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
남아공 흑인노동조합운동의 합법화 투쟁과
교훈
김 영 수(정책사업위원,
외국어대학 강사/정치학)
1. 흑인노동자 탄압과 조직건설 투쟁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났던 공통적 현상이었지만,
노동조합운동은 자본축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계급적 모순과
대립, 즉 노동자들의 전투적인 투쟁과 자본진영의 폭력적인
탄압.회유라는 상호간의 “힘 겨루기”를 지속하면서 성장해
왔다. 어떤 경우에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힘이 우세하여 자본가
계급이 굴복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경우에는 자본가들의 계급적
힘이 우세하여 노동자 계급이 굴복하기도 하였다. 계급간의
이러한 “힘 겨루기”는 자본주의가 몰락하지 않는 이상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과 자본진영은 필사의 노력으로 계급적 힘의
우위를 선점할 수 있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들의 계급적 힘을 조직적 단결과 투쟁에서
찾는 반면에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 탄압과
개량적 회유를 통해 노동자들의 계급적 힘을 약화시킨다.
남아공 흑인 노동자들은 1918년 상공업노동조합을 최초로 건설한
이후 1979년 흑인노조의 합법화를 인정하는 노동관계법의
개정시기, 그리고 그 이후 1996년 현재까지 백인 자본가
계급과의 투쟁을 계속해 왔고 앞으로도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흑인 노동자들은 68년이라는 기나긴 투쟁과정에서 “패배하는
승리”를 거듭해 왔다.
흑인 노동자들은 1924년의 노동쟁의조정법, 1925년의 임금법을
비롯한 각종의 인종차별적 노동관계법 때문에 ‘노동자’의
범주에서 제외되었고, 인종차별적인 저임금 구조 1973년 제조업
백인 노동자들이 100을 받을 경우 제조업 흑인 노동자들은 6.10
- 18.25에 불과했고, 1983년의 경우 18.74 - 25.03에 불과했다.
에기반한 인종자본축적의 희생양이었다. 1979년 노동관계법이
개정되기 이전까지 흑인 노동자들은 ‘노동자 아닌 노동자’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자유로운 노동조합결성 뿐만 아니라
파업투쟁흑인노동자들은 포괄적인 ‘파업’ 개념하에서 모든
형태의 파업행위를 할 수 없는데, 파업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그 파업개념 속에는 계속된 작업을 거부하거나 태만한 것, 혹은
작업재개나 재고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흑인노동자들에게 적용되는 고용기간이나 조건에 응하지 않는 것
등이 포함된다. ‘태업’과 같은 직무태도도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즉 그것은 노동자들 간에 어떠한 형태의 협약 또는
협정으로 “일상적인 작업과 작업의 진전을 방해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극도의 제한적 조건에서 전개될 수 있는
파업이라 할지라도 “보안법”을 위반할 수 없었다.
, 그리고 대량사직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흑인 노동자들의
불만과 요구사항들은 단지 노동위원회(Works Committees)비록
형식적이었을지라도 이 위원회제도는 흑인 노동자들을 위한
유일한 제도였다. 그러나 20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고용한
사업장은 이 위원회를 설립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자본가들은 이 의무조항을 지키지 않았다. 또한
설립했다 할지라도 이 위원회는 흑인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간의
단순한 의사소통 매체에 불과했었고, 노동쟁의 발생시 조정의
역할만을 담당했었다.
를 통해 자본가들에게 전달되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흑인
노동조합운동은 계급적 힘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흑인 노동자들의
목숨을 자본가 계급의 총칼대표적인 예가 67명이 사망하고
108명이 부상당한 샤프빌(Sharpeville)봉기, 575명의 흑인이
사망하고, 4,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소웨토(Sweto)봉기,
그리고 1985년 2월, 흑인 노동자들의 임대료 인상
거부투쟁이었다. 이 투쟁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많은 흑인
노동자들이 죽고 부상당하였다. 흑인 노동자들의 1985년 3월
21일, 장례투쟁조차 경찰은 장례행렬에 참여한 흑인들에게
발포하여 적어도 21명 이상을 사살하였다.
앞에 들이미는 투쟁을 전개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희생을
바탕으로 1990년 아파테이트 폐지정책이 선언되기 이전까지,
노동자 계급의 힘을 강화시켜 인종 자본주의 국가를 무너뜨리기
위한 조직건설.강화 투쟁을 끊임없이 할 수 밖에 없었다.
1979년 노동관계법의 개정으로 흑인 노동조합 상급단체가
국가등록제를 전제로 흑인 노동조합의 합법성을 인정받기
이전까지 흑인 노동자들은 주로 업종별.지역별.인종별연맹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 노조들은 다인종 체제를
고수한 TUCSA, 비합법 노조인 SACTU에 가입하거나 혹은
상급단체에 가입하지 않은채 독립된 노조로 존재하기도 하였다.
1980부터 남아공 흑인노조들은 급속하게 성장하였는데, 아래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FOSATU, CUSA, 국제금속노동자연맹
남아프리카협의회, 미등록미조직노동자연맹 등을 토대로 1985년
COSATU가 결성되었다.
TUCSA
(남아프리카노동조합 협의회)
1954년
COSATU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
1985년
COSATU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
1990년
NACTU
(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90년
FOSATU
(남아프카 노동조합연맹)1978년
국제금속노동조합연맹남아프리카협의회
1983년
CUSA
(흑인동조합협의회)
1981년
FOFASATU
(자유노조연맹)
1959년
NACTU
(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86년
BAWU, NA
(미등록미조직 노동자연맹)
1984년
SACTU
(흑인노동조합회의)
1955년
2. 노조합법화 투쟁
각 노동조합의 투쟁의 성격과 이념적 지향점이 상이할지라도,
기본적으로 남아공 흑인노조합운동의 투쟁은 “인종모순과
계급모순”의 이중적 질곡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흑인
노동자들을 해방시키고, 반(反)아파테이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흑인 노동자들은 ‘인종차별에 기반한
임금구조.노사관계.노동정책의 폐지와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위한 투쟁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흑인 노동조합운동의 성격 때문에 백인 자본가 계급은
흑인들의 조직적 단결과 투쟁에 대해 폭력적 탄압으로
일관하였지만, 흑인 노동자들의 CUSA(1954)와 SACTU(1955)의
결성, 흑인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투쟁(1972년 - 1977년), 70년대
중반 이후 가속화된 인종자본축적의 어려움 등을 계기로 흑인
노동정책을 변화시켰다. 그것은 ‘흑인 노동조합의 인정, 흑인
노동조합의 체제내 흡수를 통한 간접적 통제의 강화, 경쟁력
강화를 위한 근로자파견제의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동관계법의 개정(1979)이었다.
1) 법외노조 형성기(1954년 - 1971년)
흑인 노동자들의 본격적인 노동조합 결성투쟁은 국민당
정권(1948)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전개되었다. 1940년대 초반부터
흑인 노동자들은 흑인광산 노동조합(1941),
흑인의류노동조합(1944), 그리고
흑인양모노동조합협의회(1944)를 결성하였고, 1945년 중반에 약
120개 흑인 노조가 가입하였다. 당시 흑인 노동조합은 ‘흑인
노동자의 인정, 임금인상, 조합결성의 자유, 파업의 자유’ 등을
욕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백인 자본가 계급과 국민당정권은 본격적인 아파테이트
정책과 공산주의 탄압법(1950)을 근거로 흑인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공산주의 탄압법에 규정된 공산주의의
개념은 “노조내에서 소란과 무질서를 조장하여
정치.경제.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나 행위”공산주의
탄압법은 1962년에 다시 개정되었는데, “제한된 지역의 이탈,
집회 참여, 특정 정치조직 가입” 등도 공산주의의 개념에
포괄되었다.
를 포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50년 당시 법무국의 발표에
의하면, “공산주의자 블랙리스트에 노조간부 7575명 중 백인
노조간부는 35명, 혼혈유색인 노조간부는 12명, 인도인
노조간부는 7명, 그리고 흑인 노조간부는 21명이었다.
명이 올라 있었는데, 이들은 공산주의 탄압법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탄압으로 흑인 노동조합운동은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그러나 흑인 노동자들은 다인종 체제를 지향하면서도 결성
당시에 흑인 노조를 배제한 TUCSA(1954)에 반발하여
SACTU(1955)를 결성하였고, SACTU에 가입하지 않은 흑인
노조들은 FOFATUSA(1959)를 결성하였다.
SACTU는 ‘흑인 노조는 국가에 등록된 노조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공식적인 노조활동을
전개하였다. 아파테이트 국가와 백인 자본가 계급은 SACTU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SACTU는 흑인 광산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1958)을 주도하였고 샤프빌(1960)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SACTU는 국민당 정권의 탄압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지만, 1967년 국외로 추방되기 이전까지
흑인 노동자들의 정치적.조직적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흑인 노동조합운동은 1972년 흑인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투쟁이 전개되기 이전까지 흑인 노동자들의 정체성(Identity)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TUCSA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TUCSA 중심의
흑인 노동조합운동 때문에 흑인 노동자들은 오히려 전투적인
흑인 노동조합운동의 출현을 위한 투쟁을 강화하였다. 왜냐하면
TUCSA는 SACTU에 가입하지 않았던 흑인 노조 중심의 FOFATUSA
이외의 흑인 노조운동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흑인 노동자들은 1972년까지 형식적일지라도
흑인 노조의 활동과 투쟁을 국내에서 지원.지도할 수 있는
TUCSA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2) 법외노조 인정기(1972년 - 1978년)
SACTU의 해외추방으로 TUCSA에 의존해 왔던 흑인 노동자들은
판매노동자연합(1972.6)의 결성과 요하네스버그 버스노동자들의
총파업(1972.6)을 계기로 “강력하고 통일된 노조의 결성과
전면적인 투쟁”을 시작하였다.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
그리고 흑인노조의 인정”을 요구하는 부두노동자들의
파업투쟁(1972.10), 더반 자동차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시작된
1973년 전국 총파업 투쟁, 광산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1973-74)이 전개되었다. 특히 흑인 노동자들의 1973년
총파업 투쟁은 공공업무를 마비시키고 지배질서의 균열을 가져
오게 하는 등 노동자들의 계급적 힘을 증명하였고, 백인 자본가
계급은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흑인 법외노조를 교섭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요하네스버그 지역과 영국계 미국인 회사들을 중심으로
한 백인 자본가들은 흑인법외노조를 교섭주체로 인정하고
법외흑인노조와의 공식적인 협상을 공포하였고, 광산 자본가들
역시 전국흑인광산노조를 흑인광부들의 교섭대표로
인정하였다.
1974년 8월, 파인타운(Pinetown)에 있는 영국계 제조업 사장인
Smith와 Nephew는 남아공 역사상 최초로 흑인노조와 임금협상을
하였다. 다른 흑인 노조들 역시 노동쟁의의 해결주체로 나서게
되었으며, 자본가들 역시 흑인 노조를 노동쟁의의 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흑인 노조가 “합법성을 부여받지 못한 합법노조”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하고 또한 흑인 노동정책과 관련된 지배계급의
균열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백인 자본가 계급은 흑인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남아공의 평화적인 노사관계를
지속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직물 노동조합(1973.9.), 금속노동자연맹(1974.9),
엔지니어링노조연맹등이 설립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흑인 노동자들은 노조를 설립하여
자본진영으로 부터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또한 자동차산업과
화학산업의 흑인 노조(1977) 역시 공식.비공식적으로 백인
자본가들과의 교섭주체로 나섰던 것이다.
3) 법외노조 갈등기(1979년 - 1983년)
이러한 투쟁의 성과는 흑인노조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노동관계법의 개정과 백인 자본가들의 유연적 통제방식의
도입으로 나타났다. 인종자본축적 과정에서 ‘노동통제
절대성(imperatives)’만을 고수해 왔던 백인 자본가 계급은
‘노동통제의 절대성’만으로 자본축적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점, 합법노조보다 오히려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는
법외흑인노조에 대한 유연적 통제의 필요성 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백인 자본가 계급은 위하흔 위원회를
구성(1977)위하흔 교수를 중심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다수의
자본가 조직과 관료, 국가에 등록된 주요 연맹노조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4명의 위원중 흑인 1명에 불과했다.
하여 노동관계법의 개정안을 협의하였다.
위원회는 노동관계법 개정 권고안을 마련하였는데, 그 핵심
내용은 “노조와 조합원들의 조직 가입의 선택과 자유 완전
보장, 인종.피부색.성에 따른 조합원 자격제한 철폐, 노조의
제반 권리주체 인정, 노동부의 권한 집중, 동일산업내 노동력
파견의 자율성 강화, 미등록노조의 불법파업 원천금지,
제3자개입 금지, 등록의 전제조건 강화노조가 국가에 등록하여
합법성을 부여 받으려면, 노조의 강령과 정책, 노조간부의
주소와 명단, 재정의 상황 등을 기록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등록된 노조는 정당 혹은 정치단체에의 가입을 원천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 등이었다. 위원회의 권고안을 토대로 노동관계법이
개정(1979)되었는데, 이는 노동관계법의 법적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법외흑인노조들을 법체제 내로 흡수하여 간접통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고, 간접통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흑인
노동조합운동에 대해서는 “통행법, 국가안전보장법, 집회 및
시위법” 등으로 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흑인 노동조합운동 진영은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놓고서
갈등.대립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TUCSA와 CUSA는 국가등록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FOSATU는 조건부 수용을, 그리고
서부지역 일반노동조합과 SACTU는 전면거부를 주장하였다.
기본적으로 흑인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지만, 국가등록을 통한 노조 합법화가 흑인
노동자 계급의 역량을 강화시킬 것인지 약화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TUCSA와 CUSA는 국가등록제의 장단점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등록을 통한 노조 합법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수용을 거부하는 것은 흑인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와 흑인 노동자들의 열망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용하여야 한다는 측면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CUSA는
1983년까지 국가등록을 하지 않은채 미등록 법외노조로
존재하였다.
반면에 FOSATU는 ‘흑인 노조의 합법화는 강력한 노동조합운동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국가등록에 필요한
전제조건을 흑인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하는 차원’에서만
수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FOSATU는 ‘국가등록을 통한
합법화 자체가 투쟁의 목표가 아님’FOSATU 중앙위원회 성명서,
FOSATU Workers News, November 1979 참조.
을 분명하게 하면서도 자신들의 장기적인 목표, 즉 “개혁적
노동조합운동의 전략적 목표”FOSATU는 흑인노동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노동조합운동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확실한 장기 목표를 자체적으로 세우고 있다. 그 목표는 아래의
내용과 같다:노동운동에서 합법적으로 강화된 인종차별 철폐;
노동 관계에서 국가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제한; 노조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 확립 등이다.
FOSATU 중앙위원회 성명서, FOSATU Workers News, November 1979
참조.
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적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FOSATU는
국가등록의 전제조건이 오히려 노동조합운동의 전략적 목표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인식.강조하면서 1983년 말까지
국가등록제를 수용하지 않았다.
서부지역 일반노동조합(WPGWU)WPGWU -
서부지역총노동자조합(Western Province General Workers
Unions)는 전체적으로 비인종적 노동자들의 조합이다. 이 조합은
케이프주의 매우 낮은 임금을 받는 아프리카 이주 노동자들
사이에서 조직되었다. 왜냐하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법률에
Cape Colored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남아프리카 케이프주
서부에는 백인과 유색인종과의 혼혈인들이 많이 산다. 그래서 이
조직은 이들을 조직화의 주요 대상으로 히면서 풀뿌리
노동자들의 위원회를 설립하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약
10,000여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다.
과 국외의 SACTU는 ‘국가등록제의 수용으로 노조의 현장장악력
상실, 노조활동에 있어서 법률적 구속장치의 강화, 노조에 대한
국가의 통제 강화’ 등을 강조하면서 국가등록제의 전면거부를
주장하였다.
WPGWU는 노동관계법의 개정을 자본과 국가 사이의 타협에
불과하다고 일축하였다. ‘노조들은 매우 제한된 조건을 가진
등록제만을 받았을 뿐이다. 이런 조건들을 받아들인다면, 사실상
노조는 현장조직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 등록제는 자본가들과 국가 사이의 타협에
불과하다.’서부지역 총노동자조합, ‘등록, 승인, 그리고
조직’, 남아공 노동회보, Vol.5, No.6, p.72.
즉 그들에게 있어서 국가등록제의 수용 그 자체는 국가의
성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와의 음모적 결탁으로
다수의 흑인 노동자들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조는
“국가의 목적들을 진정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가가 제시한 조건하에서는 등록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서부지역 총노동자조합, ‘등록의 문제에 대한 논평’,
위의 책, Vol.5, No.4, p.120.
라고 주장하였다.
망명 상태에서도 국제적으로 남아공 노동조합의 대표체로
인정받고 있는 SACTU, 남아공 노동교육센터(SALEP)와 아프리카
민족의회(ANC) 역시 ‘등록제는 인종차별을 위한 속임수이고
과시용에 불과하고 오직 국가가 조합들을 통제하려는 목적을
위해서일 뿐이다.’남아공:SACTU와 ANC의 노동운동, London
1980, pp.13 - 17.
고 하면서 전면거부를 주장하였고,
남아공노동자동맹조합(SAAWU)SAAWU - 남아프리카
노동자동맹조합(South African Allied Workers Union)은 1980년
BAWU(의식화된 흑인노동조합)으로부터 떨어져나왔다. 노동조합의
조직화를 대중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하면서 노동현장 문제에
보다는 오히려 공동체 문제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주로 동런던과 더반에 약 25,000여명의 회원이있다.
와 식품.통조림제조업(Food and Canning) 노동조합들도
‘등록제를 수락하면 불가피하게 인종차별 국가에 모두 협력하게
될 것이고 정부의 법률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노동조합운동은 약화될 수 밖에 없으므로 등록제를 거부해야할
필요가 있다.’남아공 흑인권력, Newsweek Special Report,
March 9, 1981, p.47.
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흑인 노동자들은 국가등록제를 통한 노조 합법화 전략을
쉽게 수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히려 등록제를 거부하는
법외노조 건설투쟁에 주력하였다.
1980년 부터 노동관계법상 흑인 노조건설이 합법화되자
흑인노조의 조직율은 급성장하였지만, 흑인 노조는 국가등록을
거부한 상태에서 노조를 설립하였다. 1981년 당시 남아공의
노동조합원은 약 142만 명이었지만, 이중 37.7%인 38만 여 명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110여 개 노조가 미등록 상태의 법외노조로서
상급단체에 가입하지 않았고, 10개 노조의 조합원 95,000여
명을 대표하는 FOSATU와 7개 노조의 조합원 49,000여 명을
대표하는 CUSA 역시 둥록을 하지 않은 법외노조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들거부 현상은 1982년에 더욱 급증하였다. 당시
조합원 450,000여 명을 대표하는 131개 노조는 미등록 상태의
법외노조로서 상급단체에 가입하지 않았고, FOSATU와 CUSA도
미등록 상태의 법외노조로서 합법성을 부여 받고 있었다.
4) 합법노조 완성기(1983년 - 1986년)
남아공 흑인노조의 합법화 투쟁은 1985년 COSATU의 1986년
NACTU의 결성으로 마무리 되었다. COSATU는 출발 당시 35개
노조의 조합원 50만 명 정도를 대표하는 산업별 노동조합이었다.
NACTU는 1986년에 결성되었는데, 역시 23개 노조의 조합원 42만
명 정도를 대표하는 산업별 노동조합이었다. COSATU와 NACTU
건설의 실질적인 토대는 국가등록제를 거부한 상태에서 시작된
흑인 노동조합운동의 조직건설투쟁이었다.
1983년 “국제금노동조합연맹 남아프리카협의회”가 산별체계를
기반으로 결성되었다. 이 협의회는 비록 7개 노조만이
참여했을지라도 미등록.미가입 노조와 FOSATU, TUCSA, CUSA에서
이탈한 노조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남아공 철강산업의 모든
노동자들을 대표하였다. 이 협의회는 “철강산업에서 노조의
정책과 행동의 연대 그리고 보다 강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금속
노동자들의 통일된 요구와 행동”을 지향했지만,
실질적으로는흑인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발전투쟁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투쟁에 힘입어 미가입.미등록 노조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흑인노동조합연맹이 결성되었다. 주로 광산, 보험,
건축업계 흑인노동자들 중심으로 총 20개의 흑인 노조가 참여한
흑인노동자연합노조(BAWU)와 신연맹(NA)이었다.
1983년 흑인을 제외한 백인. 혼혈유색인. 인도인 중심의
“3원의회” 제도가 도입되고, 이를 대중적 투쟁으로 저지하기
위한 통일민주전선(UDF)이 결성되자 국제금노동조합연맹
남아프리카협의회, 흑인노동자연합노조(BAWU), 그리고
신연맹(NA)은 1983년 부터 COSATU가 결성되기 이전까지 흑인
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UDF 내에서의 대중투쟁을 주도하였다.
특히 ‘노조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발표되자, 흑인 노동자들은 대대적인 파업투쟁을
전개하였고, 백인 자본가 계급과 아파테이트 정권은 흑인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구속.감금.물리적 탄압으로 맞섰다.
철강노동자와 광산노동자들은 1983년 - 1984년 남아공의
파업투쟁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파업투쟁의 결과, 파업투쟁에
참여한 흑인 노동자의 5% 정도가 집단해고를 당했으며, 1983년에
흑인 노동자 560,334명이 실형을 선고받아 구속되었고, 1984년에
흑인 노동자 1,300여 명이 사상당했다. 더욱이 1985년 -
1986년의 경우, 아파테이트 국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여
흑인 노동자들의 조직적 저항과 투쟁을 총칼로 탄압하였기
때문에 흑인 노동자들의 사상자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그렇지만
흑인 노동조합원의 수는 급증하였다. 1983년 흑인 노동조합원은
약 61만 명이었지만, 1984년 흑인 노동조합원은 약 83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흑인 노동자들의 이러한 투쟁이
‘국가비상사태’하에서 COSATU와 NACTU를 결성해내는 실질적인
힘이었다.
3. 간단한 과제와 교훈
남아공의 흑인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국가의 합법화 정책을
물리쳤고, 투쟁으로 흑인노조 실질적인 합법화를 쟁취”하였다.
즉 제도적인 합법화가 곧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합법성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법외노조로서 합법성을 부여받고 있든지 제도적
노조로서 합법성을 부여받고 있든지 간에 노동조합운동의
실질적인 합법성은 국가의 법률적 절차만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조직적 단결과 투쟁, 즉 자본가 계급과의 계급적 “힘
겨루기”에서 이길 수 있는 계급역량의 강화와 투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아공의 흑인 노동자들은 1987년 - 1988년에 “임금인상과
노동관계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총파업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ANC, UDF, 남아공공산당 등 남아공의
정치적 변혁운동 세력들은 이러한 투쟁을 토대로 전면적인
대중민주주의운동(MDM)을 전개하여 아파테이트 정책을
폐지(1990)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COSATU와 NACTU는 이미 1989년에 상호합의한 ‘1국가
1산별노조’를 공동으로 건설해 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조직통일투쟁’만이 ANC 정권하에서 자본파업을 무기로
삼고 있는 백인 자본가들에게 보다 통일적으로 계급적 “힘
겨루기”를 할 수 있고, 인종자본주의의 유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흑인 노동자들의 완전한
계급적 해방의 디딤돌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노동법개악저지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남아공 흑인 노동자들의 투쟁과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특히 “상급노조 합법화” 문제는 전술적 장단점과
전략적 장단점을 통일적으로 고려하는 과정을 요구한다. 단지
“3금 3제”를 수평적 교환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3금 3제”
뿐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법 개정조항들을 계급투쟁의 역량강화와
직결되는 수직적 결합관계로 설정해야 한다. 즉 민주노조진영은
노동자 계급역량의 균열을 초래하는 투쟁을 지양하되 계급적
힘을 토대로 지배계급의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 투쟁을
지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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