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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와 80년대 하나의 정신사적 고찰

현장에서 미래를  제52호
이해영

월 례 토 론 회

이 해 영

연구위원/한신대 교수 국제관계학

90년대와 80년대: 하나의 정신사적 고찰*









1)

1. 들어가는 말


1980년대, 그 10년이 남긴 수많은 문건,  연인원 수백만이 훨씬 넘게 동원된 시위, 족히 수천에 달할 ‘시국사범’, 동시대 지구 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놀라운 투쟁열기, 한마디로 8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고 또 ‘신화’의 시대였다. ‘운동권’은 사실 하나의 보통명사였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모두가 운동권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한 때 민중의 호민관을 자임하던 운동권은 말 그대로 하나의 권이 되었고, 사회 변혁이라는 지향점은 이제 먼 미래의 일로 치부되었다. 그 자체로 이미 지난한 투쟁으로 간주되던 ‘원전’ 학습은, 지난 10년- 세계적 시각에서 볼 때 이미 그 자체도 낡은 것이었던- 갖가지 최신 패션으로 대치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분석적 맑스주의, 포스트 맑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등 한 때 서구사회를 떠돌던 갖가지 포스트담론들이 순환적으로 그 자리를 메꾸어 나갔다. 80년대의 ‘사회’는 사회과학을 요구하였고, 90년대의 ‘나’는 정신분석학을 소비하였다. 모두 다 함께 사회를 외치던 80년대의 주체들은, 어느 날 문득 그 속에 자기가 없음을 깨닫자, 다 함께 ‘나’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패러다임의 교체기, 새로이 수입된 다양한 문화상품으로서의 포스트주의는 달콤한 자장가였고, 일부 급진적 지식인들은 80년대와 똑같은 급진적 방법으로 ‘무질서한 퇴각’을 ‘지도’하길 원했다. 물론 언뜻 보기에 90년대에도 80년대 못지 않게 많은 변화가 목격된다. 정권이 바뀌었고, 전국단위 노동조합이 조직되었으며, 과거와는 다를 것이라고 말하는 노동자 정당이 출사표를 던진 상태이다. ‘확실하게’ 밝혀진 80년대 ‘유일한’ 가해자인 ‘고문기술자’가 구속되었고, 80년대의 많은 스타들은 서둘러 변신을 준비하고, 또 일부는 성공하였다. 온갖 개혁논의가 말의 성찬을 이루고, 누구도 80년대와 같은 탄압이 재현되리라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는 ‘낡은 것은 사라졌으되, 새로운 것은 여전히 오지 않은’ 것을 ‘위기’라고 부른다. 과연 그런 것인지, 21세기를 앞둔 시점임에도 누구도 자신 있게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믿지 않는다.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자면, 미래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점령’되어 있고, 아직도 ‘넘겨볼 수 없는’ 것 같다.

시인 H. 하이네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사상이란 어떤 하나의 영혼, 즉 우리가 자신에게 맞는 육체를 찾아줄 때까지, 그리고 감각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현상으로 만들어 줄 때까지, 결코 우리를 편안히 내버려두지 않는 영혼이다.… 막시밀리앙 로베스삐에르는 쟝 쟈끄 루소의 손, 그것도 그의 피묻은 손에 불과하였다. 이 손이 시대라는 자궁 속에서, 루소가 만들어 준 그 영혼을 가진 육체를 받아 내었다”. 말하자면 로베스삐에르의 쟈코벵적 실천은 루소의 쟈코뱅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레닌의 혁명은 맑스의 맑스주의라는 정신적 토대가 있었기에 일어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80년대의 ‘로베스삐에르’는 누구였고, 또 ‘루소’는 누구였던가. 80년대에 변혁을 꿈꾸며 투쟁했던 모든 이가 로베스삐에르였다면, 이 들에게 영혼을 불어넣어준 루소로 나는 맑스/엥겔스와 레닌 그리고 김일성을 지목한다.

80년대는 여전히 살아있는 역사이다. 헤게모니라는 것이 한마디로, 말과 사물, 역사와 현상에 대한 규정력 또는 해석권에 다름 아니라면 8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질문은 그 자체 고도로 실천적, 정치적인 문제이다. 한 시대의 프로필은 그와 대조적인 다른 한 시대의 그것과 비교될 때, 비로소 그 전체적 윤곽이 또렷해진다. 그런 점에서 80년대와 90년대는 마치 일제하 20년대와 30년대처럼, 한국 현대사에서 지극히 대조적인 시공간이라는 것이 이 글의 기본적인 판단이다. 그래서 이 글은 ‘80년대가 90년대가 되었다’는 가장 단순한 사실에 대한 의문, 곧 왜 그러했는가, 왜 그 격렬했던 하나의 시대가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쉽게 스러져 버렸고, 80년대를 도저하게 흘러내린 지적-정신적 흐름 또는 80년대의 ‘영혼’의 형태와 성격은 무엇이며, 또 90년대의 그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2. 1990년대: 80년대 ‘권(圈)’의 정치학에 대한 반명제로서 ‘나’의 정신현상학 


(1) 하나의 역사적 시대 또는 시기라는 것이 동시대인들간에 합의된 목표, 대상, 주체, 사상이념, 방법 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 한다면, 80년대는 그 자체로 나름의 자기완결성을 갖추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80년대의 경우 목표=민주화/민족해방, 대상=군부독재/ 미제국주의, 주체=민중/노동자계급, 주동=합법/비합법/반(半)합법 조직, 사상이념=ML주의/주체사상, 방법=혁명/개혁식의 비록 대립과 차이를 포함하고는 있었지만 높은 합의 수준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90년대의 경우 (의사) 민주화로 인한 적(敵)의 상실, 현존사회주의 붕괴와 북한의 경제위기로 인한 대안적 전망의 소멸, 중간계급의 체제 내 통합, 각종 전선운동의 와해, 광범위한 이념의 위기 따위로 말미암아, 그 자체로 차라리 카오스의 법칙이 지배하는 지극히 문제적인 시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80년대의 시간개념이 군부독재라는 구체적 적의 실존과 연관된 다분히 계몽주의적 미래관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90년대의 그것은 그 어떤 자신의 독자적 미래전망도 내놓지 못한 채, 80년대의 진보적 미래주의에 대한 단순 부정이나 아니면 ‘제3의 물결’류 공허한 21세기 담론 또는 사이비 미래학, 그도 아니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류 유행성 세기말사조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는 무엇보다 정치의 시대였다. 모든 현상과 사물은 정치라는 프리즘을 통해 해석되었고, 그것이 반미 자주화이건, 반파쇼 민주화이건 국가권력은 곧 억압의 대명사로서 그것과 대결하는 것이 곧바로 정치였다. 80년대의 과잉정치주의는 90년대의 문화주의라는 또 다른 편향을 낳았다. 80년대는 전통 속에서 마당극, 사물놀이 등 민족적인 것 또는 많은 경우 ‘민속적인 것’을 서구문화에 대한 대안문화이자 대항문화로 재발견해 낸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그것은 ‘한국적인 것’으로 둔갑, 상층문화로 흡수통합되거나, 지배문화의 외곽에 배치돼 그 문화적 다양성을 홍보하는 매체로 전환되었다. 90년대 과거와 다름없이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자본과 이 문화는 결합하여 상품이 된다. 단자화된 개인, 해체된 개인을 묶어 줄 수 있는 대중문화의 장치가 ‘스타’이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는 80년대가 생산해 낸 수많은 활동가들을 스타로 만들었고, 그런 다음 이들을 소비하였다. 정치적 문화주의의 자본주의적 문화주의로의 변모와 더불어, 80년대의 운동은 90년대에는 ‘생활’이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운동의 생활화, 생활의 운동화가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나 90년대가 끝나 가는 시점에서 볼 때, 운동은 생활이 된 것이 아니라, 생활의 논리, 그 핵심으로서 ‘생계’의 논리에 함몰되어, 휘발되어 버렸다. 반(反)거대담론을 이데올로기로 하는 90년대 생활패러다임의 딜레마는 ‘큰 권리’가 확보하지 않고서는 ‘작은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 무망하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90년대의 수많은 시민운동단체는 80년대 사회적 개인에서 90년대 개인적 개인으로의 존재이전과정에서 파생된 ‘틈새시장’을 공략,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정치라는 크나 큰 벽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없는 시대, 더욱 엄밀히 말하자면 규정할 주체를 생산해 내지 못한 시대가 90년대이다. 90년대는 80년대에 기대설 수밖에 없는, 결코 홀로 설 수 없는 불구의 시대였고, 또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없는- 80년대에 대한- 반동의 시기였다. 80년대가 계몽의 시대였고, ‘헤겔적으로’ 진보하는 이성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이에 대한 거부와- 부분적으로는 타당한- 항의의 시대였다. 이런 의미에서 90년대는 결국 80년대의 부수현상일 따름이다. 80년대의 놀라운 행동력이 역사철학적 승리주의에서 기인한다면, 90년대의 정신적 기초는 보수적 ‘낭만주의’1) 또는 우발주의(偶發主義)에서 찾아 진다.1) 80년대의 정치와 운동이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주체에게 ‘혁명적’ 결단과 ‘투신’을 요구하였다면, 90년대는 ‘수동성’을 본질로 하는 ‘정치적 낭만주의’2)와 그와 정신적 기원을 함께 하지만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낭만주의적 정치’를 요구하였다. 전자가 80년대 말/90년대 초 광범위하게 등장한 청산주의 또는 대기주의를 일컫는 다면, 후자는 ‘강준만 현상’에서 표본적으로 발견되는 90년대 한국의 정치적 ‘돈 키호테주의’를 예로 들 수 있다.3)

그 이론의 최초 기획자 특히 맑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도식주의와 교조주의는 그러나 그 이론의 효과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투톱’으로 하던 80년대 정신세계의 서열구조는, 다분히 무책임한 사감성(私感性)과 중간계급적 내밀성의 재발견을 목표로 하는 90년대 미학주의의 우선적인 공격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90년대 초 이후 급격히 유통된 포스트모던 해체주의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지적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80년대류 거대담론 역시 90년대식 일상담론의 대책없는 공격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90년대 미학적 영역의 팽창과 보편화가 예술적 자의식의 엄청난 고양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90년대의 그것은 “작품없는, 적어도 위대한 양식을 갖춘 작품이 없는 예술”이었다.4) 그 이유는 바로 우발주의로서의 낭만주의가 가진 내재적 특성 즉 일체의 “위대한 그리고 엄격한 형식에의 의무”로부터 벗어남, 다시 말해 정신적 무정형과 지적 탈원칙에 있다. 나아가 지적 서열구조를 해체시키는 90년대 미학주의는 다른 정신영역을 ‘나’를 중심으로, 사회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화(私有化)’한다. 그러므로 경향적으로 90년대는 지식생활의 전영역을 나의 정신현상학으로 환원시킨다. 결국 이 모든 현상은 새로운 주체, 즉- 사회적 개인이 아니라 - ‘개인적 개인’의 출현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의 새로운 형태의 정신 사회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5)

이 글은 90년대 대표현상을 ‘나’에서 찾는다. 흔히 말하듯 ‘우리’는 있되 ‘나’는 없었던 시대가 80년대라 한다면, 90년대는 ‘나’는 있되 ‘우리’가 보이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러나 80년대의 집단적 자아에 대한 하나의 비판으로 출현해, 90년대의 가장 두드러진 문화현상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은 ‘나’의 정신현상학이 갖는 문제성은, 정신적 소우주에 고립된 90년대적 자아가 궁극적으로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전제가 된다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적 또는 우발주의적 태도는 ‘나’와 세계와 사회와의 관계를 단지 외부적 관계로 치환시켜 그사이에 놓여 있는 본질적 관계성을 마치 선택 가능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 때 관계로부터 이탈된 ‘나’의 생존전략은 내면적 ‘깊이에의 강요’ 또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정신병리학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6)

(2) 90년대 ‘나’에 의해 각인된 미학적 낭만주의 또는 지적-정신적 우발주의는 한국적 ‘부르주아 세계’  혹은 90년대 한국의 ‘부르주아 사회’를 전제한다. 90년대의 주체인 ‘나’는 그러므로 시장종속적이다. 사회적 노동 혹은 활동이 압도적으로 임금노동의 형태로 수행되고 있는 90년대 조건에서 그 어떤 ‘나’도 시장을, 자본을 비껴갈 수는 없다. 오히려 전 사회관계의 자본관계로의 ‘실질적 포섭(Subsumption)’이 일어나고, 모든 문화현상이 자본의 욕망기제에 포위되고 있는 상태에서 주체들은 자본순응적일 것을 요구받는다. ‘나’의 참된 해방이 어떤 형태로든 자본과의 대결을 지나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자화된 ‘나’, 해체된 ‘나’로부터의 저항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혹 없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문화(주의)적이고, 일탈적이며, ‘딴지일보’적이다. 따뜻하고 섬세한 그래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90년대적 인간형 ‘광수’, 결코 자본주의적이지만은 않은,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본의 선택을 받는다. 지배블록의 해체전략에 맞서는 유일한 방도는, ‘나들’의 연대전략 외에는 없다. 그러나 그러기에 90년대식 사고법은 이미, 너무나 개인적이다.

(3) 90년대 한국사회 발전경향 가운데 이 글은 특히 개별화(individualization) 현상에 주목한다. 말하자면 개별화는 나의 사회학이며, 90년대의 나는 어쩌면 바로 이 개별화의 효과이다. 푸코에 따르면 국가라는 ‘정치적 형식’의 효과는 “개별화하는 동시에 전체화”하는 데에 있다고 한다.7) 이 말은 우리가 그의 국가개념에 동의하는 가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 상당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모든 한국사람은 예외 없이 출생과 동시에 하나의 코드 곧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으면서 국가와 관계 맺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과정을 국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가가 어떤 특정인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하면서, 다시 말해 ‘개별화하면서’ 동시에 그를 지배의 대상인 ‘국민’으로 등록 곧 ‘전체화’한다. 정확히 동시적인 이 과정을 통해 권력은 전혀 ‘합리적으로’ 자신의 구조를 관철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개별화’는 그 자체로 모든 근대적 지배에 고유한 하나의 형식이다. 더군다나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초한 보다 발전된 행정기술- 예컨대 ‘전자주민카드’- 을 갖춘 국가의 경우 이러한 개별화 메카니즘은 더욱 더 효과적으로 기능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럴 경우 개별화된 개인은 마치 벤담의 팬옵티콘처럼 또 다른 개별화된 개인과 단락된 소통망 속에서 권력과 일방적으로 관계 맺을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로써 권력은 거부할 수 없는 마치 일종의 ‘제2의 자연’으로 현상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사회 각부문의 자율성이 신장되고, 또 예컨대 X세대, N세대론 등 세대담론에서 보듯이 개성이 강조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이에 걸맞게 상품판매전략도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전환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개별화현상은 단순히 인간의 관계성의 종말이라는 의미에서 원자화도 개인의 결정권이 확대된다는 의미에서 자율화도, 해방은 더군다나 아니다.8) 그것은 개인-사회 관계의 새로운 형태를 의미하고 이는 뒤집어 말해 지금까지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던 바로 그 개인성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구조변화와 관련해 개별화의 각 차원을 살펴보자.

가장 먼저 개별화의 정치적, 사회적 조건으로 해방이후 한국사회를 규정해 온 특정한 하나의 사회운동 싸이클이 종결되었음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보통, 평등, 비밀선거를 통한 절차합리성의 관철은 대중들에게 광범위한 ‘정당성믿음(M.베버)’을 유포시켰고 따라서 흔히 말하는 민주/반민주 대립구도는 효력을 상실한 것처럼 나타났다. 더군다나 80년대 후반의 현존사회주의의 붕괴는 운동의 공식, 비공식적 준거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라진 ‘적’은 전선을 해체시켰다. 이는 곧 개별화라는 지배 권력의 효과를 저지할 세력이 분산 내지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두는 더 이상 잠재적 ‘운동권’이 아니었다. 통합 구심의 상실로 인해 각자는 각자의 ‘필요’와 결단에 따라 자발적 동원해제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80년대적인 인간형과 삶의 형태, 곧 ‘전투적 삶의 위기’9)속에서, 상당수 현장활동가들이 노동현장이 아닌 다른 현장, 곧 생활현장으로 엄숙하게 그러나 무질서하게 퇴각하였다.

개별화의 경제적 귀결은 삶의 모든 부면이 ‘시장종속적’으로 형성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80년대 후반이후 한국사회에 관철되기 시작하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급진시장주의 그리고 90년대 전반을 풍미한 이른바 ‘경영학적 마인드’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개성은 갑자기 최고덕목이 되었고, 모든 것은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성은 시장성이 있을 때, 즉 소비되고 교환가치로 환산될 때, 비로소 성공한 것으로 승인된다. 모든 개인이 ‘튀거나’, ‘뜨는’ 것을 원하지만, 그것은 시장 위나 밖으로가 아니라 오직 시장 내적으로만 가능하다. 그런 한에 있어 그 개인은 시장 내적 존재이며, 시장은 개별화의 물적 존재조건이된다. 존재의 시장화, 상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당연한 것은 개인의 시장성을 판별하는 자는 어디까지나 구조로서의 자본이며,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논리이지, 그 개인의 주체성이 아니다.

개별화는 ‘규격화(standarization)’의 이면이다.10) 여기서 특히 대중매체가 수행하는 ‘개별화하는 동시에 규격화하는’ 기능이 중요해 진다. 모든 역사적 시기에 그 시기를 지배하는 담론이 있듯이, 그 시기를 지배하는 패션이 있다. 같은 옷, 같은 화장 나아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른바 신세대의 ‘개성’은 잘 해야 규격화 속에서의 배리에이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차이가 중요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차이는 기껏해야 ‘미세한 차이’이며, 결코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다. 예컨대 시멘트파시즘 (신도시아파트!)의 공격 앞에 차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잘해야 내부장식을 바꾸는 일이다. 이 ‘미세한 차이’는 나아가 미분적 세계관을 요구할 수밖에 없고, 또 그에 걸 맞는 미시정치의 출현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이 미세한 차이를 거부할 때, 그것은 많은 경우 사회병리적 징후로 표출된다. 한때 ‘왕자병’, ‘공주병’과 같은 ‘네오나르시시즘’적인 담론의 유행은 그러므로 한편으로 이 미세한 차이에 대한 권태의 표현이자, 다른 한편으로 개별화를 통한 관계단절을 합리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거시적, 사회적 관계로부터 이탈된 관심의 시선은 육체로 향하고, 이는 다시 건강도착증이나 매체를 통한 집단관음증으로 전환된다. 포르노는 일상이 되고, 육체라는 공간은 억압과 착취의 최종적 기착점이자 따라서 해방적 실천의 원점으로서가 아니라, 장식과 쾌락의 대상으로 정의될 뿐이다. 이 관심의 시선은 또한 정신으로도 향할 수 있다. 정신이 육체에 대해 가진 절대적 비교우위는 정신의 비경계성이다. 90년대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신비주의나 종말론은 하지만 진정한 개인의 주체성의 복원과는 무관한 단절된 관계성의 절대화라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개별화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권위주의와 그리고 인종, 민족, 민속, 종교 등 새로운 자기동일성에 대한 추구와 연결된다. 이 권위주의는 자유시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구화, 개별화 그리고 사유화 경향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을 보완하고 완성할 뿐이다.”11) 사적 욕구의 무한 추구를 향해 조율된 사적 개인 혹은- 사회적 개인에 대립되는- ‘개인적 개인’의 존재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효과’인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지배의 전제이다. 경향적으로 그것은 다시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주체적 조건 가운데 하나인 사회적 연대망을 해체시켜 결국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초를 잠식한다. 따라서 90년대는 그 정신적 경향에서 볼 때, 민주주의와의 불화를 예감케 하는 시대이다.



3. 1980년대: 좌절한 2개의 (의사) 스탈린주의


(1) 돌이켜보건대 80년대는 우리 역사에서 분명 ‘영웅시대’였다. 다시 말하자면 영웅적 실천의 시대였다. 그러나 때로는 전설로, 때로는 무용담으로 구전되어온 신화적 실천의 사상적 형태는 무엇인가. 나는 80년대의 변혁적 실천의 사상적 형태를 ‘의사스탈린주의’ 또는 ‘스탈린주의적 경향’이라고 파악한다.12) 그것은 80년대 전반을 규정한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조건의 결과이며, 다른 수단에 의한 특수한 80년대 ‘권’의 정치학의 계속이었을 뿐이다. 스탈린주의의 이명(異名)으로서 ‘맑스-레닌주의’ - 줄여서 ‘ML주의’라고 불렸던-와 그의 자립화된 아형(亞型)으로서 김일성주의는 말하자면, 80년대라는 독특한 지적- 정신적 지형, 즉 맑스사상의 지적 인프라가 불비한 조건에서 당면한 ‘적’의 탄압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운동주체가 선택한 이데올로기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80년대의 ‘모든’ 변혁적 사상을 스탈린주의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또는 이런 류의 비판은 90년대 초반에 유행했었던 반성문 열풍의 때아닌 재탕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미하는 바 ‘권’의 이데올로기 전략으로서의 스탈린주의는 결코 당시 주동세력들의 목적의식적 추구의 결과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당시의 이념전략이 이미 존재하던 비맑스주의 내지 반맑스주의적 저항이념과의 치열한 경쟁과 대결을 통해서 라기 보다, 그 어떤 기성의 사상이념의 ‘수용’을 기본 축으로 전개되었고, 또 당시의 사상투쟁이라는 것이 대부분 좀 더 권위있는 ‘원전’안의 보물찾기 경쟁식으로 즉 잘해야 원전 해석투쟁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누가 더 빨리 원전을 번역해 내고, 또 입수해 내는 가가 주 관심사인 상황 즉 사상이념적 과당경쟁 조건에서, 이미 그 자체 완성품으로 존재하던 기성의 이론, 학설의 조건과 그 실천적 결과를 면밀하게 따지는 작업을 실행에 옮기거나 또는 요구할 조건 자체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전의 입수, 학습, 번역 또는 방송 녹취, 배포 자체가 고도로 정치적이며, 운동적인 의미를 부여받는 상황에서 이런 따위는 이미 그 자체로 과도한 요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ML주의와 김일성주의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는 스탈린주의적 요소들이 우리의 사유 깊숙이 자리 잡고 난 뒤였다.

(2) 맑스의 이론이 각국의 조건에 따라 ‘개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하나의 ‘일반적 지침’이라는13) 레닌의 말은 사실 그 자체로 그다지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술이다. 맑스의 이론이 교조가 아니라, 행동의 지침이라는 관점이 ‘ML주의’의 ‘정통주의’에서도 김일성주의의 ‘혁명전통론’에서도 전혀 내면화되지 못한 채, 문서상의 진리로 남았다는 것이, 80년대 사상의 첫번째 비극일 뿐이다.

엄밀히 말해 80년대 사상이론에서 문제가 된 것은 그 자체로 당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과 조건에 대한  독자적인 하나의 이념체계의 정립이라기 보다는, 기성의 주의와 이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즉 이것과의 ‘관계설정’의 문제였지 그 자체로 새로운 무엇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상의 자기준거성의 상실은 사상이론의 구체적인 적용 곧 정치노선에 있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1986년 5월 당시 호헌-개헌을 둘러싼 헌법국면에서 CA(제헌의회) 그룹이 주장했던 제헌의회 소집론을 들 수 있다.14) 당시 상황을 ‘혁명정세’로 파악하면서 이 들은 노동자계급의 당면 정치투쟁의 전술적 슬로건으로서 제헌의회소집과 ‘임시혁명정부’를 주장한다. 이 그룹의 전위주의에 내재된 정세판단상의 주관주의적 오류는 차치하고, 당시 제헌의회와 임시혁명정부 소집론의 이론적, 경험적 준거틀은 직접적으로 러시아 1905년 혁명당시 레닌의 저서였다.15) 다시 말해 이 좌익적 촌극은 그러나 당시 수동타자기 복사본으로 유포된 맑스, 레닌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확산된 ‘보급형 ML주의’의 적용 결과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러한 ‘원전주의’ 또는 원전에 대한 ‘신앙적’ 관계가 주체할 수 없는 혁명적- 그리고 순수한- 열정과 결합되었을 때, 그것의 정치적 결과는 심각한 것이었다.

사고의 외부준거성은 그러나 CA그룹과 함께 80년대 중반 변혁운동을 대표하던 NL그룹 역시 별 차이가 없다. 물론 기본적으로 CA그룹의 ‘러시아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좀 더 ‘민족적인 것’을 모색한 결과-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수입’된- 주체사상이라는 토착변혁이념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분명 진일보한 면이 있고, 나아가 분단현실을 고려 ‘반국적(半國的)’ 관점이 아니라 남북한을 포함한 ‘전국적’ 곧 ‘Korea'의 관점에서 변혁을 사고했다는 측면에서도 CA그룹과 비교 일견 구체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전국적’ 관점이다. 이 관점은 기본적으로 ‘혁명적 민주기지’로서의 북한의 남한 운동에 대한 지도력과 헤게모니를 전제로 하는 발상이다. 이와 함께 ‘해방된’ 사회주의 ‘조국’ 북한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재생산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 체제대립이라는 것이 단순히 ‘관점’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실체적 모순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진정한 ‘조국통일운동’은 이 실체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어야 함이 마땅하다. ‘자기의 머리로 사고’하기 보다, 북으로부터의 단파방송에 저당잡힌 의식으로부터 이러한 주체성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 무리였고, 어찌 보면 가장 비주체적인 주체사상이라는 남한 주체사상의 역설은 그러므로 운동의 구체적 자기준거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으로 비판적 자기반성에서 면제된 CA노선의 신앙적 ‘정통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NL노선의 사실상 1930년대 김일성의 무장투쟁노선에 근거하는 ‘혁명전통론’은, 주장의 진리성과 노선의 과학성의 근거를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서 찾기 보다, 텍스트 외재적인 제3의 높은 권위에 의탁하여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운동의 추상화와 대중으로부터의 자립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정신적 편의주의는 80년대 운동에서 나타난 ‘지식인의 실패’의 한 전형을 이룬다.

(3) 그러면 여기서 85년 이후 남한에 수입되어 젊은 연구자와 활동가를 사로잡은 ‘ML주의’는 과연 ‘어떤 맑스주의’였는지에 대해 보기로 하자. 이와 관련 우리는 앞서 언급한 G. 라비카의 논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ML주의는 전적으로 스탈린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1930년대, 권력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하나의 ‘이데올로기 권력’으로서 ‘철학-당-국가 체계’는 자기완결적이고 조화로운 맑스주의의 체계를 형성해 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하나의 주목할 만한 현상이 발생한다. 이 체계의 “창안자는 스스로 명명자로서 등장하는 것을 효과적이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다시 말해 “엥겔스가 맑스 뒤에 숨어 있듯이, 스탈린은 레닌 뒤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는 마치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 ꡔ삼총사ꡕ에서 가장 중요한 총사는 4번째 곧 달타냥이라는 것과 비교된다.16) 스탈린 사후 후르시초프의 이른바 스탈린 격하운동에서도 스탈린의 ML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이는 ‘스탈린없는 그리고 반스탈린적 스탈린주의의 유지’가 당시 소련의 노멘클라투라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였고, 또 그런 이유로 스탈린주의 자체에 대한 본질적이고, 발본적 비판은 생략된 채, 단지 그 개인숭배와 그로 인한 결과를 극복하는 것으로 스탈린 격하운동은 제한되었다.17) 이로서 스탈린주의 아니 ML주의는 소련의 ‘국가철학’ 또는 ‘국가이성’으로 봉인되기에 이른다.

(4)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본다는 점에 변증법의 진정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최종적으로 봉인된 맑스와 레닌의 사상은 이후 어떤 본질적인 변화도 없이, 이른바 ‘일괴암적’ 형태로 고정되어, 모든 나라에 보편타당한 것으로 권장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른바 ‘소련철학’에서 변증법의 문제이다. 라비카가 인용, 언급하고 있는 구유고연방의 Z. 무니칙(Munisic)은 구소련의 소위 ‘정통’ 철학에서의 “체계는 맑스의 저작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또 여기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직관적이고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이전의 유물론”18)이라는 견해를 제출하고 있다. 또 소련 공식 철학에서의 변증법은 궁극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학도 당의 철학도 아닌, 국가와 당관료를 중심으로 한 전문직 권력층과 소련 소시민층의 세계관”19)이라고 말한다. 80년대 특히 소련교과서를 매개로20) 수입된 ML주의는 결국 소련의 ‘국가철학’ 내지 ‘노멘클라투라와 소시민의 세계관’을 교조로 섬긴 셈이 된다. 달리 표현해 ‘비판의 무기’ 자체가 불량품이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스탈린주의 또는 ML주의에서 변증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모든 피조물, 모든 과학적 발견을 꾸역꾸역 먹어 치우는 식세포(Phagozyt)”21)같은 것이라 할 때, 김일성주의와 변증법은 어떻게 관계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주체철학에서 변증법이 거의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 채, 지난 시대의 주변적 범주로 취급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유물변증법적 철학은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에 관한 원리에 기초하여 모든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하고 해명함으로써 사람의 의사와는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세계와 그 인식의 객관적 법칙을 밝히는 데로 나갔으며 세계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지도, 해결하지도 않았다.”22) 공식적 ‘북한 철학’에 의하면, 주체사상은 ‘철학의 근본문제’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고, 또 이것이야말로 주체사상의 ‘독창성’을 보증하는 알파요, 오메가이다. 한편에서는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으로 찬양되는 변증법이, 다른 한편에서는 주체사상의 “전제”23)로 과감하게 상대화, 역사화된다. 그리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독창적인’ ‘철학적 원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평가적 진술 또는 윤리적- 강령적 요청(Postulat)은 될 수 있을지언정, 경험적- 사실적 진술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사상은 이 ‘철학적 원리’의 부단한 반복을 통해 양자를 혼치시키고 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 ‘아니며’,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하는’ 북한 사회주의의 경험적 현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조건반사라는 의혹을 낳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한 때 맑스가 헤겔철학의 ‘합리적 핵심’으로 건져 올리고자 했던 변증법은 주체사상의 ’체계‘에서는 사실상 기각되고 마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에서 사실상 문제가 되는 것은 변증법/비변증법이라기 보다, 유물론/관념론의 구분이었다. “맑스주의적 사고의 양대 구성요소의 상대적 자립화와 이와 결부된 ‘유물론적’ 고백에 대한 변증법의 방기야말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신에 반대되는 스탈린주의의 원죄라 할 수 있다.”24) 더불어 스탈린주의에 의한 유물론과 변증법의 분리와 이로 인한 변증법의 불구화는 또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정치현실에서의 기본적인 우적(友敵)관계는 사유의 범주로 전이된다. 현상에서의 변증법적 모순을 대신해 경직된 대립이 출현한다. 사유는 변증법에서 이원주의로 곧 전(前)맑스주의적 사유의 형태로 퇴보한다.”25) 80년대 사회운동에서 허다하게 목격되는 수많은 정파 및 ‘종파’의 명멸과 그들간의 ‘적대적’ 대립은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많은 부분은- 최소한 사상적으로 볼 때- 변증법의 부재에서 설명된다. 동시에 변증법 이론적으로 보더라도 80년대의 변증법은 대립의 변증법만 존재했지, ‘차이의 변증법’이 부재한 시대였다.26) ‘차이’의 시민권이 광범위하게 무시되고, 그것을 거대한 철학적 체계의 잣대 그것도 잘못된 이념적 잣대로 재단해서 정치적 대립을 양산한 것은, 결코 주체사상에서 말하듯 ‘품성’의 문제라기보다, 당시 사상이론의 내재적 한계의 당연한 결과였다.27)

(5) 학생운동을 매개로 도입된 새로운 이념은 80년대 중반이후 이들 이른바 ‘학출’들이 노동현장에 대거 투입되면서, 생산현장으로 빠른 속도로 확장․전파되어 나간다. 이른바 ‘존재이전’ 즉 자신들의 계급적 존재에 의한 한계를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적 몸부림의 산물인 ‘학출노동자’들이 한편으로 한국의 노동운동,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바는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이들의 헌신적 투쟁을 빼놓고는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 이 들이 중심이 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이후 민주노총 건설의 정치적, 조직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80년대 말 이후의 운동권의 격심한 분열, 분파주의, 청산주의는 단순히 어떤 사상이론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치부될 수 없는 내적 맥락을 가진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학생운동의 급진주의 내에 삼투되어 있던 스탈린주의적 편향들이 전혀 걸러지지 않은 채, 학출들에 의해 노동현장으로 이전․확장되었고, 경쟁적으로 현장에 투입되었던 제정파간의 노선투쟁과 아울러 생산현장에서의 정권과 자본의 억압과 전제에 의해 이 편향이 확대재생산된 데에 기인한다. 현장실천에서 나타나는 ‘권력기회주의’ 또는 ‘목적기회주의’는 그 자체로 스탈린주의의 실천적 전화형태라는 것이다. 이론은 단순히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실천’이라는 목적을 위한 단순 도구로 이해되고, 이로써 이론과 행동의 전략, 전술간의 매개는 단락된다. 사실과 그것에 대한 해석, 평가 그리고 주관적 희망이 광범위하게 혼동되고, 진술은 그것의 객관성이나 진리성이 아니라, 주어진 목적에 그것이 유용한지, 유해한지를 기준으로 판정되는 곧 ‘당파성’에 대한 지극히 잘못된 견해가 유포되었다. 이러한 ‘목적기회주의적’이며 도구주의적 이론관은, 나아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에 대한 특정한 경제주의적 관점으로 이어진다.28)

(6) 레닌 초기저작 ꡔ무엇을 할 것인가ꡕ, ꡔ두 가지 전술ꡕ에 거의 전적으로 준거해 ‘변혁운동의 목적의식성’을 내걸고 등장한 ‘MT’(민주화투쟁위원회의 약자)의 이른바 ‘정치주의․혁명주의․전위주의’가 운동권내 분파주의를 심화시킨 데 대한 반작용이 이른바 「강철서신」이란 이름으로 NL계 고전으로 광범위하게 읽힌 「노동해방운동의 힘찬 전진을 위해」라는 글이었다. 이 글에서 저자는 노동자 해방운동의 긴급한 당면과제로 ‘공장핵을 튼튼히 박는 일’을 설정하고, 여기에 “어떤 난관에 부딪쳐도 동요하지 않고 혁명적 순수성을 지키며 현장에서의 모든 투쟁을 지도하고 지역노동자 투쟁조직과 현장의 투쟁을 강하게 연결”시키는 기능을 부여한다.29) 그런데 바로 이 ‘공장핵’의 발굴, 선정 기준으로 등장한 것이 “솔직, 소박, 겸손, 성실, 용감한 품성”이다.

번역투의 난삽한 개념전투의 한 가운데서 불거져 나온 NL의 초기 문제제기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또 그런 만큼 당시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NL계 문건이나 특히 북한에서 출판된 서적류에서 공통적인 지극히 ‘대중적인’ 서술방법이나 해설조 문체는 독자 곧 대중에 대한 특정한 관점이나 해석코드를 전제함에 유의해야 한다. 80년대 후반 당시 이 계열 논자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대중의 상태’, ‘대중의 낮은 의식수준’등의 표현 즉 ‘대중=유아’식의 태도는 단순히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도덕주의적 포퓨리즘에 다름 아니다. 활동가에겐 누구보다 엄격한 청교도적 도덕율이 요구되고, 기호(taste) 역시 ‘포퓰러’하게- 예컨대, 반제국주의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커피, 콜라안마시기, 청바지 안입기 등- 유지할 것이 요구된다. 또한 철두철미 대중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스테레오 타입화되고 코드화된 대중의 정서 또는 감성에 활동가 자신을 맞추어 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 과정에서 주관적 도덕주의와 함께, 스탈린주의에 구성적 의미를 갖는 특정한 ‘실용적 주정주의(Emotionalismus)’30)가 발생한다. 주의나 학설은 토론과 논박보다는, 감격과 열정의 대상이 되고, 이성적 판단보다는 ‘구국의 결단’, ‘혁명적 의리’, ‘동지애’가 선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건에 따라 놀라운 대중적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러한 정서적 미분화(未分化) 구조는, 그를 받치고 있는 분노의 대상으로서 구체적 적이 소멸되거나 혹은 흐려질 때, 곧바로 위기에 봉착하고 이 때 과시적 행동주의나 맹동주의적 성향으로 이어진다. 흔히 스탈린주의의 일반적 특징으로 언급되는 개인숭배란 허약한 사회적 토대로부터 ‘고대적’ 형태의 카리스마에 바탕한 지도자 또는 리더십의 상대적 자립화 현상을 말한다. 카리스마의 원활한 기능은 유아기(幼兒期) 대중을 전제한다. 주체사상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이른바 ‘수령-당-대중’의 ‘주체의 영도방법’은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서의 수령에게 유아적 대중에게 의식과 나아가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을 설정한다. 그러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갖춘 진정으로 성숙한 대중은 그 어떤 수령도 필요 없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이 반(反)철학으로서 주체철학이 남한의 변혁운동에 도입되자 희안한 촌극으로 변한다. 극도의 탄압적 정치상황이 이 촌극의 무대가 되었다. 그것은 학생운동권의 ‘의장님’, ‘총장님(총학생회장)’ 또 각종 ‘위원장’등 일련의 ‘님자(字) 문화’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그 반대 진영에서도 그다지 예외가 아니었음이 한때 ‘면죄부’ 판매로 구설에 올랐던 ‘사노맹’에서 확인된다.



4. 맺는 말: 80년대에서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


전반적으로 80년대의 계승보다는 단절이 강조되었던 90년대에 대한 비판은 어쩔 수없이 80년대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이 때 즉 90년대 비판이 조건 반사적으로 80년대 찬양으로 이어지는 그러한 도식성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가의 ‘새로움’을 보증할 잣대의 정비를 요청한다. 이 잣대는 특히 다음 세기 한국사회의 과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무엇보다 민주주의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출발한다.31) 80년대 전반을 가로지르는 열쇠말은 결국은 민주주의였다. 80년대와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렇지만 90년대 흔히 듣게되는 ‘민주/반민주 대립구도의 해소’는 그 자체로 협소한 민주주의이해, 즉 ‘민주주의=절차민주주의’라는 잘못된 등식에 기초한 관점이다. 해소된 것은 민주/반민주구도가 아니라, 절차적 민주/절차적 반민주이며, 내용적 민주/내용적 반민주구도는 의연하다. 이런 측면에서 민주주의 개념을 특히 거기에 내장된 ‘전복성’ (N.보비오)에 착목, 생활세계의 전부면으로 확장시켜내는 일은 여전히 관건적인 과제로 남는다. 이런 측면에서 80년대의 ‘민중민주주의’ 개념의 한계, 민주주의를 그 다음 단계 곧 사회주의의 전단계로 설정하는 단계론적 사고 또는 계급동맹의 수단정도로 파악하는 도구적 접근 모두 극복되어야 한다.

둘째, 80년대의 ‘적’은 하나의 반이성, 비합리 그 자체였다. 이러한 적과의 싸움을 통해 80년대의 주체는 비로소 합리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90년대 들어와 합리주의에 대한 포스트주의의 격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합리성은 한국사회의 조직원리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비판적 합리주의 역시 80년대와 분리될 수가 없다. 그러나 80년대 운동노선의 과도한 주관주의와 맹동적 실천주의에서 확인되듯이, 이 때의 합리성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또 절차민주화과정에서 관철된 것은 결국 ‘합리적 지배’의 부정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줌의 합리성마저도 결코 저절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합리적 사회, 나아가 이성적 사회를 지향하는 투쟁과 노력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할 것이며, 물론 이 때의 합리성은 도구주의적 합리성만으로는 가능치 않다 할 것이다.

합리성이라는 문제설정은 근대성의 문제와 긴밀히 연관된다. 80년대의 운동은 무엇보다 기성의 반(半)봉건적 권위체계와 특권구조와의 갈등에서 부단히 그 에너지를 공급받았다. 그 갈등은 드물지 않게 가족 내로 전이되어, 부자갈등, 세대갈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운동의 팽창과 더불어 출현하는 예컨대 ‘의장님’ 또는 ‘수령님’ 문화 등 운동권내 전근대적 권위주의는 그 본질에 있어 사상적 퇴행의 흔적이며 또 가장 반운동적인 행태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90년대의 개인주의는 그 이전과 비교해 분명 근대적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개인의 주체성이 아니라, 그 단자성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세계사적 근대가 해방된 개인에 대한 예감과 더불어 열린 것이라면, 한국에서의 근대는- 하버마스의 표현처럼- 여전히 ‘미완의 프로젝트’이다.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그 출발이었다.

셋째, 80년대는 무엇보다 집단행동의 시대였다. 이러한 집단적 문제해결의 경험과 효과는 90년대에 들어와 더욱 일반화되었고, 심지어 소부르주아적 ‘님비’현상을 포함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80년대의 스크럼문화와 ‘매스게임’(?)은 강한 공동체지향과 연대감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연대는 분명 싸구려 연민과 출처미상의 어중간한 ‘똘레랑스’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사회적으로 자각된 개인의, 뚜렷한 지향을 가진 하나의 의식적인 집단행위이다. 노학연대, 동맹파업, 동맹휴업 등 계급, 계층을 뛰어넘는 대중적 저항은 연대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연대의 사회적 조건은 변화하였고, 노동자계급 내에서건 학생운동 내에서건 연대를 가능케 하는 그러한 집단적 동질성은 도처에서 해체의 징후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연대의 경험이야말로 80년대가 다음 세기 멀리까지 가져가야만 하는 전통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민중지향성이라고 불리우던 ‘낮은 곳’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80년대의 징표이다. 80년대 중반이후 급속도로 관념화되기는 했지만, 야학, 농활, 공활 등 당대 한국 ‘나로드니키’들의 순수열정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그 자체로 탓할 바는 못된다. 문제는 이들이 스스로를 ‘코아’(핵심)로 이해했고, 그러고 나서 스스로 코아이기를 포기했을 때, 다시 말해 스스로 대중이 되어 버렸을 때 전선이 붕괴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런 점에서 90년대는 운동이 아니라, 운동론의, 대중이 아니라, 지식인의 실패의 결과이다. 한 때 대중과 함께 생활하고, 느끼고, 호흡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특히 ‘지도’하기를 원했던 80년대 지식인은 대중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자, 스스로 버림받았고, 많은 경우 현실정치에서 이를 보상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의 사상이념은 이들 지식인의 민중지향적 진보성에 의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물론 진보는 철저하게 상대적 개념이다. 진보의 폭과 수준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며, 그 절대적 경계란 없다. 그렇다고 할 때, 새로운 21세기적 진보의 정형을 창출해내는 작업은 여전히 열린 과제로 남는다. 여기서 80년대 한 때, 치열한 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경계를 혁파하고, 자신의 미래를 사회적 조건의 혁신과 동일시하면서, 당면한 현실의 장벽을 집단적으로 돌파하고자 시도한 그 역사적 경험은 여전히 유효한 출발점이라 하겠다. 90년대보다 오히려 80년대에서 우리의 21세기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제기



9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이냐, 80년대와는 완전한 단절이었다면 90년대에도 어떻게 그 상을 그려볼 것이냐, 앞으로 역사적 과제가 될 것인데 그런 점에서 90년대를 이론사적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지 기본적으로 계급의 정치학에 대해서 계급이라던가 ‘우리’라는 것을 해체하고 개별적인 ‘나’로 나아가는 ‘나의 정치현상’의 시대가 아니겠느냐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90년대가 하나의 개념으로 그려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90년대 포스트담론 시대, 80년대에 나왔던 주의에 대해서 ‘탈’이라는 접두사를 붙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9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해서 그런 정도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80년대를 운동사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80년대 운동사의 지침이 되었던 이론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이 괴리를 어떤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지가 의문시됩니다. 오히려 거꾸로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80년대가 실천적으로 긍정적이라고 한다면 긍정적인 실천을 경험했던 이론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답


우선 접근방법 연구전략상에 있어서 설명을 드리자면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이론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구체 논쟁이란 말이 나왔어야 하는 것이고 저는 그걸 대상으로 삼은 게 아니라, 우선 80년대 전반 그리고 90년대 전반 즉 철학에서 얘기하는 메타이론을 다루고 있는 사상사-이론사가 아니라-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90년대가 하나로 묶일 수 있느냐 즉 온갖 주의들, 잡사상들, 잡놈들이 횡행했던 그런 시기였는데 있을 건 백화점식으로 다 있었죠. 애너키즘도 있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주체를 중심으로 구분을 한다면 대표적 현상으로 주체적, 실천적 측면에서 ‘나’라는 문제, ‘나’들이라는 것이 뭔가 손에 잡히지 않는 이런 불가해적인 시대, 그렇지만 어떤 시대건 그 시대를 호명해주고 자기의 시대를 해석하고 규정을 가하는 주체가 없었던,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주체이며 주체가 아니되게는 역설과 딜레마의 시대를 사상사적 의미에서 나의 정신현상학이라는 표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존재조건을 중심으로 80년대와의 비교를 통해서 거기에 기대어서 90년대는 어떤 시대로 규정할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80년대와 비교해서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시대였다는 겁니다.

여기서 나를 기초짓는 방식이 좀더 분화되어야 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80년대죠. 지적하신 대로 리버럴 진보, 보수, 창비계열 리버럴들이 주장하는 80년대 비판이 같은 맥이예요. 실천적으로 열심히 했는데 이론적으로 문제가 있다. 그런 얘긴데 김동춘선생도 그런데 제가 스탈린주의 규정을 끌어들인 건, 제가 생각하는 80년대의 문제점이 이론과 실천의 통일의 실패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론은 틀렸는데 실천은 잘했다 이런 건 아닙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실패했던 여러 이유 중 우선 이론 자체, 사상 자체에서 찾아보자고 할 때 스탈린주의가 가진 큰 것이 끊임없이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고 이론을 자기 세력의 필요에 따라 도구화시켜버리는 것이고, 따라서 이론이 마땅히 담아내어야 하는 이론의 진리성을 끊임없이 도구화시켜버리는 편향들, 즉 전술적 일상적 필요에 의해 이론을 동원해내고 그래서 필요한 구절을 따오는 훈고학적, 이론 실용적 태도를 문제삼자고 하는 겁니다. 기성의 담론들, 기성의 해석들에 대해 정확한 갈라치기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구분짓기를 해야될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제기


맑스-레닌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스탈린주의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탈린주의가 소련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관료화되고 지배이데올로기로 역할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소련 내에서는 관료적 지배체제에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스탈린주의 사상체계가 한국에서 다른 조건 속에서 오히려 급진주의적 실천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기 때문에 동일한 사상적 내용이 다른 사회적 조건 속에서 다른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사상체계로 스탈린주의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서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접근해야지만 80년대 이론을 더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리고 80년대 맑스주의를 보면 이런 걸 왜 과학이라고 했을까 다들 생각합니다. 그런데 80년대에 왜 그런 형편없었던 사회과학체계라는 것을 수용하게 되었던걸까 하는 즉 스탈린주의를 가장 발전된 좌파의 사회과학이론이라고 절대적으로 신봉하면서 수용했을까 그 수용의 사회적 조건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우리가 근대화 과정 속에서 제도권 속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변혁권 내에서도 국내로부터 즉 자기가 처해있는 현실로부터 사상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 외부의 사상을 수입해 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답


그 코멘트에 대해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수용의 사회적 조건을 보자는 것은 제가 거기에 대해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맑스의 표현처럼 적들이 대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론을 살펴본다는 것은 사치겠죠. 그런 조건에서 사상과 이론에 대한 두터운 해석자, 즉 먼저 보면 최신이론이 되어버리고 먼저 수입을 하면, 먼저 번역하면 자기 정파의 이론이 되어버리고 하는 상황에서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공공영역이라는 부분에서 토론을 조직하고 걸러내고 전파 확산되고 검증하는 사회적 공간의 부재라는 점에서 가장 큰 원인과 이유가 있고 그 당시적 의미에서 시민사회의 부재, 사회적 담론의 영역들이 토론을 조직하고 소비자들로부터 피드백되는 부분의 부재가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나, 즉 80년대 운동이라기보다 운동론과 지식인의 실패라는 부분은 거기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속이론, 세계체제론 모두 그랬지 않습니까. 당시 사회과학의 열풍 속에 있었지만 그걸 검증하고 비판할 만한 능력은 안되었던 거죠. 그리고 그런 능력이 생겼을 때 소동구의 붕괴가 있었고, 거기에 한걸음 더 나아간 비판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반성이 주가 되었었던 것이고, 그랬지만 완고파들은 의연히 고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알고 있었던 문제를 공론화시켜서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파와 싸우다보니, 그리고 정권이 바뀌고 북한이 변화하고 사회적으로 해체적 분위기, 결코 대안적 주체가 아닌 ‘나’들의 공세 앞에서 수세에 몰려버린 그런 상황이 아니었나 그런 조건이 아니었나 합니다.


문제제기


정신사의 주체인 ‘나’가 80년대 ‘우리’ 속의 ‘나’인지 90년대 독자적인 ‘나’인지를 구체적으로 해주시고, 운동권이 주체였던 ‘나’로 말씀하시고 운동권이 ‘나’로 치환되는 느낌인데, ‘우리’라고 하는 것과 ‘나’라는 것이 분리되기도 하고 일치되기도 한다는 느낌입니다. 정신사적으로도 볼 수 있지만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볼려면 역사적 파악, 역사 속에서의 ‘나’라는 것, 역사와 구체적 정세가 스며들어서 논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에서 사회적 개인과 개인적 개인을 구분하시는 데 어떤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습니다. 그것은 앞의 제기와도 맞물리는 것입니다. 사회적 개인이라는 용어는 개인적 개인이라는 것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만약에 개인이 독립적이면서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다면 그것이 역사 속에서 파악되면 좋겠지만 독립적으로 고찰되면 잘 드러나지 않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답


지배블럭과의 관계 속에서의 사상, 제가 그것을 어떻게 방법적으로 실현시킬지 계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첫번째 ‘나’와 ‘우리’의 문제, 그 부분에서 제가 정확하게 구분을 못한 지점을 지적했는데, 80년대의 ‘우리’는 권의 헤게모니 하에서 규정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우리’를 묶어주고 ‘우리’의 성격을 규정해주고 실천방향을 지시해주었던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헤게모니에 대해 그 윤리적 규범적 당위에 대해, 당위의 권력이 없고, 힘이 없고 그런 의미에서 권이 규정해 왔던 ‘우리’와 권이 그것을 놓아버리면서 스스로 ‘나’로 돌아가고 해체되고 이탈되고 더이상 규정력, 헤게모니를 잃어버렸을 때 남는 것은 규정되지 않는 단자로서 개인만 남게되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남겨진, 규정되지 않는 단자로서의 ‘나’의 정치적․경제적 생존전략은 알아서 해라, 먹고살아야 한다, 고시공부하고 유학가고 취직하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말한 개인적 개인이란 것은 사실상 사회 내의 규정되지 않은 개인, 나아가자면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개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다분히 방법적인 구분이지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구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회적 개인은 맑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의미에서의 개념입니다. 즉 진정한 개인성의 회복, 주체성의 회복이 사회와 유기적으로 맞물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자는 것이 사회주의니까 80년대의 개인을 사회적 개인이라고 보는 것은 권의 규정력에 의해 방향을 이뤄갔고, 동참해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과 물질적인 실천적으로 스크럼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시민단체가 틈새시장이라고 말했는데 마치 80년대의 적자인 것처럼 그리고 보수언론도 시민운동만이 살길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적극 권장했고, 정권 쪽에서도, 지금도 그렇고 민중운동 쪽으로 넘어가면 빨간 생쥐들이라고 반대하고 있는 그러한 조건과 설정 속에서 개인적 개인과 사회적 개인을 방법적으로 구분한 겁니다.


문제제기


우리가 80년대에는 ‘우리’로 부딪혔는데 그 이전에는 ‘우리’의 시대가 있었느냐 독재정권시대는 ‘우리’로 규정할 것인지 ‘나’로 규정할 것인지, 아니면 그때는 국가적으로 호명된 ‘우리’였죠. 민족주체 산업역군으로서 80년대에 등장한 ‘우리’가 왜 등장했는가는 80년대와 90년대의 차이보다도 근대화과정에서 80년대가 등장할 수 있었다는 데 맞춰져야 하고 우리나라가 80년대 다른 나라들과 다른 시공간에 있었다는 언급을 훨씬 밀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80년대 자유주의 문헌이 우리에게 끼친 것이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80년대는 맑스주의의 르네상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일본에서 60년대 학생운동인 전공투도 ‘우리’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다가 체제 속으로 단자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취하는데 80년대 우리들과 그들의 차이점들이 있다면 10년간을 주기로 말하는 세대담론에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90년대에 ‘나’를 발견한 것이 부정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리고 ‘불비한 인프라’라는 것 지금 시대의 인프라는 무엇인가를 고찰하는 것을 이 글이 제공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전시대와 후시대 그리고 국제적인 맑스주의의 비교 등 내용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80년대와 90년대를 나눌 때, 과연 시기구분이 명료하게 될 수 있는가, 기준은 무엇인가가 필요한데, 여기서는 ‘우리’와 ‘나’로 되어있는 것을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80년대에는 ‘광주’라는 것이 중요한 계기였고, 90년대는 그것에 빗대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있구요. 그리고 80년대 운동주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민주화’인데 많은 세력들이 87년 투쟁을 ‘실천’은 긍정, ‘이론’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고 저는 그것을 뒤집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여러 세력이 민주주의를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광주에서도 투항파와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던 거죠. 투쟁을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민중주의의 합리화와 함께 부르주아적인 민주주의 요소를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었고-운동권 내부에서조차-, 그래도 뒤집어서 90년대는 그것이 더 분화되고 좀 더 전개되는 과정이고, 80년대는 김동춘선생 표현대로 하면 레닌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90년대에는 그것을 표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각되고 명확해지고 계급의 민주주의로 전화되는 과정으로 본다면 80년대를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성의 재평가가 가능한가의 문제의식이 듭니다. 또한 대중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지식인의 실패, 이론 자체가 아니라 운동론의 문제, 그것은 나아가면 지식인 중심 운동이냐 대중이 주체가 되는 과정이고 80년대와 90년대를 나누는 근거점, 80년대의 이론 혹은 주체들이 대중과 결합에서 실패했던 과정이었고, 이론이 실패한 것이 스탈린주의가 문제라면 이제는 대중운동 스스로의 자기이론, 자기노선이 뭐냐는 문제들이 ‘나들’이 지금은 경향으로 잠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권의 논리가 과거에 민주주의 쟁취, 확장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민주주의 자체 계급적인 내용이 분화과정, 자본주의 모순이 발아에 착목하고 다양한 여성 환경 등의 문제들이 발아하고 있고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 통합시켜나갈 것인가가 고민되어야 하는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80년대말 소동구붕괴 이후 운동권의 분화과정이 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답


80년대라는 건 81년부터 89년까지를 모두 말하는 건 아니고 굳이 부르자면 문화정치적 개입이죠. 그래서 조금 자르는 각도 분석방법이나 사용되는 개념 풀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미처 생각 못했던 것인데 권과 헤게모니, 제가 권이라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 권의 어떤 사상적 헤게모니가 과연 80년대만큼 전면적으로 아래로부터 관철된 시기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앞 시기가. 그래서 앞 시기와 구별되는 것으로 권이라는 것이 도입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앞 시기에 대한 사상적 철학적 고려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동의합니다. 그런 면에서 잣대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만일 사상사적인 방법을 채택한다면- 문화정치적 방법을 채택한다면, 그것은 대상의 성격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차용하고 있는 중심 개념 중 하나가 90년대를 볼 때 오케이저널리즘인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정신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사물과 세계의 관계 등에서 필연적 관계를 거부하고 모든 걸 우발적인 것으로 보려하는, 즉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낭만주의 같은 따라서 여기서 사용되는 잣대는 ‘나’와 ‘우리’라는 주체를 세우고, 그리고 그것이 세계와 사물에서 어떤 상태로 관계하는가 하는 것이 잣대라면 잣대인데 텍스트에서 그 잣대를 완벽하게 관철시켜 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조금더 지금 시기를 앞당겨서 실천적으로 끌어올 수 있는 결론이라는 것은 90년대에 재발견된 ‘나’라고 하는 것이 관념적 재발견에 불과하다, 물적 기초는 전혀 없는 시장종속적인 즉 ‘나’들로 해체된 공간은 권의 정치학도 아니고 자본의 전략이었다는 거죠. 특히 90년대 후반부에 들어서 끝으로 갈수록 ‘나들’의 위기가 나타나고 있지 않나, 그러한 ‘나들’의 위기, 새로운 아이덴티티에 대한 갈망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90년대가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끝나가고 있지만 팬옵티콘 시스템이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나들’이 각방에 갇혀있는 ‘나들’의 욕구들로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80년대의 연대와는 다른 새로운 ‘나들’을 엮어내고 연대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러한 ‘나들’의 연대전략에 대해 좌파들이 문화주의적 좌파라고 불릴지는 몰라도 좌파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와 공간들이 열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죠. 적절한 사례일지 모르지만 시민운동단체에서 낙선운동 한다니까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죠. 그것을 해석한다면 위기감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거죠. 해보니까 별 거 없고 남는 게 없다는 거죠. 그런 문제들을 좀 더 좌파적 방식으로 가공해서 만들어가는 것, 예를 들면 진보넷도 하나의 시도이지 않을까요.

한편 90년대에는 신자유주의, IMF를 통한 극적인 ‘나들’의 학습 혹은 재학습, 자발적 리플렉션이 강요된거죠. 그 상황에서 위기감들 90년대적 주체의 위기라고 해석하는 것이고 80년대 개인이 없었다는 것은 메타포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90년대와 비교해서 90년대적 의미의 개인이 없었다는 의미죠.


문제제기


통방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는데 통방을 하는 것이 80년대와는 다른 질서고, 나들이 위기를 느끼는 속에서 제기되고 발견되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개인들의 연대에 좌파들의 개입지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민주주의 부문에서 80년대식 민중민주주의 개념의 한계, 민주주의를 사회주의 전단계로 설정하는 것, 계급동맹의 수단 정도로 파악하는 것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극복형태로서 민주주의, 예를 들어 ‘우리’ 의식의 접목과 통방과 일치되는 개념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좌파의 개입과 민주주의가 전략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런지요.


답


통방이라는 문제의식은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보면, 저는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이 주가 되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고 위험하기기 때문에 민주주의 문제를 거시사회학적 패러다임이 아닌, 더 내려가서 살펴보자는 겁니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민의 주체성을 고양시키고 신장시키는데 장애가 되는 장치들은 신자유주의 그것의 세포형태, 사상적인 세포형태까지 내려가 볼 때, 우선 단자적으로 쪼개져 있는 개인들은 힘이 있을 수가 없죠. 거기를 깨쳐나오는 방법으로서 ‘연대’가 나오는데 지금의 ‘연대’라고 하는 것은 집단주체를 상정하고 계급주체가 고전적 모델이라고 한다면 이미 우리는 개별화를 경험했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헤겔식으로 하자면 불행한 의식이라고 할까 이미 알아버린 그런 상태에서 스탈린주의적 집단연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라는 거죠. 노동자들과 현재의 학생들에게 이전의 스크럼문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거죠. 그렇다면 어떤 전략전술이 있을 수 있을까, 통방의 방법도 있을 수 있고. 현재로서는 일단 사이버공간의 구성을 돌파해내는 그리고 인터넷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버추얼 리얼리티는 결코 리얼리티가 될 수 없다는 자각들을 만들어가는 그것을 자각하면서 닫힌 구조들을 깨나가는 그런 방법들이 고민되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문제제기


소 붕괴 후 여러가지를 정리할 상황이었는데 결론은 이제야 비로소 한국사회에서 맑시즘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고, 80년대 변혁운동에 투신해서 내 20년의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되었고, 어쨌든 여기서 비판되고 있는 이런 경향과는 다른 PD운동 속에서 80년대를 살아왔고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맑시즘의 출발의 거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80년대를 정리해보자 할 때 거꾸로 시대적인 분위기는 맑스주의가 죽은 개가 되었고 거기에 제일 분노한 것은 80년대의 모든 실천을 스탈린주의의 잔재였다고 청산하는 태도였거든요. 그것은 목욕물을 버리면서 애기까지 버리는 거죠. 한편으로는 어쨌든 80년대에 스탈린주의적 요소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치밀하게 부딪혀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스탈린주의로 뭉뚱그려 버릴 수 있는 것인가. 두번째로는 여기서 비판되고 있는 NL, CA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죠. 함께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거죠. 80년대에 대해서 새롭게 맑스주의 운동을 출발한다는 점에서 이들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거죠. 문화수입의 역사적 단계론을 저는 맑스주의 사상이라는 게 어쨌든 도입되어 오는 것이고 그렇다면 맑스주의 사상의 초기 도입기로서의 80년대를 어떻게 보고… 문제는 이 시대를 특징짓는 것이 스탈린주의라기보다는 첫째는 맑스주의 도입의 초창기에 보면 코제브를 통해 번역된다든지 일본을 통해 수입되었고 여러 경로를 통해 맑스원전이 읽혔는데 이 시기가 오히려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정치적 신좌파적 해석으로부터 해서 혁명적 민족주의 사상, 민중주의적 사상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의 맑스주의가 토착화될 때 다 겪는 과정인 것이고 한국사회는 광주, 4․19 전통에서 그 나라의 토착적인 것에 맑스주의가 어떻게 결합되어 나가는가 그리고 동시에 어떤 사상적 독자성을 확립하느냐의 과정인데 이런 것들이 혼재되어 있고, 이런 부분들이 80년대 90년대 초반 정리되면서 조건이 성립되었다고 보는거죠. 두번째로 맑스주의를 받아들이는 경로를 보면 현실의 계급운동으로부터 분리된 학생출신의 활동가들의 논쟁을 통해 도입됐다는 거죠 그것은 한국사회 맑스주의 도입경로의 특징인거죠. 그런 논쟁이 현실의 계투 속에서 검증될 수 없었다는 거죠. 이론, 전술 그 자체의 논쟁으로만 끝나버린 것이었죠. 초기 도입 단계 속의 특수한 측면들이 87년을 거치면서 바닥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87년 투쟁이 그 이후 6~7년간에 걸친 모든 세력들이 검증을 받아야 되는 문제인데 거기서 어느 한 세력도 검증받지 못하고 지도적 이념을 세워내지 못했다는 거죠. 그래서 그 계급적 토착화를 이루어내지 못한 결과로서 동구사회주의권이 영향을 미친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민주화투쟁의 성과가 87년 대선에서 정리되어지는 것이고 87년 민주화투쟁이라는 정치적 성과가 80년대 운동세력의 성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 맑스주의 도입초창기에는 번역되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그것은 어느 나라나 불가피한 것인데 문제는 그러한 과정이 동시에 실천을 통해 검증되어 새롭게 재편되는 계기들을 완결하게 접근해 간 단위가 없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대부분 조직사건으로 깨어졌고 내부적으로 그것을 새롭게 해갈 계기가 없었고 또 하나 보자면 정파운동을 볼 때 조직지도부와 사상지도부가 분리된다는 거죠. 이 부분이 조직 내부에서 이론과 실천을 조직적으로 구축하는 데 실패한 것이고 그 과정이 편집부와 조직지도부가 갈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거기서 주목할 부분이 89년이 되면서 합법적으로 보급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기가 운동사적으로 중요하다는 거죠 그 당시 맑스주의를 공부한 사람들이 90년대 초반에 정리를 한편으로 하지만 그것은 맑스주의 운동진영에서 보자면 먼저 본 것이 권위가 아니라는 것을 제공한 것이죠. 운동양식에 있어서 새로운, 객관적으로 제기되지 않으면 형성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맑스주의 도입과 관련해서 그렇다면 또 하나는 맑스주의라는 것이 현실계투의 지침으로서 맑스주의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그러한 계급적인 결합들을 어떻게 하려 했는가에 대한 사구체논쟁을 겪으며 87년으로부터 많이 분리된다는 거죠.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90년대가 맑스주의 운동의 새로운 출발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문제제기


저는 현실을 보는 것에 대해 견해가 틀린데, 80년대를 ‘우리’라고 하고 90년대를 ‘나’라고 한다면, 80년대의 ‘우리’를 운동권의 ‘우리’로 사용하신 반면 90년대의 ‘나’는 운동권의 ‘나’를 얘기하는 건지, 그게 아니라는 판단이 들거든요. ‘나’로 되면서 그냥 흩어져 버린 상태의 ‘나’이고 그들의 위기의식을 느낀다는 논의인데, 오히려 그렇게 되면 ‘우리’라는 부분들이 없어져버리는데, 저는 없어져버리지 않았다고 판단하구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껴 연대를 생각하는 ‘나들’은, 그리고 낙선운동은 탈정치화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고, 그러한 탈정치화는 무엇이냐, 80년대 그것은 운동에서 3S로 시각을 돌리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노동운동의 부정을 탈정치화라고 보아야 하고 거꾸로 돌아간다면 ‘우리’와 ‘나’의 긴장과 대립으로 80년대로 보면서 90년대를 ‘나’의 경향성 속에서 ‘우리’의 새로운 모색으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추상수준 문제는 인정하면서 90년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면에서 80년대야 어디 ‘나’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이런 것들이 87년 이후 타겟도 없어지는 것이고 90년대 후반 동구붕괴 후 개인적인 ‘나’로서 내가 무엇인가를 질문했었고 그 방식도 여러 가지였는데, 이점과 관련해서 저는 이것이 완전히 부정적인 문제만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활동가의 입장에서 ‘나’라는 것은 먹고사는 것도 문제고 가족문제도 있고, 어쨌든 민주화운동으로 동원되는 수준의 것이 요구되었다는 것이고, 이 점에서 당장 전략전술만 가지고 우리나라의 사구체는 신식민지다 어쩌다 하는 수준만 가지고는 이제는 더 이상 운동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고, 운동권 내부에서 ‘나’의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문제를 돌이켜 보는 것 중요한 역사적 시기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런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권이라는 데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문제는 이제 그렇게 해체되어지는 데서 자본이든 시민이든 나름대로 조직하려는 기도는 있었지만 그에 대응하는 플랜은 없었죠.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우리나라는 분명한 것이 없는 것이 뭉뚱그려지는 ‘우리’가 아니라 그것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되는 계기이고, 다른 측면에서 보면 90년대 초반의 과정이라는 게 80년대 정치투쟁이 해체되는 거죠. 그러면서 90년대 초반 이후 운동을 떠난 것은 그렇다 치고 정치는 해체되어지면서 부문 현장 지역 이론 지형들 속에 숨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나’를 찾는 모색과정인 동시에 정치의 해체과정이고, 이것을 마감하는 그 시점에조차도 해체되어진 것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대해서 노힘 등 맹아적으로 제기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해체과정이었다고 보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이 문제가 통방의 문제를 제기하셨고 그 인프라의 문제도 80년대의 동력 활기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현대화, 이 과정은 동시에 되어야 하는데 네트웍 자체가 그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어디서든 제한없이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그것은 여기저기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80년대처럼 누가 깃발 든다고 따라오는 건 아니죠. 변화되어진 조건은 인프라일 수도 있지만 90년대 운동의 조건은 이미 대중조직이 성장하고 그 노동자 민중들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구축해 들어가는 문제거든요.


답


한국 맑스주의 이론사를 쓴다면 도입은 1920년대죠. 오히려 전쟁을 통해 깨어지고 그 이후 80년대 시민권을 획득해서 90년대 오는 것인데, 제가 하는 것은 이론사가 아니라 두 시대를 추상성을 높이 잡아서 대표현상을 뽑아 90년대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볼 때 두 시대를 볼 때 다른 방식도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어쨌든 IMF 이후 단자화된 개인들의 위기 그리고 그 반전의 계기를 확장시켜내고자 이 코드를 가지고, 물론 그것은 운동사의 관점에서는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고 봅니다. 통방은 소통 가능성을 보고자 하는 것이죠.

그런 부분에서 더 나아가서 어떤 인프라와 어떤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 또 다른 결론이죠. 통방뿐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전략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 정신적인 자립성, 독자성, 자본주의에 통폐합되어버린 그런 아이덴티티에 대한 비판이죠.


문제제기


주목해야 될 것은, 80년대의 소산이자 산물이면서도 90년대의 신자유주의, 그것에 맞서는 계급적이고 집단적인 관계, 그런 공세들에 맞서서 대중적인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그 부분에서, 민주노총을 둘러싸고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그리고 사회 전체적인 관계들을 분석하고 현실적인 지점에서 진단하고 어떻게 고리들을 풀어 나갈 것인가를 진단하고 고리들을 찾아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민주노조운동 내부적 측면에서 본다면, 여러 위기의 징후들이 보이죠. 다른 곳에서 많이 얘기합니다만, 대중적 확신들을 못 보여줌으로 인해서, 민주노조운동이 조합원 수준에서부터 연맹, 단사 등에 이르기까지 주식투자, 뭐뭐 해서 아주 영향이 큽니다. 2002년 복수노조 문제라든지, 민주노조운동과 전체 사회운동, 해서 실질적인 민주적 권리 수준에서, 소위 시민사회라고 얘기되는 그들이 총파업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대응했냐는 것인데, 예컨대 낙선운동에 그렇게 열광하는 시민운동이 올해 총파업운동이 예를 들면 일어난다고 했을 때, 어떻게 보여질지 하는 문제들이죠.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문화정치적 측면에서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대응이 필요하겠지만, 핵심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신자유주의적 지배질서 하에서 뭔가 이들이 우리 사회질서에서 뭔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이게 관건이 아니겠나 하고, 그것이 보여지지 않을 때는, 여기에서 서구의 개량화된 모습으로 가버리게 될 것이니까요.


답


시민사회의 의미와 관련되는데, 시민사회 영역이 작년에 보여준 것처


럼 앞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에서는 비슷하게 보여 줄 것인데, 이게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시민운동의 태도가 그렇게 변함없이 간다면, 좌파들이 그런 소위 시민운동이 제기하고 있는 부분들을 놓쳐 버린다면, 역설적으로 노동운동이 개량화되어 갈 것이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시민사회 영역을, 오히려 우리의 개량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게 아닌가, 시민사회 영역을 노동운동에서 길게 보아 우리의 영역으로 확대해 들어가는 것, 이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노/정/연





* 이 글은 이해영, 「사상사로서의 ‘1980년대’: 우리에게 1980년대란 무엇인가?」 이해영 편, ꡔ1980년대: 혁명의 시대ꡕ (새로운 세상, 2000년)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혀 둔다.


1) 이 글에서 사용하는 ‘낭만주의’개념은 현대 (신)보수주의의 정신적 교부라 할 독일의 사상가 칼 슈미트(1888~1985)에게서 ‘다운’받은 것이다. 슈미트가 문제삼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란 낭만주의라 했을 때 흔히 연상되는 그런 것, 예컨대 자연, 열정, 환상, 몽환적인 것 따위와는 전혀 다른, 일종의 ‘정치적’ 현상이다. 계몽주의와 혁명의 시대를 뒤이은 19세기 독일낭만주의의 탈정치화, 정신적 종속성과 또 그로 인한 ‘무결단성’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통해 슈미트가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결단하는, 결단의 능력을 갖춘 주체의 형성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새로운 ‘혁명적 보수주의’ 사상이 접속된 곳은 히틀러 파시즘이었다. 히틀러야말로 무한한 행동력으로 무장한 새로운 시대정신의 화신이었다. 상세한 논의는 다른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지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해 둘 것은 이글이 슈미트의 사상에 내장된 맹목적 행동주의 경향과 공허한 결단주의(Dezisionismus)마저 수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1) 슈미트는 “낭만주의란 주관화된 우발주의(Occasionalismus)”라고 간결히 정의해 낸다. 핵심적인 것은 마땅한 역어의 부족으로 잠정적으로 ‘우발성’이라고 옮겨 적을 수밖에 없는 ‘occasio’라는 개념의 의미이다. “낭만주의적 태도란 하나의 독특한 개념 곧 occasio라는 개념을 통해 가장 명료하게 표현된다. 이 개념은 동기(Anlaß), 사정(Gelegenheit) 또는 우연(Zufall)이란 말로 바꾸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원래 뜻하는 바는, 그 반대말을 통해 더욱 잘 드러난다. occasio 개념은 causa 개념 - 즉 예측가능한 인과성에의 강제, 혹은 어떤 하나의 규범에 대한 모든 구속 -을 부정한다. occasio개념은 삶과 사건에 결과와 질서를 부여하는 모든 것은 ... 단순(한낮) 우연적인 것에 대한 관념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해체시키는(auflosend) 개념이다.”(C. Schmitt, Politische Romantik, 5. Aufl., Berlin 1991, 22-23면)


2) “정치적 낭만주의는 혁명이 일어날 때에는 혁명적이고, 혁명이 끝나면 보수적이며, 명확한 반동복고 시기에도, 자기 편을 발견해 낸다. …정치적 내용의 이러한 가변성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발주의적(okkasionell) 태도의 결과이며, 수동성을 핵심으로 하는 낭만주의적인 것의 본질 깊숙한 곳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Schmitt (1991), 위의 책, 160면.


3) “낭만적으로 구성된 시류의 정치에 대한 불후의 전형이 바로 돈 키호테이다. 그는 낭만주의적 정치가이지, 정치적 낭만주의자는 아니다. 돈 키호테는… 정의와 불의의 차이를 보고, 자신에게 정의로 보이는 것을 위해 결단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자신의 기사도 이상에 대한 감격과 소위 불의에 대한 분노가 이 가련한 기사로 하여금 외부의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돈 키호테는 탄식을 현재에 대한 비판으로 양식화시키면서, 자신의 주관성속으로 미학적 퇴각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돈 키호테의 감격은 자신의 신분에 대한 한 진정한 기사의 감격이었지, 귀족들의 인상적인 그림에 대한, 부르주아의 그것은 아니었다.”(Schmitt(1989), 위의 책, 207-208면) 강준만식 실천은 90년대적 실천, 90년대 정치적 돈 키호테주의의 한 전형이다. 자신이 판정한 불의 곧 <조선일보>에 대한 일인전쟁은, 마치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 키호테의 몸짓 바로 그것이다. 어떤 주의의 검열도 거치지 않고, 어떤 조직과의 연계도 없는 그의 실천은 진정 90년대적이며, 또한 90년대적 주체 ‘나’의 정치전략을 대변한다.


4) 같은 책, 20면.


5) “오로지 개인주의적으로 해체된 사회에서만, 미학적으로 생산하는 주체는 정신적 중심을 자기 자신안으로 이전시킬 수 있다. 곧 개인을 정신적인 것 속에 고립시키고, 자기 자신에 준거하며 그리고-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의 사회 질서안의 서로 다른 기능에 서열적으로 배분되었을- 모든 부담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바로 이 부르주아 세계 안에서 만 말이다. 이 사회에서는 모든 사적 개인이 스스로의 사제가 되게끔 그들에게 내맡겨 버린다.… 이러한 사적 사제주의(司祭主義;Priestertum)속에 낭만주의와 낭만주의적 현상의 마지막 뿌리가 있다”.(같은 책, 26면)


6)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68운동의 정치적 유산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1970년대의 ‘새로운 자기도취증 new narcissism’- 즉 운동에 의해 ‘우리’라고 정의됐던 것이 ‘나’로 환원되는 역학- 은 신좌파의 탈정치화가 가져온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ꡔ신좌파의 상상력ꡕ, (이후, 1999), 417면.


7) 미셀 푸코 (1994), ꡔ미셀 푸코의 권력이론ꡕ, (서울:새물결), 93면.


8) U. Beck, Die Erfindung des Politischen, Frankfurt, 149면.


9) Lucien Seve, La personnalite en gestation, in: M. Bertrand, et al., Je. Sur l'indivualite approches pratique/marxistes, (Messidor: Paris, 1987), 242면.


10) U. Beck, Risikogesellschaft. Auf dem Weg in eine andere Moderne, Frankfurt. 1986, 210면.


11) Altvater/Mahnkopf (1997), Grenzen der Globalisierung, Munster, 52면.


12) 이 글에서 사용하는 ‘스탈린주의’ 개념은 다음에서 나온 것이다. 먼저 프랑스의 맑시스트   죠르쥬 라비카의 다음 책, Georges Labica (1984), Der Marxismus-Leninismus. Elemente einer Kritik, Berlin (라비카의 이 책에 대한 간략한 개요는 윤형식(1995), 「ML주의, ‘정통주의’의 시대」, 김수행 외(1995), ꡔ1980년대 이후 한국의 맑스주의 연구ꡕ, 과학과 사상, 11면 이하를 참조) 그리고 독일어권에서 스탈린주의 비판에 관한 한 고전으로 꼽히는 베르너 호프만(Werner Hofmann (1984), Was ist Stalinismus? Heilbronn.)이 그것이다. 특히 호프만은 스탈린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강제에 대한 욕구는 스탈린주의의 하나의 전제이지, 그 자체가 아니다.… 스탈린주의란 ‘교육독재’라는 과제에 기초했던 것도, 객관적으로 ‘필연적이지도’ 않았던, 권력의 과잉(Exzeß)이라고 볼 수 있다. 스탈린주의는 모든 문제를 권력의 관점에서 결정하는 것, 곧 의지한 것의 관철가능성으로 요약된다. 스탈린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사회라는 일반적 기초하에서의 특정한 권력의 기회주의이다. 그것의 사회적 기초는 여전히 허약한 사회적 기초로부터 지도자의 일시적인 상대적 자립성에 있다.”(같은 책, 48-49면)


13) LW(Lenin Werke), Vol. 4, 205면 이하.


14) 「혁명의 기수를 제헌의회 소집으로」, 강신철 외, ꡔ80년대 학생운동사ꡕ, 형성사, 1988. 소수 자료.


15) 위의 책, 272면 이하 참조.


16) Labica (1986), 위의 책, 17면.


17) 같은 책, 94면.


18) 같은 책, 96면.


19) 같은 책, 96면.


20) 대표적으로 당시 교과서로 광범위하게 소비되었던 ꡔ세계철학사 I - IIIꡕ(녹두. 1985), F.V. 콘스탄티노프, ꡔML주의 철학의 기초. 사적 유물론ꡕ, (새길, 1987), ꡔ철학의 기초이론ꡕ (두레, 1987).


21)위의 책, 99면.


22) 사회과학출판사 편, ꡔ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ꡕ, 백산서당, 1989, 105면.


23) “주체사상은 유물론적, 변증법적 입장을 전제로 하면서 세계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 문제를…”. 같은 책, 106면.


24) Hofmann (1984), 72면.


25) 같은 책, 74면.


26) 여기서 말하는 ‘차이의 변증법’은 그람시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그람시는 20세기초 이태리의 신헤겔주의자 크로체와의 지적 대결을 통해, 대립의 변증법을 차이의 변증법으로 대체하고자 시도한 크로체의 맑스주의 비판의 합리적 핵심으로서 차이의 변증법을 맑스주의 이론속으로 재통합시키고자 시도한다. 그것은 주로 그람시 시민사회론의 방법론적 기초로 작용하였다. 자세한 것은 이해영(1992), 「그람시의 시민사회개념」, ꡔ이론ꡕ 3호, 1992년 겨울호, pp. 191-223.


27) “양자 [주사와 비주사그룹-인용자]의 차이는 사실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이 땅 위의 모든 현실에 대한 파악에서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고,… 그러나 여기에는 상대의 주관적 의지를 충분히 인정하고 그것이 객관현실의 어떠한 측면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함으로써 오류로 전환되는가를 제시하는 등의 개조하고 감싸안는 동지애가 넘친 토론이 아니라, ‘주관적 의지와 무관하게’란 물신화된 명제하에 비록 객관적이긴 하지만 일면의 오류를 과장하여 기회주의자로 단죄하는 비동지적… 토론풍토가 있는 한 근접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 김영수 (1988) 편, ꡔ한국사회 변혁운동론의 모색ꡕ 백산서당, 편자 서문.


28) NLPDR노선의 ‘대중주의’를 비판하는 노동운동가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도록 가르치기보다는 현실의 부르조아 정치가들을 비교하여 선택하고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전념한다. 그들은 현실의 부르조아 정치만을 정치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주로 그들에게 의존하고 그들에게 호소한다. 현실적으로 어떤 정치가 (혹은 정치세력, 정치집단)가 유용하며 현실적인 효용이 있는가가 일차적으로 고려된다. 그들은 민중운동권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보다 보수야당과의 협력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김진국(1989), 위의 글, 90면.


29) 편집부 편(1989), ꡔ강철서신ꡕ, 도서출판 눈.


30) Hofmann(1984), 위의 책, 64면.


31) 여기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졸고, 「신자유주의, 종속적 경쟁국가 그리고 민주주의문제」, ꡔ문화과학ꡕ 99년 여름호를 참조.


2000-02-07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