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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일상과 문화산업

현장에서 미래를  제59호
신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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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일상과 문화산업
특집


신 병 현
교육위원장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적 일상의 문화적 성격을 기존 사회관계의 재생산과 변형이라는 모순적인 투쟁의 지형으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문화산업의 영향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90년 대들어서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말하는 문화연구나 문화비평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들은 문화현상에 대한 역사 구체적인 분석을 수행하지 못하고 관념론적 경향을 드러낼 뿐 아니라, 문화정책과 수용자에 대한 편향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들은 대중문화 혹은 저급문화의 대중성을 경험주의적으로 추수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며, 정치를 문화로 환원시키는 문화 대중주의의 경향을 노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들이 주목하는 일상이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이를 가치증식의 주요 표적으로 삼고 경쟁하고 있는 정보통신 기술을 적용하면서 시장을 개척하고 확장해 가는 문화산업의 기본성격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자본주의적 일상

프랑스의 철학자 르페브르(H.Lefevre)는 일상(la quotidienne, everyday)이 마치 스크린과 같아서 한편으로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 은폐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런지 일상은 의미 없고 진부하기 짝이 없고 연구할 만한 가치도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와서, 일상은 일부 예술적 경향을 제외하고는 가장 친숙하면서도 가장 탐구되지 않은 영역이다. 그러나 맑스가 노동의 일상성 초점을 맞추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였듯이, 그리고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대륙을 발견하여 일상 속에서의 성에 대해 과학적 접근의 장을 열었듯이, 일상의 영역은 보다 엄밀한 과학적 접근이 요구되는 영역임에 틀림없다.
일상은 사전적 의미로 보면 늘, 항상, 이미 등을 뜻한다. 그것은 반복이며, 친숙함을 의미하기도 하며, 규칙적인 리듬에 따른 순환이기도 하다. 그것은 당연함이다. 그러나 일상에 대한 일반화된 통념들과는 달리 그러한 당연시되는 자연화된 일상은 단순히 주어진 현재만은 아니다. 일상은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생산이며 동시에 그것을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다양한 참여자들에 의해 매일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일상적 실천은 바로 지배적인 사회관계들을 모순적으로 재생산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
우리들이 일상 속에서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과정은 동시에 우리의 욕망과 희망을 추구하는 실천들에 의해 형성되고 변형되는 가운데 재생산된다. 결국 일상은 과거 투쟁이나 변형의 효과로서 축적된 경험들의 야기하는 당연함이며, 다양한 제도들을 매개로 지속적이고 가차없는 일상적 투쟁 속에서 유지되고 관리되어야만 하는 긴장과 갈등이 이루어지는 재생산의 시공간인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는 이러한 일상을 중심으로 전개된 변형과 유지 및 재생산의 모순적 투쟁의 역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일상은 축적된 역사성을 그 중요한 특징으로 갖는다. 르페브르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직접적으로 주어진 ‘자연적인’ 낮과 밤, 주, 월, 계절, 해와 같이 단순하게 나눠진 순환적 생활 리듬이 지배해온 오랜 시기가 있었고, 이 시기는 사용가치와 종교가 지배적인 일상이었다. 자본주의 발달 초기는 일상 생활과 그리 큰 관련을 맺지 못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거대한 산업화와 도시화와 더불어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지배하고, 상품, 시장, 화폐와 그 논리가 일상생활을 장악해 가면서, 자본주의는 일상의 세세한 곳까지 확장되고, 생산과 생산관계가 누가 이 생산물을 소비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욕구와 일상은 관리 기법이 작동되는 가운데 철저하게 프로그램화되어 간다. 그것은 ‘효율적’ 기법의 강조와 더불어 ‘도구적 합리성’이 일상에 침투하고 지배해 가는 과정이다. 나아가 이제는 기업의 소비재 생산과 광고와 미디어 조작의 매개는 도시공간 뿐 아니라 가정내 공간도 프로그램화하고 상품화되어가고 있다. 식사에서부터 운동, 세탁과 오락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일상 생활의 영역들이 이미 식민화된지 오래이며,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서 식료품을 주문하도록 선전하며 정보기술의 시장을 확대하려는 정치 경제적 노력이 전개되거나 심리 전문가들의 심리상담 프로그램이 대중 문화 상품화하기에 이르고 있다.
일상은 대중적인 미디어의 매개를 통해 중간계층의 평균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추상화되고 관리적, 기능적 평면으로 환원되는 경향을 띤다. 도시 공간, 공장을 비롯한 작업장 공간, 심지어 가정 공간 속에서조차 합리성, 효율성, 편의성이란 명목 하에 기능적인 관리 평면으로 단순화, 추상화되어 행정관료나 경영자들에 의해 계획되고, 결정되고, 집행된다. 이러한 과정은 곧,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확장 양상, 그리고 도시 공간에 의한 농촌 공간의 착취의 모순, 지식노동과 육체노동간의 모순 전개 과정이고, 산업을 비롯해서 농업과 도시 공간을 자본주의적으로 생산해 온 역사인 것이다.
또한 일상은 선형적인 시간(linear time) 속에 가두어지는 반복적인 생활 양식이라는 점에서, 통치 목적과 지배적인 권력의 전략에 바탕을 둔 지배-종속의 과정이기도 하다. 기능적 평면으로 환원된 채 당연시되어 수행되는 일상적인 반복 속에서 사람들의 죽음의 두려움과 삶의 비극은 은폐된다. 일상생활은 모호하고 모순적이다. 한편으로 욕구를 생산하고 그것을 충족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과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심각한 불만족을 야기한다. 일상은 뻔한 것을 미적 형상화의 변형과정을 거처 새롭게 전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진기한 힘을 갖고 있다. 명확하게 구분되어 인식되지 않은 것으로서 일상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야기하는 저장소”이기도 하다. 다양한 문학 및 예술 작품과 같은 미적 표현물들에서 우리는 이러한 놀라움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상적 진부성의 형태변화에 불과하다. 전형적으로 ‘유행’은 이러한 일상을 스펙터클한 모습으로 재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상품관계의 확산 과정은 바로 일상성의 생산과 재생산의 역사인 것이다.
노동자들의 일상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노동자들에게 일상은, 첫째, 노동자들의 일상은 자본주의적 기계화와 다양한 규율화와 자연화 기제들이 작동한 기계문화의 확산과정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투쟁의 축적된 역사로서의 성격을 띤다. 산업화가 일찍 이루어진 국가들에서 산업화 시기, 특히 가내생산제와 공장제의 투쟁시기 동안에 작업장을 둘러싸고 노동자들은 일상생활의 장을 보호하려는 (보수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작업장에 함께 모여 작업을 하도록 되어있는 매뉴팩처에 대한 가내직물업자들의 반발은 공동체적 네트워크이나 집이라는 전략적 공간을 보호하려는 노력과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에 집은 생산수단이었으며, 독립성을 보장해 주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시개발이건 공장 설립 목적에서건 합리화를 통한 노동자 일상에 대한 통제와 규율화 시도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의구심을 갖고 저항했다. 둘째, 노동자들의 일상은 작업장을 중심으로한 선형적 기계적, 기능적 시공간으로 환원되는 경향을 띠며, 철저하게 자아와 타자에 의해 통제되는 규율의 시공간이다. 애초부터, 공장은 규율의 시공간이다. 효율화된 실용적 공장 공간에 적합하도록, 규율화된 선형적인 동작들은 신체가 갖고 있는 곡선의 부드러움이 드러나는 동선을 잘라내어 ‘효율화’시켜 주어진 공간에 적응된 것들이다. 박준성 선생과의 토론, 이진경의 ꡔ근대적 시공간의 탄생ꡕ 참조할 것.
기계부품들의 선형적 연결성은 또 하나의 핵심적인 부품으로서 인간의 신체를 선형화시켜 버린다. 곡선의 동선은 사고의 원인이 되며 비효율과 낭비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일상에 대한 자본주의의 선형적 시간으로의 규율화 과정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부르주아의 관리시도와 정치 및 종교 담론들과 자유주의 문학적 묘사들을 통한 자연화 혹은 감응성 창출 시도들 속에서 잘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연화 시도는 오늘날의 매스미디어와 대중문화 상품들의 영향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문화적 관리시도는 이러한 맥락조성을 조건으로 한다.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과 안정성을 높이려는 자본의 관리적 욕망은 관료제적 통제장치를 비롯한 다양한 관리기제를 동원하여 노동하는 이들의 다양성과 자의적인 행동 가능성으로부터 야기되는 불확실성을 줄이고자 한다. 이것은 곧 노동이 이루어지는 상황에 대한 계획과 통제에 바탕을 둔 분업적 배치이며 작업자들에 대해 일상적인 기계적 동작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도록 형식적 틀을 부과하는 것이다. 잉여가치 생산의 비밀이 노동 능력에 있음을 익히 잘 알고 있기에 자본은 문화적 자연화 과정을 통해 노동능력의 길들이기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의 공세는 ‘진보적인’ 자본과 자유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보수적인’ 노동자들의 전통적 노동방식과 일상생활에 대한 공세라는 역설적 성격을 띤다. 이는 마치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유연화의 불가피성을 유포하고, 이를 배경으로(그리고 IMF를 계기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전면화 되는 가운데, ‘정보화 사회’ 및 ‘지식기반 경제’의 ‘창조적인’ ‘신지식인’이 되지 못하고 저항하는 탈-숙련된 노동자들과 그들의 조직이 보수적이고 억압적이라는 비판과 유사하지 않은가? 셋째, 노동자 일상은 규율화된 시공간인 동시에 그들에게 능력을 부여해주는 또 다른 가능성의 시공간이다. 규율은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규율화된 신체는 종속된 주체성의 체현인 동시에 생산적 기술과 기능을 내부화한 임파워된(능력부여된) 주체성을 체현한 것이다. 반복적으로 규율 부과된 동작의 신체적 각인은 일상생활에서 안정적인 적응을 보증해 주는 동시에 기계화된 신체의 단순성과 황폐화의 지표이기도 하다. 자본권력의 전략과 관리장치들에 의한 코드화된 주체형태의 생산은 정신적인 종속인 동시에 자신감을 부여해주는 임파워먼트이기도 하다. 산업혁명기의 젊은 청년층에겐 공장은 그들의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다는 역사적 증거들도 있다. 가족과 지역공동체라는 전제적인 제약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공장은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공장은 뚜렷한 노동자 계급 형성의 용광로였으며, 개별 노동자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장이기도 하며, 투쟁과 반역의 진앙이기도 하였다. 사실상 노동자들에게 작업장 공간은 부정적 이미지로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노동자 개인들의 임금을 버는 장소이며, 주요한 생활공간이고 사회적 신분을 확인해 주고 보증해 주는 ‘회사원’이라는 정체성과 주요하게 관련된 공간이다. 작업장 및 사무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과정 역시 노동자들을 질식시키는 전체주의적인 공간만은 아니다. 회사 공장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자본권력에 대한 지나치게 과장된 인식으로 이끌어 자칫 허무주의적인 상상적 해결책에 매몰되게 할 위험을 갖고 있다. 작업장과 사무실은 노동자들에겐 일상생활을 형성해 가는 주요한 생활공간이다. 소외된 생활로서 일상은 작업장이나 사무실 경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작업장 경계를 넘어서면 소외된 삶으로부터 탈출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한 영역이 언제나 거기에 그저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에게서나 있을 법한 것으로서, 작업장이나 회사와 그 외부의 경계를 긋고 거기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방식이 더 소외된 도피주의(escapism)의 모습일 수 있다. 넷째, 노동운동에서의 일상은 작업장에서의 활동가 및 노동자들의 일상 투쟁을 뜻한다.
일상생활에서의 적극적인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는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를 주장하는 것은 자칫 노동활동의 일상을 배제하는 편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변화는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며 재생산하는 작업장 시ㆍ공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노동자의 일상은 가족과 회사, 회사와 지역, 가족과 회사와 국가 및 민족 혹은 회사와 노동자 공동체, 가족과 노동자 공동체, 지역과 노동자 공동체와 회사 등과 같이 다른 실제적 상상적 사회적 관계들을 환원시키는 특정한 일상적 시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일상의 탈출로서 꼬뮨적 삶이 그러한 관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상적 진부성의 ‘소격화’로서 문화형식들이 갖는 해방적 기능은 계급적 실천과 분리되어 평가될 수 없다. 일상은 사회 제도나 노동과정에서의 소외나 정치적 영향들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전원주의적 도피의 장소, 환상의 장소는 아닌 것이다. 일상은 권력과 사회구조의 작동과정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요하는 장소이다.
일상은 매일 매일 일관성을 지닌 반복적 생활을 의미하지만, 사회 공학적 추상을 통해 분절화되고, 정의된 것의 나머지만은 아니다. 즉, 일상은 우리들의 삶이나 사회적인 것의 단순한 잔여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성, 사회성을 품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의미의 폭발을 언제나 이미 품고 있는 가능태로 보아야 한다. 혁명이나 전쟁은 일상이 아니지만 일상적 삶의 문제로부터 언제나 이미 폭발하고 있다. 작업장에서 이루어지는 관리자 및 감독직들과 벌이는 활동가들 및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저항과 투쟁은 대규모 파업이라는 한시적 성격을 띤 전쟁을 예고한다. 그 뿐 아니라, 스타 TV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다국적 미디어 자본의 위성망을 통한 전세계적인 문화상품 공세와 미디어망 구축 시도나 서구의 다문화적 사회관리 시도들와 관련된 ‘문화 전쟁’, 그리고 신자유주의 질서 구축을 위한 국제적 시도들은 비상한 시기의 또 다른 표현 형식들인 것이다. 일상에 대한 연구는, 문화연구처럼 유행과 패션에 기대어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사회관계의 물질적 변화 과정과, 그와 관련된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대한 이해와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2.대중문화의 대중성?

일상을 강조하는 문화연구들은 대중문화가 갖는 대중성(popularity)에 특히 주목한다. 대중문화의 소비자이며, 수용자인 대중들이 보이는 대중문화 상품들에 대한 몰입과 열정에 대해 기호론 및 산업분석과 연계하는 가운데, 반계몽적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엘리트주의와는 달리, 그리고 대중성의 근원을 역사 사회적으로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하기보다는, 이들의 분석은 다수가 몰입하는 대중문화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것의 창조적인 수용을 발견하고자 하며, 동시에 그로부터 정치적 가능성 혹은 해방적 전복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러한 이론적 실천의 효과는 지배적 좌파 정치담론의 지형을 몰실천적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며, 정부의 문화정책에의 개입의 여지를 확장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실천적으로 대중성의 진정한 이유에 대한 통찰도 제공하지 못하는 가운데, 문화산업에 속한 다국적 자본이 대규모 투자를 요하는 정보기술이나 국가 기간 시설을 이용하거나 사유화를 통한 흡수합병을 막아내기보다는, 문화산업 시장의 확장과 대중들의 문화시설의 이용의 민주화나 정부의 이벤트성 문화정책의 수립과 시행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실천과 새로운 정치적 개입영역의 확장보다도 더욱 시급한 이론적, 실천적 분야는 다른데 있는 것 같다. 문화산업의 정보통신기술의 적용을 통한 일상의 식민화 경향과 문화산업 자본들의 국제적 흡수 통폐합과 관련된 문화전쟁이 그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에 대한 실천적, 이론적 관심은 문화이론 및 비평들의 유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변적이다.

이러한 문제인식 하에서 이러 저러한 문화 관련 문제들을 우리 주변에서 문화상품 이용 및 대중성과 관련된 간단한 예를 통해 좀 더 살펴보자. 우리 사회 노동자들 중 40세 이상의 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농촌 출신이다. 이들이 시골에서 성장하던 시절의 대중음악들은 비록 형식에서는 일본과 미국 음악 풍일지라도, 대개가 고향과 어머니, 그 대리자로서 연인과의 이별로 인한 외로움과 연모를 담은 명확한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를 갖고 있었다. 고된 하루의 노동을 마친 후 탁주 한잔을 놓고 시름에 잠기는 장면들이 70년대 드라마에 자주 등장했던 것 같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이별이란 가사의 주제가 특히 대중적 정서에 부합했던 이유는 먼저 분단과 6․25로 인해 피난 온 이산가족들이 많아서 그랬다고 볼 수 있고, 또 60년대 이후 이농 현상과 더불어 도시화가 급속히 추진되는 가운데, 농촌이나 시골 출신들이 도시인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어렵고 고통스런 도시 속의 삭막한 현재의 삶이 부모나 가족의 보살핌에 의존했던 어린 시절을 실제와는 다른 정도로 안락했던 시절로 상상하도록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도시화된 생활이 지배적으로 된 지금과 비교해 보면,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정서에서 많은 변화가 빠르게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음악의 변모에서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듯이, 지난 3-40년의 시기는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제 우리사회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화된 자본주의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금의 기성세대에 속하는 40대 이상의 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시기의 급격한 변화에 어렵게, 어렵게 적응하면서 가족을 형성하고 가장으로서의 가부장적 위치를 지키고자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다고 보아도 그리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인물들의 인생유전과 70년대의 시대적 풍경과 대중적 취향 구조를 요즈음 90년대의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간의 정서적 격차는 상당하리라는 점을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이렇게도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무엇이 그렇게 크게 변했는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즉, 일하는 방식에서, 사람들과 관계 맺고 소통하는 방식에서, 교육 방식에서, 정치하는 방식에서 등 ― 얼마나 변했는가? 변동의 구조 및 패턴을 피상적인 변화들과 분명히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 무엇이 변했을까? 이 질문은 개인적으로 90년대 초반 신세대 담론이 매스컴에 등장하고 새로운 문화비평들이 대두할 초기부터 계속 갖고 있었던 것으로 명확하게 답해지지 않은 질문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제는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대중들의 정서에 호소하는 대중음악들이 요즈음에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도 유통되지도 않고 있다. 또한, 요즘의 대중가요들의 가사 역시 개인적인 신변을 산문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깊은 생각 없이 흘려버릴 수 있는 단순한 의미를 담고 있고, 기계적인 빠른 박자와 반복적인 리듬을 강하게 드러내는 청소년 댄스뮤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본식 트로트나 서양의 포크송과 같이 기성세대가 즐기던 가요들은 대중 매체를 통해서는 더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까지 크게 축소 편성되어 방송되고 있는 실정이다. 왜 그렇게 기성세대의 음악이 그토록 주변화 되었고, 사회의 주변부에 속하는 대중들만이, 시외버스나 효도 관광버스, 가판대나 싸구려 술집, 퇴폐적이라고 비판받는 댄스홀 등 주변적인 매체들을 통해서만 향유되고 있는 것일까? 기성세대에 속하는 대중들의 취향이 획일적으로 변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다. 대중음악 수용자와 창작자들의 취향 탓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아도르노가 말하듯이, 대중음악의 창작은 예술적인 탁월성 혹은 미학적 비판성은 거의 없는 가운데, 한결같이 익숙한 리듬의 모방과 스타일들의 혼합 혹은 변형에 기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표준화된 상품생산에 불과하다. 흔히 민중가요나 민중문화 일반에 대한 대중들의 기피를 대중 문화 상품들과 비교하면서, 대중문화에 훨씬 못 미치지 민중문화의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다 미적 탁월성을 갖고, 의식성 있는 리얼리스틱한 작품의 생산을 강조하는가 하면, 이와는 정반대로 대중문화 형식의 모방을 추구하면서 독자적이고, 대량적인 생산, 유통체계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성 자체 만으론 표현형식 문제에 대해 판단하기 곤란할 것이다. 대중적 정서 혹은 취향 자체를 고정된 불변요소로 주어진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며, 동일한 정서가 얼마든지 다른 표현형식을 취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 근원적이 이유에 주목해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아도르노는 대중들의 익숙함에 대한 향수 혹은 대리만족이나 불안 및 의존성이라는 대중들의 정서적 상태가 대중음악의 대중성 확보에서 핵심적인 이유라고 보았다.
대중성 자체만을 강조하고 그것에 표현을 종속시키는 방식의 접근은 지나치게 도식적이며, 관념론적이다. 또한, 설명되어야 할 대중성을 근저의 이유들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어야할 현상들을 추수하는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그러면, 무엇이 대중문화에 대중성을 부여하는가?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대중들은 대중문화를 기분전환(diversions)이나 주의분산(distractions), 재미(amusements) 혹은 오락(entertainments)으로서 향유한다. 이러한 오락이나 비몰입에 대한 갈망은 일상의 힘든 노동과 책임과 같은 축에 있지만, 반대의 가치를 갖는 사항들이다. 곧, 대중문화의 대중성은 일상생활의 부담과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도피 경향으로부터 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란을 빠짐없이 챙겨보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보이듯이, 자본주의적 일상의 짓누르는 무게를 지탱하기 힘든데서 오는 그러한 도피 경향은 체념과 순종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산출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문화산업과 정신적 생산을 통제하는 지식인들과 문화상품의 생산자들의 갖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편으로는, 대중문화의 이해에는 그 사회의 민중들이 처한 사회 경제적인 삶의 조건과 그것의 변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둘째로, 첫째와 관련되지만, 더욱 중요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매스 미디어, 비디오, 카세트 등 정보통신 기술을 적용한 문화매체 생산과 유통으로 대변되는 문화산업의 발달과 이들에 의한 문화상품 생산과정 및 시장의 통제가 대중문화의 대중성을 설명하는데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 상품의 수용자들, 즉 문화상품의 시장을 강조하면서 문화상품의 주요 소비자인 청소년층에 초점을 두고, 우리사회 부모들의 소외된 과도한 노동시간과 빗나간 자식 사랑으로 특정한 문화상품의 생산과 유통, 대중성 등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인한 피로와 노동과정에서의 소외가 가족 내로 전위된 것으로서, 소통이 단절되고 황폐화된 가족의 모습과 청소년 소비문화를 연결시키거나, 반-권위주의적인 청소년 세대의 동아리 의식 및 세대 문제 등과 연결시켜서 더 상세하게 사회학적이며, 문화이론적으로 수용자의 창조적(?) 수용에 초점을 두고 ‘좀 색다르게(?)’ 분석할 여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러한 접근이 지닌 피상성과 관념성을 넘어서서, 신자유주의로 특징 지워지는 현 시기 정치 경제적 맥락에서 문화의 산업화 경향과 대중들의 정서와 일상에 대한 통제라는 진부하면서도 기본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연구될 필요가 있다.


3. 문화의 산업화와 문화생산자

대중들의 문화적 취향은 역사 사회적 과정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변화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과거와 두드러지게 달라진 점은 정보통신 기술 발전과 미디어 산업의 발달로 인하여 대중들의 문화향유가 주로 위성방송, 케이블 TV나 음반, 디스크 등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을 적용한 매체들을 매개로 이루어지고, 대규모로 생산되는 문화상품들의 유통채널에 의해 통제된다는 점일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40 년대부터 문화산업의 발달과 미디어의 대중적 감성의 조작을 경계하는 논의가 있었고, 80년 대들어서는 문화산업 영역에 속한 대규모 기업집단들의 흡수합병 및 계열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실정이다. 참고로 한겨레신문 2000. 9. 25일자 23면에서는 ‘유럽통신공룡 “먹거나 먹히거나”’라는 기사에서 다음 사냥터가 문화산업의 공략에 무방비 상태인 아시아일 것이라는 내용을 싣고 있다.
90년대 들어서 우리 사회에서도 잉여의 투자처를 찾아 헤매던 대기업들이 정보통신기술 분야와 문화산업에 경쟁적으로 투자하고 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기술표준 설정을 둘러싸고 자본분파들간의 노골적인 경쟁이 가시화 되고 있다. 또한 국민의 세금으로 국가에 의해 조성되고 대규모로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진 정보통신 설비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공공부문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민영화 과정에서 정치권력과 자본의 공모와 자본분파들의 합종연횡과 격렬한 사활을 건 이익선점 투쟁을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남아도는 돈 다발들이 고 수익을 노리며 주식과 화폐 시장으로, 문화 시장으로 떠돌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자본의 흐름은 정보통신 기술로 인해 확장된 시장과 기회를 이미 개발된 기술을 이용해서 초과 이윤을 향유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경제 이데올로기가 민영화/ 사유화 조치 등 경제정책들로 가시화 되면서 이제 우리 사회도 초국적 거대 문화자본들의 전쟁터로 되어 가는 조짐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앞서 언급한 대중문화(특히 음악)의 소비패턴 변화의 중요한 한 측면이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하면서도 단순한 이유는 대중음악과 관계된 시장 때문이다. 시장에서의 성공 혹은 자본의 가치증식이란 공리가 대중들의 문화적 향유를 원격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언급해 보자면, 첫째로, 음반이나 영화필름을 포함하여 독립 제작된 방송프로그램 등 주요 문화상품의 유통을 폴리그램이나 포노그램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필립스사와 같은 초국적 기업을 포함한 주요 대기업들이 수익성과 위험 극소화의 원칙아래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스타의 작품과 기존에 성공한 작품의 모방이 아니면 아예 유통 불가능한 실정 때문일 것이고, 둘째는, 케이블 TV와 민영 방송사는 말할 것도 없고, 공영 TV나 라디오와 같이 공익성을 대변한다는 대중 매체들 조차 시청률과 광고수입, 그리고 정치권력의 항상적인 모니터와 통제 아래 놓여 있어서 특정한 성향의 문화상품들은 심사를 통해 배제하거나 자기 검열적인 방송기피로 인해서 그러하며, 또한 일부 문화생산자들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뒤틀린 자기-정당화로서 작동하고 있는 매체 이데올로기와 그 조직적 장치들 그리고 그 속에서 혹은 그와 관계 맺는 가운데 창작에 종사하는 문화적 생산자들의 예술과 창작의 자유라는 문화생산 실천 이데올로기들이 타협과 갈등의 방식으로 공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지적 생산 수단을 둘러싼 통제형태는 주로 상품 생산이란 형태를 취하는 방향으로 발달하였다. 이런 모습은 과거의 지적-문화적 생산 양식과는 아주 두드러지게 다른 문화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비문화적 물질적 생산양식과 관련된 “정신적 생산수단의 통제”에서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문화상품의 생산은 물질적 생산 자체의 일부로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확장 법칙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갈등하는 가운데 점차적으로 포섭되어 가고 있는 부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산업화와 같이 역사적 국면에 따른 “정신적 생산수단의 통제”의 분석과 특정 사회구성체에서 생산양식들 사이의 투쟁과 갈등의 모순적 양상을 구체적인 노동과정과 산업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컨대, 정신적 생산이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으로서 매스 미디어와 이데올로기적 생산의 실제적 형태로서 자본에 의해 포섭된 사회적 의사소통 양식에 그것이 갖는 시사점을 논리가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문화산업의 확장과정은 물질적 생산의 다른 영역과 전-자본주의적 형태의 경제조직의 포섭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경제 형태 하에 종속된 비경제적 활동의 포섭을 포함한다. 예컨대, 문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추구하는 니콜라스 간햄(N.Garnham)이 강조하듯이, 개인적 공예 생산(책)에서 독립 필름생산회사나 레코드 제작자와 같은 소집단에 이르는 기예적(artisanal) 노동조직 양식은 문화영역에 공통적이고 중요한 형태이다. 그런 잔여적 부문은 자본의 논리에 반대하는 투쟁의 초점이 되어왔고, 강력한 반-경제적 문화 이데올로기를 산출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작품의 대량복제 수단과 그것의 대량 배포 수단을 통제하는 한, 그런 장인적 조직은 자본의 직접생산 위험부담과 간접비 부담 없이 더 많은 착취가 가능한 이질적인 문화작품들의 생산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자본에 기능적이다. 또한 창작의 자유(creative freedom)라는 이데올로기는 자본에 의해 노동력을 분할하여 취약하게 만들거나 총 노동과정에 대한 전략적 계기들에 대한 통제력을 갖지 못하게 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매스 미디어 분석에서도 자본이 가치를 증식시키고, 성장하기 위해서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실제적인 미디어 생산과정을 이용하는지를 보아야하며, 당면하는 내적 과정의 모순이나 외적인 힘에 의해 부과되는 다양한 장애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자본축적을 위해선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결합해야만 상품생산과 잉여가치 실현이 가능하다. 상대적 잉여가치와 자본 사이의 경쟁에 기초한 충분히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이러한 성장과정은 더 많은 생산성의 증대와 더 넓은 시장을 요구한다. 역사적으로 정신적 생산 혹은 비물질적 생산 영역은 이 과정에서 중대한 장애였다. 매스 미디어 분야의 형태와 동학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장애의 극복 시도의 산물이고 다양한 성공과 실패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 고유한 모순적 성격이 있다. 그것은 문화산업에 속한 노동자들과 자본 사이의 갈등, 자본축적과 생산력 및 생산관계의 사회화 사이의 갈등, 상대적 잉여가치 추출 동기와 잉여가치 창출자로서 노동력 사이의 갈등, 이윤율 저하 경향으로 표현되는 모순 등이다. N. Garnham, “Contribution to a Political Economy of Mass Communication,” Media, Culture and Society, 1979, 1, 123-146.

또한, 문화 및 정보재화의 사용가치는 무한해서(소비로 파괴되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교환가치를 메기기 곤란하다. 이처럼 생산자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상품. 책, 그림, 모든 예술작품과 같이 시간간격을 두고 유통되거나, 강의와 같이 생산행위와 생산물을 분리 불가능한 경우는 제한된 규모로만 자본제적일 수 있다. 이러한 비생산적 지적생산 형태들은 문화적 생산물의 독특한 창작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적 종속시도와의 갈등과 모순을 야기하며, 저임 문화노동자에서 보이듯이, 아직도 전-자본제적 장인적 경제조직양식으로 운영되는 분야로부터 상대적 잉여가치를 얻는데 의존하고 있고, 문화분야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는 자본의 압력 증가 등의 모순들이 자동하고 있다. 이런 특수성은 카피라이트(저작권)나 유통채널에 대한 경제적인 통제(신문, 영화)를 통한 소비에의 접근 통제, 시간 조작을 통한 진부화 시도 혹은 빠르게 쇠퇴하는 정보 창출을 통해 재소비의 항상적인 욕구 창출(신문), 수용자를 광고업자에게 창출하고 포장 판매하는 것 등의 발전을 야기했다.
지금까지 개괄적이나마 문화산업의 기본성격과 문화산업의 주요한 모순들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모순들 뿐 아니라, 국가간의 문화전쟁이나 문화제국주의 문제 등 다양한 실천적, 이론적 검토와 개입이 요구되는 영역들이 널려 있다. 문화를 한가하게 문화 예술 상품들의 민주적 향유로 축소시켜 인식하거나 기호학적 비평이 난무하는 포스트모던한 분석이 특권적인 영역이라고 볼 수 는 없을 것 같다. 문화노동자들의 비참한 일상적 노동과정과 생활조건은 과연 어떤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현 시기 우리의 문화와 관련한 이론 및 실천적 개입 지점은 우리는 문화나 일상에 대한 다양한 차이들 그 자체를 몰역사, 몰이론, 탈맥락적으로 찬양하고 부각시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근저에서 그것들을 산출하는 물질적 과정들을 이해하고 그런 가운데,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실천의 제 양상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접합되는지에 대한 역사 구체적인 분석을 천착해 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한/노/정/연

2000-10-06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9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