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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위하여

현장에서 미래를  제4호
편집부

특 집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위하여


이번 호 특집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6.27 지자체 선거 이후 급속히 진행되는 정계 개편과 민주노총의 역사적 출범이라는 정세속에서, 노동자는 어떠한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 지에 대해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실천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민중당’을 넘어서 -반성과 모색- ․ 최형록
현 시기 정세와 노동자 정치세력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전국노동단체연합
․원칙모임
지역정치와 노동자계급 ․ 편집부
대담 : 현대자동차 노동자 진한걸 (울산시의회 의원)
한국사회, 노동자계급, 정치운동 ․ 오세철

특집 1

‘민중당’을 넘어서
- 반성과 모색 -


최 형 록 (전 민중회의 기관지 편집위원장)


1. 머릿말

예상대로 보수 야당의 노병은 사라지지 않고 복귀하여 대권을 꿈꾸고 있고, 어제의 유신 본당은 후안무치하게ꡐ보수의 원조’를 자처하면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결코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없는 ‘어릿광대극’이 전개되고 있다. 1997년은 단순히 1987년의 반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1996년 총선과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개혁시민연합’은 개혁적 국민정당의 창당 작업에 착수했고, 진정추와 민정련은 내부 진통을 겪으면서 통합했다. 그리고 전국연합은 조직 재편과 정치조직 건설 논의에 착수했다. 이런 시점에서 남한 맑스주의 세력은 합법적 민중정당의 변혁 운동내 위상과 역할, 건설 경로를 둘러싼 과제에 직면해 있다. ‘민중정당 건설’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민중당’의 경험을 반추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 글은 민중당의 경험에 대한 철저한 해부는 아니다. 필자는 ‘이론을 실천으로 매개하는 것으로서 조직’이라는 관점에서 민중당 강령을 둘러싼 논쟁, 당내 민주주의와 활동, 특히 민중투쟁과 선거 활동을 제한적이나마 중점적으로 논의하고 창당 과정을 간략히 다루되 1992년 대선 참여와 뒤이은 당의 해산에 대해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필자는 당 국제협력위원회 국제협력국장 자격으로 1991년 4월 28일부터 7월 16일까지 헤이그 ‘사회과학연구소(ISS)’의 인권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유럽의 제 정당·사회단체를 방문하였다. 귀국 후 ‘좌파 제명 사건’을 보면서 동년 9월 말 경 탈당하였다.


2. 민중당 강령 - 당내 민주주의 - 민중투쟁

민중당 성격 그리고 성과와 실패의 교훈을 반성하는 데에서 강령을 둘러싼 논쟁은 중심축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강령 논쟁은 민중당 실패의 원인, 민주성과 집중성 조화의 실패, 민중투쟁과 국회 의석 확보를 겨냥한 일상적 활동간 균형의 실패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차대한 강령 논쟁을 살피기 전에 우선 창당 과정을 간략히 살펴 보고자 한다.

가. 창당 과정 -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ꡑ
1990년 11월 10일, 희망과 우려가 교차되는 가운데 민중당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승만 독재 정권 말기에 조봉암의 ‘진보당’이 정권의 탄압으로 끝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죽산이 ‘정치적 날조극’이라고 평가 받는 ‘매카시즘적 마녀 재판’으로 정치적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진보당이 사멸한 지 30여 년만에 ‘진보적 민중 정당’이 탄생했다는 점에서 창당은 하나의 희망이었다. 다른 한편 민중당의 앞길은 평탄하지 않으리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것은 창당 작업이 민중운동 진영의 광범위한 지지를 기초로 진행되지 않았던 점과 1989년에 이른바 공안 정국이 전개되면서 옷만 갈아 입었을 뿐인 군부 파시스트 정권의 탄압이 이념적, 물리적 수준에서 그 강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민중당 창당의 의의는 ‘각부문 민중운동의 과실을 민중이 직접 수확할 수 있는 합법적 정치조직’의 결성, 요컨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정당 형태’라는 것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대중투쟁은 전두환 군부파시스트 정권의 집권 연장 책동인 호헌을 철폐시키고 최소한의 자유민주주의적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방도로서 대통령 직선제의 길을 터 놓았다. (‘민중의 당’이 활동하기는 했으나) 굳건한 민중의 ‘독자적 정치조직’이 없는 한편, 박정희의 ‘경제주의적’ 경제개발 정책의 산물인 ‘지역감정’과 결부된 양김의 분열 결과 군부파시스트 정권은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보수정객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대안이 없는 민중은 어쩔 수 없이 4.26총선에서 다시 한번 보수야당을 지지하여 이른바 여소야대라는 극적인 상황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보수야당은 민중의 열망에 어떻게 보답했던가?
오늘날 문자 그대로 각계각층이 망라되어 요구하고 있는 ‘5.18 광주민중항쟁’의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대해서 당시 김대중씨의 평민당은 얼마 만큼 열과 성을 다했던가?
김영삼씨는 한술 더 떠서ꡐ3당야합’으로 민중을 다시 한번 배신하고 국민대중에게 정치적 허무주의와 무관심을 조장하지 않았던가?
민중투쟁의 성과를 보수야당에게 넘겨 주고 마는ꡐ비판적 지지’라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하지 않기 위해서 민중당을 창당해 나가는 과정에서 첫번째 고비는ꡐ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이하 민연추)’에서 고영구 대표위원, 이부영 집행위원장 등 ‘야권통합파’가 이탈한 것이었다.
민연추 내에서는 ①독자정당 건설 세력과 ②단일야당 건설 세력이 내부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단일야당 건설 세력’은ꡐ현 시기 합법 정당은 국민 대중의 단일한 군중 정치조직으로 대중 의식화, 조직화의 기치이며 연합적 통전질서를 주도하는 정당’이라는 입장이었다. 반면 ‘독자정당 건설 세력’은 ‘합법 정당은 반합법 통전체에 비해 전술 단위로 민주변혁에 복무하나 전체 민족민주운동의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에서 전술 단위이긴 하나 전략적 의미도 담고 있다. 그리고 합법 정당은 의회 진출을 매우 중요한 의무로 삼고 있으며 동시에 독자적인 의식화․조직화 사업을 중요시하며 합법적 투쟁이 중심이나 합법의 수준을 뛰어 넘는 투쟁도 수행해 나간다’는 입장이었다. 「민연추와 야권통합 문건 비판」 2~3쪽

요컨대 합법적 민중 정당의 성격, 위상과 관련해서 ‘독자정당 건설 세력’이 ‘전략당’의 입장이라면 ‘단일야당 건설 세력’은 ‘전술당’의 입장이었다. ‘독자정당 건설 세력’의 ‘전술당’ 입장은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타당한 것이다. 민연추 사업의 향후 전개 방향과 관련해서 ‘단일야당 건설 세력’은 ‘대중투쟁의 발전에 복무’할 것과 ‘야권 통합 문제 개입’을 주장했던 반면에 ‘독자정당 건설 세력’은 ‘창당사업 - 특히 조직화 사업과 대중투쟁에의 복무’를 주장했다.
당시 단일야당 건설 세력 즉 민주연합당파는 기본 전선을 반민주 야합(민자당)대 민주 세력(국민연합, 민연추, 평민당, 민주당)간 대결로 보면서 야권통합 논의의 주도적 대응을 기도했다. 문제는 민주연합당의 핵심이 ‘지분 문제’(십중팔구 ‘지저분한 문제’가 된다)라고 할 때 당시 민연추는 지분 문제에서 결코 주도적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지부 건설 사업이 여의치 않았으며, 의석은 물론 탄탄한 지역 기반도 없이 다만 민중의 계급적 지지 가능성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더욱이 민주당이 민주 : 평민 : 재야의 지분을 4 : 4 : 2로 제시한 것에는 나름의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첫째 민주당이 민연추와 연합하여 평민당을 6 : 4로 제압한다. 둘째 재야 세력의 일부를 제도권내로 수렴하여 정치 안정과 의회 발전(?)에 기여한다. 민주당 대외비 문서, 「민주세력 연합 문제에 대한 제안」, 앞의 「문건 비판」에서 재인용, 5쪽
셋째 이런 제안으로 민연추내 야권 통합파의 입지를 강화시겨 준다(민연추의 내분을 노린 것)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동상이몽하는 두 경향의 물리적 혼합물이었던 민연추는 1990년 4월 13일 결성된 지 채 두 달이 못되어 이른바 ‘야통파’가 이탈함으로써 동년 5월 30일ꡐ민중 정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전환하였다. ‘야통파’는 이탈하였으나 그 후 창당과 창당 후 활동 과정에서 독자정당 건설 세력내 민중주의 세력과 맑스주의 세력은 서로 갈등하였다.

나. 강령
민중당 강령은 창당 일정에 쫓기어 완벽한 의견 수렴을 거치지 못했으나 정책위원회와 교수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수차례에 걸친 토론, 당시 관심사였던 ‘사회구성체 논쟁’의 성과와 관련된 토론 성과물을 토대로 정강 정책 기초위원회가 작성한 1차 시안을 각급 당조직의 당원들에게 회람시켜 의견을 수렴하고, ‘민중당 건설 전국노동자추진위원회’(이하 전노추)가 주최한 ‘민중당 강령 시안 토론회’를 거친 다음 최종안이 확정되었다.
강령 논쟁 과정에서 나타난 민중당의 노선․성격과 관련해서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민중 주체 민주주의’냐ꡐ민중 민주주의’냐 였다. 이 양자는 강령 자체에서는 분명하게 어느 쪽인지 나타나지 않는다. 강령에는 ‘민중 해방을 위해서는 민중 권력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로 되어 있다. 「민중당 강령․기본 정책」 9쪽
이것은 민중주의 세력과 맑스주의 세력이 서로 타협한 결과였다. 즉 양 세력은 그 문구를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유럽에서 교포, 유학생들과 간담회에서 ‘민중 민주주의’적 입장에서 당 강령을 설명해 주었다.

예를 들면 장기표 정책위원장은 ꡔ사회평론(창간호)ꡕ의 대담에서 당이 추구하는 사회를 ‘생산 수단을 개인적으로 소유한 사람들의 조합적 질서’라고 하였다. 당 강령 중 ‘민중 주도의 개방적․자립적 경제 구조의 건설’ 부분의 첫째 항목은 독점 재벌의 해체와 민주적 재편, 주요 기간 산업․금융 기관 및 천연 자원의 국유화, 농지가 아닌 일정 규모 이상의 토지 국유화와 함께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는 공익과 배치되지 않아야 하며, 경제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회적 소유 형태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앞의 책자, 13쪽
고 명문화 되어 있다. 즉 장위원장의 견해는 당 강령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전노추’ 주최의 강령 시안 토론회에서 교수위원회는 전반적으로 소유권 구조에 대한 시각과 언급을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교수위는 의회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의회 활동을 보는 시각이 기회주의적이라고 지적하면서 확실한 전위 정당의 입장인가 아니면 의회 제도 정당의 추구인가를 보다 명확히 할 것을 요구했다. 서슬퍼런 국가보안법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칼춤’을 추고 있는 상황, 민중당을 변혁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고 탄탄하게 만들 수 있는 ‘전술당’이라 규정할 때, 이런 요구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다. 강령 토론회에서 전노협의 소수 견해로 제시되었듯이 ‘민중․민주변혁의 내용을 현재의 파쇼적 탄압 아래서 합법 정당이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했다. 다시 경제 강령 부분을 살펴보면 남한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볼 때 민중당 강령의 하나의 성과로 볼 수 있는 점이 있다. 앞의 소유권 부분과 함께 자주 관리에의 지향, 시장없는 계획의 비현실성, 계획없는 시장의 불공정과 낭비를 극복하고 경제의 활력과 경쟁력, 균형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적 시장 경제 체제’의 지향은 앞으로 구체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의 세계 자본주의와의 심화되는 통합성, 생산의 국제화를 고려할 때 ‘자급자족적 폐쇄 경제’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개방적이되 다국적 기업의 지배와 불공정한 국제 경제 관계를 지양하고자 하는 자립성을 강조한 것 앞의 책자, 13~14쪽
은 현실적합성을 가진 부분이다.
둘째, 문제는 당의 계급적 토대로서 ‘민중의 계급적 구성’에 관한 것이었다. ‘독재 정권과 독점 재벌, 외세의 지배 아래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민족 구성원들인 민중에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학생, 도시 서민, 중간계층, 지식인만 포함시킬 것인가 아니면 중소 상공인도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는데 결국 포함시켰다. 중소 상공인이 동요하는 쁘띠부르주아계급이고 이들을 중립화 또는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강령 토론회에서 교수위는 ‘민중이 주인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한 변혁의 방법 제시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는데 이 점은 실로 변혁 운동에서 최대의 난제이고 민중 운동의 성패에 기초한 지혜를 모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다. 당내 민주주의
필자가 독일에서 유학생, 교포들과 함께 민중당과 관련한 간담회를 가졌을 때 단 한번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민중당은 당내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접했을 때였다. 당내 민주주의는 강령에 대한 해석과 관련되는 입장의 차이, 그런 차이에서 기인하는 헤게모니 장악이 합리적 토론과 설득이 아닌 일반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추구됨으로써 억압되고 있었다.
우선 당내 민주주의는 지도 체제와 관련해서 무시되었다. 창당 대회 직전 지도 체제에 대한 상임위원회의 안은 백기완 선생을 당수로 하는 단일지도체제 안이었다. 그러나 상임위는 중앙위원회의 전에 비상 상임집행위를 열어 백기완, 이우재, 김낙중 3인 공동대표제를 결정하였다. 이것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배하는 행위였다. 나아가 상임위는 이 안이 제 1차 중앙위에서 결정이 나지 않자 재소집된 2차 중앙위에서는 의결권 위임이라는 방식으로 수정된 3인 공동대표제(이우재 - 김낙중 - 김상기) 안을, 그것도 창당 대회에서 무표결한다는 안을 통과시켰다. 교수위원장 오세철, 「더 이상 당 개혁을 늦출 수 없습니다」(1991. 6. 24) 3쪽; 민중당 개혁을 위한 당실무자회의, 「민중당은 개혁되어야 한다」(1991. 6. 6) 7쪽

이런 반민주적 행위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이 평당원의 의사를 대표하는 대의원들로 구성되는 전당 대회이다. 민중당 당헌 제 7조에는 전당 대회를 당의 최고의결기관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당규에는 전당 대회 대의원규정이 없었다. 창당 준비위의 중앙위에서는 대의원의 자격 규정으로 ‘입당 원서를 중앙당에 제출하고 당비 3천원을 납부한 자’라고 결정했다. 동시에 ‘창당 대회를 구성하는 절대 다수 대의원은 적법한 의미의 대의원이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대의원으로 구성된 창당 대회는 어떠한 표결도 할 수 없다’고 동 중앙위는 결정하였던 것이다. 앞의 민중당 개혁을 위한 당실무자회의의 문건, 1~2쪽

당내 민주주의는 당의 출범 초부터 위기 상태에 있었고 결국 맑스주의적 세력의 일부가 제명되거나 자진탈당하는 사태를 낳았다.

라. 민중투쟁
민중당의 활동은 정책 대안의 모색과 민중투쟁으로 구별할 수 있다. 정책 대안의 모색은 창준위 단계에서부터 평화통일의 전망을 시작으로 교통문제, UR대응문제, 정당법․선거법․정치자금법의 개선 문제, 여성 문제, 지역감정에 기초한 정치구조 문제 등에 관한 정책 토론회로 실행되었다.
민중투쟁과 관련해서 민중당은 1990년 10월10일 보안사의 ‘민간인 불법 사찰’에 항의하여 보안사 정문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이것은 강령에 규정한 ‘보안사 해체’를 향한 하나의 실천이었다.
또한 1991년 3월 2일에는 ‘수서 특혜 비리 관련자 처벌 및 진상 규명’(노태우의 1조원 비자금설, 율곡 사업 관련 부정과 함께 이것도 이번 기회에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을 위한 파고다 공원의 시위에 참여하였다.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강경대 열사의 타살로 고조된 노정권 타도 투쟁기에 민중당 지도부의 방침이었다. 5월 2일 지구당 위원장 연석회의에서는 광역 지자제 선거의 준비를 보류하고 5월 투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지방자치제가 진정으로 풀뿌리 민주주의가 되려면 법 제정 절차상의 민주성, 그에 따른 법․제도의 내용상 민주성 그리고 민주적 실천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당시 지자제는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보수 야당의 김대중씨는 1990년 UR에 대한 대처보다 지자제 실시를 더 중시하여 단식 투쟁까지 했다. 필자는 1990년 창당 직전(?) 연대 장기원 기념관에서 개최된 UR에 대한 민중진영의 대응 토론회에서 당리당략에 눈먼 평민당을 공박했다.

평민당은 군부 파시스트 정권과 협상 과정에서 끊임없이 양보하여 형편없는 지자제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것에 따른 지자제 선거의 결과는 ‘졸부들의 행진’이었고 민자당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권율이 투표율과 비등하였던 점을 상기해야 한다. 여하튼 당시 상황에서는 광역 지자제 선거를 거부하는 한이 있더라도 5월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민중당의 대의에 비추어 올바른 방침이었다. 당시 교수위원회 위원장 오세철 교수는 장기표 위원장에게 중앙위(인민노련-후에 한노당의 중심세력-의 영향력이 컸다)의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5월 27일 비상 중앙위원회에서는 광역 선거와 관련해서 후보가 있는 지역은 후보를 내고 후보가 없는 지역은 대중투쟁에 적극 결합한다고 결정했다.

3. 맺음말

본론에서 지적한 강령 - 당내 민주주의 - 민중투쟁에서 문제점들은 9월 15일자 ‘당무 감사 보고 및 감사에 기초한 당 발전과 총선 돌파 방안’에서도 지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획조정실장이었던 정태윤씨는 민중당의 실패 요인 네 가지를 열거하면서 민중당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은 민민진영의 역량 결집에 실패했음과 아울러 ‘시민적 양심적 역량’을 결집시키는 데 실패했음을 지적했다. 정태윤, 「한국에서 진보정당은 불가능한가」ꡔ역사비평ꡕ(1992,가을호), 57쪽
도대체 시민적 역량이 무엇인가? 노동자나 농민 그리고 도시 빈민은 시민이 아닌가?
여기서 시민이란 계층적으로 다양한 ‘중간계급’일 수밖에 없다. ‘중간계급’이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해방’을 지향하는 데 적극적일 수 있는가? 1987년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 때 과연 ‘중간계급’이 얼마나 참가했던가? 그들은 ‘6. 29선언’이 나오자 투쟁 대열에서 제자리로 복귀하지 않았던가? 그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60%가 중간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이런 결과는 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 ‘주관적 소망’이라고, 나아가서는 ‘자기기만’이라 읽는 것이 보다 정확하지 않을까? 그는 나아가 환경 운동, 반핵평화 운동, 성차별 운동이 계급․ 계층적 이해 범위를 벗어나 전사회적 이해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한다. 과연 계급․계층적 이해 관계와 무관할까? 환경처에 따르면 자동자 1대가 연간 오염물질을 1톤이나 배출한다고 한다. ꡔ한겨레 신문ꡕ(1990. 2. 20)
왜 대중 교통 수단보다 자가용을 더 제조하는 것일까? 승용차의 대기 수출이 곤경에 처하자 신용카드제가 도입되고 자가용의 내수가 증가한 것과 자본의 이윤 추구라는 것에는 과연 인과 관계가 없는 것인가? 서중석씨는 조봉암의 ‘용광로론’을 인용, 강조하면서 서중석, 「조봉암․진보당의 진보성과 정치적 기반」ꡔ역사비평ꡕ(1992) 가을호 30~32쪽
도대체 민주대연합으로 잃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필자는 당시 상황에서는 장건상의 ‘100% 이념 집결체론' 정태영, ꡔ조봉암과 진보당ꡕ(한길사) 215쪽
보다는 죽산의 ’용광로론‘이 현실적으로 타당했다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황이 다르다. 맑스주의 세력에도 그리스도교의 광신자들처럼 교조주의자들이 있다. 그러나 모든 맑스주의자들이 그런 것이 결코 아님은 최소한 그리스도교의 경우와 같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장건상의 ‘100%이념 집결체론’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전위당을 생각할 수 있는데, 전위의 정치적 형태가 곧 정당-‘역사적인 불세비키당’-이 반드시 되어야 하는냐하는 문제는 또 다른 검토를 필요로 한다.
현재 남한 노동자계급은 ‘현존 사회주의’와 맑스주의를 구별짓지 못하고 있다. 변혁의 주체적 조건뿐만 아니라 국내외 조건 역시 단기적으로는 밝지 않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기변동과 그에 수반되는 계급적 모순의 완화․격화를 분석하면서 우리는 ‘독자적 민중(노동계급)정당’의 험로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계급 해방 운동의 영원한 여성 동지, 로자(Rosa)의 말을 음미해 본다. “..... 세상은 온갖 종류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름답다. 대지 위에 비열한 자들과 용기 없는 자들이 없다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다울텐데......” Max Galo, ꡔUne Femme Rebelleꡕ, Presses De La Renaissance(1992) p.7
한/노/정/연

1995-10-2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