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3)-프랑스 국와도 가지지 못한 것을 신하가 가지고 있다니 |
현장에서 미래를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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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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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도 갖지 못한 것을 신하가 가지고 있다니!”
이산하(서울대 법대 재학)
‘창조의 기쁨’아저씨
따사로운 파리의 햇볕이 우리의 낯을 간지르자, 우리는 그제서야
깨어나 세수를 했다. 오늘은 베르사이유 궁전에 가기로 한
날이다. 오늘도 파리 민박집에는 새 손님들이 찾아 왔다. 그들은
‘영국에 어학연수 중인 한국 학생’들이었다. 공부하기가
지겨워 배낭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녀 한쌍이었다.
“애인이랑 함께 여행하니 참 좋겠어요?”
“애인이요? 그냥 친구예요.”
부러운 듯 쳐다보는 우리들의 눈을 의식해서였는지 ‘그냥
친구사이’(?)라는 말을 수고로이 덧붙였다.
한 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자연 그곳을 거쳐가는 사람들과
사귀게 됨은 물론이고, 나름대로 서열이 생기게 마련이다. 배낭
여행객들의 나이가, 남자의 경우 군대 제대하고 나서, 복학하기
전에 떠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스물 다섯 안팎인 경우가 많으며,
여자의 경우는 스물 한두살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당연 나는
조금 연배가 있는 축에 끼게 된다. 더구나 파리 민박집에
터줏대감처럼 자리잡고 있으니, 나는 때 아닌 ‘왕고’ 노릇을
톡톡히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가는 사람
‘배웅’하고, 들어오는 사람 ‘대접’하는 역할을 자연스레
떠맡게 된 것이다. 어느덧 이곳 파리 민박집에 들고 나는 사람들
속에서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삶의 변증법을 터득하게 된
듯하다. 한 사람이 온 것 같으면, 며칠새 정이 든 다른 사람이
나가고.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민박집 바로 앞에 있는 대형 슈퍼마켓에 가서 장을 보았다.
오늘의 요리는 ‘감자볶음과 참치찌개’. 땀을 뻘뻘 흘리며
요리를 끝낸 후, 오늘의 손님을 모셨다. 물론, 한마디로
"Good!"이었다. 한국에서는 그렇게도 안되던 요리가 파리에서는
일류 요리사 솜씨 뺨친다. 그것은 아마 내 요리 솜씨의 세밀함
때문이기 보다는, 손님들의 입맛이 한층 ‘너그러워’졌기
때문이리라. 그 까탈스럽던 서울 입맛도 이곳 유럽에서 순전히
바게트로만 배를 채우니, 어떤 음식이든 맛이 없겠는가? 그만큼
그들의 입맛이 ‘넉넉해져’ 있던 탓에, 나는 일류 요리사,
‘창조의 기쁨’ 아저씨가 되고 말았다. 한편, 함께 간 친구는?
그는 ‘설겆이로 쾌락을!’ 이었다.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베르사이유로 가는 방법은 생미셀이나 엥발리드, 오스테를리츠
역 등에 가서 RER(서울에서 수원, 인천 등으로 연결되는 국철과
비슷한 것) C선을 타고, 베르사이유 리브고쉬(Versailles Rive
Garche)역에서 하차하면 된다. 요금은 21Fr 정도이고,
유레일패스가 있으면 RER 창구에서 탑승권을 공짜로 받을 수
있다.
드디어 우리는 파리 민박에 함께 묵었던 나의 ‘손님’,
‘재섭이 경희’와 함께 야유회 가는 기분으로 베르사이유를
향해 출발했다. 물론, 우리의 민생고를 해결해 줄 샌드위치를
양껏 만들어서 말이다. 베르사이유를 방문할 때는 꼭 점심을
준비해야 하는데, 궁(宮)내에는 어떤 식당시설도 없기 때문이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궁전을 짓겠다’는
포부로 엄청난 돈과 물자를 들여서 지은 베르사이유이지만, 그
외관만큼은 유럽의 다른 궁전들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내부에 들어가면 ‘절대권력의 명성’만큼이나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우리 귀에도 익은 ‘거울의 방’에는 무려
578개의 거울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1687년 망사르에
의해 ‘무도회장’으로 만들어진 곳이지만, 오히려 이곳에 얽힌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역사이야기 때문에 더 유명하다.
철혈재상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 제국의 건설에
성공한 후, 1870년 전격적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이 바로 보-불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은 바로
이곳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알자스/로렌지방을 돌려주고,
전쟁배상금으로 50억 프랑을 물어내라는 ‘강화조약’을
프랑스에게 강요한다. 한번도 전쟁에 져서 파리를 점령당한 적이
없는 프랑스 국민들은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하는데, 딱 48년
후에 그들은 똑같은 장소에서 복수를 한다. 1914년에 시작된
세계 제 1차 대전이 1919년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게 되는데,
이때 프랑스는 바로 이곳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독일을 불러내
‘항복조약’을 맺게 한다. 알자스/로렌 지방을 다시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식민지를 몽땅 내놓고, 10만 명 이상의 군대를 갖지
못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전쟁배상금으로 1,320억 마르크를
금으로 갚으라는 것이었다. “역사란 한번은 희극으로, 또
한번은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말이 이처럼 맞아 떨어진 경우도
드물 것 같다.
과인은 즐길 따름
앙시앙 레짐 시대, 베르사이유 궁전은 한마디로 ‘방탕과
통음난무’의 연회장에 다름 아니었다. 베르사이유 정원을
사냥터로 쓰기 시작했던 루이13세 시절부터 시작된 ‘방탕’은
루이 14세에 들어 절정에 달했다. 당시 지배계급이 믿는 단
하나의 종교는 “과인은 즐길 따름”이라든가 “내 뒤에야
어떻게 되건 내 알 바 아니다”란 생각이었다. 시대가
그러다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기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첩들 -‘라발리에르, 몽테스팡, 퐁탕주,
맹트농’ 등- 이 ‘6명이나’ 되었는데, 이는 ‘절대주의
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겨우’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루이 14세는 ‘품행이 방정하다’는 평가까지
받았다고 한다.
루이 15세는 베르사이유 궁전 내에 어린 소녀들로 꽉 찬
유곽까지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에두아르트 푹스는 ‘풍속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베르사이유 궁 안에는 어린 소녀들이 있는 큰 유곽이 있으며
그곳에서 궁중보고서, 즉 공식적으로 루이 15세가 그날 그날의
통음난무에 이름을 붙이는 국왕의 ‘쾌락의 메뉴’가
조달되었다. 국왕이 즐기는 음식은 이른바 ‘영계’이기 때문에
유명한 녹원(鹿苑)의 거주자는 거의 소녀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한편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황제였던 루이 16세 시절에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안주인인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루이
가문의 명성에 버금가는 사치와 방탕의 화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녀는 왕비 자리에 앉은 첫 해에 장식품과 장신구류를 사기
위해 30만 프랑이라는 목돈을 빌렸는가 하면, 1776년에 파리의
보석상 뵈머의 가게에서 한쌍의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348,000
리브르(프랑스의 옛 화폐단위인 듯 함)를 들여 사기도 했다. 그
돈은 당시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던 몇 천명의 노동자 가족이
1년 동안 편히 살 수 있을 만한 액수였다.
베르사이유 궁전 내부 곳곳에는 궁전 주인들의 방탕 냄새가 코를
찌른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이유 감옥을 점령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은 바로 ‘방탕의 시대’를 걷어내고, ‘민중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프랑스 민중들의 열망이었으리라. 당시
루이 16세의 7월 14일 일기에는 ‘별일 없음’이라고 씌여져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민중들의 고통과 핍박에 무관심하고,
지배계급의 사치와 향락에는 관대할뿐더러 스스로가 열중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리라. 혁명 발발 이후에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매일 연회를 하면서 국고를 탕진했다고 하니, 그
후안무치(厚顔無恥)에 기가 막힐 뿐이다. 당시 파리 시민들은
내일의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결국 분노한 파리 시민(여성)들이 ‘빵을 달라!’며 파리에서
베르사이유까지 행진했다. ‘파리가 행진해 온다’는 소식에
당황한 나머지, 루이 16세는 그때까지 미루고 있던 인권선언에
대한 최종적 재가를 황급히 결정해서 그 회답을 국회로 보내,
‘분노한 파리 여성들’을 달래보려 했다. 그러나 파리 여성과
군중들의 태도는 완강했으며, 결국 ‘왕과 왕비, 그 가족들’을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데려오게 된다. 절대군주로서의 자격을
실질적으로 박탈하고,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행해진 방탕의
연회에 종지부를 찍은 이 사건에 대해, 역사가 마실레는
“남성들이 7월 14일(바스티유 점령)을 만들고 여성들이 10월
6일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좋은 술동이의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盤佳肴萬姓膏(옥반가효만성고)
옥 쟁반의 좋은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다.
燭淚落時民淚落(촉루락시민루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도 떨어지며,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 소리가 높구나.
지배계급의 잔치를 위해서는 민중의 피와 살이 필요했음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역사의 진리임을 다시한번
확인한다.
국왕도 갖지 못한 것을 신하가 가지고 있다니!
베르사이유 궁전 내부의 화려함 속에서 역설적으로 프랑스
민중의 고혈을 느꼈다면, 이제 그 구역질나는 곳을 나와
정원으로 들어가라. 탁트인 공간에 무성히 자란 가로수들과
호수, 그리고 분수대는 궁전 내부의 답답함을 일시적이나마
해소해 줄 것이며, 시야의 시원함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정원을 지금의 형태로 완성시킨 데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루이 14세 시대 당시 재무총감이었던
니콜라 프케는 르 노트르라는 조경가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
보 르 비콩트 성관의 정원을 만들게 했다. 르 노트르는 프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분수, 계단, 무늬화단, 식수 등을
총동원하여 멋들어진 프랑스식 정원을 만들어 냈다. 드디어
프케는 1661년 8월 17일 루이 14세를 이 성관에 초대했다. 루이
14세는 그 훌륭한 정원을 보고, “국왕도 갖지 못한 것을 신하가
가지고 있다니!”하고 언짢아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9일 후
프케는 독직 혐의로 체포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종신형에
처해졌다. 보 르 비콩트 정원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던 루이
14세는 드디어 르 노트르를 불러 베르사이유 정원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십자형의 운하를 중심으로 그 뒷편으로는 울창한 숲이 정렬해
있으며, 양 옆으로는 가로수 길이 정연하게 나 있다. 베니야마
유키오는 베르사이유 정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느 것이나 뒤에서 바라보면 정원 좌우에 울창하게 숲이
우거져 있다. 이것은 잘 계산해서 만들어진 인공의 숲으로 마치
그림의 액자처럼 정원 전체의 경관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것이 보스코(프랑스어로는 보스케, 숲이란 뜻)인
것이다. 이것이 없는 경우를 가정하면 베르사유의 정원도
쇤부른의 정원(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궁전과 정원)도 웬지
허전하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한마디로 베르사이유 정원은 프랑스식 정원(평면기하학식)의
극치라고 할 만 하다.
서양의 근대 철학의 전통이 그렇듯이, 나는 이 정원에서조차
‘자연을 정복한 인간의 오만함’ 같은 것을 느낀다. 모든
권력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었던 절대 군주가 자연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모든 것이
인공적이고 기교적이며, 위압적이다. 원래 늪지였던 이곳에
세느강의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인공 수로를 내고, 정원의 정
중앙에 거대한 운하를 만든 것 하며, 정원의 화려함을 위해
1천여개의 분수대를 설치한 것 등에서 ‘절대군주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가로수의 가지치기 조차 자로 잰 듯이 반듯한데, 그
모습은 ‘질서정연함’이 아니라, ‘자연을 마음대로 요리하려는
인간의 그릇된 자만심’이 엿보일 뿐이다.
정원(庭園)과 원림(園林), 그리고 자연과 인간
인공과 기교가 넘쳐 흐르는 베르사이유 정원에서 나와 같은
한국인의 눈맛을 그나마 채워주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마리 앙트와네트가 만든 ‘트리아농 정원’이다. 18세기 전반
자연주의의 발흥과 더불어, 너무나 인공적이고 기교적인 것에
반대하여, 가장 자연스러운 풍경을 닮은 정원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불규칙한 나무나 연못,
구불구불한 냇물이나 산책로 등을 정원에 도입한 것이다. 이를
프랑스식 정원과 비교하여 영국식 정원 혹은 풍경식 정원이라고
하며, 전 유럽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이에 마리 앙트와네트가
베르사유 정원의 한 구석을 개조하여 만든 영국식 정원(풍경식
정원)이 트리아농 정원이다. 작은 트리아농 궁전 옆으로
들어가면 본래부터 거기에 있던 것처럼 여겨지는 자연스런
냇물이나 연못이 나타나고 연못을 둘러싸고 물레방아나 농가풍의
건물이 있다. 그 옆에 마리 앙트와네트가 사용했던 왕비의 집이
있다.
그러나 트리아농 정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김치찌게’를 먹는 기분이다. 자연을 닮으려고
‘일부러 죽은 나무’를 심어 놓기까지 했으니, 첨가된 조미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조미료를 첨가하여 섣불리 낸
맛이 진실로 ‘우러나온 맛’을 당해내지 못하듯이, 제아무리
‘자연을 닮은 정원’이라 한들 그것이 ‘진실로 자연’만
하겠는가? 오히려 ‘자연을 닮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들어내는’ 일들이 자행되지 않겠는가? 돌 하나, 풀 한 포기
조차도 자기 자리가 있으며, 그러할 때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법이다. 함부로 그 이치를 깨뜨려서는 안된다. 그러고 보면
프랑스식 정원이나 영국식 정원이나, ‘자연을 경영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맥은 상통한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나는 우리나라 선조들의 ‘원림’이라는 것이
얼마나 진보적인가를 깨닫게 된다. ‘인간의 오만한 자만심’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되는 인간’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
‘원림(園林)’의 진보성을 이역만리 프랑스의 베르사이유에서
깨닫게 된다. 원림은 자연을 찾아가, 그 속에 인간을
조화시키려는 철학의 반영이다. 프랑스식 정원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며,
영국식 정원(풍경식 정원)은 고작해야 ‘자연을 모방’했을
뿐이다. 자연속에서 인간을 찾고, 그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세상을 운영해 나가려는 인간의 솔직함이 우리 선조들의
‘원림’에는 베어있는 것이다. 유홍준 선생은 이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정원이 일반적으로 도심 속의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작업을
통하여 동산(園)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
-옛날에는 성밖- 에서 동산(園)과 숲(林)의 자연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원과 원림에서 자연과 인공의 관계는 정반대로
된다.”
즉, 원림은 “인공의 정성과 공교로움을 다하고 있지만, 그
사람의 손길들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자연을 경영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자연 속에 행복하게 파묻히고자 하는 온정을 심어놓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우수한 철학적, 미학적
전통인가.
아무튼 우리 일행은 트리아농 정원에서 잠깐의 휴식과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 베르사이유 정원의 그 거대함에
기분이 거슬린 사람들은 꼭 이곳에 들리길 바란다.
신음의 가로수 길
베르사이유 정원을 도보로 돌려거든 상당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거대한 운하를 중심으로 가로수 길을 걸으려면 적어도
2~3 시간은 족히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정원의 입구
근처에서 자전거를 빌려준다. 가능하면 자전거를 타고 가로수
길을 돌아보길 권한다. 우리는 젊다는 핑계로, 자전거를 빌리지
않고 도보로 숲을 한바퀴 돌았다. 우리가 베르사이유 정원에
들어간 시간은 오후 4시였는데, 숲을 우여곡절 끝에 한바퀴 돌고
난 후 시간은 저녁 9시경이었다. 물론 정원의 정문은 닫힌 지
오래였다. 하는 수 없이 정문에서부터 조금 떨어져 있는 다른
문으로 나오려고 벨을 눌렀는데, 수위 아저씨가 나오더니
다짜고짜 ‘왜 이렇게 늦었냐고’ 화부터 냈다. 우리는 ‘길을
잃었다’고 변명을 한 후에야 겨우 나올 수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초죽음이 되어 숙소인 ‘파리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우리는 아주 천천히 숲속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관계로 -
심지어 숲 바깥에 있는 옥수수밭까지 돌아 다녔다 - 시간을
그렇게 많이 허비했지만, 가로수 숲 속 길만을 따라서 걷는다
하더라도 결코 녹록치 않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 베르사이유 정원의 가로수 길이 한 때 ‘신음의
가로수 길’이라고 불려졌는데, 거기에는 아주 재미있는 역사적
사연이 있다. 16, 17, 18세기까지 유럽에는 심지어 궁전에조차
화장실이 없었다. 그 대표격인 베르사이유 궁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귀부인들이 궁전 복도의 후미진 곳이나 가로수 밑을
찾아가 대소변을 보았다.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섭정 오를레앙
필립 2세의 어머니)가 독일의 하노버 선제후 부인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 때의 풍경이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의 대변이 얼마나 좋은 냄새가 나는지를 모르고 대변을
보는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부인의 병은 그 대부분이 대변을
보지 않기 때문에 연유한 것입니다. 의사가 부인에게 대변을 볼
수 있도록 만든다면 부인의 병은 곧 나을 것입니다. 인간은 먹은
결과로 오직 대변을 본다든가, 고기가 대변을 만든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대변이 고기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장 맛있는 돼지는 대변을
가장 많이 먹은 돼지입니다.... 대변을 시원하게 보는 기분이란
부인을 참으로 놀랍게 할 것이기 때문에.... 행길이건,
가로수길이건, 공원이건, 남의집 문앞이건 눈치볼 것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쪽은 대변을 보고 있는 쪽이 아니라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쪽이니까요... 대변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저의 의견에 부인이
찬성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무렵에는 극히 얼마 안 되는 집에만 화장실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대소변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이는 베르사이유 궁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베르사이유 정원의 가로수 길을
“신음의 가로수 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당시의 기분을 느껴볼 겸 가로수 길의 어느 한적한 곳에서
볼일을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큰 것말고 작은 것으로. 물론
지금은 베르사이유 궁전의 출입구 근처에 ‘관광객용’ 화장실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자유롭게 무단횡단 할 수 있다면?
나의 유럽 여행 경로는 영국 런던에서 출발하여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의 순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런던과 프랑스 파리,
그리고 벨기에에서 나는 그들 도로 교통 문화의 특징적인 면을
볼 수 있었다. 배낭여행객들을 맨 처음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횡단보도에서다. 파란 불이 켜질 때까지 점잖게 기다리는 사이,
본국인들은 도로의 차량 흐름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신호등의
색깔에 관계없이 길을 건너는 것이다.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100% 여행객들이라고 보면 된다. 이러한 특징은
‘런던’, ‘파리’, ‘로마’ 등 모두가 비슷하다. 파리
민박집에서 만난 어느 한국인 배낭객이 한번은 신이 나서 내게
이렇게 얘기했다.
“민박집에 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넜는데, 바로 앞에
경찰이 있더라구요. 나는 당황했고, ‘드디어 걸렸구나! 벌금이
얼마지?’라는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여기는 서울이 아니고 파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봉쥬르’하고 인사를 건낸 후, 당당하게 버스를
타고 돌아왔죠.”
경범죄 단속한답시고, 시시콜콜한 도로에서조차 ‘숨어서
단속하는’ 서울의 경찰들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곳
유럽에까지 와서 본능적으로 경찰들을 두려워할까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물론 파리에서도 샹젤리제 거리와 같은 큰
도로에서는 지나가는 자동차가 워낙 많기 때문에 신호등 체계가
지켜진다. 그러나, 자동차의 흐름이 그리 급하지 않고 폭이 그리
넓지 않은 도로에서는 ‘보행자들’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겨
놓는다.
자동차의 운전자들 또한 이러한 자율적 횡단체계에 잘 부응해
준다. 신호등의 색깔에 관계없이 ‘보행자’가 횡단하고 있으면,
자동차가 멈춰서서 보행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서유럽에서는 거의 ‘자동차 경적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실제로 우리는 런던, 파리, 벨기에를 지나도록
한번도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듣지 못했다. 우리가 그 그리운(?)
경적 소리를 듣게 된 것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유럽의 남쪽으로
내려가고서였다. 지중해를 가슴에 품고 있는 프랑스 남쪽 지방의
니스에서였다.
좁은 골목길에서조차 시시때때로 ‘빵빵’ 소리를 들어야 하는
서울의 교통문화가 안타깝다.
“빈으로 가는 기차 맞아?”
우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원래 오스트리아 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빈으로 들어가는 야간열차는 새벽 12시 30분
경이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에서 버스(船)를
타고,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 35분 경이었다.
나는 곧바로 열차 시각표를 확인했다. 그 때가 11시 50분이었다.
빈으로 가는 열차는 12시 30분이었다. 그 때! 야간 열차의
시각표를 확인하던 나의 눈은 어느 한 곳에 고정되었다. 목적지
-프랑스 니스, 출발시각- 11:55. 순간 숱한 생각들이 나의
머리속에 스쳐지나갔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빛, 푸르디 푸른
바다, 젊음, 열정, 벌거벗은 여인네들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의
일상에서 벗어나 해수욕으로 심신을 쉴 수 있다는 점 등. 단
몇초 동안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한적은 여행 기간을 통털어
유일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뛰었다. * 빠지게 친구에게
달려가서, 다짜고짜 ‘기차가 지금 출발하니 빨리 뛰자’고
소리쳤다. 친구는 놀란 얼굴을 하며, 영문도 모른채 같이
뛰었다. 그리고 우리는 무사히 니스 행 야간열차를 탈 수
있었다.
“이거 빈으로 가는 기차 맞아?”
나는 그냥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다음날 우리는 강렬한
햇볕이 내려쬐는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해변을 감상할 수
있었다.
“여기 빈 맞아?”
“!!!!........”
니스에서 한국인을 구별하는 방법
한국의 배낭객들이 니스 해안을 들르는 이유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 국내에서는 접할 수 없는 이국적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바로 웃통을 다 벗어던지고 일광욕을
하는 여인네들의 자연스러운 풍경을 구경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는 남자 배낭객 뿐만 아니라, 여자 배낭객들도 비슷한 것
같다. 직접 수영을 하거나, 일광욕을 하면서 여행의 일상을
즐기기 위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몇 안되는 것 같다. 심지어
몇몇 여행사들은 단체 배낭여행객들을 니스에 단지 몇시간
머무르게 하면서, 눈 요기만 실껏 하게 하고 부랴부랴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니스가 좋았다. 무엇보다 빡빡한 여행의 일정을 깨부수고,
실로 오랜만에 맘껏 휴양을 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수영도
하고, 일광욕도 하고, 중국식 식사도 푸짐하게 먹고...
어느 일간지에 ‘니스 해안에서 한국인을 구별하는 10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하면, ‘썬글라스를 끼고 두리번 두리번 하는
사람!’, ‘수명이 단체로 모여서 해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등이었다. 한국 여행객들의 왜곡된 육체관/나체관을
짐작케 하는 기사이다.
누드는 따스한 체온을 전하는 휴머니즘
영어로 naked(네이키드)와 nude(누드)는 똑같이 ‘벌거벗은
상태의 육체’를 가리키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 네이키드가
‘단순한 나체의 상태’를 나타낸다면 누드는 ‘예술적
소재로서의 알몸상태’를 가리킨다. 벌거벗은 육체의 단순한
재현인가 아니면 벌거벗은 육체를 예술로 형상화하고자
하는가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경계(境界)를 확정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나체 해수욕장이 영어로는 ‘누드 비치’(nude beach)라
표현된다는 것이다. 해수욕장에서 무슨 예술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발가벗고 있는 상태’일 뿐인데, 왜 ‘네이키드
비치(naked beach)’라 하지 않고 ‘누드 비치(nude beach)’라
표현할까?
“여기 한장의 사진이 있다. 몹시 매혹적으로 나를 흔들며
다가온다. 여자의 몸 일부분이 깊고 어둡고 쓸쓸하게 긴장감을
주며 온다. 드러낸 젖가슴 위의 한 손이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에로틱한 것을 넘어 엄숙하고 불가사의하다.
사진 속의 무엇이 나를 이토록 끌어당기는가. 뭔가 통렬하게
터질 듯 하면서 터지지 않는 외로운 격정과 불안이 느껴진다.
떨리는 듯한 손은 이상하게 아름다운 악기처럼 운다. 뭔가
마음을 끌어당긴다는 것은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끌어당김, 생각하게 만듬이 외설과 구분되는 예술의
힘이리라.”
「세기말 블루스」라는 시집을 발간한 시인 신현림
씨가 앨프리드 스티클리츠가 아내를 모델로 해서 찍은 사진을
보고 적은 감상이다. ‘예술’ 즉 ‘누드’의 힘은 ‘끌어당김과
생각하게 만듬’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 대상이 ‘누드 사진’이
아니고 ‘누드 비치의 실제 인간의 육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누드비치에서 육체의 따스함과 아름다움, 외로움
그리고 격정 등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중국 청나라 때의 어느 문예비평가는 청춘남녀의 정사(情事)를
진솔하게 표현한 원대(元代)의 희곡
「서상기(西廂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음란한 사람이 보면 음서(淫書)고, 성스러운 사람이
보면 성서(聖書)다.”
결국 네이키드와 누드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잣대는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나체 해수욕장을 ‘누드 비치’라 부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 ‘관능적
욕망’이 아닌 ‘태초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으로
바라보라는 뜻이리라.
미국의 어느 누드 비치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는, 사람에 따라서
인간의 육체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국내의 어느 일간지에 소개된 에피소드이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가 있는 어스틴. 바닷가는 아니지만 아담한
모래사장이 있어 주민들의 휴식처로 인기가 높다. 주변 경치도
그만이라 외지 사람들도 즐겨 찾는다 했다. 이곳은 ‘누드
비치’.
연전에 한국 여성 두 명이 현지 유학 중이던 남자 선배를 따라
이곳을 찾았다. “제일 경치가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다”는
선배의 얄궂은(?) 권유도 권유였지만 제법 쌀쌀한 날씨라 “설마
누가 있겠느냐”고 마음 편하게 나선 길이었다. 과연 경치는
그럴 듯 했고 인적조차 없어 이들 셋은 옷입고 누드비치를
마음껏 즐겼다. 순간--.
「아악!」 한 여성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앞을
보니 빨간 털모자에 빨간 털목도리를 두르고 빨간 양말을 신은
벌거숭이 남자가 이들을 향해 신바람나게 달려오고 있었다.
위기를 벗어나려는 생각과 비명을 질렀다는 낭패감을 모면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이들 입에서 「하이!」하고
인삿말이 튀어 나왔다. 빨간 털모자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또 「아악!」.
누드 비치 화장실에는 문이 없었던 것이다.”
벗는 모습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며, 또한 가장 아름답다. 또한
누드는 ‘따스한 체온을 전하는 휴머니즘’이다. 니스해변이나,
누드 비치, 혹은 누드촌에서 결코 두리번거리지 말 것이다.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사고하고 행동하라. 누드의 편안함, 육체의
아름다움을 스스로가 즐길 줄 아는 ‘열린 사고를 지닌’ 한국인
배낭객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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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4-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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