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여행기(5) 나풀레옹이 깨뜨린 천년의 영화 |
현장에서 미래를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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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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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연재하며
한국에도 대학생과 젊은 회사원들을 중심으로 배낭여행이 붐을
이루고 있다.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배낭 여행의 양적인
성장에 비해, 건강한 여행 문화는 아직도 성숙되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세계명승고적(?)을 ‘수박 겉핥는 식’으로
여행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최근에는
젊은 배낭객을 중심으로 ‘세계 건축 기행’, ‘세계미술기행’,
‘세계음악기행’ 등 테마 여행이 확산되고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 배낭여행객들은 ‘왔노라! 보았노라!’는 식의 여행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96년 여름 약 40일간의 일정으로 유럽에 다녀왔다. 이
글은 유럽 사회의 여러 풍속들과 문화, 그리고 특징적인
현상들을 접하면서, 필자가 느꼈던 느낌들을 적어본 것이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세계관과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다른
단상들이 들기 마련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려함보다는 루이
왕조의 방탕과 부패의 냄새가 코를 찔렀고,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동유럽에서는 ‘자본주의적 논리의 비인간성’만을
느꼈을 뿐이다.
유홍준 선생에 따르면 여행자는 3단계로 나눠진다고 한다.
초심자는 유명한 명승고적을 찾아다니며 안내책자 혹은 안내
푯말을 자세히 읽는 사람들이라고 하며, 중급자는 같은 장소를
들리면서도 부분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전체적인 조망과
시야를 중시한다고 한다. 그러면 고참급의 여행은 어떠할까.
그들은 ‘사람들’을 중시한다고 한다. 그곳 사람들의 풍습,
습관, 그리고 그들의 고유한 문화들을 직접 느끼려고 노력하며,
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들을 시도한다고 한다.
필자가 느끼기에도 여행이란 모름지기 ‘그곳의 사람과 삶을
체험하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배낭
여행자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테마를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무리한 여행일정을 잡기보다는 역사적/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곳에서 삶과 역사를 느껴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글은 필자가 유럽의 여러 문화, 풍속, 풍물, 역사적 명소
등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시각에서 서술해본 것이다. 유럽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이자, 건전한 배낭 여행
문화의 성숙에 일조하면 좋겠다.
유럽여행기(5)
나폴레옹이 깨뜨린 천년의 영화
- 베네치아에서의 상념
유럽여행기(5)
나폴레옹이 깨뜨린 천년의 영화
이 산 하 / 서울대 법대 재학
산마르코 광장에 나부낀 ‘자유, 평등, 박애’의 깃발!
베네치아는 천 년 동안 한 번도 이민족(異民族)에게 점령당해 본
적이 없다. 베네치아 자체가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한
‘은신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네치아의 역사는 로마제국
말기 훈족의 잦은 침입에 맞서기 위해, 육지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진 아드리아해-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의
늪지대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약 천 년 동안
딱 한 번을 제외하고 산마르코 광장에 타국의 깃발이 나부낀
적은 없었다. 바로 난공불락의 요새, 베네치아도
‘나폴레옹’이라는 희대의 영웅을 당해낼 수는 없었나 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은 유럽의 주변 군주국들에게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갔으며, 급기야 프랑스 혁명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 특히 오스트리아 제국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의 모국으로서, 프랑스 혁명정부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혁명정부는 이탈리아 전선
책임자로 ‘젊은 장군’ 나폴레옹을 임명한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차례로 격파하고, 이탈리아 북부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한다. 결국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국가 ‘베네치아’도
나폴레옹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산마르코 광장의 첨탑에도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정부의 ‘삼색기’가
나부끼게 된 것이다.
가라앉고 있는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북부의 항구도시이다. 1백 22개의 섬, 1백
76개 운하, 4백 개의 다리로 이루어졌다. 베네치아에 오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바로 나폴레옹이 ‘국보’(國寶)로
지정했던 ‘대운하’(Canal Grande)이다. 모든 운하가 배가
지나가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과는 다르게, 베네치아에서의
운하는 배를 위한 운하가 아니라, ‘물을 위한’ 운하이다. 즉,
베네치아가 원래 늪지대에 위치해 있었던 관계로 이들에게는 늪
지대의 물이 고여있지 않고 항상 흐르도록 하여, 살아있는 늪을
만드는 것이 최대의 고민거리였다. 바로 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섬 곳곳에 운하를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의 혈관처럼 섬
구석구석에 운하가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96년 11월 베네치아는 폭우로 시가지 90%가 물에 잠기는 큰
피해를 입었다. 베네치아는 금세기 들어 20여 차례의 홍수를
만났다. 1966년 11월 대홍수 때는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베네치아의 지반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지반이 약한 개펄 위에 세워진데다 염분에
의한 지질구조 약화로 매년 0.2~1cm씩 침하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알프스 만년설이 녹아내려
아드리아해 수면이 매년 15~20cm 상승할 것이며, 그러면 앞으로
60년 안에 베네치아는 물에 잠길 것이라는 점이다. 베네치아의
평균고도는 해발 1.1m밖에 되지 않는다.
이탈리아 정부는 90년 ‘아드리아해에 60~80개의 수문을 만들어
바닷물 높이를 조절하는’ ‘모세계획’이라는 것을 확정했지만,
막대한 공사비와 건설회사 수주과정에서의 부패들로 인해
지연되고 있다.
이제 베네치아를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후세에 ‘수몰 도시’로 기억될, 지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으로 베네치아를 여행해야 할 것 같다.
모든 길은 ‘산 마르코’ 광장으로 통한다!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에 내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내 몸으로 들어온다. 따가운 여름 햇볕을
친구삼아 나는 ‘산 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베네치아에서
모든 길은 ‘산 마르코’ 광장과 ‘리알토’ 다리로 통하게 되어
있다. ‘산 마르코’ 광장으로 가는 길은 지루하지 않다. 양
팔꿈치로 버티면 버틴 팔꿈치가 좌우의 건물 벽에 붙어버릴
정도로 좁은 길도 있고, 한술 더떠서 아예 건물 아래를 도려낸
길도 있다. 좁은 길을 희롱하며 걷다보면, 어느새 조그만 광장에
다다른다. 베네치아인들은 ‘캄포’라고 부른다. 이런 조그만
광장에 서서 주위의 높은 집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생각지도 않던 방향에서 사람이 나타나 소광장을 가로질러 다른
골목으로 사라져 간다. 베네치아에는 ‘조그만 광장’들이
굉장히 많이 있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는, 땅
한뼘도 헛되이 쓸 수 없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더구나 어느
일 개인이 ‘넓은 집’을 갖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자연히
고층건물들이 들어섰다. 항상 그렇듯이 고층건물은 어딘지
‘반인간적이고, 반자연적’이다. 고층건물이 주는 위압감과
인간의 소외, 그리고 자연환경의 열악함을 극복하기 위해,
베네치아인들은 고층건물들 사이사이에 ‘광장’을 만들었다.
이웃사람들과 얘기도 나누고, 햇빛도 쐬고,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동체적 삶의 공간이자 휴식 공간’으로서
‘광장(캄포)’를 섬 곳곳에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길이
‘산 마르코’ 광장으로 통하는 것도 쉽게 볼 일이 아니다.
거기에도 어떤 배려가 담겨 있다고 한다. 김석철 선생은
「세계건축기행」에서 이를 두고, ‘산 마르코’
광장을 ‘베네치아인 모두의 광장’으로 만들려는 어떤 공동체적
의식의 발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삭막한 도시’ 속에서도
‘인간적인 삶의 공간’, ‘평등한 인간들 사이의 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이곳 베네치아에서 배운다.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 동안, 어느새 내 앞에는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난다. 하늘이 열리고, 바다가 나를 향해 손짓 한다.
“어디든 조그만 광장에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큰 건물
입면이 나타나며 산 마르코 광장이 장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길
맞은편에 석회암 회랑이 거대한 규모로 서 있고 길고 가늘던
하늘이 커다란 하늘이 된다.”
김석철 선생은 그 감동을 이렇게 적고 있다. 광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질서정연한 ‘회랑(回廊)’들 -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마루같은 공간 - 이다. ㄷ자 모양의
광장에는 네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지만, 보기에는 마치 하나의
건물인 듯하다. 광장에 면한 각 건물의 아래층이 석회암의
회랑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광장과 건물을 조화시키려는
베네치아인들의 섬세한 마음 씀씀이가 느껴진다. 광장 한 곳에는
높다란 첨탑(종루)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배의
안전을 위해 과거에는 밤마다 불을 피웠던 곳이다. 아드리아해를
지배하고, 동지중해를 지배했던 베네치아인들의 기상이 서려
있다.
베네치아의 상징 ‘날개달린 사자’
산마르코 광장은 산마르코 성당, 두칼레 궁, 공공청사, 시계탑,
종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176년 산마르코 성당이, 그 옆의
두칼레 궁은 1300년에 건설되었다. 옛 시청은 1520년에
건설되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지금과
비슷한 건축적 형태를 갖추게 된다. 광장이 지금처럼 ㄷ자
형태의 회랑으로 완결된 것은, 나폴레옹의 점령 이후인
1805년이었다. 실제로 산마르코 성당의 맞은편 건물은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점령한 후, 르네상스식의 기존 건물을
헐고, 새로 건설한 것이라고 한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대운하 부두로 나가는 곳에는 돌 기둥 위에
거대한 ‘날개 달린 사자’가 올라앉아 있고, 많은 건축물의
벽에도 ‘날개 달린 사자’의 부조가 있다. 이것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복음서 저자 ‘마가’(성 마르코)를 수호 성인으로
삼고, 그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를 나라의 문장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네치아인들이 ‘성마르코’의 유해를
모셔오게 된 사연이 ‘대단히 베네치아적’이어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베네치안인들은 원래 ‘성 테오도로’라는 수호성인(守護聖人)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인의 위계상으로는 그다지 높지
않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인들은 자주
‘피렌체’-베네치아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주도했던
도시국가 중의 하나-나 ‘로마’와 비교해 약간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피렌체의 수호성인은 ‘성 요한’이고,
로마는 ‘성 베드로’이다. 그런데 베네치아인들은 아주 우연한
기회로 ‘복음서’를 쓴 4명의 성인 가운데 한 명인 ‘성
마르코’를 모셔오게 된다. 우리에게는 ‘마가복음’으로 알려진
성인을 말한다.
연대기로는 828년이었다. 당시 베네치아 상인들의 주요한 행상
루트중의 하나가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를 연결하는 것이었는데,
그 중심이 알렉산드리아였다. ‘트리부노’와 ‘루스티코’라는
이름의 두 베네치아 상인의 배가 이슬람교도들과의 교역을 위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 정박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거리는
종종 이슬람교도들의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습격 및 행패로
어수선하곤 했다. 두 베네치아 상인은 조심스럽게 물건을 가지고
가기로 되어 있던 어떤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복음서의
저자인 성 마르코의 유해를 모시고 있었다. 그 날 이 수도원은
이교도(異敎徒)들의 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해지면서, ‘성
마르코’의 유해를 보존할 방법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교도들의 무리들이 수도원에 가까이 다가오자, 베네치아
상인들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그들에게 ‘성 마르코’의 유해를
팔라고 제안한다. 수도원측은 ‘성 마르코’의 유해를
이교도들의 손에 넘기기보다는, 같은 그리스도교도인
베네치아인에게 팔기로 결심한다. 베네치아인들은 손수레
밑바닥에 성마르코의 유골을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 덩어리를
빈틈없이 채운 후 수도원을 떠난다. 이슬람교도는 돼지라는 말만
들어도 두통이 나고 구역질을 일으킨다. 마지막 관문인 이집트의
항구에서 이슬람교도인 관리의 눈을 ‘돼지고기’를 이용해 용케
피해 결국 베네치아 상인들은 베네치아에 무사히 당도하게 된다.
당시에 이슬람교도들과의 교역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베니스
상인들은 ‘장사’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교황 금지령’
쯤은 쉽게 어길 수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배짱이 ‘성
마르코’의 유해를 베네치아로 모셔올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성인의 유해조차 ‘상거래’를 통해 모셔온 사실에서
베네치아인들의 ‘냉정한 이해타산성’을 엿보게 된다. 아무튼
그 이후 베네치아인들은 ‘날개 달린 사자’의 깃발을 자랑스레
휘날리며 동지중해를 항해하게 되었다.
바다와 함께 한 ‘베네치아의 역사’
광장에 들어서면서 우리를 맞아 주었던 ‘석회암의 회랑’과
‘산마르코 성당’, 그리고 ‘두칼레 궁전’ 등에 너무 정신을
뺏겨서는 안된다. 산마르코 광장의 참 모습은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고, 역사를 되새기고 오늘을
생각해보려는 ‘이성적 여유’를 되찾고, 눈길을 왼편으로
돌려라. 바로 ‘아드리아해’가 거기에 있다. 베네치아의 천년
역사가 숨쉬고 있는 곳이다. 발 밑에서 파도가 철썩거린다.
조화로운 회랑에서 베네치아인의 ‘기품’을 느끼며, 커다란
하늘을 받치고 있는 높다란 종루에서 베네치아인의 ‘기상’을
느낀다. 베네치아인의 ‘기품’와 ‘기상’은 이곳
‘아드리아해’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그곳은 베네치아의
역사이다. 인간과 하늘, 그리고 바다가 하나인 곳, 이곳이 바로
산마르코 광장이다. 건축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꼽고 있는 광장이라고 한다. 김석철 선생은 그 이유를
아주 탁월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씨에나의 깜뽀광장과 바띠깐의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을 이
곳과 비교해 보면 도시에서 광장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깜뽀 광장과 성 베드로 성당 광장의 뛰어난 성과는
건축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나 산 마르꼬 광장에는 건축과 자연의
만남이 있다. 건축만으로 이루어진 것과 건축과 자연이 함께
이룰 수 있는 것의 극명한 차이를 산마르코 광장은 말하는
듯하다.”
산마르코 광장이 바다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네치아인들에게 바다는 삶의 원천이며,
생명의 근원이며, 역사의 현장이다.
훈족의 침입으로부터 베네치아인들의 생명을 지켜준 것은 바로
‘개펄지대인 바다’였다. 또한 인구 10만의 도시국가가
에스파니아, 프랑스, 포루투갈 등의 대국들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면서 ‘영광의 세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다’
덕택이었다. 베네치아는 몸을 숨기기에는 적합했으나, 살기에는
아주 불편했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교환에 의해 얻어야만
했던 베네치아인들은 일찍이 ‘바다’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만’이라고 불렸던 아드리아해는 물론, ‘해가
떠온다’는 의미의 ‘레반트’ 해역으로 불리웠던 동지중해까지
10세기 경부터 장악하기 시작하여 오스만터키 제국이
콘스탄티노플과 중요한 해상 거점들을 점령하기 전까지 약 5백
년 동안 지배했다. 베네치아는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해상 상품무역을 사실상 독점하면서
유럽 경제의 중심이 되어 갔고, 15세기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의 한 도시로만 바라보면 그 진수를 만끽할
수 없다. 베네치아는 지리적으로는 서유럽에 가까우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비잔틴제국의 ‘그리스정교’가 아니라,
‘로마가톨릭’ 교회 소속이었다. 베네치아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신성로마제국(서유럽의 대부분을 장악한 제국)에 속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 수도를 둔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에 속하게 된 것은 다분히
‘베네치아인’들의 ‘현실적이고 냉정한 이해타산’에 근거한
선택이었다. 막강한 정치, 군사적 힘으로 서유럽을 제패(制覇)한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이 되는 것보다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한 비잔틴제국의 소속이 되는 것이 ‘자국(自國)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었으며, 더구나
‘비잔틴 제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 보다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서유럽의
르네상스 문화와 동로마제국의 비잔틴 문화가 만난 ‘문명의
중심’이면서, 유럽 ‘경제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효시?
한 나라의 경제적 발전과 쇠퇴를 세계적인 차원의
경제규모로부터 설명하려는 이론적 조류를 ‘세계체제론’이라고
통칭한다. 세계체제론의 선구자격인 ‘페르낭 브로델’(Fernan
Braudel)에 의하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중심이 17세기에는
네덜란드, 18세기~19세기는 영국, 그리고 20세기가 미국이라면,
15세기는 베네치아가 당연 그 중심이었다고 말한다. 15세기
베네치아의 시(市) 예산이 약 75만 두카토(베네치아의
화폐단위)였는데 비해, 프랑스 왕국의 예산은 100만 두카토에
불과했다. 프랑스가 베네치아 인구의 열 배 이상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베네치아라는 국가가 당시에 얼마나 우월했는지를
알 수 있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동지중해 무역의 핵심인 후추,
향신료를 중심으로 해상교역에서의 우위를 확고히 유지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경제적 풍토는 아주 독특했다. 우선 그들은 각종
상업 및 기업활동에 대해 늘 철저하게 국가가 통제했다. 자국
상인들끼리의 출혈경쟁을 막기 위해, 이집트의 향신료를
사들이는 상인들에게는 기업연합(카르텔)을 편성하라는 지령을
내리기도 하고, 반대로 특정한 기업집단이 ‘독점화 경향’을
보이면 가차없이 국가가 개입하여, 물건을 몰수하고
‘시가(市價)’ 이상으로는 팔지 못하게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지오바니 아리기(Giovanni Arrighi)는 이를 두고,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효시라고까지 표현했다. 베네치아
경제의 또 다른 특징은, 상업활동이 전반적으로 대단히 활력에
넘쳤지만 그것은 무수히 많은 소규모 사업으로 나뉘어
행해졌다는 점이다. 피렌체나 제노바 식의 거대주의는 결코
이곳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중세경제사의 권위자인 예일대학의
로페츠 교수에 따르면 베네치아 공화국은 ‘현대의 사기업인
회사와 마찬가지로 경영’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베네치아
상인들은 기업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손쉽게 빌릴 수
있었다. 도시 전체가 일종의 상업사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피렌체의 경우처럼 ‘고도의 활동을 특징짓는
장기지속적이고 고액의 누적된 자본을 가지고 있는 회사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동지중해 무역’을 위해서, 베네치아 상인은
혼자 혹은 두 세명이 모여 하나의 조합을 만든다. 그리고 나서
도시 전체에 자발적으로 존재하는 ‘자본가들’에게 돈을 빌려
출항을 하고, 배가 귀환하면 해산한다. 다시 상업활동을 하려면,
위의 과정을 반복하면 된다. 한마디로 ‘은행에서 돈 빌리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요즘 우리 나라 상황과는 딴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사업자금을 아주 쉽게
빌릴 수 있었으며, 도시 전체가 그렇게 조직되어 있었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 베네치아 경제의 쇠퇴
“베네치아는 처음부터 자신이 거둔 성공의 논법 속에 갇혀
버렸다. 변화의 힘에 저항하는 베네치아의 진정한 지배자는
베네치아의 과거, 즉 법전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참조하는
선례(先例)였다 …… 역사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데 비해 승자는 어느날부터인가 이런 사실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라는
책에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베네치아 경제의
쇠락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베네치아는 16세기 초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유럽 경제의 중심은 베네치아에서 이제 북유럽 도시인
‘앤트워프’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베네치아 경제는 왜
쇠퇴했을까? 평범하게는 동지중해 지배권을 둘러싼
오스만터키제국과의 갈등을 들 수 있겠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베네치아의 ‘일리아드’라 불렀던 ‘크레타
공방전’(1645-1669)을 포함해서, 베네치아는 거대한 영토국가인
터키제국에 맞서 200년 이상을 대결해 왔다. 여기서 우리는
터키제국의 그림자가 베네치아에게는 얼마나 크게
드리워졌는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해상의
대발견이나 대서양 순환체제의 작동, 포르투갈의 예기치 못한
성공’ 역시 베네치아의 쇠퇴를 부채질한 요인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베네치아 경제의 쇠퇴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을 게
아니다. 브로델이 지적한 것처럼 ‘베네치아 경제구조 자체의
문제’를 짚지 않으면 안된다. 한마디로 베네치아의 자본주의적
조직은 대단히 편리하고 완벽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던, ‘이미
검증된 전통적인 방법’인 동지중해의 상업무역 활동에 푹 빠져,
만족해 하고 있었다. 경쟁상대인 제노바나 피렌체 등은 창조의
길을 가는 서유럽과 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반면,
베네치아는 ‘당장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비잔틴 제국’과의
연결을 더 선호했다. 결국 예전의 관습에 의해 ‘이미 정리된
해결책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것이며, 변화된 환경에 대처하는
보다 ‘구조적이고’, ‘적극적인 해결책’을 내오지 못했던
것이다.
‘파다니아 연방공화국’ 선포식이 베네치아에서!
며칠 전 어느 일간지에 ‘분리주의자’ 청년이 산마르코 성당의
종루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다가 ‘중무장’한 경찰에 붙잡혀가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한국에도 ‘남북문제’가 있듯이,
이탈리아에도 ‘남북문제’가 존재한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남북문제’가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하다면, 이탈리아의
‘남북문제’는 ‘역사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인
문제’이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북부지역의 중심 도시인 피렌체, 밀라노
등에서는 자체적인 산업이 발달했고, 제노바와 베네치아, 피사와
중세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해상도시국가들도 전부 북부지역에
존재한다. 특히 ‘베네치아의 세기’라 불리우는 15세기에,
베네치아는 한쪽으로는 동방을 상대로 한 동지중해(레반트)
무역을 원천으로 하면서, 밀라노, 롬바르디아, 제노바, 피렌체
등 북부지역의 주요 도시와의 연결망 형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알프스 산맥 너머의 서유럽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당시 ‘베네치아 경제
네트워크’의 경계가 북쪽으로는 알프스 산맥이었으며,
남쪽으로는 피렌체(Firenze) - 르네상스 시대 최대의 도시국가
중의 하나이며, 단테,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 등이 이곳
출신이다 - 와 안코나(Ancona) - 이탈리아 북동부지역에
위치해있으며,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다 - 를 잇는 선이었다.
당연히 이탈리아 북부지역에서 상업 및 산업활동이 왕성히
전개되었음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과정을
겪으면서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의 경제력 차이는 점점
벌어졌으며, 현재에도 그 간극은 좁혀지지 않고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은 ‘북부 분리주의자’들이 활개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으며, 결국 96년 총선에서 움베르토
보시는 ‘이탈리아 북부동맹’이라는 조직을 이끌고 10.6%의
득표를 얻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는 북부지역 사람들의
남부에 대한 우월의식이 상당히 뿌리깊고, 넓게 퍼져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북부동맹은 중앙집권적 국가운영, 세제 등에
대해 반대해 오다, 96년 하반기부터는 본격적으로 ‘북부지역의
분리독립’이라는 노선으로 선회했다. 지난 겨울에는
‘북부지역의 역사적인 상징’ 베네치아에서 ‘파다니아
연방공화국’ 독립선언 행사를 가졌다. ‘이탈리아 정부가
북부지역을 조직적으로 착취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파다니아의 주권을 선포하는 내용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부지역의 경제적 번영은 ‘북부동맹’의
토대이기도 하지만, 광범위한 공장지대의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한 ‘진보운동세력’의 토양이기도 하다. 베네치아에서
‘파다니아 연방공화국’ 독립선언이 있었던 날, 밀라노에서는
베네치아 행사 규모를 훨씬 웃도는 15만명 규모의 ‘단결 촉구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자본주의가 빚어내고 있는 구조적 병폐들은
‘진보운동세력’에게 ‘자신의 정치적, 정책적 실력’을
검증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은
‘극우세력’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극우세력의 논리는 단순하다.
‘누군가 내 몫을 빼앗아가고 있다, 그 누군가를 배제하자’는
것이다. 프랑스, 독일 등의 선진유럽국가들의 극우세력들은 그
대상을 ‘유색인종’, ‘불법이민자들’에 맞추고 있다. 그들을
쫓아내면 ‘우리가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고, 그들의 몫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극우세력들은
‘남부지역’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같은 민족이니
쫓아내지는 못하고, 그냥 ‘분리’함으로써 그들을
‘배제하자’는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무서운 논리이다.
‘누구를 배제함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방식’이 아닌 ‘모든
인류가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식’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 역할은 ‘인류와 역사의 진보를
염원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추진될 수 있다.
‘카사노바’는 탈옥자?
산마르코 광장의 부두에서 왼편으로 돌아가면 조그만 운하가
하나 나온다. 그 운하 위에는 조그만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
다리는 베네치아에서 리알토 다리에 이어 두 번째로 유명한
다리이다. 일명 ‘탄식의 다리’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
다리를 지나가면 살아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다리는
산마르코 성당의 왼편에 있는 두칼레 궁과 감옥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한마디로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다리’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육중한 감옥의 철창이 수 천 년의 세월
속에 녹슬어 있었지만, 으시시한 분위기 만큼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베네치아에 온 단체 여행객의 안내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 “누구도 이 다리를 건너면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그 안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그가 바로 카사노바입니다.” 나는 처음에 이 말이
카사노바에 대한 약간의 환상을 주입하고,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언급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이야기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는데, 최근 엄창현 씨의
‘서양사 배낭여행’이란 책에서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카사노바는 베네치아 정부에 의해 ‘1755년 7월 25일과 26일 밤
사이에 체포’되었는데, 죄목은 포괄적인 ‘사회불안 조성죄’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는 5년형을 언도받고, 당시 유럽에서
제일 견고하다는 ‘연판 지붕’이라 불리우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감옥에서도 타고난 기질로 간수,
죄수할 것 없이 아주 친하게 지냈지만, ‘육체적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자 드디어 탈옥을 결심했다고 한다. 처음에 그는 쇠조각을
이용해서 감옥의 바닥을 파내려 갔으나, 그의 감방이 옮겨지는
통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두 번째 시도를 하게 되는데,
옮겨진 감방의 옆에 수감된 ‘수도승’과 공동으로 탈옥 작업을
펼쳤다. 천정에 구멍을 내고 지붕을 통해 탈출하려는 계획을
세워서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탈옥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파내는 ‘탈출 구멍’은 어느 육체파
여배우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붙여지는데, 이들이 구멍을 파낸
천정에는 수 십 장의 성화(聖畵)로 채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탈출에 성공하여 카사노바는 뮌헨을 거쳐 파리로 입성하게
되었다. 그 이후 카사노바는 죽을 때까지 베네치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삶을 마감한다.
이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카사노바가 베네치아의 감옥에 갇힌
것은 확실하지만, 그가 ‘탄식의 다리’를 지나갔는지는
불확실하다. 탄식의 다리는 궁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고급 죄인들’이나 ‘정치범들’이 지나갔던 길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면 귀족이나 고급관료, 혹은 부유한 상인들
말이다. 이들은 사소한 일로 감옥에 갇히지 않았을 터이고,
‘중죄’를 지었을 때만 수감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한번
들어가면 평생 나오기 힘들거나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탄식의 다리는 이래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백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천년의 다리’ - 리알토다리
베네치아에서는 산마르코 광장 앞 부두에서 그냥 앉아 바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관광이 된다. 훈훈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출렁이는 파도소리에 귀기울이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천 년의 역사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 버스’를
이용했다. 이곳 베네치아에서는 ‘버스’, ‘택시’, ‘응급차’
할 것 없이 모두 ‘배’이다. 현대 도시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자동차 문화’인데, 이곳에서는 자동차 한 대도 볼 수
없으니 시끄러운 소음소리에 시달릴 이유는 전혀 없다. ‘배
버스’를 타고 산타루치아 역으로 향한다. 산마르코 광장으로
밀려들어오는 바닷물은 ‘대운하’로 밀려들고, 버스는 그
물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얼마나 갔을까. 눈 앞에
인상적으로 생긴 ‘다리’가 들어온다. ‘리알토 다리’이다.
리알토 다리는 ‘백년 동안 논의하고 삼십년 동안 건설’했다는
다리이다. 1172년 최초로 건설된 이후 16세기 초까지 3번에 걸쳐
다리가 세워졌으나, 모두 붕괴되고 말았다. 3차례에 걸친 붕괴
후에 1524년 베네치아 정부는 다리를 석재로 건조할 것을
결정하고, 당대의 거장들을 대상으로 현상공모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아치의 수와 형태, 그리고 자금부족’ 등으로 한없이
미루어졌다. 결국 1588년 무명의 건축가 안토니오 다
폰테(Antonio Da Ponte)의 제안으로 하나의 아치로 만드는 안이
결정되어, 1591년 마침내 완공되었다. 이 다리는 1977년 다시
완전하게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다리를
건설함에 있어서 왜 그토록 오랜 기간동안 논란을 빚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 이유는 베네치아만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한다. 즉,
베네치아에서의 다리는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는
육로(陸路)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각종 교역상품을 차질없이 운반하고,
하역하는 기점으로서의 의미도 지니는 것이다. 실제로
베네치아가 융성했을 때 ‘리알토 다리’ 주변 ‘국제적인
상품거래 시장’이었다. 따라서, 베네치아인들은 ‘교통
수단으로서 배가 통과할 수 있는 다리’, 즉 중앙이 높이 솟은
홍예다리 - 무지개 모양의 타원형으로 된 다리 - 를 건설해야만
했다. 이러한 구조는 당시 공학적 기술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작업에 속했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리알토 다리는 최초 논의가
시작된 이후 백 여 년의 기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었다.
32명의 인명을 앗아간 성수대교가 올 7월에 재개통된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 어떤 다리가 무너질지 모른다. 혹은 어떤 건물이
무너질지도 ┈ ‘안전불감증’에 걸린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베네치아인들의 치밀함과 끈기가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이제는 우리도 ‘천년을 전망하고’, ‘천년의 다리’를
건설할 ‘치밀함과 끈기’를 지녀야 할 때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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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6-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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