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노협 6년 노동운동 탄압의 세월 |
현장에서 미래를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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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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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두 언
전노협 6년,
노동운동 탄압의 세월
신 인 령 (이화여대 법학과 교수, 이사)
90년 1월 22일 아름다운 옥동자 전노협이 탄생하여 험난한 파고
속에서도 노동운동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자기 몫의 과업을
완수하고 마침내 95년 12월 3일 그 발전적 해산잔치를 하게
되니, 전노협 곁에서 ‘부화뇌동’하며(정책자문위원 또는
후원회원 등의 이름으로) 지켜봐 온 사람들로서도 전노협 역사
6년의 세월이 그야말로 감회가 새롭다.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학대와 무차별 공격을 받게 된 전노협은 출발부터
당면 과제를 ‘전노협 사수 투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노동운동을 소중히 여기는 양심적 시민들로
하여금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전노협 언저리에 모이게
하였으며 함께 노심초사 지나온 세월이었다. 오랫동안 이 땅에
민주노조의 깃발이 꽂히는 날을 염원해 온 우리 모두에게
전노협은 우리 모두의 애절한 꿈이 현실화되는 시작이었다.
돌이켜보면 90년대 우리나라의 노동정책, 즉 노태우 정권
후반기와 김영삼 정권 전반기 노동정책은 한결같이 전노협
탄압을 통하여 그 본질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전노협의 역사는
곧 혹독한 노동운동탄압의 역사가 되었다. 자본과 권력은 일찌기
전노협의 역사적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전노협
창립을 전후하여 정․재계의 지각이 변동할 정도로 큰
동요가 일어났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존의 한국경총을
두고도 전노협 대응책의 일환으로 90년 1월 20일 경제계는
새로이 경단협을 조직하였고, 전노협 창립대회 바로 그날 ‘3당
합당’이라는 밀실야합 정당이 만들어졌다. 89년 3월 3당 합당전
‘여소야대’시절, 여․야 합의로 국회에서 통과된
노동관계법의 일부개정안마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된 후
정부는 각 부처를 거의 총동원하여 각종 정책과 방침으로
노동조합 운동 목조르기에 부심해 오던 중 합당을 계기로 더욱
과감하게 전개하였다.
전노협 와해 정책은 직접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관으로
‘노동대책회의’를 열어 마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동대책회의’란 전두환 군사정권 당시 제정된 국무총리
훈령에 의해 설치되어 노태우 정권에 이르러 더욱 본격적으로
가동된 노동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방대한 행정조직을 말한다.
이것이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쟁의가 있는 사업장이나
지역에 배치되어 “공권력투입” “대여론 홍보대책 강화”
“조합원 개개인 설득과 가족에 공안문 발송” “권용목 추종자
의법 조치” “권용목 구속키로 결의” “행사 원천봉쇄, 기관별
순화 격리” “진압병력 동원” “재야인사 개입 봉쇄”(이상
88년 정기국회 국정감사 제출자료 중에서 발췌) 등 기동력을
과시하며 작동하고 있었다. 전노협 와해 대책은 90년 1월 20일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직접 주재한 ‘산업평화와
노사안정을 위한 관계장관회의’(일명 ‘청와대대책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거기서 논의된 ‘회의자료’라는 문건을 통해 보면
전노협 와해 구상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치밀하였던 지를 알 수
있다. 내용 요점은 이러하다.
“다음과 같은 ‘정부의 대응 방안’을 실시하여 전노협을
와해시킨다” “전노협 가입 노조에 대한 업무 조사권 발동 /
‘제3자 개입’ 사례를 엄밀히 조사하여 강력 처벌 / 전노협
창립 기금이나 의무금 모금에 대한 의법 조치 / 전노협 가입
노조에 대한 규약변경과 탈퇴를 명령하고 불응시 처벌 / 유인물
배포 단속 및 불법 집회 시위에 대해서 경찰을 투입하여 원천
봉쇄하고 주동자 처벌 / 대응논리에 대한 대대적 홍보선전, 교육
실시”
“위 방안을 실행하기 위해 정부 각 부처는 다음과 같이 역할을
분담한다.” “노동조합 업무 조사 실시 : 노동부, 시․도,
내무부 / ‘제3자 개입’조사 및 처벌 : 노동부, 치안본부,
법무부 / 노조 규약변경 명령 및 탈퇴 유도 : 노동부,
시․도 / 대응 논리 홍보선전 : 노동부, 공보처, 상공부 /
불법 행사와 유인물 단속 : 내무부, 법무부, 공보처”
그밖에도 ‘불법쟁의 유형에 대한 포괄적 기준 발표’, ‘쟁의
현장에 대한 경찰 투입, 진압지침 발표’ 등을 연이어 내놓는,
참으로 치열한 노동운동 진압책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 속에는
심지어 “기업주들의 112신고나 고소․고발 접수와 동시에
경찰이 쟁의 현장에 출동하여 노동자 연행”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 세월동안 전노협의 역대 지도부는 전노협 출범
당시부터 시작하여 이날 이때(이른바 문민정부)까지 한치의
다름도 없이 쫓기고 갇히며 민주노조 기틀을 마련해 왔던
것이다. 이 개명천지에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는
이유로 형사 처벌을 받는 나라가 여기 존재하는 것이다!
단병호․김영대․현주억․양규헌 등
역대위원장과 위원장 직무대행들 중 구속 또는 수배의 고초를
겪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마치 지하비밀결사 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운동을 전개해 왔던 것이다. 전노협
지도부에 오르면 틀림없이 감옥행이 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를
마다하는 이가 없었다. 특히 단병호 초대위원장은 이른바
‘제3자 개입법’ 위반으로 세번씩이나 징역을 살게 되어 전노협
창립대회도 경찰의 수배 중에 참석했고 역사적인 민주노총
창립의 날도 또 다시 구속 중에 맞았다.
전노협 창립 무렵에 창원공단의 한 노조간부로부터 받은
옥중편지가 새삼 생각난다. “황량한 공단거리에 민주노조의
깃발 하나라도 온전히 올려낸다면 곧게 뻗은 공단대로 옆에
주검으로 묻힌다 해도 여한이 없다는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면서 “전노협 깃발이 올려지던 전야에는 뜬 눈으로
새우며 벅찬 감격에 겨웠다”고 썼다. 그는 출소 후 헌신적으로
전노협 활동과 민노총 준비에 복무하다가 민노총 깃발이
올라가는 날 전야를 공교롭게도 역시 차가운 감방속에 맞았다.
이것이 전노협의 역사다.
전노협 깃발을 잡고 사수와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 낸 열성
조합원들과 그 지도부 및 중앙조직의 여러 간부들의 순결한
투쟁에 한없는 경의를 느낀다. 더구나 6년의 세월을 무급으로
살아 온 중앙조직 간부들의 투지와 희생과 인내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전노협과 민주노총은 생각하기 어렵다. 휴일날 공사판에
가서 일당을 벌거나 새벽에 부자촌 아파트에 가서 세차
아르바이트를 하여 교통비를 마련하면서 묵묵히 일해 온 전노협
동지에게 미안함과 존경으로 머리가 숙여진다. 역사는 이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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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1-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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