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가지 위기 |
현장에서 미래를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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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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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초점
3가지 위기
이 해 영(연구위원, 한신대 국제관계학과, 정치학)
1. 들어가면서
위기란 말을 한두번 들어온 바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뭔가가 다른
것같다. 정권이 무너질 것같다. 그렇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웬지 조금은 멍한, 마치 격한 운동 뒤의 피로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현정권이 반노동자 정권인 바에야, 그것이
무너진다손 애석할거야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가 석연치 않다.
그 이유는 모르긴 해도 현정권이 스스로 무너지려고 한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번 총파업투쟁에서 노동자들의 평균적
입장은 사실 현정권 타도가 아니라 노동법재개정 내지 철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정권타도 투쟁을 원했다 하더라도
실질 역량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너질
조짐을 보인다는 것은 썩 내키는 일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
이유는 단적으로 현 노동운동의 역량이 정권 담당을 위한 여러
필요, 충분조건까지 충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현재의 한국에는 3개의 위기 즉 정치위기, 경제위기 그리고
헤게모니위기가 중첩되어 있다. 그리고 사안의 심각성도
여기에서 유래된다. 그 각각을 간략하게나마 나누어 짚어 보기로
하자.
2. 정치의 위기
정치위기란 무엇인가? 이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정치학적 원론이 필요하다. 흔히 정치학은 3가지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한다. (1) ‘정체(polity)’ 곧 정치의 몸통을 말한다.
대개 그것은 정치공동체의 제도나 구조를 가리킨다. (2)
정치공동체를 운영, 유지하기 위한 내용이자 프로그램이라 할
‘정책(policy)’을 들 수 있다. (3) 권력의 장악, 유지, 배분을
둘러싼 투쟁이나 경쟁으로서의 ‘정치(politics)’이다. 이러한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는 정치공동체의 과정을 이룬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정치위기라고 말한다면, 이는 이러한 정치의 3가지
차원 모두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일단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까운 시간대에서 본다고 할 때, 현재의 정치위기는 압도적으로
자본편향적인 노동법개정안 곧 잘못된 ‘정책’을
날치기통과시킨 신한국당 민주계 즉 현정권의 파워핵심의
‘정치적’ 오류에서 발단된 것이다. 이미 당시 전국적, 국민적
저항에 직면해 정권 붕괴 직전에 내몰린 상황에서 한보사태를
통해 시도된 국면전환은 정권 차원을 넘어 야당을 포함한
지배블럭 전체와 ‘정체’의 동요로 이어지게 되었다.
서구정치의 경험에서라면 이 경우 총리사퇴, 의회해산 그리고
총선의 수순을 통해 정체를 다시금 구성하는 출로를 모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행 헌법상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는
상태에서 이 또한 초헌법적 수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한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정체는 ‘민주공화국’ (헌법 1조
1항)이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군주정이 아닌 공화정을
채택하고 있는 이상, 한국사회의 정체와 관련해 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문제 곧 한국민주주의의 진정성 문제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할 때, 아마
가장 상식적이고 또 그 자체로 만족할 만한 대답은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링컨의 다음 정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민의(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치. 여기서 이 각각은 민주정치 또는
민주적 권력의 생성, 주체 그리고 목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규정을 우리가 엄격히 해석할 때 민주주의는
그자체로 기존 지배체제에 대단히 적대적인 혹은 - N.보비오의
표현을 빌자면 - ‘전복적(顚覆的)’인 구상이 된다. 그 이유는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도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르주아의,
부르주아에 의한, 부르주아의 정치’가 그 실상에 가깝다.
그런데 서구의 경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긴장관계는
복지국가적 제반 장치를 통한 공존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이념 그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반자본주의적
포텐셜을 복지국가적 개입을 통해 제어하고 조절해 온 것이
20세기 서구민주주의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현대민주주의는 ‘인민을 위한’ 복지국가적 서비스개념으로
축소되어 왔고, 그 결과 인민의 주체성은 부단히 거세되고 또
인민은 대상화되어 왔다. 다시 말해 권력의 생성과
권력행사과정에서의 주인됨이 부정된 채, 단지 지배엘리트의
순환절차와 과정에 대한 규율로 왜곡된 민주주의 속에서
정치체제와 인민간에는 복지와 충성간의 교환체제가 성립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나마 이러한 복지에 대한
보상메카니즘마저도 갖추지 않고 정치체제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요구해 왔다. 그렇게 본다면 8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의
민주주의는 권력주인의 주체성도 권력의 존재목적도 사라진 채
습관적으로 되풀이되는 투표일에만 잠시 존재하다 곧
사라져버리는 찰나적 민주주의였다. 현재의 정치위기는 간단히
말해 민주주의의 실종에서 비롯된다. 민주주의의 질적 심화가
없는 한 위기는 정치체제의 유전병과 같은 것이다. 최소한
서구형 복지국가적 개입을 통한 - 이것 역시 완치는 아니지만 -
증상의 완화마저도 없다면 한국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격렬한 긴장관계는 지속적으로 체제스트레스를 가중시켜 체제의
조기사망을 재촉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불완전한
민주화, 하다 만 민주화야말로 김영삼정권의 비극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 어떤 민주주의도 사회적 기초가 부실하다면 유지될 수가
없다. ‘건방진’ 노조지도자를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는
황장엽은 자신의 서신에서 남한의 정치인들이 ‘군중’속으로
들어가 ‘군중’을 쟁취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참으로
옳은 지적이다. 달리 표현해 이는 곧 YS정권이 자신의 지역적
기반을 넘어선 사회적, 곧 계급․계층적 기초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는 말로 된다. 혹은 언론플레이를 통한 지역주의적,
신보수주의적 포퓨리즘을 정권의 공고한 사회적 기반강화로
연결시켜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노동법 파문이 극명히 보여주듯
현정권은 오히려 중산층 이반을 자초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기반의 붕괴는 그나마 정권의 유지기반이었던 지역적 기반마저도
약화시켰고 그리고 위기를 증폭시켰다.
이와 관련해 현정권의 역사적 한계도 아울러 지적해 둘 수 있다.
3김정치, 지역할거주의는 철저하게 ‘박정희주의’의 유물이다.
어떤 의미에서 3김은 그러므로 ‘박정희의 아이들’인 것이다.
1김은 그의 그늘에서, 2김은 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그와의 갈등속에서 정치를 ‘배웠다’. 따라서 정치모델에 있어
3김은 박정희주의와 그 어떤 뚜렷한 질적 차별성도 확인시켜주지
못한다. YS정권의 정치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 박정희주의의
문민적 아형(亞型)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3. 경제의 위기
입장의 좌우를 막론하고 모두가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특히 자본측은 한국경제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위기의 주범으로 지적하고, 이 구조가 한국의 이른바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한다. 96년 하반기 이래
자본측의 이러한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적 위기론공세에 이미
정권은 집권초의 규제완화, 민영화라는 경제정책적 기조를 더욱
보수화함으로써 이에 편승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시장물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고비용-저효율’ 한국경제의 위기원인은 분명 ‘구조적’인
문제, 즉 단순히 국면적이거나 국지적인 문제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유통부문에서의 현상에 불과한 이런 구조보다도 구조의 구조라할
한국 독점자본 곧 재벌의 반민주적, 비효율적 그리고 전근대적
구조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첫째, 95년 말 현재 한국 30대 재벌의 평균
자기 자본비율은 22.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부채이다. 이는
미국과 일본의 제조업 평균치 32~36%나, 우리와 경제발전
수준이 비슷한 대만의 53%에 비교해 몹시 낮은 수준이다. 즉
미미한 재벌가의 자기 출자분에도 불구하고 계열사간 상호출자
등을 통해 절대적인 경영전제를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30대 재벌의 매출액과 GNP의 비율을 볼 때 1989년 71.7%, 1993년
79.9%, 1995년 91.2%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고, 이 가운데에서
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각각 64.2%, 66.0%, 66.5%로
지속적인 증가세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사회에서 자본의
집중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5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의 집중은 동시에 소유의 집중을 의미하고 그것은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를 의미한다. 즉 1970년 대비 1990년
실질임금이 4배 상승했을 때, 노동생산성은 7배가 상승하였다.
그러나 노동과 자본간의 소득분배는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제조업부문 대기업을 놓고 볼 때 매출액 총이익율이 85년
14.69%, 90년 16.58%, 95년 20.14%로 증가하는 반면, 같은 기간
‘노동소득분배율’은 85년 45.82%에서 90년 51.12%로
상승하다가 95년 44.20%로 오히려 10년 전보다 낮아 지고 있다.
반면 이에 대한 사회보장 수준은 가히 비참한 수준이다. 예컨대
국내총생산에 비교한 정부의 사회보장부담금은 95년 2.5%에
불과하고 그나마 93년까지는 증가추세에 있었지만 최근에는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93년 기준 프랑스의 경우 이 비율이
19.6%, 독일 15.1% 그리고 일본은 9.8% 였다.
한국의 독점재벌은 80년대 후반을 경과하면서 현재 한국
경제구조의 부동의 중추로 자리잡게 되었고, 특히 김영삼정권
등장 이후 더욱 강화, 안정화된 재벌체제는 지배연합의 핵심으로
80년대 군부중심형 지배연합을 대체하고 있다. 독점자본과
국가권력간의 관계 변화는 이 당연한 귀결점이다. 그리고 이미
제4의 지배심급으로 부동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한국의
언론권력이 사실상 이들 독점재벌의 확고한 영향권 안에 들어
있는 사정을 고려한다면, 그 어떤 권력도 독점재벌의 눈밖에
나서 유지되기 어렵고 또 이들의 동의를 확보하지 않고서 새로운
권력의 창출이란 무망한 일이다. 더군다나 이 언론권력은 다른
권력 예컨대 행정권력이나 입법권력과는 달리 임기가 있는 것도,
권한과 책임이 정의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총파업국면, 한보사태, 청문회국면으로 이어지는 정세의
흐름은 경제위기론의 형태로 정식화된 독점자본의 이해를
확고하게 방어해 내지 못한 현 지배블럭의 대표 즉 ‘YS +
민주계’에 대한 자본의 탄핵 내지 사보타지의 성격도 아울러
갖는다. 사실상 YS의 정치적 기반이 민주계라고 할 때 현 정세는
현상적으로는 말을 잘못 몰아 낙마한 장수가 말을 탓해 그 목을
벤 뒤 혼자 뛰어다니는 꼴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자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 세력기반을 상실한 YS는 설사 임기가
10개월 남았다 하더라도 중임이 불가능한 한에 있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며, 대신 파편화된 지배블럭의 소방주 간의 격렬한
권력게임에서 누가 가장 자신의 이해를 잘 대변해 줄 것인가를
판단하는 문제만 남는다. 물론 개별자본이나 대재벌의 입장에서
볼 때, 게임의 향배를 예측하는 것이 경기예측만큼이나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혹시 헛짚거나 줄을 잘못 서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 곧 재벌지배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혹 헛 집거나 줄을 잘못서는 경우,
정치인에게는 정치적 죽음을 의미하겠지만 재벌로서는
손비처리뒤 잠시 엎드리면 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투쟁과 시장경쟁의 차이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경제위기론은 많은 경우 운동정치적 담론권에
속해 왔다. 다시 말해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고 이를 - 대부분 환상임이 증명되곤 하였지만 - 비 혹은
후자본주의적 전망과 연결하고자 하는 모종의 전망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기의 물적 실체성을 우리가
인정하는 바탕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위기론은 그 역 즉
자본의 신보수-신자유주의적 공세의 표현이다. 이러한 위기론의
‘정치적’ 핵심은 그러나 위기의 실체를 경험적으로 증명하는
문제라기 보다, 한국사회 지배연합의 핵심인 재벌이 현상황을
위기로 느끼고 또 위기라고 정의한다고 하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한국경제의 ‘구조’개혁을 처방으로 요구하고 있다.
지배블럭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파편화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구조개혁이 관철될 것인가는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과 노동의 경제민주주의적 구조개혁간에 다시 말해
노자간 힘의 벡터량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4. 헤게모니의 위기
근대적 지배는 그 ‘비인격성’을 본질로 한다. 다시 말해
전근대적, 봉건적 지배가 신분을 매개로하는 피치자에 대한
직접적, 인격적인 지배였던 데 반해,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지배는 지배의 인격적 주체성이 공공영역에서의
절차속으로 해소된 지배이다. 즉 사람에 대한 사람의 지배가
사람에 대한 법의 지배로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배의
비인격적 성격으로 인해 봉건사회에서 봉건귀족이 농민당 정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반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당 정부하 부르주아적 지배는 얼마든지
가능해 지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의 부르주아적 지배는 그러나
그 ‘정상적인’ 경우 단순히 강제력을 통한 지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정상적인 경우란 극단적인 파쇼적
억압 - 박정희의 유신파시즘, 전두환의 5공과 노태우의 5.5
공화국 등 - 상황과는 구분되는, 부르주아적 절차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나마 기능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 때 부르주아적
지배는 한편으로 강제력(공권력)이라는 정치체제의 최후이성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설득과 동의에 기초하는 헤게모니에 의해
기능한다. 이 양자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경우를 우리는
서구형 민주주의 사회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헤게모니를 통한 지배는 기본적으로 시민사회공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할 때 시민사회를 단지 해방의 가능성의
공간으로만 이해하고자 하는 시민사회지향적 시민운동론자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는 시민사회가 자본주의적 지배담론이 형성,
전파되는 곳이며 또 그런 한에 있어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체제의
기능적 보완물이라는 또 다른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에서 시민사회는 80년대 후반 이후의 새로운
현상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 공간은 지난 총파업투쟁과정에서
「범대위」의 역할이 증명해 주는 것처럼 정치적
변동과정에서 변화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일방적인 지배담론에
맞서는 대항담론을 전파하며 나아가 이를 위한 행동을
조직화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열린 가능성의 공간으로
자리매김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혹자들이 말하는 한국의
민주화를 시민사회의 자율성 증대라고 보는 관점은 경험적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민사회의 대주주라할
언론의 대국가권력 자율성의 증대 내지 자립화경향은 동시에
언론의 사자본의 경제권력하로의 종속성의 심화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독점자본과 국가간의 위상변화를
배경으로 하는 이러한 시민사회의 정치권력에 대한 자율성의
증대와 경제권력에 대한 종속성의 심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시민사회의 자율성 증대와
민주주의의 증대를 등치시켜보는 것은 시민사회 영역 마찬가지로
계급관계에 의해 각인되어 있고 이것이 민중지향적 시민사회와
자본종속적 시민사회로 분화되고 있는 경향을 전적으로 간과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현정권의 헤게모니 위기는 한편으로 민중부문의
공격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 보수언론과 같은 자본종속적
시민사회내 헤게모니기구의 이반으로 인한 지배정당성의 위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현정권의 지배정당성은 다른
무엇보다 ① 북한의 존재 ② 경제개발 ③ 지배엘리트의
민주화투쟁경력 ④ 개혁이라는 원천에 의해 공급받아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이 4가지의 정당성 자원
모두가 고갈되었거나 혹은 고갈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무엇보다
첫째로 북한의 존재, 곧 공포를 통한 지배는 한국정치사를
통틀어 가장 효과적인 정당성 자원 가운데 하나였음에는
분명하나, 현존 사회주의 붕괴 이후 북한의 위기는 이를 통한
정당성 보전이 예전처럼 무조건적이지만은 않음을 보여 준다.
정권이 스스로 선전해 온 것처럼 아사직전의 ‘악마’로부터 -
혹 절묘한 남북한 팀플레이를 통한 - 국면조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대항세력을 ‘싹쓸이’할 정도의
구조조정적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둘째, 한국정치에서
경제개발은 안보와 함께 정당성 자원의 양대축으로 역할해 왔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자본의 위기담론에 밀린 상황하에서 자칭
‘경제대통령’ YS의 대자본 헤게모니는 기대하기가 어렵고, 또
그나마 노동측과의 힘싸움에서 패배한 그에게 자본이
만족하리라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자본의
규제완화요구와 민중생활간의 모순성으로 인해 규제완화는 그
자체로 한계가 있고, 경우에 따라 노조 및 대중운동의 또다른
저항을 자초할 위험마저 존재한다. 셋째, 현 파워엘리트가
훈장처럼 내세웠던 민주화투쟁 경력만으로는 더이상 정치라는
직업활동을 영위하기 어렵게 되었다. 마치 후보의 필수경력처럼
되어 버린 이 경력은 정보화사회, 세계화시대를 맞이 하여
당사자 스스로 이미 거추장스럽게 느낀지 오래고, 다른 무엇보다
한보사태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들 ‘투사’들의 엄청난 부패는
이들에 대한 정치적 평가뿐만 아니라 역사적 평가마저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민주화투쟁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 부패 때문에 역사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넷째,
현정권 집권초기의 위로부터의 개혁이 한 때 현정권의
등록상표였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 그 개혁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정권안정이라는
권력논리에 의해 단행되긴 했지만 그나마 평가해 줄 대목이었던
구시대의 인적 청산마저도, 대선을 맞이한 현시점에서 또다른
정치논리 곧 지역주의 담론에 밀려 스스로 부정할 처지에 와
있다. 결국 현재 정치권력은 헤게모니의 원래적 기능 가운데
하나인 사회적 통합력으로의 기능을 상실하고, 남아 있는 역사적
과업 즉 ‘선거관리위원회’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자신 혹은 자파에게 조금이나마 유리한
후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곧 ‘김심’으로 환원되어
버렸다.
5. 맺으면서
결국 낡은 헤게모니는 붕괴되고 새로운 헤게모니는 형성되지
않은, 알려진 그 어느 정치세력도 사회의 유일대표성을 주장할
수 없는, 그리고 공동체의 미래가 사(私)자본의 전제에 저당잡혀
있는 현재 한국사회의 위기는 새로운 대안세력의 출현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 가장 ‘경쟁력’있는 한국사회 21세기
정치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는 노동의 정치에 의한 세력교체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미완의 프로젝트’로서 한국의 근대화를
정치적으로 종결짓는 경로가 된다. 노동의 정치 그 구체적
표현으로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그러나 노조가 어떤 정당의
주요고객이 된다거나, 혹은 투표시 직업이 노동자이기만 하면
몰표를 던지는 문제는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은 다른 수단에
의한 자본주의의 계속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정경분리
지배전략(정당은 정치투쟁, 노조는 경제투쟁)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출하는 것과도 무관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노조출신
시의원, 도의원 그리고 국회의원 몇명을 놓고 ‘세력’이라
부르지 않는다.
세력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개념이다. 여기서 세력이 위치하는
장소가 원내인지 아니면 원외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렇지만 분석편의상 우리는 - 그람시적 정신의 연장에서 -
정치사회지향적 정치세력화와 시민사회지향적 정치세력화를
나누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전자가 주로 원래적 의미의
정치권력 내지 강제력을 포함한 직접권력에, 후자는 사회권력
내지 간접권력 혹은 헤게모니에 관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그 자체로 고도로 정치화 되어있는 한국사회에서
두가지를 ‘차이 속의 통일’로 보지 못한 채 어느 하나만을
절대화하는 것은 이론적 오류라 하겠다. 문제의 핵심은 권력문제
즉 그 세력이 어떤 계급․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권력문제를 제기하는가에 있다. 현실정치적으로 세력이란
권력장악의 가능성이 실재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지되고,
현실의 역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이 단순한 잠재력이 아니라
실력임이 공개적으로 실증될 때 비로소 상대방에 의해 인정된다.
이러한 실력에 기초한 ‘인정투쟁’의 단계를 경과한 세력이
사회적 합의를 장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또 기타
사회적 동맹 내지 제휴세력을 설득할 수 있을 때, 곧
헤게모니적으로 될 때 그 세력은 대안세력이 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이나 단계 각각에서 정치사회적 개입과 시민사회적
개입은 결합되어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활동의
최종적인 성패는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인민들이 잃어버린 또
잊어버린 자신의 ‘주권’을 국가로 부터 회수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심장부 깊숙히 장착되어 있는 차이와 모순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는 지 여부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권의 회수과정으로서의 진정한 민주화야말로 한국사회가
미래에 맞게 될 노동자정치세력화의 핵심 프로젝트임에
분명하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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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5-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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