전쟁이 베트남 전쟁을 닮아가고 있다고 인정하는 판에, 두 전쟁의 유사성을 한사코 부인하려다 보니, 논리 또한 군색할 수밖에 없다.
학사정연은 베트남 전쟁이 “10여 년간 계속된 길고 긴 전쟁”이었다면서, 이 점이 마치 현재의 “테러와의 전쟁”과는 다른 점인 양 규정한다. 그러나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야말로 결코 단기전이 아니다. 이라크 전쟁과 점령만 해도 벌써 3년이 지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포함하면 4년 6개월이 지났다.
게다가 이미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이 ‘영구적인 전쟁’이 돼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 이어 지금 이란에 대한 공격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전쟁의 판돈은 점점 커지고 있다. 냉전 해체 이후 등장한 잠재적 경쟁 강대국들을 군사력을 과시하여 제압한다는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 때문에, 이 전쟁이 베트남 전쟁보다 더 길어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또한 학사정연은 현재의 반전운동 수준이 베트남 전쟁 당시보다 훨씬 낮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동안 학사정연이 얼마나 반전운동에 관심이 없었는지 스스로 증명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은 전쟁 초기에 수백 명 규모의 운동으로 시작했다. 수만~수십만 명 규모의 운동으로 발전하는 데에 수년이 걸렸다. 반면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은 전쟁 발발 전부터 1천5백만이 참가하는 반전 운동으로 급격히 성장했다. 즉, 이 운동은 시작부터 베트남 전 반대 운동의 최대 규모를 훌쩍 뛰어넘었다.
현재 이라크 저항 세력의 끈질긴 저항과 국제 반전 운동의 성장 때문에 미국은 이라크 점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자신의 뒷마당인 라틴아메리카에서 분출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베네수엘라 정부 각료들조차 공개적으로 베네수엘라가 이라크 저항세력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인정할 정도다.
반전 운동 초기에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이 반전 운동의 토양을 제공했다면, 이제는 반전 운동 또한 다른 운동들을 고무하고 있다.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항쟁, 국제적 반부시 운동, 라틴아메리카 반란, 무슬림들의 저항, 프랑스 학생 반란, 아시아의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은 서로 연결되고,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요컨대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은 오늘날 세계적 차원의 저항을 고무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당장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도식적으로 접근하는 학사정연의 눈에는 이러한 저항의 분출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1968년 상황과 현재는 다르다고 주장한 학사정연이 최근 프랑스에서 벌어진 학생과 노동자들의 거대한 저항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운동 발전의 변증법적 동학에 대한 몰이해

그런데도 학사정연은 두 차례에 걸쳐 ‘다함께’를 비판하면서, 현재의 계급 세력 관계를 ‘퇴조기’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학사정연은 주되게 노동조합 투쟁이 얼마나 성공을 거두고 있느냐는 관점에서 정세를 분석하는 듯하다.
노동조합 투쟁에 대한 논점을 다루기 전에, 먼저 상이한 운동들의 발전 동학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다. 학사정연이 ‘퇴조기’라고 규정하는 1980년대 이후 운동의 발전에 대해 추적해보자.
세계적 차원에서 보자면, 1980년대 초반 노동운동은 강력한 패배를 겪었다. 특히 직접 파업의 패배를 심각하게 겪은 미국과 영국이 패배의 진원지였다. 그러나 이 조차도 남한의 경우는 적용되지 않는다. 남한 노동운동은 1987년에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전투성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할 정도였다. 현재 노동운동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결정적 패배를 겪지 않았다는 점에서 강력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동시에 봐야 한다.
게다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진행된 소련·동유럽 블록의 몰락은 좌파 전체에 사기 저하를 가져다주었다. 이 때문에 서구의 지적 조류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강세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1990년대 중반 들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1994년 사파티스타 봉기와 그 이듬해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대중파업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997년 1월 남한에서는 거대한 대중 파업이 벌어졌고, 1997~19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는 인도네시아에서 독재자 수하르토를 타도하는 혁명을 낳았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은 이제 IMF, 세계은행, WTO 등에 대한 분노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1999년 시애틀 WTO 반대 시위의 폭발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이 급격히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2001년 제노바에서 30만이 결집한 G8 정상회담 반대 시위로 절정에 도달했다.
그해 9·11 테러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이 반전 운동으로 성공적으로 옮아갔다. 베트남 전쟁 당시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반전 운동의 규모는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의 자양분 덕분이었다. 이제 반전 운동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은 서로 결합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운동들은 불균등하게 발전했다. 즉, 모든 운동이 동시에 같은 수준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운동이 먼저 성장하면 다른 운동이 영향을 받아 뒤늦게 성장 대열에 동참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각 나라마다 운동의 성격도 조금씩 다르다. 가령 영국·이탈리아에서 반전 운동이 강력했다면,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은 라틴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반전 운동에 노동자 조직이 참가한 정도도 나라마다 상이하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는 2003년 2월 15일 시위에 각각 400만 명 씩 참가했는데, 참가자 중 상당수는 조직 노동자들이었다. 반면 영국의 경우 아직 노동 운동의 활성화가 더뎌, 상대적으로 앞의 두 나라보다 노동 계급 참가가 적다고 볼 수 있다.
학사정연은 운동의 불균등 발전을 이해하지 못하고, 노동조합 투쟁의 승리 여부로만 운동이 처한 정세를 분석하다 보니,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에 대해 폄하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노동 운동의 문제

그렇다면, 학사정연의 노동 운동 상황에 대한 분석은 타당한가. 분명 현재의 노동 운동이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에 비해 발전 속도가 더딘 것은 사실이다. 이는 현재의 경제 상황이 불황기라는 점과 관련돼 있을 것이다. 불황기에는 자본가들의 양보의 여지가 많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 또한 사기가 높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점 때문에 학사정연처럼 현재의 정세를 ‘퇴조기’라고 규정할 이유는 전혀 없다. 노동자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서, 투쟁에 나설 엄두가 안 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불황기에는 호황기보다 자신감이 높지 않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불만이 켜켜이 쌓여가는 시기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축적된 불만은 간헐적이긴 하지만 매우 사소한 쟁점을 계기로 폭발적 투쟁으로 분출될 수도 있다. 특히 평상시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학생들에게서 이러한 휘발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학생들의 거대한 투쟁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자극할 수 있다. 최근 프랑스에서 거대한 저항이 분출했던 과정과 비슷하게 말이다.

실제 최근 유럽에서는 우파 정부와 개량주의 정부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도전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늘어나고 있다. 공기업 사기업화, 연금 축소, 노동시간 연장 등에 대항하는 투쟁들이 꽤 커다란 규모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학사정연은 서구 노동 운동은 둘째 치고, 심지어 남한의 노동 운동에 대해서도 ‘퇴조기’라고 말한다.
“1996~97년의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 이후, 98년의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철회투쟁, 99년의 지하철투쟁, 2001년의 대우차 투쟁과 한통계약직 투쟁, 2002년의 발전노동자투쟁 등 굵직굵직한 계급투쟁들이 벌어져왔지 않은가? 이제는 비정규직노동자들도 ‘불법파견 철폐’를 외치며 투쟁의 대열에 들어서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은 투쟁에서 모조리 패배해왔다는 것이다.”(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 “<다함께> 동지들의 응답을 환영하며”, ≪현장에서미래를≫117호.)
그러나 남한 노동 운동이 모조리 패배해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가령 1997년 대중 파업의 경우, 김영삼과 신한국당의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를 저지했고 김영삼 정권을 내리막길로 치닫게 했다. 물론 IMF가 닥치면서 지배자들은 다시 공세를 취했고, 최종적으로는 개악 노동법을 막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완전한 승리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본주의 내에서 경제 위기 시기 노동자 투쟁의 성과는 모두 일시적이다. 그렇다고 모든 노동자 투쟁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맑스는 노동자 투쟁의 “직접적인 경제적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도덕적 효과”라고 지적했다. 97년 대중파업으로 노동 계급의 선진 부위가 더는 보수 정당들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집단적인 각성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중요한 전진이었다.
1998년 현대자동차 공장점거 파업의 경우도 노동조합 지도부가 마지막에 식당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를 합의한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파업은 1천여 명 이상의 정리해고를 막을 수 있었고,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추진에 제동을 걸었다. 이렇듯 굵직굵직한 노동자 투쟁에 대해 우리는 양면적 성격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2000년대 들어서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이 활발해졌는데, 이들 노동자 투쟁은 대체로 정부나 사측이 부분적으로 양보안을 제시해 놓고 이를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다시 투쟁에 나서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다.
즉, 노동자들이 결정적 패배를 당한 상황은 아니다. 물론 노동자들의 결정적 승리를 가져온 상황도 아니다. 국민파든 현장파든 가리지 않고, 노동조합 집행부에 당선되면 투쟁을 자제하는 ‘노동조합 관료주의’의 영향 때문에 노동조합 운동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남한의 노동 운동은 위기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강력하다는 점 또한 봐야 한다. 남한에서는 최근 수년 간 파업건수, 파업일수, 파업손실액 등 노동자 투쟁의 활성화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들은 대체로 증가 추세에 있다. 자동차 산업과 같은 남한 주요 산업에서 여전히 전투적인 노조가 존재한다는 점은 남한 노동 운동의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비정규직 개악안 처리 정국에서도 민주노총 노동자들의 민주노총 지도부들의 예상을 넘는 수준의 파업을 조직한 것도 이러한 잠재력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러한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뛰어넘어야 한다. 좌파 지도부 세우기 전략보다, 현장 조합원 운동 전략이 강조돼야 한다. 즉, 노동조합 지도자가 투쟁을 조직할 땐 그 투쟁의 일부가 되고, 투쟁을 배신할 땐 독립적으로 현장 조합원들의 투쟁을 조직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한편 학사정연은 ‘다함께’가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을 강조한 것을 두고,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기계적으로 분리하고, 반전·반세계화 투쟁은 정치투쟁, 현장투쟁은 경제투쟁이라는 맑스주의 역사에 유래가 없는 구분법을 들이대”고 있다고 비판했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칼 같이 나눠지는 것은 아니지만, 학사정연은 정반대로 마치 이 두 가지 투쟁을 구분할 수 없다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두 가지 투쟁이 상호 작용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개념적으로는 두 가지 투쟁을 구분해야 한다. 그 다음에 둘 사이의 상호 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일찌감치 레닌은 두 가지 투쟁이 칼 같이 나눠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조심스럽게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을 정치 투쟁으로, 그렇지 않은 개별 사업장의 투쟁은 경제 투쟁이라고 정의했다.
노동자들의 처지 개선을 위한 투쟁도 국가 권력에 맞선 투쟁으로 발전한다면, 정치투쟁의 성격이 결합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학사정연의 곡해와 달리 우리는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반드시 경제투쟁의 성격만 지니고 있고, 더 나아가 경제투쟁은 하찮은 투쟁이라는 식의 도식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유사한 쟁점인 등록금 투쟁 쟁점에서도 NL 계열과 연대회의 등이 보이는 ‘대정부투쟁론’이 대학 당국에 맞선 투쟁을 회피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다함께> 74호에 필자가 쓴 ‘등록금 투쟁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기사 참고.) 물론 대정부 투쟁이라도 진지하게 조직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시도를 지지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이 개념적으로 구분되고, 서로 다른 투쟁을 고무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했을 뿐이다. 바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론≫은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이 서로 상승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
“정치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경제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이것은 정치투쟁의 활발한 공격과 승리가 노동자들에게 처지 개선을 위한 싸움으로 시야를 넓혀 주고 또 싸우려는 충동을 강화시킴과 아울러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치 행동의 물결이 고양된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을 틔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이 휴지기를 맞이할 때마다 노동자들을 지탱해준다. 말하자면,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노동자계급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이다.”(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 풀무질, pp57~58)
특히 우리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원리에 따라,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이 불균등하게나마 노동자 투쟁을 고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학사정연은 바로 이 점이 못마땅한 듯하다. 노동자들은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에 참가하기 어렵다고 가정하면서, 현장 투쟁이면 됐지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이 뭐가 필요하냐는 식으로 대한다.
그러나 가령 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에서는 얼마 전에 AFL-CIO(미국 노동총동맹-산별회의)가 공식적으로 이라크 철군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이 단체의 50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 노동자’라는 단체는 작은 모임에서 1백만 명이 넘는 회원을 대표하는 전국적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지금 미국에서는 4월 말 반전 노동자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반전·반부시 운동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투쟁 또한 고무하고 있다. 2004년 여름 50만 명이 뉴욕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항의 시위에 참가했다. 뉴욕의 50만 시위는 노동자들에게도 자신감을 심어준 듯하다. 그래서 작년 12월에는 뉴욕 대중교통노조가 파업에 돌입했다. 비록 강경 탄압에 사흘 만에 파업을 철회하긴 했지만, 이 파업은 1980년대 초반 이후 25년 만에 감행된 역사적인 파업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가장 앞서 나간 곳이다. 이곳은 유럽헌법 통과를 저지한 후, 노동자들의 경제적 조건(연금, 실업, 노동시간 등)을 둘러싼 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요컨대 반전·반신자유주의 운동은 노동자 투쟁을 고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사실 학사정연이야말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에 대한 그릇된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권력의 핵심인 생산 현장에서의 투쟁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여긴다. 즉, 정치투쟁을 경제투쟁으로 환원하고 있다. 이는 그들의 국가에 대한 관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미 생산관계 내에 국가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투쟁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정치투쟁은 체제자체의 본질상 있을 수 없다. 경제와 정치의 공간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단지 자연발생적인 투쟁과 의식화된 투쟁이 있을 뿐이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대비란 존재하지 않는다.”(학사정연, “국가-권력-사회주의”, <신질서>3호)
이런 관점 때문에 학사정연은 배타적으로 ‘현장’에서의 투쟁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생산현장은 혁명을 사고하는 한 반드시 사수해야하는 전략거점이자, 정치와 경제의 분리의 지양이 시작되는 신질서의 공간”이라는 주장 자체는 옳다. 당연히 변혁적 사회주의자라면 “소비에트 혁명전략”을 채택해야 한다.
그러나 “소비에트 혁명전략”은 국가 권력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 국가 권력을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본가 권력과 노동자 소비에트 권력 사이의 “이중 권력” 상태를 넘어설 수 있다. 따라서 국가 권력과 대항하는 정치 투쟁을 회피해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가 형식적으로나마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 시기에는 노동자들 자신도 그러한 구분법을 받아들인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노동자들의 의식은 대체로 지배 계급 전체와 국가 권력에 대해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혁명적 의식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아무리 나아가야 전투적 노동조합 의식에 머물게 된다.
따라서 일상적 시기에 노동 현장에서의 투쟁만 배타적으로 강조해서는, 오히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 의식을 획득하는 데에 어렵게 만든다. 노동자 투쟁을 건설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과 제국주의, 국가 탄압, 정치적 자유, 환경, 여성 등의 쟁점에 대해서도 투쟁을 건설하려 노력해야 한다.
심지어 노동자들의 투쟁조차 지금과 같은 불황기에는 개별 현장 투쟁을 보다 일반화하여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정규직 문제만 보더라도, 개별 사업장 차원의 투쟁을 국가 정책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일반화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바로 정치가 중요하다. 혁명적 좌파들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구분하지 않는다면서 실제로는 정치투쟁을 회피하는 전략을 취한다면, 정치 영역은 개량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인민전선이냐 공동전선이냐

학사정연의 정치적 무능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쟁점은 바로 인민전선과 공동전선 문제다. 고전적 맑스주의 전통에서 인민전선은 계급 협력 전략을 뜻하고, 공동전선은 노동계급 정치세력들 간의 사안별 공동행동을 뜻한다.
그런데 이들은 반부시 투쟁과 반파시즘 운동을 비슷한 사례로 언급하며, ‘부시 반대’나 ‘히틀러 반대’를 외치는 것 자체가 인민전선인 양 취급한다. 마치 지배 계급 전체가 아니라 특정 분파에 반대하면 문제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반부시나 반파시즘, 심지어 반한나라당조차 그 자체로 인민전선, 즉 계급 협력 전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면, 학사정연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반노무현’도 지배 계급 전체가 아니라 그 일부에 반대하는 것이므로 인민전선으로 규정해야하는 모순에 빠질 것이다.
인민전선 비판으로 유명한 트로츠키도 파시즘에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한 적이 없다. 다만 파시즘 반대를 위해 지배 계급 정당들과 손잡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오히려 노동 계급이 단결하여 파시즘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른바, ‘반파시즘 노동자 공동전선’)
맑스주의자들은 전략적으로 지배 계급 전체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지만, 전술적으로는 대중의 불만의 초점이 되고 있는 지배 계급의 특정 분파에 반대하는 투쟁을 조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학사정연과 달리 탄핵 정국 당시, 노무현과 열우당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대중적 분노의 표적이 됐던 한나라당·민주당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탄핵 반대 투쟁에 동참하는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했다.
지배 계급의 상이한 분파들은 서로 “싸우는 형제”이므로, 만약 지배 계급의 특정 분파가 대중 행동에 의해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다른 분파 또한 대중의 눈치를 보느라 쩔쩔매게 될 것이다.
학사정연이 인민전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혼란은 지배계급과의 동맹과 운동 세력 내의 동맹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전 운동에서 NL 경향과 NGO와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다함께’를 인민전선주의자로 몰아붙인다. 지난 번 우리의 글을 다시 인용해보겠다.
“NGO와 좌파 민족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모두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노무현 정부의 파병에 반대하는 점에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반전 운동은 이러한 제한된 공통점에 한정해서 공동 행동을 추구하고 있고, 이럴 때 힘의 합성력은 배가될 것이다.”
“사회주의자는 이러한 공통점을 확대 해석해서 운동 내 여러 경향이 사회 변혁의 전략적 방향까지 통일될 수 있다고 착각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공통점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이라크 점령 반대, 파병 반대’라는 제한된 쟁점에서 그들과 공동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팽개쳐 버려도 안 된다.”(다함께 서울대 모임, ‘반제국주의 투쟁은 사회주의 활동의 핵심 고리다’, 2006년 1월 12일.)
우리의 비판에 대해 학사정연은 “반전운동의 현재 동맹들은 완전히 같은 방향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반 부시’와 ‘반미’라는 민족주의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유치하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은 반전 운동의 동맹들이 이라크 점령이라는 구체적 쟁점에 대해 반대 방향이 아니라는 얘기지, 강령적 방향까지 완전히 일치한다는 말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도, 학사정연은 우리의 주장을 의도적으로 곡해하고 있다. 게다가 학사정연은 ‘다함께’를 인민전선주의자로 몰아붙이기 위해 ‘다함께’가 농민 투쟁에 대해 무비판적이었다고 곡해한다. 그러나 <다함께> 신문에 실린 쌀 시장 개방 문제 관련 기사들만 읽어봤어도 이런 식의 황당한 왜곡은 불가능할 것이다.

학사정연은 반전 운동에서 NL 경향과 NGO와의 동맹을 비판하면서도, 노동자 공동전선을 옹호한다. 이는 NL 경향과 NGO를 지배계급의 하수인쯤으로 보거나, 적어도 노동자 공동전선과 무관한 정치세력으로 보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NL 경향과 NGO는 한국판 개량주의 정치세력에 속한다. NL은 제국주의 억압 경험에서 비롯한 대중의 자생적 좌파 민족주의 의식을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이들은 노동 계급 정치 세력 중에 다수파다. NGO는 소련·동유럽 블록 몰락과 더불어 조성된 좌파의 위기 상황에서 국가 권력과의 대결을 회피할 것을 주장하면서 등장한 개량주의 정치단체다. NGO의 스펙트럼은 참여연대부터 급진 NGO까지 다양한데, 이들 또한 노동계급과 피억압 대중 운동과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이들과의 사안별 공동 행동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순수한 의미의 혁명적 좌파들 간의 협력만을 옹호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말한 노동자 공동전선의 취지와 맞지 않다. 학사정연의 관점은 오히려 개량주의 정당들을 공동행동에서 배격한 스탈린주의적 ‘사회파시즘’론과 유사하게 나아갈 위험이 있다.
또한 이러한 관점은 학사정연의 실천을 더욱 정치 투쟁과 거리 두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 현실에서 국가적 차원의 정치 쟁점을 주도하고 있는 단체들이 바로 개량주의 단체들이기 때문이다.
학사정연이 이러한 관점으로 변혁적 노동 계급 정당을 건설하려 한다면, 실제 정치 투쟁에서 개량주의 정치의 주도력을 넘어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 시기에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수용하는 노동자들의 자생적 의식에 기대어 당을 건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된다면, 학사정연은 향후 실제 계급 투쟁이 폭발할 때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소종파로 전락하거나,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노동조합 의식에 타협하느라 혁명적 이데올로기와 실제 실천 사이에 괴리를 빚게 되는 경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2006-03-31 01:02:49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2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