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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교훈4
 투쟁 돌아보기

현장에서 미래를  제124호
전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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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98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교훈 (4)

전주희 / 연구원



투쟁 속의 투쟁 : 노동조합 집행부와의 갈등
- 노동조합의 공인된 투쟁이냐 아니냐

투쟁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다시 싸우자고 했을 때 최초에는 전부 반대했어요. 내부 논란을 거듭하다가 대의원 한 번도 안 해봐서 무식해서 그런 것이다, 대의원대회에 우리 모두 가서 봐야 안다, 해서 가보았다. 그랬더니 집행부에서 ‘정리해고자는 133명’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다 돌았다. “회사도 277명인데 왜 노조가 133명이라고 하냐” 그러면서 투쟁이 만들어진 것이다. (면접자 q)
너무 힘드니까 식당 운영위원회에 요구하고 대의원대회에 갔는데, 대의원대회에서 해고자는 133명이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우리는 사라진 것이죠. 그래서 열 받아서 투쟁을 조직하고 했어요. 대의원대회에서 우리는 해고자가 아니고 고용승계자라며 제외됐다. 하지만 정리해고될 때 임금 등 승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고용승계가 아니죠. (면접자 s)

복직투쟁 과정 내내 식당 여성 조합원들과 노조 집행부 간에는 끊임없는 마찰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자들과 출근투쟁을 시작하면서 2000년 합의할 때까지 줄기차게 한편에서는 사측에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투쟁을,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에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투쟁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여왔다.
아래는 99월 8월부터 2000년 1월까지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원직복직 투쟁을 노동조합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약 18여 개월 동안 진행된 이 투쟁의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노조소식지를 통해 노조집행부와의 갈등의 단면과 투쟁이 기록되어 있거나 투쟁의 주체였던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기억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나름대로 생생하게(?) 당시 이 투쟁을 바라봤던 당시 노조집행부의 시각으로 기록된 소식들을 재구성하도록 한다.

1) 복직투쟁 : 자주적 투쟁 VS 정당한 조합활동 1999년 12월 23일, 노조소식 13-12호,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집행을 누가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노동조합이잖아요. 우리 절대로 포기 안 할 것이라고 이야기 많이 했지요. (면접자 q)
복직투쟁으로, 99년 휴가 끝나고부터 정식으로 출투와 투쟁을 하기 시작한 것은 99년 8월이었지요.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살았고 투쟁 시작하게 됐고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실텐데 힘들었지요. 시작할 때부터 이야기하면 ‘조합원으로 인정해줘도 되냐’는 정도였고요. 우리는 당당하게 조합원이라고 했어요. 그 과정 속에 우리는 집행부에 복직시킨다는 약속을 하라고 요구했고 집행부는 그 약속 못한다 그랬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오면서 우리가 여하튼 저는 개인적으로 제일 힘들었던 것이 그때는 노동가도 모르고 했는데 나머지 144명이 복직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동지들이 먼저 복직이 되면서 ‘무급휴직자, 징계해고자 27일 복직 : 작년 고용안정투쟁으로 발생된 무급휴직자 중 1,663명은 10월에 복직하고 나머지 165명의 무급동지들과 징계해고를 당한 동지들 중 9명이 27일부로 현장으로 복직한다… 아울러 남아있는 징계해고자들의 복직문제는 2000년 임금협상시 다시 거론할 것이며, 정리해고자들의 조기리콜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 노조소식 13-14호.
우리는 자체적으로 투쟁을 가장 최고 앞에서 서 있었다고 해야 하나요.(면접자 s)
생대위원 해복투, 식당조합원들은 원직복직을 위한 출근투쟁 과정에서 손해배상청구 및 채권가압류 민사 손해배상청구(64,285,476원) 및 채권가압류(84,285,476원), 집회 및 시위금지 가처분 신청을 당한 사실이 있다. - 노조소식 13-13호.
등 회사로부터 정당한 조합활동을 위협당하고 있어 규약에 의한 정당한 조합활동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과 법적 대응에 필요한 소송비용 일체를 신분보장 기금으로 처리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현대차 노동조합 규약 신분보장과 지급대상 규정에 따르면 ‘규약에 의한 조합활동은 노동조합 4대 의결기구인 조합원 총회, 대의원대회, 운영위원회, 상집위원회에서 결의한 활동’에 대해서만 신분보장 기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노동조합 운영위원회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논란이 있었으며, 투표한 결과 안건 상정 자체가 되지 않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이에 12월 21일 운영위원회에 식당조합원을 포함한 생대위와 해복투에서 노동조합의 공식 회의체계인 운영위원회 회의 도중 들어와 물리력을 동원한 심한 고성과 삿대질로 회의 자체를 무산시킨 것은 노동조합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심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또 어제(22일)는 8시부터 10시까지 해복투, 생대위, 식당조합원들이 노동조합 사무실을 점거함으로써 2시간 동안 노동조합 업무가 중단되기까지 했다.

농성 해고자 문제 이렇게 해결하겠습니다 노조소식 13-19호, 2000년 1월 5일.

복직투쟁과 관련하여 회사 측으로부터 고소고발된 17명의 해고동지들이 규약에 의한 신분보장을 요구하며 노동조합 운영위원회의 부결 결정에 반발하여 노동조합 앞의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15여일 지나고 있다. 집행부는 그동안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였고 해고자들의 고소, 가압류, 손배 철회를 시키도록 하겠다는 이야기도 전달했다. 이후 집행부는 해고 동지들의 농성이 시작된 후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임원 및 해고자 중 대표자와의 간담회를 통해 위와 같은 내용을 전달했고 다음과 같은 문안으로 집행부의 입장을 정리해서 제시했다. 첫째, 집행부는 해고자 17명과 고소, 손해배상 가압류 등을 취하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노력한다. 둘째, 신분보장의 문제는 고소가 취하되면 자동 해소되는 것이고 고소고발이 취하되지 않으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한다. 셋째, 원직복직의 문제는 집행부의 방침에 따라 단계적으로 복직을 요구하여 2000년 임금협상 때까지 해소되지 않으면 임금인상 투쟁시 최선을 다한다. 넷째, 또한 향후 해고자 복직투쟁은 집행부와 논의해서 시행한다.
그러나 해고 동지들은 이러한 집행부의 입장에 대하여 신분보장과 자주적인 복직투쟁 보장 등을 요구하며 오히려 투쟁 수위를 강화하려고 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몇 차례 밝힌바와 같이 노동조합은 규약과 규정에 의해 집행해야 하며, 지금도 원칙에 변함이 없으며…

해고자 천막농성, 혼란만 가중 노조소식 13-21호, 2000년 1월 10일.

지난 금요일(7일)에 식당조합원들은 유인물을 통해 단식농성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노동조합에서는 해고자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식당조합원들의 집행부에 대한 비난 수위는 노동조합의 정상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조합원들의 일자리와 직접 연관된 현안이 대두되어 있어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도 힘든 상황인데 해고자들의 독단적인 행동과 집행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4만 조합원에게 돌아가는 것임을 식당조합원들은 직시해야 한다.

현장활동가들, 조합원들이 처음에는 냉랭했지요. 도장까지 찍었는데 우리가 물리지는 못하겠다고 하고, 조합원들, 대의원들도 김광식 집행부가 어쩔 수 없이 도장을 찍은 것처럼 정갑득 위원장도 내가 약속해놓고 복직 못하면 저번보다 더 할 것 아니냐. 약속은 못한다고 하고, 우리는 복직시키겠다고 답해라였다. 그런 과정에서 집행부와도 많이 싸웠어요. 집행부를 대상으로 단식농성하고 대대에서 천막쳐 달라고 발언하면 대의원들이 ‘천막치면 못 지켜준다’고 해서 ‘지키는 것은 우리가 지킬 것이다’ 하니까 치는 것은 해주어야 한다고 해서 본관 앞에서 천막을 치게 되었지요. (면접자 q)

규약, 규정은 노동조합의 법과 생명 노조소식 13-23호, 2000년 1월 12일, : 임원, 상집 8500만원 대출 - 법원 담보공탁으로 채권가압류 취소 신청.

규약과 규정을 만든 우리들이 지키지 못한다면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규약과 규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고자들은 단식농성에 이어 삭발투쟁을 갖겠다며 투쟁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금까지 발생한 사안에 대해 집행부가 대책을 수립해 나가자, 이후 투쟁에 대해 신분보장과 자주적인 투쟁을 요구하고 있다. 신분보장은 규약과 규정에 의해 운영위원회나 대의원대회 등 의결기구에서 결정할 사안이지, 집행부가 임의로 결정하거나 약속해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들의 요구에 밀려 규약,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원칙을 저버리는 무책임한 행동은 할 수 없다. 또한 집행부는 자주적인 투쟁을 보장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제껏 자신들 스스로 단결해서 투쟁해 왔다. 정말 자주성을 내세운다면 투쟁하는 것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이즈음, 2000년 겨울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철회, 해외매각 저지를 중심으로 총자본과의 한판 뜨거운 투쟁을 벌이고 있을 시점이었다. 98년 현대자동차, 만도, 99년 한라중공업 파업이후 또 다시 전국적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내부에서는 식당 여성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철회,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투쟁을 본격화하고 있을 시점이기도 하다.
97년 정리해고 법제화 이후 현장에서는 정리해고를 거부하는 투쟁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 있어서는 첫째, 98년의 전국적 연대에 대한 뼈아픈 경험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게도 되물림하게 할 것이냐 아니면 공동의 투쟁으로 받아 안을 것이냐의 선택이 있었다. 그리고 98년의 정리해고 수용의 뼈아픈 경험을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원직복직 투쟁을 통해 다시금 ‘정리해고 반대’의 요구를 재확립할 것이냐 아니냐의 선택이 놓여졌다.
하지만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앞에 놓인 당면 과제는 “부품사업 양도와 시트매각 저지, 정리해고자 조기 리콜, 신차종 투입에 따른 인력수급 대처, 특별 성과금 쟁취” 등이었다. 이는 98년 이후 사측의 공세적인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과 무급휴직, 정리해고자 조기 복직이 가장 큰 사안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현장은 엄청나게 늘어난 생산 물량과 노동강도로 인해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상황이었으며, 조합원들의 개별화・실리화는 이미 급속도로 현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의원들 역시 이러한 조합원들의 이해에 조응해 잔업・특근 합의를 하기 시작했고, 모자라는 인력에 대해 정규직 대신 비정규직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 2000년 현대자동차 현장의 모습이었다. 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의 전선은 그 잠정합의 당시에 무너졌고, 투쟁 이후 이런 현장에서 또 한 번 무너졌다. 98년 당시는 지도부가 무너졌으며, 그 다음에는 조합원이 무너졌다. 파업직후 개별화에 놓일 수 밖에 없는 조건은 이후 ‘고용이데올로기’에서 다룸.

이러한 현장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라도 당시 노동조합은 98년 이후 유실된 반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과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또 시트매각 저지 투쟁 등 구조조정 저지 투쟁을 동일한 선 위에서 인식하고 배치했어야 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대우자동차 투쟁에는 98년 공장 밖의 연대 세력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에서 연대하였으며, 식당 노동자들의 투쟁에 있어서는 ‘규약’과 ‘규정’을 되풀이하면서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이해 당사자의 투쟁으로 인식하는 한계를 보였다.
노동조합 운동이 제도적으로 합법화・관료화되는 한편에서는 노동자를 핵심과 주변부로 가르는 자본의 공격에 자발적으로 맞서거나, 노동조합의 양보와 타협을 거부하며 노조의 통제에서 벗어난 들고양이 파업(wild cat strike)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에서는 ‘조합원의 일부 집단이 노동조합의 의사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쟁의행위(들고양이 파업, wildcat strike)’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시기와 국경을 넘어 존재해왔다. 또한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운동의 역사에서도 노조 민주화를 위한 투쟁, 95년 양봉수 열사 투쟁, 개별 현장조직이나 활동가들의 ‘라인 잡기’에 이르기까지 조합원들의 자발적이고 독자적인 투쟁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투쟁 역시 그러한 역사적 경험 위에 있다.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제도적 합법화 노동조합운동의 제도적인 합법화가 곧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합법성을 곧바로 보장해 주지 않는다.(김영수)
에 제한되지 않고 민주노조운동의 합법성을 실질적으로 쟁취하기 위한 조직적 단결과 투쟁이기도 하다. 또한 노조의 통제 속에서 ‘노동자 대중의 행동방식’으로 올바르게 자리매김 하지 못한 98년 투쟁의 한계를 직접 경험했던 그 주체들이 이를 극복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은 이런 의미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당시 이 투쟁에 대한 일반적인 분위기는 ‘여성’들의 외롭고 힘겨운 투쟁으로 바라보는 온정주의적 태도이거나 노동조합처럼 관료적인 태도, 아니면 무관심이었다.
‘자주적인 투쟁을 보장하지 않은 적이 없다’라는 노동조합의 주장은 자주성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자주적인 투쟁을 보장받기 위해서 식당 여성 노동자들과 해고자들은 노동조합에서 대신 투쟁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이 투쟁이 노동조합이 벌이고 있는 여러 투쟁들 중 하나여야 하며, 그러므로 투쟁에 따른 사측의 손배 가압류 조치 등을 노조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는 점에서 신분보장을 요구했던 것이다. 자주성은 ‘집행을 누가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노동조합이다’라는 여성 노동자의 인식처럼 주체성 혹은 민주주의 전체 노동자들은 ‘민주주의’를 현실화시키는 주체들 중심으로 나서야 하다. 민주주의는 계급투쟁의 산물이고 사회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의 보편적 가치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가 대의제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 문제는 대의제가 주권의 주체가 전도되는 ‘위임권력의 이중성’, 즉 위임하는 과정으로서의 권력과 집행되는 과정으로서의 권력이 주기적으로 역전되는 권력행사방식이라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주권의 자기실현’이라는 보편적 가치로 간주한다면, 대중들의 참여와 통제장치가 보장되고 확보되는 과정, 즉 권리의 보유자와 행사자 간의 관계에서 권력주체의 의사가 권력 행사자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현실화될 것이다.(김영수) - 노동조합 역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규약과 규정에 의거한 4대 의결기구라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훼손을 우려하고 있다.
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텐트농성 해결 위한 중재노력 무산 노조소식 13-25호, 2000년 1월 17일 <중재안 내용> 1. 해고자 복직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운영위원회에서 구성하자. 단, 해고자 출근 투쟁 관련 이전 발생 사안은 집행부가 책임지고 해결토록 노력한다. 2. 특별위원회 구성은 집행부+해고자+대의원대표로 구성한다. (특별위원회 역할은 복직협상 투쟁, 일상활동에 대해 입장을 조율하는 단위)

중재단 어떻게 만들어졌나? 대의원대표, 현장 제조직(실노회, 민투위, 현지사, 현노신, 미래회, 노연투) 대표, 회계감사 동지들 등 현자노조 역사상 최대 실력자들 22명이 사태해결을 위해 중재를 나서게 된 것이다.
15일(토) 오전 9시 중재단은 회의를 가졌으나 해복투와 식당조합원은 끝내 중재안을 거부했다. 중재안을 거부하는 이유는 “복직투쟁에 대한 자주성 보장이 안된다.”는 것과 “원직복직 요구가 특위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갔을 때, 식당조합원의 요구가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어떤 것이 자주성이고, 어떤 것이 식당 조합원의 요구가 훼손된다 말인가? 진정 사태해결을 위한 거부인지 아니면 노동조합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거부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식당조합원과 해복투의 중재안 수용거부는 단순히 텐트농성을 계속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또 다른 속셈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위해 펼쳐야 할 중요한 사업들이 무수히 산적해 있는데, 텐트농성이 해결되지 않아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농성자들은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떤 제조직도 식당아줌마 투쟁에 거의 함께 하지 않았어요. 어떤 제조직도 동참하거나 지지하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대신 상징적으로 의장단이 결합한다. 말 그대로 식당 아줌마만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나 생각이 들데요. 다 손 떼어버리데요. (면접자 ㅋ, 활동가)
그때 또 아줌마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우리가 이기지 않으면 우리 후배 우리 자식한테 이런 짓을 안전화로 밟히기도 하고 안 당한 것이 없으니까 어느 지점에 오면서 우리만의 복직이 아니라 자본과 정권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 잘하려고 잔소리도 하지만 너무 감탄을 많이 했다. 하루 종일 뼈빠지게 일을 하고 목숨을 걸어놓고 한 것이지요. 앞에서 일한 10사람(운영위원) 보다는 사명감을 다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면접자 s)

해고자 텐트농성사태 해결 노조소식 13-28호, 2000년 1월 21일, 13-5차 운영위원회의에서 ‘해고자 원직복직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운영위원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중재안 합의 내용> 1. 해고자 복직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운영위원회에서 구성하자. 단, 해고자 출근투쟁과 관련 이전에 발생한 사안은 집행부가 책임지고 해결한다. 2. 특별위원회 구성은 집행부+해고자+대의원대표로 한다. 단, 식당운영위원 10명, 생대위 2명이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3. 집행부는 2000년 임금협상시 해고자 원직복직에 최선을 다한다.

19일(수) 식당조합원이 중재안을 수용하는 것으로 정리하여 텐트농성을 종결짓게 되었다.

위원장이 조합원께 드리는 글 노조소식 13-43호, 2000년 2월 21일

지금까지 미진한 부분은 2000년 임투 과정에서 정리하고 징계해고자들의 복직을 이루어내면서 완결짓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두웠던 과거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싶은 것이 위원장의 바램입니다.


2) 여성 노동자들에게 가해졌던 폭력들 : 물리적, 언어적, 정신적 폭력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머리채를 휘어잡는 것부터 시작될까? 왜 남성 노동자들은 같은 노동자로서 당하는 폭력이 아니라 내 ‘아내들’에게 가한 폭력에 더 분노할까? 왜 여성 ‘노동자’가 아니라 ‘여성’ 노동자로 볼까?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2000년 임금인상 요구안에 정리해고자 277명 중 미복직자 전원을 6월 31일 이전에 복직시킬 것을 요구했다 노조소식 13-45, 2000년 2월 25일
. 이 때 처음으로 노조신문에는 ‘식당 여성 조합원 원직복직 되어야’한다는 입장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노조신문에 실린 것처럼 텐트농성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신분보장 요구를 둘러싼 텐트농성 ‘사태’가 종결되었을 뿐이다. 중재안 합의 후 노동조합 앞에 쳐진 텐트는 정문 앞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투쟁은 계속 ‘간다’.

현대중공업 경비, 노조식당 여성 조합원 폭행 노조소식 13-58호, 2000년 3월 20일.

3월 17일 오후 14시 식당 여성 조합원들이 동구에 있는 울산 과학대 앞에서 집회를 하였다. 울산 과학대 설립 축하를 위해 현대그룹 사장단과 정몽준씨 등 다수가 모인다고 했기 때문이다 … 식당 여성 조합원들을 건장한 젊은 남자 70여명이 과학대 정문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몸이 건장한 젊은 남자들은 아주 무식하고 폭력적으로 어머님뻘 되는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뿌리치려고 발버둥치면서 팔을 저으니까, 이미 손목을 꺽여 버렸고, 만신창이가 되는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식당 여성 조합원들은 즉각적으로 현대의 폭력 집단들에게 “공개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사과하지 않을 경우에는 “과학대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경고를 했다.


싸울 당시에 폭력도 당했어요. 앞의 경비들이 어디서 “밀어” 하면서 넘어오니까 안 밟히려고 했는데 그 때 10여명이 입원했잖아요. 저는 화장실 갔다가 오는데 젊은 경비가 밤길 조심해라 했던 게 이런 것이구나 싶을 정도로… 하여튼 우리는 정세영 국회의원까지 찾아갈 정도였으니까. 재단 이사장이었잖아요. 안간 곳이 없었어요.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거기서도 머리채 뽑혀서 맞고… 거의 1년 걸렸지요. 해고된 날부터 23개월, 완전히 출투 한 것은 1년 반 가까이요. (면접자 q)

여성 조합원에게 보내지는 협박 편지 중단하라 쟁대위 속보13-17호, 2000년 4월 21일.

… 이것은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복직투쟁이 장기화되자 여성 조합원들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주어 투쟁의지를 꺽어 보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썩었다지만 이래서는 안된다. 여성 조합원들은 한 가정의 어머니이며, 아내들이다.


그 과정 속에서 000하고 저한테 협박편지가 왔어요. 집에 갔는데 딸이 편지를 주는 거예요. 편지를 받았는데 순간 예감이 이상한 거예요. 바로 편지를 뜯지 않고 나 혼자서 뜯었는데 ‘집안에 가만히 있지 않으면 포르노배우를 만들어주겠다’고… 지금 000은 혼자 애들하고 있으니까 애들을 공격하고 저는 남편이 있으니까 저는 그때 아마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협박을 하면 아마 그 편지 받고 좌절할 수도 있었겠지만 워낙에 바로 공개를 해버렸어요. 저도 그때 별 생각을 다했지요. 나는 죽어도 복직안하면 아주 최악의 상황 그런 것까지 다 생각했어요. 복직이 아니면 다른 것하고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그 편지를 받고나서 더 했어요.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이 큰 조합이 있고 조합원이 있는 우리한테 이런 짓을 할 정도면 더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저는 행복한 투쟁한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면접자 s)

당시 협박 편지 받았던 것을 수치스럽고 힘든 기억이었다고 술회하는 면접자는 7년이 지난 지금에도 처음 말 꺼내는 것을 난감해하면서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그 편지를 받기 전까지 투쟁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울기도 많이 했다는 면접자는 편지를 받고 나서 그 전까지와는 다른 오기와 비장함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투쟁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도 했다.
협박 편지 사건을 접했던 면접 현장에서만 세밀하게 느낄 수 있는 면접자의 감정은 당시의 폭력에 대한 정신적 충격이 남아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치욕감’하고는 다른 것이었다. 여성 노동자는 협박 편지를 공개함으로써 여성의 수치심을 은밀하게 협박하여 투쟁 의지를 무력화시키려는 적들의 의도를 ‘공개’했다. 이로써 은폐된 성폭력이 있음을 드러내고, 주체들 뿐 아니라 노동조합도 함께 대응하게 만드는 ‘투쟁’으로 반전시켰다. 그것은 협박을 당한 여성 스스로 그 폭력을 극복해내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한편 수백 일이 넘는 출근 투쟁과 천막 농성으로 사측은 복직 등에 대한 3가지 안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쟁대위 속보 13-28호, 2000년 5월 15일 <회사 측이 제시한 3가지 안> 첫째, 울산공장 현장 부서 중 비교적 쉬운 일자리로 복직 둘째, 본인은 외주식당에 그대로 근무, 직계가족 중 1명 추천 현대차 입사 셋째, 노조식당 공동인수 자체운영시 회사 납품권보장, 재식시까지 임금 일정부분 인상, 정리해고자 재활기금 잔여분 식당조합원 복지지금으로 활용.
하지만 노동자들의 원직복직 요구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5월 20일까지 세 가지 안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을 철회하겠다는 협박성 공문으로 전달되었다. 이에 식당 조합원들은 투쟁의 강도를 더 높이기로 결정한다.

식당조합원 원직복직 염원을 담아 쟁대위속보 13-32호, 2000년 5월 22일.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정리해고를 당해야 했고, 그로부터 10개월 동안 원직복직을 회치며 투쟁하여 왔다. 지난 19일(금) 17시 그들은 삭발투쟁을 강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여성임을 포기하는 삭발식을 방치할 수 없어 이를 막기로 하고 문용문 부위원장과 상집들이 식당조합원들과 몸싸움까지 하며 봉쇄하고 자제를 호소하였으나 식당조합원들의 의지는 너무나 완강하였다. 이 자리에서 문용문 부위원장은 여성 조합원들의 삭발을 방치할 수 없음을 밝히고 식당조합원들의 원직복직의 염원을 받아안고 노동조합 임원과 상집이 삭발할 것임을 밝히고, 문용문 부위원장과 김대영 조직실장, 김근태 대협실장 동지가 그들의 뜻을 받아 삭발식을 가졌다.
회사는 분명 알아야 한다. 식당조합원들의 한 맺힌 절규를...


위 인용문에서 ‘아내들’과 ‘어머니’와 ‘여성’이라는 표현들은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정서’를 염두에 두고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대중적으로 지지할 수 있도록 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부장적일 뿐 아니라 노동자 집단 내부를 성차별적이고 위계화된 권력 관계로 공고화하려는 자본의 의도를 미처 몰랐거나 우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합원의 정서’에 기대는 방식은 단기적인 효과는 거둘 수 있을지언정 장기적으로는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자로서의 기반을 자본에게 내주는 결과를 자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투쟁 과정을 통해 ‘노동자성’과 ‘여성성’을 회복하는 인식의 진전을 이루어나가고 있었다. 반면에 남성 노동자와 노동조합은 그 투쟁에 주체로 함께 서지 못함으로 인해 여전히 남성적 권위와 가부장성에 안주하고 있음이 대비된다.

식당조합원 삭발에 이어 단식농성 돌입 쟁대위 속보 13-37호, 2000년 5월 30일.

단식농성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으로 자칫 생명의 위협을 가져올 수 있어 대단히 우려스럽다. 하지만 식당 조합원들의 단식농성 돌입을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지만 자유로울 수도 없다. 그것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정리해고 대상에 선정되어야 하는 억울함이 어쩌면 최후의 몸부림인 단식농성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잘 싸워서 여성이 얼마나 독한지 이번 기회에 보여주자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면접자 s)
2000년도 경우에도 마지막 임투였거든요. 그 때도 완전고용합의서 ‘18일 본관 집회시 정갑득 위원장은 연설 중반에 완전고용 보장을 위한 구조조정 3대 원칙과 관련하여 설왕설래가 많아 위원장의 소식을 피력코자 했다. 내용인즉 “내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청 투입은 해야 한다”로 듣는 조합원들의 어안이 벙벙한 연설이 갑자기 나왔다… 4만 조합원의 완전고용 보장 집념에서 표출된 과도한 표현으로 죄송함을 표합니다… 조합원들의 고용안정 확보는 노동조합의 최대의 과제이며 활동가 한사람 한사람의 몫이다. 하청(비정규직)의 조직화 논쟁도 조합원들의 의견을 물어 규약개정을 통해 조합원에 가입시키고 임금격차 해소를 위해 직영들이 투쟁에 나설 날이 곧 오게 된다. 일부에서 직영도 지켜내지 못하면서 하청의 고용보장을 성급하게 내세우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쟁대위 속보 13-37호), 완전고용합의서와 관련해서는 뒤의 “고용이데올로기” 부분 참고.
가 만들어지잖아요. 저는 반대했었거든요. 집행부가 사업부 내려가면서 막 설명회를 해요. 저도 같이 내려가거든요. 당시 위원장 마이크 들고 조합원들 고용안정 내가 지키겠다. 비정규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할 때 나는 옆에서 또 마이크 들고 절대 받아들이면 안된다, 식당 우습게 보고 하청화 되면 그 다음은 현장이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귀담아 주지 않더라고요. 내가 듣기로는 98년도 식당으로 오기 전에 사업부에 있었는데 그 때 사업부에도 비정규직이 많았었어요… 어떻게 보면, 98년도 현자 정리해고가 단순한 정리해고가 아니였다고 봐요. 지금 보면 10,000명이 짤렸고, 그 인원대신에 15,000명이 비정규직으로 들어와 있거든요. 그 당시까지만 해도 회사가 어렵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몇 개월 되지 않아서 알게 되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더욱더 강력하게 투쟁을 전개하지 못했을까. 비정규직 다 들어온 자리에 불파가 들어와 있고요. (면접자 q)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수위는 출근투쟁에서 텐트농성으로, 그리고 삭발에서 단식으로 지속적이고 완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2000년 임단투 역시 잠정합의안이 하나 둘 제출되고 있을 즈음, 노동조합이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원직복직 요구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되자 본관로비를 점거하고 상의를 벗은 채 1976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자본이 사주한 남성 행동대, 어용 상급조직인 섬유노조, 전경 등이 대의원대회와 노조선거를 방해하고 침탈하려하자 ‘옷을 벗자’는 선동아래 브래지어 바람으로 나체시위로 저항했었다. 부끄러움은 옷을 벗는 여성이 아니라 폭력을 휘두른 남성들의 몫으로 반전시키는 투쟁이었다.
농성투쟁에 들어간다. 이후 이날의 단체교섭은 무산되고 위원장과의 간담회를 통해 여성 조합원들의 요구사항이 일부 수용되면서 ‘나체시위’와 농성은 풀게 된다.
그러나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나체시위’를 통한 극단적인 저항의 방식은 여전히 노동조합에 있어서는 이해당사자들의 요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노동조합이 회사와 식당 여성 조합원간의 문제로 이야기하면서 양쪽의 이해당사자들에게 문제 해결을 위한 상호간의 노력을 촉구하는 태도는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투쟁에 대한 일관된 인식의 단면을 드러내준다.
식당 여성 조합원 내부에서는 사측의 최종안을 둘러싸고 10인 운영위원회 중심으로 논란을 거듭하게 되면서 결국 2000년 임단협 마무리와 함께 합의 <정리해고자(식당조합원) 복직 관련 합의문>
1. 대상자 : 고용승계자 144명(노조식당 종사자) 중 타결일 현재 노조식당에 재직 중인 자
2. 복직 및 (대체) 채용방법 (당사자 개인별로 아래 3가지 방안 중 한가지를 선택하면 됨)
① 현 노조식당을 외주식당 전문업체에서 일체를 위탁 관리・운영하고, 대상자들은 노조식당에 그대로 근무하면서, 월 급여 수준 및 복지제도 지원은 기존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자들의 재입사 조건과 동일하게 적용하고, 운영수익금, 「정리해고자 재취업 및 재활기금」을 활용한 복지지금 설립 등 소요재원 마련 및 운영방안에 대해서는 추후 노동조합과 협의하여 시행한다. 또, 본인 신청시 직계가족(자녀 및 형제) 중 1명을 대체입사 조치한다.
② 울산공장 현장 부서 중 비교적 쉬운 일자리로 복직조치하며, 노사 공동으로 복직 가능한 현장의 일자리를 찾아 본인의 동의를 얻어 배치한다.
③ 상기 ①, ②번안을 수용하지 않는 조합원에 대해서는, 현재 직영으로 운영되고 있는 5공장 갤로퍼 식당으로 재입사 조치한다.
3. 회사는 2000년 임금교섭 타결 후 7일 이내 식당조합원 관련 민⋅형사적 조치(고소, 손배, 가압류)를 취하하고, 노동조합과 식당조합원들(전원)은 연명으로써 향후 원직복직과 관련한 일체의 이의제기나 집단적인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확약한다.
를 마무리 짓게 된다.

10차 협상, 식당조합원 노동조합 내 농성으로 무산 쟁대위 속보 13-41호, 2000년 6월 5일.

- 위원장, 사태해결위해 식당조합원 130명과 어제 간담회 간담회 내용 (최종희, 정영숙) : 식당문제 노동조합 대응이 부족했던 부분 섭섭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집단해고 당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위원장) : 원직복직 외에 다른 논의 못하는 입장을 고수한다면 오늘 간담회는 의미 없다. 다른 복직자들도 원직복직한 것이 아니며 다양한 직무에 재배치되어 들어왔다. 원직복직이 아니면 안된다는 데서 변화된 입장을 정리해 달라. 안 그러면 위원장으로서 규약과 규정에 따라 조합원총회에 묻겠다. (최종희) : 다음 안을 제시하며 실무협의를 진행하는데 동의하겠다. (1)현재 6개 식당을 4개로 줄여 원직복직, (2) 일단 식당으로 원직복직 후 본인동의하에 전환 배치 등을 우선 의제로 다루어 최선을 다한다.
가져
2000년 단체교섭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지부, 본부는 ‘이것만은 해결되어야 한다’하고, 현안의 이해 당사자들은 ‘내 문제 없이 2000년 임투 종결 없다’고 한다. 거기에 식당조합원들은 원직복직이 아니면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투쟁의 강도를 계속 높여가며 본관로비 점거농성을 하고 있다.
회사는 최선을 다했다 주장하고, 식당조합원은 무조건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평행선을 그으며 협상은 딜레마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회사든, 식당조합원이든 문제를 풀고자 하는 동기를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섭팀은 문제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식당조합원들은 2일 오전부터 상의를 벗은 채 원직복직이 되지 않으면 자결하겠다며 회사 본관로비를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운영위원회 10명이 있는데, 당시 지도부랑 우리 간담회 6월4일의 간담회인지는 분명치 않다. 면접내용으로 보면 ‘간담회를 계속’했다는 것이므로 여러 차례의 간담회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를 계속 했는데, 지도부가 ‘2000년 임단투 끝나면 당신들 고립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회사 안을 가지고 결정해라. 식당 지도부가 10명이었는데 나하고 2명만 밀어붙이자고 했다. 우리 투쟁을 전국이 보고 있는데… 찬반투표를 붙이게 되요. 그것 때문에 지금도 엄청나게 속상한 거예요. 내가 회사가 던진 안은 원직복직이었다. 세 가지 중에 원하는 것 정해서 가자는 것이다. 장단점이 설명 안되고 단점만 설명되었다. (면접자 p)
노조식당이 106명이 남아있지만, 스스로 ‘자녀를 대체입사를 시키고 임금을 똑같이 가져가면서 우리는 1석2조’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왜냐면 청년 실업률을 엄청 높지만, 열 받잖아. 조금만 더 싸우면 만 이천 명 다 들어올 수 있잖아. 그러니까 6개월도 안돼 정상화됐잖아. 리콜 합의 우리가 제대로 된 투쟁을 했으면 무급자, 회망퇴직자 있었잖아요. 다 들어왔잖아. 회사는 우리가 원직복직 되면 희망퇴직자도 다 받아야 하거든요. 우리가 결국 내부적인 분열 때문에 못해냈다. (면접자 s)

3) ‘여성’과 ‘노동자’로 싸우고 생활한다

합의안대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세 가지 안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식당 여성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거나, 생산현장에서 여성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 50세가 넘는 고령자이다 보니 생산현장을 선택하기 보다는 ‘잔뼈가 굵은’ 식당을 선택하게 된다.
투쟁의 마무리 과정에서 원직복직을 끝내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합의내용을 둘러싼 내부 갈등과 논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98년의 ‘패배’와도, 2000년 완전고용합의서의 ‘성과’와도 다른 무엇이 있다. 그것은 1년이 넘게 투쟁을 했던 그 과정을 투쟁 주체들이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 투쟁을 통해 그들의 삶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적어도 면접자들에 대해서는 그렇다. 한 면접자는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꿈꿔 온 일을 위해 당분간 활동을 열심히 하지 못할 것 같다며 미안해했다. 그녀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국문학과에 입학했다고 했다.
또 다른 면접자는 여성으로, 노동자로, 활동가로 부단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녀의 인식의 넓이와 깊이는 여느 활동가 못지않았다. 그리고 두 면접자 모두 현실의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아주 분명하고 원칙적인 태도는 갖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투쟁을 통해 얻은 ‘살아있는’ 원칙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그들의 투쟁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소수의 여성으로 현대자동차 노동 현장에서 부대끼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는 당당함의 원천이었다.

98년 봐라. 여성이 정리해고 되었고, 99년도에 여성이 투쟁하지 않았으면, 제대로 투쟁을 만들었으면 희망퇴직자(노란 봉투)까지 다 들어올 수 있었거든요. (무급휴직자들도) 식당아줌마들의 투쟁으로 빠르게 들어오게 된 것이고, 이런 것이 계기가 되어서 여성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조합에서도 주의깊게 잘 보아야 한다. 여성들을 조직하면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생각해요. (면접자 s)
여성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우리는 적어도 실천투쟁을 만들었고요. 여성이 빠진 자리는 남성 비정규직이 온다. 아줌마들이 하는 일은 조금 쉬운 일이다. 그래서 여성을 기피하는 것이다. 저 같은 경우는 다 로테이션 돌거든요. 남성들도 몸이 약하면 (여성들과) 똑같은 경우가 있다. 로테이션을 원하는 여성과 원하지 않는 여성이 있다는 것이예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단순하게 여자가 하는 일은 빠지고 비정규직도 남자가 들어오면 심부름하듯이 다 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여성을 자꾸 기피하게 된다. 여성을 기피하는 것은 한 라인을 다 비정규직을 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거든요. 우리가 고용위기가 오면 시간을 나누어서 주간연속2교대제 이야기하듯이 이런 식으로 고민하지 않고, 현장 정서도 활동가들이 다 잘못하고 있다고 봐요. (면접자 q)
제가 오니까 조장, 반장 등이 다 싫다고 말도 하지 않더라고요. 요새는 반장이 깃발 들고 나가요. 자랑이 아니라 현장에서 활동가들이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도 가보니까 맨아워 협상하는 것을 보니 회사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편하게 이야기해요. (회사가) 비정규직 받자 하면, 대의원이 ‘조합원이 원하니까’라면서 요구해요. 그러니까 98년에 정규직은 15,000명 나갔는데 비정규직은 3,000명만 나갔잖아요. 처음에는 ‘아줌마는 잘 몰라서 그런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도 현장 다 안다. 비정규직을 왜 받냐?’ 하니까 ‘물량이 없어지면 누군가 가야하는데 비정규직이 가야 한다.’고 하더라. ‘나중에 물량이 들어오면 비정규직 받고, 그리고 당신들 자식들 들어갈 자리가 없지 않냐.’하면서 처음에는 논란도 많고 싸웠어요. 내 아들이 비정규직이고, 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답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맨아워 협상할 때 비정규직 받자고 했는데, (조장에게) ‘선배 아들은 왜 정규직으로 (현대차에 입사원서) 넣습니까. 정규직 자리가 어디 있어요? 그때 왜 비정규직 받으면 안된다고 이야기 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알아듣더라고요. 그래서 현장을 조직하고 현장을 만드는 것은 활동가들이 어떻게 중심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활동가들 노조에 와서 이야기하는 것 하고 현장에서 이야기하는 것 하고 달라요. 대의원하려고요. 현장을 조직하고 만들면 아마 이렇게 노동강도가 우리나라가 현대자동차가 최고 높다고 하던데요. (면접자 s)
98년 이후로 활동가들 양심이 있으면 된다. 노동해방을 하기 위해서는 활동가들이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한다. 말하고 행동하고 실천이 안되는지… 말은 잘하는데 실천투쟁 장에 보면 없어요. (면접자 q)



98년의 의미와 영향


고용이데올로기의 발생 : 더 이상 정규직의 고용안정이란 없다

IMF 경제위기라는 조건 속에서 ‘노사정합의→민주노총 대의원대회 부결→정리해고 법제화→비대위 총파업 선언, 철회→민주노총 2기 선거→5・1절 투쟁’이라는 전국적 흐름 속에 정리해고는 현대자동차를 필두로 하여 현실로 드러났다. 1998년 5월 20일자 각 신문에 현대자동차의 대규모 구조조정 내용이 비중 있게 실렸다. 전체 직원의 18%에 해당하는 8,189명을 정리해고 하겠다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현대자동차 36일간의 파업 이후에 만도의 구조조정 저지 투쟁 역시 공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당시 공공기관을 포함한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이른바 ‘자발적’ 정리해고의 형태를 띤 희망퇴직이 남긴 공포와 정리해고의 충격은, 더 이상 안정된 평생 직장이라는 신화란 없음을 절감케 했다.
이 때, 현대를 비롯한 자본은 정리해고를 통해 수량적 구조조정을 관철하고, 또 정리해고의 위협을 통해 ‘노동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으로 노동운동의 단결력과 교섭력을 약해진 틈을 타 그동안 노동조합의 저항에 부딪쳐 온전히 추진하지 못한 신경영전략을 공세적으로 도입했으며, 그 결과 일상적 구조조정이 가능하도록 하는 ‘유연한’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노동자들의 위계화・양극화를 통해 노동강도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98년 당시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은 자동차 산업의 과잉생산 위기와 그에 따른 급속한 생산 감축으로 인해 노동조건과 상태에 심각한 변화를 경험했다. 사외용역 및 외국노동자들의 축출, 임금삭감, 작업조직 변화 및 노동의 유연화, 작업장 통제 및 노동강도 강화, 정리해고의 위협 강연자, 자동차 산업과 고용문제
이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각 노동조합은 고용안정협약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유지, 인원배치 등에 대한 노사합의 등을 주요 요구 사항으로 내걸었고, 부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임금과 노동조건을 후퇴하면서 고용을 유지하는 양보의 결과가 이후 상시적 구조조정 대응에서 전반적인 후퇴와 양보를 거듭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상시적 고용불안감은 더욱 확대되어 왔다.
물론 상시적 고용불안감이 노동진영의 대응 실패 혹은 투쟁전선 유실 때문에만 생긴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자본 자체의 위기를 노동자 희생으로 전가했던 상황에서, 이제는 자본이 대대적인 호황을 누리더라도 일상적으로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데 있다. 현대자본만 하더라도 IMF 외환위기 직후 곧바로 연일 사상최대의 흑자를 갱신하고 있으며, 필연적인 과잉생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과잉생산을 확장하는, 이른바 GT-5라는 글로벌 전략을 세워 추진하고 있다. 자본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추진해오던 노동의 유연화를 늘리기 위해 외환위기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유연화는 대다수 고용관계를 비정규직 형태로 전환하여 고용불안을 증대시켰다. 유연화는 차별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이덕재, 세계화 선언 이후 경제사회구조의 변화.
고용불안은 노동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확산되었다. 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제도적 고용안정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 시장 규율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됨으로써 체감 고용불안이 높아졌던 것이다. 유연 생산체제는 그 자체로 그 동안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오던 정규직의 위치를 박탈했다. 이제 정규직 노동자들은 시장과 직접 대면하면서 그들 스스로 시장과 경영의 책임을 일상적인 임금삭감(물량 축소에 따른 노동시간의 축소는 곧바로 임금삭감으로 이어진다)으로 전가하게 되었다.
한 면접자가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에 고용안정을 요구하지만 고용안정의 실제 요구는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모두들 ‘고용’을 일순위로 꼽고 있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실체로 드러나는 요구가 아니라 상시적인 고용불안감의 표현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고용안정이란 이제 이전처럼 단순히 ‘안정적인 평생 일터의 보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그 자체가 목적하는 그 모든 정책을 막아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고용안정이란 ‘총고용보장’ 혹은 ‘고용안정협약’과 같은 요구나 형식이 아니라, 노동강도 강화와 임금불안의 핵심 요인인 변동급의 증가를 막아내는 것, 각 공장에서 고용안정을 볼모로 밀어부치는 구조조정을 중단시키는 것에서부터 풀어나갈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98년 희망퇴직과 정리해고 이후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용보장을 갈구하고 있지만 더 이상 정규직만의 고용은 보장될 수 없다. 또, 임금이나 노동조건과 분리된 고용안정이란 있을 수 없다. 자본에게 고용과 임금과 노동조건은 모두 ‘노동의 유연화’의 다른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자본의 공격들을 하나의 기조 아래 파악하지 않는 이상, 현재 ‘고용’과 관련한 요구들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쫓는 것 뿐임을 확인하자.


임금삭감안 : 임금과 고용은 생존의 다른 이름들이다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고용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함으로써 고용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임금의 일정정도 삭감은 불가피하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가지게 한다. 자본이 제기하는 고용문제의 목표는 광범위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대규모 실업자 양산,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의 최소화이다. 자본은 이와 함께 임금삭감 혹은 임금동결을 압박함으로써 당장의 임금비용 절감뿐만 아니라 임금체계의 변화, 즉 임금 유연화의 조건을 확보하려 한다.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최소 인원의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인 셈이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한다면 노동자들이 고용을 보장받기 위해서 일정한 양보, 즉 임금삭감 혹은 임금동결을 하더라도 고용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자본은 ‘임금삭감을 통한 임금체계의 변화’와 ‘노동시장 내부를 분할하는 정리해고’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있는 것이다.
98년 정리해고 저지 투쟁 당시 노동조합 지도부는 희망퇴직에 이어 두 번째 양보안으로 임금삭감안을 발표했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임금삭감 고통분담을 통해 정리해고를 철회하겠다는, 혹은 정리해고를 최소화하겠다는 당시 지도부의 의지는 신자유주의 공격을 전혀 철회할 의사가 없었던 현대 자본에게 좋은 기회를 주었다. 이를 적극 활용하여 자본은 임금삭감안은 그것대로 받아들이고, 정리해고는 그것대로 관철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지도부의 ‘거듭된 양보’가 무엇을 뜻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으로 고용을 보장받기 위해 임금 삭감을 받아들이는 소위 ‘고통분담’ 이데올로기가 98년 당시 전 사회를 관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98년 이후 기본급은 실질적으로 하락하고 변동급 비율이 증가하여 임금 구조가 더욱 불안정해졌다.
1998년 6월 현재 임금삭감을 타결한 회사는 모두 2백81개사이며, 이중 2백37개사가 상여금을 삭감키로 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법적 수당이 아닌 제반 수당, 즉 복지 영역과 관련한 수당 삭감은 이미 IMF가 터진 직후 거의 완료되었다는 것, 즉, 이미 실질임금이 하락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실질임금이 하락한 상태에서 상여금을 삭감하는 것은 단지 통상임금의 하락을 의미할 뿐 아니라 기본급에 대한 공격을 뜻한다는 것이다. 기본급에 대한 공격이란 단지 임금 인상액의 삭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92년 이후 기본급은 경향적으로 하락해왔고, 노동자들은 그 손실을 연장근로수당, 제반 수당, 그리고 상여금, 성과급 등을 통해 보전해왔다. 그러나 자본은 경제 위기를 빌미로 기본급을 제외한 제반 수당을 삭감하고, 심지어 기본급까지 삭감하여 노동자들의 임금을 경기 변동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셈이다. 임금을 노동자의 생활이 아니라 자본의 생산성에 맞추어 결정하겠다는, 자본의 이데올로기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노동전선 36호, 1998.6.

면접 조사에서 ‘고용불안의 내용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대부분은 임금과 물량에 대한 것이었다. 물량의 변동 폭이 커짐에 따라 ‘물량불안감’이 발생하고, 그것이 ‘임금불안감’으로 이어지면서 ‘있을 때 더 벌자’라는 심리를 유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불안감은 ‘물량불안’이나 ‘임금불안’이 아니라 ‘고용불안’으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노동자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물량과 임금의 불안정함이 구조조정의 결과와 과정에서 온 것이며, 또 이러한 불안정한 변동은 단기적 상황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고착화 될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임금과 물량의 불안이 장차 나의 고용을 위협할 것이라는, 그 자체로 개별화된 조합원의 상태와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98년 당시 정리해고 철회투쟁과 임금투쟁은 동일한 위상에서 조직했어야 했다. 지금도 역시 임금투쟁과 고용투쟁은 동일한 위상에서 조직해야 한다. 즉 물량을 더 많이 따내어 임금의 총량만을 높이는 성과주의적 투쟁 말고, 임금의 안정성을 높이는 투쟁을 벌여내야 한다. 그래야만 잔업・특근 따내기에 열중하는 대의원의 왜곡된 활동 방식과, 잔업・특근을 대의원 활동의 최우선과제로 요구하는 조합원의 개별적・실리주의적 생존 방식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다.


277명의 정리해고: 현재의 비정규직 문제를 바라본다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정리해고는 이미 이전에 외주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경험 위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98년 투쟁의 총전선의 의미였던 ‘집단적’인 정리해고가 ‘여성’에 집중되었던 점, 식당과 같은 주변부 노동에서 관철된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중요성을 가진다. 즉, 신자유주의의 공격 방향이 정확히 노동자 분할과 양극화에 있다는 점과,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가르고 위계화시키는 성별 분업구조가 전면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또 그러한 정리해고에 대해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과 자본 사이에 합의 혹은 암묵적 묵인이라는 담합구조가 형성된 것은,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이 이후 위험천만한 우경화 행보에 발판을 마련했음을 뜻한다.
98년 정리해고 이후 노동은 한 번의 후퇴와 패배를 반성하고 이후 방향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가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한 각개 전투로 나아갔다. 반면 자본은 그 틈을 타서 기존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이제 그 구조적 폐해의 희생자인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사회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노동자 내부를 핵심과 비핵심을 가르는 자본의 논리는 노동자들에게 깊숙이 박혀있지만, 또 한편에서는 날로 늘어만 가는 또는 최근 조직되어 가는 비정규직 집단을 목격하면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종의 방어심리와 불안심리가 혼재되어 더욱 깊은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98년 이후 현대자동차에서 정리해고는 두 번 다시 없었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규직에 국한된 것일 뿐, 공장별로, 사업부별로, 사측과 대의원 사이의 합의와 조합원들의 암묵적 혹은 노골적 동의 속에 비정규직에 대한 일상적인 정리해고는 쉬지 않고 진행되어왔다. 98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측의 일방적인 정리해고는 없다는 점이다. 신차종 투입, 모듈화 합의, 직제개편 등에 따라 인원변동이 있을 때마다, 정규직은 배치전환을 통해 고용이 유지되고, 비정규직은 정리해고 당해왔다.
최근 불법파견 문제로 노동조합이 ‘불법파견 철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을 보고 조합원과 활동가들은 일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것은 2000년 완전고용합의서를 통해 16.9% 만큼의 비정규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그 이후 공공연하게 사업부별로 비정규직의 확산이나 정리해고를 용인 또는 합의, 심지어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비정규직에 대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방관해왔던 태도들은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수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과 사측의 담합구조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그리고 지난 7년여의 과정을 돌아본다면, 지금과 같은 식으로 구조조정을 막아내고 고용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정반대의 결과일 뿐임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반대 총전선의 유실 : 총파업과 현대자동차

96・97년 총파업투쟁과 98년 5월 총파업투쟁에서 보듯이, 총파업투쟁 이후 노조와 현장이 겪는 어려움은 투쟁이 정치적・조직적으로 강고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지, 총파업 투쟁 그 자체의 결과는 결코 아니다. 민주노총과 연맹에 대한 현장 조합원들의 ‘불신’과 불신을 넘는 ‘분노’, 그리고 이어 다가오는 자본의 공세에 대한 ‘무기력’은 총파업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 아니다. 전국적 총파업투쟁 전선이 무너져, 총자본의 공세를 개별 연맹이나 개별 사업장의 수준에서 고립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전체 노동자의 과제는 ‘현실적인 차선책’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신이 현실화시킨 바 있는 정치 총파업투쟁을 이데올로기적・정치적・조직적으로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그 투쟁 전선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위상과 역할은 깊숙이 결부되어 있다. 2001년 7・5 총파업 무산 이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총 전선의 선봉으로 위치지우는 것을 대단히 부담스러워하고 피로해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밖으로는 전국적 전선 형성을 요구받는 한편, 안으로는 이러한 조합원의 상태에 직면하여 그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사측은 바로 이러한 지점을 노려 집요하게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붓고 있다.
98년 당시 민주노총과 산별 대표자들은 6월 10일 총파업을 철회하고 노사정위 참여를 결정하면서 현대자동차 투쟁을 전국적 사안으로 받아안지 못하고, 98투쟁을 온전히 현대자동차 지도 역량과 조합원에게만 맡겨놓았다. 만약 당시 현대자동차를 비롯해서 만도 등의 개별적 투쟁을 전국적 전선으로 확장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인 노력과 실천을 하는데 일말의 주저함이 있었다면, 이것 역시 동일한 선상에서 평가해야 한다. 그래야만 총 전선에 대한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의 피로도와 피해의식이 총전선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의 정치적・계급적 투쟁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조합원 정서’로 수용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끝)

2006-11-02 23:24:25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4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