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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성 또는 상상력
 세상만사/

현장에서 미래를  제111호
이영민

세상만사//


타성 또는 상상력

이영민 / 철도 노동자


세상만사
타성 또는 상상력


호박에 침주기
아시아나 조종사 노조가 끝내 긴급조정에 걸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벼운 주먹을 툭툭 던져보고, 후려칠 듯이 빈주먹을 몇 번 내밀어 보고, 다음에는 회심의 한방을 날린다. 언론에 흘려서 여론을 끌어당기고, “자율교섭이 안된다면…”이라는 전제를 깔아두고, 노동운동의 반응을 살핀 뒤에, 이쪽에서 빈 수레처럼 시끄러운 성명서나 띄운다면 비로소 결정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안심이다.”라고 판단한 뒤 조정권을 발동하는 것이다. 호박에 침주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긴급조정권이나 직권중재, 혹은 공권력 투입과 같은 수순들을 밟아 나가는 것은.
그 뒤에 “이제 노사관계, 혹은 노정관계는 파탄 났다. 다시는 우리하고 원만하게 대화할 생각은 하지 마라.” 이렇게 공갈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런 공갈치고 시간이 해결하지 않았던 사례는 아직 없었다.
긴급조정은, 통하니까 거는 것이다. 그런 것을 걸어봐야 소용없다, 저 꼴통들은 어차피 무시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구차한 절차는 밟지 않게 된다. 폭력, 업무방해, 명예훼손 등 즉시 공권력을 투입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합법적으로 투쟁하고 싶다.”는 당사자들의 생각이 긴급조정권 발동의 가장 큰 원인이고, 지키지도 않을 뻥이나 빈 수레에 지나지 않는 노동운동 진영의 성명서가 그 배경이 될 것이다. “조금 시끄러우니까 잠깐만 기다리면 됩니다.”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아부하는 아시아나 노무관리팀이나 운동출신 관료들의 미소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개 (마지막 회)
시골에 가서 밭을 매고 있는데, 우스꽝스럽게 생긴 강아지(‘슈나우저’종이라고 한다.)가 벌레를 잡아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기어 다니는 모든 종류의 벌레, 날아다니는 곤충, 하여간 가리지 않고 먹는다. 잠깐 사이에 잠자리 네 마리(아침이라 날지 못하는 놈들), 매미 두 마리(수명이 다 되어 죽어가는 놈들)를 먹어치우는 것이다.
“아니 저놈은 애완견인데….”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시골 개라서 그래요.”어린 조카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더니“쐐기도 먹어요.”“달팽이도 먹고요.”했다.“사료는 안 먹고?”“엄마가 그냥 밥찌꺼기를 줘요. 없어서 못 먹는데요.”그렇구나, 애완용 개도 저렇게 환경이 달라지니까 벌레나 밥찌끼를 먹는구나. 사람이야 오죽 하려구. 한심한 기분이 되었다.
몇몇 고참 기관사들이 먹고 살만해지니까 골프를 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임금에 연금도 받고, 또 시골에 땅을 가지고 있는 게 신도시 개발로 값이 올라서 우선 차부터 바꾼다고 한다. 그래도 여유가 있으면 골프를 치러 간다. 아직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전 같으면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젊은 친구들은 어떻게 하면 채팅을 해서 얼빠진 여자들을 후릴까 해서 골몰하고, 나이든 축들은 또 그들대로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은, 같은 또래의 여자들을 후리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개는 환경에 따라 먹고 사는 것만 오로지 생각한다. 주인에게 아부해야 하는 놈은 아부하는 것이고, 그냥 주변에 벌레라도 충분히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게 과연 개보다 더 나은 것인지.

전화 두통
벼르다가 끝내 전화를 걸었다.“지난번에 차를 빌려 가셨잖아요. 실어놓은 물건도 내리지 않고, 차가 흙이나 먼지투성이가 되어 우리가 세차를 하고, 끝내 한마디 사과도 없고, 이거 이래도 되는 겁니까?”“차를 빌려간 친구들이 상근자가 아니라서, 정말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오늘 당장 가서 처분을 하지요.” 오후에 자리를 비웠더니 전화한 사람이 찾아 왔다고 한다. 그렇게 박박 긁지 않아도 되는 건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 또 한통을 걸었다. “엊그제 의자를 빌려 갔잖아요. 그런데 남은 음식이나 접시를 그냥 두고 갔군요. 음식은 상했지만 접시는 찾아 가셔야죠.” 역시 미안하게 되었다고 열심히 사과했다. 오늘 오후에 가서 당장 처리를 하겠다고. 그런데 결국 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다. 괘씸하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소설가 아무개는 “그러니까 직업적 운동권은 믿을 수 없다.”고 한심한 어투로 늘 우리들을 비난했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타성 또는 상상력의 빈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은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있다. 이 사람은 일본에서 인기가 그만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팬이 많고 영미 권에 책을 무지하게 팔아먹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다고 한다. 영미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잘 통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럴 것이다. 자유주의자이고 “세상 골치 아프게 살지 말고 그냥 너 혼자 즐겁게 살아. 제 몸 하나 못 챙기는 주제에 잘난 척 하지 말구.”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 같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니 처신만 웬만하면 정말 즐겁게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60년대 안보투쟁 세대이다. 자기는 머리가 나쁘고 별로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아, 와세다 따위 시시한 대학에 다녔다고 한다. 와세다가 정말 그렇게 시시한 대학인가? 그런데 이 사람이 보니까 학교를 점거하고 “자본에 점령당한 대학 따위는 차라리 폐쇄하라.”며 농성하던 작자들이 공권력(이 사람 표현으로는 기동경찰)이 한번 치니까, “하루아침에 착한 학생으로 돌아가더라”는 것이다. 건물도, 사람도 모조리 멀쩡하기만 하고, 걸핏하면 수업을 방해하던 운동권들이 가장 열심히 강의에 참석해서 이 사람에게 실컷 비웃음을 샀다. 아니, 뭐 저런 작자들이 다 있어? 이런 기분이 되었는데 교수들이 출석을 부르니까 꼬박꼬박 대답도 잘 하더라는 것이다. 에라, 이 한심한 놈들아. 하는 기분이 되어 자기는 출석을 불러도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간 이 사람은 소설에 이런 말도 늘어놓았다. “선동전단을 훑어보면 천편일률적인 주장에다, 맞춤법도 맞지 않고,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이다. 이 치들의 진정한 적은 자본이 아니라 호소력 없는 문장이나 상상력의 빈곤일 것”이란다.
자기야 타고난 절세의 문장이니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꼭 문장력이 뛰어나야 호소력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상투적이라든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든가, 대중들에게 늘 설교를 한다든가, 진실성이 없다든가 하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손가락질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롭지 않기는 우리들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단식
결국 8일째에 단식을 그만 두었다. 일곱 명이 함께 단식을 하고 있는데 가장 먼저 나가떨어진 것이다. 배가 아프고, 물도 토하게 되고, 무엇보다 서울역에 오가는 사람들이 싫어서, 부끄러운 것을 무릅쓰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9일째에 중단했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14일까지 단식투쟁을 계속했다. 릴레이 단식이 벌어지고 새로 두 사람이 합류하고 이러던 와중에 교섭이 타결되었다.
교섭내용은 그렇고 그렇지만 (철도매점 노동자들은 특수 고용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따라서 노조활동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손해배상 철회, 계약해지 철회, 손실금 보상, 정도이니 파업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매점 동지들이 타결을 기뻐한다니 다행이다. 이로써 새마을호 여자 승무원 정규직화 투쟁과 철도매점 노동자 투쟁 등 철도의 중요한 비정규직 투쟁들이 모두 한 매듭을 지은 셈이다. 단식투쟁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단식은 오래 할수록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하루나 이틀도 마찬가지이다. 십일이든 이십일이든, 노동자들 단식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악랄한 인간들을 생각하면 자꾸 억울한 생각만 들었다. 왜 이렇게 굶으며 우리만 고통 받아야 하나, 저런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을 더 효과적으로 때려잡을 방법은 없나? 이런 후회 속에 불과 일주일을 견디다가 마침내 손을 들었다. 이리 저리 하면 네 번째의 단식, 다섯 번째 단식은 정말 사양이다.

임금노예
여승무원들이 마침내 정규직 발령을 받았다. 어느 여승무원이 남겨놓은 글, “차라리 비정규직일 때가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규직이 이렇게 감시받는 줄 몰랐습니다. 모니터링인가 뭔가 해서 하루 종일 감시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답한 어느 노동조합 간부의 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임금노예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서울 쪽은 그래도 모두 원하는 역에 매표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지방은 일곱 명 중 네 명을 수송원으로 발령을 냈다고 한다. 수송원은 젊고 건장한 남자들도 곧잘 다치고 산재를 입는, 시설 쪽과 더불어 철도에서 가장 위험한 직종이다. 늘 달리는 열차에 매달려 일하고 뛰어 타고 뛰어 내리고, 나부터도 수송 원으로 일하라고 했으면 늘 사표 쓸 일을 고민했을 것 같다.
지방은 여승무원들이 노동조합의 찬밥이었으니까 사측에서 보복하는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복을 하다니 정말 치사한 인간들이다. 정규직이 되었다고 그렇게 기뻐하더니 그들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일하고 있을까? 남성 동료들도 “이거 골치 덩어리들이다. 왜 이런 여자들을 위험천만한 수송으로 보내는 거냐?”고 반감을 가질 것 같다. 그게 사측으로 향하면 다행이지만 죄 없는 당사자들에게 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리 저리 전화를 돌려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연락하라.”고 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8개월을 싸워서 싸움은 정리되었다. 이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패한 것도 아니다. 이제 첫 단추를 꿴 것인데, 중요한 진전도 있었고 끝내 돌파하지 못한 벽도 있었다. 비정규직 운동을 노동조합의 활동방침으로 만든 것은 중요한 발전이다. 소수 활동가들과 연대투쟁을 해온 동지들로만 싸운 것은 끝내 넘지 못한 벽이다. 끝내 합의타결을 하지 않은 것은 우리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 짧지 않은 과정에서 스스로를 임금노예로 자각한 승무원들은 몇 명이나 되는 것인지, 몇몇은 분명한 것 같고,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정규직이 되어도 자기가 임금노예라는 사실, 노예가 좀 뭣하면 그냥 임금 노동자라는 사실, 임금 때문에 몸은 묶어 있어도 정신은 자유롭고 싶다는, 공대위 동지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던 그 노동자로서의 자각을 얼마나 이루어냈는지 전혀 자신이 없다.

요리
인터넷을 뒤져 요리를 배우고 있다. 그래봤자 한심한 수준이지만 워낙 악식에 익숙한 애들인지라 곧잘 먹어준다. 요리를 배우며 깨달은 일, 요리를 잘하지는 못해도 인터넷 교본대로 하려고 노력하면 애들이 잘 먹어준다. “재료도 없는데, 그까짓 생강이나 마늘 따위는 그냥 두지 뭘.” 하는 태도로 대충하면 애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대중운동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존 혹은 자존심
누군가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의존에 상대를 방치하는 것은 그를 망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설거지나 청소를 도맡아서 하면 애들이 반드시 게을러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깨달았다. 그래서 막 신경질을 내면 그날은 반짝하고 하는 척 한다. 아예 일을 나누어 맡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또 그렇게 한다. 노동조합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범에는 다 그렇게 나와 있지만 과연 우리는 그렇게들 하고 있는 것인지, 웬만한 조직들은 성원들을 지도부나 선배들의 꼬붕으로 만들고자 하고, 거기에 반기를 들고 정말 자주적으로 하고자 하면 “저놈은 조직적이지 못해, 늘 튀어.”하고 짓누르고자 한다. 막연하게 단결해야 한다고 하면서 다른 의견을 억누르기도 한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교묘하게.
부자이고 정규직인 우리 지방본부는 빚만 잔뜩 있고 오랜 파업 끝에 기진맥진하고 있는 철도매점 본부에게서 차용금을 몽땅 돌려받았다.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5개 사업장 연대 스티커 분담금도 내라고 하여 받아 내었다.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즉시 돈을 찾아다 갚아준 동지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살아있는 그 자존심을 존경하게도 되었다. 인간에게 자존심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발현되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 운동의 많은 경우들은 정말로 그런 것인가?

상농, 중농, 하농
유기농을 하는 아우에게 가서 한나절 밭을 매었다. 장마철이라서 비는 늘 오고 콩밭은 질척거리는데 풀도 별로 없다. “이거 언제 밭을 맨 거요? 풀도 별로 없는데, 좀 있다가 뜯으면 안 되나?” 은근히 꾀가 나서 제수씨에게 물었더니 “며칠 지나서 장마가 끝나면 하루에 한고랑 매기도 바빠요.” 한다. 저녁에 동생에게 다시 잘난 척을 했다. “거, 아무개 소설에 보니 밭은 보통 세 번 맨다고 하는데 정말 그래야 하는 거냐?” “그렇지, 세 번은 기본인데 생강 밭은 네 번도 매야 되지. 옛말에 상농은 흙 밑에 있는 풀을 잡고, 중농은 풀이 어릴 때 잡는데 하농은 풀이 다 큰 다음에 잡는다고 하는 거여.”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흙 밑에 있는 풀을 잡어?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게 말이나 되냐?” “이런, 풀이 싹이 날 때는 벌써 흙 밑에서 줄기가 자라 올라오는 거여. 그러니까 풀싹이 한두 개 올라올 때, 고랑을 득득 긁어준다고. 그러면 풀이 비리비리하니까 햇볕에 싹 말라 죽지.” “에이, 그렇다고 흙 밑에 있는 풀을 잡는 사람이 누가 있어?” “보통은 다 풀이 어릴 때 잡으니 중농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나도 요즘 바빠서 그렇지 고랑을 긁어 줄때도 많다구. 초겨울에 논을 두어 번갈아 엎으면 방동산이 뿌리가 모두 얼어 죽어서 그 다음해 농사짓기가 한결 편하다구.” “음….” 동생은 팔 년째 농사를 짓더니 도사가 다되었다. 천성이 워낙 부지런하니까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가장 게으른 농사꾼은 풀씨를 받는다구. 풀을 그냥 두면 씨를 맺는데 그거 받으면 나중에 풀이 열 배, 스무 배는 나는 거여.” “음….” 하는 수없이 밭에 나가 다시 콩밭을 매며 곰곰이 생각했다. 노동조합일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기풍을 그냥 두면 잡초처럼 번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되고, 그놈들이 새끼를 치게 되면 열배, 스무 배의 노력을 기울여도 바로 잡을 수 없게 된다. 노동조합 비리도 마찬가지, 작은 풀을 그냥 두니 마구 자라서 취업비리까지 터지게 된 것이 아닌가. 노동조합 운동에서 잡초란 과연 무엇인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두 고랑도 못 매어 소나기 때문에 품을 메고 말았다.

벗
백남룡이 쓴 ‘벗’을 읽었다. 더위에 지쳐있는데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어 그럭저럭 읽고 있다. 담담해서 꼭 절간 음식을 먹는 기분이다. 주인공인 판사는 참 훌륭한 사람이다. 그 부인도 전형적인 사회주의형 인간이다. 북한 판사들이 과연 그런 것인지는 심히 의심이 간다.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해서 “본받아야 한다.”고 캠페인을 벌인다면 그 이면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특별한 경우니까(소설에 있는 이야기나 이런 유의 소설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이런 소설도 재미로 읽는 것이지만 계속해서 읽으라면 질릴 것 같다. 너무 심심하기 때문이다.
이혼 위기에 처한 주인공들은 판사의 노력에 의해 결국 재결합하게 된다. 그 소설을 쓴 그대로 보아 준다면 그럴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순이 단선적이기 때문이다. 가수인 여주인공이 인기를 얻고, 그래서 우직한 노동자인 남편을 은근히 우습게보게 되고, 남편은 아내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생긴 대로(우직하고 순박한 그대로) 행동하고, 이런 식이라면 나도 화해를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인 남한에서 벌어지는 부부간의 갈등 및 이혼은 누구도 말리기 힘들게 된다. 이놈의 사회에서 개인의 의지는 미약하기만 하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순은 구조적이고도 위력적이기 때문이다.

2005-08-26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