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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과 진보진영의 과제

현장에서 미래를  제57호
김세균

남북정상회담과 진보진영의 과제** 이 글은 서울대 「관악」지 2000년 스물두번째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김 세 균/소장


남북정상회담의 개최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이 글이 실린 관악지가 발간될 무렵에는 정상회담이 이미 개최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이 시점에는 남북정상회담의 성과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직 이르다. 그러나 회담의 성과가 어떤 것이든,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는 남북한 관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 글은 남북정상회담이 남북관계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며,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로 변화될 새로운 정세에 진보진영이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매우 일반적 수준에서 구명해 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1. 미국의 대북정책의 변화

남북한관계는, 남한 대외정책의 대미 종속성을 반영하여, 일차적으로는 북미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므로 남북한관계의 변화를 읽기 위해서는 우선 북미관계의 변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미국은 이전까지는 북한에 대한 강력한 군사적 억지력을 유지하면서 북한을 전면적으로 압박하는 ‘북한 봉쇄정책’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이용해 핵무기를 보유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미국은 이를 자국의 국가이익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으로 간주, 평화적 방식에 의한 해결이 불가능할 경우 최종적으로는 무력 행사도 불사한다는 자세를 보였다. 이로 인해 1994년에는 전쟁발발 직전에 이르는 심각한 한반도 위기가 발생했다. 그러나 1994년의 제네바 협정을 통해 영변 핵시설의 동결에 합의 보게 되고, 북한의 조기붕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되면서부터는 미국의 대북정책은 큰 틀에서는 ‘대북 포용정책’으로 전환하게 된다.
제네바 합의가 있은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은 1999년 10월 미상원 청문회에 제출된 「페리보고서」에 의해 큰 가닥이 잡혔는데, 이 보고서는 미국의 초미의 관심사인 북한의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관련활동을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해 미국과 한국 및 일본의 상호 조율되고 상호 보완된 공동전략으로서 ‘포괄적이고 통합된 이중접근전략’을 추천하고 있다. 이 전략의 요지는 북한과의 협상에서 성과가 있으면 미국과 동맹국들은 대북압력을 완화해 나가고, 북한이 핵 및 미사일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면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대북 무역제재를 완화하며 여타 긍정적인 조치들을 취하는 반면, 북한이 비호응적이면 (북한이 94년의 제네바합의를 파기하지 않은 한) 제네바 합의를 유지하고 가능한 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도 미국과 동맹국이 단호하고 절제된 조치를 취함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첫 번째 접근방식으로 돌아오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기조 하에서 미국은 협상 성공을 위한 환경조성을 위해 북한에게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장거리 미사일 발사의 중단을 요구했는데, 북한이 이를 수용하고 대응조치로서 우선 미국이 몇가지 대북 경제제재 완화조치를 취함으로써 현재 미국과 북한은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포괄적인 협상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페리보고서는 북한의 가장 큰 관심사인 주한미군의 철수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협상이 진척되더라도 그것이 북미관계를 얼마만큼 정상화할 수 있을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이러한 지적과 관련하여, 우리는 미국의 대북 포용정책이란 북한이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관련활동을 완전히 종식시킬 경우 북한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시킨다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포용정책은 실제로는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를 힘을 앞세우면서 직접적으로 추구하는 ‘현실주의적이고 강압주의적인 붕괴추구 노선’과는 구분되는, 사회주의체제의 세계자본주의체제로의 통합과 시장경제화에 기초해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도해내는 ‘기능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붕괴유도 노선’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미국이 ‘북한 포용정책’을 취하게 됨에 따라 김대중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이 힘을 얻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환경을 조성할 목적으로 지난 3월 행한 ‘베를린선언’은 ‘북한의 호응이 있을 경우 한국과 일본 등도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는 페리보고서 전략에 부응한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2. 북한의 사회발전과 대미, 대남정책

북한은 그간 미국 및 세계자본주의체제에 의해 전면적으로 포위된 조건 속에서 ‘주체사상’을 유일무이한 국가이데올로기이자 사회통합 이데올로기로 내세우면서 대내적으로는 수령과 당-국가에 의한 전일적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이에 기초하여 공산주의사회로의 이행을 담보하는 이른바 ‘주체형 사회주의체제’를 건설하려고 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소련과 중국에 대해 우호협력 관계와 군사적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치적-군사적 자주성을 확보하고, 민족자립경제체제를 수립하는 동시에 제국주의의 세계지배에 대항하는 제3세계의 반제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강고한 보루 역할을 수행하려고 했다.
북한체제는 그간 북한주민들에 대한 당-국가관료층의 강고한 전일적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주체사상에 의해 북한주민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하는 데에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북한체제는 그간에 존재한 어떤 사회주의체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강고한 ‘자생적’ 생존능력을 지닌 체제가 되었다. 실제로 소련에 종속적이었던 동유럽의 사회주의체제들이 소련의 후견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허무하게 무너진 반면, 북한체제가 근자에 이르러 더 한층 악화되고 있는 경제난과 식량난 등에도 불구하고 체제 붕괴의 결정적 조짐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북한체제가 지닌 강고한 자생적 생존능력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북한은 정치적-군사적 자주성을 앞으로도 계속 견지해 나가고, 경제난의 해소 등을 위해 북한경제의 대외적 개방을 추진해 나가는 가운데에서도 ‘민족자립경제 건설’이라는 기존 노선을 최대한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은 오늘날 대내외적인 조건의 변화로 인해 그간 자신이 추구해온 제반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가 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북한은 무엇보다 세계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퇴조로 인해, 그리고 미국과 대자본주의권과의 관계개선 등을 위해 더 이상 제국주의의 세계지배에 대항하는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진영의 강고한 보루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북한은 자신이 견지해온 민족자립경제 건설노선을 크게 훼손시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국경제의 세계자본주의체제로의 통합을 많든 적든 추진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 있다. 그리고 북한의 ‘주체형 사회주의체제’는 그간 대내적으로 계급적 착취의 폐기와 보편적 복지체제의 수립과 같은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자본주의사회로부터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체’로서의 공산주의사회로 이행하고 있거나, 또는 이행할 능력을 지닌 사회주의체제를 건설하는 데에는 명백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오늘날의 북한체제는 ‘국가의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사회의 국가화’가 전면적으로 관철됨으로써 노동자대중에 의한 정치의 직접적인 전유가 확대-심화되고 있는 사회, 즉 국가권력의 노동자대중으로의 이전과 국가에 대한 노동자대중의 밑으로부터의 민주적 통제가 확대-심화되고 있는 체제라기보다는 노동자대중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국가와 국가로 전화한 당에게 전면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체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체제를 우리는 ‘국가(또는 관료)사회주의적 신민(臣民)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데, 북한사회주의체제는 그러한 체제의 전형에 속한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북한체제의 자생적 생존능력이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음으로써 구래의 유교적 전통 등이 크게 작용하는 가운데) 제반 구계급사회적 착취의 폐기, 보편적 복지체제의 수립, ‘혁명적 군중노선’의 채택, 민족적 자주성의 확보 및 주체사상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통합 등을 통해 수령과 당-국가에 대한 북한인민들의 ‘신민적 충성’을 확보하고, 이에 기초하여 당-국가관료층에 의한 전일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성공한, 북한 특유의 ‘국가(관료)사회주의적 신민사회’가 지닌 강고한 생명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은 오늘날 내국 축적의 부족과 북한 스스로가 자인한 3차 7개년 계획의 실패, 농업기반 조성의 어려움, 천재지변의 발생 등이 가져온 경제난과 식량난 등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유례없는 위기상황에 내몰려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생겨난 1950년대의 위기상황을 자립적 민족경제의 수립과 수령제 및 주체사상의 확립 등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 발전전략’을 구사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도리어 이러한 ‘우리식 사회주의 발전전략’이 북한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있다. 경제위기의 도래와 더불어 북한은 정치적으로는 수령제의 완벽화를 기하고 있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붉은 기 철학’을 제창하는 등 주체사상을 더 한층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중공업 우선주의에서 농업-경공업-무역제일주의로의 전환, 물질적 자극의 강조, (농민)시장의 활성화 및 이로 인한 비공식적인 제2경제의 확산 용인, 새로운 ‘분조관리제’의 채택,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의 창설 및 개방의 확대와 같은 경제적 발전 전략 면에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경제위기는 작년을 고비로 ‘바닥을 친’ 것으로 판단되지만 본격적인 성장국면으로 돌아서기에는 북한경제는 아직 많은 난제들에 봉착해 있다. 다른 한편, 북한은 안보를 위협하는 미국의 군사적 압박 등에서 벗어나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과제에 대처해 나감에 있어 북한에게는 미국과 얽혀 있는 제반 정치적-군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는 협상무기가 핵과 미사일 이외에는 없다. 이 점에서 북한은 미국과의 관개개선을 추진함에 있어 자신의 협상무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정책을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지적과 관련하여, 우리는 북한이 오늘날 체제유지와 생존을 위해 세계자본주의 체제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 그런 가운데 미국과 다른 서방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도 남한과의 관계를 개선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조건 속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한편, 북한은 남한에 대해 처음에는 북한의 혁명역량에 의해 남한을 해방한다는 ‘혁명적 민주기지노선’을, 그리고 1964년 이후부터는 두 개의 지역혁명론에 의거, 남한인민에 의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통한 통일국가 수립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다가 1980년 이후부터는 남한에 ‘민족자주정권’ 수립되면 이 정권과 연방국가(고려민주 연방공화국)를 창설한다는 노선을 추구해 왔다. 그런데 북한은 그간 김대중정권을 포함한 그간의 모든 남한정권을 ‘민족자주정권’으로 간주한 적이 없다. 따라서 남한정부를 남한사회를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치 않았으며, 남한정부와 교섭에 나설지라도 그것은 (남한에 ‘민족자주정권’을 수립시키기 위한) 남한인민과의 통일전선 구축을 위한 전술적 차원의 접촉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의 남북정상회담 개최 수용은 ― 확실히 판단하려면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를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 북한의 대남정책 기조상의 중대한 변화로 해석될 수 있다. 즉, 남한정부를 더 이상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지역에 대한 남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남북한관계를 개선하려는 정책으로 대남정책의 기조를 바꾼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경은 북한이 처하고 있는 대내외적인 어려움을 반영하는 것으로 남한정부와의 관계개선을 중요한 지렛대로 삼아 한편으로는 경제위기 극복에 요구되는 제반 자원들을 외부로부터 끌어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보다 미국 등과 제반 정치적-군사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3. 남한의 대북정책과 정치지형

남한사회에서는 남북 대결구조의 온존 등으로 말미암아 반공이데올로기가 그 어떤 자본주의사회에서보다도 강력한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수구보수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온존-강화시키는 중요한 조건이 되어 왔는데, 이들 수구보수세력은 대내적 민주화의 진전을 방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힘의 우위에 기초하여 북한을 압박해 북한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대북 강경책을 주창해 왔다. 이러한 대북 강경노선을 우리는 ‘현실주의적 대북 강경노선’ 내지 ‘강압주의적 북한 흡수병합 노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른 한편, 국력이 신장되고 민주화가 진척됨과 더불어 남한사회에서는 오늘날 대북 자신감과 우월감이 사회적으로 팽배해 있다. 더욱이 남한의 자본가들은 북한의 노동력과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북한진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를 배경으로 ‘남북한간의 경제협력관계를 진척시켜 남북한간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북한경제를 남한경제권으로 통합시키는 것에 기초하여 궁극적으로는 북한체제를 남한체제에 흡수통합해야 한다’고 하는, 이른바 ‘(신)기능주의적 대북 온건노선’ 내지 ‘시장주의적-신자유주의적 북한통합 노선’을 지지하는 세력 역시 그 힘을 급속히 증대시키고 있다. 이때 북한의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북한 진출에 나서고 있는 독점재벌들은 ― 내국정책에서는 수구노선을 견지하고 있지만 ― 대북 정책에서는 그러한 기능주의적-신자유주의적 통일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사회세력에 속하며, ‘햇볕정책’을 내세우면서 북한을 흡수통일할 의사가 없다고 말하고 하지만 시장경제체제로의 체제통합을 추구하고 있는 현재의 김대중정권 역시 그러한 ‘기능주의적-신자유주의적 북한 흡수통합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휴머니즘적 동포애’ 등을 내세우면서 다양한 형태의 통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시민운동세력은 현실주의적인 대북 강경노선에는 반대하는 세력이긴 하지만, 사회 내부에서 기능주의적-신자유주의적인 흡수통합정책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지원세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전의 김영삼정권은, ‘햇볕론’을 편 한완상이 통일원 장관직을 맡은 초기국면을 제외한다면, 북한이 경제적 위기 등에 몰려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북한 목조르기’를 계속해 북한체제를 강압적으로 붕괴시키려는 ‘현실주의적-강압주의적 흡수병합 노선’을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 김영삼 정권이 이렇게 대북 강경노선을 고수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김영삼정권의 보수성에 기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존사회주의권이 붕괴한 데에다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북한이 심대한 경제위기에 내몰림으로 인해 북한체제의 조기붕괴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데에도 크게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김정일 체제의 안착 등으로 이어진 이후의 사태 전개는 북한체제의 조기붕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게다가 미국은 제네바 합의가 있은 이후부터는 북한 포용정책으로 대북정책의 기조를 바꾸었다. 이로 인해 남한정부가 대북강경정책을 계속 고수하는 것은 김영삼정권 때부터 이미 객관적으로는 불가능해 졌는데, 이전부터 ‘햇볕정책’을 지지해 온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부의 대북정책은 최종적으로 ‘대북 강경정책’으로부터 ‘대북 온건정책’인 ‘햇볕정책’으로 변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햇볕정책’의 추구는, 현대그룹이 추진한 ‘금강산 관광사업’의 성사 등에서 드러나다시피, 남북한간의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남북한간의 교류 증대 등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김대중정권의 ‘햇볕정책’에는 동시에 뚜렷한 한계가 존재하고 있다. 그 한계는 ‘햇볕정책’이 무엇보다 ‘북한에 대한 힘의 우위정책’을 추구하는 선상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부는 그간 ‘햇볕정책’을 내세우면서도 남북한간의 군사적 대결구도를 대폭 완화시킬 수 있는 평화군축안을 제출한 적이 없으며, 남북한 평화군축체제와 남북한 공동안보체제의 구축을 위한 어떤 적극적인 이니시어티브를 취한 적도 없다. 다음으로 정부는 경제분야에서는 이른바 ‘정경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남북한간의 교역과 남한자본의 북한 진출을 허용하면서도 정부간의 관계에서는 ‘상호주의’ 원칙을 고수해 왔다. 상호주의 원칙은 남한과 주고받을 협상자원이 부족한 북한에게는 남한이 예를 들어 식량 제공 등을 미끼로 하여 다른 문제에서는 자신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양보를 자신에게 강요하는 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이 지닌 최대의 문제점은 그 정책이 궁극적으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친자본적인 통일정책’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햇볕을 씌워 외투를 벗긴다‘는, 즉 시장논리를 북한에 침투시켜 북한을 흡수통일한다는 신자유주의적인 흡수통일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끌어냄으로써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은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김대중정부는 시급하게는 이산가족의 재회와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촉구할 것이고, 북한이 남한정부와의 관계개선에 찬성하면 남북경제협력을 크게 증대시키고, 북한과 미국-일본과의 관계개선 및 북한의 세계기구 진출 등을 적극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한정부가 북한에 대한 힘의 우위정책을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고, 김대중정부의 통일정책이 친자본적인 시장주의적-신자유주의적 기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의 개최를 통해 남북한간의 관계는 앞으로 개선되겠지만 남북의 진정한 평화공존과 평화군축체제의 구축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합의 발표를, 무엇보다 영남민의 반발에 부딪쳐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총선 대응용으로 적극 활용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및 그 이후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남북한관계 개선국면은 총선국면에서의 활용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에서 계급들간의 관계 및 정치 사회세력들의 관계에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남북한간의 관계개선이 추진되면 시민운동은 물론 노동자 민중운동진영의 많은 개량주의세력 및 현재 민간통일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NL세력이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 추진 및 남한 독점자본의 대북경제 진출을 뒷받침하는 정권과 자본의 제2중대로 편입될 것으로 보인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러한 사태 전개는 지배층과 자본의 대국민적 헤게모니를 강화시키고, 노동자-민중운동의 발전을 한층 어렵게 만들 것이다.
나아가 김대중정부는 남북정상회담 및 남북한관계 개선국면을 정국을 주도하고, 선거기간 중 그 추진을 일정하게 미루어오던 반민중적 신자유주의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무기로 이미 활용하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적극 활용할 것이다. 실제로 김대중정부는 한편으로는 여야영수회담을 개최해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 여야협력으로 국민통합에 앞장서는 초당적인 ‘상생(相生)의 정치’를 실시하기로 야당과 합의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생존권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면서 대우자동차노조를 비롯한 자동차공대위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착수하고, 철도노조민주화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철도청을 앞세워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협동조합 개악을 반대하는 축협노조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으며, 의보통합을 둘러싼 노-노갈등을 부추기면서 민주개혁의 과제를 희석화시키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이 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국가적 중대사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여야영수가 합의한 상생의 정치란 내국적으로는 반민중적 신자유주의정책 등을 강도 높게 추진하기 위한 여야간의 전략적 제휴에 다름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전략적 제휴는 여당이 인위적 정계개편 등을 시도하면 언제나 깨어질 수 있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전략적 제휴가 지속되든 말든, 남북정상회담 및 남북한관계 개선국면을, 정국을 주도하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는 무기로 사용하려는 김대중정부의 시도는 앞으로 더욱 도를 더할 것이다.


4.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북한은 경제위기에 대처하고 안보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 등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는 데서 더 나아가 남한정부와의 관계개선으로 나서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동시에 북한의 ‘주체형 사회주의체제’의 유지를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이 어느 정도 신속하고 심도 깊게 진행될 것인가는 아직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남북한관계 및 북한과 미국, 일본 등과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는 가운데 북한체제가 중국의 ‘시장사회주의’에 가까운 체제로 점차 변모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런데 남북한간의 힘관계가 북한에 대한 남한의 압도적 우위에 의해 특징지워지고 있고 그 우위가 갈수록 더욱 커지고 있는 점, 북한이 자신의 ‘주체형 사회주의체제’를 크게 훼손시킬 수 있지만 생존과 체제보존을 위해서도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점차 문호를 개방하고 남한과의 경제적 교류관계를 증진시키지 않을 수 없는 점등은 남북한관계의 전개와 통일의 경로 및 통일국가의 상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 변수들이다. 이와 관련해, 언제 통일이 이루어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만, 통일의 경로와 통일국가의 형태가 어떤 것이 되든, 통일이 되기 이전에 남북한이 각각 내부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게 되든, 남북한의 통일과정은 남한이 통일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남한체제가 그대로 북한에 이식되는 형태로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북한을 극도로 우경일변도적인 남한의 ‘초국적자본과 독점재벌 지배하의 제한적 민주주의체제이자 종속적 신자유주의체제’에 통합시키는 것이 된다.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비록 그 방식이 동 서독 통일과 같다할지라도, 그리고 서독에 의한 동독의 급속한 흡수통일이 치유하기 어려운 심각한 후유증을 통일 독일에게 안겨주고 있다 할지라도, 세계자본주의체제의 핵심적 중심국의 하나였던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통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후유증을 통일한국에 안겨줄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방식의 통일은 북한주민들에게 새로운 재앙을 안겨주고 통일된 한국에게 풀기 어려운 심각한 내부문제를 안겨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남한사회의 민주변혁이 얼마나 진척되는가가, 남북관계의 개선 및 통일국가의 수립이 남북한 민중의 이익에 얼마나 합치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진보진영은 통일운동을 어디까지나 남한 민주변혁운동의 일환으로 확고히 편입시켜야 하며, 통일운동을 노동자-민중이 전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반대투쟁에 새로운 장애물을 안겨주는 형태로 전개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늘날 ‘시민운동’이 크게 보면 남한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 및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통일정책을 밑으로부터 뒷받침하는 지배층의 하위동반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또한 우리는 그간 민간통일운동을 주도해온 NL세력이 통일운동을 남한사회의 민주변혁운동에 우선시킴으로써 민주변혁운동의 진전을 방해해 왔고,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 이후에는 (노동자 민중진영의 개량주의세력들과 더불어) 정권과 자본의 대북정책에 대한 자립성마저 급속히 잃어가고 있음을 보고 있다. 그러한 움직임과는 달리, 진보진영은 정권과 자본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일운동에 대해 명백한 사상적-조직적 자립성을 견지해야 할 것이며, 남북한대결구도를 완화시키는 데에 기여할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나 남북한관계개선 과정 등에 반대할 필요는 없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북한에 대한 조건 없는 무상지원의 확대, 확고한 평화공존체제와 상호안보에 기초한 한반도 평화군축체제의 수립, 주한미군 철수,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반대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민중적 교류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통일정책을 넘어서는 민중적 평화통일정책을 적극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그 결과 남북한관계가 크게 개선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우리는,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통일정책이 커다란 힘을 얻게 되고, 지배층 및 자본의 대국민적 헤게모니가 크게 강화되는 새로운 정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노동자 민중운동 및 진보운동의 진전을 어렵게 만드는 새로운 조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진보운동의 재정비를 촉진시키는 계기로서도 의의를 지닌다. 그 재정비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신자유주의를 지지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이며, 자본지배체제를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체제를 추구할 것인가, 자본지배체제를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자신을 재정비함으로써 남한의 노동자 민중의 이익은 물론 북한의 노동자 민중의 참다운 이익도 대변하는 운동으로 다시 출발해야 할 시점에 오늘날 남한의 진보운동은 서 있다.(2000.6.5.)

2000-07-1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9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