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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란 들을 수 있는 귀에서 시작된다

현장에서 미래를  제122호
너부리

우리들 안에 내면화된 성차별주의, 여성혐오증에 맞서서

여자든 남자든 우리들 모두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차별주의적인 행동, 생활방식, 사고를 받아들이도록 사회화된다. 그 결과 여성들 역시 남성들만큼이나 성차별주의자일 수 있다. 억압적인 사회를 좀 더 해방적이고 좀 더 자유로우며 보다 더 민주적인 사회로 변혁하는데 동참하는 모든 운동은 우리들 모두가 바로 그 억압(들)을 영속화하는데 참여하고 있다는 공모에 대한 의식과 책임성에서 시작되고 지속된다. 세상을 변혁하는 작업이란 그 세상이 일러주어 내 안에 내면화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들의 결을 대면하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대면은, (우리 사회) 집단들 간의 (변혁)투쟁에서 종종 누락되고 무시되어 온 것이기도 한, 변혁주체로서 책임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주요 전략들 중 하나였던 의식화(consciousness-raising)는 자기 안에도 내면화된 성차별주의와 대면하는 것이 페미니스트가 되어가는 과정의 통합적인 일부라는 점을 일러준다.
역사적으로 여성운동은 자기변혁을 동반한, 최초의 대중적인 사회변혁운동이었다. 여성해방을 향한 투쟁은 노동해방을 향한 투쟁보다 훨씬 더 장구했으며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다. 젠더, 성별 권력관계란 가장 방대하면서도 가장 조밀한 권력 관계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사회 운동들과 (좌파) 정치적 기획(들의 연이은 실패)에서 우리가 반복해서 배운 점은 여성해방 없이는 인간해방도, 노동해방도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20세기 진보 운동들과 정치적 기획들에 팽배했던 남성우월주의와 남성중심주의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여성들의 목소리를 침묵시킨다는 점에서 단순한 성차별이 아니다. 여성에 대한 우월의식은 남성의 정치의식, 계급의식을 약화시킨다. 여성들 안에도 내장된 여성혐오증은 계급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은폐하고, 주체로서 여성들을 무력화시키는데 봉사한다. 그리고 지배세력은 이 모든 것을 영악하게 이용한다. 내가 보기에, 진보진영에서 무의식적 수준에서까지 강요되는 여성혐오증을 벗어나,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동료 여성들을 ‘여자’가 아니라 정치적 공동주체로 인식하고 정치적 공동주체로서 대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변혁 정치의 출발점이다.
다음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작가인 애드리안 리치가 한 말이다. 우리 안에도 내장된 성차별주의, 여성혐오증의 작동과 그 폐해를 잘 지적하고 있어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나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몇 가지 방식들에 대해서 열거해 보고자 한다.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것self-trivialization이 그 첫 번째다. 여성들은 중요한 일, 중요한 창조를 할 수 없다는 거짓말을 믿는 것 말이다. 우리들 자신의 필요와 욕구가 아니라 항상 남들의 욕구를 발견하고 채워주려고 애쓰면서, 우리들 스스로를 혹은 우리들의 일을 진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말이다. 남성들을 모방하면서 지적인 혹은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것 자체에 만족하면서, 우리들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거짓을 말하면서, 우리들이 지닌 온전한 가능성들을 실험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우리가 아이들이나 연인에게 바치는 주의와 열심한 노동을 우리들 자신의 가능성에는 충분히 기울이지 않는 것 말이다.”
“수평적 적대(심) --다른 여성들에 대한 경멸--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두 번째 방식이리라. 다른 여성들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 쏟아 붓는 공포와 불신 말이다. ‘여성들은 결코 실제로 무언가를 하려 들지 않는다’는 [근거없고 여성 폄훼적인] 확신이라던가, 여성들의 자기결정권과 생존은 남성들이 이룩해낸 ‘진짜’ 혁명에 부차적이라는 [허위적] 맹신이라던가. ‘우리에게 최악의 적은 바로 여성들’이라는 잘못된 믿음이라던가 말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길러진 자기혐오를 서로서로에게 이렇게 얄팍하게 투사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최악의 적이 되고 만다.”
“세 번째 파괴성은 엉뚱한 데 쏟아 붓는 측은지심/공감misplaced compassion이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이 최근에 강간을 당했다. 그녀의 첫번째 --그리고 매우 전형적인-- 본능은, 자기 자신에게 칼을 겨누었던 강간자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우리가 우리를 강간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서로에게 측은지심과 공감을 느낄 때라야, 우리는 자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네 번째 자기파괴방식은 중독이다. (대문자로 쓴) ‘사랑’Love에 대한 중독 -- 구원이라고도 불리며 여성의 커리어라고 여겨지는, 이기심없는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관념에 대한 중독 말이다. 마약과도 같은 열광적 행위로서 섹스라는 관념에 대한 중독 말이다. 알고보면 이런 식의 섹스 관념에 대한 중독이야말로 자기파괴self-immolation이자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는 한 방식인데 말이다. 우울증 중독 --이것은 여성으로서 실존을 살아내는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우울증에 빠진 자들에게는 책임을 지우지 않으며 의사들은 우리에게 약을 처방해주고 술을 통해서 우울한 황량함을 가리기 때문이다. 남성의 인정에 대한 중독. 성적으로든지 지적으로든지 간에 자기를 지지해주는 남성을 발견할 수 있는 한, 괜찮다고 여기고 자기의 실존이 옹호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로 인해 치르게 되는 대가가 무엇이든지 말이다.”
“자기를 하찮게 여기는 것, 여성들에 대한 경멸, 엉뚱한데 쏟아 붓는 측은지심/공감, 중독. 이 사중의 독으로부터 우리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생존과 더 나은 삶의 재건설 행위를 위해 더욱 더 적절한 몸과 마음을 지니게 될 터이다.” Adrienne Rich. On Lies, Secrets, and Silence: Selected Prose 1966-1978 (New York: Norton, 1979), 121-123.


변화란 들을 줄 아는 귀, 듣고 있는 귀로부터 시작된다

최근에 진보넷 블로그에 성폭력피해 생존자의 글쓰기를 지지하고 반성폭력 운동에 연대하는 블로거들의 글쓰기가 이어지고 있다(http://blog.jinbo.net/ trackpack/?pid=43). 성폭력피해 생존자의 글쓰기가 고통을 가로질러 공명을 내면서 여러 다른 여성들의 경험 이야기와 정치적 정서적 지지가 잇따르고 있다. 성폭력 생존자의 글쓰기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단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다. 성폭력 경험을 말하는 것은 고통에 대한 기억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고통과 상처를 야기한다. 성폭력피해 생존자에게 말하기/글쓰기란 적극적으로 연루하고 개입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정치적 실천으로서 이런 글쓰기는 개인의 고통을 여럿이 공유하게 함으로써 경험이 되고 집단의 기억이 되며 정치가 된다. 피해생존자와 더불어 다른 여성들의 따로 또 함께 글쓰기/말하기는 사회적 소수로서 여성들의 말하기가 갖는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이들의 글쓰기가 분명하게 보여주듯, 개인적인 것은 집단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딴날당 출신의 구케의원 최연희가 정치를 본격적으로 재개하면서 성추행을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했듯이, 성추행, 성폭력, 광범위한 의미에서 젠더폭력을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야말로 정확하게 가부장제와 남성지배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수법이다.
진보넷 블로거들이 드러내는 성폭력피해 생존 경험에 대한 글쓰기에서 과거는 미래를 향해가는future-oriented 기획이 된다. 자기 자신도 할 수만 있다면, 남들도 쉽사리 혹은 어렵사리 ‘잊으라’는 과거를, 여성으로서, 재기억하는 성폭력피해 생존자들은 자기치유를 정치적 저항 그리고 문화적, 사회적 변화/변혁과 분명하게 연결한다. 생존자로서의 재기억을 매개로 한 자기치유는 글쓰기를 통해서 정치적 저항과 문화적/사회적 변화와 연결된다.
이들의 글쓰기와 더불어, 우리가 그토록 부인하고자 공모했던 어떤 현실이, 말뜻 그대로의 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따로 또 함께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또 기뻐한다. 이 고통에 찬, 용감한 목소리가 쪼개어 연 세상은 우리에게 미래를 향해 가는 정치 기획의 공간인 것이다. 이들의 글쓰기를 통해서, 과거는 말뜻 그대로 지나가 버려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환원불가능한 어떤 연속성, 과거의 현재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망각하고자 공모해 왔다는 점에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급진적으로 다른 방식에서 ‘진상’을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성폭력피해 생존자들의 글쓰기는, 조직의 편에서, 조직 내부의 힘있는 자들에 감정이입하여 ‘진상’을 파악하는 ‘진보’에 ‘진보’란 없다는 무서운 경고이자, ‘우리’의 현재를 비추어주는 거울이자, 우리의 미래를 시험하는 리트머스이자, 불행컨대 예언일 수도 있다. 내부 권력의 결을 따라 ‘현실’을 파악하는 자들이 어찌 현실을 변혁할 수 있단 말인가?
성폭력 생존자들은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관련조직의 생존-발전viability에 매우 근본적인 의제를 던지고 매우 급진적인 공간들을 열어젖히고 있다. 바라건대, 변화하려는 의지를 유발하고 책임성을 동반하는 인식이 늘기를. 인식이란 변화의 의지를, 변화를 위한 투쟁을 발생시키고 동반할 때라야 ‘진보적’ 인식이 되기 시작하는 법. 가해자의 인권을 운운하는 반동적 역습backlash이나 조직의 구겨진 체면을 다림질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퇴행이자, 스스로의 텅빈 진보성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변화란 들을 줄 아는 귀, 듣고 있는 귀로부터 시작된다.

2006-07-31 16:56:46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3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