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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혹은 김대중을 위한 변명

현장에서 미래를  제45호
이진경






칼 럼
마녀사냥, 혹은 김대중을 위한 변명

이 진 경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휴머니즘’과 ‘근대적 이성’ 시기에 나타난 마녀사냥

서양에서 마녀사냥은 15세기초부터 산발적으로 시작하여 15세기말에 이르면서 본격화되었다. 장-미셀 살망은 1480년에서 1520년까지 기간과 1580년에서 1670년에 이르는 두 기간이 마녀사냥의 역사에서 획을 긋는 중요한 두 시기였다고 말한다. “이 두 시기는 특별히 그 규모의 방대함과 정도의 심각성에서 의미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15세기말과 16세기초에는 희생자들의 수도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더러 사냥의 주축은 종교재판소였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날 무렵에는 세속법정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잔인한 탄압을 자행했다”
기묘한 것은 마녀사냥의 역사에 획을 긋는 이 두 시기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휴머니즘’의 시대로 잘 알려진 르네상스의 절정기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갈릴레이, 데카르트, 뉴튼, 라이프니치 등으로 대표되는 과학혁명이 서양의 근대 문명에 확고한 기초를 놓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너무나 상반되게 보이는 이러한 시기적 일치는 다른 사태를 함께 생각한다면 첫 인상만큼 아이러니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와 로마로 상징화된 서양 문명의 원천을 찾고 문명화의 시작으로 알려진 르네상스 시기는,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불려지지만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90%(!) 가까이를 죽이던 대 야만과 학살의 시기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지리학과 지도제작법의 발견은 이를 위한 항해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또한 데카르트가 신에게서 ’나‘라는 주제가 존재하는 것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실에 기인한다면서 근대적 주체의 독립을 선언한 17세기는 부랑자, 가난뱅이, 게으름뱅이, 광인 등을 ’종합병원‘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에 대대적으로 가두던 대감금의 시대였다. 다시 말하면 휴머니즘적인 근대적 문명은 이처럼 미개와 야만이라는 이름으로 타자들을 침략하고 학살함으로써 탄생한 것이고, 근대적 이성은 광기와 비이성이란 이름으로 타자들을 감금하고 억압함으로써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러한 시기가 마녀사냥이라는,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탄압과 학사의 시기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 역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사실 우리는 마녀라는 말에서, 부글부글 끓는 물에다 도마뱀과 쥐똥, 고양이 꼬리와 달팽이 껍데기 등속을 넣고 침을 다섯 번쯤 뱉으면서 오줌을 한 바가지 쏟아 붓고는 활활 타는 불로 삼일 쯤 달여 신기한 마법의 약을 만드는, 검은 두건 아래 코가 길게 불거져 나온 노파를 쉽게 떠올린다. 어린아이가 별다른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을 때, 짝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에 대한 사랑에 들끓게 만들고 싶을 때, 혹은 상사병에 죽어 가는 여인을 치유할 때, 바로 이런 마녀나 마법사의 신기한 마술적 능력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에서, 혹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이런 마녀나 묘약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아마도 경외와 공포가 만들어낸 상상이요 환상의 산물일 것이다. 하지만 상상과 환상의 이유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필자의 연배 정도라면 생소하지 않은 것이 ‘할머니’라는 존재와 결부된 민간요법이다. 여기에도 자신의 피나 어린아이의 오줌, 고양이와 뱀, 지네나 자라, 쑥과 미나리 등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것은 서양에서도 임상의학이 탄생하여 자리잡은 19세기 이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동물들의 어떤 성분이나 신기한 약초들, 혹은 평범하지만 때론 약이 되는 재료들을 잘 알아서 여자들이나 어린아이의 치료와 간병에 ‘신통력’을 발휘한 할머니나 여인들, 혹은 전문가 냄새를 충분히 풍기는 마법사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그런 역할을 했다. 별을 보고 점을 치며, 손금을 보고 인생을 예언하고, 신기한 부적을 만들고 약을 제조하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모든 금속을 금을 만들려던 연금술사들의 마술이 여기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것이었을까?


타자이자 속죄양으로서의 마녀사냥

범부들이 이런 사람들의 신통한 능력에 대해 신이나 악마를 연상케 하는 어떤 상상을 하고 표상을 갖게 되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것이었을 거다. ‘이처럼 병이나 운명에 대해 잘 알고 그것을 고치고 복종시킬 능력이 있다면, 이들이 우리 같은 범부들의 삶이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이러한 태도와 삶, 사고방식과 치료방식은 정말로 사람의 능력, 인간의 세계에 속한 것이라고 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많은 문학 작품에서 보이듯이 악마적인 능력이고, 인간의 힘을 넘어선 세계의 속하며, 그런 점에서 인간의 ‘타자’였다. 그렇다면 인간의 얼굴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고, 인간이 세계의 척도로서, 만물의 중심에 확고히 서야 한다고 믿기 시작한 ‘휴머니즘’의 시대에 그들이 본격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차라리 이해하기 쉬운 일처럼 보인다.
또한 그들이 병이나 사람, 사물을 다루고 그것을 사유하고 인식하는 방법은 아무리 보아도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원리에 따라 획득할 수 있는 사유의 세계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아무리 잘해보아도 과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누구든 동일한 절차에 따라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시대에, 행하는 사람의 신통력이나 신비로운 비술로 전해지는 마술과 마법은 과학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성이 모든 진리의 올바른 기초여야 하며, 과학이 유일하게 참된 지식이 되어야 했던 시대, 이를 위해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모든 태도와 사고방식이 사라지고 제거되는 것이 문명이라고 생각했던 시대에 그들이 대대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근대 과학혁명의 총아였던 뉴튼 역시, 이른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연후에도 연금술과 마술에 수많은 시간을 쏟아 붓던 마술사였던 점을 안다면. 우리가 과학과 마술 사이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계선이 생각처럼 분명하진 않았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바로 그것이 어쩌면 마술이나 마법에 대해, 혹은 마녀나 마법사에 대해 잔혹한 탄압을 행했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그 경계를 ‘명료하고 뚜렷하게’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마술’이나 ‘마법’, 혹은 ‘마녀’나 ‘마법사’라는 명칭은 인간이란 이름의 문명, 이성과 과학이라는 이름의 문명이 탄생하여 자신의 영토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그와는 다른 삶이나 사고의 방식,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녀사냥이란, 이전에는 공존했던 상이한 삶과 사유의 방식 가운데서, 인간이나 이성 내지 과학이라고 불리는 방식이 지배적인 것, 다수적인 것으로 자리잡으면서 만들어 냈던 타자요 속죄양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것’, 이성이 ‘아닌 것’을 통해 인간이란 무언지, 이성이란 무언지를 정의하고 알려면, 그 ‘아닌 것’의 세계에 들어가면, 혹은 그 타자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한 얼마나 끔찍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가시화함으로써 인간과 이성의 세계의 안전을 ‘증명’하는 일종의 논증방법이었다.


마녀사냥의 몇가지 특징

종교 재판소에서 주도했든 세속 재판소에서 주도했든 간에, 마녀사냥이 행해지며 나타났던 중요한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일종의 가시적인 구경거리(스펙터클)로 행해졌다는 점이다. 마녀나 마법사란 악마적인 존재이기에 비난과 배척의 대상이었지만 강력한 힘을 갖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찾아내 마녀임을 ‘입증’한 연유에도, 그들이 또 어딘가서, 우리의 삶에 이어진 어떤 공간에 숨은 것이 아니라 신과 재판소의 힘에 의해 대중들의 세계로부터 제거되고 사라져간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는 특히 마력적인 두려움이 강했던 르네상스 시대엔 더욱 그랬다. 혹은 이 다른 종류의 삶이나 사고방식은 극도로 강력한 처벌을 통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의 색출과 취조는 물론 처형 역시 대중적인 제의(祭儀)로서 행해졌고, 처벌의 고통을 극도로 증폭시키면서 그것의 사라짐을 가시화하기 위해 일관되게 화형(火刑)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타자적인 삶이나 사고방식의 조그마한 쪼가리라도 인간들의 건전하고 이성적인 삶의 세계에서 남아 있어선 안된다는 생각을 명료하고 뚜렷하게 가시화했다.
둘째, 문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악마적인’ 태도나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어떤 개인이 실제로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는지 아닌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그러한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이면, 혹은 그런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비난하는 소문이 있다면, 그는 저 끔찍한 처형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악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의 신체를 접수하고 그를 종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무서운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철없는 어린 아이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도 유죄의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로 인해 직접적 당사자 이외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경우가 발생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악마와의) 전쟁에서 무고한 민간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무서워 전쟁을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로 인해 마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폭력과 고문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두렵고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적 능력의 소유자이기에, 그들을 취조하는 것은 평범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죄를 인정하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중요했던 만큼 이를 위해서는 속임수와 함정을 이용하는 것도 불가피하다. 살망이 전하는 예를 보면, 피소된 사람에게 “그대는 마법사의 존재를 믿는가?”라고 묻는 것은 함정을 담고 있는 질문의 하나다. 만약 이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이는 마법사도 없고 악마도 없다는 대답이 되므로 처형되어 마땅한 이단자로 몰리게 된다. 반대로 ‘녜’라고 대답하면 이제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된다. “언제 어떻게 누구를 알게 되었지?”
넷째, 사정이 이러한 만큼 언제나 ‘여론’과 사법장치의 합동작전이 벌어진다. 저 사람이 마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 그 증거를 보았다는 사람들, 혹은 그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것은 모이면서 증폭되어 소문이 되어 세찬 광풍을 만들어낸다. 종종 그 바람에 창문도 깨지고 다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론 마녀임을 증명하거나 제거할 순 없다. 그 바람이 실어다주는 사람에게서 마녀의 징표를 찾아내고, 처형의 근거, 자백을 찾아내는 것은 종교재판소나 세속법정이라는 사법장치의 역할이었다. 사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여기서 여론이나 소문은 그다지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 두 사람의 밀고만으로도, 혹은 필요하다면 조작 내지 유도된 한 건의 고소만으로도 마녀로 입건하는 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결정적인 것은 이 모든 탄압이 사법적 장치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종교나 국가라는 거대한 제도적 권력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마녀사냥은 종교나 국가가 타자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가한 사법적 폭력이었다는 것이다.


마녀사냥에 대한 오해, 연씨 부인 사건

그러나 마녀사냥은 그 시기 이후에 끝난 것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진 않은 것같다. 알다시피 50년대 이후 수많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추방하고 내쫓은 매카시즘은 이런 마녀사냥의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그것은 미국 자본주의라고 하는 지배적인 삶의 방식, 돈과 관료적 장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태도를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타자, 빨갱이 마녀로 만들어버렸던 금세기 최대 규모의 마녀사냥이었다.
언론과 국회라는 가시적인 무대에서, 이런 식으로 살면 어떻게 된다는 범례를 일종의 스펙터클로 만들면서 행해졌다는 점에서, 또 주변 동료나 프락치 등의 간단한 밀고만으로,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임을 확신하고 추궁하는 데 충분하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또한 이러한 대학살을 위한 각각의 경우마다 속임수와 함정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매카시의 명단조차 조작이고 거짓이며 속임수였다는 점에서, 나아가 이러한 사태 전체가 언론이 주도하는 ‘여론’과 의회와 사법적 장치는 물론 정보부나 경찰 등의 국가적 폭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마녀사냥의 중요한 특징 또한 정확하게 공유한다.
우리가 사는 한국이라는 이 나라 역시 빨갱이라는 밀고나 소문이면 마녀로 몰기에 충분했기에, 걸핏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가 되어 죽어야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타자 한 두 사람의 밀고만으로도, 혹은 종종 속임수와 함정, 거짓으로 취조와 처벌이 행해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법과 국가장치의 폭력에 의해 자행되는 등, 마녀사냥의 중요한 양상들을 공유하고 있는 점에서 틀림없는 마녀사냥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빨갱이라는 말은 심지어 확신을 갖는 사람들 자신조차 드러내선 안될 것, 인정해선 안 될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마녀사냥은 한국에서 사는 우리의 삶에서 볼 때 정확하게 현재적이다.
당대적인 역사 속에서 이런 사태의 끔찍함을 충분히 겪어서일까? 아니면 그 와중에서 자신 또한 빨갱이라는 마녀사냥식의 비난에 평생을 시달려서일까? 아는 바와 같이 얼마 전에 김대중 대통령은 한동안 전국을 휘저어놓은 불미스런 사태에 대해 국민여론의 이름으로 행해진 ‘마녀사냥’에 대해 명확하고 뚜렷하게 절단하고 나섰다. 법적으로 잘못이 없다고 밝혀진 전 검찰총장 부인이 마녀사냥의 희생물이 되는 것을 적극 막고 나서서 세간의 구설수에 올랐다. 물론이다. 아무리 분노가 끓어도 멀쩡한 사람을 마녀로 만들어선 안 되고 속죄양으로 삼아도 안된다.
확실히 그것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용기 있는 발언이었다. 나는 여기서 그가 귀가 막혀있느니, 국민을 무시한 처사니 하는 세간의 비난은 과감히 무시하겠다. 대체 어디가 막혀 있다는 것인가? 여론의 비난은 귀머거리 귀에도 들어갈 정도였기에, 귀가 막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더구나 자타가 공인하는 정치 9단 아닌가! 국민을 무시한다고? 그럴 리가 없다. 국민의 거대한 힘을 타고 들어선 국민정부가 아닌가. 문제가 있다면 다만 홍보가 부족한 것일 수는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나 시민단체가 좀 더 전달벨트 역할을 열심히 했어야 한다. 국민연금이나 동감 댐에 대한 오해도 바로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건가! 오죽 답답했으면 국정홍보처를 만들었을까? 다만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사태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다. 다 좋은데 그가 마녀사냥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그 말을 사용하는데 부적절한 사례를 들었다는 점이다.
먼저, 모피 옷 사건은 마녀사냥의 본질을 담고 있는 정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배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타자적 삶의 방식이 아니며, 반대로 정확하게도 지배적인 삶의 방식이기에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식의 로비나 뇌물이야 권력의 중심에 그토록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선 일상사가 아닌가?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고 ‘자제’하긴 하지만, 중심 아닌 주변적 권력을 이용하는 사람들조차 그 정도 ‘선물’이야 유난할 것도 없는 일 아닌가? 사실 야당을 하고 있든, 권력의 다스림을 받든 권력의 근처에 이르면 우리라고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우리의 신체와 머리를 사로잡고 있는 지배적인 삶의 방식이 아닌가? 그렇다면 배척되고 억압받는 소수적이고 타자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마녀의 요건에서 연씨 부인은 멀찍이 벗어나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진행의 양상 또한 그렇다. 물론 언론과 여론에 의해 가시적인 구경거리, 스펙터클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선물과 돈을 주었다는 사람의 결정적인 증언, 그 옷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입었으며, 그것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모든 증언들은 ‘아니오’라는 당사자의 한마디만으로 그 모든 효력을 잃었으며, 속임수는 연씨 부인을 소추하면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그분을 보호하는데 사용되었고, 여론을 빌어 유죄를 입증하는데 사법기관의 폭력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여론에 반해 무죄를 입증하는데 사법기관의 ‘폭력’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마녀사냥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연씨 부인 사건은 마녀사냥의 본질이나 양상과 정 반대되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녀사냥의 전형, 조폐공사 탄압유도 건

반면 최근까지도 빈번히 이루어지는 마녀사냥이 이와 대조적으로 전혀 자각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마녀사냥에 대한 오해는 단지 김대중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드러난 것으로 마녀사냥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적절한 사례는 진형구 대검공안부장께서 고백한 조폐공사 건(件)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복종하는 삶이라는 지배적인 삶의 방식, 혹은 IMF하에선 대량해고를 감수해야 한다는 지배적인 사고방식에 반하려는 노동운동을 깨부수고 배척하기 위해 만만하고 적절한 ‘시범케이스’(범례)를 찾아 박살내는 스펙터클을 연출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를 위해 파업을 유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마녀사냥의 정의와 특징을 정확하게 구현하고 있다. 함정과 속임수를 써서 파업을 유도한 뒤, 언론이 떠들어줄 여론과 엄벌백계의 사법장치로 저항하고 싸우는 자들을 박살내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만들어서, 그런 종류의 운동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위축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마녀사냥의 정의와 특징에서 어디 하나 벗어나는 것이 없다. 덕분에 조폐공사 노조는 하고 싶지도 않았던 마술게임을 해야 했고, 조합의 간부 몇 분은 아직도 감옥에서 마녀의 신분으로 억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얼마 전 ‘종결’된 지하철공사의 파업은 이보다 더한 징후를 보여준다. 그것 역시 자본주의와 IMF하에서 지배적인 삶의 거대한 강요에서 벗어나고 그것을 전복하려는 태도를 국가적 장치를 동원해 짓밟고 탄압한 것이라는 점에서 마녀사냥의 전제에 적절하게 맞는다.
시민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악의 소행들을 비난하고, 그것을 언론과 방송 모든 곳을 이용해서 떠들썩한 비난의 여론을 만들며, 그에 대한 대처 역시, 노동운동 전체를 무력화하는 스펙터클로 만들어야 하기에, 결코 조금의 양보도 있어선 안 된다는 극단적인 입장을 갖고 타협의 여지조차 말살된 강경일변도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공세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조폐공사의 ‘유도된 파업’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 거대한 사법 장치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살을 추가하는 것은 사족일 뿐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사태야 일상화된 것이니 이렇게 말하는 게 새삼스럽다. 정작 놀라운 것은 지하철역에서 노조원이 많이 입은 빨간 조끼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사실의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멀쩡한 시민을 두들겨 팬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이나 방송에서 이 어이없는 폭력에 대해 아무런 비판도 없이, 얼마나 불편하고 화가 났으면 그랬겠냐는 식의 논평으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길거리에서 만나 두들겨 패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며, 불행히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다만 옷을 비슷하게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 경우에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이 익숙하고 길든 삶을 뒤흔들고 불편하게 만드는 저 마녀와 같은 존재를 색출해 척살해야 하기 때문이고, 그 각각의 참가자가 정말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수긴 했지만, 이 용기 있는 시민에게 박수를 - 이것이 그 사건에 대한 언론과 방송이 여론을 실어 보도한 문장들의 실질적인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마녀사냥을 허용해선 안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용기있는 발언을 새삼 중시해야 한다. 우리는 그 용기가 진심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그의 이 중대한 발언은 마녀사냥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를 바로 잡기 위한 고뇌에 찬 결단이라고 믿는다. 부디 이 결단 어린 발언이 진지하게 이행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물론 마녀사냥의 정의와 내용에 연관된 오해를 정정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길 다시 당부하면서. 한/노/정/연

‘의료보험, 국고지원 50% 확보와 재정통합 즉각 실시’
100만인 서명 운동에 함께 합시다.

1988년 이후 정부의 지역의보에 대한 국고지원은 갈 수록 감소되어 98년 30%에서 99년 24.5%로 급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99년 지역의보의 재정이 약 4조원인데 국고지원은 1조원에 불과했고 올해 지역가입자들의 보험료 인상 총액이 5,000억 원 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부가 애초의 약속대로 국고지원(50%)을 했다면 불황으로 고통받는 지역가입자들의 보험료를 올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정부는 공적의료보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당장 국고지원 50%약속을 이행해야합니다. 또한 조속한 재정통합을 통해 관리안정화와 사회적 통합을 도모해야하며 누진제를 보험부과에 적용시켜 부과의 형평성을 보장해야합니다.
이에 ‘국고지원 50%확보, 재정통합 즉각실시을 위한 100만인 서명’을 공공의료강화를 위한 연대회의(준)과 전국빈민연합이 전개하고 있습니다. 함께 참여하여 민중의 권리를 확대해 나갑시다.
문의처: 공공의료강화를 위한 연대회의(준) 전화: 02)774-8774. 팩스: 02)774-8773

1999-07-05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