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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 노동운동의 구심, 서노협 7년
 전노협 운동, 그 과거와 현재

현장에서 미래를  제5호
김영대

특집 2

전노협 운동, 그 과거와 현재, 전노협 운동 6년, 현장에서 말한다

서울지역 노동운동의 구심, 서노협 7년


김 영 대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의장)


1. 87년 대투쟁에서 89년 임투까지
: 노동조합 운동의 조직적 확산기

서노협은 87년 노동자대투쟁 때 결성된 노동조합들이 노동조합 운영을 위한 간부 지도력을 공동으로 구축하고 정부와 자본의 탄압에 공동대처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지나면서 간부 지도력없이 투쟁했던 노동조합들의 상당수가 정부와 자본의 회유와 탄압에 무력화되거나 어용화되었다. 정부와 자본으로부터 자주성을 지키고자 하는 노동조합들의 노력은 곧바로 노동조합의 연대활동으로 나타났다. 중소제조업과 사무직노동조합들이 제각각 친소관계에 따라 교류를 해 오던 중 88년 맥스테크 위장폐업에 대한 지원 투쟁을 매개로 지하철노동조합을 비롯한 사무직업종 노동조합들이 중소제조업과 대거 결합하게 되었는데, 대한광학노동조합 민주화 투쟁, 지역노동조합 3사 합법성 쟁취 투쟁, 동아건설 창동공장 노동조합 설립 투쟁 등을 상호 지원하다가 88년 5월 29일 결성되었다.
88년의 임금인상투쟁을 겪으면서 구로노동상담소등에 대한 3자 개입(이 시기 서울지역에서는 주로 단체에 대해서 적용하였다), 지하철, 병원 등 공공부분의 쟁의 제한과 같은 노동악법 문제가 임금인상투쟁을 효율적으로 하는 데 걸림돌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이는 88년 하반기 노동법 개정 투쟁의 주요동력이 되었다.
88년 하반기부터 서울지역은 커다란 조직 개편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서노협을 결성한 이후로 100개가 넘는 조직을 포괄하게 되자 단위노동조합에 대한 일상적 조직관리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무직업종 노동조합들의 상당수가 서노협에 가입하였지만 가입하지 않은 조직들도 상당수 널려 있었다. 서노협 활동이 일정하게 안정되어 가자 사무직업종 노동조합들이 업종연대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 당시 서노협에 참가했던 사무직업종 노동조합들이 업종연대조직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으로 일상적 연대활동의 효율성을 위해 제조업 노동조합들은 구로, 영등포, 중동부지구로 지구 편재를 갖기 시작하였다.
89년 임투에서는 기업별 노동조합체제에서 투쟁역량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요구 수준을 비슷하게 맞추고 투쟁 일정을 통일하여 공동투쟁 전술을 적용하는 방식이 구로지구를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지하철노동조합에 대한 파업지원 투쟁과 단위원장 구속에 따른 석방요구 투쟁등을 공동임투의 일정과 맞물려 동시 출․퇴근 집회, 점시시간 공단내 가두행진 등의 대중적 투쟁으로 조직하였다.
한편으로 살인적인 토지가격 인상과 이에 따른 주택의 전․월세 가격 인상은 임금인상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기업별노동조합 체제에서 하는 임금인상투쟁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었고 노동조합 운동의 관심영역에 대한 본질적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대응양상에서 주택 수당이나 융자금 제도 ,교육 수당등을 사회적 차원이 아닌 단위기업에 요구함으로써 중소기업과 사무직 노동조합간, 사무직 노동조합과 대기업간 실질생활의 격차를 벌려 놓았다. 기업별노동조합 체제가 사회개혁 투쟁마저도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2. 침체기 : 저변의 확대 및 전국적 전선의 침체

89년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이 형성되면서 전노협 결성을 방해하고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기 시작하였다. 정부와 자본은 하반기 단체협약부터 무노동 무임금 원칙과 인사․경영 참여 요구를 배제하는 원칙을 강제하기 시작하였으며 90년 1월 20일 전국경제단체협의회(경단협)를 결성하여 탄압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데 주력하였다.
이들은 민자당 합당의 부도덕성을 반공 이데올로기로 만회하려는 듯 전노협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한 자리수로 임금인상률 억제, 무노동 무임금 원칙, 준법투쟁의 불인정, 업무조사권 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탄압하면서 노동조합 간부들을 무자비하게 구속․수배하였다. 특히 3저 호황이 끝나면서 밀어 닥친 전자․섬유업종의 자연 감원 및 해고 사태가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탄압에 대하여 노동조합은 집회와 농성으로 버티었으며, 이후 진행된 업무조사에 대해서 공문을 주고 받으며 시간끌기 작전을 벌여 마침내 5월 4일 임금인상투쟁 일정을 최대한 조정하여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을 계기로 총파업으로 맞서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5월 9일 민자당 창당 전당대회에 맞춘 가두 집회에 수 많은 조합원이 참여하였다.
90년 총파업을 겪은 후 서노협은 조직력의 절대적 축소를 맛보아야 했다. 사무직 노동조합들이 업무조사 과정에서 몇 개의 노동조합을 제외하고 대부분 탈퇴하였으며, 중소기업의 제조업 노동조합들은 자연 감원 및 휴․폐업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과정에서 임금인상 투쟁은 기업별노동조합 차원의 임금인상 투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모습을 별로 보여주지 못하였다. 노동법 개정 투쟁 역시 매년의 형식적 투쟁에 머물렀다.
90년 투쟁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우리 사회체제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임금보다 높이 오르는 전․월세 가격, 정부의 노골적 탄압, 실업 등.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지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져야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바꾸어 나갈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의식에 대한 변화를 타고 선거를 통해 그 가능성을 적극 모색해 보자는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91년 지자제 광역의원 선거에서 서노협이 주체적으로 후보자를 물색하여 선거에 임하였으나 광역선거에 걸맞는 우리의 요구나 선거방식에 많은 한계를 보여 주었다.
92년 3월 24일 총선에서 서노협 부의장이 민중당 후보로 참여한 것과 구로지구 수석부위원장의 독자후보 출마로 인해 내부적으로 엄청난 갈등을 겪었다. 정당조직과 노동조합과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와 사업추진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선거 결과는 노동조합 지도자가 국민적 지도자가 아니라는 뼈아픈 현실이었다.

3. 새로운 연대관계의 모색

전노협에 대한 탄압 이후 서울지역의 민주노동조합 운동은 대다수 업종조직과 서노협, 그리고 소수이지만 그룹조직이 어우러져 활동을 하는 양상이었다. 서노협은 중소제조업의 임투를 지원하거나 서울지하철이나 서울대병원 등 큰 노동조합의 투쟁을 지원하는 활동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좀더 적극적인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서노협에서 관장하는 업종모임을 조직하였으나 친목모임 수준에서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서울지역 연대를 새롭게 모색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이 임금가이드라인 저지를 위한 서울지역공대위나, 근로자파견법저지를 위한 공대위등 기존의 서노협 활동의 위상과 다른 제도개혁 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지역연대조직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실천수준이 미약한 조건에서 ILO공대위 및 전노대와 위상 관계를 정립하지 못한 채 93년 활동으로 마감하였다.
93년 전노협 위원장 선거와 함께 민주노총 건설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서노협 내부도 민주노총 건설에 대비하여 업종분화 사업을 진행한다. 유통, 섬유 등의 노동조합들에서 조금씩 실체를 갖기 시작하여 민주노총 출범을 앞두고 준비위 및 대표자회의를 구성하여 업종분화에 대비했다.
94년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전체 서울지역 노동조합의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로의 재결집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임․단투가 업종 중심으로 진행된다면 서울본부는 노동관계법을 비롯한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의 일상화에 주력하면서 일반 시민단체와 연대를 모색하고 아울러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일조하고자 방향을 잡고 있다. 한/노/정/연

총파업의 깃발, 전노협


박 양 희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의장)


“어찌나 최루탄을 쏘아대는지 너무 많이 울었어.”
“학교안으로 들어갈 때는 무서움으로 오금이 져렸지만 신이 났지!”
“전경도 많지만 선봉대도 얼마나 많은지 끝이 없는 것 같더라구”
“완전히 전쟁터였다구”
내가 범우전자 노동조합의 사무장으로 있을 때였다.
90년 추운 겨울날 위원장과 조합원들이 난로가에 둘러 앉아 전노협 결성 보고대회의 못다한 이야기를 듣느라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어젯밤 뉴스에서 본 선봉대와 전경들의 격렬한 투쟁장면이 화면으로 비춰지고, 전노협의 결성을 알리는 짧은 멘트를 볼 때보다 위원장의 입을 통해 전노협의 결성을 듣는 것은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 울렁거리는 시간이었다. 89년 전국노동자대회는 정부의 탄압 때문에 적진에 침투하듯이 긴장감 넘치는 야밤 행군을 통해 참가한 경험이 있어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어 더욱 그러했으리라.
민주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은 해고와 구속을 각오해야 하고 민주노동조합의 전국적 조직을 갖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을 가르쳐 준 전노협 6년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90년 5월 1일 해방 이후 최초의 전국적 총파업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결성 전부터 몰아닥친 공안정국으로 전노협은 계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특히 결성하는 해였던 90년 KBS투쟁과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으로 전노협은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해 전국적인 총파업투쟁을 결의했다.
부천에서는 89년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이하 부노협)를 결성하기 직전 지역 지도부의 구속에 항의하는 ‘4.15 총파업’을 전개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때는 우리들이 하는 총파업의 의미를 잘 몰랐다. 지도부의 구속에 항의하여 우리들의 성난 분노를 단결된 힘으로 보여주여야 한다는 뜨거움으로 결행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4.15 총파업 이후 전국에서 부천의 총파업에 대한 높은 평가가 쏟아지면서 우리는 큰일을 해 낸 듯한 마음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결국 그 힘으로 우리는 자랑스런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창립할 수 있었다.
90년 전국 총파업 결의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직관으로만 결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90년 임금인상투쟁은 자본측의 대응이 고도화 되었다. 투쟁력이 뛰어난 연대투쟁의 발원지 여성사업장은 유행병처럼 번지는 부도나 위장폐업 등의 탄압으로 고용안정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또한 총파업 투쟁을 저지하려는 관의 압력은 거세어져 시청, 노동부, 경찰서가 몇 개의 팀으로 나누어져 직접 노동조합 지도부들을 협박하면서 돌아다녔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을 대표하는 노태우 정권의 노동조합 탄압은 노동진영의 진출을 저지하고 항복을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때문에 전국적 총대응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우리는 정치적 전국총파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해냈다! 5월 1일 부천역에서 춘의사거리까지 가두투쟁을 벌이며, 우리의 의지를 다지고 5월 3, 4일 20개 노동조합이 자신감 속에서 힘차게 총파업투쟁에 참여하였다.
총파업 투쟁의 경험은 우리에게 단결하면 단결할수록 모진 탄압이 몰아닥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전노협의 총파업투쟁 전술을 보면서, 일부에서는 후유증이 많이 남았다는 결과론적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파업투쟁을 통해 90년 총자본에 대한 총노동의 투쟁전선을 설치하면서 임투을 성과있게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전국적 단결의 힘을 보면서 전국적 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 투쟁으로 조합원들이 단위노동조합 투쟁 속에서 배운 것보다 한 단계 높은 정치적 각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노협은 민주노동조합의 개별적, 지역적 투쟁을 모아 내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단결․투쟁하는 민주노동조합의 구심으로 자리잡아 나갔다. 그간의 과정은 자본과 정권의 어떠한 탄압과 회유에도 굽힘없이 노동자의 대의를 지키고 투쟁으로 쟁취하고자 했던 전노협이기 때문에 이루어 낼 수 있었던 투쟁의 역사였다. 투쟁의 상징이고 깃발이 되었던 전노협.
그러나 계속되는 지도부의 침탈과 구속, 단위노동조합에 쏟아지는 칼날같은 탄압은 지도력과 조직력을 안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없게 하였다. 이런 조건으로 현장과 조합원 속에서 느끼는 한계도 많았다. 단위노동조합에 몰아치는 다양한 탄압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해 조직수는 축소되어져 갔고 조직강화에도 힘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노동법개정 투쟁도 매년 쟁점을 만들지 못하고 내용적인 변화없는 관성적인 투쟁일 때가 많았다.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이라는 정신에 맞게 현실에서 불평등 구조를 개혁하고 평등사회를 앞당기는 전망을 구체화해 나가는 사업방향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일상활동에서 갖는 이러한 한계는 전노협이 조합원들과 현장에서 친밀하게 일체화된 조직으로 발전하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전노협의 한계를 극복하고 산별노동조합을 건설하기 위한 과제와 투쟁은 금속연맹과 민주노총에 남겨졌다.

올해 전국노동자대회를 마친 후 뒷풀이는 민주노총의 건설로 인해 전노협의 해소를 앞둔 간부들의 아쉬움으로 채운 술잔이 부딪히는 자리에 함께 기뻐하며 또 슬퍼했다. 전노협이 단결투쟁으로 지켜온 민주노동조합의 소중한 조직적 성과가 닻을 올린 것을 보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허허로운 것은 전노협이 노동자에게 투쟁의 깃발이었고 진정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사랑이기 때문이리라. 한/노/정/연

민주노조운동의 싹을 키운 전북노련 7년


이 송 준 (전북지역노동조합연합 의장)


제반 투쟁사업과 그 대응과정

전북지역은 산업구조의 특수성과 노동조합운동이 낙후한 관계로 실질적 공동투쟁은 활발히 진행되지 않았다. 전지역적 공동요구는 제기하지 못하였고, 전국적 공동요구(예를 들면 91년도 주택융자 및 수당, 95년 의료문제)를 중심으로 몇몇 노동조합이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89년 이후 계속해서 ‘지역임금인상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한 두 해(89, 90년)를 제외하고는 전북지역노동조합연합(이하 전북노련)에 가입한 노동조합의 공동투쟁본부(이하 공투본)였고, 그밖에는 상황실 체계였다.
활동을 본다면 그 동안 공동임투의 주요 내용이었던 시기집중 투쟁, 파업사업장 지원이 주내용이었으며, 다양한 형태의 임투전진대회(공단 또는 가두시위, 문화제, 체육대회, 등반대회 등)와 중간보고대회, 임투 마무리 시점에서 갖는 전조합원 수련대회 등을 매년 시행하였다. 임금인상 투쟁에 돌입하기 전 임투승리를 위한 간부수련회, 지역 최저생계비 설정을 위한 설명회를 가졌고, 공투본 소식지를 월 2회 발행하였다. 초기에는(88년 - 92년) 많은 간부 및 조합원이 참여했으나 그 이후 거의 모든 사업이 상층활동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노동운동탄압 분쇄투쟁은 지역노동운동의 제1의 사업내용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운동탄압은 여러가지 있었으나 주로 노동조합파괴 책동에 맞선 지역연대투쟁이 많았다. 기억나는 투쟁은 노동부 점거투쟁이었던 창신정비 지원투쟁(88년), 200일이 넘었던 아세아스와니 지원투쟁(89 -90년), 백양섬유 하청회사인 세일나염 투쟁(88-90년), 11년간 싸웠던 선전자 지원투쟁 등이다. 초기에는 집회, 철야농성 합류 등으로 조합원 대중이 참여하는 투쟁이 이루어졌다. 후반에는 지지 대자보, 스티커 작업 등 선전사업을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성공을 한 투쟁,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한 투쟁 등이 있었으나 모두 전북지역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지역시민들의 의식을 바꾸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전국적 총파업 때는 중식집회, 잔업거부 투쟁, 지지집회가 주요 투쟁이었다. 대중적 파업투쟁까지는 발전되지 못했다.

노동조합 활동과 정치활동

88년 당시 18개 사업장 노동조합 3,000여 명 가입, 9개 사업장 노동조합 4,000명 참관으로 출발한 전북노련은 92년까지 나름대로 대중적 지지와 참여로 지역노동조합 활동의 연대구심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90년초 전노협 사수투쟁에 따른 업무조사와 노동조합 침탈로 인해 92년부터 10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연대사업도 주춤하게 되었다. 주로 제조업 중심의 전북노련은 90년대 새로 건설된 제조업 노동조합들과 연대사업을 진행했다. 93년의 전북노동조합연대모임은 전북노련과 신규노동조합연대회의로 구성되었다.
94년 하반기 이후에는 전북지역 노동조합운동의 한 축이었던 병원노련 전북본부, 전교조와 연대활동이 이루어졌다. 연대활동의 시기가 늦어진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했다. 선거와 같은 정치적 사안을 둘러싼 대응에서 제조업 노동조합은 독자후보,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에 중심을 두었는데, 사무직 노동조합은 범민주연합전선을 형성하는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제조업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노동자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88년 민중당, 92년 노동당에 전북노련의 전․현직 주요 간부들이 참여한 적이 있다. 반면 일반 조합원들은 보수 야당에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한/노/정/연

대공장 노동조합에서 바라본 전노협


장 대 현 (대우조선노동조합 부위원장)


1990년 1월 22일.
반역사적, 반민족적, 반민주적 행위임에도 그 간교함을 애써 감추며 화려한 마스크를 쓰고 3당 합당의 민자당이 출범하던 그날. 삼엄한 경비와 서슬퍼런 눈초리를 피해 상경한 전국의 노동자들이 화려하지는 못해도 구릿빛 얼굴에 맑고 똑똑한 정신으로 모여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를 힘차게 건설하였다.
전노협이 무수한 군화발에 짓밟히고 숱한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힘찬 투쟁으로 전국의 노동자들과 함께 전진해 온 지 어언 6년. 이제 전노협은 한국노동운동사에 화려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자 한다.
대우조선 노동조합은 전노협 소속 노동조합은 아니지만 전노협과 같은 맥락 속에서 훈련되고 교육되어지며 같은 사업을 전개하면서 전노협과 함께 해 왔다고 내심 자부하고 있다. 전노협 결성으로 지난 87년 7, 8월 노동자대투쟁을 이끌어 내었던 제조업 노동조합은 최초로 전국 단일조직으로 결집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전국 노동자의 꿈과 희망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항간에는 민주노총의 역사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이하 전노대) 또는 I.L.O공대위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민주노총의 발원지는 다름 아닌 전노협에서 시작되었다고 나는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전노협 출범 당시 전노협을 와해하거나 말살하려 했던 것은 민주노동조합 진영 자체를 말살시키려 했던 것이며 전노협은 투쟁과 단결로써 민주노동조합 진영을 사수하며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또한 전노협이 출범하면서 민주노동조합 진영의 투쟁이 단위노동조합의 투쟁에서 지역 중심의 공동투쟁으로 발전되고 이것이 확대․발전하여 오늘날 산업(업종)별 공동투쟁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전노협은 민주노동조합 진영을 사수하고 확대․발전시켜 민주노동조합의 총단결체인 민주노총을 건설하였으므로, 민주노총의 역사가 전노협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전노협은 지난 6년간의 사업 속에서 한국노동운동사에 엄청난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전노협은 대기업 노동조합을 전노협으로 조직하는 데 부족함이 있었다. 해마다 투쟁의 선봉이 되었던 대기업 노동조합이 별도의 조직 속에서 투쟁을 전개하면서 전국의 투쟁이 단일화 되지 못하고 이원화 되어 민주노동조합 진영이 대단결을 이루어 내는 데는 미진하였다. 물론 90년의 대기업 연대회의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대노협), 전국조선업종노동조합협의회(조선노협) 등과 상호 지원, 연대하기는 했지만, 한 조직의 틀 속에서 통일된 전술을 가지고 투쟁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투쟁의 산물을 생산해내지 못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전노협이 이룩한 성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노협 출범 당시부터 줄곧 전노협을 이끌어온 단병호 위원장의 지도력인 것 같다. 그의 얼굴은 전노협의 상징마크로 연상될만큼 대중적이며 따스하고 강인했다. 그래서 그는 철의 노동자였으며 전노협 뿐만 아니라 전체 민주노동조합 진영의 지도자였으며 민주노총이 건설된 지금 이 순간에도 단위원장의 지도력이 빛나게 자리하고 있다.
전노협은 지난 6년간의 숱한 시련 속에서도 굳굳하게 전노협을 사수하고 확대발전시켜 빛나는 민주노총을 건설하였다. 지역 중심의 투쟁을 산업별 투쟁으로 전환시켜 내고 민주노동조합 진영을 하나의 총결집체로 건설해냄으로써 전노협은 스스로의 역할을 다 했다고 본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노동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려고 하고 있다. 비록 전노협은 해소되어지더라도 지금의 민주노동조합 진영은 전노협의 빛나는 업적과 정신을 계승하여 산별노동조합을 건설하고 노동해방을 기필코 쟁취해야 할 것이다. 한/노/정/연

전노협 6년의 교육활동을 바라보며


김 진 순 (민주노총 집행위원, 전 전노협 교육국장)


전노협이 창립된 지 벌써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노동조합활동은 조직과 투쟁이 중심이지만 둘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 교육활동이다. 전노협 교육활동의 시작은 지역, 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교육활동 방향설정을 위하여 이 시기에 교육실태 설문조사와 지역간담회를 시작했는데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얼마되지 않는 기간이라 노동조합활동의 실무역량이 많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답하고자 단위노동조합 교육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비롯한 각 부서의 실무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전국 조직이 만들어지고 전국과 지역, 단위노동조합을 연결하고자 실시했던 교육사업으로는 미가입사업장-대공장노동조합-과 연대를 위한 교육사업, 민주노동조합 운동의 방향을 잡아나가는 데 필요한 조합원 조직화를 위한 사업, 교육자료제작, 교육매체 제작, 교육 연구사업 등으로 큰 틀을 잡을 수 있다.
전노협이 창립된 해에 실시된 교육 사업은 부서별 실무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이 기본을 이루었다.
임투시기에 교육담당자를 위한 강사훈련을 수도권과 영남권으로 나눠서 동시에 실시하였는데 영남권의 경우 이 교육에 100여 명 정도의 교육생이 참가하여 단위노동조합의 교육역량 강화를 위한 갈증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었다. 이후 교육역량 강화 교육은 강사 훈련만이 아니라 초보교육담당으로서 교육사업을 기획하는 훈련과 결합하여 매년 상하반기에 1회씩 실시하였다.
실무교육으로 중요한 교육은 선전담당자를 위한 선전학교를 들 수 있다. 전노협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주간노동자신문에서 실시되는 노보편집자교육만이 유일한 교육이었고 단위노동조합에서 당장 선전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역량공급은 시급한 과제였다. 전노협은 이러한 단위노동조합간부들의 요구에 부흥하여 선전학교를 수도권 지노협 선전부장단을 기획단위로 구성하여 단위노동조합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사항을 중심으로 배치하되 첫회 교육이므로 실험정신을 발휘하여 선전활동과 관계 깊은 매체교육(사진 촬영법, 만화대자보 그리기, 비디오 촬영 및 활용법 등)도 선택과목으로 배치하면서 선전의 영역을 확대하는 계기로 삼았다.
위 두교육은 매년 정기적으로 하면서 내용을 다듬고 발전시켜 나가면서 전노협의 고정 교육으로 자리잡아 나갔다. 그밖에 지도자훈련등 전노협 초기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상반기사업 평가와 하반기 전노협 사업방향을 집중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다. 실무부서 교육은 신임간부교육, 문화, 산업안전, 여성, 선봉대 훈련 등으로 교육이 확대되었다.
매해 투쟁시기, 일상시기 등으로 나눠서 단위노동조합교육담당자가 조합원교육을 실시하려 할 때 참고하고 활용하기 위해 그 시기에 꼭 조합원에게 교육해야 할 내용을 교안과 참고자료를 담는 교육지침을 제작 배포하였다.
매체교육으로는 매년 중심 주제를 비디오, 슬라이드 등을 제작해서 배포해 단위노동조합에서 조합원교육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시 전국의 조합원에게 신속하게 투쟁상황을 알려내고 연대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투쟁비디오 속보를 4일만에 제작하여, 언론매체를 가지고 있지 못한 노동조합 상황에서 노동조합 언론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교육 연구사업으로 단위노동조합의 교육 실태조사, 노동조합 교육활동 방향을 위한 토론, 기초과목의 교안으로의 정리, 교육방법론 연구작업을 하였다. 93년에 들어서부터는 기존 교육은 지속해 나가면서 노동조합조직발전과 맞물리면서 금속산하 업종별교육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국제적 교류가 활발해져 전노협은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자동차업종, 조선업종, 금속일반, 섬유업종의 교육 수련회를 실시하였다. 특히 교육 수련회의 성과를 바탕으로 94년 1월 전국조선업종노동조합협의회(조선노협)가 결성되면서 제조업에서는 처음으로 업종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전노협 교육의 흐름은 크게 실무교육, 조합원 교육 활성화를 위한 지원의 축과 제조업의 업종분화 조직화를 위한 사업의 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전노협에서 매 교육을 기획하면서 주요하게 관철시키고자 노력했던 교육의 관점은 단위노동조합과 지역, 전국을 어떻게 연결하고 통일시켜 내느냐는 것이었다. 중앙에서 소집할 경우 실무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인데 교육의 형식은 실무역량 강화이고 내용은 전국적 사업방향, 주요쟁점에 관한 것으로 형식과 내용을 결합하고자 하였다. 교육지침의 경우 교안도 단위노동조합 조합원의 상태와 전국의 방향을 내용적으로 결합하고 결론은 실천과제로 맺음하였다.
6년의 교육활동을 정리하면 조직적 관점과 현실에 맞는 교육을 기본 관점으로 잡으면서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교육활동이라 하기에 미흡한 상태이고 노동자의 계급의식 향상에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이런 과제를 이후 민주노총, 산별조직에서의 교육과제로 남기면서 전노협의 교육활동을 마감한다. 한/노/정/연

전노협을 돌아본다


신 철 영 (개혁신당 사무부총장, 전 전국노운협 공동의장)


민주노총의 출범에 따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가 발전적으로 해산한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다. 전노협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작은 역할을 했었다는 인연으로 이 글을 요청받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애써온 분들에게 혹시 누라도 끼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 때문이다.

전노협의 출범과 3당 합당

1990년 1월 22일은 눈이 많이 내렸다. 갑자기 많은 눈이 내리자 수도권 일대의 교통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날 전노협은 성균관대학교 수원캠퍼스에서 비밀리에 창립 총회를 하기로 계획하였다. 전노협이 생기기 몇 달 전부터 노태우 정권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단골로 써 먹던 용공시비에서부터 이후의 업무조사까지 동원되었기에 새로이 탄생하는 조직의 앞날이 험난함을 예견할 수 있었다. 결성대회 당일은 갑자기 눈이 내린 탓으로 비밀리에 연락하여 참석이 예정되었던 사람들이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 채 속전속결로 결성식이 끝났고 이후 들이닥치는 경찰과 대치를 하였다. 오래전부터 수배를 받고 있던 단병호 위원장 등 지도부는 식을 끝내자마자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이날 3당 합당이 선포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소위 여소야대 정국으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씨가 민주당(김영삼 총재), 공화당(김종필 총재)과 합당을 선언함으로써 전노협의 앞날에는 먹구름이 가득함을 예고하였다.

88년 전국 노동자 대회와 노동법개정 운동

88년은 노동법개정 운동을 전국적, 대중적으로 전개한 해이다. 87년 노동자 대파업투쟁의 여세를 몰아 민주노조들이 지역별, 업종별로 단결하기 시작하였다. 88년 하반기에는 이런 힘을 바탕으로 대중적인 노동법개정 운동을 펼치고 이를 모아서 민주노조의 전국조직화를 한다는 공감대들이 광범하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노동법개정 운동의 깃발은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이하 전국노운협)가 먼저 들었다. 당시의 전국노운협은 노동운동을 지원해 온 전국의 거의 모든 노동단체들이 모여서 공동사업을 하고 있었다. 6월 초에 공청회를 시작으로 노동법개정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여소야대 국회에서도 야 3당의 공조체제로 노동법 개정이 추진되었다. 이렇게 모아진 전국적 움직임의 총화는 그해 11월 13일 전국 노동자 대회로 절정을 이루었다.
1970년 청계천에서 근로기준법을 안고 분신했던 전태일씨의 분신 18주년이기도 했던 이날 전국에서 모인 5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세대 대회를 마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평화행진을 함으로써 폭발적으로 커 올라 온 노동자들의 힘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필자도 노운협 집행부의 일원으로서 준비과정에서는 노심초사 하였지만 막상 이날 행사를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격을 맛보았다.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와 전노협

88년 노동자 대회를 거치면서 앞으로 각 지역과 업종별 노동조합 조직의 대표자들이 정례적인 회의를 하면서 이후의 공동사업을 논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틀 후에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전국회의)”로 이름지었고 전국노운협도 참가 단체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전국회의는 89년 중반에 형성된 소위 공안정국으로 인하여 몇 달 뒤부터는 비공개로 회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울산에 가서 숨박꼭질을 하면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회의를 했던 기억등이 새롭다.
1년여에 걸친 이런 과정을 거쳐 전노협이 탄생되었다.

전노협 결성 시기를 둘러싼 논쟁

89년 여름이 되자 전국노운협 내부에서 전노협의 결성 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다. 한쪽은 “7월 경에 조직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고 다른 한 쪽은 “상당한 준비과정을 거쳐서 조직을 하여야 된다”는 시기상조론을 주장하여 양측이 팽팽하게 논쟁을 하였다. 물론 전노협을 만드는 시기는 노동조합 지도부들이 결정할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당시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를 반영하는 것으로 노동조합 지도부들에게도 일정한 참고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조직을 하기 전에 전국적인 조사를 하여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가능한한 89년을 넘기지 않는 범위에서 전노협을 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 논쟁은 절충 조정되었다.
지역조직들에 대한 실사를 한 결과 7월이나 또는 직후에 전노협을 조직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판명되었고 이후 최대한 서두른 결과가 90년 1월 22일이었다.

생산직과 사무전문직의 갈등

민주노총의 결성을 보면서 한 가지 감회가 있다. 이미 89년 초반에서부터 제조업과 사무전문직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제조업 노조 지도부들은 사무전문직을 싸안고 갈 수 있는 정도의 유연성과 포용력이 부족했던 약점을 갖고 있었다. 당시는 최근처럼 많은 사무전문직 노동조합의 전국조직이 생겨나지 못했던 때였다. 병원노동조합협의회(병노협), 전문노련, 건설노련 정도가 적극적으로 회의에 참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제조업 노동조합은 전투성이 강한 반면에 사무전문직 노동조합의 경우 전투성은 떨어졌지만 제조업 노동조합과는 다른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차이로 인하여 여러가지 어려움이 예상되었지만 전문직 노조 지도부들은 노동조합 전국조직화(전노협)에 함께 참여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문제와 지도부들이 겪는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할 만한 여유가 제조업 노동조합의 지도부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전노협은 사무전문직노동조합을 아우르지 못하고 제조업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사무전문직과 함께하게 된 것이다. 이는 아쉽지만 “대중운동이 성장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다”는 교훈이기도 한 것 같다.

전노협에 지워진 정치적 부담과 대중성

전국회의에 참가하거나 전노협 회의에 참관하는 기회에 여러가지 아쉬움을 느꼈다. 우선,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조직은 기본적으로 과격한 단체는 아니다. 그러나 당시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3당 합당을 통하여 일거에 거대여당을 만들어 낸 정부로서는 전노협이 유연한 대중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전노협=과격단체”라는 등식에 사로잡혀 이를 몰아 세우기에 급급하였고, 반면 전노협은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재야운동도 전노협에 과도한 정치적 부담을 지우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이 전국적 대중조직으로서 전노협이 정상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저해하였다.
전노협의 회의 때마다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다. ‘전국적인 투쟁을 하여야 한다’는 당위적인 주장에 조합원들의 현실적 조건이 따라가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회의에서 결정하는 현상이 안타까웠다. 대중조직에 대한 넉넉한 이해를 바탕으로 훨씬 유연하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면 우리 노동운동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새로 탄생한 민주노총을 정부는 인정하지도 공식적으로 상대하지도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여전히 어려움을 예고하는 것이지만 노동조합도 이제는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주변에 보다 많은 세력들이 노조를 지지하고 국민들의 마음 속에 노동조합의 정당성을 확신하는 분위기가 확산될 수 있도록 대중적인 넉넉함과 유연함이 더욱 필요한 것 같다.
전노협의 발전적인 해체가 한국노동조합운동이 국민 속에 튼튼히 뿌리내리는 전기가 되기를 빈다. 한/노/정/연

1995-11-2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