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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민중이 곧 ‘시민’이다

현장에서 미래를  제52호
이무열


노동자 민중이 곧 ‘시민’이다
이 무 열
책만드는 노동자










새해 벽두부터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낡고 썩은 정치판을 시민의 힘으로 갈아엎자는 낙천낙선운동의 바람이다. 뜻밖의 일격에 철갑의 정치권이 동요하면서 시민운동에 시민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시민운동의 주가는 날이 갈수록 치솟고, 예의 그 덧칠로 시민운동에 색깔을 입히려던 보수 언론과 정치권의 공격도 많이 무뎌졌다. 시민운동은 오른쪽으로부터의 예봉을 피하고자 조심스런 줄타기를 계속하면서도, 운동을 쉽게 거두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파이팅에 일단 박수를 보내자.
살맛 없어하던 시민들에게 싱그런 새해 선물을 안겨준 시민운동, 총선연대, 파이팅!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은 제도 안의 운동이 ‘주권자’들에게 등 돌린 권력에 보내는 ‘가벼운’ 경고이다. 무엇이 잘못됐는지조차 무감각해진 권력은 그 가벼운 경고에도 휘청거리며 더러운 몰골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추한 꼴을 신물나게 보아 온 탓에 이제 하나같이 ‘정치 10단’이 돼 버린 시민들 사이에 ‘음모론’ 같은 억지 주장이 먹혀들 틈은 없어 보인다. 2000년대의 서두를 장식한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은 그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 속에 권력의 틈새를 벌리며 나름대로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 한계는 자명한데, 하나는 제아무리 대상자를 엄선하여 낙천낙선운동을 벌인다 해도 보스 중심으로 굴러가는 지역정당이라는 기본 틀을 깨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고, 더 중요한 다른 하나는 부패하고 무능한 일부 정상배를 솎아 내는 데 성공한다 한들 같은 풀 속에서 놀고 있는 그 몇배, 몇십배에 이르는 정치꾼들마저 ‘퇴출’시킬 수는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더 악랄한 ‘새끼 호랑이’들을 키우는 데 일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은 ‘주권자’인 시민이 팔을 걷어붙이고 정치판의 정화 작업에 나섰고 어느 정도 그 성과가 기대된다는 상징성에서는 유례없는 쾌거로 기록되겠지만, 실질적인 ‘정치개혁’을 이끌어 내기는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에 식상한 시민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원이 뒤따르자, 지배집단은 시민단체의 활동 폭을 좁히고 그 주장의 수위를 낮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제도 안에서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여 움직이는 조직이라는 시민단체의 ‘치명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낙선운동을 일정한 테두리 안에 묶어 두려는 것이다. 시민단체가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그야말로 획기적인 ‘정치혁명’을 추구하는 중대 결단을 하지 않는 한, 결국 적정한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고 낙선운동의 성과 역시 일정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보수 언론과 정치권, 자본가집단이 공동으로 취하는 태도가 눈에 띈다. ‘시민’은 그 자체로서 ‘선’으로 인정할 수도 있지만, 노동자는 명백한 이익집단이라는 시각이다. 실체가 모호한 ‘시민’은 주권자지만, 실체가 있는 노동자나 민중은 눈앞의 자기 이익에만 골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민’이라는 존재의 속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시민’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자산계급(부르주아지)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이 주권자로 ‘숭배’되는 민주공화정하의 납세자이며 유권자인 공민권자라는 뜻이다. 후자의 의미에 덧붙여, 도시화가 진전되고 도시 주민이라는 뜻의 시민이라는 말이 일반화되면서,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시민’으로 여기는 데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문제는 ‘시민’이라는 말의 이중성에서 오는 함정이다. ‘시민’은 주권자인데, 그 구성원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 공통분모일 뿐이고, 그 최대치는 절차상의 합리성, 본질상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껍데기 민주주의일 뿐이다. ‘시민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예리하게 부딪히는 계급간의 갈등이나 대립은 당연히 은폐되고, 그 몰계급성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관철하는 데 유효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런 점에서 ‘시민’은 ‘국민’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어지러운 이야기는 관두고, 보통사람의 언어로 돌아가 이야기를 풀어 보자.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시민’으로 여기고, 또 ‘시민’의 이름으로 자기 주장을 펴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으며, 그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 못마땅하더라도 ‘시민’이라는 이름에 애정을 가지고 접근해 보자.

한데 그 ‘시민’의 구성원은 누구인가? 딱딱한 통계수치를 잠깐만 들여다보자. 우리 나라의 2천만 남짓한 경제활동인구 중 노동자계급으로 분류되는 층은 약 1,300만이다. 그리고 농민과 사실상 자기고용 노동자인 하층 자영업자가 400~500만이다. 줄잡아 80%가 노동자 민중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 시민의 80% 이상이 노동자 민중 또는 그 가족인 셈이고, 나머지 20%도 채 못 되는 사람들만이 소수의 자본가와 소자산가, 신중간층이다.
문제는 그 20%도 채 못 되는 사람들이 사회의 온갖 전파수단을 독차지하고서 노동자 민중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인데도 노동자가 아닌 듯 착각하게 하고, 예상되는 결과가 뻔한데도 잘만 하면 운이 펼 것처럼 기대하게 만들고, 평생 걸려 서민 아파트 하나 장만했는데도 지킬 게 많은 듯한 환상을 갖게 만들고, 따지고 보면 백지 한장 차이뿐인데도 너는 너고 나는 나고 너와 나는 다른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하며, 설령 꿈틀거려 봤자 계란으로 바위치기고 다친 놈, 잘린 놈, 죽은 놈만 손해라는 식의 생각을 강요한다. 80%가 20%의 선전에 놀아나,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경제위기와 더불어 한국 사회도 20:80 사회로의 재편 추세가 뚜렷해지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도 ‘시민’이라는 말은 좀더 뜯어볼 필요가 있다. 상층 20% ‘시민’과 하층 80% ‘시민’의 격차가 나날이 벌어져 동질성이 약해지고 있는데도, ‘시민’이라는 이름 아래 그 차이점이 뭉뚱그려지고 있다.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20%만 살찌우고 80%는 궁지로 내모는 경제 정책이 강행된다. 80%의 고통과 궁핍과 좌절은 되도록 은폐된다.
여기에서 ‘시민사회’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지배계급에게 시민사회는 지배 메커니즘을 은폐하면서 지배를 영속화하는 장이다. 노동자 민중에게 시민사회는 지배구조에 저항하며 사회를 재편해가는 장이다. 시민사회를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정치 지형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시민사회를 저항과 재편의 장으로, 노동자 민중의 무대로 만드는 것은 순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시민’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노동자 민중이 20%도 채 안 되는 사람들에게 시민사회의 주도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200여 년 전 프랑스 혁명 때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제3신분이란 모든 것이다’라고 답하며 구제도를 뒤엎는 혁명에 정당성과 무기를 제공해 주었다. 당시 프랑스는 한 줌도 안 되는 성직자와 귀족(제1, 제2신분)이 지배하고 있었다. 제3신분의 선도자를 자처한 신흥 시민(부르주아지) 계급은 민중들의 지지하에 구제도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권력을 장악한 시민(부르주아지) 계급은 이내 민중들을 떨쳐 내고 자신들만의 권력을 세운 뒤, ‘시민’의 권력이 수립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것은 껍데기만의 ‘시민’ 권력이었고, 노동자 민중들은 그 뒤에 실체가 더 분명해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여전히 압박과 질곡 속을 헤매야만 했다. 배반당한 노동자 민중들은 그뒤 200년 동안 왜곡된 말을 바로잡고 진정한 ‘시민’ 권력,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세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써 왔다. 1848년 혁명, 파리 코뮌,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쿠바 혁명, 68혁명 등등이 모두 그런 발자취이다. 그러나 시궁창 속에서라도 이윤의 출처를 찾아내어 그 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자본주의의 힘은 아직도 다하지 않아, 노동자 민중들을 여전히 질곡 속에 몰아넣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다느니,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느니, 지식과 정보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느니 하는 온갖 헛소리들이 난무하지만, ‘새로운’ 시대에도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심한 압박 속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 민중 앞에 주어진 길은 분명하다. 그 길은 이 문답 속에 있다.
‘노동자 민중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상층 20%의 ‘시민’에게 하층 80%의 ‘시민’(노동자 민중)은 필요한 존재지만, 하층 80%의 ‘시민’에게 상층 20%의 ‘시민’은 없어도 되는 존재다. 그러니, 노동자 민중은 모든 것이다. 그런 확신을 갖고 나아갈 때라야만 ‘시민사회’를 가리고 있는 안개의 숲이 말끔하게 걷히면서 시민사회가 노동자 민중의 무대요 진지로 떠오르게 된다.

그런 인식을 갖고서 ‘시민’의 이름이 들먹여지는 모든 자리에 ‘노동자 민중’을 대입해 보자. 그러면 모든 것이 훨씬 더 분명해지고 풍부해진다. 낙선운동? 노동자 민중을 외면하거나 그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는 인간들, 국가보안법이나 노동악법, 보스의 총애나 지역정서 따위에 기대어 보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인간들, ‘시민’의 대표, ‘국민’의 대표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명예와 실리의 주판알을 퉁기고 있는 인간들은 모조리 몰아내야 한다. 진보정당운동? 모호한 ‘시민’이나 ‘국민’에게 표를 구하지 않고 노동자 민중과 함께 싸우며 노동자 민중 세상을 열어가는 운동으로 자리잡아가야 한다. 실업과 고용 문제?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를 갖고 태어났고,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줄 의무가 있다. 무한경쟁의 적자생존 원리?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연대와 협력을 통해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존재다.
뭐, 세상이 변했다고? 과문한 탓인지, 나는 이제까지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속 시원히 이야기해 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유사 이래의 계급사회가 무너지고 있나, 6․25 이래 고착된 수구반동세력의 지배구조가 무너지고 있나? 내 눈에는 썩어문드러져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그 파편들, 금융폭탄을 안고서 종말로 치달아 가는 위험사회의 단면들이 선명히 비쳐 들어올 뿐이다. 벤처 기업은 그 위험을 자양분삼아 한몫 잡아보려거나 조금 너그럽게 봐주면 그 속에서 먹고살려고 발버둥치는 인간 군상들일 뿐이고, 지식정보사회니 문화시대니 하는 것들은 이제 생산력이 충분히 발달하여 모든 사람들이 단 몇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발달한 생산력이 여전히 자본의 이윤 증식을 위해 쓰이는 나머지 노동자 민중의 삶과 우리의 지구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차별적인 다원주의는 그 진상을 은폐하여 자본의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술책에 넘어간 어릿광대의 놀음일 뿐이고… 그만하자. 혹시 어지러워할지 모르는 일부 독자를 위해서. 분명한 한 가지는 이렇게 거꾸로 뒤집힌 세상, 소수만이 태평연월을 구가하고 다수는 삶에 허덕이는 이 세상은 ‘당신들’만의 천국이라는 것이다.

사회의 전면적인 재편은 이제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지상명령이다. 노동자 민중의 이름으로, 노동자 민중이 주축이 된 ‘시민’의 이름으로, 세상은 완전히 탈바꿈되어야 한다. 노동자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으로!
그 첫걸음 가운데 하나가 자기 정체성 찾기 운동이다. 모든 노동자, 모든 민중이 허위의식을 벗고 스스로 노동자, 민중임을 자각하는 운동이다. 한쪽 구석에 처박혀 숨죽이고 있는 바로 당신, 바로 너, 바로 나, 바로 우리가 노동자이고 민중이며, ‘시민’이고, 세상의 주인임을 자각하는 운동이다.
구호는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그만하면 됐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해쳐 먹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나? 이제 우리한테 넘기고 그만 사라져 줘!’ 한/노/정/연

2000-02-07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