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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는가?

현장에서 미래를  제27호
고원





부르주아민주주의의

과거, 현재, 미래





한국사회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는가

고    원

?

한국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의

미래는 존재하는가

김 세 균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의 투쟁, 택시투쟁 등 고용불안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용안정과, 경제민주화,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있었다. 예년보다는 분명한 슬로건으로, 또한 고용안정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구호로 제창되었으나, 역시 현장투쟁과 대선투쟁을 결합시키기에는 부족한 현실이었다.

노동현장에서는 대선투쟁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 방향뿐만 아니라 분위기조차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대선문제 역시 노동자의 정치실천에서 비켜갈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이번호 특집 ?부르주아민주주의의 과거, 현재, 미래?에서는 대선 그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한국에서의 ‘부르주아민주주의’의 발자취와 억압적 권력 재생산의 기초, 그리고 앞으로의 ‘부르주아민주주의’의 가능성 여부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제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정치행동에 기본적 준거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특집 1 ?한국사회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는가?는 한국의 경험에 비추어 현상황을 평가한 글로 필자는 그 검토 시기를 87년 이후로 잡고 있다. 87년 7~9월 투쟁으로 치열한 계급투쟁이 전개되어 91년 5월 투쟁으로 그 정점을 맞이 했지만 여기서 노동자 계급이 패배함으로써 그 이후의 한국사회는 ‘계급역관계의 심한 불균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제한적으로도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나아가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 건, 민중민주주의 건 투쟁으로 획득한 것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자고 당부하고 있다.

특집 2 ?한국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의 미래는 존재하는가?에서 필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정치란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지배를 전사회적으로 관철시켜 나가는 정치라고 정의하면서 지금의 한국사회를 독재적인 부르주아정치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87년 이후의 과정은 ‘외면적인 진보속에 내면적 반동의 증대’로 특징지울 수 있기 때문에 ‘민중통합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을 어렵게 만든다고 전망하고 있다.

더불어 15대 대선은 진보진영의 대부분이 후보전술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지만 합법주의적?의회주의적 흐름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진보진영 내부의 투쟁 역시 중요한 과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사회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는가


고   원 /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과정






1. 한국사회에 민주주의는 있는가?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부터 시작된 정치변동은 한국사회의 전반에 총체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군부독재정권은 민간정권으로 바뀌었고, 언론․출판․결사의 자유가 상당정도 보장받게 되었으며, 지방자치제가 회복되어 미흡하나마 권력의 중앙집중화가 해소되었다. 최근에는 한국정치사에서 최초로 선거에 의해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강력한 조짐도 보이고 있다. 변화는 정치사회의 수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생산활동의 측면에서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지시를 축으로 하던 경제운용의 방식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 속에서 노동조합의 활동 자체가 부정당하던 현실은 기본적으로 사라졌다. 문화적으로도 사람들의 소비패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 ‘삶의 질’에 관한 문제가 중심적인 과제로 대두하였으며, 이에 따라 개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이 모든 변화들이 8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변화들을 한국사회가 ‘민주화’된 결과라고 해석한다. 설사 이런 평가에 조금 인색한 사람들도 ‘제한적’ 혹은 ‘절차적’이라는 접두사를 붙여 ‘제한적 민주화’ 혹은 ‘절차적 민주화’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남은 과제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공고화하느냐’라든가, ‘형식적 민주화를 어떻게 실질적 민주화로 전화시키는가’가 문제의 초점이 된다.

그러나 6월 민주항쟁으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회의와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한다. 특히 노동자․민중의 처지에서 볼 때, 그러한 의구심은 더욱 강력하게 증폭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지배’라는 고전적 정의를 굳이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민주화가 됐다고 한다면 뭔가 생활이 이전보다 안정되고 국가에 대한 참여의식과 정체감이 높아져야 할 텐데,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짙은 소외감과 생활에 대한 불안정감만이 더욱 거세게 뒤덮여 오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민중들은 80년대의 정치변동이 가져온 현실의 결과에 깊은 배신감을 느끼면서 과거의 권위주의에 오히려 향수를 느끼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최근 들어 이미 하나의 문화적 유행어가 되어버린 ‘박정희 신드롬’은 지배세력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산된 조작물이기에 앞서, 민중들 스스로의 자생적인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하다. 거기에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지금, 내노라 하는 보수정당의 후보들에 의해 표만 되면 공작정치의 주범이건, 부정비리 주범이건 상관없다는 식의 서로 모셔오기 경쟁이 벌어짐으로써 민주주의의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정치학자는 문민정부가 표면적인 개혁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가족’과 ‘붕당’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한국정치의 전(前)근대성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기도 한다.1) 문민정부의 사인화(私人化)된 정치, 정치적 의사소통 구조의 폐쇄성이야말로 문민정부가 기실은 “박정희주의의 문민적 아류”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처럼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여러가지 왜곡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군부독재의 퇴장,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게임의 보장, 표현권의 확대 등 전체적으로는 정치적 자유와 개방이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는 사실이 현 지배체제를 국가권력에 의한 강권적 억압과 행정통제를 특징으로 하는 구(舊)지배체제와 무작정 동일시할 수 없게 하는 까닭이다.

오히려 우리는 한국정치가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확대와 더불어 전(前)근대적 요소들이 구조적으로 온존․재생산되는 모순적 과정들을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얼마전 학술단체협의회가 주최한 학술토론회에서 김상조 교수가 제기한 문제의식에 필자도 동의한다. 즉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지배이데올로기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형식논리상 신자유주의의 극복대상일 수밖에 없는 박정희가 부활하는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이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박정희 신드롬’이 득세하는 사회구조적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2) 사실 신보수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는 90년대 이후 경제정책을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의 지배논리로 정착하였다. 소위 ‘규제완화’ ‘민영화’ ‘개방’ 등으로 표현되는 ‘시장만능론’이나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90년대에 지배세력들이 발견한 새로운 지배논리였으며, 이것은 “국가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민주화’라는 이름의 동의어로도 포장되어 왔다. 그것은 정치적 상부구조 수준에서 군부독재를 해체시키고 선거공간을 개방하는 일련의 정치적 자유화와 함께 진행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지배논리는 ‘민주화’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 ‘시장논리’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민중의 정치․경제적 권리를 근본적으로 배제하고 억압하는 기제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래의 민중억압체제였던 파시즘적 군부독재가 사라지고 ‘정치적 경쟁’의 제도화가 상당 정도 진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계급적 불균형의 심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기실 ‘자유’ 혹은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개념 만큼 애매모호한 말도 없을 것이다. 인류는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 이후 수백년 동안 ‘자유’라는 개념을 놓고 논전을 벌여왔다.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그 실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한가지 분명해진 사실은 있었다. 그것은 ‘자유’가 ‘보편적 인간의 자유’가 아닌, ‘계급의 자유’라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해석은 계급적 처지와 시각에 따라 명확하게 달라지고 대립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유’를 각각 다르게 의미지우는가? 그것은 특정한 정치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계급적 세력관계의 조건이다. 그런데 부르주아적 이론가들은 민주주의 이론으로부터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계급역관계’라는 조건을 제거해 버린다. 그들은 균질적인 권리를 가진 추상적 개인․집단들이 정치적 대의(代議)체계를 매개로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제도적 과정으로 민주주의를 정의한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적 지배논리의 등장은 87년 이후 개방된 공간에서 벌어진 지배세력과 민중세력 간의 치열한 계급투쟁에서 민중세력이 패배하고만 역사적 사건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 계급투쟁의 역사란 87년 6월 항쟁으로 촉발되었고, 7~8월 노동자 대투쟁, 87년 대선을 거쳐 91년 강경대 학생 폭행치사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5월 투쟁’에서 절정을 이룬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이 계급투쟁에서 민중세력은 패배하였고, 그 패배로 인하여 창출된 계급역관계의 현저한 불균형 위에 도입된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민중에 대한 지배세력의 착취를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민중세력은 자신의 조직화된 힘을 통하여 계급역관계를 조정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정치․경제적 자유화는 민중들에게 권리를 보장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배제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민중들에게도 형식적으로 선거공간은 개방되지만 개방에 따라 민중들이 치러야 하는 희생과 비용은 엄청나게 커져서 실질적인 측면에서 민중들은 정치․경제적으로 무권리의 상태에 떨어지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 결과는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비정한 현실이었다. 노태우 군부정권이 김영삼 민간정권으로 바뀌는 순간 친재벌정책은 더욱 노골화되었고, 노동자의 임금상승폭은 ‘세계화’와 ‘국가경쟁력’이란 미명 하에 노동생산성 지수를 한참 밑도는 수준으로 잡혀버렸으며, 해고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었다. 또한 농민들은 쌀시장을 개방당해 파탄의 위협에 직면하였고, 국민 사회복지 예산지출수준은 노정권 때보다도 더 후퇴하게 되었다. 정치사회의 수준에서도 민주-반민주 구도는 퇴색하여 보수 일색화가 더욱 가속화하였으며, 제도권의 바깥에서나마 민중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던 각종 정치조직들은 국가보안법 등을 동원한 탄압에 의해 예전보다 더 매섭게 짓밟혀야 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민중들이 문민정부에 회의와 절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며 차라리 박정희 시대로 회귀하고픈 욕망을 느끼는 것은 더더욱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신드롬’은 지배세력의 종교라기 보다는 민중들이 고달픈 마음을 달래기 위한 도피성 ‘민속신앙’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민주화’되었는가? ‘제한적’으로라도 민주화되었는가? 그리고 ‘민주화’로 갈 것인가? 그 대답은 단호히 ‘아니다’라는 것이다. 90년대 한국사회에서 민중들의 정치, 경제적 권리는 ‘정치적 개방’이라는 외피로 둘러싸여 다소 개선된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계급역관계의 산물이며, 일정한 세력균형을 전제로 한다. 서구에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의 역사도 노동자·민중의 피로 얼룩진 치열한 계급투쟁의 점철과정이었으며, 자본가계급이 ‘힘을 통한 지배’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즉 민주주의란 단순히 어떤 제도적 장치의 묶음이 아니라 계급적 세력관계의 제도화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파악할 때, ‘정치적 개방’의 외피 속에서 한국의 자본가계급의 권리는 노동자계급의 권리보다 몇 배나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국가권력의 직접적 개입과 행정통제의 폭이 줄고, 이른바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신장되었지만 그 속에서의 주된 수혜자는 자본가계급과 보수언론이었을 뿐이다.

자본가계급의 부에 대한 숭상풍조가 얼마나 강렬해졌는지는 굳이 딱딱한 통계수치를 들이댈 것도 없이, 텔레비젼 드라마만 보아도 알 수 있고, 소위 ‘신데렐라 콤플렉스’니, ‘공주병’이니, ‘왕자병’이니 하는 사회 증후군들이 횡행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독점하고 있는 TV, 신문매체 등 부르주아적 언론의 힘이란 가히 말할 나위도 없다. 91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조작, 94년 박홍사태 등에서 보듯이, 부르주아적 언론들은 ‘도저히 말도 안되는 말’을 ‘되는 말’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상업주의에 의해 ‘깜짝 스타’가 제조되고 대중들은 한바탕 열풍에 휘말리며, 또 다른 스타가 제조되면 대중들은 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요컨대 한국의 부르주아들은 ‘정치적 개방’을 통하여 막강한 대중조작의 능력을 키웠다. 한마디로 90년대 한국사회는 ‘계급적 불균형의 심화’를 핵심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변동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런 속에서 어떻게 민주주의가 가능할 수 있는가? 이 속에서 어떻게 계급타협과 세력균형으로서의 민주주의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한국사회가 ‘제한적 민주주의’3)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배세력의 교묘한 변형전술을 통해 굴절되고 파괴된 지 이미 오래다. 한국의 정치체제는 파시즘적 군부독재도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에게 지금 민주주의란 없다. 설령 우리에게 약간의 민주주의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노동자․민중의 저항이 존재하는 만큼의 민주주의일 뿐이다.



2. 민주주의의 말살과 신자유주의 등장의 역사적 전개과정

   -계급투쟁의 역사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역사과정을 통해 앞서의 논의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는 김영삼 정권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등장과정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의 다차원적인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크게 지배세력과 민중세력간의 대립을 한축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자당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을 다른 한축으로 하는 중첩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같은 계급투쟁들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었다.


1) 파국적 갈등기와 민중세력의 패배

87년 6월 항쟁은 한국사회의 파시즘적 군부독재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음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6월 항쟁이 군부독재를 대신할 새로운 대안체제를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6월 항쟁 이후의 과정은 지배세력과 민중세력이 이를 둘러싸고 팽팽한 접전을 거듭하는 ‘파국적 갈등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에 출현한 3당합당은 극단적인 힘의 대결을 통해 파국을 종식하고자 하는 지배세력의 도발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도발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3당합당에 의해 출범한 민자당 정권은 출발부터 민중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였다. 3당합당을 “정책중심의 정당정치를 실현하여 당파적 이해로 분열, 대결하는 정치에 종지부”4)를 찍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강변하던 것과 달리, 3당합당 체제는 정국을 더욱 더 큰 불안과 갈등, 대결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갔다. 그것은 민중세력의 민주화 요구를 물리적인 힘으로 제압하려는 반민주적 폭거였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쓰러져야만 끝날 수밖에 없었다.

3당합당으로 국회의 공전이 계속되었고, 국회가 열려도 ‘날치기’ 통과가 다시 재현되었다. 현대중공업의 장기파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 등 90년 한해 동안 무려 30여 차례에 걸친 공권력 투입이 있었다. 그 결과 90년 한해 동안 7백여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구속되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과 학생운동 역시도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민중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재야세력들은 ‘민자당 일당독재 분쇄와 민중기본권쟁취 국민연합’(국민연합)을 결성함으로써 투쟁체제를 재정비하고, 5월 10일 민자당 전당대회를 계기로 한 ‘민자당 해체’투쟁을 상당히 성공리에 치를 수 있었다. 90년 10월 4일에는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는 양심선언을 한 가운데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래서 10월 13일에는 평민당, 민중당, 국민연합 등 5개 정당·사회단체가 보라매공원에서 보안사 사찰을 규탄하는 집회를 개최하였다. 91년 2월에는 수서비리사건이 터졌고, 이 과정에 노태우 대통령이 연루되어 있다는 강력한 의혹이 제기됨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이 비등해져 갔다. 노정권은 3당합당 이후 엄청난 물리력을 동원하여 민중적 저항을 차단하였지만 민중의 불만과 저항 또한 식지 않고 계속되어 갔다. 누적된 불만은 급기야 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姜慶大)군이 시위도중 전투경찰의 집단구타로 사망한 사건을 기화로 폭발하였다. 그리하여 이 투쟁은 5월달 내내 계속되었다.

91년 5월 투쟁은 전국에서 수십만 군중이 참여하는 폭발적인 대중투쟁으로 발전하면서 노태우 정권은 취임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대규모 시위의 치열성은 4년 전의 6월 항쟁과 비견될 만한 것이었고, 이 와중에 노정권의 살인만행을 규탄하면서 네 명이 분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시위 초기에 군중들은 공안통치종식, 내각총사퇴, 전투경찰 해체와 같은 비교적 온건한 구호를 외치다 점차 노태우정권 퇴진, 국가보안법 등 악법의 철폐, 안기부, 기무사 등 억압기구의 해체 등과 같은 전면적 민주화 요구로 발전해 나갔다. 이에 노태우 정권은 대규모의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봉쇄하는 한편, 보수언론 등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가하였다. 그들은 5월 정국 속에서 발생한 일련의 분신사건들을 재야세력들의 계획적인 의도인 것처럼 조작했다.

5월 투쟁의 양상은 6월 항쟁에 비해 훨씬 조직적이었다. 생산직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각각 노동조합별 또는 업종별로 참가했고, 재야, 농민, 교사, 전문지식인, 도시빈민 등은 자신들이 만든 조직별로 집단적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것은 91년 5월 투쟁이 87년 6월 항쟁 이후에 성장한 민중의 계급적 역량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5월 투쟁은 강도(强度)의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비조직화된 대중과 중간계급을 가세시키는 데 한계를 보였다. 중간계급은 노정권의 살인행위에 분노를 공감하면서도 투쟁을 관망하는 자세에 머물러 있었다. 5월 투쟁은 ‘노정권 퇴진’의 요구를 압도적 다수의 국민적 요구로 만들어 나가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투쟁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결절점의 구체적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여기에는 민중운동의 지도력 부재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투쟁의 지도부였던 재야세력들은 민중들의 자발적 투쟁과 상황적으로만 결합되어 있을 뿐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결합력은 취약했다.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항쟁과 달리 운동의 계급적 성격이 농후해질수록 의식적 지도력의 역할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5월 투쟁이 발발한 당시의 상황은 6월 항쟁 때보다도 사회 제세력들의 정치적 계급분화가 훨씬 더 많이 진전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사회세력들은 그에 상응하는 만큼 계급적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표출하였다. 이것이 6월 항쟁과 5월 투쟁의 조건을 차별적으로 규정하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5월 투쟁 과정에서 보수야당이 계급적 태도를 분명히 한 것도 그 예였다. 그들은 6월 항쟁과 달리 대(對)정권투쟁에 소극적이었으며, ‘노정권 퇴진’의 구호를 거부하는 태도를 명확히 보였다. 그 때문에 김대중씨는 학생들로부터 계란세례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보수야당은 민중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의 길보다는 차라리 권위주의 체제를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야세력들은 보수야당의 이같은 속성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결여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그들은 투쟁의 수위(水位)와 방향을 최소주의로 잡고 있었다. 그로 인해 민중투쟁은 자꾸 발목이 잡히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재야세력들은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5월 18일로 절정에 달한 대중투쟁을 국가권력에 대한 한차원 높은 투쟁으로 끌어올릴 지침과 프로그램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 채 방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5월 투쟁은 이 날을 고비로 하강국면을 그리기 시작했고, 양대 세력의 힘관계 추이를 저울질하던 중간계급들은 이제 ‘노정권 퇴진’의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예감하고 급속히 보수적인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노태우 정권의 ‘유서대필’ 사건 조작이 먹혀들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였다. 이를 전후하여 잇따랐던 분신은 이같은 한계 앞에 선 민중들의 절망적인 몸짓이 개별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행동을 통해 표출된 것이었다. 민중투쟁과 재야 지도부의 괴리는 왜 그들이 정치세력화에 번번이 실패하는가 하는 이유를 단초적으로 보여준다.

5월 투쟁은 결국 민중세력의 패배로 끝났다. 민중세력의 좌절은 정원식 총리의 ‘밀가루 봉변사건’으로 더욱 깊어졌다. 그 후 지자제 선거 등 일련의 부르주아적 정치일정이 순탄하게 관철되어 가는 가운데, 민중세력의 패배라는 현실은 더욱 구조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91년 5월 투쟁 이후 한국사회는 세력관계의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였다. 민중세력의 패배는 민주주의의 역행을 시도한 3당합당 체제의 존립을 가능케 해주었고, 지배세력과 민중세력의 파국적 갈등상황은 지배세력에게 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되었다. 5월 투쟁의 결과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운명을 결정짓는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5월 투쟁에서 민중세력의 패배는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로 도입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2) 지배세력 내부의 권력투쟁과 자유부르주아지의 득세

한편 지배세력과 민중세력의 치열한 대립과 맞물려 민자당정권 내부에서는 격렬한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민자당 내부의 불화는 3당합당 3개월이 지난 90년 4월부터 외부로 표출되기 시작하여 92년 5월 김영삼이 민자당 대선후보로 결정되는 시점까지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권력투쟁의 절정은 노정권 내 공안파와 김영삼계의 싸움이었다. 이들의 싸움은 지배세력과 민중세력의 대립이 격화되어 가고있는 정권의 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속에서 민자당 내 김영삼계는 민중투쟁을 자신의 권력투쟁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면서 공안파들을 축출하고 노태우정권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노태우정권에 대한 민중적 불만과 저항이 증대하는 가운데, 김영삼은 분당(分黨)의 위협을 가함으로써 주도권을 양여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민자당이 붕괴될 경우 지배체제가 파탄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지배세력들의 위기감을 자극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김영삼정권은 노재봉내각과 공안파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결과적으로 민중의 저항과 투쟁이 없었다면 김영삼의 당권장악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계의 당권장악이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자당내 권력투쟁은 노태우정권이 부르주아계급의 효율적인 지배도구가 되지 못한다는 지배계급 전반의 문제제기를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노태우정권과 재벌간에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유례없는 긴장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본가들과 부르주아적 지식인들은 구태의연한 군부독재적 지배를 유지하기엔 지배의 비용이 너무 커졌다는 데 공감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김영삼계의 승리는 바로 이같은 부르주아 사회 전반의 요구와 철저히 밀착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김영삼이 민자당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수많은 부르주아적 지식인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거개가 자유주의적 논리로 무장된 사람들로서 김영삼정권의 등장에 공훈을 세웠다. 그들은 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을 내세워 ‘작고 강한 정부’라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전략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독점 자본가들도 이런 전략에 호의적 지지를 보내며 막대한 대선자금을 제공하였다. 이제 민중세력의 계급투쟁 패배와 자유부르주아지인 김영삼정권의 등장은 부르주아들의 갈채 속에서 한국사회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시발점이었다.


3) 김영삼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국가개혁과 정치지형의 변화

김영삼정권은 등장하자마자 각종 개혁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그것은 지배질서의 합리화를 제고시키기 위한 일종의 ‘부르주아 국가의 총체적 개조’작업이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하나는 지배체제 내부의 낡은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배체제로부터 탈구된 민중들을 순치(馴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영삼정권의 개혁작업은 전자를 중심으로 먼저 이루어졌다. 우선 김영삼정권은 반부패 사정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구체제의 권력엘리트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하나회의 숙청을 통해 군부집단을 탈정치화시켰다. 또한 김영삼정권은 사정개혁작업과 아울러 정치적 대표체계의 개혁을 지향하는 선거, 정당, 정치자금 등에 관한 정치개혁입법을 추진하여 1995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리고 지방자치선거를 지방의회만이 아니라 자치단체장에게까지 확대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것은 정치경쟁의 틀을 일정정도 개방적인 구조로 전환시키는 조치로서, 독재정권이 모든 권력자원을 독점하고 배분, 통제하는 이전의 국가중심적 사회운영구조를 깨뜨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개혁조치들은 단순히 김영삼정권 일분파의 이익에 관련되는 것이 아닌 자유주의적 체제개혁의 일환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조치들은 자유부르주아로서의 이념적 기반을 공유하는 보수야당에게도 기본적인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같은 개혁의 전면화는 이후 한국정치에서 왜 민주-반민주라는 여야 대결구도가 완전히 사라지고 공식없는 합종연횡이 횡행하게 되는가를 이해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김영삼정부의 정치개혁은 파시즘적 국가기구의 핵이었던 안기부, 검찰, 기무사 등의 개혁과 국가보안법, 노동법 등에서 매우 미흡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구체제 세력들의 반발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김영삼정권의 계급적 본질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즉 그들은 자유부르주아의 이념적 지향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개혁을 추진하였고,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민중세력의 저항력이 꺾인 상황에서 김영삼정권의 개혁조치들은 단순한 자유주의적 조치가 아니라, 계급간 불균형의 심화를 조건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틀을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김영삼정권은 정치개혁 뿐만 아니라 경제개혁도 추진하였다. 그것은 군부독재를 지탱해 왔던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다는 정치개혁작업의 일환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체제전반의 개혁을 위한 필수적 전제였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하나는 국가중심적 축적체제의 산물인 각종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행정규제의 완화였고, 다른 하나는 재벌의 체질개선을 위한 경제구조의 개혁이었다. 특히 후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신자유주의적 체제개혁이란 과거의 국가 중심적 지배구조가 아닌, 자본의 헤게모니를 통해서 국가지배를 운영해 나가는 방식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권력에 의존하여 축적을 이루어온 재벌의 체질과 관행을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결코 국가개혁의 과제란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영삼정권은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는 한편, 재벌의 소유구조, 조세금융정책 등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정권의 이같은 경제개혁작업은 재벌들의 완강한 저항에 밀려 후퇴를 거듭한 끝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재벌의 체질개선 없이 민영화와 행정규제만이 대책없이 실시됨으로써 재벌은 전례없는 팽창을 이루었고, 재벌의 힘이 더욱 강화됨으로써 김영삼정권의 재벌정책은 더욱 힘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된 결과, 김영삼정권은 균형을 상실한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는 노동자․민중의 불만을 누적시켜 정권의 기초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김영삼정권은 이를 지탱하기 위해 재벌의 검은 돈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결국 김영삼정권은 재벌의 볼모가 되고 말았으며, 이는 급기야 1997년 한보사태로 불거져 나와 파탄을 맞이하고 말았다.

김영삼정권의 개혁작업이 왜 실패했는가에 대해서는 입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자체의 내적인 한계, 개혁추진 전략 상의 문제, 민중세력의 저항내용과 강도 등 다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에 관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정권의 신자유주의가 완전히 파탄난 것은 아니다. 김영삼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굴절되고 왜곡되었지만 구체제로부터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파행적인 모습으로나마 한국사회의 지배논리로 정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지배계급 스스로도 구체제로의 복귀는 원하지 않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우리 사회 전반에 지배적인 조류로 뿌리를 박았다. 그것은 김영삼정권이 한국사회에 가져온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람시(Gramsci)의 표현을 빌면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5)이다. 다만 불완전한 혁명이었을 따름이다. 김영삼정권은 한국사회에 ‘부르주아적 보수대연합’의 지배체제를 한층 더 진전시켰다. 그것은 제도화된 정치사회 전반의 보수화, 여야의 이념적 대결구도가 전면적으로 무화(無化)된 상황, 어떤 공식도 없는 합종연횡의 무정형한 모습, 진보적 민중세력의 철저한 배제로 드러난 새로운 지배질서의 제도화이다. 이는 정치적 개방과 경쟁의 자유주의적 확대와 계급간 불균형의 심화라는 모순적이고, 역설적 정치변동을 엮어낸 과정이기도 하다.

지금 김영삼정권은, 조국 잉글랜드에 찬란한 영광을 안겨주고 자신은 황야에서 비참하고 쓸쓸한 최후를 맞는 사자왕 리처드처럼, 미완의 혁명을 뒤로 남긴 채 약간은 초라한 몰골로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다시 김영삼정권의 바통을 이어받은 신자유주의 전도사가 나타날 것이며, 제2, 제3의 수동혁명이 시도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성공한다면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아니라, 반민주적 신자유주의 체제의 공고화가 이룩될 것이다.



3. 결론에 대신하여


80~90년대의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의 지배계급이 부르주아적 민주주의마저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수행할 능력의 빈곤을 교묘한 변형전술로 위장하고자 하였다. 물론 그들의 민주주의적 덕성(virtue)의 결핍이 곧 지배체제의 허약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이 보여준 고도의 변형능력을 격하시킬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수평적 정권교체, 개혁연합, 야당-운동권 연합 등 허구적인 대안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러나 이 땅에 민주주의의 진전이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세력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민중배제’의 신보수주의 정치가 종말을 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노동자․민중의 깃발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가장 올바른 길이다. 부르주아의 민주주의와 민중의 민주주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민중의 힘 속에 있을 뿐이라는 간명한 진실을 우리의 깃발 속에 새겨넣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한국에서 제2의 민주화 장정을 시작하고 있다. 비록 그 길이 멀고 험난할지라도!

한/노/정/연


1) 김영수, “한국정치의 근대성에 관한 의문,” 『현대사상 2권』, 1997년 여름, 민음사


2) 김상조, “박정희식 경제개발의 부정적 유산-사이비 신자유주의,” ꡔ박정희시대 재평가와 오늘의 한국사회ꡕ , 학술단체협의회, 1997.


3) 최장집, 『한국민주주의의 이론』(한길사, 1993)과 정대화,『한국의 정치변동:1987~1992』,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95 참조.


4) 1990년 1월 22일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3인이 발표한 ‘새로운 역사창조를 위한 공동선언’의 일부분


5) 안토니오 그람시,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수고,” 이상훈 역, ꡔ옥중수고ꡕ(거름, 1995) 부분을 참조


1997-11-01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4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