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악함과 강고함, 그리고 환상의 변주곡 |
현장에서 미래를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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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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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채 만 수
부소장
추악함과 강고함, 그리고 환상의 변주곡
부르주아 선거제도의 본질과 기능
‘낙천․낙선 시민운동’의 영광과 좌절
지난 1월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총선시민연대가
연달아 이른바 ‘공천 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하자, 정치권은
‘음모’니 ‘야당 탄압’이니 하고 발칵 뒤집히고,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잡지 등 온갖 언론은 ‘국민의 환호’를 들어
대서특필․환영하고 나섰다. “한국의 정치사가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는 호들갑과 더불어 말이다.
이른바 ‘낙천․낙선 대상자’로 지목되면 아무래도 득표에
악영향이 있을지언정 도움이 될 리 없겠으니, 시민운동 단체들에
의해 그렇게 지목된 정치인들이 신경질적이고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문제는 그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국민의 환호’.
그것은 무엇보다도 경실련이나 총선시민연대에서 제시한 몇 가지
기준, 즉 ‘부정부패’라든가, ‘지역감정’이라든가,
‘정경유착’ 등의 전력과 혐의가 있는 정치인들을 총선에서
‘낙천․낙선’시키면, 이른바 ‘정치개혁’이 이루어지고
‘진정으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가 이루어지리라는 기대의
반영이다. 경실련이나 총선시민연대, 그리고 언론이 부추기는
것은 바로 그러한 기대이다. 자신들의 ‘운동’이 일정한 정치적
위력을 발휘하여 자신들 시민운동의 정치적․사회적 위상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기를 바라는 내밀한 속마음은 화려한 구호
속에 감춘 채 말이다.1) 그들 시민운동 단체들은
‘낙천․낙선운동’이 ‘그토록 높은 호응을 받을지는
몰랐다’는 겸사의 말을 잊지 않으면서도 사실은 ‘뭔가 될 듯
싶은 잔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호간의 ‘헤게모니
다툼’도 빼놓지 않았다. (「경실련의 딜레마」,
ꡔ한겨레21ꡕ 제293호, 2000. 1. 27. 참조.)
아무튼 ‘낙천․낙선운동’의 기세는 드높았다.
그런데 지난 2월 중순 무렵부터 여야 각 정당의 후보 공천이
본격화되고 총선에 출마하려는 정치인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지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낙천․낙선운동’의 기세는 풀죽은
옷처럼 형편없이 꺾이고, 총선을 보름 남짓 남겨 놓은 지금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어서 ‘한국의 정치사가 새롭게
쓰여진다’는 것이 고작 이것이었던가, 허망감 마저 들 정도다.
부르주아 언론 역시 ‘선거판 추악’이라는 기사 제목을 뽑는 데
주저함이 없고, “조직책 된지 두 달(만에) 벌써 3억 썼어요”
ꡔ조선일보ꡕ 2000. 3. 9.
라는 정치 초년병의 자조 섞인 고백이 지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정치개혁’을 부르짖는 시민운동을 한껏 비웃으면서 선거판,
정치판은 그렇게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다.
‘정치개혁’?동기는 ‘체제 불안’
지금 이 정치판, 선거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그 속에서
어떠한 어릿광대들이 어떤 춤을 추고 있는가?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자유민주주의적 지식인의 의식에는 어떤 위선과
사대주의, 그리고 불안이 숨쉬는가를 자유민주주의의 전투적
이데올로그 집단인 ꡔ조선일보ꡕ의 대표적 논객의
하나인 류근일의 한 칼럼 류근일, 「‘고래’ 잔치에 등
터지는 ‘새우’」, ꡔ조선일보ꡕ, 2000. 3.
17.
을 통해서 보자. (과도하리 만큼 길게 인용한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선거판에 온통 공룡같은 거대조직, 천문학적인 돈, 그리고
매스컴들의 메이저 정당 위주의 스포트라이트로 야단법석이다.
소속정당이 웬만큼 크지 않고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선거자금도 억대는 숫제 새발의 피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TV나
신문들도 허구헌 날을 주로 그런 공룡들의 게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방송 때마다 TV에 등장하는 얼굴들은 어김없이
바로 고명하신 그분들뿐이다. 하기야 미국 같은 곳에서도 주로
메이저 위주로 보도하지, 다른 후보들은 거의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는 한다. 그리고 ‘대정당 후보=나쁜 사람,
소정당이나 무소속 후보=좋은 사람’이라는 등식이 반드시 항상
옳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선거라는 것이 정말로 공정한 게임이어야 한다면 ‘돈
없고 세(勢) 약한’ 후보들에 대해서도 합당한 심사의 기회는
갖게 해 주어야 한다. 지금으로선 선거법도, 지역주의 선거판도,
그리고 먹자판 유권자들도 모두 그런 후보들에 대해선 심한
불공정 게임으로 시종하고 있다. …
… 또 어떤 진보정당은 ‘말못할 고민’을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우리 민주노동당은 당원들의 당비로만 운영되기 때문에
자금이 빠듯한 것도 고민이고, 후보선출 등 중요한 행사가
대부분 밤에 열리기 때문에 그 참신성에 비추어 언론보도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당원의 대부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오히려 자부심을 갖는다.”
선거판이 이러니 유권자들은 자기 지역 출마자들 하나 하나를
모두 빠짐없이 파악하지도 못한 채 투표소엘 들어간다.
요란스러운 장외집회와 합동유세, 어줍잖은 홍보물과 선전포스터
몇 장을 통해 후보 개개인이 과연 어떤 사람이며 얼마나
적격자인지 부적격자인지, 그리고 A, B, C, D 후보 중에서 누가
그 중 나은지를 대체 어떻게 알아보고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런 선거운동은 이제 마땅히 바뀌어야 한다. 더군다나 지금의
선거운동은 순전히 육두문자 욕설싸움 이상의 것이 못된다.
“괴수 중의 괴수” “가출소년” “뻔뻔한…” “영도다리 밑에
빠져…” “후안무치”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운운하는 것들이
말하자면 우리가 가진 후보심사 자료의 전부인 것이다. 이런
욕쟁이들의 입심자랑 일변도에선 유권자들이 제대로 된 심사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것 대신 앞으로는 유권자들에게 일종의 쟁점토론식
선거판을 만들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케이블 TV나 공회당에
후보들을 세워놓고 패널리스트들이 그 지역의 주요 쟁점을 묻고
나라의 중대사를 논하게 하는 방식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
그렇게 해야 … 고래들만의 떼돈바람이 빚는 왜곡된 정치시장
구조에서 선거라는 행사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ꡔ조선일보ꡕ와의 전쟁을 필생의 업으로 삼는
일부의 자유주의 논객들은 “왜 하필 ‘파쇼언론
조선일보’냐?”며 눈살을 찌푸리거나 혹은 적대감을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보라. 위 칼럼이 제시하는 상황 진단과
‘대안’, 그리고 지향하는 바가 ꡔ조선일보ꡕ를
문제 삼는 자신들, 그리고 경실련이나 총선시민연대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파쇼 언론’ ꡔ조선일보ꡕ를
포함하여 그들 모두 “미국에서는 …”, “미국에서도 …” 하는
식의 ‘선진 민주주의’를 들먹이기를 즐겨하고, 대중에게 그런
식의 사대적(事大的) 사고를 설교하기를 좋아하고,
‘자유민주주의적 지배체제’의 안정적인 재생산에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고, 그리하여 개판으로 돌아가는 선거판에 알지
못할 막연한 ‘체제 불안’을 느끼는 나머지 무언가
‘개선’․‘개혁’되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ꡔ조선일보ꡕ는 본질적으로 파쇼인데, 상황 상황의
‘말 바꾸기’로 우연히 비슷한 발언을 했을 뿐이라고? 아니면,
내가 우둔해서, 혹은 편견 때문에 본질적 차이를 못 본다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음과 같은 지적을 보라. 즉, “파시즘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본주의에 대해 침묵할 수
없다.” 주정립, 「파시즘 비난은 ‘겨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격’」, ꡔ말ꡕ 2000. 3, p. 153
참조.
내가 ꡔ조선일보ꡕ에서뿐만 아니라 이른바
자유주의 논객들, 그리고 시민운동 단체들에서 ‘듣는’
것이래야 ‘자본주의에 대한 침묵’과
노동자․민중운동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켜 이른바
‘시민운동’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등의 노동자․민중에
대한 경원과 은근한 적대뿐이니 말이다.
실제로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논객들은 ‘보수와 수구는
다르다’느니 뭐니 하는 헛소리의 연장선상에서
ꡔ조선일보ꡕ가 전투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자신들의 ‘자유민주주의’ 깃발을
흔들어대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들의 관념에서의
‘자유민주주의’일 뿐, 자신들의 현실 자유민주주의도
ꡔ조선일보ꡕ 등이 옹호하는 그것 아닌가?
(독점)자본의 지배 말이다.
부르주아 지배의 합리화를 위한, 대중에 대한 정신적 테러
경실련이나 총선시민연대 등의 이른바
‘낙천․낙선운동’은, 얼마 전 미국에서 민주․공화
양당의 대통령 후보 예선전이 한창일 때 ꡔ뉴욕
타임즈ꡕ가 ‘우리는 부시와 고어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것이 그런 것처럼, 정치학의 초보 지식에만 비추어 봐도,
정치적으로는 사실 저급한 코미디 극일 뿐이다. ꡔ뉴욕
타임즈ꡕ가 ‘우리는 누구누구를 지지한다’는 대사를
읊조렸다면, ‘낙천․낙선운동’을 하는 신사
숙녀분들께서는 ‘우리는 누구누구를 반대한다’는 대사를
읊조려서, 그들이 반대하지 않는 ‘누구누구를 지지한다’는
말을 에둘러서 표현했을 뿐이다. 자신들의 지지 대상자들이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그리고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등등으로 정당을 달리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이는 분명 ‘정견을 달리하는’ ‘정당정치’라는 근대 정치에
비추어 분명 코미디가 아닌가?
그런데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그러한 코미디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 근대 정치를 ‘정견을 달리하는 정당정치’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본래 정당정치가 표상하는 대로라면 ‘계급을
달리하는 정당정치’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 대부분에서,
때로는 노골적이고 때로는 은근한 계급적 억압과 집요한
이데올로기 조작으로, 그러한 정당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쳇말로 하자면, 다만 그러한 무늬만 존재할 뿐이다. 가장
천박한 의미의 ‘정견 차이만이 있는 정당정치’, 즉
‘대부르주아지의 정당’ 정치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류근일 식으로 얘기하자면, A, B, C, D 정당간에 사실상 아무런
계급적 차이도 없으니, 정당이 아니라 개인만이 문제로 되는,
그런 코미디가 되는 것이다.
ꡔ뉴욕 타임즈ꡕ에게 있어서 민주당이 집권하든
공화당이 집권하든 아무런 계급적 차이가 없는 것처럼, 시민운동
단체들과 ‘진보적 언론’에게 있어도 부르주아 지배의
합리화만이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정치인
개인개인의 품성만이 문제이지, 그들 정치인이 속한 정당은
민주당이든 자민련이든 한나라당이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시민운동 단체, 따라서 ‘낙천․낙선운동’을 하는
사람들 개개인이야 각자 정당에 대한 호오(好惡)의 취향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낙천․낙선운동’으로
모아져서 표출되는 한에서의 문제의식은 분명 그렇다.
그들의 안목으로 보자면, 오늘날 한국의 부르주아 정치가,
따라서 부르주아 지배가 대중의 경멸과 혐오를 받고 있는
이유는, 경제적인 부면에서의 재벌의 ‘천민성’과 더불어,
정치적인 부면에서는 오로지 부패․타락한 정치인의 진출을
저지하지 못한 때문으로만 보일 터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패․타락한 정치인의 ‘의회 진출’을 저지하여 부르주아
지배를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의 ‘낙천․낙선운동’은 실제로 부르주아 지배의
합리화는 결코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그래!
그렇게 해서 고쳐 가면 되겠지’ 하는, 근거없는 환상을
대중에게 심어줌으로써 대중의 정치적 냉소주의로부터는
부르주아 정치를 일단은 상당 정도 건져냈다고 할 수 있다.
개판으로 돌아가는 총선을 보고 경험하면서 다시 얼마나 더 진한
냉소와 경멸이 그들 대중에게 스며들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부르주아 지배를 연장하고 재생산하는 데에서의 시민운동
단체들의 그러한 역할은 사실은 대중에 대한 정신적 테러이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어떤 계급착취도 경제법칙의 필연적인
작용과 피억압자에 대한 공공연한 테러만으로는 그 지배를
유지해 갈 수 없다. 지배계급은 어떤 경우에나 자기의 사회적
상태나 가능성에 따라서, 인민 대중에 대한 이런 저런
이데올로기적 공작이라는 수단에 의존해 왔다.” 베 벳쏘노프,
「資本主義と勞動者意識の操縱」, 소련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와 국제관계연구소,
ꡔ世界經濟と國際關係ꡕ(일본어 번역판) 제7집,
도쿄, 1969, pp. 150~151.
그리고 그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공작 수법은
자신들, 그러니까 지배계급 자신의 이익을 사회구성원 공통의
이익인 것처럼 포장하여 대중의 정서에 부단하게 호소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지배의 합리화를 통한 그것의 안정적 재생산은 분명
지배계급으로서의 (독점)부르주아지의 이익이고, 따라서
(독점)부르주아 언론과 천둥벌거숭이 소부르주아 언론의 공통의
이해관계 사항이다. 그 때문에 독점 부르주아 언론과
시민운동은, 종파적 이해에 따른 극히 부차적인 마찰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언제나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사회의
공적인 이해로 포장해서 선전하는 데에 합작을 해왔다.
아직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른바 ‘시민운동’이 부르주아
언론의 대대적인 각광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주요한 이유의 하나
이재영 (민주노동당 창준위 정책국장), 「한국 시민운동
성장을 바라보며」, 역사학연구소 ꡔ함께 보는
우리역사ꡕ 제51호, 1999년 겨울, p. 2.
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적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상업주의 언론과의 합작, ‘지나친 언론 의존’이라는 비판은
식상할 정도로 들어 왔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 시민운동에서
언론이 차지하는 역할은 의존이나 활용의 대상을 넘어 공동의
기획자임을 직시해야 한다. 보도의 필요가 생길 때 언론은
시민운동에 정보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시민운동이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신문 사회 2면의 피케팅 사진은 하나 같이
사진기자들이 연출하는 것이다. 언론은 시민운동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논조를 전파하거나 지면을 메우고, 시민운동은 취약한
활동력을 언론으로 보완하는 공생관계가 고착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합작하여 ‘이데올로기적 공작’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대중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가하는 정신적 테러다. 그리고, 독점자본의
정당 이외에 노동자 계급의 정당도, 기타 소부르주아지의 정당도
의미있게 존재하지 못하는 것도, 그들이 그토록 지탄해 마지않는
타락․부패의 정치도, 개판인 선거판도, 나아가
‘지역감정’에 대한 대중의 감응도 사실은, 군대 경찰 검찰
법원 감옥 등등에 의한 물리적 억압을 보완하면서 그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그러한 정신적인 정치적 억압과 무력화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베 벳쏘노프, 같은 글, p. 150 참조.
그러한 정신적 테러를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인 사고력을 사실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자신의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그런 교묘한
경제적 강제의 체제인데 말이다.
다음과 같은 지적 베 벳쏘노프, 같은 글, p. 153.
을 들어보자.
다른 어떤 사회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만큼 사회관계의 본질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회는 없다.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의
생산의 사회화는, 소유와 직접적 생산관리의 ‘분리’, 자본의
비개성화, 자본의 외면적 탈인격화를 초래한다. 독점자본의
권력은 한층 은폐되고. 착취는 한층 가장된다. 그 결과, 이
현실적, 객관적인 과정은 주관적 환상의 원천으로 된다.
부르주아 사회의 진짜 주인으로서 비개성적이고 이름도 없는
사회층을 상정한다. 이러한 사정이 흡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천명이고 숙명인 것 같은 외관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다시
한층 무력감을 낳아 ‘조종되는 인간’을 부각시킨다.
지배의 재생산 장치
‘근본주의’는 후기 부르주아 윤리에서는 죄악으로 간주된다.
당연히, 적당히 눈을 감고 적당히 배를 맞추면서 사는 것이
현존의 사회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것인데, 근본주의는 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증오는 종교적으로는, 예컨대 명색이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모세의 ‘십계명’을 받든다는, 교황, 추기경,
신부, 목사 등 기독교 ‘지도자들’이 ‘종교간의 화해’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교리대로라면 필시 마귀도 대마귀에 분명할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교통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일부 종교
집단의 테러나 집단자살 등의 사태가 일어나면 종교 그 자체의
미개성을 문제삼는 대신에 ‘근본주의’를 성토하고, 다수자의
언어인 ‘사교성(邪敎性)’을 개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부르주아지의 근본주의에 대한 증오는 단지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그 본령은 오히려 정치적 문제에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대 부르주아 정치와 선거를 논하고
비판할 때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문제삼기보다는 대개는 극히
지엽말단의 것들만을 문제삼는다. 그리고 부르주아 정치와
선거제도 자체에 대한 근본적 문제의식을 오히려 은폐한다.
시민운동 단체들이 벌이고 있는 이른바
‘낙천․낙선운동’이나 이른바 ‘정치개혁’ 운동, 그리고
부르주아 언론의 그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대의정치’ 자체나, 그것을 재생산하는
부르주아적 선거제도의 본질적 기능과 그 한계를 문제삼는
대신에 부정부패니,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니, 지역감정이니,
‘정경유착’ 이 ‘정경유착’이라는 말은 부르주아 정치
술어에서는 물론, ‘독점자본과 국가의 융합’이라는 체제
본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치인과 독점재벌과의 정치자금을
매개로 한 스캔들적인 유착’이라는 가장 협소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니 하는, 사실 문제의 본질에 비추어 보면 극히 부차적인
성격의 것들만을 문제삼고, 그리하여 마치 그러한 측면만을
교정할 수 있다면 만사오케이라는 식의 환상을 대중에게
심는다.
그러나 부르주아 대의정치나 선거제도의 본질은 결코 그렇게
그들이 믿고 선전하는 것처럼 단순하지도 몰계급적이지도 않다.
봉건적 귀족정치와 절대주의에 대항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일궈낼 때의 그것은 무엇보다도 진보적이었고,
보통선거권이 확립될 때까지의 과정도 역시 진보적이었지만, 그
‘진보성’은 언제나 절대적인 한계를 갖는 그것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그것은 이미 철저히 독점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재생산하고 보장하는 장치로 전락해 있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오늘날 대부분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범죄적으로
침묵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
한국의 시민운동 단체들이나 자칭 자유주의자들, ‘진보적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독점부르주아지의 지배체제 안정적
재생산이라는 ‘현상유지’에서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부르주아적인 한
논객에게서 부르주아적 대의정치와 그것을 재생산하는
기구로서의 선거제도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근본주의적인 진술을
발견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바로, 과학기술혁명의 결과로
부르주아적 지배와 문화가 ‘변화했다’는 환상을 심음으로써
독점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부정직하게 연장하려고 하는, 대표적인
부르주아 논객 중 한 사람인 앨빈 토플러에게서다. 그는
과학기술혁명에 따른 ‘제3의 물결’로 이제는 ‘부르주아적
지배는 과거지사’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당당하게 부르주아적
지배 기구의 본질과 성격을 진술하고 있는데, 바로 그를 통해서
그는 본의 아니게 그것을 폭로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보수적․파쇼적 지배질서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자들에게는 물론이요
‘낙천․낙선운동’을 하는 시민운동 단체의 관계자들이나
‘진보적 언론’에 종사하는 자들에게도 심히 언짢은
내용이겠지만, 여기서 앨빈 토플러의 아이러니한 폭로를
들어보자.
대의제(代議制) 정부는 세습적 왕조가 없이도 질서있는 권력
승계를 가능하게 했고, 1인1표제 등 다수자 지배의 원리에
의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
엘리트들로부터 얼마간이라도 은전(恩典)을 짜낼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상 인간화의 커다란 약진’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Alvin Toffler, The
Third Wave (1980), London: Pan Books, 1981, pp. 88~89.
역시 무척 길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인용해 보자.
하지만 처음부터 그것(대의제 정부)은 약속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봐도 그것이, 어떠한
의미에서도, 인민에 의해서 통제된 적은 없다. 어디에서도
그것은 … 산업국가의 기본적 권력구조를 현실적으로 바꾸지
않았다. 실제로, 공식적인 대의기구는, 관리 엘리트들에 의한
통제를 약화시키기는커녕,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의 하나로 되었다.
그리하여 선거는, 누가 당선되든 전혀 상관없이, 엘리트들을
위한 강력한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모든 사람이 선거권을
가질수록 선거는 평등이라는 환상을 키웠다. 투표 행위는,
사람들에게 선택이 기계처럼 정확하게 조직적으로, 그리하여,
은연중, 합리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같게 하는
확신의식(確信儀式)이었다. 상징적으로 선거는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확신,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자신들이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 자주 이러한 의식상(儀式上)의 확신은 많은
선거에서의 실제 결과보다도 중요했다.
… 선거는 아래로부터의 항의에 김을 뺐다.
더 나아가서, 민주적 개혁가들이나 급진주의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합 엘리트들은 사실상 대의제 정부 체제의 항구적
통제권을 가졌다.
‘엘리트’니, ‘관리 엘리트’니, ‘통합 엘리트’니 하는
부르주아적 용어를 ‘독점자본’이나 ‘독점자본의 정치부대’
정도로 바꾸어 보라. 그러면 앨빈 토플러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부르주아 선거는 결코 독점자본의 지배구조를
조금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지배를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고 그 환상을 확산시킨다는 것,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불만에 김을 뺀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토플러는 이렇게도 얘기한다. 같은 책, p. 91.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도록 배워온 대의제 정부는 간단히
말해서 불평등을 보장하는 산업적 기술이다. 대의제 정부는
사이비 대의제였다.
…
이 체제에서는 대의제 정부는 공장의 정치적 상응물이었다. …
대부분의 공장처럼 그것은 위로부터 관리되었다.
부르주아 대의정치의 이러한 속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르주아
속물들은, ‘그래도 국회의원들은 재선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에
일정하게는 선거구민들의 의사를 대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이른바 ‘제2의 물결’, 즉
부르주아적 지배는 ‘과거지사’라는 자신의 환상에 철저한
토플러는 이러한 항변에 대해서도 빗장을 잠궈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론적으로는 재선에 대한 필요가 대표자들을 정직하게
행동하게 하고 주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도록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것이 결코 그들 대표자들이 권력구조에 흡수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같은 책, p. 90.
고 말이다.
앨빈 토플러의 이러한 진술은, 천박하기 그지없는 자유주의자나
‘진보적 언론’이, 그리고 시민운동 단체들이 ‘타락선거’나
‘천민적 정치 행태’를 비판하는 것과 같은 류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가장 정상적이고, 아마도 가장 최상의 부르주아
대의정치와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본의 아닌,
통렬한 폭로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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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4-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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