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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의 합법화

현장에서 미래를  제50호
노중기


민주노총의 합법화
노 중 기
연구위원/한신대교수 사회학










민주노조운동 자기진단의 계기

지난 11월 23일 민주노총이 당당하게 합법성을 쟁취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정부 부처의 단순한 행정처리, 요식행사에 불과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절차가 없었더라도 이미 투쟁으로 확보된 민주노총의 정치적․사회적 지위가 문제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합법성의 확보는 지난 1997년의 겨울총파업투쟁으로 쟁취한 것일 뿐 노동부의 법적 인정조치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합법노조로서의 지위를 얻는다고 해서 현재의 노동정세나 민주노총의 위상이 크게 바뀔 것도 아닐 것이다. 기쁜 일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흥분할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합법성 쟁취가 내포한 역사적 의의까지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위기를 맞고 있는 노동운동진영이 풀어내야 할 당면 과제의 역사적 위상을 점검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법성쟁취는 기념하거나 축하해야 할 일이기 이전에 우리 민주노조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고, 미래를 설계하도록 요구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1987년 체제’ 해체의 제도적․행정적 계기

무엇보다 민주노총의 합법화는 해방 이후 반세기동안 점철되어온 이 땅의 노동자, 민중투쟁의 소산이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법률적 공인은 직접적으로 보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제기한 과제가 일단계 해소된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10년이 넘는 시간뿐만 아니라 100여 명 이상의 노동자들의 죽음, 3,000명 이상의 구속노동자, 1만 명 이상의 해고노동자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그러나 보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1970년 전태일열사의 분신 이후 30년, 더 나아가 1947년 미군정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불법화한 이후 50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는 정권과 자본의 가혹한 탄압이 계속되어 왔었고 민주노조운동은 좌익용공․친북세력이거나 불법폭력집단으로 매도되었다. 이 억압체제에 대해 노동자들은 죽음을 불사한 투쟁으로 항거했지만 그것은 50년을 버티어 왔던 것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이런 억압체제에 대한 최초의 대중적이고 계급적인 항거였다. ‘민주노조 인정하라’라고 하는 노동자들의 단순, 소박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쉽게 좌절되었다. 6월 항쟁 이후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민주화는 점진적이고 느리게나마 꾸준히 진행되어 왔지만 노동사회 영역은 여전히 5공 정권의 반민주성이 지배하였다. 노동자대투쟁을 물리적으로 억압한 국가는 그해 11월 노동법개정을 통해서 4대 악법조항(복수노조, 제3자 개입, 공무원․교원의 단결권,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유지․강화했고, 노동계급 배제의 전략적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이런 국가와 지배블럭의 배제전략으로 말미암아 이후 10년간 노자, 노정간에는 첨예한 정치적 대립이 매년 되풀이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1987년 노동정치체제’(노중기, 1997; 임영일, 1998; 장홍근, 1999)라는 기형적인 노동배제체제로 발전하였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반민주적 억압과 배제는 1987년 체제의 핵심적 요건이었다. 지난 10년간의 노자대립의 핵심에는 항상 민주노조운동의 법적 자격과 정당성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국가든 개별 자본이든 노동 측과의 대립과정에서는 실질적 쟁점의 합리성에 앞서 노조의 성격이 항상 문제였다. 민주노조일 경우에는 쟁의의 합리성 따위는 애초에 문제가 안되었으며 무조건적인 탄압, 공작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10년 투쟁의 최종 귀결점인 지난 1997년 겨울총파업과 노동법개정은 이 같은 반민주적 체제가 해체되는 전환점이었다. 복수노조, 3자 개입 금지조항이 철폐되었고 IMF공황 이후에는 공무원․교원 단결, 정치활동 금지조항이 완화되어 왔다. 그러므로 금번의 민주노총의 합법화는 ‘민주노조 인정’이라는 노동자 대투쟁의 요구가 최종적으로 관철되는 과정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1987년 체제 해체의 제도적인 확인, 행정적인 추인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조폐공사파업유도사건’도 체제전환의 구조적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사실 지난 10년 이상 정권과 자본은 수많은 쟁의에 불법적으로 개입하여 사건을 조작해 왔다. 대표적인 것만 보더라도 1989년 서울지하철파업과 현대중공업파업 그리고 전교조 결성, 1990년의 전노협과 KBS 파업, 김영삼 정권기의 현대그룹노조 연대파업, 한국통신파업과 전지협파업, 최근의 서울지하철파업과 현대자동차파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주요 쟁의에는 공안기관의 불법개입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그러나 지난 10여년 동안에는 정권의 불법개입들이 용인되거나 대개 무시되어 왔다. 즉 그런 공작이 사회적․정치적 사건으로 인식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부로 사건의 일부가 알려지더라도 정치적 쟁점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국가․자본의 대 노동전략이 민주노조운동 일반을 불법화하는 사회적 환경에서는 전혀 사건도 될 수 없었던 것이 이제야 비로소 하나의 ‘사건’으로 인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조폐공사파업유도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건으로 인지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며 그것은 체제전환의 효과였다.
요컨대 민주노총의 합법화는 그 자체로서는 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흐름속에서 보면 그것은 지난 10년 이상의 민주노조운동을 한 단계 마무리하는 체제전환과정의 행정적 완결로 볼 수 있다. 그것은 10년 투쟁의 성과이자 그 결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민주노조운동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으며 그만큼 새로운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노총 합법화의 구체적 의미와 정세변화

이상과 같은 구조변동의 맥락을 전제로 해서 합법화의 구체적 의미와 정세변화를 간략히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문제는 하필이면 왜 이 시점에서 DJ정부가 합법화를 용인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 동안 DJ정부는 다섯 차례 이상 되풀이된 민주노총의 합법화 요청을 우스꽝스런 이유를 들어 계속 거부해 왔었다. 노사정위원회 참가와 같이 실질적인 총연맹단체로서의 위상을 실질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부인했던 것이다.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는가?
쉽게 추론 할 수 있는 가장 일차적이고도 중요한 이유는 총선을 앞둔 정치전략 차원의 고려이다. 주지하듯이 내년 총선에는 DJ정부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DJ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앞서 주도한 탓에 여론과 민심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으며 제도정치과정에서도 분명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총선에서의 패배를 피하는 것이 절대절명의 과제가 되고 있으며, 그 중요한 요건 중 하나가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을 최대한 잠재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직접적으로 보면 노사정위원회 혹은 노동측과의 막후 협의채널의 복원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노사정위원회는 구조조정과정으로 인한 노동자, 민중저항을 통제하기 위한 핵심수단이었으나 현재 작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따라서 돌파구를 찾을 정치적 필요가 있는 정권이 또 다른 카드인 ‘합법화’를 꺼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합법화는 거시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1987년체제의 해체, 노동계급역량의 사회적 추인과정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자체의 의미가 작은 것만도 아니다. 합법화는 국가․자본에게 새로운 통제정책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양날의 칼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제공하는 활동공간이 열린다는 의미에서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주아계급 헤게모니가 노동운동을 포위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위기의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먼저 국가는 민주노총에 대해 재정지원을 할 ‘권리’를 갖게 된다. 민주노총이 재정지원을 수용할 경우 현재의 재정난은 일부 해소될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당근의 효력을 항상 발휘할 것이다. 또 재정지원을 매개로 한 통제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능해질 것이다. 재정분배를 둘러싼 민주노조 내부의 균열을 유도하고 재정 지출에 관한 투명성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등 통제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할 수도 있다. 또 한국노총과의 분배 시비가 생긴다면 경쟁체제를 이용한 분할지배 수단이 될 가능성도 있다.
둘째, 민주노총에게는 단기적으로 일정 정도의 조직확대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른다. 양대 노총체제에서 동요하고 있던 중간노조들로써는 이제 민주노총에 참여하는 데 심리적․사회적 장벽이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또 개별 자본도 민주노조 지향의 조직활동에 대해서 공개적인 억압을 할 수 없는 환경이 점차 열릴 것이다. 지역노조나 중소․영세노조들의 민주노총 활동도 보다 쉬워질 것이며 미조직노동자들에 대한 조직사업의 환경도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직환경의 개선은 그 자체도 저절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며 주체적인 노력이 전제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장기적으로 한국노총과의 대등한 경쟁이라는 더 어려운 문제의 출발신호일 수 있다. 그 동안 1987년 체제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성장, 발전은 체제적 효과에 힙입은 바가 큰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즉 민주노조의 깃발 자체가 운동적 정당성을 부여했던 측면이 있었다. 민주노총의 민주적․자주적․투쟁적 활동만큼이나 억압적 체제에서 불법화된 조직으로서의 조직위상 자체가 노동대중의 지지를 받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와 같은 프리미엄은 사라질 것이고 거의 모든 측면에서 대등한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특히 단위사업장의 복수노조체제가 도래하면 그것은 양 노총 모두에게 기회이자 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셋째, 합법화는 무엇보다 정책참가의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그리고 전방위적으로 확장시킬 것이다. 시민권을 법적으로 보장받았다는 일차적 의미는 국가 노동행정의 모든 과정에서 시민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현재 노동위원회 등 최소한의 행정기구로 제한되고 있는 민주노조의 정책참가는 그간 한국노총이 형식적으로 참여해 온 근 백 개에 가까운 정부기구, 위원회들로 확장될 것이다. 그리고 정책참가의 확대는 노동정보에 대한 보다 손쉬운 접근, 각종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실질적 참가, 정부와 시민사회에 대한 노동계급의 영향력 증가 등의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정권 및 행정기구와의 접촉면이 넓어진다는 것이 곧바로 영향력의 손쉬운 확대나 유리한 정책결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그것은 정책참가 일반이 야기할지도 모르는 포섭의 효과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크다. 접촉면의 확장은 민주노총의 다수 상층간부들이 행정관료 및 자본측 인사들과 보다 많은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분할지배의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더욱이 취약한 인력자원, 정책역량을 갖고 있는 우리의 기업별노조체제에서 전방위적 참가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많은 간부들에게 참가의 통로가 개방되고 권한이 위임된다면 각종 정책결정에서 민주노총 차원의 일관된 방침의 관철 쉽지 않을 것이며 민주노총 조직내 의사소통 상에 많은 문제가 야기될 가능성을 갖는다. 이 점에서 민주노총은 노사관계개혁위원회와 노사정위원회 참가 경험을 다시 한번 찬찬히 정리,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또 참가 이전에 정책역량의 확대․강화, 조직체제의 효율성 제고, 내부 의사소통구조의 개선 등 주체적인 준비작업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산별체제로의 조직체제 전환이 시급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도전과 과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제기한 역사적 과제, ‘민주노조 건설’의 첫 번째 과제는 민주노총의 합법화로 일단락되고 있다. 그리고 합법화는 보다 거시․구조적인 노동정치체제의 변동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합법화는 합법화된 민주노조가 변화된 환경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새로운 난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조의 구체적 내용, 계급세력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채울 것인가는 전혀 결정되지 않은 열려 있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노동배제전략을 계속하고 있지만 ‘파업유도사건’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 전술적 통제방식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국가의 입장에서 민주노총의 합법화는 통제방식의 변화를 예기하는 하나의 정책대안일 뿐이다. 또 합법화는 자본의 태도 또한 변화시킬 것이다. 민주노조에 대한 일방적 억압으로부터 한국노총 소속 노조와의 경쟁체제를 이용할 수도 있으며, 보다 시장적인 기제를 통제수단으로 동원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반면에 여전히 취약한 조직역량과 정책역량을 갖고 있는 민주노조운동은 전혀 낯선 환경 속에서 새로운 도전과 과제에 맞서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노/정/연

1999-12-1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7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