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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과정으로서의 한국의 노동자 계급정치

현장에서 미래를  제28호
김영수






노동자 정치운동의

현실과 그 가능성




‘축적과정’으로서의 ‘한국 노동자 계급정치’

김 영 수

∙

특별인터뷰

현장의 ‘정치실천단’을 찾아서

∙

‘민주노총 정치실천단’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박 성 인




지난 12월 3일 IMF 구제금융에 관한 양해각서가 체결된 이후 전체 노동운동진영은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의미, IMF 구제금융이 끼칠 영향, 이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기조에 대한 신속한 검토와 실천적 대응에 들어갔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민주노총은 지난 12월 10일 중앙위원회를 통해 예상되는 자본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향후 몇 년간 노동운동의 조건과 방향을 규정할 이 사안을 고리로 한 정세의 엄중함은 우리에게 올바른 원칙과 태도의 정립을 강제하고 있다. 산별노조로의 이행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방향과 동력 또한 이러한 정세에 근거하여 전개될 것이다.

이번호 특집 ?노동자 정치운동의 현실과 그 가능성?은 11월호 특집 ‘부르주아민주주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뒤이은 특집으로 현재까지의 노동자 정치운동의 경험과 향후 밑으로부터의 정치실천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특집 1 ?‘축적과정’으로서의 ‘한국 노동자 계급정치’?는 한국 노동자들의 정치실천을 의식과 주체형성의 축적과정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한국 노동자계급정치의 상태는 70년대 이후 노동자대중의 생존권투쟁, 정치운동 주체들의 법정투쟁, 국제적 연대운동 등을 통해 점차 사회주의 사상과 이념을 노동자대중의 보편적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특집 2 ?특별인터뷰 : 현장의 ‘정치실천단’을 찾아서?는 대선을 계기로 한 활동 중에서 주목해야할 전국의 정치실천단 중 현대중공업 설남종, 공익노련 이승원, 민철노련 서형석, 대우자동차 김성갑 등 현장의 정치실천단 단장 및 집행위원을 연차로 인터뷰하여 실은 글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현재 현장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정치실천의 내용과 15대 대선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민주노총의 활동방향 등을 있는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특집 3 ?‘민주노총 정치실천단’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민주노총의 선봉부대로서의 정치실천단이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요구에 입각하여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운동의 주체로 형성되고 있는 모습, 그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목표와 계급적 원리에 입각한 운영원칙, 위상 등도 새롭게 정립해 들어가고 있는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아직은 어린 싹으로서 애국주의, 노사정 사회적 합의에 대한 유혹 등 극복해야 할 과제도 만만치 않음을 더불어 지적하고 있다.

‘축적과정’으로서의

‘한국 노동자 계급정치’


김 영 수 / 편집위원






1. 들어가는 말


노동자 대중들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기본권리확보투쟁’을 전개하면서, 계급의식의 향상을 추구하지만, 계급의식의 향상이 곧 정치적 계급의식 혹은 혁명적 사회주의 의식의 향상과 등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질서의 폐지, 지배세력의 지배질서로부터 해방된 인간적 삶의 구현과 인간소외의 극복, 노동자 계급국가를 수립하려는 사회주의 운동세력들은 ‘사회주의 운동에서의 노동조합운동의 역할은 무엇인가? 혁명적 활동을 위한 노동자 계급의 잠재력은 무엇인가? 계급 - 노동자 정치운동 - 노동조합운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Perry Anderson;1967)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해 왔고, 사회주의 혁명투쟁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핵심적 관건으로 간주하였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계급의식 혹은 혁명적 사회주의 의식의 발전은 ‘노동조합의 핵심적 활동인 경제투쟁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지원연대’1)와 ‘노동조합주의의 전투성의 기능을 담당하는 노동자들과 혁명적 노동자 정치운동과의 정치적 상호연대관계의 강화’2)를 통해 이룩될 수 있었다. ‘노동자 대중들의 의식이 정치적 계급의식 혹은 혁명적 사회주의 의식으로 전화되는 과정은 곧 국가/자본의 폭정・억압・폭력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훈련과정’(Perry Anderson;

1978), 즉 계급투쟁의 동반 주체인 노동자 정치운동의 발전과정과 그 궤를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노동자 계급운동 역시 노동자 정치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상호연대 관계를 토대로 성장․발전하였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들의 계급의식의 향상과 노동자 계급정치의 토대도 구축․성장하였다. 우리나라의 노동자 계급정치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주객관적 조건3)의 변화에 조응하는 상호연대관계를 형성․유지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정치운동으로 표출되었는데, 그것은 1970년 전태일열사의 분신투쟁 이후 ‘계급적 의식전화운동’ ‘혁명적 전위정당운동’ ‘대중적 정치조직운동’ ‘통전적 노동단체운동’ ‘합법적 민중정당운동’ ‘대중적 계급정당운동’ 등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일정한 주객관적 조건에 조응했던 각 노동자 정치운동은 노동조합운동과의 상호연대 관계를 형성․발전시키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그러한 활동의 성과를 계급정당 건설의 역량으로 전화시키기 위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다.



2. 1970년 이전의 상호연대 관계의 다양성


한국 노동자계급의 계급정치의 역사는 결코 일천하지 않다. 한국 노동자계급은 해방이전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서의 조선공산당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역사, 해방정국하에서의 좌익정권 수립운동의 주체로서의 조선공산당과 전평의 역사, 그리고 남한 단독정권 수립 이후 독재정권 반대투쟁의 주체로서의 노동자 정치운동과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계승․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한국 노동자 계급운동은 국가/자본과의 역관계를 둘러싼 계급투쟁의 굴절과정을 거치면서 ‘누적적 나선형’적인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상호연대관계 역시 노동자 계급운동의 발전과정에 조응하는 수준에서 다양한 형태의 굴절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노동자 계급운동의 다양한 상호연대 관계는 ‘형식적 법칙성’을 담보하기보다는 계급 역관계를 규정하는 조건의 변화에 따라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무형식의 법칙성’을 담보하고 있다. 계급투쟁의 조건과 상황에 부응하는 노동자 계급운동 주체들의 상호연대 관계의 형성․발전과정을 반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1930대 중반까지 지속된 ‘정치지도형 연대형태’였다. 이 상호연대 관계는 노동자 계급운동에 대한 식민지 국가의 탄압이 유연해진 상황에서 노동자 계급운동의 태동과 맞물려 형성되었다. 사회주의 의식으로 무장화된 노동자 정치운동 세력은 선진적인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운동과의 상호연대를 최초로 형성하였으며, 노동조합운동은 태동기의 주체적 한계들을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사상적 지도・지원에 의존하면서 극복하였다.

둘째로는 1930년대 중반 이후 1945년까지 지속된 ‘현장밀착형 연대형태’였다. 이 상호연대 관계는 혁명적 노동조합주의 운동의 발전을 도모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노동자 계급운동에 대한 식민지 국가의 탄압이 강화된 상태에서 노동자 정치운동 세력의 현장으로의 잠복과 맞물려서 형성되었다. 현장으로 잠복한 노동자 정치운동 세력은 현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혁명적 의식의 형성과 발전을 위한 비밀활동을 토대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셋째로는 해방정국하에서 형성된 ‘종속적 연대형태’였다. 조선공산당운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지지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해방정국하에서의 노동조합운동은 조직형식적으로는 노동자 정치조직의 외곽조직으로 존재하면서 노동자 정치조직의 하부기관적인 성격을 띄었으며, 실질적으로는 노동조합운동의 이념, 노선, 투쟁 등을 노동자 정치운동 조직의 지도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조직인 당과 대중조직인 노동조합과의 관계가 당의 산하기관으로 설정되고, 모든 것이 당의 결정에 따라 집행됨으로써 노동조합의 상대적인 자주성이 없었다’4) 즉 형식적으로는 노동조합운동이 전평이라는 산별 상급단체를 중심으로 노동자 계급운동의 독자적 주체로서 활동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운동의 조직동원적 활동대상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는 노동자 정치조직의 소멸과 함께 노동조합운동의 소멸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넷째로는 1953년 이후 1959년까지 지속된 ‘대체의존적 연대형태’였다. 한국전쟁이 종결되고 난 이후, 노동자 정치운동을 담당하는 조직이 부재하였다. 그리하여 조직적인 차원에서 노동자 정치운동과 노동조합운동 간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해방정국하에서 살아남은 노동자 정치운동의 개별적 역량, 1950년대 대한노총의 어용성과 부패성을 딛고자 했던 노총내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가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대한노총의 중앙본부 혹은 각 연맹본부의 상근 활동가로 결합한 상태에서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상호관계를 모색하려 하였다.

다섯째로는 4․19혁명 기간 동안 형성된 ‘독립적 형태’였다. 4․19혁명이 발생되고 난 이후에도, 노동자 정치운동이 부재하였기 때문에 상호연대 관계는 형성될 수 없었다. 비록 사회대중당을 중심으로 진보적인 정치운동을 표방한 세력들이 있었지만, 노동조합운동은 이들 운동과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9년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지향하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전노협이 4․19정국하에서 한국노총과의 통합을 추진한 것도 이러한 관계를 반증하는 것이다.

여섯째로는 5․16군부쿠데타 이후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투쟁이 발생될 때까지 지속된 ‘독립분산적 연대형태’였다. 선진적인 정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정당을 먼저 구축・강화하고, 후에 노동자 계급운동의 정당으로의 통일을 지향하면서 형성되었던 연대관계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인혁당, 통혁당 등이 혁명적인 노동자 정치운동을 표방하면서 정치운동을 전개하였지만, 그러한 운동은 노동조합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 아니라 먼저 혁명운동의 지도구심을 형성하고 난 이후 노동자계급과 연계를 맺는다는 원칙하에서 전개되었다. 따라서 양 운동의 주체들은 노동조합운동과 상호연대 관계를 맺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을 추진했던 세력들은 노동자계급과의 긴밀한 관계를 토대로 노동자 계급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원칙을 설정한 상태에서 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지만, 본격적인 활동도 시작하기 전에 국가의 탄압을 받아야만 했었다.



3. 노동자 정치운동의 필요조건 형성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투쟁 이후, 국가는 ‘국가기구 동원전략, 제한적 포섭전략, 배제적 고립화전략’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전 계급적 활성화를 저지하였으며, ‘반공의식의 전국민적 내재화전략, 정권교체운동에 대한 제한적 포섭전략, 노동자 정치운동의 근거지 폐쇄전략’으로 노동자 정치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운동은 이러한 국가의 탄압전략에 대해 ‘노동조합운동의 정치성 극대화 투쟁, 제도권 야당과의 의존적 연대운동, 노동자 계급운동의 상호독립보완연대 관계의 시원적 토대 강화, 독립보완연대 관계를 토대로 한 계급주체 형성운동’으로 대응하면서, 노동자 계급운동의 발전적 토대를 강화하였다. 노동자 계급운동의 역량은 ‘기본적으로 노동자 대중들의 투쟁을 계기로, 투쟁전선에서 형성되는 연대운동의 확대를 계기로, 그리고 투쟁의 성과를 토대로 하는 계급주체의 형성과정’에서 변증법적으로 발전되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자들의 투쟁전선에 정권교체운동세력의 지지・동참을 강제하였으며, 민주노조운동과의 실질적인 연대운동을 전개하려는 노동자 정치운동의 주체형성의 조건을 강화시켰다. 노동자 대중들의 기본권 확보투쟁은 비록 비조직적이고 독립분산적이었을지라도 1970년대 초반의 종교단체의 지원연대운동과 1970년대 후반의 노동자 교육운동을 통한 계급적 의식전화운동의 활성화를 일궈내는 기본적인 토대였으며, 이를 토대로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상호연대 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노동자 계급운동의 투쟁은 제도권 야당을 중심으로 한 정권교체운동과의 ‘의존적 연대관계’도 형성하였다. 의존적 연대관계는 정권교체운동의 노동자 투쟁전선 동참으로 형성되었지만, 노동자 투쟁의 정치성 강화와 정치적 해결의 실마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동자 계급운동의 요구들이 강력하게 반영되는 과정이었다. 즉 노동자계급의 제반 이해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주체들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제도권 야당의 현실적 정치권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대 노동자 계급운동은 이러한 투쟁과정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적 권리의식의 확장에 기여하였고, 국가/자본에 대한 계급적 투쟁의 ‘필연성’을 보편화시켰다. 특히 노동자 계급운동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면 될수록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정치적 정당성을 더욱 많이 획득하게 되었으며, 정치적 파급력 역시 확대되었다. 노동자 계급운동은 연대구조의 강화를 통해 노동자 투쟁의 정치화・사회화를 일궈냈으며,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영역들을 확장시켰다.

이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통일의 조건이 형성되는 과정으로서 정치적 노동자 계급운동의 필연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노동자 계급운동은 기본적으로 노동자 계급운동의 통일적 주체로서의 계급정당운동의 필요성 인식, 둘째로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계급적 갈등구조의 정치화, 셋째로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정치적 주체형성을 전제로 한다. 1970년대가 바로 그러한 전제조건, 즉 정치적 노동자 계급운동의 발전적 조건들을 형성했던 시기였다.

먼저 노동자들은 노동쟁의의 제반 이슈들을 정치화하였는데, 이는 국가/자본의 탄압 정도와 정비례하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운동의 제반 요구들이 계급적 갈등구조의 토대로 작용하였고, 투쟁의 과정에서 계급적 갈등문제의 정치화・사회화가 진행되었다. 당시의 한 단위사업장의 노동쟁의는 전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담보하고자 하는 투쟁의 전계급적 상징성과 국가/자본의 계급적 탄압의 상징성을 담보하였다. 1970년대 전개된 노동자 계급운동의 주요 투쟁들은 계급적 갈등구조의 정치화를 일궈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성장 이데올로기에 의한 노동운동의 탄압이 가중될수록 노동운동은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고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켰기’5) 때문에, 노동운동에 대한 독자적인 정치적 엄호・지지세력의 출현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둘째로는 비록 전위적 비밀 소그룹을 중심으로 전개된 혁명적 전위정당 건설운동이었지만, 노동자 계급운동의 통일적 주체로서의 계급정당의 필요성을 복원하였다. 이들은 과거 혁명주체들의 이념성과 투쟁성을 복원하여, 정치적 계급운동의 보편화를 시도하려 하였던 것이다. 국가의 ‘부풀리기 조작전술의 측면’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인혁당 재건위와 남민전은 반정부 민주화운동을 기반으로 혁명적 노동자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투쟁을 전개하려 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노동조합운동과의 독립보완적 수준에서 전개되었는데, ‘조직건설활동’ ‘반정부 선전활동’ ‘개별적 수준의 노동자 조직활동’ ‘노동조합운동 선전지원할동’ 등을 전개하였다. 비록 활동과정에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러한 운동은 정치적 계급운동의 역사적 당위성을 지속시키려는 투쟁의 과정이었으며, 계급정치운동의 전형을 복원하려는 과정이었다.

셋째로는 비록 조직적이진 못했지만, 민주노조운동의 발전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정치적 노동자 계급운동의 주체들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면서 부당 해고된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주체로 참여하고자 하는 학생운동 출신의 선진적인 정치・조직활동가들이었다. 노동조합 활동가의 대부분은 교육활동을 매개로 한 계급적 의식전화운동, 개별적으로 진행된 소그룹 활동, 그리고 개별적인 인맥의 영향을 받았고, 선진적인 정치・조직활동가들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였다. 남한 사회구조의 변혁을 도모하고자 하는 정치적 계급주체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4.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의 원시적 토대


1987년 이전의 국가는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억압적 국가기구 동원전략으로 ‘노동자 계급운동세력 소멸정책, 제도권 야당 및 중간층을 대상으로 한 동의구조 확보정책, 노동자 정치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상호연대 관계 차단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파시즘적 지배권력의 정당성을 확보・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파시즘적 지배권력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민주진영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 계급운동은 비합법적 정파조직을 매개수단으로 정파별 연대형태 및 연대내용으로써, 국가의 노동자 계급운동 차단전략에 대응하고 정치적 선진활동가들을 양성했다. 주로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다가 해고된 노동자들이 혁명적 전위정당운동 내지는 대중적 정치조직운동의 선진활동가로 성장하였으며, ‘파시즘적 지배권력구조의 구조적 재편, 파시즘적 지배권력의 정당성 도모 및 강화, 기층 민중진영과의 대치국면기’의 국가통제정책에 대응하는 계급적 역량을 축적・발현・강화함으로써, 정파별 연대에 기초한 한국 민주화과정의 선도적인 투쟁주체로서 그 위상을 정립하였다.

민중민주진영과 노동자 계급운동진영은 파시즘적 지배권력의 정당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상태에서, ‘의존적 생존방어운동을 통한 운동역량의 보존・확대, 노동현장 참여운동을 통한 계급적 연대관계의 매개고리 형성, 계급적 연대투쟁 및 민중민주진영과의 동맹투쟁을 통한 노동자 계급운동의 대국가권력 투쟁의 강화, 노동자 정치운동 주체들의 경쟁적 출현과정에서 형성된 정치적 계급역량구축의 토대 형성, 사상이론적 연대운동을 통한 노동자 계급중심성의 확인・강화, 계급(전위)정당운동의 토대 및 노동자 통일전선운동의 토대, 파시즘적 지배체제에 대한 민중민주연대투쟁’ 등으로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위기상황으로 내몰고, 파시즘적 지배블럭의 항복조치로 국가권력 형성의 새로운 정치적 수단을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운동은 노동자 정치운동과 노동조합운동 간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연대관계의 형성으로, 1970년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즉 보다 과학적인 노동자계급운동론을 토대로 하는 계급역량으로 전화・발전하였으며, 부르주아 국가권력과의 투쟁의 정당성을 이론적・현실적으로 검증하는 주체로 성장하였고, 사회주의 혁명의 개별적・조직적 주체형성의 동력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소위 ‘팜프운동’을 통해, 남한 자본주의의 성격을 보다 엄밀하게 분석・규정하고, 그것을 토대로 투쟁의 대상, 투쟁의 주체, 계급적 동맹의 대상, 그리고 투쟁방식 등 전략전술적 과제들을 보다 과학적으로 정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즉 노동자 정치운동은 ‘계급중심성을 토대로 하는 새로운 국가권력 수립 및 권력주체의 당위성, 새로운 국가권력에 의한 노동자 계급현실의 재편, 부르주아 국가권력과의 투쟁주체 형성의 필요성’ 등을 핵심적으로 제기하였다. 부르주아 국가권력과의 권력투쟁 및 투쟁의 통일적 주체인 계급(전위)정당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노동자 계급운동 주체들의 인식의 토대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비록 팜프운동은 사상이론적 투쟁의 동력으로써 혁명적 계급(전위)정당운동을 둘러싸고 제기된 다양한 노선경쟁이었지만,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의 원시적 토대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의 원시적 토대는 일반적으로 3가지 수준에서 구축되었다. 첫번째 수준에서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사상이론적 토대의 구축 및 확산, 둘째 수준에서는 다양한 노동자 정치운동주체의 출현, 그리고 셋째 수준에서는 실질적인 계급(전위)정당 건설 및 활동이었다. 이 시기에는 각각의 수준에 해당하는 계급운동이 전개되었고, 그러한 역량을 토대로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의 원시적 축적구조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첫 번째 수준에서 전개된 시원적 토대는 70년대 한국 노동자 계급운동에 대한 한계, 즉 부르주아 국가권력 및 한국자본주의의 성격에 대한 인식의 부재와 노동자 계급운동의 주체역량에 대한 과학적 분석・평가의 부재에서 비롯된 한계의 측면에 착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남한자본주의의 성격 및 변혁운동의 전략전술적 과제를 둘러싼 남민전과 전민노련의 논쟁6)을 계기로 시작되었고, ‘팜프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운동의 주체들에게 반합법적으로 공개화・대중화되었으며, 1986년을 전후로한 학계 지식인들의 참여로 공개화・대중화되었다.

노동자 계급운동의 사상이론적 토대 구축작업은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대한 평가의 보편화, 자본주의 사회의 성격,7)에 대한 분석․평가, 한국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대한 분석․평가, 프롤레타리아 혁명론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 제기, 사회주의 사회의 상’ 등을 통해 노동자 계급운동의 역사적 필연성을 확인하고, 한국 노동자 계급운동의 구체적인 투쟁전략전술을 이론적․조직적으로 구축하는 수준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즉 이러한 토대들은 맑스­레닌의 원전과 제3세계 국가의 혁명사를 개별적・조직적으로 독해․토론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고, 남한사회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하여 1980년 5월 이후, 현장․지역의 활동가들은 현장참여운동의 과정에서 사상이론적 학습대상을 확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선진적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정치의식의 제고 및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정치적․조직적 영향력들을 키워나갔다.

둘째 수준에서의 시원적 토대 구축작업은 주로 1970년대 노동자 정치운동의 선배 활동가들이 정점이 되어 노동자 정치운동의 주체로 성장하기 위한 학생운동진영의 활동가들과 선진적인 노동자들을 비합법․반합법적 정파조직으로 묶어 세우는 과정이자,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정치적․조직적 지원활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는 노동자 정치운동의 출현, 즉 ‘전략적인 계급(전위)정당 중심론’에 입각하여 각 조직의 전술적 이념과 노선을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출현한 노동자 정치운동은 이전 시기의 노동자 정치운동과는 상당히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학생운동 출신의 선진적 활동가들만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운동의 선진적인 현장활동가들의 결합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었다. 둘째, ‘노동자 계급중심성’이 정강정책이라는 선언적인 수준에서 관철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투쟁・조직화의 과정에서 관철될 수 있도록 하였다. 셋째, 노동자 정치운동의 현장동력을 조직적으로 체계화하고, 노동조합운동과의 상호연대를 강화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넷째, 노동자 대중들의 현실적 문제들과 관련된 것들을 대국가권력투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즉 부르주아 국가권력과의 투쟁을 통해 노동자 대중들로 하여금 정치의식・계급의식이 향상될 수 있고, 계급(전위)정당의 필요성들을 현실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투쟁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셋째 수준에서의 시원적 토대 구축작업은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원칙성을 확인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즉각건설’ ‘건설연기’ ‘단계적 건설’ 등의 이견이 존재하였지만, 개별적・조직적 주체들을 실질적으로 조직화하면서 전국적인 계급(전위)정당을 실질적으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건설방식을 둘러싼 이견이 존재하고 그 역량 자체가 미약할지라도, 실질적인 계급(전위)정당 건설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즉 계급(전위)정당의 인적․조직적 토대들이 각 공장단위, 각 지구단위, 혹은 각 지역단위에서 형성・강화되었고, 이러한 토대를 중심으로 노동자 계급운동의 대국가권력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전위)정당의 토대구축 작업은 전국적인 계급(전위)정당건설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체로서의 의미, 즉 노동자 계급운동의 정치적 계급역량을 강화했다는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억압적 통제기구의 고도화, 노동자 계급운동의 사상이론적 통일의 미약, 노동자 대중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선진주체들 간의 정치의식 및 계급의식의 간극현상, 계급(전위)정당 주체들의 정치적・조직적 훈련의 미약, 재정자립성의 빈약, 계급(전위)정당 조직체계 형성의 조급성’ 등을 지적하지 않을 없기 때문이다.



5.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역량 구축을 위한 ‘선거정치의 실험’


87년 대투쟁 이후 1993년 김영삼정권이 들어서기 이전까지, 노동자 계급운동은 통일적인 ‘투쟁의 정치’와 ‘선거정치’에 목적의식적으로 참여하면서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상호분화 도모, 노동자 계급정치의 전략전술적 이데올로기의 대중화, 노동자 계급정치의 선진적 주체의 양성화, 선거정치 참여구조의 형성’ 등을 꾀하였다. 민주노조운동이 전국조직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역량을 구축하는 과정과 그 궤를 같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운동은 국가/자본의 탄압에 저항하는 ‘투쟁의 정치’를 통일적으로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통일적으로 전개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정당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계급정치의 활성화를 일궈내지 못하였다. 즉 노동자 계급운동은 노동자 계급정치의 초보적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노동자 정치운동과 노동조합운동 간의 상호통일분화의 동학을 보다 과학적으로 인식하지 못하였으며, ‘선거정치’ 참여투쟁의 전술요인을 전략요인으로 치환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1) 상호통일분화의 동학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독자적이면서도 통일적인 활동영역과 활동내용이 정립되어야만 할 조건이 형성되었다. 즉 대중운동으로서의 노동조합운동의 역할과 위상, 정치운동으로서의 노동자 정치운동의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형성된 것이다.

먼저 노동조합운동의 독자적인 주체역량의 성장이었다. 국가/자본의 집중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이었던 전노협은 1991년부터 주체역량을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과정에서, ILO공대위 형성을 주도하였고, 민주노조운동의 내적 통일성을 기함과 동시에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발전의 토대를 일궈냈다. 대중운동의 전국조직으로서 일상사업을 체계적으로 수립․집행하고,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연대통일의 구조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둘째,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의 주체역량이 구축되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데, 당시 대중적 정치조직운동을 포괄하고 있었던 전국노운협은 통전적 노동단체운동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통전적 노동단체운동은 중층적 참여방식으로 민주노조운동과 밀접한 연대관계를 형성하여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헌신적으로 복무해 왔다. 한편으로 대중조직에, 다른 한편으로 자주적 노동운동체 내지는 반합법 공개운동단체, 그리고 노동상담소를 통한 노동조합운동 지원과 지도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들은 또한 각종의 대책위원회, 투쟁위원회와 같은 임시기구를 통해 대중과의 접촉공간을 확대하고 공동투쟁을 통해 그들과의 결속을 강화해 왔었다. 또한 전노협 결성 및 사수투쟁의 과정에서 통일적 연대투쟁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주체역량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전노협이 법외노조로서의 합법성을 쟁취하고, 주체조직역량을 보다 안정적으로 구축하게 되자, 통전적 노동단체의 연대활동이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실무지원 및 정책기획 수준 이상을 넘지 못하게 되었다. 즉 통전적 노동단체는 이전까지 민주노조운동을 대신하여 투쟁동원력, 정치지도력, 조합원대중 조직화 및 의식화, 지도집행력 강화 등의 역할들을 담당하였지만, 민주노조운동의 주체역량이 구축되면서 그러한 역할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전노협 활동가의 말에 따르면, “전노협 결성 1년 동안 전국노운협 때문에 전노협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91년부터는 노동단체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업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현장의 선진노동자들에 대한 노동단체의 지도력은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수준을 극복하지 못한 반면에, 대중조직 내에서의 전노협의 지도력은 구체성과 현실성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셋째,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선진노동자들과 노동자 대중들에게 확산되었다. 노동조합운동의 지도부들과 선진적인 활동가들, 그리고 조합원 대중들이 진보적인 이념정당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개별적인 수준에서 합법적 민중정당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전노협의 중앙위원들과 단위 사업장의 선진활동가들은 개별적인 차원에서 합법적 민중정당운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조합원 대중들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적인 이념정당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였다.8)

넷째,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87년 6월항쟁의 최대 성과는 87년 대선을 시작으로 선거정치에 민중민주진영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참여구조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민중민주진영은 지극히 피동적이고 제한적인 참여구조 속에서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전개해야만 했었다. 제도권 야당과의 주체적인 결합구조조차 형성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다. 85년 2.12총선의 경우, 민중민주진영은 제도권 야당의 들러리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민중민주진영은 87년 대선부터 독자적인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고, 제도권 야당과의 결합 역시 주체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차원에서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2)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통한 실험


노동자계급은 의회주의에 매몰9)되지 않는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매개로 계급정당의 물적토대를 강화함과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의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민주노조운동과의 통일적 분화를 모색․단행하는 과정이자, 노동자계급의 선거정치 참여역량을 구축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선거정치 참여투쟁은 곧 선거정치를 매개로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의 물적조건을 형성하는 주요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억압하는 법・제도적 장치와 노동자계급내 참여전술의 분화라는 이중적 개입변인이 발생하고, 선거정치 참여투쟁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결과 및 평가과정과 국가의 탄압이라는 이중적 개입변인이 발생한다.

                 국가의 탄압장치       국가의 탄압


          주체변인              매개변인          종속변인

  

노동자 정치운동 + 노동조합운동

  

선거(총선,지자제,대선)

  

노동자 계급정당




                                참여전술10)               결과 및 평가


노동자 계급운동은 선거정치 참여의 법․제도적 탄압장치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87년 대선, 88년 총선, 91년 지자제선거, 92년 총선 및 대선에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전취하기 위한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전개하였다. 노동자 계급운동의 역량이 집중적으로 투여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자 계급운동의 선거정치 참여투쟁은 ‘민중민주진영의 전국통일전선조직의 결정을 토대로 한 민주노조운동’ ‘정당의 형태로 참여한 합법적 민중정당운동’ ‘선거대책본부로 집중되었던 노동자 정치운동’ 등 참여형태를 달리했지만,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조합의 정치참여 금지조항’ 때문에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지만,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통해 ‘노동자를 비롯한 전 민중의 요구투쟁을 토대로 민중의 정치세력화 적극 도모, 민중민주진영과의 연대구조 강화, 조합원 대중들의 정치의식 향상, 민중민주진영의 전국통일전선조직의 결정에 복무, 각 지노협의 조건에 따라 독자후보전술에서 범민주후보전술에 이르기까지 참여전술의 유연적 대응구조 형성’이라는 원칙하에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주요 투쟁사업으로 설정․집행11)하였다.

이와 같이 노동자 계급운동은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정기적이고 보편적인 투쟁사업의 영역으로 설정․참여하였고,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노동자계급내 대중적 공감대도 상당할 정도로 구축하였다. 또한 노동자 계급운동의 선진적 주체들은 선거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구축하게 되었고, 향후 노동자 계급정당의 주체역량의 저변을 확대․강화하였다. 1991년 광역의회 선거에서는 민주노조운동진영의 해고자노동자, 전노조위원장 및 노조간부 총 11명이 민중당 소속12)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후보로 참여하는 것 이외에 당원으로도 참여하였는데, 민중당의 경우에는 창당발기인 1,143명중 500여명이 노동자13) 혹은 노동조합운동과 밀접하게 결합했었던 선진활동가들이었고 당원은 약 2,000여명이었으며, 한노당의 경우 1992년 1월 창당발기인 대회의 발기인은 3,520명, 창당 당시 당원은 약 4,000여명14)에 달했었다.

그러나 선거정치 참여투쟁의 전술분화는 노동자 계급정당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계급정치의 통일성 강화에 주요한 질곡으로 작용하였다.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 정치운동 내부의 분화적 대응구조의 형성으로, 노동자 계급정치의 통일적 대응역량 및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의 역량을 약화․분화시켰다. 87년 대선부터 형태와 내용이 약간씩 다를지라도 92년 대선까지 지속되었고, 선거정치에 대한 노동자 계급운동의 통일적 대응을 어렵게 하는 주요 개입변인으로 작용하였다. 도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87년 대선

88년 총선

92년 총선

92년 대선

독자적 계급정당추진

독자후보

(후보단일화)

군소정당운동

합법적 민중정당운동

독자후보

의존적 계급정당연기

비판적지지

평민연가입

재야입당

범민주단일후보


그러나 87년 대선 당시부터 범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통한 민주정부 수립투쟁으로 설정한 ‘의존적 정당연기’ 전술은 기본적으로 제도권 야당과의 의존적 제휴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의 강화를 추구하였다. 선거정치 참여투쟁의 개입변인으로 작용한 참여전술문제는 아직도 해소되지 않았지만, 민중민주운동의 전국통일전선조직과의 동맹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개입변인이 발생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는 첫째, 변혁운동의 역사적 단절과 국가권력의 탄압으로 인한 노동자 계급운동의 미발달, 둘째, 노동운동을 실천적으로 지도할 사상체계 내지는 지도사상이 우리식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음, 셋째, 지도사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남한사회의 당면변혁운동의 성격을 규명하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상의 차이로까지 계속하여 나타남. 예를 들면, 남한사회에 대한 식민지성의 규정,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관계, 타계급과 보수야당에 대한 정치적 태도에 관한 문제들을 들 수 있다.15) 하지만 보다 구체적인 원인으로 전국적인 통일전선조직의 사실상의 분열, 즉 우리 운동이 가지고 있는 여러 약점, 즉 양김의 정치적 야심 및 운동권 자체의 응집력 혹은 통일성에 대한 불철저성 = 낭만성, 규율 및 민주집중제의 허약성, 명망가운동적 성격, 일부 활동가들의 부정직성, 외부공작에의 나약성, 지방성16) 등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변인의 발생으로 제도권 야당의 한계를 대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노동자 계급운동은 제도권 야당과 제휴하여 의회에 진출한 선진활동가들을 매개로 제도권 투쟁진지의 구축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이는 오히려 제도권 야당의 한계를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재야입당으로 92년 총선에 당선되고 난 이후 국회노동환경위에서 핵심적으로 활동한 한 국회의원은 ‘재야입당의 최고 한계는 기존 제도권 야당의 구조적 힘을 극복하기 힘들고, 의정활동의 과정에서 당의 결정에 따라야만 하고, 차기 공천과 당선을 위한 활동에 주력해야만 하고, 게다가 정당에 대한 노동자들의 태도가 변화한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제도권 야당의 보수적 이념성과 반노동자적 정치활동에 대한 노동자 대중들의 인식변화의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식변화의 주요 동학으로는 제도권 야당의 한계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진보성을 담보하는 ‘대체이념’의 대중적 필요성이었다. 노동자계급은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매개로 ‘대체이념’의 실현 가능성을 대중적으로 실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독자적인 선거정치 참여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권력의 수립, 진보적 민주국가의 수립, 독점재벌 해체, 실질적 민주주의 정책의 수립, 민중적 민족통일의 달성’ 등의 정강정책이 여론매체 및 유세투쟁의 과정에서 대중적으로 선전선동되었다.

계급정당 건설의 질곡으로 작용하였던 것은 독자적인 선거정치 참여투쟁의 득표결과17) 및 평가였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서 ‘정치적 자살행위에 가까운 패배’였다라는 임영일의 평가, ‘노동자계급의 고립적․즉자적․지역적 투표행태에서 드러난 정치의식의 박약’이라는 김동춘의 평가도 있지만, 이는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투표행태를 방해하는 제반요인 및 노동자 계급운동의 역사적 발전법칙을 감안하지 않고 있다. 물론 독자적인 선거정치 참여투쟁의 과정에서 ‘의회주의의 맹아라 할 수 있는 당선투쟁에 매몰, 자금력의 한계, 조직력의 한계, 유권자 대중들의 감성적 지지․지원’18) 등 많은 한계도 드러났다. 이러한 한계들은 낮은 득표율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 대중들은 고립적․즉자적․지역적 투표행태를 보유할 수밖에 없는 권력블럭의 구조속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선거정치 참여투쟁 및 혁신적․계급적 정당투표의 기회를 박탈당해 왔으며, 권력블럭의 반공통치구조 및 지배블럭의 권력분점구조의 정치적 동원대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정치는 ‘득표확대전략’으로서의 선거정치 참여투쟁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투쟁전선 유지․확대전략’ 및 ‘노동자 계급정치의 지지기반 구축전략’으로서의 선거정치 참여투쟁으로 평가해야만 한다. 더구나 민중민주진영 내에서 사표방지 심리가 대중적으로 유포되었던 점들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3.07%~6.25%의 출마지역구 평균득표율을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할 가치가 있다. 88년 총선 당시 민중당을 중심으로 한 합법적 민중정당운동의 전신이라 할 수 있 ‘민중의 당’의 전국득표율이 0.33%인 것에 비해 ‘민중당’의 전국득표율은 1.5%로 상승하였다는 점,19) 그리고 91년 지자제 선거에서의 당선사례 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1992년 대선투쟁에서 ‘전략적 독자후보전술’을 토대로 ‘노동자 계급운동의 정치적 좌파진영의 통일성을 강화하고, 보수 대 진보의 계급적 대립구도를 부각’20)시키려 했던 노동자 계급정치는 보수화의 급속한 진전과 민중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전무한 대선, 그리고 범민주 단일후보전술에 대한 민족민주운동권의 전폭적인 대중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전체 투표자의 1% 수준인 23만 7,000여명의 지지기반을 구축하였고, 계급적 대립구도 및 계급적 투쟁전선의 정당성을 강화하였다.21)

노동자계급은 선거정치 참여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들의 정치의식・계급의식에 대한 상이한 평가, 노동자・민중의 정당건설 과정에 대한 상이한 평가, 노동자계급 ‘중심성 테제’에 대한 상이한 이해, 선거투쟁의 결과에 대한 상이한 정치적・조직적 이해득실 평가, 그리고 노동자 계급정당의 적실성에 대한 인식의 차별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민족민주운동도 운동하고 발전하는 하나의 사물 혹은 운동형식이다. 그것은 당연히 대립물의 통일이고 대립물의 투쟁을 통해서 때로는 점진적․개량적으로, 즉 양적으로 발전하고 때로는 급격하게 혁명적으로, 즉 질적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민족민주운동과 반민족적․반민주적 질서=체제는 상호간에 직접적 대립․통일물이어서 끊임없이 투쟁하면서도 동시에 일정하게는 상대방을 규정해내고 있다. 상대방과의 투쟁을 둘러싸고 각각의 내부에서 대립과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87년 6월투쟁 이후, 선거정치 참여투쟁의 과정에서 발생된 일련의 논쟁 및 민족민주운동권의 분열은 민족민주운동의 질적=혁명적 발전을 이룩하는 하나의 과정임에 틀림없다. 즉 민족민주운동의 비약적 자기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과정의 주요한 표현 내지 형태의 하나였던 것이다.’22) ‘운동발전사상의 요구에 기초하여 새로운 통합을 모색해야 된다. 우선 분열을 강조하되, 그것이 분열 자체 또는 분열주의의 조장으로 이해돼서는 안된다. 분열 그 자체가 아니라 분열을 통한 통합, 분열과 통합의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23) 선거정치 참여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논쟁의 유발, 후보전술 논쟁의 유발, 후보전술에 부응하는 정치조직화 활동’ 등이 분열되는 양상으로 드러났지만, 이는 노동자 정치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통일분화연대 관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외연적 분화경쟁, 내포적 통일경쟁’을 지향하는 개입변인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6. 지속적인 ‘계급정당 건설운동’의 동학


혁명적 방식으로 부르주아 권력블럭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 노동자계급도 부르주아계급과 마찬가지로 계급정당24)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 국가권력 교체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은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인 대중투쟁만으로 혹은 노동자 정치운동의 독자적인 정당운동만으로 결코 강화되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운동은 ‘상호통일분화연대’에 기초한 계급정당으로의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영향력과 국가권력투쟁을 강화할 수 있다.25) 노동자 계급운동은 ‘대중투쟁의 정치성과 정치투쟁의 계급성’ 간의 상호전화 구조를 형성․강화하여야 하는데, 이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상호통일분화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문제이다. 대중운동으로서의 민주노조운동과 정치운동으로서의 노동자 정치운동의 발전은 상호통일분화성에 기초하는 주체조직역량의 구축을 통해 가속화 될 수 있다. 특히 계급정당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즉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상호통일분화연대에 기초한 계급정당 건설의 물적 토대구축 및 계급정당 건설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의 물적 토대26)로는 첫째,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의 심화에 따른 계급적 갈등의 일상화, 둘째, 노동자계급내 계급정당건설의 대중적 토대의 형성․강화, 셋째, 계급정당의 조직적․개별적 주체의 출현 및 성장, 넷째, 의회주의 혹은 합법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독자적인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투쟁의 통일성, 다섯째, ‘대체이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대중성 확보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적 토대는 일회적이고 단기간에 형성․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계급정당은 합법・비합법 여부 및 노동자계급 중심성의 선언 여부, 그리고 제도권 정치에의 참여 여부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정당의 대중성, 계급 중심성의 실제성, 노동조합운동과의 실질적인 결합성, 변혁적 계급주체 형성운동으로서의 정치운동’(김세균:1997)의 추진 여부에 따라 성패를 좌우한다.

이제까지 노동자계급은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운동의 발전과 함께 계급정당 건설의 동학을 지속적으로 구축해 왔다. 노동자 계급정치의 구체적인 동학으로는 첫째, 무・탈계급적 민중이념의 정치적・사상적 한계가 노동자 계급운동의 일상적인 대 국가투쟁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 둘째, 노동자 계급운동의 좌우세력의 형성과 분화의 발생, 셋째, 노동조합운동의 선진적 활동가들과 지도부들의 노동자 정치활동 참여가 보편화되는 것, 넷째, 의회주의 및 합법주의를 지향하는 제도권 정치 참여전술의 한계가 확인되는 것, 다섯째, 사회주의 사상이 보편적으로 대중화되는 것 등이다.

먼저 무・탈계급적 민중이념은 소・동구 지역의 몰락 및 합법적 민중정당운동의 과정에서 형성되었고, 그것은 시민운동을 매개로 하는 노동운동의 활성화(서경석:1991), 탈계급적인 범민주적 민중주의(최장집:1991), 노사관계의 진보적노사협조주의(김형기:1991)로 전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들은 오히려 탄압받고 있는 노동조합운동의 현실, 악화되어 가는 노동조건의 현실, 노동자 대중의 제반 계급적 요구들을 외면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거나 노동조합운동의 투쟁성을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노동자계급은 노동조건・생활조건・법적 권리조건 등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한 계급적 투쟁성만이 계급 중심성 운동을 활성화시키고, 투쟁으로 획득된 노동자들의 권리를 상실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체득하게 되었다. 특히 국가/자본의 신자유주의적․신보수주의적인 체제재편전략에 따라, 국가권력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정치’가 노동현장으로부터 부활되고 있다.

둘째로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좌우파 간의 통일분화의 조건이 형성되었다. 노동자 계급운동의 좌우파는 선거정치 참여투쟁, 계급투쟁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계급정당 건설운동 과정에서 상호통일분화적인 투쟁을 전개하였고, 투쟁의 결과를 자파운동의 조직적・정치적 헤게모니 관철력으로 전화시켰다. 물론 노동자 계급운동 내부의 좌우파 간의 헤게모니 투쟁으로 가시화되기도 하지만, 이는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축적된 노동자 계급정치의 자기발전의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동맹정치’를 재편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셋째로는 노동자 계급정치의 활동주체들이 대중적으로 양성화되었다. 통전적 노동단체운동과 합법적 민중정당운동이 발생되기 이전에는 주로 지식인 출신의 노동현장 활동가들이 노동자 정치운동의 핵심적 주체로 활동하였는데, 합법적 민중정당운동을 경험하면서 노동조합운동의 활동가들과 지도부의 정치활동 참여가 반(半)공개화되었고, 노동조합운동 내부에서도 개별적인 수준의 참여에 대해 제재27)를 가할 수 없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노동자 계급정치는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 노동현장의 선진활동가,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현장성을 토대로 추상적인 전문성을 탈피하려는 지식인들의 대중적 참여주체들을 양산함으로써, 각 사안별・국면별로 생성되는 노동조합운동의 정치적 쟁점사안 및 노동자 대중들의 투쟁에 대한 노동자 정치운동의 영향력을 급속하게 증가시킬 수 있는 동력을 형성한 상태인 것이다. 단지 노동자 계급운동의 실질적인 통일분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노동자 계급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지도구심의 부재로 말미암아, 양산된 노동자 계급정치의 주체들이 고립적․분산적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는 의회주의 혹은 합법주의를 지향하는 제도권 정치 참여전술의 한계가 대중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역량 구축과정에서 주요 질곡으로 작용하였던 제도권 정당 의존전술이 그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노동자 대중들에게 확인․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사회주의 사상과 이념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1987년 이전만 하더라도 책을 통해 맑스레닌이즘에 심취하는 것 자체도 국가보안법의 탄압대상이었다. 노동자 계급정치의 주체들은 ‘한국사회의 부당한 현실을 발견하고 이를 개선해 보려는 순수한 정열로 대학 졸업자로서의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현장에 뛰어 들어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체험하고, 노동자들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살아 왔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혹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각성을 돕기 위한 각종 교육상담활동, 정치신문 발간, 대중집회의 개최, 각종 선거에의 참여를 통한 정치적 선전활동, 합법적 민중정당 건설투쟁 등의 과정에서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통한 민중민주사회의 실현주체들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28) 즉 노동자계급은 노동자 정치운동의 활성화 과정에서, 노동자 정치운동 주체들의 법정투쟁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들의 일반 민주주의 의식의 고양 과정에서, 자본주의 체제내 사회주의 운동의 성과 및 한계들에 대한 지식인들의 사례분석들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노동자 계급운동의 국제적 연대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을 고사시키고 사회주의 사상과 이념을 노동자계급의 대중적 보편이념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의 변화를 일궈내고 있는 것이다.

한/노/정/연


1) John Kelly, [Labour and Unions], 1987.


2) James Petras, Socialist Revolution and there Class Components;1978


3) 노동자 계급운동에 대한 국가의 통제 및 노동자 계급운동의 주체적 역량, 즉 투쟁역량․조직역량․정치역량 등에 따라 형성된다.


4) 이일재, ‘1945년 해방공간의 현재적 의미’,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1997. 8월호. 37~38쪽.


5) 한국노총, ꡔ한국 노동조합의 정치활동ꡕ, 77쪽.


6) 남민전은 남한사회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무장투쟁을 통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한 반면에 전민노련은 남한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였다.


7) 조희연・박현채, ꡔ한국사회구성체논쟁 1,2ꡕ, 죽산, 1989 조희연, ‘사회구성체논쟁① ②’, ꡔ사회와 사상­80년대 사회운동논쟁­ꡕ, 한길사, 1989 등을 참조.


8) 임영일의 노동자 의식조사 총괄보고서에 따르면, 자동차, 전자, 철강, 기계, 조선의 5개 업종의 독점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의 약 48.3%가 현재 우리나라 정당들 중에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정당은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적인 이념정당의 필요성에 대해 90.7%가 인정하였다고 한다. 임영일 외, ‘독점대기업 노동자의 의식연구­생산직 노동자 의식조사 총괄보고서­, ꡔ독점대기업과 노동운동1ꡕ, 백산서당, 1991, 239­248쪽’ 또한 ‘노동자 이익 대변할 독자정당이 필요한가’라는 한사연(88년)・한국노총(89년)・한국노동연구원(89년)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생산직 노동자의 최저 84.4% 최고 92.3%가 필요하다라고 응답하였으며, 사무직 노동자의 최저 80.0% 최고 86.3% 가 필요하다라고 응답하였다.


9) 의회주의는 부르주아 정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의 게임’을 승인하자마자, ‘계급정당’을 선거연합 내지는 득표확대전략으로서의 ‘대중정당’화하는 자기파괴성을 지니고 있다. 유권자들을 계급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시민’ 내지는 ‘개인’으로서 견인시켜냄으로써, 담화의 탈계급화, 정치행위의 단위로서의 계급의 경시화, 궁극적으로 정치의 탈계급화를 초래한다. 즉 대중의 선거동원과정은 동시에 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의 해체과정으로 되고 만다. 손호철, ‘자유민주주의와 선거 -선거사회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중심으로-’, 한국산업사회연구회, ꡔ경제와 사회ꡕ, 1992년 봄, 46~47쪽.


10) 선거정치 참여투쟁에서 발생하는 주체적 개입변인은 참여전술뿐만이 아니라 조직력, 자금, 헤게모니투쟁, 활동방식, 독자적 선거참여운동에 대한 유권자 대중들의 인식 등 무수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선거정치 참여투쟁에서 주체적인 핵심적 개입변인이라 할 수 있는 참여전술은 제반 개입변인들에 대해 상당한 규정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참여전술의 분화를 주요 개입변인으로 상정할 수 있다.


11) 전노협의 선거정치 참여의 방식과 내용을 압축적으로 정리한다면 아래의 도표와 같다.

11) 전노협의 선거정치 참여의 방식과 내용을 압축적으로 정리한다면 아래의 도표와 같다.

 

91년 지자제선거

92년 총선

92년 대선

참여내용

반민자당 장외투쟁

정책개혁투쟁

노동자선거대책본부 구성, 노개투 및 조직발전투쟁

 

91년 지자제선거

92년 총선

92년 대선

참여내용

반민자당 장외투쟁

정책개혁투쟁

노동자선거대책본부 구성, 노개투 및 조직발전투쟁

    그러나 노동조합운동의 선거정치 참여투쟁은 많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조합원 대중들의 불균등한 정치의식을 고려한 참여전술, 즉 유연적 대응구조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92년 총선에서 참여전술을 둘러싼 진통을 겪지 않은 지노협이 없을 정도였고 이로 인해 대중조직의 통일성을 약화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노협공동연구팀, ꡔ전노협 6년의 역사와 활동평가ꡕ, 1995, 전노협백서발간위원회, ꡔ전노협백서ꡕ, 1997, 제2권~제4권, 참조.


12) 전교조 또는 전노협도 독자적인 후보를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민연합의 선거불참 선언으로 각 지역․지구의 자율적인 결정과 역량에 맡기기로 했었다. 전노협백서발간위원회, ꡔ전노협백서ꡕ, 1997, 제3권.


13) 민중당을 지식인 중심의 정당이었다고 평가하는 기준중의 하나는 500여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 대부분이 학생운동 출신의 노동자였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구분은 ‘현장 노동자주의 혹은 학생을 하나의 계급․계층으로 간주’하는 것에 불과하다.


14) 그러나 한노당과 민중당의 합당으로 한노당 당원의 약 50% 정도가 이탈하였다. 이는 조직의 민주적 운영문제, 조직의 통일성 문제 등으로도 볼 수 있지만, 정당운동의 역사적 일천성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조직형식의 독립, 계급투쟁의 연대”가 “계급운동의 통일”이라는 수준으로 전화할 수 없었던 노동단체운동의 역사와 긴밀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측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15) 한국기독교산업개발연구원 엮음, ꡔ한국사회변동과 노동운동ꡕ, 정암, 1989, 165쪽~169쪽.


16) 채만수, ‘필연적으로 예비되었던 분열이 전면적으로 현실화되었던 논쟁’, ꡔ80년대 사회운동논쟁ꡕ, 1989년 가을, 한길사, 129쪽.


17) 1988년 총선에서는 평민당 입당파들은 21명이 출마하여 15명이 당선되었지만, 민중의 당은 16명이 출마하여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고, 전국득표율도 0.33%였다. 한겨레 민주당은 63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전국득표율 1.4%를 기록하였다. 정관용, ‘1988년 4.26총선­한국 최초의 여소야대­’, 역사문제연구소, ꡔ역사비평ꡕ, 1992년 봄, 역사비평사, 79~80쪽. 92년 총선에서 민중당 경우 51명의 후보, 출마 지역구 평균 득표율이 6.25% 전국 득표율이 1.5%였고, 민중회의와 민정추는 각각 출마지역구 평균 득표율이 5.04%, 3.07%였다. 손호철, ‘14대 총선결과와 그 의미’, ꡔ이론ꡕ, 1992년 창간호, 164쪽.


18) 합법적 민중정당운동의 주요 주체로서 총선투쟁에 2번 참여했던 김철수는 면담에서 ‘대부분의 일반 유권자들이 선거운동본부에 찾아와서 하는 말이, 당신같이 깨끗하고 참신한 후보를 지원․지지하고 싶지만 선거운동자금을 대 줄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나를 감성적으로 지지․지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력의 한계 때문에, 이들을 조직적 지지․지원세력으로 만들 수 없었다. 현실 제도권정치 참여투쟁에서 선거자금의 문제가 제일 크게 대두되지만, 현실 선거정치의 구조적 한계와 직결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선거정치 참여투쟁을 전개한다면, 일반 유권자들의 감성적 지지․지원은 조직적․민중적 지지․지원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19)16명의 후보가 출마한 88년 총선과 51명의 후보가 출마한 92년 총선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양적으로 상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논리로만 본다면 전국의 모든 투표구에 후보를 낼 경우, 상승율의 폭이 더 커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후보 출마자의 증가에 따른 상승으로 보기 보다는 혁신적․계급적 정치운동에 대한 지지율의 상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0) 손호철, ‘14대 대선 민중운동 대응평가와 향후전략’, 1993.


21)선거정치 참여투쟁을 ‘득표확대전략’(손호철:1992)으로 평가한다면, 이러한 결과들은 지극히 열악한 지지기반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정치의 실현구조가 부재한 상태에서의, 제도권 야당에 대한 노동자 계급운동의 의존구조가 엄존한 상태에서의, 계급적 대립구조를 명확하게 부각시켜내는 최초의 대선투쟁의 결과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양적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22) 채만수, 앞의 글, 126~127쪽.


23)채만수, 위의 글, 132쪽.


24) 부르주아 계급은 국가권력의 독재성을 엄・은폐하듯이,(손호철, 한국정치의 새구상) 정당의 계급성을 대중성으로 엄・은폐하고 있다. 정당의 성격을 정당의 “주체, 주체들의 출신배경, 정강정책, 정치활동의 내용” 등으로 규명할 때, “대중정당”이라는 개념은 적합하지 않다. “대중”이라는 개념을 계급내적인 차원에서 접근, 즉 한 계급의 구성원으로서 아직까지 계급적 정체성이 허약한 주체들을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적합하다.  


25)임영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저발전 상태, 활동가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도, 그리고 계급정치 지형의 구도 및 정치사회의 자립성, 폐쇄성의 정도 등을 감안할 때, 광범위한 운동 내부적 합의에 기초하지 못한 일부 정파들의 선거정당의 결성과 선거정치에의 참여는 거의 정치적 자살에 가까울만큼 무모한 일이었다.’고 평가(1997,134쪽)하고 있으며, 정영태는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은 계급정당이 존재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노동조합의 이념적, 조직적 통합력이 유지되고 있는가 아닌가가 좌우된다.’라고 평가(1992, 173~174쪽)하고 있다.


26) 노동자정당 건설의 조건은 ‘첫째, 노동해방을 향한 사상이론적인 토대가 대중적으로 마련되어야 하며, 둘째, 그 사상이론을 현실 속의 정치투쟁, 경제투쟁과 결합하여 세워나갈 조직원의 양성 및 확보, 셋째, 노동조합 등 대중조직내에 노동자정당의 활동을 떠 받칠, 사회주의 의식으로 무장한 선진층의 형성 등을 제시하고 있다. 김명시, ꡔ전노협건설과 노동조합운동의 현단계ꡕ, 백산서당, 1989, 109~123쪽


27) 그러나 대중조직의 활동가들이 노동자 정치운동의 실질적 주체로 참여하는 순간, 대중조직의 조직력은 이완되었으며 대중활동의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노협공동연구팀(1995), 전 광노협의장의 면담자료.


28) 민변, 변론서자료집1, ‘인민노련 변론서’, 91.5.25. 229~232쪽


1997-12-01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4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