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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

현장에서 미래를  제32호
채만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채만수\현장에서 미래를, 제 32호\98-05-01\실업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


실업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주)

채만수/부소장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실업문제가 격화되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이미 지난 3월 중순 현재 실업자가 1백65만명, 실업률 8%에 이른 데다가*주1) 하루 1만명 이상의 실업자가 연일 새롭게 발생하고 있다.*주2) 이에 따라 거리로 내몰린 노숙자도 연일 무섭게 늘어나 부르주아 언론이 "이들이 '거리의 폭탄'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주3)며 그 공포감을 감추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격증하고 있는 실업에 대한 대부르주아지의 태도는 극히 분열증적이다. 한편에서는 두려움과 공포로 각종의, 그러나 그 효과는 크게 의문시되는 '실업대책들'을 발표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실업문제를 더욱 격화시키는 대(對)노동자계급 공세를 계속 강화하고 있다. 실업 문제에 대한 대부르주아지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문제의 본질과 그들의 계급적 성격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라도 실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대응은 바로 경제위기와 대량적 실업으로 그 생존권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몫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실업문제 등과 관련한 일반적 인식은 부르주아적 사고에 의해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대량적 실업의 규모, 본질, 원인 등이 과학적․주체적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개의 현실이다. 이러한 조건하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실업과의 투쟁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그 투쟁은 미로의 출구 찾기와 같은 것이 되어 자칫 불필요한 시행착오만 거듭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실제로 이미 지난해 초의 총파업에서도 그러한 시행착오가 자해적(自害的)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에 현대자본주의에 있어 실업문제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가부터 논의를 시작하자.


실업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특유한 역사적 문제

실업문제를 보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확인하여야 하는 점은 그것이 하나의 경과적․역사적 생산양식인 자본주의적 생산에 특유한 역사적인 문제라는 사실이다.
혹시, 문제를 너무나 진부하게 제기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점을 확인하지 않는 논의는 대개의 경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경과적․역사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절대적․보편적인 것으로 알게 모르게 전제하고, 그리하여 실업문제 역시 역사적으로 특유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한다. 혹은 적어도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에게 그러한 인식을 심어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하에서는, 예컨대 근대경제학이 상당한 실업률의 상태를 '완전고용'이라고 규정하면서 실업(의 크기)은 단순히 노동자 인구의 공급과 임금과의 관계에서만 결정된다고 주장하듯이, 실업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올라갈 때에만 문제로 된다. 이러한 논의 하에서는 실업문제에 대한 진정한 인식과 대응․극복의 길이 닫혀 있음은 물론이다.
인간의 삶의 절대적 전제조건은 노동이고 인간은 노동수단에 의해서 매개되는 이 노동을 통해서 자연(노동대상)으로부터 삶의 재료를 얻는데,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직접노동자는, 비록 그들이 원시공산사회의 공동체원, 고대의 노예나 중세의 농노․예농이었을 망정, 이들 노동수단 및 노동대상, 즉 생산수단과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원시공산사회에서 공동체원은 토지나 농기구 등의 생산수단에 대한, 동료 공동체원과 더불은 공동의 소유․이용자였고, 고대의 노예는 물적 생산수단과 직접적으로 결합된 그 자신 생산수단이었으며, 중세의 예농은 농기구 등의 노동수단을 소유하고 토지에 묶여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과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생산수단으로 노동을 하여, 노예나 농노의 경우 비록 착취와 수탈을 강요당했지만, 자신들의 생활자료를 획득할 수 있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는 '실업'이란, '고용'이란 것이 그랬던 것처럼, 아직 존재하지도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근대의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면 사정이 일변한다. 중세 말의 노동생산력의 발전은 거대한 사회적 격변을 일으켰는데, 바로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라는 사태이다. 즉, 과거의 예농과 수공업 장인들은 중세적인 신분적 억압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산수단과의 결합(소유)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이제 직접생산자는 그의 노동을 매개하고 실현할 생산수단을 수탈당한 무산자로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판매함으로써만,*주4) 즉 생산수단의 독점적 배타적 소유자인 자본가에 의해서 고용됨으로써만 생산수단과 관계를 맺고 자신의 노동을 매개․실현시켜 생활자료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 실업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즉, 생산수단을 독점적․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에 의해서 그 노동력이 구매되지 않게 될 때, 혹은 그 노동력이 부분적으로밖에 구매되지 않게 될 때, 그는 '실업'으로 되어서, 즉 상대적 과잉인구로 되어서 사회의 적선에 의지해 연명하든지 아니면 굶어 죽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상대적 과잉인구의 존재와 그 주기적인 증대를 자신의 '생존조건'으로 하고 있어서,*주5)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은 항상적으로 기아와 빈곤․아사를 강요받고 있고, 이는 취업부분에조차 저임금․장시간의 과도노동과 자본의 명령에 굴종할 것을 강요하는 조건 혹은 장치로 된다는*주6) 점이다.
이에 직접노동자와 생산수단의 재결합,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지양이 과도노동이나 자본에의 굴종, 그리고 실업문제를 해결하는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과제로 되는데, 그 과제의 실현은 주체적 조건․준비뿐만 아니라 객관적․물질적 조건의 성숙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실업과 상대적 과잉인구, 혹은 산업예비군

실업문제는 이렇게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의 인간의 생존조건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르주아적 관념의 '실업' 규정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부르주아지의 통계 작성에서 '실업자'란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사를 가지고 있으나 조사기간 중 수입 있는 일에 전혀 종사하지 못한 자로서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과 일시적인 질병, 일기불순, 구직 결과 대기 등 특별한 사유로 구직활동을 하지 못한 사람"을 의미하고,*주7) 여기서 '조사기간 중'이란 매월 "15일이 속한 1주간"을 의미한다.*주8) 말하자면, 다른 것, 예컨대 '경제활동의 의사'라든가 '구직활동' 등은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한 주일에 한 시간 이상 수입 있는 일에 종사하면', 그 노동시간이나 수입의 과다에 상관없이, '취업자'인 셈이다. 실제로 통계는 "조사기간 중 수입을 목적으로 한 시간 이상 일한 사람"을 '취업자'로 분류하고 있어서, 수입의 과다를 문제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언대로라면, 실제로 수입이 발생했는지 여부조차 문제삼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실업자' 규정에 의거해서 최근의 실업자 수가 1백50만이니 1백65만이니 200만이니 하고 있고, 그러한 규정에 의거해서 '실업률'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관념의 실업(자) 규정이 얼마나 실업 현실을 반영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은, 대표적 부르주아 신문인 {중앙일보}(98.4.8)의 [일용직 160만, "우린 뭡니까" - 실업대책도 근로자 혜택도 해당 무(無)]라는 제하의 아래 기사가 절절히 보여주고 있다.

용접 15년 경력의 최모(42) 씨는 올 들어 나흘밖에 일을 나가지 못했다. 석달 동안의 총수입은 32만원. 봄이 되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일감이 전혀 없어 …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 건설 일용근로자인 송모(36) 씨도 사정은 마찬가지. '… 올 해엔 한 달에 이틀 일 나가면 운이 좋은 (것).' … 송 씨 일가족 4명은 결국 하루 식사를 두끼로 줄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실업 자가 아니다. 1주일에 1시간 이상 급료를 받고 일을 했다면 실업자로 인정되지 않 기 때문이다. '직업있는 실업자' 격인 일용직 근로자들이 정부 실업대책의 사각지대 에서 신음하고 있다. 3월말 현재 일용직 근로자 수는 1백92만명으로 이중 32만명 정도만 실업상태에 있다는 게 정부의 공식 통계다. 하지만 취업자로 분류되는 나머지 1백60만명의 일용직 근로자도 극심한 불황으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실업자보다 나을 게 없다. 7일 전국건설일용노조협의회에 다르면 1백40만명의 건설 일용직 근로자들이 3월 한달 동안 일한 기간은 평균 2.8일. … 임금도 크게 떨어져 10만원 수준이던 기능공 일당이 5만원까지 내려갔고 잡부․보조원 일당은 6만원에서 3만5천 원으로 곤두박질쳤다. …
더구나 일용직 근로자의 60%가 40대 가장... 이들 1백60만 명이 4인 가족을 가 진 것으로 계산할 때 7백만 명 가량이 당장 오늘의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위 기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 달에 두 번 일 나가면 운이 좋은 것(?)'이고 '석달 동안의 총수입이 32만원' 언저리여서는 그들은 "실업자보다 나을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취업자로 분류되어' "정부 실업대책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고 있다."*주9) 이러한 '실업(자)' 개념이 당연히 '생산수단에 노동을 매개․실현하여 생활자료를 획득'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실업' 혹은 상대적 과잉인구를 파악하고자 하는 우리의 문제의식을 채울 수 없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실업' 개념을 확대하거나 보다 적절한 개념으로 대체하여야 하고, '상대적 과잉인구' 혹은 '산업예비군'이라는 개념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특유한 인구법칙을 드러내는 보다 적절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신과 가족의 온전한 생존을 위해, 즉 노동력의 온전한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생활자료를 충분히 획득하지 못하는 실업 및 각종의 불완전취업 노동자군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실제로 "상대적 과잉인구는 생각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색조로 존재한다. 어떤 노동자나 그가 반(半)밖에 취업하고 있지 않거나, 또는 전혀 취업하고 있지 않은 기간은 상대적 과잉인구에 속한다."*주10)
그런데, 그것이 과연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아무튼 부르주아적 개념의 실업자 수 및 실업률은 매월 발표되고 있음에 비해서, 과연 한국에서 상대적 과잉인구는 어떤 구조와 규모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통계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몇 가지 자료를 통해서 추산해 볼 수 있을 뿐인데, 대략 다음과 같다.
1) 노동부는 97년도의 비농전산업(非農全産業) '상용근로자' 수(잠정치)를 521만2천명으로 발표하고 있다. 또한 통계청의 {한국통계월보}에 의하면 97년도의 비농경제활동인구는 1902만4천명이고, 비농자영업주는 461만7천명, 비농상시고는 1098만2천명이다.(주11) 그렇다면 대략 342만5천명과 919만5천명 사이 어딘가의 숫자가 실업자 혹은 불완전취업자로서 상대적 과잉인구에 속한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에 비해서 97년도의 비농실업자 수는 54만명, 실업률은 2.8%로 발표되고 있다.) 2) 그런데 "97년 2/4분기 중 전체 노동자 가운데 고용계약 기간 1년 이상인 상용직은 54.5%이고, 일용직을 포함한 임시직은 45.5%로서 600만명이나 된다"는 자료도 있다. 이때 "임시직은 주로 비정규직 형태를 취하는데, 일용, 시간제, 계약직, 용역, 파견 등이 그것이다. 이런 비정규직은 늘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업무에 종사하는 경우에도 정규직에 비해 임금이 낮고 법정 휴가나 수당 등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사회보험의 적용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흔하다."*주12) 여기에 97년 2/4분기의 '실업자' 약 55만명을 합하면, 상대적 과잉인구는 대략 655만명 정도가 된다고 추산할 수 있다.3) 여기에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취업의사가 있으면서도 구직활동을 포기한 이른바 실망실업자는 20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무급 가족종사자의 수는 195만명으로서 전체 취업자의 9.1%에 이르고 있다. 또 1주 18시간 미만 취업자만도 33만명 가량 된다"*주13)는 보고를 감안해,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고 있는 '실망실업자' 200만명을 더하면, 한국의 상대적 과잉인구는 97년도(2/4분기)에 이미 855만 명 내지 1,119만명으로 엄청난 숫자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7년도의, '실망실업자'를 포함한 확대된 경제활동인구 약 2,360만명의 약36.2% 내지 47.4%를 점하는 비중이다.*주14) - 이들 거의가 모두 우리의 '실업문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실업 혹은 상대적 과잉인구 증대의 원인 (1) - 경제위기

이미 이러한 엄청난 상대적 과잉인구가 상존하고 있었던 데다가 최근 급격히 그 규모가 확대되고 그 정도가 심화되면서 이른바 '실업문제'가 핵심적인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면 왜 현시기에 실업 혹은 상대적 과잉인구가 급증하는가? 현재 실업 혹은 상대적 과잉인구가 급증하는 직접적 배경 혹은 원인은, 말할 나위 없이, 지난해 말엽부터 심각한 규모와 심도로 폭발한 경제위기, 곧 경제공황이다. "근대산업의 특징적인 생활과정, 즉 중위의 활황, 생산의 번망(繁忙), 공황, 침체라는 각 시기가 보다 작은 변동들에 의해 중단되면서 10년마다 순환을 이루고 있는 형태는 산업예비군 또는 과잉인구의 부단한 형성, 그다소간의 흡수, 다시 그 재형성에 기초하고 있다. 산업순환의 변전하는 국면들은 또한 그 자체 과잉인구를 보충하는 것이어서 과잉인구의 가장 정력적인 동인의 하나가 된다."*주15)
특히 공황국면은 직전에 극대화되었던 생산이 경련적으로 수축하는 과정으로서, 우선 극도로 낮아져 있거나 심지어 역(逆)으로 되어 있는 이윤율의 부담을 견디지 못하는 수많은 기업의 퇴출․파산에 의해서, 그리고 수요의 급격한 위축과 그에 따른 재고의 누증으로 공장의 가동률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대량의 노동자들을 유리(遊離)시키게 된다. 바로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그런데 공황의 과잉인구 생산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국면이 발전하여 극심한 화폐핍박의 시기가 지나면 자본은 새로운 기계를 충용하거나 개량하는 등 상대적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방법들을 충용함으로써 더욱더 급속히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어내게 된다.*주16)
공황국면을 통해서 자본이 이렇게 대량의 산업예비군을 양산하는 것은 잉여가치를 위한 생산으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연적인 운동이다. 왜냐하면, 번영기의 과잉생산은 동시에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과잉흡수․과잉고용이어서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하고, 이 임금의 상승이 이윤율을 저하시키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로 되기 때문이다.
즉, 자본의 자기파괴, 생산과 경쟁의 축소와 더불어 대량의 상대적 과잉인구․
산업예비군의 창출은 과잉생산으로 인해 자본의 이윤율이 극도로 저하된 결과
이고, 이윤율 회복을 위한 자본의 운동인 것이다.


실업 혹은 상대적 과잉인구 증대의 원인 (2) - 과학기술혁명

자본에 의한 '경제위기'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총파업이 한창일 때, 일부의 전투적이고 '선진적인' 노동운동 단체들은, "한국의 재벌들이 기술개발․기술혁신에는 투자하지 않고 부동산투기․재테크․정격유착에 의한 돈벌이에만 열중하다가 이제 노동자들의 초과착취를 노려 노동법을 개악하고 있다. 한국의 재벌은 노동자들의 초과착취를 기도하는 대신에 기술개발․기술혁신에 나서야 한다"는 뜻의 선전전을 아주 열심히 펼쳤다. 그리고, 누구라고 특별히 지적할 필요도 없이, 많은 '진보적인' 경제․사회학자들이 "기술개발․기술혁신이야말로 경제위기를 벗어나는 근본적인 길"이라는 주장을 폈고, 일부는 지금도 그러한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주관적이고 민중주의적인 선전으로서 우선 사실과도 전혀 다르다. 한국의 재벌은 부동산투기․재테크․정격유착에 의한 돈벌이에도 열심이고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에도 물론 열심이지만, 동시에 기술개발․기술혁신에도 열심이고 또 열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총파업을 강요했던 '신노사관계 구상'이나 그것을 구체화하는 노동법의 개정은 다름 아니라 바로 향후 '기술개발․기술혁신'을 더욱 가속화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그 신기술의 충용을 위한 노동법적 조건을 정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즉, 신기술, 새로운 생산방법을 도입함으로 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잉여노동력'을 합법적으로 폐기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기술개발․기술혁신'을 촉구하는 일부 노동운동의 지도부, 그리고 '진보적인' 학자들은, 자신들의 주관 여하에 상관없이, 개별자본의 '경쟁력' 이데올로기 및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포로로 잡혀 있어서, 신기술, 즉 새로운 생산기술의 도입이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가하는,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 이래의 논의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서두에서 간단히 지적한 대로, 자해적인 주장을 열심히 외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이 완숙한 나머지 시장의 크기가 대체로 제한되어 있거나 세계시장이 상품으로 포화되어 있고, 그때문에 경쟁이 갈수록 격화된다면, 각 개별자본은 경쟁을 위하여 더욱더 급격히 노동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데에 열중할 수밖에 없는데, 그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생산기술의 혁신․개량과 새로운 생산기술의 개발, 즉 과학기술혁명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일정량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노동자 수를 절대적으로 줄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술적 기초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리카도는 이미 지금보다 170년도 훨씬 이전에 이렇게 쓰고 있다. 즉, 기계를 충용하면 "비록 순생산물(=잉여가치, 혹은 이윤 및 지대 : 인용자) 의 가치는 감소하지 않을 것이며 그 상품구매력은 크게 증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총생산물(=잉여가치 + 임금)은 … (그 가치가) 하락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인구를 부양하고 노동을 고용하는 힘은 항상 한 나라의 순생산물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그 총생산물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수요는 필연적으로 감소할 것이며, 인구는 과잉으로 될 것이고, 노동계급은 곤궁과 빈곤의 상태로 될 것이다." 라고.*주17)
그리고,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전부는, 기계의 발명과 사용이 총생산물의 감소를 수반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이 사실일 때에는 언제나 그것이 노동 계급에 해로울 것이라는 것인 바, 이는 그들 중에는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인구는 그들을 고용할 기금에 비해서 과다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주18)
그리고 또, "노동계급이 품는, 기계의 사용은 흔히 자신들의 이해에 유해하다는 의견은 편견과 오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경제학의 올바른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라고.*주19)
물론 리카도의 이러한 견해는 맑스에 의해서 확인되고 부분적 결함이 바로잡혔다. 맑스는 "따라서 노동이 과잉으로 되는 것은 노동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기 때문이고, 이 수요는 (기계로 대표되는 새로운 생산기술의 충용으로 : 인용자) 노동생산력이 발전한 결과 감소하는 것이다."*주20)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기계 경영은 노동의 생산력을 높임으로써 필요노동을 희생시켜 잉여노동을 확대하는데, 그것이 이러한 결과를 낳는 것은 단지 주어진 한 자본이 사용하는 노동자의 수를 줄이기 때문일 뿐이다."*주21)라고도 말하고,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주22) 기계의 충용이나 개량으로 인한, 즉 신기술의 도입에 의한 노동력 인구의 과잉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우리의 많은 노동운동가나 '진보적인' 학자들은 신기술의 개발․혁신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주23) 근대 자본주의에서 실업 혹은 상대적 과잉인구가 증대하는 데에는 이렇게 노동생산력의 발전,즉 생산기술의 개량이나 새로운 생산기술의 개발이 그 기술적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오늘날 눈부신 속도로 전개되고 있는 과학기술혁명은 이러한 자동화 기계에 의한 노동력의 대체를 생산부면을 넘어 유통부면, 그리고 서비스 노동부문까지 급속히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장르를 '0'과 '1'이라는 숫자의 바다로 환원하여 통일하는 '디지털 혁명'에 힘입어*주24) 급격히 '무인생산'을 향해 접근해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무인생산'을 향해 급격히 접근해가고 있는 새로운 생산기술,과학기술혁명의 성과가 직접생산자들의 공동의 재산으로 되어 이용되지 못하고 독점자본에 의해 소유․장악되어 잉여가치․이윤 생산을 위해서 배타적으로 이용되는 데에 오늘날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고 있는 대량실업, 상대적 과잉인구의 급격하고도 만성적인 증대, 그리고 그에 따른 취업노동자들의 장시간․저임금 노동의 기술적․생산력적 기초가 있다.*주25) 따라서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직접생산자 공동의 재산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세계의 노동자계급에게 주어져 있는 역사적 과제이다. 고도의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라고 하는 이 부조응은 그 자체로서 역사적 변전의 조건이자 추동력이기도 하다.

대량실업에 대한 자본의 태도 혹은 대책

지금 경제위기의 폭발을 계기로 폭증하고 있는 대량의 실업, 상대적 과잉인구에 대해서 자본은, 서두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중의, 분열증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껴 '대책'을 서두르면서도, 한편에서는 노동자계급을 더욱 철저히 자본에 종속시키고 더욱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그 임금을 삭감해서 이윤율을 높이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산업예비군을 증대시키기 위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각양각색의 부당노동행위, 무단적 대량해고 등을 계속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개별자본이 그러할 뿐 아니라, 기구화된 총자본으로서의 국가(정부)의 정책과 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정부는 고용보험 등 실업자를 위한 기금․대책을 확대하고, '실업의 증대를 막기 위해' 기업에 부당노동행위를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한편 '고용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줄 것을 종용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등의 조기실시 혹은 조기도입 등 대량의 해고와 불완전취업의 확대를 촉진하는 장치들을 정비하였다. 특히 상품․자본․금융․부동산 시장 등의 전면적인 개방, 규제완화, 국․공영기업의 무차별적 민영화*주26) 등등을 공언하고 적극 추진하는 등, 직접적으로 고용불안을 강화하고 실업․상대적 과잉인구를 증대시키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을 본격화하고 있다.
말하자면, '고용안정․실업대책' 등을 요란하게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그것들은 기실 구두선이거나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디게 하기 위한 마지못한 수단에 불과하고, 정책의 기본노선은 노동자계급을 희생으로 하여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주27) 이렇게 고용안정 혹은 실업의 최소화보다는 노동자들을 희생으로 한 '경제위기 극복'에 김대중 정권의 기본노선이 있다는 점은,무엇보다도 그가 당선 닷새만에 선거공약을 내팽개치고 "정리해고제 조기 실시만이 살 길"이라며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하여 그것을 관철시킨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본(김대중 정권)측은 이러한 산업예비군 확대정책을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면서, 그러한 정책추진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마치 대처 정권이래의 영국이 이를 통해서 '실업문제'를 해결이라도 한 듯이 특히 선전해대고 있다. 정부의 이러한 선전은 당연히 부르주아 언론에 의해서 증폭되고 더욱 화려하게 분식되는데, 그 하나를 보자.
"영국의 노동간은 상당히 탄력적이어서 실업자 구제에 대단히 효과적이다.
시간제 근로나 변형근로시간제가 잘 정착돼 있다. 시간제 근로에 종사하는 사람만도 6 백50만명에 달할 정도다. 고용알선이나 근로자파견제도도 잘 갖춰져 있고 이 업무를 다루는 업체만도 1만5천개에 달한다. 또 각 지방정부별로 총 1천1백개에 달하는 취업센터를 운영하면서 교육과 훈련을 통해 끊임없이 실업자를 일터로 내몰고 있다."*주28)
같은 기사에 보면, 1997년 말 현재 영국의 경제활동인구는 2,880만명인데 그 가운데 650만명(22.57%)이 '시간제 근로에 종사하는 사람', 즉 불완전취업자이고 거기에 다시 최소 146만명(5.07%)의 완전실업자가 더해진다. 그렇다면, '시간제 근로' 이외의 형태의 불완전취업을 제외하고, '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지 않는 '실망실업자'를 역시 제외하더라도, 영국의 상대적 과잉인구는 경제활동인구 2,880만명 가운데 최소 796만명(27.64%)이다.
이러한 실정의 영국을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실업문제를 해결한' 모범적 사례로 선전할 때, 시끄럽게 '실업대책'을 떠들어대는 김대중 정권이나 부르주아 언론이 추구하는 바의 '노동시장의 유연화' 그리고 '실업대책'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에 절대적으로 종속적인 산업예비군의 충분하고도 안정적인 확보,' 바로 그것이다.
참고로, 위 기사가 영국에서 "각 지방정부별로 총 1천1백 개에 달하는 취업센터를 운영하면서 교육과 훈련을 통해 끊임없이 실업자를 일터로 내몰고 있다."라고 쓰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한 마디 하자. 여느 부르주아 정권과 마찬가지로 김대중 정권도 유사한 '재취업을 위한 교육․훈련'을 '실업대책'의 하나로 내놓고 있는데, 이는 명백히 한편에서는 실업자에 대한 학대․모욕이자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간의 경쟁을 격화시켜 보다 더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한 '산업예비군 정책'에 불과하다. 오늘날 명백히 실업은,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업종에서 대량적으로 발생하고 있어서 노동자의 숙련의 부족이 실업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업대책'으로서의 오늘날의 이른바 '재취업을 위한 교육․훈련'이라는 것이, 예를 들면, 건설미장공에게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교육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머에게는 건설미장기술을 훈련시키는 식인데, 양 부문에서 공히 대량의 과잉인구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상대의 기술을 배울 이유가 없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본의 이해와만 관련된 것이어서, 이는 곧 양 부문의 과잉노동력을 하나의 풀(pool) 속에 넣어서 노동자들간의 경쟁을 격화시키고, 그 결과로 노동력의 가격을 저하시키려는 전략인 것이다.


실업문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앞에서 본 것처럼 실업․상대적 과잉인구의 확대와 그 부분적 흡수 등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연적 운동이다. 더구나 현재와 같은 과학기술혁명의 시대에 있어서의 그 대량적․만성적 누적은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로서의 고도의 생산력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간의 부조응의 표현이다. 그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틀 안에서는 … (엄청난 파괴와 인간살육을 초래한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의 비극적 전쟁 외에는 구조적으로 심화되어 가는 대량의 과잉생산, 대량실업, 전반적 위기를 극복할 방안이 존재하지 않는다."*주29) 더구나 노동자계급과는 그 정치적․경제적 이해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잉여가치의 생산․증대를 위한 '효율'이 제일의 행동규범인 자본측의 어떤 자발적인 실업대책 혹은 재취업 정책이 실업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환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누군가가 어떤 기발하고 진지한 '실업대책․고용정책'을 통해서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듯이 말한다면, 그것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고,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실업․상대적 과잉인구의 존재와 대량화를 필연화하는 생산양식 그것의 지양을 통해서만이 문제는 진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업문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응은 원칙적으로 그러한 역사적 대전환을 전망하면서 이루어지는 정치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실업문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응이 그러한 원칙적․일반론적 차원에서만 논의되고 제시된다면, 그러한 논의는 당연히 현실적 실천력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상대적 과잉인구를 포함한 노동자계급 대중의 현실적인 경제적․정치적 요구에 충실하게 부응하면서 추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실적인 방안은 그들의 경제적 생존권 확보 투쟁을 실천하고 확대하면서 동시에 그 투쟁을 통해서 그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과학적인 이념․이론으로 무장시켜 나가는 길일 것이다. 그를 통해서 그들을 노동자계급적 방식과 이념에 기초하여,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형태로 정치세력화시켜 나가는 길일 것이다.
먼저 제시되는 과제는 당연히, 현재 각 사업장에서 광범하게 저질러지고 있는 것과 같은 무단해고, 자의적 배치전환, 임금삭감․동결, 노조․단협 파괴 등과 같은 부당노동행위에 반대해 조직적인 연대투쟁을 전개하여 그 힘으로 자본측을 압박․제어하고, 그들 투쟁을 노동자들의 경제적․정치적 조직강화로 귀결시켜 가는 것이다. 자본측의 부당노동행위가 우심하여 많은 현장노동자들의 분노를 사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투쟁을 위한 객관적 조건은 성숙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부터의 활발한 논쟁․교육 등을 통해서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노동자계급의 선진부대 내부에는 "임금삭감 없이 생활임금을 확보하는 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한 고용확보"가 고용파괴․대량실업 시대의 노동자계급의 '당면의' 대응전술원칙으로서, 적어도 선언적으로는, 확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금속산업노조 자동차 업종 같은 곳에서는 지금 "주 38시간 노동"을 통한 고용안정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 두 가지가 문제로 된다. 첫번째로는, 노동시간의 단축이 '임금을 양보하지 않고' 이루어져야 하고, 특히 실제의 노동시간의 단축이 없는 임금의편법적 인상수단으로 전락하여서는 안된다. 최근 2~3년래 몇몇 대기업에서 단체협약을 통해 '주당 노동시간'을 법정의 그것보다 짧은 '주 41시간' 혹은 '주42시간'을 획득하였지만, 대개의 경우 실제로는 그것이 노동시간의 실제적 단축이 아니라 '잔업시간'의 계산상의 연장과 그를 통한 '잔업수당'의 증대수단으로 이용되었는데, 이렇게 되어서는 '노동시간의 단축'이 고용의 증대․확보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
두번째로는, 과연 주당 노동시간을 얼마로 줄여야만 실업 혹은 상대적 과잉인구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실업․상대적 과잉인구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인구법칙의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규모에서 타산되어야 하고, 그 값은 가장 원칙적으로는 사회적 총노동시간을 노동 가능한 총인구 수로 나눈 값이어야 할 것이다. 혹은 현재의 주당 노동시간을 우리 사회의 상대적 과잉인구의 비율만큼 축소한 값이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상대적 과잉인구 비율을 97년도 현재 약 36.2% 내지 47.4%로 계산하였다. 따라서 주당 노동시간은 현재 그것의 최소한 36.2% 이상 적은 시간으로 축소되어야 상대적 과잉인구를 최소화할 수 있다.
노동부의 {매월노동통계조사보고서}에 의하면,(주30) 97년도 현재 비농전산업의 주당노동시간은 46.74시간이다. 주당 29.82시간 이하로 (임금삭감 없이) 줄여야 실업․상대적 과잉인구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46.72시간을 일하는 노동자의 눈으로는 '29.82시간 이하로의 단축'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객관적 조건으로서의 노동생산력은 29.82시간 이하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을, 혹은 줄여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렇게 단축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오직 노동자계급 자신의 주체적인 결단과 역량에만 달린 문제라는 점을 동시에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국가가 실업․상대적 과잉인구를 위한 사회보장을 실질적으로 확대시키고, 그를 통해서 그들의 생활을 보장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가에 의한 사회보장은 두 가지 방식, 즉 무상의 급여 혹은 생활임금과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정상적인 고용계약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새마을 취로사업'과 같은, 생활임금도 노동기본권도 보장하지 않는 노예노동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사회보장의 확대를 통한 생활 보장'과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현재의 상황과 추이는 신자유주의, IMF 등의 요구, 그리고 국내 독점자본의 탐욕이 함께 어우러져서 사회보장의 확대가 아니라 그 반대물인 긴축정책이 추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책기조는 바뀌어야 한다. - 물론 공황이 심화되면서 자본측은 긴축으로부터 부양으로의 정책전환을 강요받게 될 것이지만, 이 경우에도 그 부양은 내용이 기업을 지원하는 것보다는 사회보장을 확대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강제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고 대량적 실업이 항상화 될수록, 취업노동자의 운동․투쟁에 못지 않게 '실업자'의 조직화와 그 투쟁이 당연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따라서 그 조직화와 올바른 정치세력화가 이미 주요한 과제로 등장해 있다.
주지하듯이, 실제로 실업이 대량화․장기화하는 것을 반영하여 오늘날 서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이미 여러 색조의 '실업자 운동' 혹은 '실업자 투쟁'이 상당 정도 활성화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전투적이고 선진적인 노동운동단체에서부터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시민단체나 종교단체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실업자동맹' 혹은 '실업자모임'이 '경쟁적으로'조직되고 있다. 그 동기도 우로는 체제방어적․자선적․박애적인 그것에서부터 좌로는 급진적․혁명적인 그것까지 다양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앞으로 그들 조직․모임의 행동․투쟁 양식도 그 동기만큼이나 다양한 색조로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특히 유의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의 하나는 파쇼적․국가주의적 선동이다. 역사에서 보았듯이 극도의 대량적 빈곤은 동시에 파시즘적 선동의 무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실업자 동맹'은 우리의 개념에서는 그 구성이 상대적 과잉인구의 조직, 즉 실업자와 불완전․비정규직 취업자가 함께 구성원이 되는 조직이어야 할 것이고, 노동자계급 가운데 취업부분으로부터 자신을 절대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상대적․기능적으로만 구분하는 노동자계급의 조직이어야 할 것이다. 여러 구분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분단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경계하고 거부해야 하는 자본가계급의 지배전술이기 때문이다.









□ 주----------

*(주) 이 글은 4월 25일 전해투 지원대책위와 민주노총이 공동으로 개최한 "실
업문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서 발표된 글이다.
1) {한겨레} 98. 3. 17.
2) {동아일보} 98. 3. 27. 참조.
3) {동아일보}(98. 4. 18) 논설실장 김종심의 칼럼, "나는 무너지고 싶지 않다" 참조.
4) 인간 노동력이 여타의 물적 상품과 다름없는, '판매되어야 하고 A/S되어야 하는 상품'임이 그로테스크하게 표 현되고 있는 한 예는, ["불량인력 기업에 A/S해 드립니다," 대학가 '졸업생 리콜제' 확산]이라는 제목의 {문화 일보}(97. 5. 5) 기사 참조.
5) MEW, Bd. 23, S. 661
6) MEW, Bd. 23, S. 665.
7) 한국노동연구원, {1998년 KLI 노동통계}, p. 8 참조.
8) 한국노동연구원, 같은 책, p. 11 참조.
9) 정부의 '실업대책'의 사정권 내에 있다고 해서 '신음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말이다.
10) MEW, Bd. 23, S. 670.
11) 이상 숫자들은 한국노동연구원, 같은 책에서 재인용.
12) 이상, 김금수, [경제 주체는 사람이다], {한겨레} 97. 12. 30.
13) 김금수, 같은 글.
14) "1996년 말 현재 고용 가능한 나이의 인구 가운데 전일제 취업인구의 비율"은 예컨대 "미국은 75%, 영국은 71%, 프랑스 59%, 그리고 독일은 64%"(International Herald Tribune, 97, 8. 1)라는 보도나 "(프랑스는 현재 3백만명, 독일은 4백80만명이 [완전] 실업자다.) 실업률이 비교적 낮은 미국도자선단체가 제공하는 구호식량에 의존하는 저임금 취업노동자가 8백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사실상의 저임금 실업상태에 있는 것이다."({한겨 레 21} 제203호, 98. 4. 16.)는 등의 보도는, 이들 나라에서도 미국은 5%대, 영국은 7%대, 그리고 유럽연합은 12%대라는 '공식 실업률'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며,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이 얼마나 대량실업 상태에 있는가를, 즉 상대적 과잉인구가 얼마나 팽대해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15) MEW, Bd. 23, S. 661.
16) MEW, Bd. 25, S. 228 참조.
17) 리카도,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김세련․이영배 역, 서울출판사 1949,p.342; 같은 책, 정윤형 역, 비봉출판 사 1991, p. 473.
18) 같은 책, 김세련․이영배 역, p. 343; 정윤형 역, p. 473.
19) 같은 책, 김세련․이영배 역, p. 344; 정윤형 역, p. 475.
20) MEW, Bd. 26II, S. 570.
21) MEW, Bd. 23, S. 429.
22) 다음의 네 곳은 독자들의 참고를 위해서 특히 인용해두고 싶다.
[1] "노동수단이 노동자를 타살한다. 이 직접적인 대립은 확실히 새롭게 채용된 기계가 전래의 수공업 경영 이나 매뉴팩처 경영과 경쟁할 때에 가장 명료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대공업 자체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기계의 개량이나 자동적 체계의 발달은 동일한 작용을 한다."(MEW,Bd.23,S.455.)
[2] "기계로서는 노동수단은 곧바로 노동자 자신의 경쟁상대로 된다. 기계에 의한 자본의 자기증식은 기계에 의해서 생존조건이 없어져 버리는 노동자의 수에 비례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체제 전체는 노동자가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판매하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분업은 이 노동력을 일면화시켜 하나의 부분적 도구를 취급하 는 극히 특수화된 기능으로 만든다. 도구를 취급하는 것이 기계의 역할로 되면, 노동력의 사용가치와 함께 그 교환가치도 사라져 없어진다. 노동자는, 통용되지 않게 된 지폐처럼, 판매되지 않게 된다. 노동자계급 가운 데 이렇게 기계 때문에 잉여인구로 된 부분, 즉 이미 자본의 자기증식에 직접적으로는 필요하지 않은 인구로 된 부분은, 한편에서는 낡은 수공업 경영이나 매뉴팩처 경영의 기계경영에 대한 불평등한 투쟁 속에서 파멸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침입하기 쉬운 모든 산업부분에 넘칠 정도로 밀려들고,노동시장에 차고 넘치게 되고, 따라서 노동력의 가격을 그 가치보다도 저하시킨다. … 기계가 하나의 생산분야를 차츰 파악하여 가는 경우 에는 기계는 그것과 경쟁하는 노동자층 속에 만성적인 빈곤을 낳는다. 이 추이가 급속한 경우에는 기계는 대규모로 급성적으로 작용한다. 영국의 면포수직공의 몰락은 수십 년에 걸쳐 질질 끌면서 서서히 진행되어 1838년에야 겨우 종지부를 찍었는데, 세계사상 이보다 무서운 광경은 없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굶어죽 고 많은 사람이 가족을 포함하여 하루에 2.5펜스로 살아갔다."(MEW, Bd. 23, S. 455.)
[3] "기계는 임금노동자를 언제나 '과잉'시키려는 우세한 경쟁자로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에 적 대하는 힘으로서, 기계는 자본에 의해서 큰소리로 그리고 저의를 가지고 선전되고 조작된다. 기계는 자본의 전제에 반항하는 노동자의 주기적 반역, 스트라이크 등을 타도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로 된다. … 증기기 관은 처음부터 '인력'의 적수였고, 이에 의해서 자본가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던 공장제도를 위기에 빠뜨리려고 했던 노동자들의 고양되는 요구를 분쇄할 수 있었다. 단지 노동자 폭동에 대항하는 자본의 무기로서 태어 난 1830년 이래의 발명만을 모아도 완전히 하나의 역사가 쓰여질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자동뮬 방적기를 생각해보자. 왜냐하면, 그것은 자동체계의 신기원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MEW, Bd. 23, S. 459.)
[4] "(새로운 기계의 채용이나 낡은 기계의 확장에 의해서 가변자본의 일부분이 불변자본으로 전화되는 경우 에) 유리되는 것은 단지 기계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구축되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그들의 보충원도 유리되는 것이고, 또 사업이 종래의 기초 위에서 보통의 방식으로 확장되는 경우에는 규칙적으로 흡수되는 추가대(追 加隊)도 유리된다."(MEW, Bd. 23, S. 668.)
23) "맬더스는 보수적 이익의 봉사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방해받아, 기계
의 비상한 발달 …이, 특히 전시수요 나 영국의 세계시장 독점이 끝나고 나서
는, 노동자 계급의 커다란 부분을 '과잉'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볼 수 없었다."(MEW, Bd. 23, S. 551)라고 말함으로써 그러한 주장의 객관적 계급성을 밝혀주고 있다.
24) High Tech Committee of the National Organizing Committee, "The High Tech Revolution: Who Will Reap The Benefits?", Rally, Comrades!, December 1994.
25) 과학기술혁명의 전개에 의한 일자리의 소멸에 대해서는 제레미 리프킨 저, 이영호 역, {노동의 종말}, 민음사,1996 참조; 제레미 리프킨 류의 견해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Doug Henwood, "Talking About Work" (Monthly Review, Vol. 49, No. 3, July-August, 1997) 참조; Doug Henwood의 견해에 대한 반비판에 대해서는 채만수, "21세기, 고용 없는 사회 - 대량실업의 원인과 귀결", {당대비평} 제2호, 1997년 겨울호 참조.
26)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속에서 많은 국․공유기업이 '비효율'이라는 낙인이 찍혀 민영화(사유화)되고 있지만, 그들 국․공유기업이 민영화되는 진정한 이유는 '비효율'이 아니라 (산업구조의 변화 등으로) 그들 기업이 이 제 '수익성 있는 사업'이 되었거나 조만간 그러한 사업이 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비효율'이란 낙인은,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키워온 그러한 기업을 사유화하는 데에 따를 수 있는 대중의 저항을 봉쇄하면서 그것을 사유화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이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사적 기업의 연장으로서의 자본주의적 국․공유기업의 성격․기능․임무 등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27) 다만, 그러한 노선․정책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것은 김대중 정권이나 독점자본가계급의 주관적 환 상일 뿐, 현 위기는 그 본질이 과잉생산 공황이어서 결코 그러한 노선․정책을 통해서 극복될 수 없음은 명백하지만, 이 점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여기서의 우리의 주제는 아니다.
28) {동아일보}, 1998. 1. 23, 런던 이진녕 특파원.
29) 채만수, 같은 글, {당대비평} 제2호, p. 231; Sam Gindin, "Notes onLabor
at The End of The Century: Starting Over?," Monthly Review, Vol. 49, No. 3, July-August 1997, p. 157.
30) 여기서는 한국노동연구원, 같은 책, p. 155에서 재인용.@

1998-05-01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