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출신 노동자의 삶 노동운동가평전 |
현장에서 미래를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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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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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가평전(2)
멀리는 1970년 청년 전태일의 분신에서부터
가깝게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 민주 노조 운동으로
표현되었던 노동자 대중 운동은
이제 민주노총이라는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운동의 발전과 함께 많은 노동 운동가들이 탄생하였고
이들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기 위해
분주히 활동하고 있다.
이 기획은 서유럽 노동 운동가들의 운동과 삶을 통해
서유럽 노동운동의 역사와 경험 및 노동 운동가로서
성장해 가는 이들의 모습을 소개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조건과 경험의 차이를 뛰어 넘어 발견할 수 있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 노동 운동가로서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
가는 여러 운동가들의 모습은 민주노총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폭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지식인 출신 노동자의 삶
-베르너 포미(Werner Fohmi)-
현 철강콘쩨른 직장평의회 위원이자
비판노조그룹 활동의 중요 인물이며
“비판노조그룹 국제정보교환기구(TIE)” 집행 위원
옮긴이:정병기(해외연구원, 독일 베를린 자유대 박사과정)
나는 1943년 칼스루에(Karlsruhe)에서 한 노동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바이에른(Bayern) 주의 한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전쟁 상황이었던 그때, 대부분의 시골 마을들은
도시에서 피난해 온 사람들에게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당시 여성들은 폴란드와 다른 동구권
국가들에서 온 강제부역자들과 더불어 들에서 많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농부들은 대개 도시의 포격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전쟁에 대한 그들의 언급은 무엇보다 러시아
전선으로부터의 전사와 실종 보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점차
늘어갔습니다. 나의 어머니도 전쟁에 나가신 아버지의 전사
소식이 언젠가 전해질 것이라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사는
많은 여성들 중의 하나였지요. 그러나 그러던 어느 날 대문 앞에
아버지가 서 계셨습니다. 나자렛(Nazarett) 전투에서 도망하여,
그 마을로 숨어든 것이었지요. 나치에게 발각되면, 그 즉시
탈주병으로 총살될 판이었습니다. 그 당시 몇 개월 동안 많은
병사들이 탈주하였으나, 얼마 못가 붙잡혀 처형되곤 했습니다.
전쟁의 막바지 두 해는 히틀러에 대한 조그만 비판이라도 사형을
면치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결국은 비열한 고발자까지
속출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허벅다리에 매우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부상은 나자렛에서 이미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머지않아 도시로 돌아갔고,
아버지는 과거에 일하던 낡은 공장의 기계공으로 다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수입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얼마간 우리는 도시의 폐물들을 모아 시골에 가져다 파는 것으로
연명해야만 했어요. 시골에서 우리는 가져간 자전거 바퀴 튜브나
잡동사니 연장들을 농부들의 감자와 계란 또는 닭과
교환했습니다.
기획:노동운동가 평전(2)
지식인 출신 노동자의 삶-베르너 포미
도시 지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 수용소에 갇히게 만든
이른바 밀고자들에 대한 청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거의 기적과 같이 갑자기 나치스트들이 없어졌던
것이지요.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요일 아침이면 교회에
갔고, 스스로 독실한 크리스찬이라고들 했어요. 그런 반면
그리스도의 윤리와 민주주주적 자유의 이름으로 벌써 ‘적색
공포’에 반대해 흥분하던 부류도 있었지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거의 정당 마크를 외투에서 떼어내고, 기민연(CDU) 당원이
되었습니다. 모든 죄가 히틀러에게 돌려지고, 오직 그에게만
책임이 있었던 것처럼 떠들었어요. 히틀러를 둘러싸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만이 청산의 대상이 된 것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이들은 단지 명령 수령자였으며,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용서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해방되었다고 얘기했었죠.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당시 거부하던
병사들에게 나치 통치와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비록
부분적일지언정 사형 선고를 내린 장본인들이 60년대의
독일에서도 여전히 지도적 정치인들 속에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단지 현행법을 준수하고 실행했을 뿐이라는 것을 이유로
말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rttemberg) 주지사
필빙어(Filbing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일 사회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고, 국가 기구와 사법부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합니다. 법치 국가라는 수호되어야 할 절대적 가치로
인식되는 그 담론 속에 매우 잘 은폐되어 있습니다. 입법을 통해
수호되는 이해 관계와는 독립된 형식적인 법 존재로 이해되는 그
담론 속에 말입니다.
당시에는 많은 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텔레비전은
아직 없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님들이 전쟁에 대해,
“미친” 히틀러에 대해, 그리고 엄동설한 러시아 하늘의 겨울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것은 “러시아”에 대한
패배의 책임이라는 맥락에서였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야기
속에 가끔씩 붉은 군대 소속 여자 전투 부대의 놀라운 용기와
임전 태세에 대해 감탄하기도 하는 무용담이었지요. 이러한
이야기는 나의 어린 시절과 초기 청소년 시절에 강하게
각인되었습니다.
60년대에 나는 김나지움(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중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교육 개혁의 결과 수업료는 폐지되었고,
교육 자료의 선택은 자유화되었습니다. 교재의 대부분은 재학
기간 전체에 걸쳐 학교 도서관에서 무료로 빌릴 수 있게
되었어요. 자본은 당시 한층 많이 교육 받은 전문 인력을 필요로
했고, 때문에 한층 폭 넓은 학교 교육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단순한 노동 관계의 의미이지만, 이 같은 상황이 많은
어린이들에게 실로 도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때 나는
인종주의를 주제로 한 나의 졸업 시험 작문 때문에 학교장 앞에
불려간 적이 있지요. 그는 남의 작품을 베꼈다고 나를
처벌했습니다. 나는 놀랍게도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상황과 그들의 지속적인 시민권 획득 투쟁을
적나라하게 서술했던 것입니다. 사실 나는 그전에 나를 사로잡고
흥분케 한 사건들에 대해 과연 내가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내 나이는 정의롭지 못한 일에
대한 반항과 반감이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어린 시절 나는 백인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인디언들의 투쟁과 로빈 훗의 전설,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하는 삶, 그리고 바다에서 돈 많은
장사꾼들을 때려부수는 해적들의 이야기에 특히 반했었지요.
작년에 나는 동료들과 함께 미국의 한 노동 조합 그룹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부의 여러 주들을 방문했고, 그 곳에서
많은 흑인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60년대
이래 자신들의 상황이 전혀 나아진 게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가했던 집회는 KKK단의 공격에 대비하여 무장한 노동자들에
의해 경호되고 있었습니다. 몇몇 노동 조합 그룹들은 스스로를
“현장과 공공 생활에서의 사회적 권리 획득 투쟁과 정의를 위한
흑인 노동자들”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의 일부 노동
조합들을 친자본적 그룹이라는 의미에서 “영리 노조(business
unions)”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나는 대학에 입학하였고, 어학과 철학을
전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세미나에 참가한 나에게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위해 공부하는가 하는
의문이 점차 커져 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특혜 받은
대학생이기를 포기하고 노동자가 되어 노동자계급과 함께 사회
변혁을 준비하기 위해 공장에 가고자 하는 한 서클에
가입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특히 중국 문화 혁명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선 나는 공구 제작공이 될 수 있는 직업
교육을 받고, 한 커다란 철강 콘쩨른에서 노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철강 회사는 공동결정법이 실현된 산업에 속했지요.
공동결정법의 실현이란 직장 평의회가 주요한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규 고용과 근로자 주택 제공
등에서 직장 평의회는 특히 고유한 역할을 가집니다. 곧, 직장
평의회는 종업원들의 물질 생활 문제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셈이지요. 그러나 투쟁수준과 조직도가 높은 이 공장에서도 점차
직장 내 노동 조합 활동에 대한 불만이 커져 갔습니다. 1969년
첫번째 자발적 파업은 도르트문트(Dortmund) 시의 대철강 회사인
회쉬(Hoesch) 사에서 일어났습니다. 파업은 토대 노조원들과
노조 신임 대의원들에 의해 조직되었고, 요구 사항은 시간당
임금 50페니히 인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정율 인상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노조 지도부의 교섭 관행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지요. 그러한 관행이 우리들에게는, “이미 가진
자가 더 많이 받게되는, 곧 10% 인상이라고 할 때, 2천 마르크를
버는 사람이 2백 마르크를 더 받는 반면, 3천 마르크를 버는
사람은 3백 마르크를 더 받게 되는” 결과를 의미한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곳곳에서 이러한 균등주의적 주장과
파업이 받아들여졌어요. 그리고 그것은 더 나아가, 어떠한 단체
협상 체결도 노조 토대 구성원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주장과 맞물리게 되었습니다. 1969년 이 투쟁의 시작은
곧 토대 민주주의적이고 균등주의적인 새로운 노조 운동의
탄생을 알리는 첫 울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직장 내에서 한 노조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한 작은 신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직장 내 활동 외에 동료들과 함께 나는 전국적 수준뿐만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의 노동자 투쟁을 보도하는 신문을
만드는 정치적 모임에서 활동했습니다. 우리는 점차적으로
조금씩 혁명적 상황에 우리 스스로 가까이 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매우
공세적으로 나타났고, 그로부터 우리는 낙관적 생각을 갖게 된
것이었지요.
우리 그룹에는 많은 쿠르덴과 터어키 출신 노동자들도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막 철강사에 입사한 사람들로서, 높은
산재율을 무릅쓰고 용광로 작업 등 가장 어려운 일들을 하고
있었지요. 따라서 그들은 직장 내 활동 가운데, 임금 문제뿐
아니라, 작업간 휴식과 산재 위험 등과 같은 노동 조건에 특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직장 내 작업 분담에서 독일 노동자들은
절대적인 특권을 누렸고, 그 중에서도 일부는 마치 귀족과 같이
행세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차별적 요구에서는 이른바 토대를 이루는 사람들이었죠.
철강 계열로 엮어지는 거의 모든 철강사에 이제는 우리와 같은
대항 그룹이 조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서로의 경험과 정보를 교환하고, 앞으로 할 일을 의논합니다.
1979년 겨울의 주 35시간제 획득을 위한 대규모 파업도 그
성과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투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자본을 한계 상황까지 몰아내는 데는 실패했지요. 전체
투쟁은 금속노조(IG Metall)의 파업 지도로 인해 절반 가량
희석되고 말았습니다. 그 영향으로 자동차 업종을 비롯한 일부
다른 업종들은 참가하지 않게 되었어요. 이 투쟁은 결국 저열한
협상으로 종결된 것으로 수많은 동지들에게 인상지어졌습니다.
즉, 주 35시간제의 도입은 수 년 뒤로 미루어지고, 그와 동시에
많은 해고자만을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이 신규 고용
없이 조기 정년으로 처리되면서, 실제 수만에 달하는 일자리의
상실을 초래했습니다.
80년대는 바로 합리화와 실업에 관한 논쟁으로 점철된
10년입니다. 금속노조의 정책은 이른바 사회적으로 적절한
일자리 해소, 다시 말해 평화로운 등장을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철강 노동자들은 55세면 정년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자리는 없어집니다. 신규 채용을
하지 않게 됨으로써, 기존의 근로자들이 초과 노동과 특근을
해야만 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직장 평의회
위원과 노조원들은 오히려 이러한 흐름에 찬성하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것을 비판하는 입장과 싸웁니다.
단 반 시간도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한 수백 만의 실업자들을
생각할 때, 초과 노동을 거부하고 신규 채용을 주장하는 것이
진실하고 현명한 연대적 요구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이미 금속노조 지도부는 기업의 수익성을 이해 관계의
최상위에 두고 동지들의 투쟁 의지를 잠식시키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만일 대항그룹들의 입장이 관철된다면, 직장은 폐쇄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라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연대의
목표를 가진 다수의 지속적 투쟁은 종종 저지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현장 어디에서나 더욱 첨예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 공포 논리의 근거는 간단한 것입니다:곧, 직장의
발전이 우리에게도 수익성을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수익성 이론에 사로잡힌 직장 평의회 위원들과 노조
대표자들에게는 아마 자신들이 위와 같은 자본측의 정책과
수단에 동의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자본의
논리에 현혹된 그들의 사고 방식 내에서 임금 노동자 계급의
총체적 이해 관계는 단지 부차적 위치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요즈음 거의 매일이다시피 논쟁되고 있는 이른바 “생산 입지
안정” 정책이 바로 그러한 대표적 논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노동 조합과 사회 운동 내 비판적
입장이 다시 강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지역적 및 전국적
모임을 갖고, 자본과 국가의 공세에 대한 대항 전략을
논의합니다. 그 연장선 속에서 당연히 다른 나라들의 적극적
노조 운동 그룹과도 연계 활동이 이루어집니다.
내년에도 국제 회의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세계 각국의
민주적, 계급 투쟁적 입장을 대표하는 거의 모든 노동
운동가들과 노조 그룹들이 초대될 것입니다. 한국의 민주노총
활동가들도 초대할 예정입니다.
나는 머지 않아 조기 정년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세
번째 장에서 나는 다른 하나의 생산 방식과 생활 방식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여 나의 경험과 이상을 투입할 더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가올 세기가 자본의 정치 경제학에 의해
결정될 것이냐, 아니면 노동의 정치 경제학에 의해 결정될
것이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투쟁의 문은 더 많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내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바칠 것입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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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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