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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교육운동에 관한 연구-인천노동자대학

현장에서 미래를  제26호
김민호

노동교육 운동에 관한 연구

- 인천 ‘노동자대학’을 중심으로 -


김 민 호 / 제주교대 교수․교육학





1. 머리말


어느 사회에서든 교육은 그 사회 구성원들간의 상호작용과 그 사회가 처한 사회적 상황 및 집단이념 속에서 전개된다. 그러므로 어느 특정 사회의 교육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면, 단지 교육의 형식과 내용을 조사하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된다. 교육 관련 집단들간의 역동적 상호작용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 및 집단이념을 밝혀야 한다. 특히, 일부 사회구성원들이 새로운 교육이념과 조직을 갖고 기존의 교육질서를 변화시키려는 교육운동을 집단적으로 전개할 경우, 교육계의 주도집단들과 새로운 교육질서를 수립하려는 도전집단간의 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들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과 집단이념들도 분석해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노동교육 관련 집단들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고, 제도권 노동교육에 대해 새로운 노동교육 질서를 지향하는 노동교육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노동교육 운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노동교육 운동을 둘러싼 집단들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친 노동교육 관련 제도와 정책 및 집단이념 등을 심도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노동교육 운동에 관한 선행연구들은 대체로 거시적 차원에서 노동교육 운동의 사회적 조건을 규명하는 데 관심을 두었을 뿐, 미시적 차원에서 노동교육 운동 관련 집단들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하지 않았다. 또 노동교육 운동 관련 집단들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한 경우라도 노동운동이나 노동정책 등의 관점에서 접근했을 뿐, 노동교육 운동의 맥락이나 노동교육의 의미 차원에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거시적 접근과 미시적 접근을 통합하여 노동교육 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기술하고, 노동교육 운동을 둘러싼 관련 집단들간의 상호작용을 노동교육의 의미와 노동교육 운동의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해석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인천 ‘노동자대학’ 합법화 운동(이하 ‘인노대 운동’)을 연구사례로 선택했다.


2. 노동교육 운동의 의미와 유형


‘노동교육 운동’은 사회운동의 하나이다. 따라서 노동교육 운동의 개념 정의는 사회운동의 정의(定義) 위에 세울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운동이란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의사소통 과정을 통해 형성한 집단이념을 토대로 사회질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집합적 행위”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교육 운동이란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의사소통 과정을 통해 형성한 집단이념을 토대로 노동교육 질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집합적 행위”인 셈이다.

그런데 노동교육 운동은 종종 노동운동의 한 수단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한 여성운동에서 남성 지배의 담론이 역사적으로 여성의 주관성을 어떻게 규정해 왔는지를 가르치는 여성 정치교육 운동이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노동운동이 노동교육 운동의 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영국의 교육사학자인 시몬(Simon)에 의하면 “노동시간 단축,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위한 오랜 투쟁은 일반적으로 해방을 위한 단계이면서 동시에 교육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간 주체의식의 형성과 교육받을 권리의 확대를 지향하는 교육운동은 노동질서의 변화를 모색하는 노동운동과 상호 보완적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어떤 노동교육 운동의 성격을 보다 면밀히 검토하고자 한다면, 그 노동교육 운동이 교육운동과 노동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어디에 위치하는 지를 확인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한편, 영국 노동교육 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1830년 이전까지는 기존 체제를 인정하는 노동교육이 주를 이루다가, 그 이후 1830∼1840년대에는 새로운 이념과 조직의 급진적 노동교육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1850년대부터 확실하게 진행되다가, 1860년대 후반부터는 국가가 제공하는 보다 평등한 교육체제가 노동교육을 주도하였다. 이에 비추어 노동교육 운동은 기존 체제와 부과된 지식을 인정하면서 교육받을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데 주력하는지 아니면 기존 체제로부터 지원은 받지 못하나 체제 밖의 독자적인 학습조직을 통해 기존 체제와 지식을 비판하면서 이제껏 무시되어 왔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진정으로 유용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 주력하는 지에 따라 그 성격을 구분할 수 있다.

위의 논의를 바탕으로 노동교육 운동은 다음 <그림 1>과 같이 유형화할 수 있다. 가로축은 노동교육 운동의 목적(ends)을 표시하는 것으로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경우와 교육운동을 지향하는 경우가 양극단에 놓인다. 한편, 세로축은 노동교육 운동의 조직과 다루는 지식의 공식성(formality)의 정도를 표시한다. 기존의 공식적 체제에서 부여된 지식을 다루는 이른바 제도권의 노동교육 운동과 공식적 체제 밖에서 비공식적 지식을 다루는 비제도권의 노동교육 운동이 양극단에 위치한다. 가로축과 세로 축을 교차시키면, 노동교육 운동은 위 그림에서와 같이 크게 다섯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겠다.


<그림 1> 노동교육 운동의 유형

                    공식적 체제, 지식 지향

                              ↑

                 제 2 유형        제 1 유형

교육운동 지향 ←──── 제 5 유형 ────→ 노동운동 지향

                 제 3 유형        제 4 유형  

                              ↓

                   비공식적 체제, 지식 지향

제1유형은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제도권의 노동교육 운동으로서, 주로 노동조합, 노동자 정당, 노동자 언론매체, 도시산업선교회․가톨릭노동청년회(JOC)․크리스챤아카데미․기독교청년연합회(YMCA) 등과 같은 종교단체, 기타 공식적인 민간단체 등이 추진하는 노동교육 운동이다. 제2유형은 교육운동을 지향하는 제도권의 노동교육 운동으로서, 주로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노동교육 운동이 해당된다. 노동조합과 대학이 연계한 영국 노동교육협회(WEA)가 이끈 노동교육 운동이나 대학확장(university extention)의 지원을 받은 캐나다의 안티고니쉬 운동(Antigonish movement)이 여기에 속한다. 제3유형은 교육운동을 지향하는 비제도권의 노동교육 운동이다. 제2유형과 다른 점은 정규교육기관과의 유대가 없이 독자적 조직을 바탕으로 기존 체제에 도전하는 지식들을 다룬다는 점이다. 1920년대와 1970∼80년대 우리나라의 야학 운동, 1980년대 노동자소모임․노동자문학회․노동자문예운동단체들의 노동교육 운동, 1990년대의 노동자교실, 1830∼40년대 영국의 자생적인 노동자 학습운동(예컨대, 읽기․토론 집단, 선술집․찻집 혹은 독서실 등에서의 신문 읽기), 선거권 확대운동론자들(Chartists)이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Owenites)의 정치교육과 순회강연, 진보적 성향의 출판물 보급, 삶과 학습이 구분되지 않는 노동자들의 자서전 출간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하이랜더(Highlander)라는 독자적 교육기관을 세워 노동조합 활동을 지원했던 1930년대 미국의 노동교육 운동 사례도 여기에 포함된다. 한편, 제4유형은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비제도권의 노동교육 운동이다. 제3유형과 달리 제4유형은 노동자 조직 또는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재야 사회운동 단체들과 연계되어 있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노동상담소의 노동교육, 사회민주주의 청년연맹의 ‘정치학교’, 서울민중연합과 인천민중연합의 ‘민족학교’와 ‘노동교실’, 서울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시민학교’와 ‘여성교실’,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의 ‘청년학교’ 등이 있다. 또한 드러나지 않은 지하 노동자 정치조직들의 노동교육을 들 수 있다. 끝으로 제5유형은 교육운동과 노동운동의 목적을 모두 지니며 현재로서는 비공식 조직이나 공식적 조직으로 나아가기 위해 합법화를 추진하는 노동교육 운동이다. ‘학원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학원 설립을 추진했던 인천 ‘노동자대학’이 여기에 해당한다.



3. 인천 ‘노동자대학’ 합법화 운동의 배경


‘인노대 운동’은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노동교육을 모색하는 한국 노동교육 운동의 전개라는 역사적 맥락과 우리나라의 사회정치적 상황이 어우러진 결과로 대두하였다.


가. 한국 노동교육 운동 약사

여기서는 한국 노동교육 운동의 약사를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1960년대부터 ‘인노대’의 설립이 논의되던 1988년말 이전까지의 시기에 한정하여, 교육내용의 확대와 교육대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1) 1960년대 : 능력지향 및 시혜적 노동교육 운동 단계

1960년대의 경제는 수출위주 산업화 정책과 외자도입에 의해 특징지워 진다. 우리 경제의 대외종속은 심화되었고, 사회적 불균형과 불평등 역시 확대되었다.

이 당시 노동교육이라 할 만한 것은 노동자의 직업기술 습득과 향상을 도모하는 직업훈련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정부는 산업에 필요한 산업인력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1967년 ‘직업훈련법’을 제정하여 직업훈련을 국가적 제도로 도입하였다. 또 직업훈련담당요원 양성을 위해 1968년에는 ‘중앙직업훈련원’을 개원했다.

노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했던 만큼, 노총은 노사협조주의, 반공주의, 개량적 노동조합주의의 틀 속에서 묶여 있었고, 그러한 노총의 노동교육은 노동자를 대상화하고 노조간부들을 노동귀족화시켜, 노조간부와 노총의 어용적 지위를 유지시킴은 물론 체제유지의 강력한 수호자로 나서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한편, 몇몇 뜻 있는 사람들은 정규교육에서 소외된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지식 습득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재건학교, 검정고시 야학 등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불우 청소년들의 알고자 하는 욕구에 대해, 뭔가를 알려 주려는 열의로 가득했으나, 이들을 시혜적 차원에서 접근할 뿐, 사회구조적 문제와 연관시키지는 못했다.

 

(2) 1970년대 : 경제지향 및 계몽적 노동교육 운동 단계

1970년대 전반 이후 한국 정부는 경공업 제조업 중심에서 중화학 및 고기술 산업 정책은 경제의 대외 종속과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1970년대 노동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제껏 잠자고 있던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지식인들의 양심을 일깨워 교회와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에의 참여가 증대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교육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사례들이 많아졌다.

한국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UIM),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경수 도시산업선교회 등은 소모임 위주의 노동교육을 통해 꾸준히 노동자들의 주체적 자아각성을 도모해 왔다.

1966년에 세워진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연구소와 1967년에 설립된 고려대학교 부설 노동문제연구소는 주로 노조간부와 경영진을 대상으로 3개월 과정의 노동교육을 실시했다.

한편, 대학생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노동야학’을 설립, 운영했다. 노동현장의 모순을 피부로 느끼고 있으나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의해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와, 이론적으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깨우쳐 가면서도 그 현실감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던 대학생이 야학이라는 장소에서 만나 서로를 교육하는 의미가 컸다. 그러나 노동교육을 효과적으로 하기에는 대학생들의 역량이 크게 부족했다.

교회와 대학 부설 연구기관이 주도했던 1970년대 노동교육 프로그램들은 노동조합의 어용집행부를 민주집행부로 전환하는 노조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3) 1980년대 : 노동교육의 다양화 및 계몽적 노동교육 운동 지양 단계 

1980년에 형성된 제5공화국 정권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정당성과 대중적 지지가 약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중화학 공업 정책 속에서 숙련된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해 갔다. 뿐만 아니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와 국가권력의 본질, 노동운동 방식에 대한 안일한 생각을 바꾸었고 사회변화의 중요한 집단으로 등장했다.

제5공화국 정부는 1981년 ‘노사협의회법’ 제정 이후, 전국 41개 지방노동사무소를 통해 노사협의촉진교육, 조․반장교육, 노무관리자와 경영관리자교육 등의 노사관계교육을 조직적․체계적으로 실시하였다. 또한 한국방송통신대학이 1981년부터는 학사과정으로 승격 개편되었고, 개방대학이 1982년부터 등장하였다. 그밖에 정부 각 부처 산하의 크고 작은 많은 사회교육 기관들이 노동문제 관련 교육프로그램들을 실시했다.

‘기업주도 노동교육’은 1980년대 들어 전반적으로 매우 활발해졌다. 삼성그룹이 1982년 자체 종합연수원을 설립한 이래 현대그룹이 1986년, 대우그룹이 1987년, 럭키금성그룹이 1988년에 자체 종합연수원을 설립하면서부터 산업교육이 제도적으로 정착하였다. 1987년 317개 상장기업의 교육훈련비는 약 522억원(기업당 1억6천5백만원)으로 매출액 대비 0.07%이었다. 

한편,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있던 야학들은 1980년 초 노동야학의 전통을 이어 받되 전문적인 연구와 교육이념 정립을 위해 ‘야학협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5·17 이후 외부의 탄압과 자체 역량부족으로 소멸되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투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노동조합의 위상이 크게 부각했고 노조 중심의 실무교육이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노조 밖에서는 노조의 사업을 지원하는 각종 노동교육 프로그램들이 생겨났다. 노동교육만을 주목적으로 삼는 노동교육기관 - 야학, 소모임, 노동자 학교, 노동(자)교육협회 - 과 자신들의 설립목적 달성을 위해 또는 설립목적과 병행하여 노동교육 프로그램을 부수적으로 마련하는 각종 단체 - 노동상담소, 노동자교육 연구소(원), 노동자료실, 노동자 신문, 문화단체, 산업안전 연구단체, 종교단체, 여성단체 - 들로 나눌 수 있다. 형태 면에서 매우 다양해졌고, 다루는 내용도 더 넓고 깊어졌다. 특히 ‘노동상담소’는 노조의 자주적, 민주적 단결을 강화하면서도, 노동운동의 정치사상적 입장을 강화, 한국사회의 구조적 인식 제고, 노동자 정치조직 건설 준비 등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


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의 사회정치적 상황

우리나라 독점자본은 선진 자본주의국가들과 달리 막대한 자본수입과 높은 무역의존도 때문에, 노동과정의 기술적 측면에서는 생산자동화, 포드주의적 노동과정의 도입 및 과학적 관리 등을 실시함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구상(conception)은 선진 자본주의국가에 의존하고 있으며, 사회적 측면에서도 관료적․이데올로기적 통제만이 아니라 병영적 통제를 나타냈다.

또한, 정부는 노동조합에 대한 행정적 규제와 정치활동 금지를 통해 ‘시장기제적 배제적 억압’을 추진해 왔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노동자로 하여금 계급투쟁적 이데올로기를 선호할 기회를 확대시켰다. 198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노동력 수급의 위기와 경제체계의 변화로 단일노동 시장이 위협을 받으면서, 시장기제적 배제적 노동억압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이제까지의 시장기제적 노동억압 정책을 일단 우회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노동계급 상위집단(중화학 노동자) 중심으로, 노동계급의 보편적 이익보다는 노동조합의 배타적 이익을 강조하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대두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1987년 선거를 통해 등장한 권위주의 체제는 ‘제한적 민주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저항세력이 조직기반을 채 갖추기 전에 국가의 관리능력을 회복하고 일단 후퇴했던 시장기제적 노동억압을 재개하였다.

한편,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불균형 고도성장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의 악화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노동자들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급진적 저항이념의 ‘정치적 공간’을 확보해 나갔다. 또한, 조직면에서는 합법적 조직공간 외부에 많은 비공식 집단들이 생겨났다. 학생운동권의 현장진출이 증가하면서 해고 노동자를 중심으로 소집단 운동이 확산되었다. 또 1984년 구로지역 연대투쟁을 계기로 ‘서노련’, ‘인노련’ 등 지역적 연대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조합주의의 틀을 벗어나 정치적 ‘전위조직’의 건설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1988년 말부터 1989년 전반기까지 기존 노동운동의 이념과 조직을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 나아가 사상투쟁으로 발전시키려는 분명한 시도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조짐은 노동조합운동을 하다가 노동자의 정서에 융화되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치거나 해고되었던 이른바 ‘학출’ 노동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났다. 인천 지역은 ‘학출’ 노동자가 다른 어떤 곳보다 많았다.

이에 상응하여 ‘노동상담소’의 조합주의와 ‘소모임’ 등 작은 규모의 비공개적 교육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노동조합 임원에 해당하는 소위 ‘중진’ 노동자들과 열성적 노동자들을 “과학적 계급의식”으로 무장시킬 것을 목적으로,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이며 대규모적인 노동자 정치교육기관의 설립을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모색하려는 시도가 ‘인노대 운동’을 중심으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4. 운동의 전개과정


1988년 말부터 대안적 노동교육의 필요성을 논의하기 시작하다가 1989년부터 본격적 준비에 들어가 1990년 3월 3일 개교했던 ‘인노대’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5기에 걸친 정기강좌를 마치고, 1993년 5월부터는 새로운 전망모색을 했으나, 1995년 1월 끝내 해산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인노대 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설립추진 조직의 형성 (1988년 말∼1989년 7월 초)

‘인노대 운동’은 표면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사상의 자유와 알권리를 바탕으로 대규모의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노동자 정치교육공간 확보 차원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이면에는 노동운동의 성장만큼 노동자의 의식이 뒤따르지 못함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에게 ‘과학적 계급의식’을 심어주고 노동자의 정치적 진출을 모색하려는 의지가 크게 담겨있었다.

몇몇 전문가와 인노협 위원장 20명, 그리고 약간의 실무자들은 ‘인노대’의 모태인 ‘노동자대학설립추진제안모임’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다음 <그림 2>와 같은 조직을 구상했다.


<그림 2> ‘노동자대학설립추진 제안모임’이 구상했던

                   ‘인노대’ 조직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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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문위원단

- 지도위원단(강사진)

- 운영위원회 : ‘인노대’의 실제적 주인으로서 ‘인노대’의 운영방안이나 발전방향 등에 대한 주요사항을 결정한다. 지역 내 노동자대중의 신뢰를 받고 있는 민주노조 위원장, 그리고 여타 노동운동단체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할 예정이다.

- 상임집행위원회 : 운영위원회가 마련한 기본사업 방향에 따른 제반 사업을 실제로 집행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기구이다. 따라서 상임집행위원회는 ‘인노대’의 설립을 실제적으로 추진하고 제반 실무집행기능을 전담할 수 있는 전문적 능력을 갖고 있는 헌신적 동지들로 구성하고 그 산하의 부서는 상황에 따라 확대, 축소할 수 있다.

* 운영위원회와 상임집행위원회 구성원들이 바로 ‘노동자대학설립추진 제안모임’ 사람들이다.


이에 대해 1989년 4월 6일 청와대 당정협의회는 ‘민중교육기관 엄단 및 노대설립 원천봉쇄 방침’을 발표했다. 정부의 탄압에 대한 대응방안과 노동자조직과의 연대방안을 두고 정파연합으로 출발했던 ‘제안모임’은 의견이 갈라져, 헤게모니 싸움 끝에, 결국 실무자 중심의 정파만이 남아 ‘인노대’를 이끌게 되었다.


나. 조직개편, 개교준비 및 제1단계 합법화 투쟁

    (1989년 7월 초∼1990년 2월 말)

‘제안모임’에서 개량적 노선의 사람들이 이탈하자, 남아있던 사람들은 곧이어 ‘제안모임’을 ‘노동자대학 설립 추진위원회’로 개편했다. ‘추진위원회’는 사무국장 아래 재정 및 사무관리, 홍보(유인물 제작), 교육준비(교육자료 수집), 및 학생모집 등으로 조직되었다.

이후 ‘인노대’ 개관 및 공식 출범을 준비하기 위해 ‘추진위원회’를 ‘노동자대학 집행위원회’ 체제로 전환하였다(<그림 3>). ‘인노대’의 실제적 운영에 책임질 ‘상임집행위원회’에는 이제껏 추진위원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들어갔고, 운영 전반에 대한 지도․조언 및 특별강좌를 담당할 ‘자문위원’과 정규강의를 담당할 ‘지도위원’을 추대했다. 아울러 ‘인노대’에 등록된 학생들로 ‘학생자치회’를 구성했다. 학생자치회는 ‘인노대’ 실무자들이 생산현장을 방문하여 ‘인노대’의 취지를 소개한 결과, 1989년 9월 24일 인천지역 노조 간부 10여명이 일단 ‘학생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한 데서 비롯했다.


<그림 3> ‘노동자대학 집행위원회’

 

설립자*



교 장*

                                자문위원회*

         학생자치회**

                                          지도위원회**



                      상임 집행위원회**               

                         사 무 국 장                  



              총        홍          교         교

              무        보          육         육

              부        부          1          2

              장        장          부         부

                                    장         장





  *   설립자, 교장 및 자문위원은 상징적인 존재임.

  **  상임 집행위원회, 지도위원회, 학생자치회가 흔히 노동자대학의 3주체라고 불림.


‘인노대’ 측은 1989년 9월 25일 현행법이 정하는 틀 내에서 합법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인천시 북부 교육청에 ‘노동자대학(원)’이라는 학원 설립인가 신청서를 냈다. 그러나 당시 인천직할시 교육위원회(현 교육청) ‘사설강습소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에 의거, 이틀만에 신청서류가 반려되었다. 이같은 ‘인노대’ 설립불허 입장은 단지 교육구청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대학 설립 관련 동향’이라는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경찰, 교육청, 관할구청(인천 북구청) 등 관계기관은 ‘인노대’ 설립에 대해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학원 설립에 필요한 법적 요건의 결여와 위법성을 문제삼았으나, 그 이면에는 국가 헤게모니에 위협적인 ‘노동해방’ 사상의 전파를 미연에 방지하고 아울러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사전 봉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인노대’의 합법적 설립인가 신청이 거부되자, ‘인노대’는 정부의 법적, 물리적 제재에 맞서 이 때부터 합법적 교육공간 확보를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인노대’가 전개한 제1단계 합법화 투쟁은, 1989년 9월 30일 개관식 및 설립보고대회와 직후 1, 2차 합법성쟁취 결의대회, 약 100여 일에 걸친 9회의 공개 임시강좌와 임금투쟁 특별강좌 운영, ‘구속동지 석방 및 ‘인노대’ 탄압 분쇄 농성투쟁’ 발대식 거행, 폭력 경찰에 대한 항의시위와 고발장 접수, 또 ‘송년 농성투쟁’ 전개, 해가 바뀐 1990년 1월 24일 부평시장에서 ‘인노대’ 탄압 규탄 가두시위 전개, 제10회 공개 임시강좌가 원천봉쇄될 것에 대비한 시민 홍보전 등으로 전개되었다.


다. 개교, 교육활동 및 제2단계 합법화 투쟁 (1990년 3월∼1992년 6월 초)

‘인노대’는 1990년 3월 3일 신문광고를 통해 공개적으로 개교를 선언하고, 학생모집에 나섰다. 제2단계 합법화 투쟁에 돌입하였으나, 1990년 3월 15일 압수수색과 함께 폐쇄조치 당하고 만다. 힘들여 만든 교육시설에서 정식으로 입학식 한 번 못한 채 쫓겨난 것이다. 일시적인 임시강좌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어도, 공개적인 정식 개교는 곤란하다는 정부의 급진적 교육시설에 대한 단호한 불허방침을 엿볼 수 있다.

‘인노대’는 쫓겨난 뒤에도 1990년 3월 17일부터 이동식 수업으로 정기강좌를 운영했다. 1990년 5월 2일 정치학교, 민족학교, 인천민중학교 등과 더불어 영등포 성문밖 교회에서 ‘노동자, 민중교육운동 탄압 규탄 공동강연회’ 개최, 1991년 6월 2일 인천시 북구 십정동에 60여평의 새 강의실을 마련하여 새 강의실 개소식을 강행하였다. 또한 사민청의 정치학교, 민주통일시민학교, 민족학교, 민족불교학당, 인천민중학교 등과 연대하여 ‘민중교육운동 탄압 규탄 및 사상의 자유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결성하기도 하였다. 정부의 탄압을 규탄하는 원고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하고, 투쟁 속보를 발간․배포하였다. 용접으로 봉쇄된 새 강의실을 열고 들어가 사무실 집기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강의실 농성에 돌입하기도 하고, 사민청 및 서울대생과 ‘인노대’를 지지하는 지역 사람들이 ‘인노대’ 탄압 규탄 집회를 개최하였다. 1991년 8월 1일에는 성균관대에서 ‘민중교육운동 탄압 규탄 및 사상의 자유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할 것을 알리는 광고를 한겨레신문에 게재, 아울러 그간의 ‘인노대’의 투쟁과정을 정리하여 투쟁자료집을 발간․배포하기도 하였다. 이후 사무실만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공간을 마련하였고, 민중당 인천시 남동구 지구당 사무실을 빌어 제4기 입학 준비, 이후에는 비공개 사무실을 갖고 ‘인노대’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라. 전망 모색과 종결 (1992년 6월 초∼1995년 1월 말)

‘인노대’는 제4기 정기강좌를 종결한 1992년 6월초부터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일에 착수했다. 국가가 ‘인노대’를 이적단체로 규정․탄압했고, ‘인노대’ 역시 대중 정치교육기관으로서 대중결합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내용이 어렵고 현장성이 결여되었다는 문제 또한 무시 못할 이유였다. 게다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적 운동권을 대변하는 민중당의 득표율이 1%에 불과했고, 이른바 ‘문민정부’의 탄생과 함께 ‘위로부터의 개혁’과 시민운동의 활성화 등에 따라 상대적으로 민중운동권이 자신의 존재 의의와 진로를 뚜렷하게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노대’의 문제점은 더욱 증폭되어 나타났다. 제5기 교육을 마친 1993년 5월경에는 ‘인노대’ 내부에서 “더 이상은 안된다. 일단 교육사업을 중단하고 전망을 모색하자”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하여 향후 1년간 전망을 모색하기로 합의했다.

1년여에 걸쳐 제안, 논의된 ‘인노대’의 새로운 전망안은 크게는 ‘인노대’의 ‘독자적 위상 필요론’과 ‘불필요론’의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불필요론’의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조직되지 않은 대중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을 때는 ‘인노대’처럼 학교형태의 노동자정치교육기관이 필요했으나, 노동자조직이 성장한 지금의 시점에서는 이들이 노동자 정치교육을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노동자 정치교육을 담당할 공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독자적인 노동자 정치교육기관으로서 ‘인노대’의 존재의의를 확보할 수 있었으나, 다양한 대중적인 합법공간이 확대된 조건에서 독자적 교육기관으로서 ‘인노대’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인노대’를 노동자 정치교육을 위한 독자적인 조직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정당이나 대중정치조직이 현실적으로 대중적 포괄 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은 정치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므로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밖에도 ‘인노대’를 구성하는 집행위원, 지도위원 및 학생들은 정세에 대한 대응, 노동자 조직과의 관계 설정, 합법화 투쟁 전략과 전술, 정치교육과 정파활동의 관계에 대한 인식, ‘인노대’ 교육결과에 대한 평가, 그리고 새로운 전망 안의 모색 등을 놓고 항상 의견의 일치를 봤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견해차는 ‘인노대’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으나, 심할 경우 파벌을 형성하여 ‘인노대’ 내부의 결집력 약화를 초래해 ‘인노대’가 쇠퇴의 길로 빠져들게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1년 넘는 전망 모색에도 불구하고, ‘인노대’는 변화하는 정세에 적응하지 못한 채 1995년 1월 말 문을 닫고 말았다. 1988년 말의 ‘인노대’ 설립 필요성 논의로부터 시작하면 만 6년의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인간적 성장을 이룰 시기에 그만 도중 하차한 셈이다. 외국의 성인교육기관들 중에는 시대의 흐름에 자신의 성격을 변화시켜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거의 1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경우들도 적지 않음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에서 ‘인노대’가 6년만에 종결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인노대’ 해산 원인은 대체로 ‘인노대’ 내부와 외부에서 찾고 있었다. 

먼저, ‘인노대’ 해산 원인을 주로 내부에서 찾는 사람들은 전략상의 오류와 그에 따른 내부 의견 불일치, ‘인노대’ 내부 인적 역량의 약화 및 물적 동원능력의 부족 등을 지적했다. ‘인노대’는 전문적, 체계적, 대중적 노동자정치교육이라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전선활동에 많은 비중을 둠으로써 비합법조직의 정파교육으로 흘러갔다. 그 결과 다른 노동교육기관들에 비해 보다 강한 탄압을 받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노동자대중들로부터 유리되었다. 게다가 1992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의 참패 등 객관적 정세의 변화는 ‘인노대’ 내부 구성원들의 희망을 꺾어 그 역량을 더욱 소진시킴으로써, ‘인노대’ 자신들의 역량에 걸맞는 교육사업의 전망을 모색하고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인노대’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노대’ 해산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사람들은 일단 ‘인노대’를 노동자 대중교육운동보다는 노동운동, 그것도 사회주의 깃발을 드러내는 노동운동의 맥락에서 바라봐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인노대’의 폐교는 ‘인노대’ 구성원들의 역량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정부, 그것도 이른바 문민정부가 국가보안법과 공권력을 동원하여 ‘노동운동 말살정책’을 추진한 결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부 요인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노대’가 가르쳤던 교육내용이 지나치게 고전적이고 한국의 상황에 적합하지 못해서 ‘인노대’가 대중성 확보에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인노대’ 내부 요인보다는 외부 요인이 ‘인노대’ 해산에 보다 크게 작용했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5. 분석 및 논의


‘인노대’ 합법화 운동 안에는 합법화를 둘러싼 정부와 ‘인노대’간의 갈등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다양한 노선과 전략, 국가의 노동교육 정책과 노동정책, 그리고 기존의 제도교육과 노동교육을 비판하는 노동교육 운동이 녹아 있었다. 본 연구는 이제까지 노동교육에 관한 연구가 주로 교육 외적 요인들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음을 비판하면서 ‘인노대’ 합법화 운동의 교육적 의미를 ‘학습권’ 실현의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

가. 노동교육관의 대립 

‘인노대’ 합법화 운동을 둘러싼 관련집단들간의 중층적 상호작용에서 집단이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집단이념을 본 연구에서는 노동교육관으로 표현하였다.

먼저, 가장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노동교육관의 대립은 ‘인노대’와 국가의 상호작용에서 볼 수 있다. ‘인노대’는 사상의 자유를 명분으로 노동자 계급의식 이른바 ‘노동해방’ 사상을 합법적으로 전파할 노동교육 공간의 진지 구축을 시도했던 반면에, 국가는 현행법 위반을 내세워 이를 제재했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국가사회의 발전, 노사공존공영 이념을 바탕으로 국가 주도의 노동교육기관을 제도화했다. 본 연구는 이를 ‘노동해방’의 노동교육관과 ‘국가발전’의 노동교육관의 대립으로 규정했다.

다음에는, 국가의 제재에 대한 대응방식 혹은 합법화 투쟁의 전략과 전술, 여타 노동자 집단과의 연대 전략, 교육활동과 정치활동의 관계 및 교육활동의 평가와 전망안 등을 놓고, ‘인노대’ 내부에서 서로 다른 생각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이를 특정 노동자 정치조직의 구성원을 길러내려는 ‘정파교육’과 노동자 대중의 정치의식 함양을 모색하는 ‘정치교육’간의 대립, 그리고 교육실시자 중심의 ‘목적의식적 교육’과 학습자 중심의 ‘문제제기식 교육’간의 대립으로 표현했다.   

나. 노동운동과 교육운동의 이중성

‘인노대’는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지향했으나, 조직면에서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인노대 운동’은 표면적으로는 교육운동, 이면적으로는 노동운동의 성격을 지녔다. 

먼저, 표면적으로 드러난 노동교육관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녔다. 첫째 ‘인노대’는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노동교육을 지향했다. 둘째, 사상의 자유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사상교육을 추구했다. 셋째, 사회주의의 학습은 ‘반체제적’이라는 국가의 규정에 의해 국가와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었다. 넷째,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는 유사한 민중교육 단체들과 합법적 교육공간 확보를 위해 연대했다.

다음으로 그 당시 내부 토론 내용을 통해 ‘인노대’가 상정하고 있는 노동교육관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자 정치교육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진출의 수단이다. 둘째, 사상전파의 교육공간 획득은 정치투쟁을 통해 가능하다. 셋째, 노동운동 노선에 따라 노동교육에 대한 기대가 달랐다. 정치적․개량적 노선에서는 ‘노동자대중 정치교육’을 선호했다면, 정치적․혁명적 노선에서는 ‘정파교육’으로까지 나아가려 했다. 

이처럼 ‘인노대’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노동교육관은 노동운동의 맥락에서 실제로 진행된 노동교육관과 일치하지 않았다.

한편, 애초의 ‘인노대’는 ‘정파연합’의 성격을 지닌 노동자 정치교육기관으로 출발했으나, 정부의 탄압과 이에 대한 대응방식의 차이로 ‘인노대’의 정파연합은 깨졌다. 급진적 노동운동 노선을 가진 젊은 노동운동가들, 그 중에서도 ‘사노맹’의 운동노선을 따르는 이들이 ‘인노대’를 주도했고, ‘사노맹’ 사건이 터짐에 따라 ‘인노대’의 역량은 크게 약화되었다. ‘인노대’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그 동안 특정 정파의 성격이 지나치게 강조되었음을 반성하고 애초 내건 ‘정파연합’의 정신으로 되돌아 가서 새로운 전망을 모색했다.

 

다. 교육의 자유를 통제하는 노동교육정책

일반적으로 국가의 교육정책은 허용, 지원, 개입, 통제의 네 가지 형태로 표출된다. 우리나라의 노동교육 정책은 노동교육 주체에 따라, 그리고 노동교육의 목적과 내용 등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했다.

합법적 노동조합, 사용자 및 민간단체 등 민간차원의 노동교육에 대해서는 허용, 지원 등의 비교적 소극적 정책을 취한 반면에 정부 자신의 노동교육이나 법외 노동자조직의 노동교육에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통제하였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노사간, 노정간의 갈등해결을 통해 노동력을 원활히 재생산하기 위해서였고, 정치적인 면에서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또, 같은 노동자 주도의 노동교육이라 해도 정부는 친정부 성향의 한국노총에 대해서는 재정적 보조 등 지원 정책을 펼치는 반면에, 반정부적 노동자조직인 전노협이나 사민청, ‘인노대’ 등의 노동교육은 통제하고, 어떤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 기업별 단위 노동조합의 노동교육에 대해서는 허용적인 노동교육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밖에도 국가의 노동교육 정책은 주로 객관적 의미의 노동관을 바탕으로 하였다. 사회적 존재로서 노동자가 노동조합 내에서 다른 노동자들과, 기업 내에서는 경영자와, 한 국가 내에서는 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지를 안내했다. 고등교육 수준의 교육기회를 싼값에 제공했던 것도 순치된 노동력의 확보와 재생산을 위해서였다.


라. 노동자 주도 노동교육 운동의 디딤돌

노동교육은 크게 보면 노동과 교육의 분리를 인정하고 교육기회의 확대와 노동자의 자유로운 학습활동을 추구했던 경우와 노동과 교육의 재결합을 시도했던 두 흐름 속에서 발전해 왔다. ‘인노대’ 합법화 운동은 전자의 흐름에 속했다. 그 중에서도 노동교육의 양적 확대보다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학습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대항적 헤게모니 형성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인노대’는 종래의 노동교육과 달리 집행위원, 강사 및 학생의 3주체가 노동교육기관 운영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게 했다. 이제껏 ‘교육요구권’ 실현 수준에 머물던 노동자들이 ‘교육참여권’을 가지고 운영위원회에 참석하여 ‘인노대’의 운영방안에 대해 발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학생 대표의 발언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른바 ‘학출’들인 집행위원들의 주도 아래 ‘인노대’가 전개되었다.

일반적으로 노동교육은 교육대상인 노동자를 ‘시혜의 대상’에서 ‘계몽의 대상’으로, 또 ‘교육받을 권리의 주체’로, 나아가 ‘학습의 주체’로까지 인식하면서 발전해 왔다. 그런데 ‘인노대’는 노동자 학생을 철저하게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물론 노동자를 우리 사회의 핵심적 정치세력으로 상정하여 이들이 역사발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길 기대했다는 점에서 민중지향적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를 만들어 나가려면 노동자의 계몽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고 봤다는 점에서 ‘교육주의’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 노동교육 운동의 진전은 교육 목적의 변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노동교육의 목적은 노동운동, 노동정책 및 교육운동의 맥락 등에서 설정되어 왔다. ‘인노대’의 경우, 노동계급의 해방을 지향하는 혁명적 노동운동의 지도자 양성을 교육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교육운동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교육목적이 지나치게 ‘운동지향적’이어서, 그것도 ‘정치운동’ 중심적이어서, 자칫 그 운동의 주체인 ‘노동자’ 자신의 삶을 축소,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노동교육의 교육내용은 인간 노동의 ‘객관적 측면’에 주목하는 경우와 ‘주관적 측면’에 주목하는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John Paul Ⅱ, 1981). 전자는 노동력의 생산과 재생산이 주요 관심사임에 비해, 후자는 노동하는 인간의 인격적 변화에 주목한다. 즉, 전자에서는 일의 세계나 노동자 조직활동에서 당면하는 기술훈련, 노동자의 권익 옹호, 나아가 노동자이기에 생활 곳곳에서 부딪치게 되는 여러 사회 문제들이 주요한 교육내용으로 선정될 수 있다. 반면에 후자에서는 노동의 의미가 노동하는 인간의 인간성 구현 및 인격체로서의 소명 완수에 있다고 보기에, 노동을 통한 개인의 도덕성 함양, 인간의 품위 유지, 가족 구성원이나 사회구성원으로서 공동선의 추구 등이 주요한 교육내용이 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인노대’는 인간 노동의 객관적 측면에만 주목하였다. 노동자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노동해방의 투사’로 규정하는 데는 기여했을지언정, ‘노동하는 인간’에서는 찾지 못했다.

‘인노대’의 교육방법은 이전의 다른 노동교육과 비교할 때, 대단히 체계적이고 계획적이었다. 또한 ‘목적의식적’이었다. “노동자는 자생적으로 계급적 각성을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현실생활에 근거하지 않은 체계적 선전의 교육방법은 생활세계에서 유리된 교육, 교육실시자를 정당화하는 교육, 피동적 학습자로의 훈련 등을 초래하고, 이른바 ‘교육주의’ 철학의 결함을 드러낸다.

노동교육 운동의 진전은 그 사회가 노동자에게 학습활동의 자유를 얼마나 제도적으로 보장했는가에 의해 가늠할 수 있다. ‘인노대’는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으나 사회주의 정치사상을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형태로 전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노대’는 끝내 합법화되지 못했다. 많은 인적, 물적 희생이 수반되었다. 아직 우리 사회의 제도나 의식이 사회주의 정치교육기관을 수용할 만큼 허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노대’ 합법화 운동은 우리 사회에 노동자의 알권리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시켰고, 우리의 법률, 제도 및 정책 등이 노동자의 알권리를 가로막고 있음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노동교육기관의 교육활동은 ‘학습활동의 자유’의 원칙에 입각해서 마땅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열린 학습사회”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6. 맺음말

이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와 논의를 바탕으로 몇 가지 결론을 내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노대’ 합법화 운동은 노동교육 그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노동운동이 정치투쟁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노동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따라서 ‘인노대’의 교육활동이 얼마만큼 교육적이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이른바 과학적 노동해방 사상을 목적의식적으로, 체계적으로 선전하는 데 몰두할 뿐이었다. ‘인노대’의 합법화는 이런 일을 공개적이고 대규모로 하여 노동해방 투쟁에 나설 노동자들을 대량생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물론, 노동자 집단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 실현을 위한 교육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는 임금을 통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며 보다 나은 노동조건과 생활조건 아래서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또 이에 필요한 교육을 충분히 받을 권리 역시 갖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요구되는 것은 단지 노동자로서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만이 아니라 노동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삶도 중요한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인노대’는 노동자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 노동의 객관적 측면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둘째, 국가는 표면적으로는 위법성을 내세워 ‘인노대’의 합법적 설립을 불허했고, 반면에 ‘인노대’는 표면적으로는 노동자의 사상의 자유와 알 권리를 강조하면서 합법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합법적 설립을 둘러싼 ‘인노대’와 국가의 갈등 이면에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인노대’와 이를 억제하려는 국가의 다툼이 숨겨져 있었다.

‘인노대’는 합법화 운동을 통하여 많은 노동자들을 ‘정치투쟁전선’에 ‘동원’하고자 했다. 그래서 개량화를 통한 합법성 쟁취 주장을 ‘합법주의’ 노선이라 비판했고, 사회주의 정치사상을 비밀리에 교육하는 것 역시 ‘청산주의’라 부르며 반대했다. 반면에 국가는 합법적 노조, 사용자, 민간단체의 노동교육을 허용 또는 지원하면서 법외 노동자조직의 노동교육은 적극적으로 통제했다. 뿐만 아니라 체제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국가가 직접 나서서 노동교육기관을 제도화하였으나, 국가사회의 안정과 평화, 번영과 발전만을 우선시할 뿐, 개인이나 지역사회의 학습활동을 지원한다는 취지는 보이지 않는다. 개개인의 학습활동이 국가사회의 체제유지에 방해가 될 때, 개인의 자유로운 학습활동마저 통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결과 ‘인노대 운동’에 참여한 집단들이 자유로운 의사소통 위에 ‘지식의 민주화’라는 평생교육 이념을 실현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사회가 이같은 ‘국가주의 교육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직껏 ‘민주적 시민사회’를 창출해 내지 못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셋째, ‘인노대’는 정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내부에서 견해차를 노정하기 시작했다. 의견 대립에는 ‘교육의 논리’에 관한 것보다는 ‘운동의 논리’에 관한 것이 많았다. 이러한 내부에서의 경쟁이나 갈등 요인은 외부의 위협으로 ‘인노대’ 존립 자체가 흔들릴 때 크게 부각되곤 했다.

점진적이고 합법적으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추구했던 사람들과 혁명적이고 투쟁적인 방법만이 ‘노동해방’을 가져온다고 보는 사람들 간에 갈등이 존재했다. ‘인노대’는 후자의 입장을 취한 사람들이 주도했다.

‘인노대’를 주도했던 노동자 정치교육론은 ‘정치를 위한 노동교육’이지 ‘정치에 대한 노동교육’이 아니었다. 특정 정치이념과 조직에 대한 헌신을 요구할 뿐, 객관적 입장에서 여러 정파의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것은 ‘선전’이지 ‘교육’이 아니다. 이래서는 열심한 당원을 만들 수는 있어도 비판적 정치의식을 함양시킬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사회주의 사상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려 했던 영국 노동자대학(Labor College)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넷째, ‘인노대’는 1년 이상 교육의 공백기를 두고 여러 전망들을 모색했으나, 그 어떤 전망에도 합의하지 못해 ‘인노대’ 내부 역량만 낭비하다가 결국 해산하고 말았다. 사실 이론은 실천을 안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길을 안내하는 지도와도 같다. ‘인노대’ 내부에서 운동 노선과 전략, 전술 등을 두고 심도있는 논쟁을 전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본다. 그러나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한 법이다. ‘인노대’가 노동자 정치교육기관으로서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정치교육을 실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자 정치교육의 이론만을 따진 것은 공리공론의 소모적 논쟁이 되고 말았다.

노동교육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노동교육에 대해 합의된 이론적 전망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인노대’의 실제적 교육활동을 통해 노동교육 이론을 고쳐나가는 것도 좋은 대응방안이 될 수 있었다. 국내외의 ‘독자적 사회교육기관’들이 애초의 설립 정신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것도 바로 이런 쉼없는 교육활동의 결과라 여겨진다.

끝으로, ‘인노대’가 우리 사회의 노동교육 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비록 합법화 운동에는 실패하였으나, 기존의 교육질서와 사회질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간단없이 운영해 온 교육적 열의는 ‘한국 노동교육 운동사’의 맥락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사상의 자유에 입각하여 노동자의 알권리를 사회적으로 부각시키고 노동교육 운동의 바람을 일으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뿐만 아니라 ‘인노대’ 합법화 운동 과정에서 얻은 경험들은 이후 노동교육 운동에 값진 교훈이 되었다. 계몽주의 단계에 머물렀던 ‘인노대’의 한계를 넘어서서 학습의 주체로서 노동자가 주도하는 각종 학습 동아리들이 생겨난 것은 이를 증명한다. 예컨대 서울 북부 노동자회 노동교실이나 ‘인노대’ 졸업생이 주도하여 만든 노동자 학습 동아리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기존의 제도교육과 노동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출발했던 노동교육들이 노동자를 단지 계몽의 대상으로만 간주하고 노동자의 학습욕구 충족에 소홀했기 때문에, 바로 그런 노동교육에 대한 ‘또 하나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공식 해산 이후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알았던 ‘인노대’가 몇 가지 움직임을 통해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노동자대학 송년 준비 모임’의 이름으로 한겨레 신문(1996. 12. 13)에 ‘노동자대학 송년회’ 개최를 알리는 광고를 게재하기도 하였고, 또한 ‘노동자대학 총동문회’는 올해 총파업 투쟁과정에서 신문 광고를 통해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 철회를 요구하였다. 이들이 실질적인 노동교육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태로 여겨지지는 않으나, ‘노동자대학’의 간판 아래 다시 모이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들이 ‘노동자대학’의 조직을 복원하여 전과 같은 노동자정치교육활동을 전개할 것인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 노동교육에 대한 열정만큼은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아 이후의 노동교육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19세기 영국 노동교육의 역사가 시사하듯이 노동교육 운동은 ‘선전지향적’, ‘계몽주의적’ 단계에서 ‘교육지향적’, ‘학습자 주체’의 단계로 발전해 왔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인노대’ 합법화 운동은 노동자에 대한 교육적 관심이 부족한 우리의 노동교육 현실 속에서 ‘계몽적 차원의 노동교육 운동’ 단계를 벗어나 ‘노동자 주도의 노동교육 운동’ 단계로 가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제 우리 사회의 노동교육 운동 연구는 계몽적 노동교육 운동에서 노동자 주도 노동교육 운동으로의 이행을 규명하는 데까지 관심을 넓혀가야 할 것이다. 이 때, 앞서 소개한 서울 북부 노동자회의 노동교실, 노동자대학 졸업생이 주도하는 학습동아리, 그리고 ‘노동자대학 송년 모임’이나 ‘노동자대학 총동문회’ 등의 향배는 우리나라 노동교육 운동의 방향을 예측하고 연구하는 데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주도 노동교육 운동에 관한 연구는 노동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학습의 자유를 바탕으로 지적․인격적 성장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교육적 조건을 찾는 데 기여할 것이다.

한/노/정/연


노동과 교육의 ‘분리’와 ‘재결합’의 개념과 의미


: 노동교육을 볼 때, 노동과 교육이 분리된 형태로서의 노동교육과 결합된 형태로서의 노동교육을 생각했다. 외국 사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결합’된 형태로서, 오웬의 이상사회를 들 수 있는데 공장학교 같은 것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일의 내용 자체가 학습내용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을 엿볼 수가 있는데, 페스탈로찌가 얘기하는 노작교육의 형태도, 다분히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결합이긴 하지만, 그런 형태의 노동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노동과 교육이 ‘분리’된 형태는 노동자의 삶에 있어서 노동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어떤 기술을 가르치는 것으로써 삶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교양인으로서 (영국 노동교육협회와 같은 형태)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한다는 입장을 갖는다. 그람시의 경우에도, 적어도 어느 수준까지는 노동과 교육을 분리할 것을 요구한다. 변혁의 지도자나 유기적 지식인을 길러내는 과정에서, 체계적이고 지적인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느 단계에서는 ‘분리’를 강조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노대의 경우는 ‘분리’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체계적이고 지적인 교육을 강조했지, 노동자들의 생산현장에서의 작업과 관련된 내용, 조합원으로서의 참여의 내용들은 ― 말기에 가서 부분적으로 나타나고는 있으나 ― 거의 배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각각에는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노동자로서 사물을 바라보는데, 체계적인 학습은 당연히 도움이 되지만, 노동자로서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사회현실을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많은 것들 ― 가정생활이나, 노래방을 가는 등 놀이문화에서 부딪히는 것들 ― 에서 느끼는 인식의 측면도 무시될 수 없다고 본다. 인노대의 경우에 한 인간으로서 동료노동자와의 삶에서 상당히 경직되어 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노동의 ‘객관적’ 측면과 노동의 ‘주관적’ 측면에 대해서


: 객관적 의미의 노동만을 강조할 때에는 노동이 노동력화되어 버리는 것, 즉 하나의 상품화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회운동에서도 노동자를 노동운동의 객체로만 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노동도 역시 인간의 노동이라는 면에서 인간의 품위, 인격 등 인간의 존엄성 속에서 노동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많이 강조했다. 노동자가 자신의 삶을 지켜나간다고 할 때, 노동자로서 또는 노동조합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에 앞서 중요한 것은 노동하는 그 사람이 한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 의미의 노동이 객관적 의미의 노동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 보완적이어야 하며, 주관적 의미의 노동을 훼손시키면서 객관적 의미의 노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 주관적 의미의 노동이 더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편 주관적 의미의 노동 속에서 역시 노동자들간의 연대의 필요성은 강조되어야 한다. 주관적 의미의 노동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단지 노동하는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문제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문제해결에 있어서 개인적인 노력만이 아니라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연대 혹은 정치적인 연대라기보다, 그 바탕에는 노동자로서 인간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연대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가 무엇 때문에 연대하느냐의 문제이다.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본 교육운동과

                     교육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본 노동운동


☑ 이 글에서는 ‘교육주의’라는 것을 노동자를 학습 대상으로, 계몽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으로 보고, 그 가운데에서 노동운동을 바라볼 때 운동의 논리가 아닌 교육의 논리, 정치적 논리가 아닌 교육의 논리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시는데, 이것이 ‘교육주의’와의 차별성은 무엇인가?


: 노동운동을 교육운동적 시각에서 봐야 한다, 그러면서도 노동교육에서 교육주의가 문제다라는 것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의 지적인 것 같다. ‘교육주의’라고 하면 교육실시자의 입장에서 교육을 바라보는 것이다. 정부가, 기업이, 또는 노동운동을 하는 노조나 정치조직에서 노동교육을 바라볼 때 그 각각의 시각에서 노동교육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이 일종의 노동교육에서의 ‘교육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노동교육을 바라볼 때, 노동교육의 실시자 중심이 아니라, 대상으로 참여하는 노동자, 즉 학습자를 중심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가라는 점을 고민했다. 그것을 학습주의, 학습권 내지는 교육의 주체로서의 학습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노동교육운동을 노동운동이나 노동정책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교육의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지만, 문제는 이러한 관점이 노동운동이나 노동정책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교육주의로 비춰지는 것이다. 이는 교육학 내부에서도 교육자 중심이냐, 학습자 중심이냐 하는 점으로 몇 천년동안 쟁점이 되어 토론되어 온 주제이다. 학습자 중심으로 바라볼 때의 문제는, 인노대에서 체계적인 교육의 근거로 삼았던, 과연 외부의 주입없이 노동자가 자신의 삶의 경험을 가지고 일상적인 생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의 문제이다. 예를 들면 계급의식 형성과정에서 노동자 스스로가 사회의 구조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도움없이 자신의 생활영역이나 삶 속에서 사회구조적인 인식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점이 논쟁 중의 하나이다. 인노대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했던 것은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노동자의 생활 속에서 노동자들 스스로 논의하면서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자기를 객관화하고 대상화할 수 있는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체계적인 교육만을 강조하다 보니까, 노동자의 삶과 괴리를 가져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교수’와 ‘교육’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교수라는 것은 체계적인 학습을 강조하는 것이고, 교육은 자기 삶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이 둘간의 긴장관계가 유지되어야 하고 이 둘을 결합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 왔다. 소위 유기적 지식인을 형성시키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문화 유산 속에서 체계적이고 지적인 교육이 필요하지만, 이미 성인이 된 노동자에게는 ― 역시 지적인 훈련은 필요하지만 ― 삶 속에서의 교육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변혁을 지향해 왔던 사람들이 고민해온 교육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노대는 그런 과정을 거쳐 온 사람들을 재사회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자신의 삶에 비추어 판단하는 성인교육의 논리, 노동자들의 생활기반을 벗어나서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 이 글에서 교육운동 일반을 가지고 인노대 활동을 평가하면서 너무 정치지향적이었다든가, 운동만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 대해 공감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도 노동교육활동을 하는 입장에서 주로 착목해 왔던 것은 노동자계급과 노동자를 둘러싼 실질적인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발돋움을 하기 위해 지원하는 내용을 찾고자 하였고, 그런 점에서 인노대가 주요한 자신의 교과목으로 했던 부분들은 지금도 연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노대의 경험을 실패라고 보는 것은 외적인 부분에서 많은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고 보고, 이 교육 자체에 대한 평가는 좀 달리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인노대가 취한 목적이나 부분적인 실험들에 대해 좀 더 깊숙이 들어가서 봄으로써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오히려 노동자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으로부터 당시 인노대 운동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싶다. 노동자생활을 둘러싼 모든 것을 노동자교육에서 담아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현실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변혁해 내고자 하기 위한 교육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교육방법에 착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교육이라는 것은 수요자의 요구에 반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떠나서는 어떠한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정작 지금 노동자들이 목말라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캐보아야 한다고 보는데, 그것을 여전히 ‘정치’라고 본다. 문제는, 정치의 과잉이 아니라, 정치의 부재라고 본다. 인노대에 들어온 학생들의 경우도 바로 그 정치에 대한 요구였다고 생각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커리큘럼이 짜여진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단 그 내용이 분파성을 떠나서 노동자계급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지만, 정치부분을 강조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보고, 앞으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 노동교육운동의 초점을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과 교육운동에 대한 관심으로 대비시켜 놓았는데,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노동교육을 바라보는 것에는 여전히 대상화의 문제가 남는다. 정치교육을 해야 한다고 보지만, 노동자에게 정치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다 보니까, 은밀한 곳에 모일 수밖에 없고, 모인 사람들은 하나의 정파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제가 보는 노동교육이라고 했을 때는 노동자의 지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할 때, 그 지적인 요구에 대해서 견주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다양한 시도를 해야만이 그것이 교육운동 맥락에서의 노동교육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다양한 지적인 탐색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특정한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 아닌 다양한 입장을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교육운동의 맥락에서 본 것이고, 그 점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계급의식의 형성, 노동운동 지도자의 형성이 체계적인 정치적 교육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결합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자기의 정치의식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가야 하겠지만, 인노대의 경우는 객관적인 인식의 과정보다는 특정한 정파적인 교육이 두드러지게 강조된 것이 아닌가 싶다.


노동자대학의 합법화 투쟁의 의의


: 사회주의 사상을 공개화시키고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점과 사회주의 사상의 합법화는 시혜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매우 강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까 인노대의 합법화투쟁 그 자체가 우리 사회에 있어서 노동운동의 진일보의 과정이고, 중요한 국면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사상투쟁적인 부분이 매우 강한 듯 하다.


인노대의 교육과정과 교육의 효과


☑ 교육을 ‘노동자 주도’로 진행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 노동자 주도라는 것은 교육내용의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의 문제이다. 내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선택권 또는 누가 가르칠 것인가의 결정권이 노동자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됐을 때 같이 공부하자는 의미가 강해지는 것이고, 초기에는 소박하게 학습 써클 중심으로 출발하지만, 그것이 좀더 나아가면 우리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 누구를 선생으로 데려오자 하는 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을 배울 것이며, 그것을 누가 가르칠 것인가의 궁극적인 선택권은 노동자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파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그곳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고 본다. 그들이 인노대를 찾아간 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있고, 동료노동자들에 대해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좀 더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본다. 바로 인노대가 이러한 체계적인 교육을 수행해주니까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강한 욕구에서 온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 정파의식이 노동자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는 많은 거부감들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요즘같이 사람이 모이기 어려운 시기에, 작년 인노대 송년모임에 60여명이 참석했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놀랐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역시도 서로들 놀랐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스스로 포럼형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은 그간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교육에 대한 결정권을 그들에게 주고, 자생성을 가지고, 적어도 교육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노동자의 주도권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 않나 싶다.

☑ 그 당시 인노대에서 했던 커리큘럼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의 강의를 6주에 걸쳐 진행했는데 흔히 스탈린주의로 명명하는 소련 공식교과서를 주로 사용했다. 그 강의를 한 사람으로서 지금 보면 여러 만감이 교차되지만, 주로 그 시대 분위기를 반영해서 각 공산주의 그룹들, 정파들의 움직임, 전위조직 건설의 흐름들을 중점으로 학습을 시킨 것이다. 나쁜 의미로 얘기하면 주입을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주로 내부에서 쟁점이 됐던 것은 사회변혁 논쟁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한 쟁점에 대해서 각 입장을 가진 사람을 각각 초빙해서 강의를 듣고 좀 견주어 볼 수도 있고, 공개적인 논의가 진행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점들이 폐쇄된 것은 안타깝게 생각된다. 그리고 매번 국면마다 설치되는 특강에서는 여성해방론이나 통일문제 등이 다루어졌는데, 특히 통일특강의 경우는 매우 첨예하게 부딪히는 주제였다. 그러한 다양한 논의들이 노동자들의 지적 수준이 낮은 것도 사실이지만 -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 그들에게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해주고 토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지 못하고, 매번 전투가 벌어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빠른 시간 안에 빠른 효과를 얻어내야 하는 필요에 의해 진행되었다.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깨우친다는 점이 다소 오해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분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 투쟁을 비껴나서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투쟁의식이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 투쟁에 무매개적으로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겪는다 하더라도 주체적인 판단들에 참여할 수 있는 좀더 열린 공간들이 마련되지 못한 한계를 가진 것이 아닌가 싶다. 다분히 군사적인 편재 속에서 동원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노동자 교육을 누가 맡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커리큘럼을 짜는 문제, 운영의 문제 등에 노동자가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인노대를 졸업한 분들이 지금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떻게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실사조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인노대 출신들 중에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것은 인노대 출신들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노동운동의 조건이 그러했다는 점을 전제하는 것이다. 인노대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 교육의 내용이나 방식 등 어딘가에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지울 수 없다. 운동을 삶으로 전환시켜 내는 교육이 되지 못한 점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본다.


: 인노대에 대한 기대감은 애초부터 매우 높았다. 그러나 실제 기대와는 다른 과정으로 진행되면서 그런 부분들이 더욱 더 꼬인 것이 아닌가 싶다. 선진노동자, 전위조직의 주체인 노동자를 기대했지만, 막상 온 사람들은 노조간부 일부와 실업자도 있었고, 체계적인 공장노동자라기보다는 소규모 영세업체의 노동자들이 많았다. 애초의 전위적인 노동자 양성을 위한 기대와는 안맞는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현장과의 괴리감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다.


☑ 80년대 운동에서 70년대의 과정을 내용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70년대의 관성의 무게가 작용했다고 할까? 그것을 질적으로 비약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들을 확보하지 못한 한계라고 보여진다. 물론 단절의 역사도 보이지만, 연속의 역사였다고 생각한다. 발제문 중 한국노동교육운동 약사에서 80년대를 노동교육의 ‘다양화 시기’라고 지적하셨는데, 80년대는 차라리 정치지향의 시기가 아닐까, 오히려 다양화하는 것이 축소된 지형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도 든다. 유형을 나누는데 있어서 능력지향, 경제지향, 정치지향이라고 하면 차라리 더 정확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인노대 활동을 둘러싼 평가의 관점


☑ 머리말에서 교육운동적 차원에서 인노대의 합법화 투쟁을 살펴보고자 했는데, 그 관점 중의 하나가 외부적인 시각이 아니라, 그 집단 내부의 교육에 대한 시각과 논리에 대해 평가를 해보고자 한 것 같다. 하지만 마무리 평가 분석에서는 오히려 내부자의 시각에서라기보다는, 외부적인 시각에서 평가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글에서는 교육운동적 차원에서의 의의라고 한다면, 기존의 교육질서 속에서 소외되었던 노동자들의 알 권리를 부각시킨 것의 의미 이외에는 새로운 교육질서의 맹아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매우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속에서 새로운 교육질서를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이 무엇이었고, 그 고민들이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가 하는 점들이 밝혀졌을 때 내부자적인 시각에서 그 운동의 형성과정을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내부라는 의미는 교육학적인 평가라는 뜻으로 쓴 것이고, 관찰자로서의 인노대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인노대 구성원들의 목소리에 바탕을 둔, 즉 해석학적인 평가를 조금 더 했다면, 인노대에 대해서 좀더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졌을텐데 매우 부족하고 그 점을 반성한다. 본문 중에는 많은 인용이 있지만, 결론에서는 긍정적인 부분이 사상의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 뿐이어서, 당시 활동하신 분들에게 죄송하다.


☑ 발제자께서 인노대를 평가하는 것 중에서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 운동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교육이었다는 점, 그들이 인간으로서 객관적 측면의 노동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점인 것 같다. 노동자교육론 내부에 보면 계급의식 형성론 등 교육운동의 핵심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러한 맥락에서 풍부하게 인노대 교육의 내용과 방식이 평가되지 못한 한계가 있는 듯 하다. 토론의 뿌리는 다양한데, 발제자께서 기반하는 논리가 있어서 논의를 끌어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 좀 더 인노대를 볼 수 있는 이론적 근거로 인노대가 애초에 하고자 했던 것에 맞추어진 분석틀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동자의 계급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했는데, 이런 목적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안되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평가가 됐다면 좀 더 풍부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제기인 것 같다.


☑ 인노대가 1∼4기까지 진행되면서 내부에서 다양한 반성과 토론, 변화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과정이 좀 더 대상과 실시자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방향, 교육대상이 자기실현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관점이나 초점이 변화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5기에 가면 이미 활동이 접힌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논의들이 이루어지는데, 초기의 교육방식과 많이 달라진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이 초기에는 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하는 점들이 평가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노동교육의 개념보다는 노동자 정치교육의 틀거리를 가지고 보면 좀더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감히 말하자면 그것은 교육학의 한계인 것 같다. 노동자 정치교육에 대한 관심이나 논의는 충분히 공부되지 않은 상태여서 매우 부족하다. 계급의식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가? 경제적 의미나 정치적 의미만으로 계급의식을 말할 수 있겠는가? 정치와 교양의 결합관계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인간으로서의 포괄적인 삶의 의미를 담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계급의식이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일반적인 흐름을 놓고 본다면 정치나 경제적인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면을 포함한 의미에서의 계급의식을 형성해야 하는데, 인노대의 경우는 다분히 정치지향적이었다. 인노대의 경우는 그람시적 투쟁보다는 레닌의 투쟁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런 시각에서 대안적 헤게모니의 형성과정으로서 인노대를 바라본 연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 인노대에 참여한 분들이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 어떠한 어려움과 갈등이 있었는지, 그 이후 삶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인노대의 교육경험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 그럼으로써 이 시대의 노동교육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고자 했지만 사실 부족한 점이 많았다. 단, 느낀 것은 노동자계급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점을 볼 때, 집행위원들의 경우는 체계적인 노동교육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하였다. 물론 인노대가 참가자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계기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노동운동에 헌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노동현장에서 경험이 없는 분이나 일용노동을 하고 계셨던 분들은 그것을 머리 속에서는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생활과 결합시켜 생활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본다. 지금도 당시 참여했던 분들을 만나면 노동운동을 하겠다, 정치조직(정당)이 필요하다, 정치운동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빼놓지 않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은 그러한 생각과는 많이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계신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인노대의 한계, 또는 그 시대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가지는 초기 인노대가 인노협이라는 대중조직과의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과정을 보면서 노동교육에 대한 관점, 내용과 방법에 대한 관점의 차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인노협에서 인노대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가 노동운동의 지도자는 체계적이고 단기적인 교육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장활동, 노조활동, 노동운동 속에서, 체계화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삶의 논리와 방식, 운동의 논리를 가지고 있고, 그런 부분들을 정형화하고 정리하는 것이 노동교육이지, 사상체계에 맞는 정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 현재 노동교육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남은 과제라고 본다. 의식있는 노동자, 행동하는 노동자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체계적인 교육이 어떻게 매개할 것인가 하는 부분들은 이후 연구과제로 남는 것 같다.


인노대 활동에 대한 평가의 의의


☑ 인노대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으로서도 내부에서 많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애초의 의도대로 하지 못하였다. 노조와의 조직적인 연계를 맺으면서 조직적으로 학생을 수급하고, 이들을 조직적으로 현장으로 배치하지 못한 한계가 존재하고, 또한 그것은 관점의 차이이기도 했다. 즉 노동자교육에 대한 관점, 대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 등이다. 인노대가 해산결정을 내리게 되는 시기의 객관적 조건을 볼 때, 92년 그 당시는 숫자만 놓고 보더라도 사민청 같은 경우, 89년 당시 100여명이 오던 강좌에 4명이 와서 앉아 있고, 인천 민중대학의 경우 등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조건에서 교육방식에 대한 나름대로의 모색이 있었지만, 사실 인노대의 연장선에서 그런 교육은 회복 불가능의 상태였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노대의 교육경험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교육체계를 갖추든가, 새로운 교육을 모색해야 했었다.

또한 인노대의 3주체, 즉 노동자학생과 집행위원, 지도위원을 일컫는 말인데 그 중 가장 헌신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 그룹은 집행위원회였다고 볼 수 있다. 교육내용과 교육방식에 있어서 이 3주체간에 많은 갈등과 차이가 존재했다.

차이와 갈등의 측면에서 좀 더 본다면, 노동자 학생, 집행위, 지도위가 현실 속에서는 노동자, 활동가, 지식인이었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존재조건들과 활동의 정서가 보여주는, 그리고 인노대를 바라보는 관점들에 있어서 내부적인 통일을 이룰 수 없었던 측면들이 좀더 짚어졌으면 한다. 어쨌든 노동교육운동사 내지는 노동운동사에서 이 운동이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의 자리매김에 앞서, 관계했던 한 100여명의 사람들이 80년대 후반과 90년대의 사회 속에서 비조직화된 그러면서도 암묵적인 집단으로 존재했었고, 이들에 대해 90년대 이후 사회 속에서 분석해 보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것이 될 것이라고 본다. 교육과정에서 이들이 경험한 다양한 현실과 교육 이후에 자신의 삶의 변화, 유지의 동력 등… 교육이라는 것이 교육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변화하고 좀더 바람직한 인간으로 바뀌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의미가 하나의 사례로서 짚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교육운동의 사례는 아니지만, 역사분석을 하는데 있어서는, 예를 들어 영국의 한 지방의 역사를 맑스주의에 입각해서 2∼300년 동안 추적한 연구내용이 있는데, 이의 경우도 그런 식으로 추적하는 것이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본다.


☑ 노동교육이 일반교육에 비해 지닌 특수성이 있는 것 같다. 한 해에 한 190번 정도의 강의를 나갔던 시기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격감하고 있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인노대도 자리하고 있다는 측면과, 노동자교육의 특성 중에 이미 경향적으로 조직되어 은밀하게 교육이 진행된다는 점을 짚어야 한다. 또 한편에서 노동교육이라고 했을 때, 이 글에서는 3주체 중에 학생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지식인들의 대대적인 이전이 이루어지는 반란의 시기에 그러한 이전의 장소로 인노대가 자리매김되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대학원생들이 대거 이전해 오고, 앞선 지도위원들의 경험과 새로운 문제의식을 접목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이러한 연구성과가 나온 것이라고 본다. 바로 그러한 지식인들의 이전과정이 평가에서 당연히 포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집행부의 경우 당연히 조직적 관계가 매우 강고했는데, 그 자체를 한계로 본다면, 결국 진공 속에서 운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끊임없는 체포의 위험 속에서 헌신한 집행부들의 자기 규정력, 이후 활로, 모색들을 추적해 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본다. 그 집행부가 어떤 노선을 가지고 그것을 강제하려고 했다는 말은 사실 하나마나한 얘기가 될 것이다. 전체 운동지형 속에서 왜 그들이 그런 운동을 했고, 그러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왜 그 운동이 파산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지난날을 볼 때 왜 즐거운 기억보다는 좀 이상한 기억들로만 축적되어 있는가 하는 것까지 심층적으로 다루어 볼 문제인 것 같다. 인노대는 여전히 그러한 문제를 다루는데 중요한 프리즘이다.


: 교육학이라는 것이 사회학적인 배경을 업고 있지만, 최근의 교육학은 사회학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한다. 그러다 보니까 집행부에 대한 평가가 전체 분위기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교육학적인 입장에서 보다보니까 한 부분으로 치중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적 논리를 가진 교육학적 평가는 나름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 모이고, 어떤 이유로 흩어졌는가, 그리고 그것이 이후 사회 속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 즉 지식인과 노동자와의 관계를 계속 추적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노대를 통해 본 이후 노동교육과 노동교육 연구의 방향

☑ 교육학적인 입장을 전제한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되짚어보자. 왜냐하면, 노동교육을 일반 교육학에서 접근하는 개념으로 똑같이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것인가? 어떤 개념을 설명할 때, 그 개념을 설정하는 준거는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이나 노동교육이라는 개념에 내포된 어떤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태생 자체부터 기존의 교육학적인 입장에서만 접근할 수 없는 어떤 특수성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에는 노동교육이 부르주아 입장에서 탄생하여 이것을 노동교육 이론 쪽에서 받아들이고, 활용하고, 개념화한 것인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노동교육을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그 활동이나 형태, 성격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에서 접근한다면 논쟁의 지점을 좀 더 명료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교육학적 관점에서만 바라봤을 때, 배제되거나 드러나지 않는 어떤 점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노대에 대해서 할 말은 많은데 그러한 한계 때문에 쟁점이 형성되지 못하는 것 같다.


: 더욱 더 느껴지는 것이 노동교육운동사를 연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노동교육이라는 용어상의 맥락이 노동운동에서 유래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70년대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 야학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야학의 뿌리를 캐보면 상당히 교육운동적 요소가 있다고 본다. 노동교육이 가지고 있는 개념과 의미가 노동운동적 의미만으로 해석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 사회주의의 테제부터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 형성과 그들이 어떻게 사회주의자로 되어 가는가 하는 일련의 과정을 원론적 차원에서 염두에 두면서, 식민지 시대부터 사회주의자들이 형성되고 이들이 노동운동과 결합하려는 역사는 계속 진행되어 왔다. 30년대의 노동자교육의 커리큘럼을 보면 레닌의 책읽기 등 좀 더 실무적인 것이었고, 선진노동자들의 경우는 코민테른의 문건을 읽기만 했던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코민테른의 노선들이 당시에는 모범답안이었던 것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그들이 느꼈던 한계와 봉착 지점들, 일제가 우리를 지배했던 엄혹한 상황 속에서 느끼는 모순들을 추적해 온다면 노동교육이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맞물려 오는 과정을 정리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신의 역사적 소명을 깨우친 지식인들이 어떻게 헌신해 가고, 전위조직과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가 하는 점들을 연구한다면 소중한 보고(寶庫)가 될 것이라고 본다.

또 한편 1930년대에 보면, 선진노동자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야학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소년, 부녀자 등 부문별로 나누어 했던 교육활동들이 있었는데, 교육하시는 분들이 노동운동사를 같이 학습하면서 전체운동과 맞물리는 교육운동, 교육운동으로만 떼어서는 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를 함께 연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 노동자들도 지적인 욕구가 있다는 점에서 교육학적인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하셨는데, 노동자들의 지적 욕구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일반 교육학이나 현재의 제도교육현실에서 얘기하는 지적 욕구와 이들이 배우고 싶다는 욕구는 매우 다를 것이고, 따라서 현실에서의 노동교육에 대한 논의는 매우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오히려 노동교육에서 ‘배운다’는 것,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나중에 교육학내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식으로 접근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무엇을 배우고자 했고, 왜 배우려고 하였는지, 기존 제도교육의 관점과는 어떤 괴리점이 있는가를 밝혀내는 것이, 가르치는 작업과 배우는 것과의 괴리나 또 가르친 후에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 교육의 효과의 차이 등도 볼 수 있고, 이것은 꼭 노동교육에서 뿐만 아니라, 제도교육의 실패도 밝힐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교육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좀 더 주체화시키는 과정인데, 노동교육이 그런 부분을 매우 첨예하게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의 제도교육은 실패였고 새로운 모색을 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보여지는데, 역동적인 삶의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교육이 그것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교육이라는 것은 어차피 여성을 여성으로서, 노동자를 노동자로서, 청소년을 청소년으로서 하나의 집단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시대적 요구에 맞게 키워내는 작업인 것인데,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을 밝혀주는 하나의 모델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조건과 어떤 과정을 거치고,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가 하는 메카니즘이 제도교육에서는 매우 경직되고 문제의식이 살아있지 않다면, 노동교육은 그런 역동성을 보여주면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에서 일반 교육학에 대한 전반적인 논쟁에서 노동교육이 주는 시사점이 매우 크다고 본다.


남는 문제들


☑ 사회주의자는 소수이고, 노동자 대중은 다수이다. 그리고 노동자대중의 의식은 지배계급에 침식되어 매우 불균등한 조건에서 소수의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채널로 선전과 선동을 두고 있는데, 선전은 몇몇 소수의 사람들에게 풍부한 자산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그러한 선전의 차원에서 교육을 도구화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운동이라는 것도 전체 변혁운동에 종속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선전의 메카니즘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과 긍정적인 면들을 밝혀내고 선전과 교육과의 관계규정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한 때 교육활동을 선전의 의미와 구분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 개념 정의가 분명히 되었으면 좋겠다.


☑ 당시 인노대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는 교육학적인 관심과 방법론이라는 측면보다는 전체 변혁운동 속에서 교육선전을 고민하였고, 그렇게 교육을 한 것이다. 그러한 점이 분석하는데 전제되어야 한다. 일반 교육학에서의 분석틀을 가지고 분석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하나의 분석틀일 수 있다. 각각 다른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가지고 분석하는 것이 또 다른 측면에서 그 운동을 다시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자리였다.

집행위도 그렇고, 참여했던 사람들도 그렇고, 그 당시 교육선전에 대한 고민은 많이 했다. 원전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교육운동의 경험들을 발췌해서 공부했고, 제도교육과 노동자교육의 관계 등에 대해 당시 수준에서 검토했었다. 그러나 창조적 계승의 문제를 볼 때, 당시의 커리큘럼이 그 당시에는 유효했는데, 이후에는 그렇지 않은 것인가, 문제는 없었는가 하는 전면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전의 교육에 대해 체계적인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9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되는 요즘의 노조교육의 경우를 포함하여, 80년대 말 좌파진영에서 교육된 것과 요즘 진행되는 교육과의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한편 이론으로 나오는 것과 그 이론이 교육되고 선전되는 것은 각각 나름대로 자기 정형성과 자기 운동성을 지니고 있어, 바로 일대 일로 일치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점들이 철저하게 분석되지 못하고, 전혀 다른 교육방식이나 내용들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당황스럽다. 이론적으로는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역량들이 있으나, 교육선전된 부분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이론을 가져다주면 이것이 그대로 교육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노동교육운동이나 변혁운동에서의 교육선전에 대한 의식과 실천의 일천함이라고 보고, 따라서 이러한 연구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라고 본다.


☑ 교육은 여전히 의식화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인데, 그 전달방식의 문제는 남는다. 일방적인 주입은 아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역으로 탈정치, 자생성에의 추종이어서도 안된다. 교육학적으로 본다면 교육이란 배운다는 것과 가르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연 이 시대에 ‘희망’의 내용이 있는가? 분명한 것은 노동교육이 많이 축소되면서 실종된 것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금 수준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결국 우리 몫으로 남는 과제이다.

한/노/정/연

1997-10-01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4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