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적’ 자본주의?
- 전후 유럽의 성장구도에 대비되는
한국과 일본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성들
I. 서론
만약 누군가가 유럽의 ‘경제기적’이 서구의 정신문화적 전통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마도 계몽된 사회과학자라면 그를 대단히 의아한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또 다른 누가 유럽의 복지국가가 기독교적 자비심의 근대적 체화라고 주장한다면, 훈련된 사회과학자는 분명 회의적으로 반응할 것임에 틀림없다. 위와 같은 무분별한 설명들이 간혹 많은 사람들에게 그럴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회과학적 시각에서는 대단히 일면적인 설명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과학의 공인된 목표란 사회발전의 복잡한 연관관계를 하나의 전통 혹은 현상으로 환원하기보다는, 세밀한 개념들과 분화된 범주들을 동원하여 그 연관관계를 보다 현실에 가깝게 분석하고 설명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발전에 대한 토론과 논쟁들은 이러한 사회과학적 자기이해가 적용되지 않는 예외지대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분화되지 않은, 편견에 가득 찬 사고들은 여기서 한 학파를 형성해, 소위 ‘유교주의적’ 국민경제의 작동방식을 ‘근면’, ‘포기’, ‘저축성’, ‘고된 노동’, ‘규율’, ‘가족’ 등의 개념들로서 설명하고 있다. 사회과학적으로 별로 세련되지 않은 이러한 개념들은 보다 복잡한 논의들의 경우, ‘국가의 산업정책적 행위’ 혹은 ‘조절되는 시장경제’ 등의 몇몇 정치경제학적 카테고리들과 결합하기도 하지만, 그 핵심논지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동아시아의 ‘경제기적’은 유교에 근원을 둔 전통적인 정신적 가치들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금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자본주의 발전의 정신적 족쇄로 저주받던 유교주의는, 세기말 동아시아 경제기적의 정신적 지주로서 복귀했다. 다가올 천년기에 유교주의는 “윤리적, 종교적으로 의미심장한 새로운 삶의 형태”가 될 것이라고 예언되기도 하는데, 어쨌든 이와 관련해 일종의 ‘유교주의 인터내셔날’1)이 창립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유교주의를 두고 일어난 최근의 소용돌이는 무엇보다 정치적인 이유들에서 등장한 것이지, 동아시아 사회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으로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여기서 성장촉진적이라고 지적되는 근면, 저축성, 규율과 같은 ‘유교주의적’ 미덕들은 궁극적으로 한때 유럽에서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이해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유교주의를 동아시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대치시키는 시도는 이 지역 자본주의에 고유한 발전의 역동성을 찾는 노력을 애당초 결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시아적’ 자본주의란 사회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전혀 무용한 개념인가? ‘아시아적’ 자본주의가 분석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이론적 전제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필자는 여기서 ‘유럽적 성장과정’, ‘대서양적 성장구도’, ‘포드주의적 성장모델’ 등의 개념에 주목하며, 이 개념들과 유사한 방법론적 전제 아래서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라는 분석틀을 작성할 것이다. 나아가 전후 서유럽의 ‘포드주의적 성장모델’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일본과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성들을 지적함으로써,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라는 분석틀의 독자성과 유용성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II. 유럽의 전후 성장체제와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
‘유럽적 성장과정’(Lutz), ‘대서양적 성장구도’(Marglin)와 같은 개념들은 국민국가적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전후 (서)유럽의 발전구도의 유사성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 개념들을 가지고 서구 학자들은 전후 유럽의 안정과 번영을 가능하게 한 정치적, 경제적 관계들의 ‘조응(Entsprechung)’을 표현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 번영의 구체적 형성과정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개별 국가들의 정신문화적 전통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겠지만, 그렇다고 ‘유럽적 성장과정’이 이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유럽적’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 이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 국민국가적 경계를 넘어서는 정치적, 경제적 특징들과 관련 있다. 이 점에 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회학자 루츠(Lutz)는 이 ‘유럽적 성장과정’을 ‘내부로의 정복(innere Landnahme)’2)이라고 특징지었다. 그에 따르면 ‘이중적 경제구조’의 해체, 즉 전통 부문의 산업․시장경제적 부문으로의 흡수는 ‘긍정적 연관효과’와 함께 일종의 ‘번영의 나선운동’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과정이 아니었으며, 동시에 정치적, 제도적 과정이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루츠는 이 새로운 구도를 다음과 같은 3가지 요소를 내용으로 하는 ‘복지국가(Wohlfahrtstaat)’라는 상위개념 아래 요약하고 있다.
첫째, 국내경제적 수요와 국민경제적 임금수준을 안정화하는 수요조절과 국가개입, 둘째, 임금율이 전경제적 평균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 노동권적 규제, 사회보장체계의 지원, 노동시장적 조치들, 셋째, 전경제적 차원에서 임금양과 임금수준의 항상적인 역동성을 보장하는 임금과 봉급의 집단적 혹은 다른 제도적 확정이 바로 이 ’복지국가‘의 구성요소들이다.
일반적으로 케인즈주의적 개입국가와도 동일시되는 이러한 요소들은 소위 ‘조절학파’에 의해서도 ‘포드주의적 성장모델’에 전형적인 조절방식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들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 모델이 하룻밤 사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기에, 이것이 전제했던 정치적 관계들을 강조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물론 이는 각국의 정치적 세력관계들의 특수성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된 분모를 가졌다. 정치학자 데페(Deppe)는 이 분모를 ‘계급타협’라고 지적하였다. “노동운동의 대중조직들(무엇보다 노동조합들, 그리고 이들의 활동 결과로서 집단적 노동권)의 등장과 함께 그 투쟁들의 결과들은 헌법, 국가제도의 체계(사회국가), 법률체계 등의 분야는 물론 정치문화의 영역에서도 각각 특수하게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타협 혹은 ‘계급타협’라고 지칭될 수 있다”
이 계급타협은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에서 우파와 좌파 사이의 효과적인 정책합의를 통해 표현되었다. 물론 이 타협은 종전 이후 유럽의 독특한 정치적 상황에 의해 촉진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곧,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의 패배와 함께 파시스트-초민족주의적 극우파들이 정치무대에서 사라졌으며, 뒤이은 냉전의 발발과 함께 공산주의라는 극좌파가 제도권 정치에서 제거되었다(공산당이 여전히 강했던 이탈리아는 예외적인 경우다). 계급타협은 또한 고용주들과 노동자조직들 사이의 암묵적, 명시적 합의에도 기반하고 있었는데, 고용주는 생산성의 발전에 상응한 실질임금의 상승에 동의하였고, 노동자조직들은 미래의 투자에 충분할 정도의 이윤 몫에 합의한 것이다.
이 합의에 기초하여 ‘포드주의적인’ 성장역동성이 관철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전의 성장유형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서도 민족국가적 편차가 존재했는데,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와 같이 축적이 전형적으로 소비재부문의 확장을 통해 이루어진 경우, 혹은 독일에서와 같이 수출이 전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경우의 차이를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국민국가적 성장모델의 차이를 추상한 채 - 유럽의 성장역동성을 다음과 같이 특징지을 수 있다.
이 역동성은 무엇보다 실질임금소득의 상승에 기반하였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발전은 한편으로 1929년 세계대공황(전형적인 과잉생산공황)의 경험과 다른 한편 테일러주의의 관철 결과 등장한 거대한 일반적 생산성의 상승을 수요 측면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강제에 의해 보다 강화되었다. 또한 냉전의 심화와 이에 따른 체제경쟁 역시 이 발전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소득의 상승을 새로운 축적유형의 성장동력으로 삼는 해결책의 등장은 무엇보다 거센 정치적 투쟁들과 대결들의 결과였음이 반드시 강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성장모델은 ‘계급타협’을 강제할 수 있었던 노동운동과 그것의 제도적 조직으로서 노동조합들이 싸워 얻어낸 거대한 성과물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우리는 ‘아시아적’이라는 개념 아래 반드시 문화적 차이만이 아닌, 이 지역 몇몇 나라들의 성장과정을 각인했던 정치와 경제의 일정한 상응관계들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위에서 논의한 유럽의 포드주의적 성장체제에 대비해 일본과 한국에서 전후 자본주의 발전을 정치와 경제의 상응관계라는 측면에서 해석하려 시도할 것이다.
사회학자 루츠가 국민국가적 경계를 넘어서 존재한 전후 서유럽의 안정과 번영을 ‘유럽적 성장과정’으로 지칭했듯이, 또한 조절학파가 이 성장과정을 유럽의 ‘포드주의적 성장구도’로 묘사했듯이, 필자는 아시아의 몇몇 국가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이것을 가능케 한 정치적, 경제적 관계들의 조응을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라고 명명할 것이다.
이 시도는 당연히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의 재구축을 통해 문화환원주의적인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설명에 대한 대안모델을 모색하려는 노력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의 발생과 발전을 추적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분석은 아주 본질적인 것에 제한된다. 일단 아래의 <표1>은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와 유럽의 포드주의적 성장구도의 현저한 특징들을 비교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 특징들을 일본과 한국의 몇몇 예를 들어 간략히 설명하려 시도할 것이다.
<표1> 유럽의 포드주의적 성장구도와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
|
포드주의적 성장구도 |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 |
계급
차원 |
- ‘계급타협’
-노동운동과 노동조합들의
정치적 인정
-전국적 노동조직 |
-위로부터의 ‘계급투쟁’
-노동운동의 분열과 패배 및 억압
-기업별 노조의 관철 (일본과 한국): 반(半)국가적 노동조합 |
국가의
특징 |
-‘복지국가’
-케인즈주의적 개입들
-자본과 노동의 ‘협조적’ 관계로 특징지어지는 케인즈주의적 헤게모니블록
-의회민주주의 |
-일종의 ‘업적국가(Leistungsstaat)'
-국가의 강력한 계획과 지도: 그러나 사회적 측면에서 극도로 자유주의적
-발전 초기에 국가관료들의 자율적 권력: 성장과 더불어 자본 권력의 국가 안으로의 응집(Verdichtung)
-독특한 형태의 민주주의(일본): 군부독재 (한국) |
자본의
배열관계 |
-생산?금융?상업자본의 형식적 분화
-거대 콘체른들의 경제적 권력: 그러나 중소기업들과의 상대적으로 수평적인 관계 |
-생산?금융?상업자본의 결합
-거대 콘체른들의 과잉권력: 하청 등을 통한 중?소?극소기업들의 지배와 위계화 (특히 일본과 한국) |
성장의
역동성 |
-전통부문의 해체와 근대화
-성장의 동인으로서 실질임금소득의 상승: 전체 국민경제의 상대적으로 균형적인 발전 |
-전통부문의 해체, 그러나 동시에 ‘이중구조’의 강화
-성장의 동인으로서 수출과 높은 투자율: 계획적으로 세계시장을 지향한 축적전략, 그리고 이를 통해 가능해진 급속한 (부문별은 물론 산업내부적인) 구조변화 |
III. 일본과 한국에서 전후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성들
1. 출발점 : 노동운동의 패배와 분열 및 억압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의 결정적인 출발점은 일본에서와 같이 노동운동의 분열과 패배, 혹은 한국에서와 같이 노동운동의 억압이다. 한국의 고도성장기에 있어 군사정권에 의한 노동운동의 지속적 탄압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조금은 덜 명확해 보이는 일본에서의 상황전개를 추적해 보자.
일본의 노동운동 역시 처음부터 지금과 같이 무력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도 한 때 노동운동의 ‘질풍노도의 시대’가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노동운동은 처음으로 대공세기의 국면을 맞는데, 이 상황은 무엇보다 미 점령권력의(급진적) 자유주의적인 개혁조치들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냉전의 발발은 노동조합에 큰 영향력을 가졌던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가져왔고 - 예를 들어 1949년부터 노동자들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해고될 수 있었다 -, 초기 점령정책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박탈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또한 한국전쟁이다. 일본의 경제에게 이 전쟁은 갑자기 상승하는 전쟁수요와 함께 ‘소용돌이효과’를 낸 ‘신의 바람’이었지만, 노동운동에게 그것은 ‘마녀사냥’과 검거의 물결을 일으킨 ‘죽음의 바람’이었다. 이 기간을 통해 1945년 3.2%에서 1949년 55.8%로 팽창했던 노동조합의 조직율은 냉전이 정점에 이른 1955년 35.0%로 하락한다.
일본 노동운동은 이 탄압에 연대적인 투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분열과 파벌싸움으로 대응하는데, 이 분열이 노동운동의 패배의 주체적 조건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일본 노동운동의 패배는 1950년대 일련의 중요한 투쟁들에서 좌파 노동조합들이 패배함으로써 확정지어진다. 이 노동운동의 패배는 일종의 시대적인 성격을 갖는 결정적인 의미의 것인데, 왜냐하면 이와 함께 일종의 ‘계급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시 얘기해 노동운동의 분열과 패배는 국민국가적 차원에서 노동조합들의 대항권력(Gegenmacht)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했고,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세력관계는 대단히 일방적인 형태로 정착될 수밖에 없었다.
‘계급타협’을 이끌어낼 수 없었던 일본 노동운동의 무력함은 이 시기에 정착된 기업별 노조체계(이는 파편화된 기업별 노조들과 정치적으로 분열된 노조연합들을 특징으로 한다)에도 잘 표현되고 있다. 한마디로 얘기해, 기업별 노조체계의 정치적 핵심은 계급연대의 질식을 통해 노동조합들의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체계의 조직원칙에는 기업노조들과 상부조직들의 비대칭적 발전이 이미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기업별 노조체계 아래서 노조는 해당 기업의 시장에서의 성공 및 생산성․비용 구조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경영 측에 보다 협조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노동조합적 연대는 개별기업 차원으로 환원되며, 노조의 저항력 그리고 갈등에 대한 준비 역시 계속해 약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적 연대가 개별기업 차원으로 환원되면 될수록, 그리고 그것이 전사회적 연대와 분리되어 발전하면 할수록, 노조 상부조직의 반대권력은 사라져가며, 노동조합운동의 정치적 영향력 역시 약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과 경영의 분리선도 점차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일본 노동조합운동의 유약함은 수십 년 동안 대안적인 노동운동의 발전을 저해한 이 기업별 노조체계의 결과이며, 이 체계는 바로 전후 노동운동의 결정적 패배를 통해 정착되었다.
1980년 12월 한국에서 소위 ‘신군부’에 의한 기업별 노조체계의 법적 강제는 이 체계의 정치적 유용성을 분명히 의식한 것이다. 1971년 전태일의 분신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한 자율적인 노동운동은 박정희 정권 하의 반(半)국가적 노조조직의 한계를 드러냈고, 나아가 1979년 ‘YH사건’을 통해 한국의 국가위기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신군부’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반(半)국가적 노동조합의 한계를 인식하고 일종의 예방조치를 취해야 했는데, 바로 그것이 기업별 노조체계 등을 명시한 1980년의 노동법이었다. 물론 이 노동법을 모든 기업들이 다 존중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가장 큰 재벌인 삼성이 아직까지 어떠한 노동조합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 아시아적 ‘업적국가’에서의 정치
일본에서 노동운동의 분열 및 패배, 혹은 한국에서 수십 년 동안의 노동운동에 대한 억압은 이들 국가에서 노동 측의 정치적 영향력을 체계적으로 봉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함께 지배이해들의 일방적 관철을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는 일종의 대항권력블록(Gegenmachtsblock)의 형성가능성은 대단히 제한적인 것으로 남고 말았다. 이들 국가에서는 ‘계급합의’ 대신 위로부터의 강력한 ‘계급투쟁’, 곧 지배이해의 일방적 관철이 정치적 일상을 규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1970년대 초반 일본에서도 급진적인 학생들의 저항이 있었다지만,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전개된 것이다. 서유럽에서 소위 ‘68세대’가 가져 온 ‘문화혁명’에 비교할 수 있는 어떠한 변화를 한국과 일본에서 발견하기란 실제로 힘들다. 경제성장(일본), 혹은 반공과 경제성장(한국)이 정치적 담론의 절대적 우선권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시민사회로부터 등장하는 대안적 논리들은 주목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빈번히 억압받고 왜곡되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사회의 각 부문에 ‘생산주의’가 굳게 자리잡았고, 한국에서는 성장제일주의, 수출주의 혹은 반공주의가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하였다. 70년대 한국의 비상체제 아래서 수출과 성장이 모든 형태의 정치적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적 저항권력이 발전하지 않을 때, 정치가 지배이해들의 조정이라는 문제로 축소되는 것은 당연히 한국과 일본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는 저항권력의 극도의 저발전이라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배이해들의 대단히 조화로운 발전(이와 관련하여 자민당의 38년에 걸친 장기집권을 생각해 보자)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만한 것이다. 부패스캔들에 휩쓸린 ‘보스들’의 몰락은 일본에서 결코 지배의 하모니를 교란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물론 본질적으로 더 많은 정치적 폭력이 동원되었지만, 그러나 지배세력들 사이의 큰 갈등이란 여기에서도 거의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한국의 대통령들이란 살해될 수도 있었고 감방으로 보내질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 괄목할 사건들조차 지배질서의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과거의 인물들은 몰락하고 그들의 파벌들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다른 인물들과 새로운 파벌들이 등장했다. 물론 지배정치의 연속성은 단절되지 않은 채 말이다.
다른 한편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대단히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확인할 수 있다. 잘 알려진 ‘통산성 자본주의 (MITI-Kapitalismus)’는 확실히 시장경제의 열광자들에게조차 한 개념으로 정착했을 정도다. 정치학자 존슨(Johnson)은 이미 오래 전 일본의 국가를 ‘창조적’ 국가관료가 ‘독자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획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발전지향적’ 국가로 묘사한 바 있다. 존슨은 이 ‘발전지향적’ 국가가 - 그 효율성에서 다른 나라들의 기존 제도들과 구분되는 - 여러 제도적 혁신들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적인 정치 이해로서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한 현상을 발견한다. 정치와 행정의 일정한 이중성이 바로 그것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이 현상은 일종의 ‘업적국가’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치가들과 국가관료들 사이의 정교한 분업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이중성을 다음과 같이 쉽게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들은 의회에서의 주먹질, 뇌물 주고받기, 염탐과 감독, ‘체제반대자들’에 대한 박해, 황당한 사건들의 연출3)등에 특화하는 반면, 국가관료들은 경제계획, 투자조정, 과잉설비의 ‘합리화’(곧 파산의 사회화), 경쟁력의 촉진 등에 몰두하는 것이다. 오늘날 흔히 ‘업적국가’로 불려지는 국가형태와 유사한 특징들(아주 작은 국가부문(Staatsquote), 복지지출에 있어 극도의 소극성, 대단히 활성화된 산업정책,4) 경쟁력 강화 최우선 정책 등등)을 갖는 국가가 이들 나라에서는 이미 오래 전 정착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가 작동할 수 있는 것은 대항권력블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의 숙명적 결과이다. “정치는 곧 부패”라는 사고는 시민들의 일상적인 정치의식에 확고히 자리잡았으며, 이는 모든 개혁노력들을 추가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정치적 상황이 국가관료들의 독자적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전제조건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관료들의 권력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곧, 이들 국가의 경제발전이 여러 측면에서 국가관료들에 의해 준비되고 일으켜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후의 급속한 경제성장 및 이와 결부된 거대자본들의 권력팽창은 국가관료의 독자적 행동공간을 지속적으로 협소화하였다. 풀란차스(Poulantzas)의 표현을 빌린다면, 자본의 거대한 권력이 국가 안으로 ‘빽빽히 들어차기(verdichten)’ 시작한 것이다.
3. 자본의 배열관계와 성장의 역동성
한국과 일본의 전후 자본주의 발전구도에서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자본의 배열관계(Konfiguration des Kapitals)의 독특성이다. 이 개념을 통해 필자는 자본들 내부의 대단히 모순적이고 복잡한 정치적․경제적 관계들을 서술하려 하는데, 특히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산업자본, 금융자본, 상업자본들의 연관․착종관계들, 둘째, 대기업에 의한 중․소․극소기업들의 위계화와 지배가 바로 그것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한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일본의 미쯔비시 그룹의 핵심사업체들에는 자동차, 화학, 철강, 조선, 항공, 기계, 전기․전자, 양조분야 등의 산업부분에 종사하는 기업들이 속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종합상사의 하나인 미쯔비시 상사는 그 옆에서 오징어에서 인공위성에 이르는 일련의 상품들을 사고, 팔고, 되팔곤 한다. 미쯔비시 계열의 은행과 금융회사들은 또 다른 옆에서 돈과 관련되는 거의 모든 것을 수행하고 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5) 한국의 삼성 그룹에서도 거의 유사한 산업․금융․상업자본들의 연관․착종관계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재벌’로 불리는, 그리고 일본에서 ‘기업집단’ 혹은 ‘계열’로 지칭되는 이러한 자본의 고도의 착종관계는 이 지역을 제외하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 예를 발견하기 힘든 것인데, 일본의 6대 기업집단들 그리고 한국의 5대 재벌들은 각각 전 국민경제 매출액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경제적 지배력은 당연히 영향력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극소수의 대기업은 이 지배력을 이용해 수십만의 중․소․극소기업들을 - 예를 들어 1차, 2차, 3차로 위계화된 - 하청체계 안으로 편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하청체계는 단순한 경영학적 계산 이상의 문제로 소위 ‘이중구조’로 알려진 이들 국민경제의 본질적 특징들의 하나이다. 또한 이 하청체계의 발전이 단순히 경제적 과정이 아닌, 동시에 정치적 과정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경쟁력 향상을 위한 모든 지원은 위와 같은 자본의 착종관계와 거대 콘체른들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고, 다른 한편 노동권적 규제, 단체협약, 사회국가적 개입에 있어 지배정치의 실패는 고용의 ‘이중구조’를 항구화시켰던 것이다.6)
이러한 ‘이중구조’는 한때 일본 혹은 한국자본주의의 ‘봉건적 유제’로 여겨진 것이었으나, 모든 것이 비용으로 환원되는 글로벌 자본주의에서는 대기업들의 강력한 경쟁무기로 전화될 수 있다.7) 왜냐면 하청체계가 제공하는 비용감소와 생산성상승 효과는 명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체계의 관계는 모기업이 하청기업들의 생산품목, 노동과정, 그리고 가격형성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여기서 대기업들은 ‘이중구조’로부터 등장하는 모든 장점들을 누릴 수 있는데, 그것은 비단 중․소․극소기업들에서의 싼 임금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들은 직접 경영적으로 통합함이 없이도 작은 기업들에게 아주 높은 수준의 특화를 요구할 수 있다.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와 ‘범위의 경제(economies of scope)’의 유연한 결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해 반드시 자본참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종속을 강제하기 위해서는 모기업이 유일한 혹은 지배적인 고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엄격한 품질관리, 적기생산(just-in-time-production)을 가능케 하는 정확한 부품공급이 쉽게 관철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당연히 모기업은 하청기업들과의 공동연구와 개발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이들에게 기술 및 자본원조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극소기업들에게 이것은 희망사항으로 머무를 뿐이다.
우리는 이제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에 포드주의적 형태와는 다른 성장의 역동성이 존재했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일본과 이후 한국의 ‘기적’이란 바로 대중소비가 복지국가적 개입 없이도 다른 방식으로 가능해졌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일본의 예를 들어보자.
1950년대와 60년대 일본 경제성장의 역동성은 실질임금소득의 상승을 기반으로 한 서유럽의 포드주의적 성장구도의 역동성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일본에서의 발전은 오히려 반대의 경향을 보인다. 실질임금 상승의 억압은 기업이윤의 증가와 함께 보다 넓은 투자공간의 확장을 가져왔다. 이것은 투자재 생산부문의 팽창을 유도했고, 일종의 ‘투자열풍’을 가져왔는데, 이의 성공은 두 가지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소비재 수출의 성공, 그리고 둘째는 생산재 수입의 통제가 바로 그것이다. 실질임금상승의 억압을 통해 발생할 국내수요의 약세는 일본제 상품들의 외국정복을 통해 보상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산업의 경쟁력은 여전히 뒤떨어진 것이었으며, 투자재 생산부문의 팽창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이 잘 조화되어야만 했다. 일본의 다양한 수출포상과 무역장애는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후에 ‘원 셋(one set)’이라고 불려지는 경제구조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다른 나라와 어떠한 무역 보완효과를 허용하지 않는 일본만의 독특한 구조이다. 바로 여기에서 또한 전후 일본 자본주의 발전의 한 특수성을 찾을 수 있는데, 국외수지가 불균형에 빠지면 빠질수록, 국내의 발전은 더욱 조화롭게 된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원 셋’ 구조가 정착되자마자, 모든 수출의 성공은 - 처음과 같이 낮은 임금을 통해서든, 아니면 나중에서와 같이 앞선 생산성을 통해서든 - 곧 바로 대규모의 무역흑자로 나타났는데, 왜냐면 수출이 - 원료들을 제외하고는 - 이에 상응한 수입을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위와 같은 성장의 역동성을 우리는 숫자로서 표현할 수도 있다. 1955년에서 1970년까지 가계소비는 연평균 8.2% 증가한 반면, 총설비투자는 매년 평균 17.8% 늘어났다. 이 기간동안 수출은 연평균 14.5% 성장함으로써 수출공세를 실감나게 한다. 처음에는 의류였지만, 곧 라디오와 텔레비전, 또한 곧 바로 자동차 등으로 이 수출공세는 이어졌다. 1955년 일본은 겨우 17만대의 자동차들을 생산했지만(당시 미국 생산량의 50분의 1이다), 1970년 530만대(당시 미국의 3분의 2 수준이다), 그리고 1980년에 1100만대를 생산하게 된다(당시 미국보다 5분의 1이 더 많다).
이러한 축적전략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경제의 급격한 구조변화를 가져왔다. 노동력의 부족에 의해 야기된 생산의 협애화의 결과, 1960년대 중반이후 임금 역시 눈에 띄게 상승하면서 일본에서도 소위 대중소비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러나 소극적인 ‘복지국가적’ 조치들은 1970년대에 들어서야 현실에 도입되는데, 이 시기는 물론 다른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포드주의’의 위기가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때였다.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에서 성장의 역동성 역시 ‘주변부 포드주의적’이라기보다는, - 그 변형들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 오히려 일본 쪽에 더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에서는 경제의 후진성, 국가의 보다 강력한 역할 및 ‘채무에 의존한 공업화 전략’이라는 특수한 계기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우 역시 노동운동의 지속적 탄압을 통해 실질임금소득의 상승을 저해하였고, 이에 따른 내수의 결핍을 수출에서 보완하려는 성장전략이 지배적이었음은 물론이다.
V. 결론
이상의 논의에서 필자는 일본과 한국의 예를 들어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라는 분석틀을 작성해 보았다. ‘유럽적인’ 혹은 ‘포드주의적인’ 성장과정이 노동운동의 정치적 인정, 곧 ‘계급타협’을 토대로 했던 반면, 아시아 몇몇 국가들의 고도성장과정은 이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관계들을 전제로 했다. 일본에서 그것은 노동운동의 분열과 패배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한국의 경우에는 노동운동의 억압이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서유럽에서의 ‘계급타협’이 ‘복지국가’를 낳았다고 한다면, 노동이 배제된 일본과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자본측에 유리하게 개입하는 일종의 ‘업적국가’를 발전시켰다. 이 두 나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본의 독특한 배열관계(생산․금융․상업자본의 결합 및 대기업들의 중․소․극소기업들의 지배와 위계화)는 무엇보다 이 업적국가의 경제적 개입과 관련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상황의 결과, 한국과 일본은 성장의 역동성에 있어서도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구분되어진다. ‘유럽적 성장과정’이 실질임금소득의 상승과 이에 기반한 전체 국민경제의 상대적으로 균형적인 발전으로 특징지어 진다면, 한국과 일본에서 성장의 동인은 수출과 높은 투자율이었고, 또한 계획적으로 세계시장을 지향한 축적전략과 이를 통해 가능해진 급속한 산업구조변화가 성장과정을 특징짓는다고 지적할 수 있다.
이 글은 ‘아시아적’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설명을 위한 한 예비적 모색에 불과하다. 한편으로 제시된 분석범주들의 보다 엄밀한 이론적 개념화가 필요할 것이고, 다른 한편 관찰대상 국가들의 확대를 통한 분석범주들의 경험적 검증 역시 요구된다. 일본, 한국, 동남아 국가들을 휩쓴 최근의 ‘아시아 위기’를 고려할 때,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성장구도와 같은 독자적인 분석틀은 더욱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아시아 위기’란 결코 ‘유교주의적’ 미덕으로부터는 설명되어지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뿐만 아니라, 이 위기가 궁극적으로 이 지역 자본주의국가들에서 고도성장을 만들어낸 성장구도 자체의 위기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 콜로키움 토론 정리 >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을 통해 아시아적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적 해석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발표자의 의도는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지점에 있어서 문제제기와 토론이 있었다.
1) 유럽중심주의적이라는 평가
우선 발표자가 본문에서 헤겔, 맑스, 베버를 관통하는 유럽중심주의를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치 평가에 있어 맑스에 대한 평가가 올바른가 하는 문제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세계적 확장, 전자본주의에 대한 폭력적 전복, 특히 (반)식민지에 대한 착취관계를 지적하면서 진보 또는 혁명의 가능성으로서 인도와 중국을 바라보며, 특히 맑스가 인도의 세포이 반란 등에서 오히려 단초를 찾기도 했다는 것이 비판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여기서 맑스는 문명화과정 자체는 인정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곧 자본을 위한 문명화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2) 발표자가 사용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적 패러다임의 재구축
그것은 오히려 맑스주의적인 입론에 바탕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발표자는 유럽적 성장구도와 아시아적 성장구도를 대비시키는데, 사실 그의 이론적 근거인 포드주의론자들이야말로 유럽중심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제기의 핵심이었다. 이 지점은 첫 번째 문제제기와도 연결되는데, 맑스에 대한 유럽우월주의 또는 유럽중심주의라는 평가는 맑스 당시의 정보부족으로부터 찾아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표자의 이론적 근거인 포드주의자들은 애초에 유럽만 분석했다는 것을 한계로 가지고 있다.
3) 시기의 애매함
발표자가 내용적 근거를 포드주의에 근거하다보니 전후의 자본주의 발전 양상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시기가 애매해진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특히 파시즘은 유럽과 아시아를 넘어서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것이 지적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또한 70년대까지를 주로 서술하는데, 슘페터주의든 또는 포스트 포드주의든 80년대를 서술하려면 그것은 아시아적․유럽적이 아닌 선진자본주의 축적전략의 일반적 변화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도 지적되었다.
4) 분류기준의 협소함
이러한 시기의 제한성은 또한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협소한 시각을 가져온다는 지적이 있었다. 발표자의 글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동일한 모델인 것처럼 서술되고 있다. 물론 한국이 일본의 발전을 따라갔기 때문에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2차대전 이전의 자본주의 발전과정이 이미 상이하고 따라서 2차 대전 이후에도 같은 모델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 지적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또한 제국주의적 질서속에서 일본이 차지했던 위상이 정당하게 평가되고 있지 못한 측면도 같이 지적되었다.
5) 한국과 일본의 차이
네 번째 지적과 연결되는 것으로 발표자의 한국과 일본 비교는 두 국가간의 차이가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조 형식만 보더라도, 일본의 기업별 노조가 한국처럼 파쇼적 억압하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한 운동적 관점으로 볼 때 춘투 중심의 일본의 경제주의적 노동조합과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의 차이가 크다는 것은 87년 이후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통해 지적되었다. 또한 이와 유사한 지적은 한국과 일본에 대한 비교를 넘어서 유럽의 영국과 독일에서 자본주의가 조직되는 방식 또한 상당히 다르다는 지적을 통해서도 제기 되었다.
6) 자본주의발전에 대한 통사적 접근
발표자의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분석이 통사적으로 본 것이 아닌, 2차대전 이후의 축적모델의 대비에 머물렀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전지구적 성격, 세계시장과의 관련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이 중점적으로 지적되었다.
7) 잉여가치적 문제의식
자본주의 축적을 설명함에 있어서 잉여가치적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것과 맑스적 의미의 ‘본원적 생산양식으로서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부당하게 적용하고 확대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8) 초과착취 개념의 간과
유럽식 자본주의를 분석함에 있어서 유럽의 계급타협이 가능했던 물적조건으로서의 초과착취에 대한 설명이 간과되었으며, 제3세계에 대한 초과착취는 하나의 양태로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요인들로 짚어져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9) 개념의 명확성
발표자가 차용하고 있는 여타의 개념들, ‘포드주의적 축적’, ’업적국가‘ 등에 대한 개념의 재고와 명확한 사용이 지적되었다.
10) 한계와 의의
한계와 의의측면에 있어서, 역사분석이라면 세계자본주의체제 내에서의 위치를 평가했어야 한다는 측면이 한계로 지적이 되었고, 아시아적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분석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을 떠나서 제대로 분석될 수 없다는 것과 함께 정치개념의 확장 또한 재고되어야 한다고 지적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것에 대한 발표자의 강조는 발표자의 문제의식이 일본의 독특한 경제성장이라는 점에 기반한 것이며, 시간적-공간적 차별성을 갖는 자본주의 발전의 다양성을 가져오는 요인을 분석하다 보니 정치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었다. 그러나 발표자의 분석에서 정치적인 것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의 범위가 모호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 글은 “한국정치학회보” 33집 1호에 게재된
같은 제목의 필자의 논문을 대폭 축약한 것입니다.
1) 싱가포르 정부는 1993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유교주의 학자들을 일종의 ‘유교주의 인터내셔날’의 창립총회에 초대하였다.
2) 이 개념은 당연히 ‘외부로의 정복’을 의미하는 제국주의적 확장을 염두에 둔 것이다.
3) 특히 이것은 한국에서 심한 것이다. ‘평화의 댐 사건’,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 등등 우리는 숱한 예들을 들 수 있다.
4) 물론 일본의 경우 80년대, 그리고 한국의 경우 90년대 이후 산업정책의 큰 변화가 있었다. 국가의 지도는 간접적인 것이 되고, 민간부문의 자율성이 보다 강화된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이 변화는 재벌들의 어마어마한 중복․과잉투자로 이어져, 소위 ‘IMF시대’를 준비하였다.
5) 그 차이는 무엇보다 한국 재벌들의 혈연적․폐쇄적 성격, 그리고 한국에서 이 착종관계들의 발전에 있어 국가의 보다 강한 영향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6) 고용의 이중구조는 기업의 이중구조에 상응한 것이다. 일본 오사카 지역의 중․소․극소기업들을 조사한 한 경험연구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확인하고 있다. 1. 60%의 모든 극소기업들(고용인 9인 이하)의 경우 노동조건의 최소기준을 정하는 하등의 고용원칙이 존재하지 않았다. 2. 90%이상의 조사대상기업에는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와 함께 노동조건들에 대한 형식적 협상 역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3. 이들 작은 기업들에서의 임금은 대기업에 비해 명확히 낮은 수준이다 (평균적으로 40%가 더 적다). 4. 기업이 작으면 작을수록, 노동시간은 더 길었다. 5. 휴가일은 기업이 작을수록 더 짧았다.
7) 이 하청체계는 특히 수출지향적 산업에 발전되어 있다. 1985년 일본 전자산업의 85.3%, 자동차 산업의 87.7%, 정밀기계산업의 80.9%의 기업들이 순수하청기업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