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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맑스의 사회주의 이념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현장에서 미래를  제21호
이성백

연구논문

칼 맑스의 사회주의이념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연구논문



이 성 백(연구위원, 서울시립대 철학과)




들어가는 말

자본주의를 대체할 사회주의적 사회조직의 이론과 실천으로서의 맑스주의가 현재 단계에서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동구권 ‘현존 사회주의체제’의 해체가 ‘맑스주의의 총체적 위기’를 초래한 원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위기 자체는 서구유럽에서는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70년대에 거기에서는 맑스주의 위기가 진단되었다. 그 한 예로 1977년 루이 알뛰세르는 ‘맑스주의의 위기’를 공개적으로 논했다. 그는 특히 맑스주의의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왜곡된 사회주의체제가 들어선 데에서 찿고 있다. 현존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스탈린주의에 의해 초래된 위기가 누적되어오다 끝내 폭발해 버린 위기의 결과였다.
이제 맑스주의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21세기적 인간해방의 사상으로서의 맑스주의의 전향적 재구성이 필수불가결하다. 맑스주의의 재구성은 상당히 복합적인 과제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위기를 불러일으킨 요소들을 해체하고, 맑스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확인하는 작업의 차원에서 고전적 맑스주의와 여타의 ‘맑스주의들’을 재검토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의 본질과 착취와 억압의 새로운 양상을 규명하여, 맑스주의를 자본주의의 현재적 단계에서의 해방 이론으로 전향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이러한 맑스주의의 재구성이란 거대한 주제가 다 다루어지지 않는다. 맑스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재검토하는 작업의 측면에서, 그 중 한가지 문제로서 맑스가 구상했던 사회주의 이념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논의의 범위는 더 좁게 제한된다. 사회주의 이념의 경제학적이고 정치학적인 측면은 다루어지지 않으며, 논의의 범위는 사회주의 이념의 사회철학적 기초에 대한 문제에 한정된다. 그러나 사회철학적 논의라고 해서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이거나, 공상주의적인 논의는 전혀 아니며, 이것은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사회조직에 대한 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회철학적 이념은 자본주의사회에 대해 사회주의 사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인가에 대해 묻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제측면과 관련한 사회조직적 논의에 그 기본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부언해 두자면, 이 글은 현존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일종의 철학적 반성이기도 하다. 현존사회주의는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이었다. 이 글은 현존사회주의의 잘못이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었는가를 철학적 이념의 차원에서 규명하고, 이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위에서 앞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지향해야 할 사회주의 이념의 ‘합리적 핵심’을 맑스가 제시한 사회주의에 대한 여러 규정들을 사회철학적 측면에서 재조명함으로써 찾아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씌여졌다.


1. 사회주의의 철학적 이념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의 철학적 이념의 기본로 이해되어 왔던 것은,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명제였다. 「포이에르바하 테제」 6번 “인간의 본질은 개별적 개인에 내주(內住)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다.”와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의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맑스의 명제에 의거하면서, 자본주의의 철학적 기초로서의 개인을 원자론적으로 실체화한 개인주의에 대항하여, 인간의 사회성 테제가 사회주의의 철학적 이념의 기초로 간주되어 왔다. “개인의 전면적 발전”, “직접적인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결사” 등과 같은 사회주의에 대한 다른 개념들도 아울러 언급되어 오긴 했으나,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 맑스가 의도하고 있던 구체적인 내용들은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다. 물론 인간의 사회성 테제가 사회주의 이념의 핵심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사회성 개념이 제대로 해명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존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은 사회성 개념을 더 세분적으로 분석하게 한다.
인간의 개별성과 사회성의 개념적 구도 속에서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사적 이해에 조응하여 개별성을 원자론적으로 실체화하면서, 개인들의 상호의존과 상호연관으로서의 사회성 내지 공동성을 개별성에 종속시켰으며, 개인들의 이해에 반하는 공동성은 실체로서의 개별성의 침해로서 부정하였다. 이러한 개인주의에 대한 맞대응속에서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이해에서는 인간 존재의 사회성이 전면에 부각되고, 개별성을 부정․해체하여, 사회성에 종속시키는 것이 사회주의의 철학적 원리로 파악되어 왔었다. 이러한 종래의 사회주의의 철학적 개념은 개인주의와 마찬가지로 개별성과 사회성을 상호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런 대립의 관점에 서 있는 한 개별성을 부정하는 사회성을 사회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개별성의 부정, 사회성의 초인간적 형이상학화를 사회주의로 이해한 단적인 예가 바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ꡔ의사 지바고ꡕ에서 라라의 남편이 지바고에게 한 “이제 러시아에서 개인은 죽었다”라는 말이다.
이렇게 개별성과 사회성을 상호 대립된 것으로 전제하면서, 개별성의 해체와 개별성에 대한 사회성의 우위를 사회주의로 이해하는 관점을 나는 “사회전체주의(socialtotalitarism)”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런 관점은 그 자체 안에 개인의 사회내에서의 소외, 즉 사회의 모든 중심 영역의 통치와 결정 과정으로부터 대중의 전면적 배제, 사회내 권력핵심부에 의한 대중의 전면적 지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실제로 현존하는 사회주의체제”로 자처해왔던 동구권의 사회체제는 그 본질상 바로 사회전체주의였다. 동구권의 현존사회주의는 중앙집권적인 당과 국가의 관료주의에 의해 인민 대중이 정치, 경제 등 모든 사회적 결정과정으로부터 철통같이 소외된 채, 상부로부터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거대한 기계의 “나사”로 취급된 사회체제였다.
다음 문제는 상기에 언급한 맑스의 사회성테제가 과연 개별성과 사회성의 대립적 구도위에서 개별성을 사회성으로 환원하는 사회전체주의를 의도했는가 하는 점이다. ꡔ경제학-철학 초고ꡕ, ꡔ독일 이데올로기ꡕ, ꡔ공산당 선언ꡕ, ꡔ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ꡕ에 이르기까지 맑스의 여러 사회철학적 저술들을 다시 들여다 보면, 그동안 특히 소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사회전체주의적 독해는 전혀 오독이었음이 드러난다. 맑스는 개별성과 사회성을 전혀 대립된 것으로 보고 있지 않으며, 개별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개별성의 자유롭고 자율적인 결사로의 발전을 사회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요컨대 개별성과 사회성의 조화, 개별성으로부터 출발한 사회성의 결성이 그의 사회성테제의 실내용이자, 바로 사회주의의 사회철학적 이념이었다.


2. 맑스의 사회성테제의 재독해

ꡔ경제학-철학 초고ꡕ는 ‘맑스의 인간론’ 과 ‘노동의 소외’에 대한 저작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 특히 한국에서 - 이 초고의 연구는 그 관심의 초점이 일차적으로 노동의 소외 문제에 맞추어졌다. 노동자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그의 노동의 산물로부터의 소외 등등 주로 소외론으로서 이 초고가 이해되었다. 이렇게 소외론에 관심이 집중된 것은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근본적인 철학적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이 소외론의 근본 기류라고 할 수 있는 인간론 자체가 맑스의 사상체계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주제화되지 못했다. 그의 인간론은 단지 맑스 사상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과 노동 개념에 대한 맑스의 논의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한 맑스의 속깊은 철학적 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가 노동이 소외된 사회상태인 한, 이 소외가 극복된 사회상태, 다시 말해 참된 인간의 본질과 노동이 실현된 사회상태가 바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임은 자명한 이치다. 따라서 그의 인간론은 다름아니라 그의 사회주의의 철학적 이념의 중심적인 부분을 이룬다.
이 초고에서 맑스는 첫 번째로 인간을 다른 지상의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자연적 존재로 정의한다. “인간은 직접적으로 자연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하는 종차는 어디에 있는가? 맑스는 그것을 인간만이 능동적인 존재라는 데에서 찾는다. 앞의 인용구절 다음에 이런 의미에서 맑스는 “자연적 존재로서 그리고 생명을 지닌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은 한편으로 자연적 힘들로, 생명력들로 갖추어져 있는 존재이다. 즉 그는 활동적인 자연적 존재이다.”(MEW, Bd. 40, 578) 이 활동성 또는 능동성이 바로 맑스가 이전의 유물론으로부터 자신의 유물론을 구별짓는 핵심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포이에르바하 테제」의 1번이 이해된다. 그는 여기에서 “감성적인 인간적 활동, 즉 실천”이란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전 유물론의 결함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맑스는 인간을 ‘유적 존재(Gattungswesen)’라는 개념을 갖고 특징지우고 있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적인 자연적 존재이다. 즉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존재하는 존재, 고로 유적 존재이다.”(579)
유적 존재의 구체적인 의미는 인간이 자유롭고 의식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러한 유적 존재일 수 있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위에서 언급한 “활동성”, “감성적인 인간적 활동, 즉 실천” 등은 결국 맑스에게서는 한마디로 ‘노동’ 개념을 의미한다. 맑스는 노동을 “자연적인 것을 전유하는 합목적적 활동”,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교대의 조건”으로 정의했는데, 바로 인간의 본질이 노동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유적 존재일 수 있다. 인간은 단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보편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개별과 보편의 통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노동을 통해서 단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할 뿐만이 아니라, 타자, 즉 전 자연을 자기의 대상으로, 자기의 전유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의 보편성은 실제적으로 전자연을 자기의 비유기적 신체로 만드는 보편성으로 나타난다.”(516) 인간이 다른 존재자들, 즉 타자와의 구별, 대립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만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즉 무생물들처럼 단순한 즉자존재이기만 하다면, 그는 개별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그와 대립되어 있는 타자, 즉 자연을, 자연의 전 대상물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자신과 타자의 통일, 즉 다른 개별자들과의 종합을 이루기 때문에, 바로 인간은 보편적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인간이 유적 존재라는 맑스의 정의를 현존의 차원에서, 인간이 이미 유적 존재로 현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인 유적 존재를 실현해가는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개인의 전인적 실현은, 개인의 소질들을 현실적 발전으로 청원하는 세계사의 시작이 개인들의 통제하에 주어지게 될 때에만이 비로소 이상(理想), 직업 등등이기를 멈춘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하려는 것이다.”(Bd. 3. 273) 유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본질이 실현된 상태, 전 자연을 자기의 것으로 완전하게 전유하게 되는 상태, 그래서 인간이 완전히 보편적인 존재가 되는 상태가 다름 아니라 역사의 완성으로서의 공산주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맑스는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로서 바로 인간주의이며, 완성된 인간주의로서 자연주의이다”(536)라고 말한 것이다.
인간이 유적 존재를 실현한다는 것을 다른 표현으로 간단히 말하면 “개인의 전인적인 실현”이다. 개인들의 타고난 감성, 소질, 능력들이 전면적으로 계발된 사회, 개인들이 자신의 타자들인 자연과 사회적 관계들을 관장하는 능동적 주체의 사회가 공산주의이다.
이러한 자유롭고 의식적이고 보편적인 활동을 하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의 자기실현이 맑스의 공산주의 이념의 기반이며, 이것을 전제로 하여서만이 그의 사회성테제에 대한 바른 이해가 획득된다. 맑스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좀 더 정확히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가?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와 ꡔ그룬트리세ꡕ에서는 ‘개인’이란 개념이 핵심적인 주제개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역사 유물론의 성립 저작이라 할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에서 맑스는 역사 유물론의 출발점을 ‘현실적인 개인들’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가 출발하는 전제들은 현실적인 개인들, 그들의 행위, 그들의 물질적 생활조건들이다.”(Bd. 3. 20) ꡔ그룬트리세ꡕ에서도 개인 개념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 맑스는 개인 개념이 한편으로 역사상 부르조아 사회에서 처음으로 획득되었음을 지적하고, 이것이 부르조아사회의 공로임을 확인하면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부르조아 사회의 원자론적 개인주의적 개인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맑스는 개인은 사회적 개인이라는 새로운 개인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말그대로 준 폴리티콘이다. 이는 단지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오로지 사회속에서 개별화할 수 있는 동물이라는 의미이다.”(Bd. 42. 20) 이 저술들에서는 나아가 “자유로이 연합된 개인들”, “자유로이 결사를 이룬 개인들”과 같은 표현들이 공산주의적 공동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맑스가 의도한 사회성의 개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맑스에게 있어서 사회성, 혹은 집단성이란 다름 아니라 개인들이 자유로이 결사를 이룬 것을 말한다. 개인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공동성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이 자유로운 결사로서의 사회성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개별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개별성, 자신의 자유를 실현한다. “공동체 속에서 비로서 인격적 자유가 가능하게 된다. … 현실적인 공동체 속에서 개인들은 그들의 결사 속에서 그리고 결사를 통해 동시에 그들의 자유를 획득한다.”(Bd. 3. 74) 이렇듯 개별성과 사회성의 통일이 맑스의 사회성 테제의 실 내용이다. 여기에서 “직접적인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결사”란 유명한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가 분명해진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여 볼 때, 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근본적인 철학적 규정은 한 마디로 결사를 맺은 생산자들의 사회적 생산속에서 인간적 본질력의 전개로 집약할 수 있다. 이를 풀어서 설명해 보자면, 사회주의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개인들이 자신들의 소질의 전면적인 실현을 위해 자유의사에 따라 연합해서 결성되는 연대적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맑스에게서 사회성의 테제는 개인들의 주체성이나 능동성을 해체하고 인간간의 사회적 관계를 초인간적으로 실체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도리어 인간의 사회성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소질을 전면적으로 실현하는 조건을 의미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동독이 사라진 후 한 동독 학자의 술회는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ꡔ공산당 선언ꡕ의 두 번째 절은 “계급들과 계급대립들로 이루어진 부르조아사회를 대신하여 각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결사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Bd. 4. 482)라는 구절로 끝을 맺고 있다.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철학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사회주의를 전혀 반대로 모든 사람들의 발전이 개인들의 발전을 위한 조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3. 미래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으로서의 “민중자치 사회주의”

이제 지금까지 고찰된 사회주의의 철학적 이념은 현실과 유리된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공리공론적인 논의에 불과한가? 아니면 그것은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함의를 갖고 있는가?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정치와 경제가 어떠한 것이라든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적 조건과 노동운동의 전략전술적 방향을 제시한다든가 하는 의미에서의 현실의 구체적인 분석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분석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함의를 갖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한 사회를 그것이 어떤 기준을 충족시켰을 때, 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사유재산이 철폐되고, 집단소유에 입각한 계획경제가 이루어지면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실제로 1929년 대권을 장악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주도했던 스탈린은 집단소유의 확립을 사회주의로 믿었다. 그래서 전 산업의 국유화가 달성된 1936년에 스탈린은 “사회주의의 본질적인 실현”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이와 같은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국유화만을 갖고 사회주의의 실현을 논할 수 있을까? 어떠한 사회주의적 경제 개혁도 그것이 직접적 생산자들을 주체로 한 것이 아닌 이상, 아직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다. 국유화, 집단화, 계획경제와 같은 경제적인 형식은 그것이 직접적 생산자들이 실질적인 경제의 주체가 되는 내용을 담보할 때만이 진정으로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일반 대중이 어느 정도 사회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주체가 되었는가가 한 사회의 사회주의적 성숙도를 가늠하는 주요한 척도가 된다. 인민 대중의 실질적인 사회적 주체화는 사회주의의 혼과 같은 것이다. 이 혼이 실릴 때야만이 구체적인 사회주의 사회조직의 프로그램은 사회주의적인 것이 된다.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의한 계획경제가 제아무리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해도, 국가권력이 이름하여 공산당의 수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체제 내에서 인민 대중이 사회적 과정의 결정적 심급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이상, 그 체제는 사회주의적이지 못하다. 구소련을 위시한 현존사회주의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현존사회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간을 창조해 냈는가? 그동안 “새로운 공산주의적 인간”,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의 창조가 누누히 설교되어왔다. 그러나 실제의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맑스가 사회주의의 인간형으로 그렸던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개인과는 전혀 배치되는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인간을 만들어 놓았다.
1991년 유리 레바다를 소장으로 한 소련 여론조사 센터에서 “소비에트인”이란 책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소련인들의 실제 모습에 대한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연구가 최초로 시도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70년간의 현존사회주의는 새로운 사회문화적인 인간유형을 만들어냈다. “소비에트인”, 혹은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라고 지칭된 이 인간유형은 그동안의 선전과는 달리 몰개성적이고, 수동적인 인간으로 특징지워지고 있다.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대중인간(‘모든 사람들과 같이’)이고, 몰개성적이며, 모든 엘리트적인 것과 희귀한 것에 대립되며, ‘순진하고’(위로부터의 통제가 용이하다는 의미에서), 자기 욕구와 관련하여 원시적이고(최저생계), 상당히 변하기 어려우며, 쉽게 통치가 가능하다(실제로 그는 원시적인 행정체제에 예속되어있다).”(9쪽) 이렇게 수동적이고, 지시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비창발적인 인간이 현존사회주의가 만들어낸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물론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부정적인 특징만이 지적되고 있는 이 책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할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서방세계의 일반 대중들보다 평균적으로 지적 능력과 문화적 교양의 수준이 높았고, 소위 말하는 재물욕에 빠지지 않아 상당히 순박하고, 비공격적이기도 했다. 하여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기본적으로 소련의 대중들은 하달된 지시만을 그대로 수행하는 수동적 객체, 페레스트로이카 시절에 사용된 표현데로, 사회란 거대한 기계의 한 ‘나사’에 불과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현존사회주의에서 창조된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맑스가 이상적 인간형으로 그렸던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인간과는 정반대로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주의에 대한 철학적 이념의 견지에서 볼 때, 현존 사회주의는 맑스의 근본적인 사회주의 이념과 전혀 배치되는 사회를 건설해 놓았다.
지금까지 맑스의 사회주의의 철학적 이념에 대한 고찰로부터 그가 의도했던 사회주의는 주체적인 개인들의 자유로운 결사, 다시 말해 근로대중들이 실질적인 사회적 주체가 되는 것임을 확인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한 가지 개념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민중자치 사회주의’1) ‘자치’란 개념은 지금까지 ‘자주관리’라고 번역되오던 것을 원어의 정확한 의미에 따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영어의 self-government, 독일어의 Selbstverwaltung는 자기 스스로 통치한다는 뜻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새로운 것은 아니고, 유고슬라비아 맑스주의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을 유고의 사회주의적 실천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유고식 사회주의는 이러한 인민자치 사회주의의 이념에서 사회주의의 길을 구체적으로 모색했던 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인민자치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사회조직화는 각 지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특수성에 따라 다양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민중자치 사회주의 이념이 현재에 갖는 함의는 앞으로의 사회주의 사회조직의 구체적인 모색은 반드시 인민대중을 실질적인 사회적 주체로 승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한 번 체제가 정착이 되면, 그 체제를 다시 바꾸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이 점 또한 현존사회주의의 경험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교훈이다. 관료주의적 중앙지배체제가 확립된 뒤에 이 체제의 전환(개혁)은 전혀 불가능했다.
중앙집권적 관료주의 사회조직의 폐단은 이를 직접 겪었던 장본인이었던 구 동구권의 좌파에게도 결정적인 반성의 계기가 되고 있다. 현재 러시아 좌파에 의해서도 뼈아픈 경험으로부터 민중자치 사회주의의 유의미성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인식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여러번 방문한 적이 있는 보리스 카갈리츠키와 함께 사회주의적 성향의 ‘노동의 당’에 가담하고 있는 모스크바 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알렉산더 부즈갈린은 그의 최근의 책 ꡔ이행의 정치경제학, 정치경제학 강의ꡕ에서 우파의 ‘노멘클라투라 자본주의’ 모델에 대해 인간이 사회의 주체라는 이념에 입각하여 정치, 경제, 사회의 ‘근로자 자치’를 좌파 민주주의적 사회 경제 개혁 전략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과거 근로대중들이 당과 국가 기구의 나사에 불과했던 관료주의 행정 체제와 정반대되는 사회주의 모델이다. 부즈갈린은 관료주의적 행정체계에서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근로자들 스스로가 자치 모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근본적인 어려움으로 토로하고 있다. 과거 현존 사회주의의 유산이 새로운 사회주의적 자치로의 이행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나아가 ‘근로자 자치’는 현 러시아 공산당의 강령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과거 소련시절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결함이 근로 대중을 철저하게 소외시킨데 있었다는 자체적인 반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미래의 사회주의 운동은 인민대중을 진정한 사회 주체로 고양시켜 나가는 민중자치 사회주의의 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노/정/연

1997-05-01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3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