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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와 자본주의

현장에서 미래를  제2호
강수돌

기획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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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냐 노동이냐




 

자본간 경쟁이 국경을 넘어 격화되면서, 국내 독점자본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총자본의 공세가 거세어지고 있다. 

공기업의 민영화, 자본의 신경영전략 등으로 드러나는 자본합리화 공세는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과 ‘자본 축적의 효율성’ 그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노동자의 생활과 노동을 새롭게 재편하려 하고 있다. 자본의 이러한 공세 앞에서 노동자는 ‘자본 축적의 논리에 전면적으로 순응하느냐’, 아니면 ‘미래 사회의 새로운 삶의 대안’을 찾아 투쟁하느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해 있다. 이 양자택일의 문제는 단지 생산현장에만 국한되어지지 않고, 노동자를 둘러 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기되고 있다. 법적?제도적 측면만이 아니라 가치관?문화?습관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세계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이 양자택일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자본이냐 노동이냐’.  

이 기획은 생산현장에서의 노?자간 대립을 둘러 싼 쟁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을 둘러 싼 모든 영역에서 자본관계에 의해 은폐된 현실을 드러내 보이고, 노동자의 눈으로 세계와 미래를 재구성하고자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 첫 내용으로 ‘인종주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와 무관한 듯이 보이는 인종주의가 어떻게 자본의 노동자 관리 수단으로 기능하는지, 차별과 위계를 중시하는 기업 조직의 원리 역시 인종주의적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기획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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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냐 노동이냐(1)

인종주의와 자본주의




강수돌(연세대 강사, 경영학)



인종주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생물학적 특성의 이용수단


인종주의(Racism, Rassismus)란 일정한 사회적 집단이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겉모습(피부색, 골격, 머리카락 모양 등)이나 또는 그 문화(종교, 언어, 관습 등)가 다르다고 하여 이들을 자신들과 완전히 다르거나 열등한 어떤 것으로 구별짓고 차별하는 행위를 뜻하며, 대개는 사회의 소수민족이나 소수집단에 대해 취하는 차별적이며 배타적인 행위를 말한다(Castles & Miller, 1993:29). 다시 말해 신체적, 문화적 특성의 차이를 우월성의 근거로 삼아 여러 집단 사이에 중요도를 달리 두거나(사람가치의 위계질서), 특정 집단이 선민의식을 가짐으로써 다른 집단에 대해 차별적으로 권위와 지배를 행사하고자 하는 것이 인종주의의 핵심이다. 따라서 인종주의란 대단히 정치적인 개념이다. 이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이나 태도와 행동은 사실상 지배집단이 특정 집단을 그 사회적 의사결정으로부터 배제하거나 이들을 구조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고 유포시킨다. 나아가 이러한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은 특정 집단의 차별과 배제를 구조화시키는 법이나 정책, 관리관행 등으로 제도화되기도 한다.

이른바 ‘선진국’ 사람이 ‘후진국’ 국경을 넘어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지만 거꾸로 ‘후진국’ 사람들이 ‘선진국’ 국경을 넘어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이며 대단히 자존심이 상하는 과정이다(영화 「살바도르」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해 볼 것). 이것은 ‘입국과 체류에 관한 법률’ 및 ‘비자제도’ 등을 수단으로 하여 민족국가 단위의 국경통제가 강력하게 이뤄지기 때문이다(Heide, 1993:285 이하 참고). 문제는 국경통제 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민족별로, 나라별로 차등통제된다는 점에 있다. 국경선 자체는 집단간 사회적 세력관계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고 통합되기도 하고 새로 그어지기도 하는 등 부단히 운동하는 반면에, 이 경계선을 기준으로 이뤄지는 차별적 통제와 위계질서 그 자체는 존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차별적 국경통제는 자본의 국제화, 생산의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점차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형태로 강화된다. 바로 이것이 인종주의가 현대적으로 제도화된 것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인종주의란 결코 생물학적인 특성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종주의야말로 정치·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생물학적인 특성을 이용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 인종주의적 제도나 구조들이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은 각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나 지배집단의 이해관계 및 사회적 세력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인종주의의 역사


한마디로, 인종주의는 인류사회에서 계급제도가 발생하면서 나타나고 확산되며 구조화된다. 노예제도가 특정한 인종, 예컨대 아프리카 흑인들과 결부되어 이해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미 고대사회에서부터 당시의 지배계급과 그 이론가들은 노예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인종주의를 ‘만들어’ 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정치학’에서 노예제도를 정당화시켰는데, 그 근거는 여러 종족과 국가들 사이에 ‘자연적인 차이’가 있어 한 쪽은 우월하고 다른 쪽은 열등하다는 것이었다(Sandkuhler, 1990:17). ‘자연적으로’ 열등한 종족은 자연적으로 우수한 종족에 의해 관리되고 지배되어야 한다는 이 인종주의 사상이 당시의 노예제도를 뒷받침했던 것이다.

근대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는 이 인종주의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중세 유럽에서는 원래 종교계와 봉건제후들이 지배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지리상의 새 발견과 종교개혁운동 등으로 봉건세력의 지배권이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어 중세 말기인 17, 18세기 유럽사회의 경우, 절대왕권을 배경으로 하는 지배집단이 중심이 되어 기존의 봉건적, 분권적 지배체제와 지방 및 도시공동체의 자치권을 타파하고 중앙집권적으로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역사의 격동적 변화과정에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민족이나 사회집단 간에 이익과 권리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이 벌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지배자들은 자국민의 우월성을 내세워 자민족을 중심으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 특유의 민족성이나, 생물학적 특성, 고유의 문화적 풍토 등을 강조하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권력을 정당화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19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찾아 제국주의 국가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백인’(아리아족) 사회 고유의 여러 전통들, 이데올로기들, 문화적 관습들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면서 그 우월성과 선진성을 ‘후진국’과 원주민들에게 강요함과 동시에 거꾸로 원주민들의 신체상 겉모습, 풍토와 습관, 문화 등을 열등하고 저급한 것으로 낙인찍는데(Lavater; Gobineau 1855; Lapouge 1896, 1899; Chamberlain 1899등), 바로 이러한 것들이 ‘선진국’의 인종주의를 사실상 뒷받침하고 있다(Castles & Miller, 1993; Miles, 1989). 오늘날 우리의 귀에 익숙한 ‘흑인’과 ‘백인’의 대립이라든가 또는 ‘백인’과 ‘유색인종’의 대립이라는 것은 사실상 이와 같은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적 팽창이 만들어 낸 하나의 결과이다. 요컨대 민족국가의 건설과정과 자본주의의 전개 및 제국주의의 팽창과정에서 지배집단이 효율적 통치와 지배권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 인종주의는 ‘의식적으로’ 개발되고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종주의는 자민족에 대한 극단적 우월과 과시, 타민족에 대한 멸시와 배척, 차별 및 증오, 왜곡 및 편견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고 전쟁과 정복, 착취와 지배, 위선과 오만을 사전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종차별 의식이란 지배집단이나 그 구성원이 자신의 ‘우월하고도 순수한’ 이미지와 품위를 지키기 위해 특정한 언어, 습관, 태도, 생활방식을 개발하고 유지시키도록 자기강제한다는 점에서 성차별 의식과 마찬가지로 상대방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서도 작용한다(Wallerstein, 1983:92).

인종주의, 자본의 노동자 관리 수단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인종주의는 이와 같이 유럽사회에서 출발해서 아프리카와 신대륙으로 뻗어나갔다. 즉 인종주의는 자본주의 아래서 가장 정성스럽게 다듬어져서 제도화되고, 또 이것이 거꾸로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기둥의 하나가 되어 온 셈이다(Wallerstein, 1983:91). 물론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국외자에 대한 혐오증 내지 배외주의(Xenophobia)는 자본주의 이전에도 널리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삶의 경계선 바깥에 있는 누군가에 대한 혐오감, 경계심, 억압, 배척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인종주의란 자본주의 체제라고 하는 삶의 경계선 내부에 있는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하도록 강제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인종주의는 혐오의 대상을 내쫓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선 안에 더욱 잘 가두어 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Wallerstein, 1983:122). 우리는 이 인종주의의 역사적 흔적 뿐만 아니라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도 은연 중에 스며들어 있음을 많은 영화 속에서도 직‧간접적으로 읽어 낼 수 있다. 저 유명한 영화 ‘미션’에서부터 ‘검은 승복’, ‘파워 오브 원’, ‘미시시피 버닝’ 등은, 과연 인종주의의 기원은 무엇이고 그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데 좋은 가르침을 준다. 심지어 이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의식에서 만들어진 영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만딩고’, ‘부시맨’ 등에서조차 우리는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깊이 녹아 들어 있는가를 읽어 낼 수 있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인종주의는 단순히 피부색의 차이를 이유로 여러 노동력 집단을 심하게 차별대우하거나 노예제도를 유지시키는 데 한 몫을 하였고 특히 ‘흑인’ 노동력을 유혈적으로 착취하기 쉽게 해 주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인종주의적 사고와 행위의 기저에는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민족과 민족, 인종과 인종 등 인간 사이의 차별과 위계의 존재 자체를 당연시하는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 차별과 위계는 경쟁과 분열을 의미하므로 연대와 저항을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를 지닌다. 이것은 자본에게 직접적인 생산비용 뿐 아니라 범사회적, 범지구적 저항을 예방하여 ‘분규’로 인해 생길 수도 있는 엄청난 손실비용까지도 절약하게 해 준다. 자본은 결국 일국적 차원 뿐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 노동자를 통제, 통합, 지배하는 데 들어갈 어마어마한 비용을 차별화와 위계화 전략을 통해 가능한 한 줄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전체적으로 자본은 위계질서화를 통해  선진국에서 뿐만 아니라 후진국에서조차 더 잘 증식하게 된다(Heide, 1993:288). 선진국에서는 후진국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후진국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명분 속에 각각의 노동자계급을 보다 잘 동원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종주의는 분명히 세계적 차원에서 직접적인 생산자들을 확실히 관리하는 효율적 수단으로 작용한다(Wallerstein, 1983:97).


인종주의와 자본주의 운동


그러면 자본주의의 현실적 운동과정에서 인종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가? 우선 자본주의가 일정 정도 발전하여 원만하게 성장하고 있을 때, 그리고 자국 내에 ‘쓸만한’ 노동력이 충분하지 않을 때에는, ‘흑인’ 등 값싼 해외 노동력은 적극 수입되어 환영을 받지만 보다 열등한 부류의 사람들로 분류되어 당연히 저급한 노동을 수행해도 좋으며 또 그래야 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경제가 흔들리고 공황과 실업이 확대되면 이 값싼 노동력은 ‘우수한’ 내국인들의 일자리와 거주공간 및 사회적 부를 뺏앗아가는 ‘기생충’으로 취급되기 일쑤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것도 모자라 이들을 특정 사회에서 격리 수용하거나 아예 그 ‘씨를 말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등장하게 된다. 이 극단적 인종주의는 사실상 세계자본주의가 공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특정 국가의 자본주의가 국내적 억압과 대외적 전쟁을 통해 그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과정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는 그 실례를 독일 나찌즘 지배 아래의 유대인 학대와 학살 속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이러한 시각에서 다시 본다면 우리는 인종주의가 자본주의의 운동과정과 어떻게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가를 쉽사리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업조직 속의 인종주의, 차별과 위계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인종주의적 사고방식 속에 깔린 차별과 배제, 위계와 지배의 논리가 오늘날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기업조직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기업조직이란 온갖 차별과 위계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야만 존속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신규채용은 물론 임금과 승진, 복리후생, 교육훈련 기회 등에서 성차별, 나이차별, 능력차별, 지역차별, 학력차별, 출신국 차별, 직무차별 등이 이뤄지는데도 많은 경우 노사양측으로부터 당연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말로 무서운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차별과 위계의 구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채 지구촌의 모든 이웃 사람들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그 사다리의 높은 쪽으로만 올라 가려고 생태계 전체를 파괴하면서까지 혼신을 다해 땀흘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학교에서는 ‘일등’하고자 하는 병으로, 기업에서는 ‘승진’하고자 하는 병으로, 나아가 최고의 ‘생산성’과 최고의 ‘경쟁력’을 이루고자 하는 병으로, 나라 전체적으로는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병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병적인 사회 속에 살면서도 사회와 자신의 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개인적으로’ 눈 앞의 많은 떡고물과 사다리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평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들을 인종주의와 자본주의의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오히려 인종주의와 자본주의를 함께 만들고 유지시키는 ‘공범자’라 부를 수 있다.

한노정연


< 참  고  문  헌 >


Castles, S. & M. J. Miller(1993), The Age of Migration: International

Population Movement in the modern World, NY.


Heide, H.(1993), “Nation als strategischer Parameter des Kapitals: Eine

nicht-okonomistische Interpretation auf Grundlage der Marxschen

Werttheorie”, “자본의 전략변수로서의 민족: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에 근거

한 비경제주의적 해석”, ꡔ이론ꡕ 1993년 가을, 257 - 290쪽.


Sandkuhler, H. J.(1990)(Hg.), Europaische Enzyklopadie zu Philosophie

und Wissenschaften, Bd.4, Hamburg.


Wallerstein, I.(1983), Historical Capitalism, London; 배손근 역(1986),

역사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서울:나남.

1995-09-2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