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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자유총선의 성과와 과제

현장에서 미래를  제46호
전 제 성


인도네시아 자유총선의 성과와 과제

전 제 성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박사과정 수료








“개혁시대” 인도네시아 총선


1999년 6월 7일, 인도네시아에서 총선거가 있었다. 44년만에 치루어진 자유 총선이었다. 한달 보름이 넘는 집계과정을 거치고 이제 공식 결과 발표를 목전에 두고 있다. 역사적이었던 만큼 사연도 많았던 이번 총선 과정에, 나는 한국 민간단체(NGO) 참관단의 일원으로 함께 할 수 있었다.1) 적도하의 열광적인 선거캠페인, 폭동과 학살에 대한 루머, 긴장감 넘치던 선거감시, 야당의 약진에 대한 환호, 그렇지만 이제 차분하게 물러나 새로운 인도네시아가 어떻게 모습을 형성해갈지 따져볼 때가 되었다. 선거 과정을 정리하고, 선거의 성과를 밝히고 동시에 선거가 남긴 숙제를 분명히 한 뒤에, 마지막으로 약간의 대선전망을 하는 것으로 이 글의 목적을 정해 둔다. 우선 1년전 자까르따가 불타던 무렵으로 돌아가 보자.

1998년 5월 21일, 경제위기에 따른 사회적 저항과 대외적 압력을 받으면서 수하르또가 물러나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하비비가 권력을 승계하였다. 하비비 대통령은 국민들의 압력을 받으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고양시키고자 좀더 민주적인 지향을 지닌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하비비 과도 정부는,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한 수까르노의 전투적인 “구질서”(Orde Lama), 수하르또의 공작정치적 “신질서”(Orde Baru)에 이어, “개혁 질서” 혹은 “개혁 시대”(Orde Reformasi)라 불리게 되었다. 이런 이름에 걸맞게 하비비 정부는 언론 통제와 노동조직 통제를 완화하였고, 일부 정치범을 석방하였지만, 과도정부로서 하비비 정부 최대의 정치적 임무는 조기 총선거와 대통령선거의 수행이었다.


Surabaya PDI-P 민주투쟁당 선거 Campain

경제위기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1997년 5월에 총선이 있었다. 여당이 압승한 1997년 총선은 수하르또 친족과 그 수하들의 가족들이 무더기로 당선된 ‘측근 선거’(crony election), 일부지역에서 재투표가 실시될 정도로 선거부정이 자행된 ‘타락 선거’, 320여 명이 숨졌다는 점에서 수하르또 체제 역사상 최대의 ‘폭력 선거’였다. 이는 곧이어 밀어닥친 경제 위기와 수하르또 몰락의 ‘서곡’이었다. 경제 위기와 민주 항쟁의 와중에서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허다한 목숨을 잃어버리는 고난을 겪으며, 그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흥미롭게도 다시 선거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


(1) 국민협의회 개최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정치 관계법을 개정하고, 명확한 선거 일정을 잡아야 했다. 정치개혁 입법과 선거일정을 논의하기 위해 1998년 11월 10~13일에 국민협의회(MPR)가 개최되었다. 그 과정에서 ‘개혁 철저, 구속 수하르또, 하야 하비비’를 외치는 학생 시위대에게 진압군경이 발포하여 16명이 목숨을 잃었다. 급진적인 학생들은 군의 정치 사회 개입 근절, 수하르또의 범죄와 재산축적에 관한 구속 수사와 함께, 수하르또의 ‘양아들’은 하비비 정권 하에서 선거란 무의미하다며 ‘존경받는 인물’로 과도기 대통령을 선거 이전에 먼저 선출하자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비상계엄의 보호 속에서 개최된 국민협의회의 관심은 기존 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점진적인 개혁이었다. 그 후 의회법, 정당법, 총선법의 초안작성위원회가 입법초안을 국회(DPR)에 제출하고 국회는 1999년 1월 28일 입법 계획상의 최종 시한에 맞추어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또 국회는 1999년 6월 7일에 총선을, 11월에 대선을 치르는 정치일정을 확정하였다.


1959년 이래 인도네시아 정치체제를 규정해온 ‘1945년 헌법’에 따르면,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이 국회(DPR)와 국민협의회(MPR)로 나뉘어진다. 우리나라 유신시대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연상시키는 인도네시아 국민협의회는 공식적으로 국가최고권위체이며 5년마다(통상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 모여서, 국가정책의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5년 임기의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한다. 이번 6월 총선은 국회(DPR)와 지방의회(DPRD I, DPRD II)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였고, 11월의 대통령선거를 치르려면, 이번에 선출되는 국회의원에 임명직 군부 국회의원과 임명직 국민협의회의원을 합하여 국민협의회를 구성하여야 한다. 달라진 의회법에 따르면 이번 총선에서 선출되는 중앙 국회의원의 수는 462명이었다.


(2) 선거 참여 정당이 48개


총 48개 정당이 선거에 참여하였고 집권 여당 하나를 제외한 47개 정당이 야당이었지만 대부분이 보수주의적 정당들이었다. 정당 수는 많았지만, 선거과정에서 두드러진 정당은 5개  뿐이었다. 현 대통령 하비비(Bacharudin J. Habibie)의 골까르당(Partai GOLKAR), 수까르노 초대 대통령의 딸 메가와띠(Megawati Sukarnoputri)의 민주투쟁당(PDI-Perjuangan), 수하르또 체제에서 제 1야당이었던 근본주의 이슬람 정당 통일개발당(PPP), 자바 농촌의 3천 7백만 무슬림을 회원으로 둔 나흐다뚤 울라마(NU) 의장 압둘라만 와히드(Abdurrahman Wahid, 일명 Gus Dur)의 전통주의 이슬람 정당인 민족각성당(PKB), 1998년 5월 정국에서 수하르또에게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아민 라이스(Amien Rais)의 현대주의 이슬람 정당 국민수권당(PAN)이 ‘5대정당’(Big 5)이었다.

48개 정당 가운데 국가이념(Pancasila)에 동의하는 정당이 골까르당과 민주투쟁당 등 35개, 이슬람만을 이념으로 내건 정당이 통일개발당, 월진당(PBB) 등 10개, 국가이념과 이슬람을 동시에 인정하는 정당이 3개 군소정당이었다. 4개의 노동자 정당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집단행동을 억제하는 이념적 장치였던 국가이념에 반대한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볼 때, 이슬람 근본주의 10개 정당들이 맨 오른 쪽에 자리하고 있다면, 왼쪽 끝에는 민중민주당(PRD)과 인도네시아단일민주당(PUDI)이 있었다. 좌파학생운동조직에 기반하여 1996년에 창설된 부디만(Budiman Sudjatmiko)의 민중민주당은 “민중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정당이념을 내걸었고, 유명한 정치범 스리빈땅(Sri Bintang Pamungkas) 박사가 1996년에 설립한 인도네시아단일민주당은 “종교적 민주주의”라는 모호한 정당이념을 내걸었지만 좌파적인 정책을 제시했다.

독재 시절의 선거에 비하면 이번 선거과정에서 선거폭력이 놀라울 정도로 감소했으며, 대부분의 지역에서 비교적 투명하고 공정하게 치루어졌다는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2억 인구 가운데 1억 천만 명이 등록된 유권자이고, 이 중에서 1억명(93.54%)이 투표권을 행사했다. 지루하도록 늦은 집계과정을 거치고 언론에 발표된 의석 점유 결과에 따르면, 민주투쟁당이 154석, 골까르당이 120석, 통일개발당이 58석, 민족각성당이 51석, 국민수권당이 35석, 또 다른 이슬람 정당 월진당이 14석, 13개 군소정당이 1~6석의 의석을 얻었고, 그 밖의 정당들은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총선의 성과


(1) 개혁적인 정치 관계법 제정


투표소(TPS) 투표/개표과정

이번 총선은 제도적인 진전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총선을 치르기 위해 의회법, 정당법, 선거법이 개혁적인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하비비 정권은 학생들의 급진적인 요구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무력을 동원하여 우회할 수 있었으나, 의회에서 야당과의 논전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여당은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원하는 여론의 포위 압박 속에서 야당과 타협하면서 민주적 대의제도와 다원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 입법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선출직 의원의 수를 늘여 의회의 국민대표성을 강화하고, 군부에 대한 의석 할당을 절반으로 줄였고, 정당의 수를 제한하지 않는 실질적인 다당제 시스템을 갖추었고, 공무원의 정당활동을 제한하고, 내무부 소속이었던 선거관리위원회를 독립시켰다. 또한 지방조직이 잘 갖추어진 여당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소선거구 상대적 다수제 투표 방식이 야당의 반대로 온전히 관철되지 못했다. 이러한 모든 입법 내용은 미진하지만, 인도네시아 민주주의를 진일보시킨 개혁이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의회법, 정당법, 선거법 개정의 핵심

 

개정이전

개정안

의회

MPR 의원수

      구성

DPR  구성

 

1.000 

500임명직 

500DPR의원 

425선출직 

75임명직(군부) 

 

700 

200임명직(지역 135, 사회조직 65) 

500DPR의원 

462선출직 

38임명직(군부) 

정당

당의 수

공무원

 

야당 2개로 제한 

여당 자동편입 

 

정당의 수 제한없는 실질적 다당제 

공무원과 군인, 정당활동과 공무수행 병행금지 

선거

선거방식

선거관리위원회

 

주단위 비례대표제 

내무부 소속 

 

시?군단위 득표반영한 주단위 비례대표제 

독립기구로 설립 


(2) “개혁 정당”의 약진과 민간운동단체의 성장


민주투쟁당, 민족각성당, 국민수권당, 즉 3대 “개혁 정당”이 240개 의석을 확보하여 골까르의 120석을 압도하므로 야당의 압승이라 할 수 있고, 가장 많은 의석을 얻은 민주투쟁당의 전도가 밝다고 볼 수 있다. “개혁 정당”이 크게 약진함으로써 여당과 군부는 이제 정치사회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야당을 무시하고는 정국을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인도네시아 민중들은 국회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부분적으로나마 관철시킬 수 있는 통로를 갖게 된 것이다. 선거전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까르따와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 수라바야의 가난한 민중들은 민주투쟁당과 민족각성당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고, 한국참관단의 면접조사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한 자까르따, 수라바야, 메단의 노동자들은 민주투쟁당을 가장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전국노동당(PBN)을 비롯한 4개 노동자 정당과 민중민주당(PRD) 같은 좌파 정당들은 0.1%도 얻지 못하고 참패를 당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자 정당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노동자정당이 분열되어 있었고, 각기 기반으로 삼는 노동조합이 달랐기 때문이고, 노동조합에 포괄된 노동자들마저도 노동자의 권익신장을 대한 노동자 정당의 역할을 실감한다기보다는 여전히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방어막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듯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표가 ‘사표’(死票)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민중주의’(populism)를 풍기는 민주투쟁당에게 표를 던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반독재 학생운동조직에 기반한 민중민주당(PRD)은 선거경쟁을 위한 정당이라기보다는 투쟁 조직이었다. 선거가 끝난 뒤에 선거 졸전에 대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은 PRD의 부디만 의장은, 민중민주당은 표를 긁어 모으기 위해 창설된 정당이 아니라고 답했다. 그의 말처럼 PRD는 선거기간 동안에 득표활동 보다는 시위에 주력하는 것 같았다. 아직 이러한 정당들이 정치사회에 자리를 잡기에는 재정적 여건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사회의 이념적 수용폭도 좁은 것 같다.


이번 선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독립 선거감시단의 활약이었다. 국제참관단까지 가세한 선거감시단의 활동은 선거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대외적으로 시위하는 역할을 하여 선거직후 인도네시아 선거의 투명성과 공정성에 대한 국제적 호평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유럽연합 선거감시단 130명, 필리핀 선거감시단(NAMFREL) 100명, 아시아자유선거감시단(ANFREL) 80명 등 국제 참관단 500여 명이 참여하였지만, 주력은 물론 현지 선거감시단이었다. 선거 감시에 현지 독립선거감시단(KIPP), 대학생공정선거감시단(UNFREL) 등의 자원봉사자 94만 5천명이 투입되었다. 특히 KIPP은 1996년 3월에 창설되어 독재시절에도 굴하지 않고 1997년 선거에 9,000명의 감시단을 배치한 경험이 있는 단체였다.


감시과정에서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선거감시활동 방해와 염탐, 자원봉사자에 대한 폭행과 성추행 등이 자행되었다. 선거감시단 조직 내부의 문제도 있었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 민간운동단체가 선거과정의 중심에 서는 것은 이미 대세였다. 그 배경에는 국제적 지원이라는 막강한 ‘화력’이 있었다. 세계 각국의 선거 원조금을 거두어들인 UNDP는 그 돈의 일부를 떼어 현지 민간운동단체들의 유권자 교육과 선거감시 활동 비용을 보조해 주었다.

(3) ‘선거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의 진전


수하르또 시절에 선거는 “민주주의의 향연”(festival of democracy)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정치 쇼’ 였기 때문에 “선거는 일종의 농담”이라는 식의 냉소와 불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몇몇 학자들은 수하르또 시절의 선거를 “국가적 의례”(national rituals)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 의례는 선거캠페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투표로 마감된다. 열광적인 캠페인은 민중의 정치적 좌절을 방출하는 카타르시스(catharsis) 수단이다. 사실상 선거유세는 대중의 흥분을 조장하는 스타일로 진행되어 왔다. 분위기를 돋구는 당둣(dangdut) 노래 공연, 정당 인사와 지방 명사의 선동식 유세, 폭음을 울리며 시내를 활개치는 오토바이 행진 등이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투표일은 일정한 냉각기간을 거친 뒤에 치루어지는 진지하고 평화로운 마감의례이다. 유세 기간에 폭력적인 혼란이 전면에 드러났다가는 투표일에 사회적인 조화와 국민통합이라는 질서의 회복으로 열기가 사그러드는 의례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의례 스타일은 이번 선거에서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폭력성은 줄어들고 진지함은 늘어났다. 일부 급진적인 학생운동 세력이 선거 보이코트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유권자 등록은 준비부족에다 홍보부족으로 등록 마감이 한번 연기되었지만, 만17세 이상 선거권자 약 1억 2천 7백만 명 가운데 1억 천 2백만 (88.22%)명이 유권자 등록을 마쳤다. 인구가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주도(主島) 자바섬의 각 주의 유권자 등록율은 89.03-91.63%로 비교적 높은 참여의지를 보여주었다. 최종적으로 확인된 전국투표율도 93.54%로, 자유선거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참여율이라 할 수 있다.

투표와 개표는 중요한 마을 행사로 치루어 졌다. 정부보조금이 적어 투표소를 지을 돈이 부족하자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돈을 거두었고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품앗이를 했다. 투표일은 모처럼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담소를 나누는 날이었고, 개표과정은 마을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지켜보는 훌륭한 오락꺼리였다. 투표 다음날 집계용지와 투표함을 떠나 보낼 때는 선거가 무사히 종결된 데 감사하고 마을의 번영을 비는 마을 의례도 있었다. 투개표는 일종의 마을 잔치였던 것이다.

선거과정에서 고강도 폭력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개혁시대”라고 불리는 여론의 분위기 속에서 기득권 층과 여당이 ‘몸을 사려’ 야당의 약진을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고, 3대야당(민주투쟁당, 민족각성당, 국민수권당)이 선거 공조 성명을 발표했으며, 폭력을 줄이기 위한 정당간 협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도 집회와 시위가 전에 없이 자유로와진 마당이어서 선거캠페인을 더 이상 억눌린 좌절의 카타르시스적 표출 통로로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는가의 여부는 논쟁적이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적어도 인도네시아의 “역진 문화”(rolling back culture)라든가 군부의 음모를 강조하는 시각의 적실성이 감소된 것만은 분명하다. 인도네시아 민간운동단체포럼(INFID)이 외쳤듯이, 이번 선거는 민주화의 길에 “더 이상의 역진은 없다”(No turning back)는 비젼의 설득력을 높여주고, 더 이상 “떠돌이 군중”(floating mass)이라는 멸시가 인도네시아 민중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 루삐아 가치 상승과 대외신용 신장


이번 선거는 또한 경제위기를 정치개혁을 통해 해결해 보려는 아시아 각국의 동시대적 노력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하비비 정부는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부문 개혁에 미화 350억불을 쏟아부었지만 그 성과가 미미했다. 금융부실을 처리해야 하는 법정과 감독기관이 비효율적이고 부패해 있기 때문이고, 이를 시정할 정통성있는 정치 리더십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총선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해법으로서 기대를 모았다. 이러한 기획의 절실함은 하비비 대통령이 “진실되고 공정한 선거” 수행을 약속하면서, 이것이 국가신용을 높이고 경제를 위기에서 건져내는 데 결정적이라고 말한 데서도 잘 드러났다. 일반인들의 소망도 마찬가지여서, 한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9.9%가 선거를 통해 경제가 회복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나는 이번 선거가 인도네시아 경제상황에 대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긍정적 효과를 미쳤다고 본다. 1999년 1/4분기만 해도 경제상황이 바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어떠한 징표도 없었다. 선거가 근접하자 기대반 우려반 속에서 환율이 달러당 8천 루삐아(Rupiah)대에 정체되다가 선거 캠페인이 대부분의 지역에서 큰 사고 없이 마감되자 루삐아 가치가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선거 직후 메가와띠의 민주투쟁당이 선두에 나섰다는 보도가 루삐아 강세를 더욱 부축여 며칠 지나지 않아 7천 루삐아 선에 육박했으며, 최근에는 루삐아가 달러당 6천 7백 대로 올라섰다. 작년 5월의 환율 달러당 1만 5천 루삐아에 견주어보면 ‘루삐아의 대약진’이라 할 수 있다. 주식 시세도 선거 직후 하루만에 12.2%나 뛰면서 700선을 향해 올라갔다. 이런 청신호에 고무된 경제 관료들은 경제가 이제는 바닥에서 벗어나 회복세에 접어들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보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이번 총선이 남긴 미담(美談)의 전부이다.



총선이 남긴 과제


(1) 지역 분리주의의 심화: 아체와 동띠모르


선거기간의 심각한 폭력 사태는 기득권 층의 음모나 정당간 경쟁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 권력과 정당 밖의 ‘변방’에서 발생했다. 선거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 곳은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지역들이었고 대표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가 강한 북부 수마뜨라의 아체와 독립결정선거를 앞둔 가톨릭의 동띠모르였다. 수하르또의 억압 통치가 사라지자 한층 더 용감해진 분리주의자들이,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너희들 선거에 왜 참여해야 되느냐’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유권자 등록 때부터 이미 선거에 대한 거부감이 내연되고 있었다. 동띠모르는 유권자등록율이 43.9%로 최저 등록 지역이었고, 그 다음이 아체로 56.76%였다. 동띠모르 어떤 마을의 등록율은 20%였다고 한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아체해방운동’(Free Aceh Movement)을 격멸하려는 정부군의 9년에 걸친 군사작전 기간 중에, 불법구금, 고문, 강간 등 인권유린과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작년 8월에 군사작전을 종결한다고 공표되었지만, 인권단체는 그 이후에도 100여 명이 더 살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리하여 아체인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선거기간 중에도 북부 아체에서 정부군과 분리주의 단체 사이의 격돌이 있었다. 가장 심각한 사태는 지난 5월 3일 아체의 산업도시 록수마웨(Lhokseumawe) 근교의 한 마을에서 비무장 시위군중에게 군인들이 발포하여 40명 이상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아체의 상당 지역에서 선거가 보이코트되었다. 선거 당일 아침 일찍 아체의 주도(州都) 반다아체(Banda Aceh)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집단에 의해 8개 마을로 배달될 36개 투표함과 투표용지가 불태워졌다. 선거에 참여하면 아체해방군이 손가락을 잘라버린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자치를 요구하는 포스터가 유포되었다. 일부 마을의 초등학교에 아체해방운동의 깃발이 걸렸다. 정부군은 폭동진압용 차량을 타고 마을을 돌면서 확성기로 “투표를 겁내지 말라 ”고 소리쳤지만, 1997년 선거에서 6천명이나 투표했던 어떤 선거구에서는 아침 10시가 될 때까지 단 한 명의 유권자는 고사하고 투표 관리위원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군의 발포로 민간인이 사살되고 저항집단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분쟁이 계속되고 있어, 아체의 일부 지역에서는 결국 투표가 실행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번 인도네시아 총선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선거”(Never Ending Election)라는 농담도 그럴 듯 해 진다. 선관위는 투표집계를 종결하면서 유권자 등록을 한 아체 거주자들 중에서 69.98%가 투표했다고 밝혔다. 44년만의 자유선거라는 유인책에도 불구하고 아체는 자까르따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로 여전히 버티고 있다.

동띠모르의 총선은 자카르따 딴중 쁘리옥 항구에서 함성을 지르고 떠나 투표일 하루 전에 동띠모르를 장악하듯이 증파된 경찰력의 무력시위 속에서 치루어졌다. 그러나 이제 ‘동띠모르 독립 결정 선거’가 일정에 오르자, 숨죽이고 있던 동띠모르가 들끓기 시작하고 있다. 유엔, 인도네시아, 포르투칼의 협약에 따라 경찰력과 경비를 지원하기로 한 유엔 동띠모르지원단(UNAMET, UN Assistance Mission in East Timor)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엔 건물과 차량은 인도네시아 군경의 배후 조정을 받는 듯한 독립 반대 무장세력의 주요 타격 대상이 되고 있다. 8월 8일 예정이던 투표일은 8월 21~22일로 연기되었다. 동띠모르가 맞이할 것이 선거일지

인도네시아 선거 유세장

내전일지에 대해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넘어 민족통합의 문제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던 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2) 방만한 법치와

‘연성 국가’(soft state)


투개표소 단위에서의 문제는 심각한 부정이나 집계 조작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에 법 조항에 대한 해석이 지나치게 유연하여 방만하기까지 한 문제였다. 교육수준이 높고 문화적 자부심이 있어 가장 법이 엄격하게 준수되었을 자바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동부자바 수라바야의 한 투표소에서는 부재자 투표 등록자 1명이 적절한 서류 없이 투표소를 찾아와 투표했으며, 서 너 명의 노인 및 병약자의 투표에 투개표 관리위원과 정당참관인이 동행하여 비밀투표가 보장되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 유권자 등록을 한 3명이 같은 마을 사람이라는 이유로 투표를 허용받기도 했다. 자바 밖의 외방도서들에서는 선거법 위반의 건수와 정도가 이보다 더 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선거과정에서 폭력이 감소하는 반면에 단연 인구의 관심을 끈 것은 “돈정치”였다. 선거 기간에 크게 유행한 단어는 “Money Politics”였다. 현지어 신문에 “Money Politics”라는 영어가 그대로 실리고, 웬만한 일반인들조차 이 단어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여당 골까르는 여러 장관들의 협조를 받으며 150여개 국영기업들로부터 저리대부로 선거자금을 빌어와 각 지구당에 분배했으며, 심지어 국영 근로자사회보장기금(Jamsostek)마저 선거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골까르는 세계은행(World Bank)이 빌려준 사회안전망 사업기금을 자기 당의 융자 프로젝트인 양 위장하면서, 여당이 패배하면 융자금을 곧바로 상환해야 한다는 거짓말로 협박했다고 한다.

이번 선거에서 제일 황당한 것은 하염없이 늦추어지는 투표결과 집계과정이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비교적 순조로운 초반 집계에 고무되어 최종결과를 6월 21일에 발표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6월 21일 선관위는 뾰족한 설명 없이 결과발표를 7월 8일로 연기했다가 그것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국내외 비판이 일자 갑자기 집계 결과를 7월 16일 발표하더니 전국단위 마지막 점검 절차를 거쳐 7월 21일에 공식 발표한다고 했으나 며칠 더 늦어질 것 같다.

집계가 한달 보름을 넘긴 이유는 세계 4위의 인구대국이자 세계최대 군도 국가로서의 집계에 인구지리적인 어려움, 팩스 및 통신 장비의 부실로 인한 기술적인 곤란이 있으며, 군소정당 참관인들이 고의적으로 집계 결과에 서명하길 거부하는 정치적 교착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부 지역은 독립선거감시단체나 정당들의 요구로 재검표를 거쳐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집계가 늦어지는 이유를 투명성의 신장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집계 절차가 비효율적이고 행정력이 취약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다. 일본, 호주, 유럽연합 등 세계각국으로부터 지원된 선거 원조금이 6월 7일 현재 미화 6천만 불에 달했다. 원조금의 대부분이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관리 비용으로 지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 집계가 이토록 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거의 ‘미스테리’라 할 수 있다.

요컨데 심각한 문제는 사회부문이 아니라 국가부문에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 특히 선거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선거의 공약을 수행할 수 있는 집행력과 효율성이 국가에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선거의 공약은 고사하고 선거 자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마무리할 능력도 없는 국가를 보면서 민주주의 진전을 그저 낙관할 수만은 없다.



새로운 인도네시아를 향하여


몇 가지 심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정치․사회․경제적 효과를 발휘한 훌륭한 정치적 기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를 장기적으로 이어 가기에는 여전히 장애물들이 많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마지막으로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단연 새로운 인도네시아의 최고 권력자를 결정하는 대통령선거이다.

선거결과를 보면 선두주자는 단연 메가와띠이다. 그러나 메가와띠는 단독 집권할 수 없다.2) 메가와띠가 동띠모르 독립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자바 중심의 민족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인지 민주투쟁당은 자바 지역를 중심으로 한 12개 주에서만 승리했다. 골까르는 그 ‘불쾌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공하여 제 2당에까지 올랐을 뿐만 아니라 외방도서의 13개 주에서 우세했다. 이는 곧 국민협의회의 임명직 지역대표 의원들의 숫자에 반영될 것이다. 지역대표는 각 주마다 인구 비례와 상관없이 5명씩 임명되므로 우세한 주가 많은 골까르에게 유리하게 배분될 것이다. 또한 메가와띠의 민주투쟁당은 종교적으로 세속주의 이슬람, 기독교와 관련이 깊어 근본주의 이슬람 정당들과 날카롭게 대치된다. 가뜩이나 메가와띠의 힌두교 신앙설과 여성 대통령의 이슬람 교리 부적합성에 관한 논쟁이 있는 터라, 하비비 대통령이 지닌 근본주의적 이슬람 편력이 상당수의 이슬람 정당들을 유인하는데 이용된다면 정국은 메가와띠에게 몹시 불리하게 전개될 것이라 한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메가와띠가 취할 수 있는 주요 전략은 이슬람 근본주의 대 세속주의 대립구도 보다는 보수 대 개혁 구도라고 이야기한다. 개혁을 기치로 민주투쟁당, 전국각성당, 국민수권당, 이 개혁 3당의 대연합을 이루고, 온건파 군 사령관 위란또(Wiranto) 장군을 부통령으로 삼으면 필승한다는 것이다. 군부와 메가와띠의 연대는 양자가 공히 세속주의 이슬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아민 라이스의 국민수권당이다. 아민 라이스는 연대의 조건으로 수하르또 구속 수사와 함께 군부 배제를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군부를 취하면 수권당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골까르가 권력을 놓지 않겠다면 메가와띠를 고립시키는 이슬람 근본주의 대 세속주의 대치 전략을 취할 것이다. 게다가 풍족한 자금을 풀어 국민협의회 의원들을 매수하기 시작하면 더욱 승산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개혁 정당들을 지지한 다수 민중들의 좌절을 낳아 골까르는 분노에 찬 공격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고, 선거의 효과는 물거품이 되면서 대혼란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어느 골까르 의원의 말처럼 “인도네시아의 미래를 위해서는 골까르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평화적 개혁”(Reformasi Damai)을 위해서는 (분리주의와 정면 대결할 위험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메가와띠 중심의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길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정치 대타협을 통해 메가와띠-위란또 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역시 문제는 많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경제적 난제들이 쌓여 있는데다가, 정권이 정당 연합 정권이고 거기에 군부까지 결합된 복잡한 정권일 뿐만 아니라, 메가와띠의 민주투쟁당 내부의 지지집단 자체도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것이다. 민주투쟁당은 서로 대립적인 중부 및 동부자바의 농민들과 부유한 화교들로부터 동시에 지지를 받고 있고, 민족주의자들과 서구지향적 지식인들로부터 동시에 지지를 받고 있다. 함께 섞이기 힘든 세력들을 한데 긁어모았던 탁월한 “연대 형성자”(solidarity-maker) 수까르노의 지혜가 필요할 터인데, 메가와띠가 자기 아버지만큼 ‘신비로운’ 능력을 지니고 있을 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어찌되었건 20세기 마지막 해에 인도네시아에서는 수많은 이들의 생사와 국가경제의 사활을 건 막강한 파워게임과 현란한 정치예술이 벌어지게 되었다. 기나긴 민주주의 장정의 진정한 파수꾼일 수밖에 없는 인도네시아 민중들은, 정치 엘리뜨들이 경합하는 ‘무대’ 밖에서, 그 무대의 ‘규모’를 제한하는 ‘울타리’를 쳐두고, ‘뉴 리퍼블릭'(New Republic)의 제2막이 오르길 기다리고 있다.  

한/노/정/연


1) 선거참관단 보고서는 신윤환, 양영미, 전제성, 정은숙 편, ꡔ1999년 인도네시아 총선ꡕ, 인도네시아 총선 한국 NGO 참관단 자료집(참여연대 국제인권센터, 1999년 7월 21일)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논문에서 지면 제한으로 자세히 다루지 못한 개혁 입법, 국제적 지원 내역, 선거 과정, 노동 상황 등에 대해서는 위 자료집에 실린 전제성, “인도네시아 의회, 정당, 선거 제도 개혁”; 정은숙, “인도네시아 총선에서 선거감시단의 역할과 국제적 지원”; 전제성, 정은숙, “1999년 6월 인도네시아 총선 참관”; 전제성, 정은숙, “1999년 인도네시아 노동 상황”을 참조하시오.


2) 이하의 대선 구도는 서강대 정치외교학과의 신윤환 교수와 호주 국립대의 해롤드 크라우치(Harold Crouch) 교수의 견해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나 실수가 있다면 필자의 탓이다.


1998-08-02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