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여행기 체코.오스트리아 |
현장에서 미래를 제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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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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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집시여인의 슬픔과 투쟁
유럽여행기(6,7)
이 산 하 / 서울대 법대 재학
오스트리아
‘우리’가 저항해야 할 일본은?
나는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으로 들어가는 야간
열차로 갈아탔다. 모든 좌석이 꽉꽉 차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콤파트먼트 밖의 좁은 통로에서 설 자리를 물색했다. 유럽에서
여행객들이 많이 움직이는 노선의 경우, 예약하지 않으면
좌석확보가 매우 힘들다. 따라서 장거리 여행인 경우 ‘예약’은
필수인 셈이다. 유럽 ‘예약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설 자리를 물색하는 나에게 반가운 사람이 눈에 띄었다. 척
보기에 분명 한국인 배낭객인 듯한 사람이 통로에 서서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길이 부딪히자, 나는
‘한국인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일본인’이라고
답하면서, 나에게 ‘일본인이냐’고 되물어 왔다. 유럽인들이
동양인들(한국인, 홍콩인, 일본인, 중국인 등)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 못하는 경우는 다반사이지만, 같은 동양인들끼리 국적을
혼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 둘이는, 서로의 국적을 혼동한
사건 때문이었는지, 곧 친해졌다.
그는 의과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이었다. 베네치아에서 약 3주
정도 머문 후, 비엔나에 잠깐 들러 체코의 ‘프라하’로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양국(兩國) 대학생들의 배낭여행 문화에
대해 잠깐 얘기를 나눴다. 그는 한국 대학생들의 ‘수박
겉핥기식’ 여행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 얘기하는 것도
잠깐, 나는 무엇에 이끌렸는지, 드디어 마음 속에 감춰 두었던
비수를 휘두르고 말았다.
“일본은 왜 2차 대전 때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민족들에게
저지른 갖은 만행에 대해 사과하지 않느냐?”
갑자기 이 질문이 왜 내 입에서 튀어 나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유별난 ‘반일민족주의자’는 분명 아니다. 다분히 일본에
대한 평균 한국인의 ‘불유쾌한 감정’ 정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홍역을 치르듯’, 나의
입에서는 역사 문제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절대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영역을 통해, 일본인을 제압해 버리려는 나의
섣부른 민족 감정의 발로였을까?
“일본인이라고 싸잡아 말하지는 말라. 일본 정치인들과
극우세력들만이 그렇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이나 대학생들은
일본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며,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담담하고 솔직했다. 한바탕의 논쟁조차도
불사하려는 나의 의지는 그의 ‘담담함’에 한풀 꺾이고 말았다.
여행 중에 만난 어느 일본인 대학생의 말만 믿고, 일본 국민
대다수는 ‘그들의 동아시아 침략만행’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어 본다.
‘우리는 일본의 누구에게, 혹은 어떤 모습에 대해서
저항하는가?’
‘일본을 얕잡아 보는 민족은 전세계에서 한민족밖에
없다’는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ꡔ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ꡕ라는 소설은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밑바닥 민족정서’를 잘 드러내 준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남북합동작전에 의해 막아낸다는 기막힌 상황설정은 우리들의
‘역사적 응어리짐’을 풀어 주기에 충분한 것 같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때 핵폭탄을 히로시마 등의 대도시에 떨어뜨린
미국과는 다르게, 정 많은 한민족은 동경 옆의 조그만
‘무인도’에 핵무기를 발사하게 함으로써, 한민족의 드높은
‘휴머니즘’을 한껏 감동적으로 연출해 준다. ꡔ대한제국
일본침략사ꡕ라는 소설은 아예 한민족이 ‘제국주의자’가
되어 일본을 침략한다는 내용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 내에 존재하는 ‘침략주의’, ‘제국주의’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다는 것이 ‘우리
스스로 제국주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악의 씨앗’일 뿐이다.
‘대(大)세르비아주의’라는 거대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려 했던 ‘대(大)크로아티아주의’는 20세기 인류가 벌인
가장 추악한 전쟁이라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에 대한 침략)의 한 원인이 되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 민족의 지배계급들은 ‘배타적 민족주의(쇼비니즘)’를
권력의 획득과 유지에 이용할 뿐이고, 민족 구성원들의 실질적인
생활 향상과 정치적 자유 및 권리의 보장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점이다.
진정한 평화와 휴머니즘의 구현이 지배계급의 손에 의해
이뤄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그들은 언제라도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고, 주변
민족들과 극도의 긴장을 조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독도를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일본
정부의 주장이 또 한차례 국내에 상당한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 지배계층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대해 투쟁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다만, 그에 대한 저항의 논리를
‘민족주의’로부터 빌어 오지는 말자. 이것은 ‘민족주의’
속에 내재한 ‘침략주의’와 ‘국수주의’를 경계하고자 함이며,
일본 지배계층의 ‘파시스트적 성향’에 저항하는 것과 ‘극단적
민족주의’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자 함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논리는 ‘진보주의’이며, ‘평화주의’이며,
‘국제주의’이다.
지켜졌으면 하는 것
빈(Wien) 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광고 전단지를 받아 들었다.
한국 민박집을 소개하는 전단지였다. 그런데 고민스럽게도 두
곳이었다. 가격이 좀 싸다 싶은 곳으로 숙소를 정한 후,
그곳에서 제공한 미니버스에 몸을 실었다. “00민박집은 절대
가지 마세요.” 태권도 사범이라는 운전기사의 첫마디는 다른
한국 민박집을 헐뜯는 것이었다. 야간열차에서 내내 서서 오느라
피곤에 지친 내 얼굴은 이내 찌푸려졌다. 내가 특별히 동포애나
민족애가 돈독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적 상업논리
속에서 최소한 유지해야 할 ‘인간성’과 ‘평화적 본성’조차
파괴되는 것이 못내 아쉬워서였다.
시청 앞 광장에서의 ‘오페라’ 감상
빈은 자타가 공인하는 음악도시이다. 그럼에도 나는 음악적
식견도 부족하고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아서 특별한 공연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할 참이었다. 그런데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겼다. 시청앞 광장에서 ‘필름 페스티발’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역대 공연된 오페라 중 가장 대표적인 것들의 녹화
필름을 시청 앞에서 대형 화면으로 상영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공짜로.
시청 앞에는 의자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다.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지만 시민인 듯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오페라가 이처럼 대중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우리의 경우만 하더라도 오페라는
사실 ‘있는 사람들’의 음악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에두아르트 푹스는 ꡔ풍속의 역사ꡕ에서 오페라
탄생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페라란 노래, 음악, 무용 그리고 화려한 색채라는 최상급의
형식을 이용하여 모든 객관적 감각을 교향악의 웅대한 통일체로
융합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페라도 역시 이
시대(절대주의 시대)에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오페라는
절대주의의 가장 독특한, 동시에 독점 배타적인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또 절대주의의 본질-[쾌락]을 가장 잘 표현한
기록이었다.”
절대주의 왕조가 발달해 있는 도시일수록 왕족․귀족들의
쾌락의 도구인 ‘오페라’ 문화가 발달해 있다고 한다면 너무
무리한 도식일까? 아무튼 빈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의
도시, 오페라의 도시로 발돋움하게 된 것도 절대주의 시대를
풍미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관련이 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페라가 지배계급의 쾌락에 봉사하는 도구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빈에서만큼은 ‘대중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유구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역사가 ‘노동자 및 시민들의 생활 영역 전반’에 대한
‘사회주의적 통제’의 범위를 넓혀 왔기 때문이다.
“비엔나의 사회민주적 노동자들은 작업장 이외에서는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세계와의 실제적 접촉을 피할 수 있었다.
다수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의 통제하에 있는 시 당국에
의해 건설되고 운영되는 매혹적인 아파트에서 살았다.
노동자들은 또한 사회주의적 협동상점에서 상품을 구입할 수
있었으며, 사회주의적 보조금에 의해 운영되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었고, 사회주의적
체스클럽에서 체스놀이를 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에게도 지배계급의 문화였던 오페라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폭넓게 제공해 왔으며, 결국 오페라를 ‘노동자와 시민의
것’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빈의 시청 앞 광장에서 느낀 것은,
‘귀족의 것’이었던 오페라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빈
노동자들과 시민들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베토벤의 고전음악조차도 ‘인민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그것은 또 다른 ‘계급투쟁’임을 강조하는 ‘한스 아이슬러’의
다음 언급은 충분히 새겨둘만 하다.
“건강한 주거,
훌륭한 식사,
2세의 교육,
노후의 보장 등이 그런 것처럼,
베토벤 역시 투쟁해서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음악에서 가장 긴급한 임무는 전문가 운동으로,
음악의 문맹을 절멸시켜 고전음악가의 가장 복잡한 음악까지도
인민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복지국가의 명암(明暗)
민박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라면을 먹기로 했다. 민박집에서
운영하는 한식당이 있었다. 그곳에는 한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고향이 전라도 어디쯤이라고 했다. 민박집 주인과는 먼
친척뻘되는데, 이곳에 와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은 없지만, 가끔 단속이라도 나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가슴 졸이지. 들키면 그날로 쫓겨나거든.”
생계를 꾸리는 데야 지장이 없겠지만, 항상 단속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한 생활의 연속이 조금은 힘든 모양이었다. 가끔은
고향도 가고 싶을 거고.
오스트리아 정부의 ‘불법’ 이민노동자에 대한 정책은
강경하기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의 사회민주주의정당)은 1970년 집권한 이후,
엄청난 경제성장을 달성했으며, 주당 40시간 노동, 가족수당,
의료시설 개선 등의 복지정책도 시행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이런 ‘밝은 면’ 뒤에는 이민노동자를 법적․인간적으로
배제했던 ‘어두운 면’이 존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스트리아 사회당 정부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실업상태의
이민노동자들을 ‘빈곤한 그들의 고국’으로 추방해 버렸다.
실제로 1973년~1982년까지 약 65,000명(전체 약 4분의 1에
해당)의 이민노동자들을 강제로 귀국시켰다. 설사 강제추방을
당하지 않은 이민노동자라 하더라도 직장을 구하는 것이 대단히
힘들었다. 11%나 되는 이민노동자들의 실업률은 그들의 현실을
웅변해 준다. 복지국가 모델의 환상 속에 ‘배타적
민족주의’라는 어두운 모습이 공존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내 코도 석잔데’
일국적 차원의 복지국가 모델은 80년대 이후 힘겨워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전세계적 규모에서 ‘최대의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최적의 요지’를 찾아 다니는 초국적 독점자본 운동을 일국적
차원에서 통제하기에는 분명 무리이다. “스웨덴의 한
조선회사는 본사를 버뮤다로 옮기고, 공장은 노르웨이로 옮길
것이라고 발표했다. 얀손(Kjell Jasson) 사장은 ‘(스웨덴의)
높은 세금’을 공장이전의 이유로 설명했다.” 오스트리아와
비슷한 복지국가 모델을 운영해 온 ‘스웨덴’의 최근 상황을
보도한 기사이다. 복지국가 모델 속에서 자본가들이 취하고 있는
행동 방향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독점자본가들에게는 오로지
‘이윤’과 ‘상품’의 논리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국가의
개입을 통해 시장경제의 모순들을 최소화하고 각종 복지정책을
확대하려던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은 초국적 독점자본의
횡포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채 파산하고 말았다.
노골적으로 복지정책과 세금의 축소를 주장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회사와 공장을 미련없이 자본축적 조건이 보다 유리한
국가로 옮겨 버리는 자본가들의 논리가, 극악한 ‘자본주의적
이윤논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다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이 기실 ‘노동통제’가 쉽고, ‘임금 싸고’, ‘세금 별로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결국 죽어나는 것은
임금노동자들이다.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당하느냐? 아프리카계
혹은 유럽계 노동자들이 당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인용하면서, “현재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일국적 차원에서의 사회계약’이 아니라 ‘전세계적
규모에서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어느 학자의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사회계약’을 실현하는 과정이
계급투쟁의 과정이듯이, 전세계적 규모에서의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이룩하기 위해서라도 계급투쟁은 필연적이다. 모든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자본주의적 이윤논리에 의해 고통 당하고 있는 전세계 대중들의
‘진실한 연대’와 ‘투쟁’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기이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건너온 ‘이민 노동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에게 따듯한 눈길과 연대의
손길을 보내자.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르는 우리 내부의
인종적․민족적 우월감을 버리고, ‘내 코도 석잔데’라는
현실 안주적 성향을 털어 버리고, 그들에게 들이대는 비수는
언제라도 우리에게 되돌려질 수 있음을 인식하여 ‘인간다운
삶을 위해’, ‘보다 인간적인 세계를 위해’ 함께 투쟁하자.
죽은 자와 산 자 - 모차르트와 잘츠부르크
잘츠부르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가 태어난 고장이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가 되었던
잘츠캄머구트(Salzkammergut)의 수려한 자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라는 도시는 ‘모차르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가 이 세상 사람은 아니라도 말이다.
모차르트의 후광을 업고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제가 되었으며, 잘츠부르크의 번화가인 게트라이데
거리의 9번지에 있는 모차르트의 생가는 항상 엄청난 인파로
물결친다. 모차르트가 새겨진 초컬릿을 먹으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죽어 있다는 것과 살아 있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죽은 자인 모차르트’의 힘이 최소한
잘츠부르크에서만큼은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보드리야르’라는 프랑스 현대철학자는 ‘죽음’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그는 ‘죽음’과 ‘권력’과의 관계에
주목한다. 중세 때 교회는 ‘죽음’을 장악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했다. 사람들은 ‘성직자’를 통해서만 ‘죽을 수’ 있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권력은 교회에서 국가로 이동한다. 동시에
‘죽음’에 대한 통제의 권리도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것으로 변하게 된다. 각종 보험제도,
사회보장제도 등은 노동자들의 ‘죽음’을 관리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의 교활한 수단일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자’는 보호해야 할 하나의 소중한 ‘자본’이며, 따라서
그들은 ‘노동자들의 죽음’까지 통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윤’ 축적 운동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죽을 권리를 달라!’고 했던가?
존재 자체의 괴로움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어보면, 감방에서
여름을 나는 사람들의 애증(愛憎)을 적어 놓은 대목이 있다.
“여름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합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보드리야르에게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의 삶’은 ‘여름철
감방에서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감방에 갇혀 있듯’이
‘자본주의 체계의 그물망’ 속에 갇혀 있으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기 몸뚱이의 존재 자체가 미움의 원인’이듯이
‘자신(노동자)의 존재 자체는 증오스러운 자본주의 체계의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드리야르의 고뇌는 여기에 존재한다. 그토록 증오하는
자본주의 체계이지만, 그것의 유지에 필수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노동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의 1차적 기획은 노동자가 자본주의 체계의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력한 길로 ‘기계의 파괴와 노동의 거부’를
주장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계의 완전한 전복’에 대한 그의
전망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여기서 그의 2차 기획이 제시된다.
전복 자체가 불가능함에야, 노동자의 존재 자체는 자본주의적
축적운동을 위한 생산요소에 불과할 뿐이라면, 결국 궁극의 체계
전복 전략으로 ‘노동의 생명력을 격렬한 죽음에 맡기는’
방법이 제기된 것이다.
나는 보드리야르에게 허무주의적 요소가 존재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의 극한적 사고에 주목한다. 그는 우리에게
‘자본주의적 체계의 그물망’이 얼마나 교활한지 밝혀 준다.
그는 인간의 죽음조차도 체계의 존속을 위해 ‘관리’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의 진절머리나는 ‘통제체제’를 고발하고 있을
뿐이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는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도
‘상품화’시키는 자본주의 체계의 교활함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탈주하려는 저항의 표현’으로서
‘죽음’은 오히려 또 다른 ‘상품’이 되어 있었다. 결국
생사를 떠나서, 자본주의 체계의 완전한 전복 없이는 그
그물망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음이 분명한 것 같다.
체코
프라하에서 만난 집시여인
내가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피타’를 통해서였다. 피타는
체코내 진보운동조직에서 일하는 활동가였는데, 그녀는 그의
아내였다. 그의 집으로 초대받아 갔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대면할 수 있었다. 깡마른 체구였지만 어딘지 다부져 보였다.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와 그녀의 두 눈이 더 크게 보였다. 긴
머리에 찢어진 청바지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동방에서 온
손님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맞이했다. 그녀는 영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피타’가 통역해 주었다. ‘피타’는 나와
한마디를 나눌 때마다, 아내에게 ‘통역’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오래된 신문 한 장을 가져와, 사진 한 컷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거기 있었다. 투쟁 현장의 선두에 선 그녀가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잡힌 것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제가
집회에 나갔을 때, 신문에 찍힌 사진이에요. 이게 저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을 게다. 그러나 그녀는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게으름’일까? 그렇지는 않다. 집시들이
‘공교육의 기회’를 정당하게 향유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물론 집시들 스스로가 ‘공동체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교육의 기회가 체코 본토인보다 훨씬 불공평하게
주어진다. 구(舊)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조차 집시 자녀들은
‘음악학교’ 등의 특수학교에 다닐 수 있었을 뿐이다. 설사
일반 학교에 다닌다 하더라도 인종적 멸시와 차별, 폭력을
당하기 일쑤다. 그러니 집시민족들의 자녀가 어디에서 정당한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피타’는 그런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 같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 나눌 때마다,
피타는 그녀에게 자세히 통역해 주었고, 그녀의 질문을 나에게
물어 오기도 했다. 투쟁 속에서 핀 사랑이라 더 아름다운
것일까?
체코 미인의 꿈
그녀는 사진 속에서 커다란 피켓을 들고 있었다. 나는 무슨
뜻이냐고 피타에게 물었다. “집시에게도 집과 직장을!”이라는
슬로건이라고 말해 주었다.
유럽에서 집시 문제는 첨예한 사회 문제 중의 하나다.
역사적으로 나찌정권은 동유럽 집시 약 50만 명을 살해했다.
독일은 아직까지도 그들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고 있다. 단지 집시문화의 중심인 하이델베르크에
‘대량학살 추모비’를 세웠을 뿐이다.
1993년, ‘미스 체코 선발대회’에 출전한 어느 미인 후보에게
‘미래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우리 도시에 있는 갈색 피부의 사람들을 완전히 청소해
버렸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은 환호로 답해 주었다. 고향 시민들은 그녀의
솔직함(?)에 대해 칭찬했음은 물론이다. 동유럽의 민족들이
‘집시 민족’에 대해 갖고 있는 ‘인종적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집시를 고용하고, 그들에게 아파트를 빌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그들은 ‘스킨헤드들’의 폭력과 살인위협에
시달려야 한다. 경찰도 예외는 아니다. 집시들에게 있어서
경찰은 ‘권리의 보호자’가 아니다. 그들 역시 집시들에 대해
‘심각한 폭력’을 밥먹듯이 행사하고 다닐 뿐이다.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동유럽 대부분의 집시들은
판잣집에 살며, 직장도 없다. 결국 그들은 생존을 위해
‘구걸’이나 ‘소매치기’ 등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는 집시들에 대한 대중들의 편견을 더욱 부채질한다. 이를테면
‘악순환의 고리’와 같은 것이다.
그녀의 ‘아들’이 택한 길
‘피타’와 그녀는 조그만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피타’는 체코인이며, 집배원이다. 피타의 월급으로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다. 동그란 눈을
뜨고, 나를 향해 방긋이 웃는 아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직 자신의 사회적 처지를 깨달을 나이는 아니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집시들이 사회로부터 어떻게 억압받고
있는가, 자기도 크면 그러한 ‘인종주의적 폭력’에 시달릴
것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 역시
동방의 손님이 반가웠는지, 아니면 자기와 비슷한 피부색깔의
사람들이 그리웠는지 연신 방긋거리며 방안을 돌아다녔다.
그에게도 언젠가는 ‘폭력과 편견’이 가해지겠지.
그래서인가. 피타가 문득 말한다. ‘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맑스와 레닌은 알고 있다.’
결국 피타는 그 아들에게 ‘저항과 투쟁’을 가르치고 있었다.
언젠가 그에게 가해질 모든 파시스트적․인종주의적
‘폭력과 편견’에 저항할 강인한 정신과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그에게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피타의 아들도 결국 ‘투쟁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스킨헤드(극우단체)들 때문에 집 주소도 사용하지 않아요.
테러의 위험이 아주 크거든요. 우체국 사서함을 이용하고
있어요.”
자본주의 체제로의 급속한 편입 속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경제적․사회적 불안정성’의 타개를 위해, 동유럽
민족들은 ‘희생자’를 찾고 있다. 대부분 그 희생자는 ‘집시
민족’들에게서 찾아진다. 나는 자본주의적 폭력과 인종주의적
편견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집시들의 정당한 생존권 투쟁을
지지한다. 자식에게까지 전해질 ‘인종주의적 편견’의 완전한
소멸을 염원한다. 피타와 그녀, 그리고 동유럽 집시들의 정당한
사회․정치적 권리의 획득을 진심으로 바란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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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8-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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