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과 좌파운동 21세기 사회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
현장에서 미래를 제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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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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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과 좌파운동
남구현 / 연구원,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혁명을 완수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왕왕 혁명 직후 그들이
했던 행위들의 의미를 몰랐으며, 스스로 수행했던 혁명이 그가
하려고 했던 것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보아 왔다.
헤겔은 이를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일컬었는데, 이 아이러니를
피해간 역사적 인물들은 거의 없었다.” Engels, Engels an Vera
Iwanowna Sassulitsch in Genf, MEW 36, 307쪽. 엥겔스의
구절은 1885년 당시 러시아의 혁명적 정세 속에 누가 불길을
당기든지 간에 - 예컨대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음모가 조직을
제창하였던 블랑키스트들이 대중의 혁명적 에너지가 폭발하도록
하는 도화선의 역할을 했던 것처럼 - 혁명적 폭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자기가 의도했던 것과는 무관하게 혁명의 도도한
물결 속에 혁명의 승리로 귀결할 것이라는 맥락에서 쓰여 졌다.
모순이 점증하는 사회 경제적 배경에 의해 혁명이 진전되면서
혁명은 자기의 길을 찾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실패가 세계사적인 사회주의의 실험의 실패로 각인된 지금,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실험을 주도했던 볼셰비키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단지
엥겔스가 썼던 당시에는 행위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혁명의
승리가 그 귀결점이라면, 지금은 혁명의 실패가 그 결과라는
점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엥겔스가 행위자들의 의도를
뛰어 넘는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해 언급하려고 했다면, 역사의
아이러니는 어차피 현실 역사는 의도되어진 대로 진행될 수는
없다는 식으로 잘못된 노선을 정당화하는 의미에서 해석되어질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빚어낸 사회 경제적 배경에 대한
분석이 요청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한편 맑스는 1848년 2월 혁명의 패배를 분석하면서 패배를
통해서만이 과거의 잘못된 관점이 극복되어질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이 패배 속에 좌절한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좌절한
것은 혁명전으로부터 전통적으로 이어 받은 잔재로서, 사회적
관계가 아직 첨예한 계급대립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은 결과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2월 혁명 이전에 혁명정당이 극복할
수 없었던 인물들, 환상들, 관념들, 계획들로서, 2월의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일련의 패배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Marx, Die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40
bis 1850, MEW 7, 11쪽) 잘못된 노선에 대해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는 동일한 오류을 범하지 않아야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들어가며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아직도 쟁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등장하던 초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자본주의의 모순 그 자체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쟁점은 이론적 이데올로기적인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순에 가득 찬 구체적인 현실을 바꾸어 내야만 하는 절박한
현실 운동적 필연성에 기초하여 제기되어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초기에 등장하던 시대에는 산업 노동자들이
사회계급으로 등장하고 당시의 지배계급이던 부르주아지에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점차 증대하는 자본주의적 모순과 이
모순을 지양하고자 노동자 계급이 전개하였던 현실 운동 속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운동의 지표로서 제시되었다. 지구적
수준에서 자본주의가 전일화된 지금의 시기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형태로 증대하는 모순에 의해 자본주의의
대안체제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념이
아니라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서 그 존재 근거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주의/공산주의와 관련된 논의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존재했으나 이미 현실성을 상실한 체제, 또는 우리가 고수해야
하는 사상 이념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과 모순을 지양하기 위한 현실 운동으로서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된 현실에 적합한 형태의 새로운 사회주의/공산주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기 위해서는 새로이 변화된 조건 아래
이제까지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은 자본의 지구화,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의해 자본의 모순이
적나라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시기이다. 점차 저하되는
이윤율에 의해 자본의 투기적 성격은 강화되고 있으며,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도는 증가되고 있고,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이윤의 사적 독점 사이의 모순은 첨예하게 증대되고 있다.
자본의 축적조건의 악화와 함께 신자유주의 지배 전략이
세계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시장, 효율성,
무한경쟁으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가 시대의 언어가 되었으며,
자본의 승리가 전세계적으로 선포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안녕을 고하는 시기에 역설적으로 증대된 모순의 결과 노동자
민중의 문제는 다시금 최대의 이슈로 등장하였으며, 대량 실업의
장기화, 노동/생활 조건의 악화 등 모순의 증대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주체들에 의해 저항과 해결을 모색하는 운동이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금 시기의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내적 모순이 첨예화된
결과이며, 이러한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모순의 완화로는
해결 안되고, 자본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의 지양이
해결책이다. 신자유주의가 점차 열악해지는 자본의 축적조건에
상응하여 민영화, 노동조건의 악화 및 복지삭감 등 군살빼기를
중심으로한 자본의 새로운 축적 전략이며 케인즈주의적
개입국가에 대한 역사적 반동을 의미한다면, 신자유주의를 단지
다른 축적 전략으로, 예컨대 사민주의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신자유주의의 극복과 함께 자본주의적
모순 자체가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국경과 나라를 불문하고 전세계 각지의 노동자 민중이
겪고 있는 지금의 질곡은 오직 자본주의적 모순의 지양에
의해서만 해결되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이미 선언적 수준에서
분명히 할 수 있다고 본다. 자본의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착취와 모든 종류의 억압의 폐지, 이와 함께
계급 자체가 사라지는 무계급 사회로의 이행은 필연적이며,
해방적인 노동자 계급 정치의 핵심적인 구성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무계급 사회로의 전망을 상실하지 않은 채 지구적인
수준에서 모순의 지양을 가능케 하는 전략 전술의 제출은 이제
역사적 필연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몇가지 주요한 쟁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과 좌파운동에 대해 살펴본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본
지구화로 표상되는 시대, 노동자 운동이 계급적, 정치적,
지구적으로 대응하고, 지금의 모순을 지양하고 새로운 대안
사회를 건설해야하는 전략 전술을 발전시켜야하는 지금의
시기에, 이를 가능케 하는 노동자 계급 정치의 필요성이 논의의
배경이 될 것이다.
2. 사회주의/공산주의, 이행기 사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용어는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어 어떠한
맥락에서 사용되는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질 수 있으며,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용례와 관련하여서 보면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공상적 사회주의/ 과학적 사회주의, 개량적
사회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국가 사회주의/ 시장 사회주의 등
여러 사회주의 분파를 통칭하는 의미에서 사용되기도 하며
이때에는 사회주의의 개념이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범주로
이해되어 공산주의까지 모두 포괄한다.
한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용어는 서로 구분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맑스는 스스로를 과학적 사회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로 구분하면서 이를 공산주의로 일컫는 한편,
자본주의의 모순이 지양된 사회를 공산주의 사회라고 지칭하였다
(공산주의자 연합, 공산당 선언, 고타 강령 비판, 자본론에서의
공산주의 사회 등). 레닌 역시 4월 테제에서 당시 볼셰비키가
내걸고 있었던 사회민주당이라는 당 이름을 공산덩으로 바꿀
것을 요청하였다. 4월테제에서 레닌은 당의 강령을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입장, 국가에 대한 입장과 코뮨 국가에
대한 요구, 최소강령의 수정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바꿀 것을
요청하면서 당의 이름을 공산당으로 바꿀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 이유로 사회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사회주의를 배반하고
부주주아지에게 투항하였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Lenin, Über die Aufgaben des Proletariats in der
Gegenwärtigen Revolution, LW 24, 6쪽.
이후의 역사에서는 공산주의 인터에 대해 개량적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인터를 건설한 바 있다. 현실 역사에
등장하였던 이와 같은 용어법에 따르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서로 지향점이 다른 정치 세력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 역시 분명하지는 않다. 현존 사회주의의
공산당에서는 공산주의 용어의 독점하여, 현존 사회주의의 공식
노선만을 공산주의로 부르고 여타의 노선들을 배제하였다.
당파성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계급적 당파성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에 대한 당파성으로 협소하게 해석되었고, 국가
사회주의 노선 외의 풍부한 논의들에 대해서는 공산주의의
이름을 못 붙이도록 하는 경향까지 있어 왔다. 트로츠키는 이에
반발하여 제4인터를 건설하면서 소련을 국가 자본주의로 규정한
바 있으며, 트로츠키스트 이외의 입장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소련을 착취가 존재하고 있는 계급사회로 보고 소련의
지배자들을 신부르주아지 (스위지), 국가 부르주아지(베텔하임)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반면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본인들의
시조 가운데 하나로 맑스를 내세우고 있다. 맑스가 개량적
사회주의와 본인을 구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맑스
생가에 있는 맑스 하우스의 건립과 운영, 메가 편집 등을 독일
사민당이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단계론적 관점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용어는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가 이행기
사회를 지칭하거나 또는 공산주의 첫단계를 지칭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고 있어서, 오히려 맑스의 이행기 사회에
대한 규정이 가지고 있는 합리적 핵심은 사라지고 모호해 졌다.
‘고타 강령 비판’에서 애초의 맑스의 서술을 보면, 공산주의
사회는 - 첫 번째 단계에서부터 -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인
사적소유가 폐지되고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이루어진 사회를
지칭한다.(genossenschftliche, auf Gemeingut an den
Produktionsmitteln gegründete Gesellschaft) 여기에서
‘모든 사회구성원은 노동자’로서 자신이 노동한 만큼 자신의
노동량을 계산한 증서(화폐형태인 임금이 아니라)를 받아
소비재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타인 노동의 결과물을 사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착취는 불가능하고,
모두는 노동자로서 계급차이(Klassenunterschiede)는 사라진다.
Marx, Kritik des Gothaer Programms, MEW 19, 19-21쪽. 바로
앞에서 맑스는 사회적 총생산물로부터 1)사용된 생산수단의
대체비용, 2)생산의 확장을 위한 부분, 3)자연재해등을 대비한
예비 및 보험기금 등을 일단 공제한 후에 나머지 부분이
소비품(Konsumtionsmittel)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이 중에서도
1)직접적인 생산에 소요되지 않는 일반적인 행정비 2)학교,
병원등 사회적 필요충족을 위한 부분 3)노동불능자를 위한 기금
등을 공제한 후에 개별적인 분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공산주의 첫단계는 이미 무계급 사회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이 지양된 새로운 사회형태인 것이다. 그러나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는 일단 자본주의 사회의 지양태로서 의미를
가지며, 자본주의로부터 생겨나서 아직 자기 자신의 기초위에
서지 못하고 구(舊)사회의 흔적을 아직 씻어 내지 못한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형식과 내용을 달리하지만 부르주아적
원칙이 작동한다. 즉 ‘각각의 생산자는 -공제 이후에- 그가
사회에 기여한 만큼 돌려 받는다.’ 모두가 노동자가 됨으로써,
즉 노동자 계급이 보편계급이 됨으로써 계급은 사라졌으나,
개인들 간의 능력과 업적에 따른 차이는 남아있는 상태는 그러나
“공산주의사회의 발전된 단계에서는, 즉 노동 분업아래
개개인들을 노예적으로 종속시키는 것과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사이의 대립이 사라진 이후에는, 노동이 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활에서 첫번째로 필요로 하는 것이 된
이후에는, 개개인의 다방면에서의 발전과 더불어 그들의
생산력이 발전하고 공동의 부의 원천이 넘쳐흐르게 된 이후에는-
그 때에는 우리가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협소한 지평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이며 사회는 자신의 깃발(旗)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누구에게나 그의
필요에 따라!” 같은 책, 21쪽.
이행기 사회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사이의 과도기로서 그것의
정치 형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이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의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기가
놓여져 있다.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는데, 그
시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일 수밖에 없다.
Zwischen der kapitalistischen und der kommunistischen
Gesellschaft liegt die Periode der revolutionären
Umwandlung der einen in die andere. Der entspricht auch eine
politische Übergangsperiode, deren Staat nichts andres
sein kann als die revolutionäre Diktatur des
Proletariats.” 같은 책, 28쪽.
요컨대 공산주의는 그 첫단계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지양태로서
자본, 상품, 화폐와 함께 국가, 계급이 지양된 사회이며, 이행기
사회는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혁명적 독재의 시기인
것이다.
이후 현존사회주의 논의에서의 단계 규정에서는 1) 공산주의 첫
단계를 사회주의로 규정하고 2)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이행기로의 사회주의를 규정한 후 3) 사회주의에 이행기 사회의
내용을 담음으로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이행기 사회의
내용들이 뒤범벅이 되었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졸고 남구현,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와 이행의 문제에 대하여’,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현장과 이론 - 콜로키움 발표 논문집
1”, 현장에서 미래를 1999을 참조하라.
공산주의의 용어는 현실 역사에서 원래적 의미가 손상되었으며,
이행 전략과 관련하여 국가, 시장,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등
다양한 범주들이 내적 상관관계를 상실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의
두번째 단계가 보통 공산주의로 지칭됨으로써 먼 미래의
유토피아적인 목적지로서 이해되고,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모순을
지양하기 위한 현실 운동 속에 존재하는 공산주의적
요소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였다. 또한 이행기 사회에 존재하는
모순들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행 전략을 그것의
실패와 함께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게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행
전략의 실패를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체의 실패로 인식하게
했으며, 대안 사회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도록, 그리하여
미래를 향한 혁명적 운동의 진전을 가로 막는 역할을 하였다.
본래의 이행기 사회의 내용에 다르면, 현존 사회주의는 잘못된
이행 전략을 구사한 여러 가지 형태의 이행기 사회들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혁명적 맑스주의의 고전적 저작들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지양된 사회를 공산주의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이러한 사회의 실현을 우리 운동의 목표로 재설정해야 하며,
공산주의는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 ‘직접 생산자의
자유로운 결사체’ 라는 원래적 의미를 다시 획득해야 할
것이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기존의
용어를 사용할 경우에 단계론에서는 폐기할 것을, 둘을 대비할
때에는 사회주의는 개량적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혁명적
맑스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모두를 지칭할 때는 사회주의
진영으로 쓸 것을 제안한다. 한편 좌파운동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모든 운동을
지칭한다.
3. 국가/시장, 소유 그리고 계급
자본주의적 모순의 지양과 무계급 사회의 건설이 핵심이라고 볼
때,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철폐와 생산수단의 사회화의 의미가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자본관계 및 자본주의적
계급모순의 지양이며 이때 소유관계로 제시되었던 ‘사회화’의
의미는 재조명되어야 한다.
사회화의 의미에 대해 흔히 국유화와 등치되고 있는 이제까지의
해석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지양태로서 사회적 소유는 국가적 소유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며, 맑스는 특히 후기에 가서는 공산주의에서의
소유를 국가적 소유보다는 ‘사회적 소유’로 개념화하였다.
자본주의가 지양된 사회에서의 소유는 사회적 소유로서, 이
경우에 직접생산자들이 자유로운 연합체를 구성하여 생산의
실질적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
(Privateigentum)의 지양태는 ‘개인적 소유 (individuelles
Eigentum)’이며, 개인적 소유는 곧 사회적
소유(gesellschaftliches Eigentum)이다. “Die aus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hervorgehende
kapitalistische Aneignungssweise, daher das kapitalistische
Privateigentum, ist die erste Negation des individuellen,
auf eigne Arbeit gegründeten Privateigentums. Aber die
kapitalistische Produktion erzeugt mit der Notwendigkeit
eines Naturprozesses ihre eigne Negation. Es ist Negation
der Negation. Diese stellt nicht das Privateigentum wieder
her, wohl aber das das individuelle Eigentum auf Grundlage
der Errungenschaft der kapitalistischen Ära: der
Kooperation und des Gemeinbesitzes der Erde und der durch
dir Arbeit selbst produzierten Produktionsmittel.
Die Verwandlung des auf eigner Arbeit der Individuen
beruhenden, zersplitterten Privateigentums in
kapitalistisches ist natürtlich ein Prozeß, ungleich
mehr langwierig, hart und schwierig als die Verwandlung des
tatsächlich bereits auf gesellschaftlichem
Produktionsbetrieb beruhenden kapitalistischen Eigentums in
gesellschaftliches.” (Marx, Das Kapital I, MEW 23, 791.)
개인적 소유에 대한 맑스의 진술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진술과 함께, 개인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이라는 그 모호성으로 인해 많은 맑스주의자들을 당혹케
하였다. 그 의미에 대해 구구절절한 해석을 낳았으며, 심지어는
그런 구절 자체를 보지도 못했다고 부정한 맑스주의자도 보았다.
기존의 사회적 소유에 대한 해석을 뒤집는 반테제로 해석되어,
계획/시장의 대당구조에서 시장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소유형태로
또는 경영 민주화론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계급이 사라져 사회 구성원의 모두가 노동자이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모든 과정에 실질적인 주체로서 성장할 수
있다면 사회구성원 ‘개개인’은 모두가 ‘사회적’ 주체로서
사회의 주인이 될 것이며, 이때 개인과 사회 사이의 모순은
지양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는 계급
프리즘을 경유해서 본다면 내용적으로는 자본가 계급의 배타적인
계급적 소유로 사적인 개인의 대다수인 노동자는 소유관계에서
배제되어 있다. 현존사회주의의 국가주의적 관점에서도 노동자는
역시 소유와 실질적 생산과정에서 객체화되었다.
기존에 소유문제만을 중심으로 제출되어온 국유화 테제는
일면적이라고 볼 수 있다. 국유화 테제의 입장에 따르면
국유화는 사회주의의 핵심으로서 절대 강령이며, 시장의 도입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화를 유도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전
사회적인 관계로서 계급관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국가/시장
그리고 소유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실제 현실 역사에서의 이행 전략과 관련된 이견의 차이는
평화적으로 해소되지는 않았다. 소련은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체코의 개혁을 반혁명으로 간주하여 탱크를 보내
침공하였으며, 당시 소련의 침공에 의해 저지되었던 두브체크의
개혁은 민주주의와 시장의 도입을 그 핵심적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소련은 체코의 시장 개혁을 자본주의로 역행하는
반혁명적 상황으로 간주하였고, 체코가 자본주의로 역행하여
제국주의 진영에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침공하였다고
정당화하였다. 당시 소련의 체코 침공은 미국의 베트남 침공과
함께 다수의 지식인들이 소련과 미국을 동시에 비판하는 입장에
서게 하였으며, 이후 68 학생혁명이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 침공과 관련하여 소련 사회주의의 의미에 대한 논쟁으로서
맑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으로서는 스위지와 베텔하임의 논쟁이
있었다. 스위지는 시장의 존재는 당시에 유고에도 존재하였고,
소련과 동구권 일반이 그 도입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으므로
시장 개혁이 침공의 진정한 이유는 아니라고 보았다. 소련이
무력을 동원해 개혁을 저지한 진정한 이유는 구질서를 대변하는
노보트니와 그의 동료들을 축출하고 진행되는 개혁을 그냥 둘
경우에 같은 처지에 있던 당시 공산당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사회주의 블록이 해체될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스위지의 주장에 대해 마오주의자였던
베텔하임은 스위지는 시장관계를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하였으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적 계급관계가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박성규(편역): “사회주의
이행논쟁 - 스위지/베텔하임 논쟁”, 들녘 1989를 보라.
중국에서의 홍, 전 논쟁은 대중 봉기와 무력 충돌을 일으켰으며
(문화혁명, 북경의 봄), 소련에서도 국가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던 보수파와 시장 민주주의의 도입을 강력하게 요청하던
개혁파 사이의 힘겨루기는 탱크를 동원한 무력 충돌로 결판이
났다. 이후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우리는 소련 및 동구의 붕괴가
결국은 정치, 경제적인 문제들에 봉착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도입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흔히 국유화인가 사유화인가 하는 소유제의 문제로 논쟁이
전개되어 왔는데, 시장인가, 계획인가, 국가인가 자본인가 하는
양자 택일의 문제로 가져가서는 안될 것이다. 국가/시장의 대당
속에서는 해당 사회의 계급관계와 모순이 드러나지 않는다.
국가/시장의 잘못된 대당, 시장 맹신과 국가 물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 시장 사회주의와 국가 사회주의 사이의 선택의
문제로 가져가는 것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소위
국가실패/시장실패를 둘러싼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국가(규제) 대
시장(자율)이라는 낡은 이항대립의 틀 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단순성을 넘어서야 할 것이며, 우리의 과제는 견딜만한
수준으로 국가를 합리화하는 것, 또는 맹목적인 시장에
조절장치를 개발해 고삐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어떻게 자본의 포섭을 돌파하여 형식적/실질적으로 명실공히
사회의 주체가 될 것인가’, 그리하여 계급 ‘국가’와
자본주의적인 ‘시장’의 모순을 어떻게 동시에 지양할 것인가가
관건인 것이다. 이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국가의 소멸과
시장/상품/화폐의 지양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가 비대해지는 것을 사회주의의 발전이라고
본다든지, 또는 시장이 커지는 것이 ‘더 많은’ 사회주의라고
볼 수 없다. 시장 사회주의 전략을 채택하였던 유고의
경험에서도 우리는 시장이냐 계획이냐의 이분법에 포획되어
시장을 택했던 것을 볼 수 있으며,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당시에 시장의 확대가 더 많은 사회주의로 주장된 바 있다.
국가는 자본주의 모순이 사라지고 계급 자체가 사라지면서
소멸해 나갈 것이며, 시장은 생산 분배 소비의 제 과정이 투명해
지고, 경제적 과정이 민주적 논의와 사전 인식, 계획을 통해
진행되면서 사라질 것이다. 하나의 법적, 형식적, 기술적
수준에서의 소유 형태는 전술적인 수준에서의 고려대상이며,
계급 모순과 함께 원래적 의미의 국가 그리고 시장/상품/화폐
모두를 지양하는 이행 전략 속에서 배치되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국가 사회주의, 시장 사회주의 등 사회주의 앞에
붙어 있는 수사들은 형용 모순이다.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지양전략과의 관련 속에 고려해 볼 수
있는 소유방안은 국공유기업, 협동조합적 소유, 노동자의 직접적
소유, 국민기업 등이 있을 것이다.
국공유기업의 경우는 오랫동안 동구의 현존 사회주의와 서구의
사회 민주주의 모두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에 있어서의 최고
강령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그 자체가 사회적 성격,
계급적 성격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공공성/민주성을
강화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두가지 문제가 핵심적이다.
자본주의 틀 내에서 국가적 소유는 국가 권력의 계급적 성격에
의해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행과정에서는 노동자 계급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와 관련하여서 운영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계급의 소멸과 함께 국가도 소멸한다고 볼 때 국가적 소유의
확대가 바로 사회주의의 발전으로 여겨왔던 기존의 관점은
재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민영화 반대 공기업화'
구호는 일단은 반노동자적인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막아 내는
의미는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단순히 공기업으로 남아 있는 것이
궁극적인 해답이 될 수는 없다고 볼 때, 공공부문의 혁신/
민주적 통제의 강화/ 국가와 독점의 유착메카니즘을 해체하는
방안이 보다 구체적으로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협동조합적
소유, 노동자 소유 기업 등은 이미 하나의 구상으로서 또는 망한
기업의 자구책으로서 부분적으로 존재하고는 있으나, 전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관계의 지양전략과 맞물리지 않을 경우 하나의
섬처럼 고립되거나 다시 자본가가 소유하는 형태로 뒤집어 질 수
있을 것이다. 국민주/우리사주/종업원 지주제 등 주식소유를
기반으로 한 국민기업론의 경우는, 주식/신용관계의 발전이 자본
자체가 사회화하는 과정으로서 자본관계를 지양하기 위한
지렛대로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해볼 수 있으나, 주식
신용관계의 발전에는 자본의 자기모순이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식제도의 발전에 의해 자본 자체의
사적인 성격이 약화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사회적 성격까지
자본의 재생산 능력을 증대시키는데 활용되면서 노동을 포섭하고
위기를 관리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할 수가 있다. 또한 노동에
대한 단순한 주식분산이 오히려 사이비 주인의식, 또는 소자본가
의식을 발전시키는 데에 그치거나 주식의 집중을 통해 다시
자본화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식소유 상한 제한/ 노동조합의
집단적 직접적 소유 등의 방안을 통해 이를 방지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할 것이다. 소액주주의 힘으로 재벌 및 대주주의
횡포를 견제하자는 소액 주주운동은 자본주의의 지양이 아니라
소액 주주의 지분을 키워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경제 민주화론에서는 소액 주주가 아니라 노동조합이
주체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난다. 하지만
전사회적/계급적 노동자 운동과 분리된 채 우리 사주제,
경영참가 등을 통해서 노동자의 지분을 넓히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 경제 민주화 운동은 소액 주주운동의 노동자 버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주식 신용관계는 소유권/경영권을 매개로 노동자가 생산의
주체로 서는 관점, 전사회적이고 계급적인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의 정치력과 맞물리면서 현실 모순을 지양하고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전략 속에 판단될 때에야 만이 현실 운동
속에서 말 그대로 지렛대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지
못할 때, 주식 소유를 전제로 논의되고 있는 국민기업은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그 자체로 사회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노동에 대한 자본의 포섭기제가
되고 말 것이다.
국가인가 시장인가 또 가능한 여러 가지의 소유형태 중에 어떠한
소유형태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면 그 자체가 자본주의 모순을 지양하고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것을 담보해 주지는 않으며, 또한 어느 하나의
소유형태가 다른 소유형태를 배제해야만 가능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소유형태는 전체 사회의 계급간 세력관계,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계급의 정치적 성격 등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국가주의/시장주의라는 도그마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배타적 소유에 대한 대안 프로젝트를 현실화하는 과정,
즉 전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관계의 지양 및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소유의 문제는 배치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사회적인 계급적 정치적인 차원에서의 이행 전략의
구상이 필수적이다.
4.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독재와 이행의 문제에 대하여
레닌과 카우츠키의 논쟁을 통해 우리는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정치권력의 계급적 내용, 즉 자본주의적
계급 지배인가 프롤레타리타트의 계급 지배인가 하는 문제로
접근해야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흔히
카우츠키의 문제의식이었던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 하는
민주주의와 독재의 외적인 형태에 매몰된 논의로 변질되었고,
지배의 계급적 성격은 간과되었다. 레닌과 카우츠키의 논쟁에
대해서는 Lenin, Die proletarische Revolution und der Renegat
Kautsky, LW 28, 1918; Über "Demokratie" und Diktatur,
LW 28, 1918을 참조할 것.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외적인 형식은 사실 형식적 민주주의에
실질적 내용을 채우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오히려 더 발전된
민주주의로 나아가야하는 것이었다.(파리 코뮨의 선출 가능성,
소환 가능성, 특권 폐지)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당독재로 바뀌고, 당파성은 계급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에 대한 입장으로 협소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완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폐지로
귀결되었다. 불행히도 카우츠키 식의 인식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머무르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반대로 페레스트로이카에서는
마치 시장의 도입이 사회주의의 확대로 잘못 이해되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대통령제, 의회민주주의 등 형식적
민주주의)의 도입이 더 많은 사회주의로 주창된 경우도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관련하여 현존 사회주의에서 진행되었던
역사적 과정과 논란에 대해 보다 자세한 논의는 졸고 남구현,
앞의 책을 참조할 것.
이는 이행기 국가의 계급적 성격과 ‘민주주의’의 형식성이
혼동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행 과정에는 역사적 반동뿐만 아니라 혁명의 성과를
왜곡시키고, 열매를 가로채는 찬탈(Usurpation)의 문제가
발생한다. 반동이 아니라 찬탈이 문제라는 점은 계급의 문제로
볼 때에는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노멘클라투라, 쁘띠의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존 사회주의의 지배계급은
부르주아지인가, 이와 관련하여 당 관료, 노멘클라투라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란 문제와 관련하여, 현존 사회주의의
지배관계는 자본관계를 매개로하지 않으며, 정치권력의 우위
아래 정치와 경제가 통일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존 사회주의의
지배계급을 부르주아지로 보는 관점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자본주의로 볼 경우에는 이행기 사회로서
현존 사회주의의 특징을 표현해 주지 못한다. 자본주의 아래의
계급과 굳이 비유하자면 오히려 부르주아지 보다는 쁘띠
부르주아지와 유사하다.
프롤레타리아트혁명의 진행과정에 부르주아지이외의 계급에
대해서 노동자 계급이 투쟁해야할 수도 있는 가능성에 대해
엥겔스와 레닌은 놀라운 통찰력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엥겔스는 일찍이 “그것은[혁명은] 무엇보다도 민주적인 헌법과
함께 직접 또는 간접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를
수립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인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직접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가 가능할 것이다. 인민의 다수가 프롤레타리아트 뿐 아니라
소농 및 소시민으로 구성된 프랑스와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간접적으로, ... 이는 아마도 두번째의 투쟁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는데, 그 경우에도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Engels, Grundsätze des Kommunismus, MEW 4,
372-373쪽.
라고 쓰고 있다. 상대적으로 후진지역인 러시아에서의 혁명
이후 레닌 역시 쁘띠 부르주아적 요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쁘띠부르주아적인 혼란의 요소(이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러시아의] 혁명에서 농촌의 쁘띠부르주아적 성격과
후진성, 그리고 반동적인 전쟁의 결과 때문에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가 소비에트에도 그 자취를 남길 수밖에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소비에트와 소비에트권력의 조직을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일해야만 한다. 소비에트 성원들을
‘의원님들’, 또는 관료로 변형시키려는 쁘띠부르주아적인
경향이 존재한다. 우리는 소비에트의 모든 성원들을 실제의
통치사업에 끌어들임으로써 이런 경향과 싸워야 한다.([ ]안은
본인이)” Lenin, Die nächsten Aufgaben der Sowietmacht,
LW 27, 263-264, 쪽.
당, 국가, 소비에트 등 국가 권력/정치적 대중권력조직과
노동조합 등 대중조직과의 관계에 있어서 당은 정치 조직으로
작동해야 하며, 무계급 사회로의 전망 속에 해방적인 계급
정치를 끝까지 밀어 붙이는 조직으로 위치지워져야 할 것이다.
당에 의해 직접 지배되는 국가는 국가 물신주의, 또는
노동조합이 직접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경제주의의 문제를 나을
것이다. 당은 정치조직으로서 국가의 노동자 민주주의의 관철,
행정, 회계 업무 등이 이행의 과정에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전략을 제시하는 단위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현존
사회주의의 실패의 경험을 통해 본다면 이때 관료주의의 타파,
독자적인 특권 계급의 형성 방지, 다양한 계급들의 움직임을
전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포착하여 이행을 위한 전략 전술의
개발하는 것이 핵심적인 관건이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몰락하는 과정에
‘국가’ 영역의 관료화, ‘시장’과 관련된 정책의 실패, 중간
계급의 무리한 해체 등과 함께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노멘클라투라의 등장 등이 그 실패의 요인이 되었음을 보았다.
앞에서 진술한 국가의 소멸, 상품/시장/화폐의 지양을 가능케
하는 이행전략의 수립은 계급 정치 영역에서도
강구되어져야한다. 이때 직접 생산자 계급이 자본에 의한 형식적
포섭과 함께 실질적 포섭을 극복하여 사회를 운영하는 실질적
주체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전략이 구상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행기 사회와 이행기 국가의 문제는 남아 있는 계급들, 역사적
반동, 찬탈자들로부터의 방어, 새로운 형태의 계급투쟁, 그리고
무계급 사회로의 전망이라는 이행 전략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새로이 조망되어야 할 것이다.
5. 나가며
이 글에서는 기존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을 검토하면서
무계급 사회로의 이행 전략이라는 관점에 입각해 1) 자본주의
사회/이행기 사회/공산주의 사회와 관련된 맑스의 논의에 기초해
현존 사회주의를 잘못된 이행 전략을 구사한 이행기 사회로
보아야 하며 2) 개인적/사회적 소유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갈 것과
기존의 협소한 국가/시장의 대당 구조 속에서 양자 중 택일하는
식으로 소유문제를 협소하게 사고하지 말고 이행 전략이라는 더
큰 틀 속에서 다양한 소유 형태를 고려해야 할 것이고 3)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당’독재로 변질하면서 혁명의 성과가
노멘클라투라, 당관료 등에 의해 찬탈되어질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원래의 민주주의의 ‘완성’(파리
코뮨)의 관점에서 새로이 조망되어야 할 것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논의는 그러나 사회주의/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
요청되는 먼 미래의 일, 또는 언제인가 실현되어야 하는 기획의
수준에서 이론적으로만 논의해야하는 사안이 아니며, 긴박한
현실 운동에서 요구되고 있는 사안이다. 자본 지구화,
신자유주의 세계화, 노동 유연화 등 자본의 공세가 지구적으로
또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금의 시기에 진행되고 있는
운동에 주는 시사점은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 유연화의 결과 증대된 비정규직의 문제는
노동자운동이 계급운동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며, 계급적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복원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노동자 운동이
무계급 사회로의 전망을 상실하고 경제적 이해관계에만
매몰된다면, 잘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의 삶의 질은 향상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는 간과되고
자본의 분할 지배전략은 유효하게 관철될 것이다. 이는
경제위기의 극복전략과 관련하여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담보로
기존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의
의도에 대응하여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투쟁이
단지 기존의 질서 속에서 ‘살아 나갈 수 있도록’, 또는 ‘삶의
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수준의 투쟁에 머무르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신자유주의 지배 전략의 세계화는 모순의 지구적이며
전방위적인 확산을 가져왔다. 자본의 공세는 이제 생산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교육, 문화, 의료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지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경제
자유구역 반대 투쟁이나 한미 FTA 반대 투쟁에서 볼 수 있듯이
투쟁의 영역도 전통적인 제조업 뿐 아니라 환경, 인권, 의료,
농업 및 서비스로 확장되고 있으며, 스크린 쿼터 반대 투쟁에서
볼 수 있듯이 영화와 같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노동자의 생존권 확보에서
출발하여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의 전체 사회적
모순의 지양을 가능케 하는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법, 제도 개선에서 출발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복지, 교육, 환경 등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경제주의의
문제는 경제투쟁에서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의 투쟁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이를 이행의 관점에서 배치함으로써 극복되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내에서’, 또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다양한 전술의 개발이 요구되는데,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양하고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전략 속에 이러한 전술들이 배치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적인 전술과 관련하여서는 선거 전술을 용인하는
한편 합법주의를 넘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전술을 동시에
발전시켜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생존권 투쟁과 소유권,
경영권을 둘러싼 경제 영역에서의 개량적 투쟁들의 전술 구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자유주의의 유행과 함께 나라와 국경을 불문하고 지구적인
수준에서 노동자 계급의 노동/생활 조건이 악화되는 한편 사회
양극화 경향이 확대되면서 농민, 빈민 등 민중의 대다수가 고통
받고 있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여 안녕’의 구호 대신에 다시
계급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여성, 환경, 평화
등으로 신좌파적 문제 영역이 확장되면서 거꾸로 잊혀져 갔던
‘사회적’ 영역이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되었다. 민중,
다중으로의 계급의 확장과 더불어 노동자 계급이 사회적
주체로서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반세계화 운동의
확장과 함께 지구적인 수준에서 ‘계급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해방이 깃발에 쓰여 지게 되었다. 인민
혁명(Volksrevolution), 노동자 농민의 동맹, 계급적 연대의
전통은 노동자 해방과 함께 장애인, 여성, 이주 노동자 등 억압
받고 착취당하고 차별받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간 해방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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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2 23:4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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