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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푸틴정부의 대외정책의 기원과 전망

현장에서 미래를  제60호
백준기



러시아 푸틴 정부의 대외정책의 기원과 전망


백 준 기

한신대교수/국제관계학







1. 머리말


소연방이 해체되기 약 1년여 전인 1990년 11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보리스 옐찐은 소연방의 해체 후 신생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대외정책의 향방을 가름할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였다

“러시아는 새로운 제국의 중심이 되기를 열망하지 않는다 …  러시아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 온 만큼 다른 누구보다도 그러한 역할이 지니는 유해성을 잘 알고 있다 … 러시아가 이것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인가?... 역사는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민족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1)

그 진위나 결과적인 정책 수정과 관계없이 옐찐의 키예프 발언은 19세기이래 짜르 치하나 소비에트 시기의 러시아(소련) 대외정책 노선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푯대였던 대외정치적 ‘메시아 주의’에 대한 포기로 해석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대외정책에 대한 옐찐의 이러한 신사고는 1991년 12월 소연방이 해체되고 등장한 신생러시아 연방의 새로운 대외정책의 양대 축의 하나인 ‘친서구주의적 노선’의 근간을 이루게된다.

옐찐의 충실한 권력 승계자라 일컬어지는 블라지미르 푸틴은 2000년 1월 21세기 러시아의 새로운 대외정책 교서를 통해 ‘강대국 러시아의 부활’을 선언하였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제정 러시아나 소비에트 시기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대한 회복이나 기존의 이해관계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역사적 책무의 확인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엘찐의 키예프 발언과 푸틴의 교서 사이에는 시간이 말해주는 것 이상의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옐찐과 푸틴사이의 정치적 간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절인가 아니면 연속선상에 있는 것인가,   그동안 러시아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러한 의문의 해결에 일정정도 기여하고자하는 노력을 이 글에서 담고자 한다.



2. 옐찐 정부의 대외정책의 유산

       대서양주의와 유라시아주의(евразийство)


소비에트 연방해체 및 사회주의권의 붕괴과정에서 Post-Soviet의 신주체로서 탄생한 러시아 연방은 그 출범시기부터 대외정책의 재정립이라는 간단치 않은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끄레믈린에서 소연방 깃발이 내려지고 러시아 삼색기가 올라간 이래 약 6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러시아의 국가와 시민사회 영역 모두에서 대외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들이 진행되어 왔다.

신체제에 맞는 신 외교전략 수립 문제에 있어서 러시아 대외정책의 선결과제는 세계경제 질서의 변화에 조응하여 국내경제를 재편하고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진입하기 위해 유리한 대외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러시아는 대외정책노선에서 소비에트 시기의 이념적이고 ‘메시아적인 외교’ 요소를 배제시켜야 한다는 입장이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현재 세계의 경제적, 기술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의 역학관계는 러시아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적 수준에서 전력적 군사력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결정적인 변화를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며, 러시아가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가 하락되었다거나 지정학적 측면에서 심대한 것은 아니므로 멀지 않은 기간 내에 러시아의 국력은 회복될 수 있으며, 이후의 대외정책의 기본방향은 ‘전략과 가치’를 겸비한 ‘강한 국가’를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신생 러시아연방의 대외정책의 접근방법에 대한 스펙트럼상의 차이를 분류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러시아 학자들에 있어서 팀메르만2)의 경우 지정학적 개념을 중심에 두고 ‘유럽-대서양주의’, ‘유라시아주의’,‘대 러시아주의’로 분류하고 있고 아르바토프3)의 경우 지정학적인 정향을 염두에 두긴하지만 중심에 이데올로기적 정향과 강온에 따라 ‘급진자유주의적노선’, ‘온건자유주의적노선’, ‘온건보수적노선’, ‘강경민족주의적노선’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서구의 러시아 연구자들 중에서 S. 보일러드4)는 러시아의 외교정책 방향설정상의 혼란상을 러시아의 오랜 역사적 전통에서 찾고 있으며 그 혼란함에 걸맞게 대외정책의 접근태도에 있어서 다차원적인 균열간의 교차조합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대외정책 방향설정에 관한 러시아의 태도에는 세가지 차원의 주요균열 즉, 문명적 연계에 따른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간의 대립, 지리적 이해범위상의 차이에 따른 ‘지역적 역할’과 ‘세계적 역할’간의 갈등, 외부위협수준에 대한 인식상의 차이에 따른 ‘강경론’과 ‘온건론’의 대립 등이 존재하며 이러한 균열들은 서로 교차균열(cross-cutting cleavages)적 현상을 띤다는 것이다.

Z.브레진스키5)는 다른 관점에서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전략적 관점에 입각하여 소연방 해체 이후 러시아에게 대략 세가지의 ‘지정학적 옵션’이 존재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미국과의 ‘성숙한 전략적 파트너쉽’에 우선순위를 두는 입장,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근외지역’을 강조하는 입장, 유라시아에서의 미국의 우월적 지위를 견제하기 위한 ‘유라시아 반미동맹’의 입장 등이다.

이상의 견해들은 강조점이나 접근 측면에 따라 러시아 대외정책노선의 분석에 있어서 다양한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분석상의 논리적 연관관계를 상호 보완해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시도로 보여진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견해들을 수렴하고 논의의 분산성을 어느 정도 제한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관점과 지정학적 관점을 동시에 취하는 포괄적 접근 방법이 요청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러시아의 대외정책 접근방법 및 태도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 분석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주의’대 ‘슬라브주의’: ‘대서양주의’대 ‘유라시아주의’라는 분류개념이- 비록 각 정파간의 노선상의 미세한 상이점에 대한 분석에는 취약할지라도- 러시아 대외정책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핵심 코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정세 분석 및 대외정책 방향에 대한 인식상의 차이는 대외정책 수립에 있어서 갈등을 초래하였는데 이 갈등의 기저에는 ‘대서양주의’와 ‘유라시아주의’라는 두 견해가 위치해 있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논쟁은 짜르 치하 제정 러시아 시대에 존재했던 러시아 발전의 모델을 서유럽에서 찾으러 했던 ‘서구주의’와 슬라브적 전통의 독자성과 독자적 발전 가능성을 주장했던 ‘슬라브주의’간의 대립의 연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6)

양자간의 논의 차이와 동일한 흐름 내에서의 공통된 입장을 단순화해 보면 먼저, 대서양주의자들은 급진 개혁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세계체제의 재편기에 있어서 러시아의 선결적 이익은 ‘경제적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세계적 차원에서의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심화현상에 주목하고 서구와의 경제협력과 러시아 경제의 세계 자본주의 시장체제로의 편입, 그리고 ‘G 7의 G8화’를 위한 경제외교의 강화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한 더 나아가 서방으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졌고 서방선진국은 러시아의 자연스러운 동맹자라는 확신하에 EU와 NATO의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하길 했으며 미국과의 ‘평화를 위한 파트너쉽’형성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한바 있다.7)

유라시안주의자들은 ‘강대국 지위 유지’를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국가이익으로 간주한다. 이에 따르면 서방국가들과의 협력은 필요하나 러시아의 국가이익을 고려치 않은 협력관계는 지양해야 하며, 동방에서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러시아가 정치, 경제적 의미에서의 강대국 지위로의 복귀를 위해서는 ASEAN, NIES, 중국등 러시아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 있는 지역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유라시아주의자들 중 의회내 공산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은 서방의 위협이 감소하였다고는 하나 걸프전쟁이후 초강대국적 세계전략을 수립, 전개하고 있는 미국은 여전히 러시아에 있어서 경계의 대상이며, 향후 ‘남’과 ‘동’으로부터의 ‘영토적 요구’와 구사회주의체제의 동맹국들과 CIS 구성국가들로부터의 군사적 위협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핵 억지력 및 지역분쟁 해결용으로서의 재래식 전력과 CIS 집단방위체제 구축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8)

유라시아론자들은 서구의 발달된 기술 및 경제지원을 받기 위해서 서구 세계와의 평화적 공존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대서양론자들의 입장을 서구 편중적 정책이라고 반대하며 러시아의 지정학적, 그리고 역사적 특수성과 독자성에 입각하여 동방에서의 국가이익을 감안한 동방과 서방에 대한 균형정책을 주장한다.

90년대 초반에는 서구주의에 입각한 대서양주의 노선이 옐찐정부의 대외정책전반을 규정하는 기본전략이었다. 총선거를 통한 신생러시아연방의 제1대 두마가 출범하지 않은 상태에서 옐찐 정부의 전면적인 서구주의 노선에 조직적으로 대항할 만한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시민사회내에서도 서구주의/대서양주의 노선을 대체로 지지하고 있었다.9) 그러나 급진 개혁주의 그룹의 일방적인 서구주의 노선 추진은 조직적으로 아직 안정화되지 못하고 있던 범 개혁주의세력 전체에 대한 균열을 초래하였으며 이에 따라 옐찐은 친서방주의 정책에 대한 의회 및 국내정치세력들의 비판 및 국내외 정세를 고려하여 러시아 대외정책 개념과 방향 재정립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변화 움직임은 92년 가을 경에 이미 감지되어 당시 작업 중이던 외교정책초안에 기존의 서방 일변도의 협력 모색 노선에서 부분적으로 후퇴하여 러시아적 독자성 추구 필요성이라는 인식전환이 반영되었다. 이 초안에 기초하여 동년 12월 1일 향후 러시아연방 대외정책 개념을 정립한 ‘외교정책문서’를 발표하였다. 이 문서에 따르면 종래의 서구 일변도의 ‘원외정책’중심에서 구소련 지역 및 재정 러시아 세력권에 대한 이해관계를 사활적 이익에 준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근외정책’의 비중을 강화시킨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로써 옐찐정부의 대외정책의 주축인 ‘근외정책’과 ‘원외정책’간의 균형모색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3. NATO의 ‘동진정책’과 유라시아주의의 충돌

1993년과 1995년은 러시아 대외정책의 노선변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전환점이 된 해이다. 두 차례에 걸친 총선거에서 급진개혁주의 세력의 참패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계열의 승리는 대외정책노선을 둘러싼 기존의 논쟁들이 정치적으로 정리, 재편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두 번에 걸친 총선을 통하여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표현물인 급진적 서구주의 노선은 퇴조하고 유라시아주의로의 노선적 수렴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제 급진적 서구주의는 대외 정책의 스펙트럼상에 있어서 더 이상 의미있는 지형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며 ‘범 유라시아주의적 경향’이 대외정책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친 서구주의세력의 상당부분과 온건 자유주의세력 또한 온건한유라시아주의쪽에 몸을 의탁하였으며 공산주의계열이나 민족주의 계열은 유라시아강경노선을 지향하였다.

1993년은 러시아에 있어서 격변의 한 해였다. 신생 러시아 연방의 출범 이후 포스트 페레스트로이카의 주제였던 리포르마(개혁)의 범위와 속도를 둘러싸고 급진 개혁파와 온건 개혁파(보수파 포함)간의 노선갈등이 점증하였는데 1993년은 양자간의 갈등이 파국적으로 표출된 한 해였다. 또한 개혁 노선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이면에는 대통령과 의회간의 권력 분할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개혁노선과 권력구조 문제를 쟁점으로 한 이러한 의회와 대통령간의 대립은 ‘신헌법’10) 채택 문제로 비화되어, 급기야 93년 10월 대통령에 의해 의회의 해산 명령이 내려졌고 사태는 이에 대항한 의회의 의사당 점거 농성 및 무력 시위로 발전하였으며, 결국 대통령에 의해 의회 농성에 대한 무력 진압 명령이 내려짐으로써 소위 ‘벨르이 돔’사태의 막이 내려졌다.

93년 10월 사태 이후 치루어진 12월 국민투표와 총선거에서, 비록 대통령측의 헌법안이 국민투표로 통과되었으나 이를 대통령이 의회에 대해 최종 승리한 것으로 판단하기엔 무리였다. 왜냐하면 10월 사태에 대한 평가의 성격을 지닌 12월 총선거를 통해 여당이 선거에 참패하고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계열 등 보수세력들이 대거 의회에 진입하여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새로운 견제 구도가 형성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대통령에 의해 연방의회에 내려진 연두교서나 여러 문서들에 표현된 외교정책의 목적과 과제들은 대체로 비현실적이거나 무리한 점이 많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도 체첸지역에서의 전쟁 수행은 러시아의 대외 이미지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옐찐 대통령의 무리한 체첸전 수행은 1995년과 1996년 동안 국내적으로 심각한 비판과 반발에 봉착하였고 또 외국으로부터의 비난도 정권의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체첸전 수행이라는 무력적 강제 방식을 통해 러시아의 ‘국가성’을 공고히 하려는 시도가 파국적이고 또 전도 무망하며,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러시아의 실용주의자들은 희생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빠른 시일내 체첸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무력외적 방식을 채택하려 강구하였으나 이들이 의도한 바와 같은 결과를 얻는 데 실패하여 전쟁은 97년까지 지속되었다.

1994~1995년동안 외교 분야에서의 러시아의 곤경과 약세는 두드러졌다. 러시아는 체첸전선에서 뿐만 아니라 원외지역의 전 외교전선에서 후퇴를 경험하였다. 특히 서유럽 외교전선에서의 퇴각이 두드러졌는데 미국과 NATO 국가들의 강력하고 계획적인 압박에 의한 러시아의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의 양보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후퇴 현상은 CIS 내부에서도 출현하였다. CIS 내부의 국가간 통합 과정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CIS 국가들은 그들의 경제 발전과 부흥 그리고 국익에 대한 ‘지주’를 근외지역이 아닌 원외지역 즉 러시아 영역 밖에서 찾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의 흐름에 직면하여 끄레믈린은 그간의 러시아의 외교분야에서의 실패를 인정하였다. 1995년 9월 8일 기자회견에서 옐찐 대통령은 처음으로 외무성의 업무 수행에 대해 신랄히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동년 12월 총선결과(공산당이 다수당)에 주목하여 친서방 외교 노선의 대변자인 안드레이 꼬지레프를 외무장관에서 경질하였다.

1995년 12월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의 외무장관 임명으로 신생 러시아의 대외정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1995년 12월 의회선거에서 또다시 여당이 참패하고 공산당이 다수당이 된 국내 정치적 조건하에서 새로 등장한 프리마코프 외교팀은 대서방 외교의 중심에 NATO 확장에 대한 경계 방침, 즉 ‘반 NATO 정책’을 위치지웠다. 1996년 이후 현재까지 러시아 외교 정책의 중심에는 ‘NATO의 동진’ 저지와 이를 위하여 ‘동방 정책’을 통한 견제, 특히 극동지역에서의 전략적 동반 관게 수립 - 특히 중국과의 외교관계 재정립-을 통하여 유럽에서의 지정학적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아태 지역에서의 신질서 형성을 기반으로 실질적인 다극체제 수립이라는 21세기 신국제질서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1996년 6월 옐찐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후로 러시아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오른 NATO 확대 저지 외교는 1997년 5월 27일 NATO 회원 가입 문제에 대한 미-러간의 기본 합의를 다룬 ‘파리문서’의 서명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NATO와 러시아간 협상의 제 1단계의 결과물인 ‘파리합의’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정파별로 다양하며 대립적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나토문제가 향후 국내정치 영역에서 정파간의 또는 대통령과 의회간의 갈등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집 러시아’로 대표되는 ‘친옐찐’ 세력은 ‘파리합의’를 ‘모스크바의 외교적 승리’ 또는 ‘러시아-나토 관계의 새로운 단계 진입’ 등으로 평가하고, 외교적으로 러시아가 승리하였음 ― 구체적으로 말하면 옐찐 대통령이 승리한 것으로 해석 ― 을 주장한다.

‘야블린스키 블록’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세력은 대체로 ‘파리합의’가 러시아와 NATO 모두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는데 일치하며 이들중 비판적 자유주의 세력은 NATO가 지속적으로 확대하려 할 경우 러시아가 더 이상 이에 동의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계열 및 민주주의 계열은 ‘파리문서’를 옐찐 외교 정책 실패의 상징, 즉 ‘서방에의 투항’의 상징으로 비판하였다. 각 정치 세력들간이 ‘파리합의’에 대한 평가는 이렇듯 다양하고 상호 대립적인 성격을 띠지만, 일반적으로 NATO의 팽창을 러시아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따라서 정치세력들간의 입장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옐찐 정부가 ‘반 NATO’ 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NATO의 동진 위협에 대한 ‘선천적인 위기 의식’ 공유에 기인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NATO 확대에 대한 반대 의식은 폴란드, 헝가리, 체코가 제 1단계로 NATO에 가입한 뒤 이 파도가 구소련 지역인 발트해 연안국가들과 우크라이나로 몰려들 것이라는 우려에 근거한 것이다.11)

평면적으로 볼 때, 서방의 시장 민주주의의 정치. 군사적 구조물의 성격을 지닌 NATO의 확장이 현재 시장 민주주의적 개조와 서구적 선진 문명 세계로의 편입 경로를 밟고 있는 러시아에게 왜 위협적인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이다. 냉전 시대의 정치․군사적 대립이 자본주의 세계의 사적 소유의 불가침성과 사회주의 세계의 사적 소유의 국유화 명제간의 대립에 근거한 것이라는 논리에 기반할 때 NATO의 팽창은 사회적, 국가적 소유 진영으로의 사적 소유의 진격으로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경제 제도에는 이러한 토대적 차별성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에서 러시아의 NATO 확장 반대 이유는 어떤 논리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것일까. 이는 신생 러시아의 5년이라는 짧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구 소연방 구성 공화국들과 러시아의 새로운 관계로부터, 또한 러시아 정치 지도자들의 전통주의적 외교관으로부터, 그리고 러시아의 국내 정치 갈등의 논리로부터 도출되어진다.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소연방의 해체가 명확히 연구. 검토되거나 계획에 의한 사태가 아니었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사태’의 이러한 ‘우연성’ 또는 ‘돌발성’에 의해 당시 모스크바가 이후 동유럽 국가들과 소연방 해체후의 신생 국가들의 ‘중립적 지위’ 보장을 놓고 서방과의 법적 강제력을 지닌 협상을 체결할 시간을 상실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고르바쵸프 통치기의 초기에 정치 엘리트들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동시 해산 문제와 독일 통일에 대한 교환 조건으로 통일 독일에 중립적 지위를 부여하는 문제가 집중 토론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모스크바에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만한 정치적 의지와 전략적 통찰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소연방과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자체 붕괴로 말미암아 서방과 동유럽에게는 러시아에 대해 지켜야 할 아무런 채무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1991 ― 1992년 사이에 옐찐의 외교 또한 러시아 공화국내의 구성 주체들 ― 자치 공화국, 자치주 등-과의 주권 문제를 중심으로 한 쌍무협정 체결과 소연방 구성 공화국들과의 연방 해체후의 관계 모색에 몰두하였다. 이렇듯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동안 러시아는 유럽에서 새로운 안전보장 체제를 수립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다. 또한 일정 기간동안 동유럽 국가들도 모스크바로부터의 자주성 회복과 동시에 ‘강대국’과의 안보 전략적 동맹에 있어서 방향을 상실하게 되어 동유럽에서는 지정학적 진공 상태가 초래되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진공상태는 동유럽과 발틱연안 국가들이 서방과의 경제적, 정치군사적 통합 의향을 밝히면서 종결되었고 구 소연방 구성 공화국들은 러시아 주도하에 CIS를 결성하는 것으로 이러한 움직임에 반응하였다.

신생 러시아의 국내 정세의 불안 또한 동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NATO로의 편입 열망을 부추긴 요소로 작용하였다. 동구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동유럽의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의 국가들과 발틱 3개국 등에서 정치. 경제적 개혁은 비교적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 반면에 신생 러시아는 출범 초기부터 사회 경제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태에서 1993년 10월 대통령과 의회간의 무력 충돌 사건과 체첸과의 전쟁(1994~1996년)등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지역 불안정의 원천이자 지역 안보의 위협 요소로 평가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신생 러시아를 과거에 자신들의 시장 지향적 전망을 박탈한 구소련과 일치시키는 경향이 팽배해졌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의 보호처로 서방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끝내는 NATO 가입 요청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논리 반복적으로 러시아의 대 NATO 경계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소연방 해체후의 ‘이념적 공백’ 현상 또한 NATO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소연방이 와해되고 러시아에서 공산 정권이 소멸되자 신생 러시아 사회에서는 기존의 공산주의를 대치할 지배적 이념이 미처 성립되지 못한 이념적 공백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등장하고 있던 자유 민주주의적 언술은 옐찐의 개혁진영에 의해 일방적인 목적으로, 즉 좌파 세력에 권력을 불허하기 위한 유일한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며 아직 시민 대중이나 새로운 정치 리더들의 의식속에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옐찐을 비롯한 행정부의 고급 관료들은 과거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교육, 훈련받은 관계로 기존의 전통주의적 세계관, 즉 냉전시대의 ‘적과 동지’의 이분법적 개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경향이 잔존하고 있었으며, 이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NATO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이상의 원인들과 더불어 반 NATO 정책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꼬지레프 외교팀의 외교적 실패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 꼬지레프 전 외무장관은 러시아와 서방간의 균형있는 관계 설정에 대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꼬지레프는 미국과 서유럽과의 관계에 우선 순위를 둠으로써 CIS와 동유럽, 중동, 그리고 아시아 지역국가들과의 관계를 부차적인 것으로 위치지웠다. 꼬지레프의 이러한 서방 편향적 노선은 좌파 정치세력뿐 아니라 자유주의적 반대 세력에 의해서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포기’ 한 것으로 비난되어졌다. 이에 따라 1996년 대통령 선거 전야에 야블린스키가 12%, 공산당의 쥬가노프가 20%인데 비해 옐찐의 지지율은 최소치 -8%, 심지어는 5%대까지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12) 따라서 옐찐은 꼬지레프를 경질하고 프리마코프를 외무부의 새로운 사령탑으로 임명하였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외교정책 문제가 주이슈로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프리마코프가 야당 세력에게 납득할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프리마코프는 자신의 전임자의 외교노선에서 벗어나 서방과의 관계를 수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진로 수정의 근거가 된 것은 러시아의 국익 보호 즉, ‘NATO의 팽창 위협으로부터 러시아의 보호와 러시아의 초강대국으로의 복귀’라는 명분이었다.

1994년 이래로 러시아 의회내의 좌에서 우에 이르는 거의 모든 정치세력은 옐찐 정부에 강력한 ‘반 NATO 정책’ 실행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공산계열뿐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인 쥐리놉스키의 자유민주당 또한 NATO의 확장을 러시아의 점증하는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의회내 친정부적 정치 분파 ― 실질적으로 여당 ― 인 ‘우리집 러시아’ 조차도 내부적으로 NATO 확장이 서구로부터 러시아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으로 평가하고 이에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민주주의 정파인 ‘야블로꼬’ 또한 NATO의 팽창을 동유럽에서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해석하고 NATO 팽창시 러시아의 ‘상실’을 최소화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렇듯 의회내 정치적 스펙트럼의 좌에서 우 거의 모든 부분을 포함하는 정치세력들이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반 NATO 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13) 1995년초까지 러시아 외교 프로그램엔 NATO의 확장에 대한 구체적이거나 특별한 저지 계획이 들어 있지는 않았다. 당시까지 러시아 외교팀은 대외 정책의 주요 방향으로 서방과의 정치. 군사적 분야에서의 협력 증진을 위한 ‘평화를 위한 동반자 프로그램’을 모색하고 있었다. 1995년 3월 옐찐은 대외정책 관련 기관들에게 NATO의 확장이 러시아 안보상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를 연구 검토하도록 지시하면서부터 러시아의 대 NATO 정책은 그 방향 전환의 계기가 마련되어졌다. 당시까지의 러시아의 국내외 정치적 경험으로 전 외무장관 꼬지레프가 ‘평화를 위한 동반자 프로그램’을 강행하기에는 러시아내에서 정치적으로 취약함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신임 외무장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는 1995년 12월부터 NATO의 확장에 대한 적극적인 저지 노선을 견지하게 되었다.

NATO 확대 문제에 대한 서방과의 협의 초기 단계에서 러시아는 어떤 형태로든지 NATO에의 신입회원 국가 허용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대하며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모스크바는 ‘적절한 조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러시아의 서방에 대한 견제 정책 또는 반서방 정책의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암시하면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 러시아가 핵 강국이라는 점 강조 근외정책의 비중을 높여 CIS와의 대안적 정치. 군사적 블록 형성을 구체화 적극적인 동방 정책 추진 ― 특히 중국, 이란, 이라크, 인도등과의 우호 협력 강화와 무기공여 등 전략 핵무기 감축 2차 협정(START-II) 인준 거부 고려 유럽에 있어서의 재래식 무기 감축 협상에 대한 재고 등.

1996년 3월 러시아와 미국간의 헬싱키 회담에서 러시아가 NATO의 확장을 저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전술을 수정함으로써 대 NATO 협상은 다음 단계로 들어간다. 원칙적으로 NATO 확대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러시아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된다면 폴란드, 체코, 헝가리의 NATO 가입 허용에 타협할 의사가 있음을 시사하였다:

NATO의 핵전력을 새회원국의 국경에 배치하지 말 것 러시아의 국익에 관계되는 NATO의 기능 문제들에 대한 러시아의 거부권 보장과 러시아의 이해 존중 구소련 구성 공화국들에 대한 NATO 가입 불허용 NATO 회원국들의 의회에서 비준되고 러시아에 대한 NATO의 의무를 내용에 포함하는 러시아와 NATO간의 법적 구속력을 지닌 조약을 체결할 것 등.

이러한 전술에 입각하여 러시아는 헬싱키 정상회담 직후 NATO와의 상호관계에 대한 ‘기본 합의서’에 대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1997년에 들어서면서 러시아는 NATO 회원국들간의 알력 관계를 활용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먼저 러시아 정부는 독일의 콜 총리에 대한 대통령 차원의 사적이고 내밀한 접촉들을 시도하였으나 독일 정부가 NATO의 확대에 대한 확고한 지지의사를 표명하자 방향을 프랑스로 돌렸다. 러시아의 의도는 당시 군사동맹 결성 문제에 대한 미국과 프랑스간의 마찰과 NATO에서의 프랑스의 중요한 비중을 활용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NATO 회원국들이 러시아와 서방간의 갈등 해결을 위한 파리 5자회담(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에 대한 프랑스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자, 결국 러시아는 NATO 확장 문제에 대한 합의 모색을 위해 미국과의 협의를 적극화하게 되었다. ‘기본합의서’ 서명 직전인 1997년 1/4분기동안 러시아는 적극적인 ‘강대국 외교’를 폈다. 이 기간동안 독일, 프랑스, 중국, 이란, 이스라엘, CIS, NATO, IMF, 세계 은행 등의 지도자들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모스크바 당국은 이들에게 ‘러시아는 여전히 강대국이며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문제들의 해결시에 러시아의 말에 귀 기울어야함’을 일깨우는데 주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지적해야 하는 것은 반 NATO 외교활동을 지속해 오면서 모스크바 당국은 서방과의 관계 악화를 원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프리마코프 외무장관은 구 소연방 구성 공화국들의 NATO 가입 불허용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1996년 여름에 이미 동유럽 국가들의 NATO 가입을 원칙적으로 허용할 수도 있음을 워싱턴 당국에 시사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미국 또한 NATO 확대 저지 캠페인 등과 같은 러시아의 정책들을 러시아의 고유한 외교 영역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견해로 화답하였다.

결국, 러시아는 1997년 5월 파리에서 ‘기본 합의서’에 서명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의 NATO 확대 동의와 서방의 양보를 맞교환 하였던 것이다. 즉 러시아의 G7가입, WTO가입, 세계은행과 IMF금융지원 등의 문제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동유럽 일부 국가들의 NATO 가입에 동의를 하였던 것이다.14)

NATO와의 협상 초기 단계에서 러시아 외교가 견지했던 목적 ― ‘NATO 동진 저지’ ― 을 달성하지 못한 채 이처럼 서둘러 ‘기본 합의서’에 서명하게된 데에는 제 1부총리 추바이스 그룹의 옐찐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그 원인으로 지적된다. 추바이스를 비롯한 러시아의 개혁 주의자들에겐 덴버에서 열리는 G7회담에 앞서 서방과의 관계에 있어서 분위기를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서방의 금융기구들로부터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서도 분위기 전환이 절실한 것으로 보였다. 또한 국내 정치적 시각으로 보면, 추바이스 내각의 입장에서는 국방예산 동결을 결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서방으로부터의 위협 증가를 주장하며 군사력 감축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정치적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서 NATO와의 협정 체결이 필수적인 것으로 판단되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NATO와의 기본 합의서 체결에 대해 국내 정치세력들 사이엔 외교 정책 실패로 규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으며 이는 이후 동방정책 추진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 ― 특히 대중국외교 강화 ― 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4. 푸틴정부의 대외정책전망: 새로운 체스게임의 시작?


새로운 밀레니엄 맞이로 전세계가 들떠있던 2000년 벽두, 러시아 연방 대통령 권한대행인 블라지미르 푸틴은 향후 러시아의 국가안보개념과 관련하여 짧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은 대통령령(Указ #24; 1/10일자)을 발하였다15). 이것은 옐찐의 집권말기인 1999년 11월의 대통령령 ‘독립적(자주적)군사정책개관’(‘Независимое Военное Обозрение’)의 개념과 외관상 유사하지만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기존의 러시아 국가안보개념의 추상성에서 탈피하여 구체적이고 명확한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국가안보개념에 대한 ‘신조서’는 아니지만 1997년 11월에 수립된 국가안보개념에 대한 실질적인 변경이라는데 의견을 달리하는 분석가들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푸틴의 새로운 국가안보개념 수립과 이에 따른 대외정책 수정 시도는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 직후인 4월 ‘신군사 독트린’발표16)로 나타났으며 의회는 이에 대해 정치적 스펙트럼을 막론하고 압도적인 지지로 비준하였다.

옐찐정부 시기의 국가안보개념과 대외정책개념(93년, 97년)과 비교시, 푸틴정부의 군사독트린및 대외정책개념은 국내 및 국제정치환경에 있어서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재인식’에 기반하고 있다는데 기존의 개념인식과의 차별성이 존재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1997년 수립되어 이후 시기 옐친정부의 대외전략적사고의 중심을 차지하고있던 대외정책수행상의 기본전제는 냉전시대의 양극체제에서 ‘실질적인 다극체제로의 전환’이었다. 다시 말하면, 냉전시기의 대립국가들간의 새로운 관계정립에 있어서 주요한 과제는 ‘다극체제로의 전환’이며 이것은 냉전해체이후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 약화를 경험하고 있던 당시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기도 하였는데, ‘실질적인’ 다극체제에 대한 강조는 미국의 세계전략에서의 압도적인 지위에 대한 견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보여주는 공허함이나 추상성을 감안하면 당시 러시아가 제안하고 또 자신의 대외정책수행에 있어서의 기본전제로 삼았던 ‘다극체제의 형성’은 중국이나 EU회원국들의 원칙적이고 명분적인 공감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치 지형상에서 현실적인 힘을 갖기엔 역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선택’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선택은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이와 비교할 때 푸틴의 구상은 기존의 대외정책의 기본전제가 ‘다극체제형성’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오히려 러시아의 전략적 선택의 폭을 협소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 것으로 현실 국제정치지형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두개의 상호 배타적인 경향간의 투쟁’양태가 표출되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하나의 경향은 ‘다극체제형성’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재편’경향인데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중대한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미국을 정점으로 한 세력 ― 예를 들면, NATO-이 지배적인 힘을 구사하고 있으며 해결방향 또한 군사력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국제정치지형의 안정성을 장기적으로 약화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더불어 러시아의 유라시아지역에의 이해관계라는 국익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자 직접적으로는 러시아의 국가안보에 대한 결정적인 위협요소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이 푸틴정부의 전략수정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독트린에서 주목할만한 점 중의 하나는 군사 및 안보분야에서의 개념변화이다. 기존의 군사독트린이나 국가안보개념에서 중심개념으로 사용하던 용어인 ‘оборонный’(방어적)라는 용어가 ‘военный’(군사적)로 대체된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방어력/방위력’이라는 수동적 의미를 탈피하여 ‘군사력’이라는 적극적인 용어로의 의식적인 전환을 뜻하며 더 나아가 용어상의 전환이 지니는 대외적 효과 이상의 실제적인 대외정책 및 군사전략상의 전환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군사개념으로의 전환을 내용적으로 보장해줄 실질적인 대안의 한 예로서 국가안보회의의 주도로 진행 중인 우주항공분야 및 차세대 전투기 개발 추진계획을 들 수 있다.

신군사독트린과 관련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구국가들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용은 핵무기 사용에 관한 것이다. 1997년 국가안보조서에서는 ‘러시아의 주권위협 발생시’라는 전제하에서 핵무기에 대한 사용을 제한하는 것이었는데 비해 푸틴정부의 신 군사독트린에서는 ‘자국의 국민의 안전을 해친다고 판단되는 경우 상대국이 비록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해결을 위한 다른 효과적인 수단이 존재하지 않을 때 핵무기를 사용해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수호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천명함으로써 국가안보 및 군사전략분야에서 한층 더 강경한 입장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핵무기의 ‘억지력’이라는 전략적 가치에 대한 논란 뿐 만 아니라 전술적 가치의 효용성에 대한 회의를 감안할 때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의 현실적 가능성은 거의 전무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핵무기의 전략적 및 전술적 가치의 효용성에 대한 회의는 러시아 정치가 및 군사 전문가들도 잘 알고 있다 ―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이러한 강경노선을 국가의 공식적인 정책, 전략으로 채택하고 문서화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불량국가’(rogue state)도 아닌 국제정치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요행위자이며 19세기 제정 러시아 이래 소비에트 시기를 거치면서 세계정치에 있어서 강대국 외교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러시아의 이러한 입장전환에 대해 좀더 신중하고 세밀한 해석이 요청된다. 1997년의 경우, 군사분야가 주는 경제부문에의 하중이 크다는 인식과 외부로부터의 침략위험요소가 부재하다는 인식이 정책입안자들의 전략적 판단의 기저에 작용하여 수동적인 군사전략과 대외정책수립으로 귀결되었다면 현재적 관점에서는 과거와 비교시 군사영역에서의 위협의 범위와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는 정세인식하에 전략적 수정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세 인식 변화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NATO의 전략수정을 들 수 있는데 멀게는 앞서 언급한 NATO의 ‘동진정책’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깝게는 1999년 봄 미국이 주도한 코소보에 대한 NATO의 무력개입이 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가 러시아의 국가성 유지의 아킬레스건인 체첸문제에 대한 외부의 개입으로 연계될 가능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NATO의 전략수정은 러시아에 있어서 사활적인 의미는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푸틴 정부의 대외정책 노선의 전환이 웅변해 주는 것은 기존의 미국과의 ‘평화를 위한 파트너쉽’이 러시아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더 이상 의미있는 전략으로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푸틴정부의 러시아는 이제 새로운‘체스게임’을 시작하려하고 있다. 냉전 시기와 같이 세계전체를 놓고 벌이는 게임은 아니지만 4월에 수립된 새로운 대외정책노선에서 표현되듯이 탈냉전 이후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재편에 맞서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자국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중첩된 유라시아 지역을 지켜내기 위한, Z. 브레진스키의 은유적 표현을 역으로 적용할 수 있는 ‘거대한 체스’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유라시아 지역에 대한 체스 게임의 주요 상대자를 고를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의 여지에 대한 미국의 판단과는 별개로 러시아는 그들의 ‘수’를 선택하고 있다. 탈냉전 이후 게임의 여러 참가자중의 하나로 전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참가자들이 ‘여럿’(다극체제형성)이라는데 그리고 여전히 게임의 ‘판’이 ‘세계’(세계질서재편)라는데 위안을 삼고 있던 러시아는 점차 게임을 주도하는 참여자가 단수이고 게임의 ‘판’ 또한 자신의 과거 ‘관할구역’이던 동유럽과 더 나아가 ‘집안’인 유라시아였다는 사실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러시아는 ‘서구주의’와 ‘평화적 파트너쉽’이라는 낭만적 환상에서 벗어나 게임의 주요행위자로의 복귀를 시도하고 있다.

푸틴정부의 새로운 대외정책 노선은 과거 옐찐정부의 노선에 대해 계승과 단절이라는 두가지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푸틴의 집권배경이 지니는 이중성 ― 하나는 옐찐이 지목한 후계자(권한대행)라는 한계와 이후 자력으로 대선을 통해 결선투표없이 1차 투표에서 50%이상의 지지로 당선되었다는 점 ― 이 그의 대외정책노선에 있어서 ‘계승과 단절’이라는 형식적으로 볼 때 서로 대치되는 내용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국내 및 국제적 상황변화에 대한 정책 입안자들의 정세인식 변화와 시민사회의 압력이 일정한 시차를 두고 러시아의 대외정책 수정에 작용하여 특정시점 ― 예를 들어 1999년 ― 에 있어서 기존에 쌓여 응축된 특정한 계기들 ― 예를 들어 NATO의 코소보 개입과 체첸문제의 심화 ―을 통해 질적인 변화를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NATO의 전략 수정을 접하면서 러시아의 엘리트들은 NATO의 동진이 동유럽에서 멈추지 않고 유라시아 지역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니게되었고 CIS소속 국가들의 독립성을 공고히 하는데 미국이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의구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게 되었다. 소연방 해체 초기에 러시아의 엘리트들은 유라시아지역에서 러시아가 영향력과 중심적인 역할을 회복하는 것을 지원해 줄 것으로 확신했다. 왜냐하면 CIS지역과 거의 일치하는 유라시아지역은 러시아에 있어서 18세기 이래로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영토’로서 ― 19세기 비엔나 체제와 20세기 두차례의 세계대전이 결과한 새로운 국제질서재편에도 변함없이 영토적 배타성을 유지하던 ―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기에 러시아로서는 ‘평화를 위한 파트너쉽’ 등 미국의 탈냉전 프로그램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과정을 통해 해당 지역에 대한 전통적인 배타적 이해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지녔던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이러한 러시아의 낙관이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탈냉전 이후 미국의 유라시아 지역에 대한 전략이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고립 또는 영향력의 현저한 축소라는 러시아의 국익과 관련하여 심각히 우려할 만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해졌다는 사실은 앞서 살펴본 대로이다.

옐찐정부의 집권 제2기부터 현 푸틴정부로 이어지는 미국의 대 유라시아 전략에 대한 러시아의 판단은 매우 부정적이다. 미국의 대 유라시아 전략에 대해 러시아의 정책입안자들은 미국이 유라시아에서의 국가간의 관계를 자신의 주도로 재편하려한다고 보고 있다. 유라시아 지역에서 과거와 같이 단일한 지도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여러개의 ‘중간국가’ ― 러시아를 점차 중간국가화 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 를 둔다는 것이 미국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개별적으로는 물론이고 집단적인 역량에 있어서도 미국에 비해 필연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된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러시아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유라시아 지역의 정치지형의 해체와 재편을 통해 미국주도의 21세기 세계질서수립 ― 명실상부한 팍스아메리카나 ― 을 궁극적으로 완결하려는 의도로 비쳐지기에 충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의 실행에 있어서 안정성을 담보해 줄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NATO와 ‘유로-대서양 세력’의 단결인 것이며 의지표명을 넘어서 이러한 국제질서재편에 대한 미국의 단호한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1999년 봄 코소보사태에 대한 미국의 무력개입이라는 것이다. 1997년 NATO의 동진정책에 대해 러시아가 현실적으로 동유럽 일부 국가들의 NATO가입을 인정하는 타협책을 구사한 것은 다극체제 형성에 대한 일말의 기대와 러시아 국내 정치경제상황에서의 옐찐정부의 불안정성을 반영한 것이었으나 1999년의 상황변화17)는 러시아로 하여금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였다.

먼저 NATO의 무력개입에 대한 러시아의 반응은 당시 러시아 하원 국방위 부위원장 알렉세이 아르바토프의 발언18)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나토공습은 러-미간의 탈냉전이후, 아니 60년대 쿠바 위기이래 가장 위험한 대결구도를 초래하고 있으며 1975년 헬싱키 조약 뿐 아니라 1997년 러-NATO간의 기본협약에도 위배된다는 것’이다. NATO의 무력개입은 코소보 내 갈등을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환시켜 국지적 민족분규를 국제정치적 차원으로 상승시켜 발칸반도와 더 나아가 전유럽을 넘어서는 대규모 군사충돌의 가능성을 잉태했다는 판단이다. 무엇보다도 바르샤바조약 기구의 해체와 탈냉전 이후 NATO는 공동의 적을 상실한 채 어느 국가나 동맹체제보다 강력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새로운 존재이유를 확보하기 위해 공격적 성격을 지니는 ‘팽창적 동맹’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NATO의 성격 전환 러시아의 국가안보 및 국내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다음은 유라시아 지역, 가장 불행한 경우에는 자국내 체첸지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우려는 현실에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부결되긴 하였지만 1999년 5월 의회에 상정, 토의된 ‘옐찐탄핵안’의 탄핵사유 5가지에 ‘국방력 약화’, ‘체첸전쟁’, ‘소연방 해체’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며 1999년 한해 동안 공산계열이나 민족주의계열이 러시아의 정치사회 및 시민사회의 주요 이슈를 선점 주도한 사실은 NATO의 ‘팽창전략’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 총리로 임명된 후 체첸문제에 단호한 행동을 취하고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 재편에 대한 저항과 유라시아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이해관계 확보 등 ‘강한 러시아’를 표명한 푸틴이 2000년 선거에 승리한 사실은 그 누구도 예상한 결과였다.

푸틴정부의 대외정책은 성격상 어떤 면에서 보면 과도기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지적하였듯이 ‘계승’과 ‘단절’의 양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푸틴정부의 대외정책노선은 멀게는 90년대 중반에 기원하며 가깝게는 1999년부터 이미 실행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2000년 대선이 끝난 직후, 새로 구성된 러시아 푸틴정부는 그동안의 여러 쟁점에 대해 신속한 해결을 단행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 및 CIS국가들과의 연이은 정상회담을 실행하였다. 무엇보다도 지적할만한 사건은 1993년이래 지연되어져왔던 START-Ⅱ와 NPT가입에 대한 의회 비준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국제정치사회에 있어서 러시아의 명분축적임과 동시에 논의의 주도권 확보라는 의도를 지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옐찐정부시기에 비준을 반대하던 의회가 이를 승인한 사실은 정부의 대외정책노선에 대한 의회의 신뢰표명이라는 옐찐정부시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던 일이 현실화되었다는데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19) 이것은 대외 정책수행에 있어서 푸틴정부에 대한 정치사회의 지지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에 의해 푸틴정부는 옐찐정부와는 달리 대외적으로 자신감을 갖고 대외정책실행에서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되었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외무부 장관 이고르 이바노프는 금년 4월 핵무기 비확산조약(NPT) 회의장에서 연설하면서 1972년에 체결된 대륙간 탄도 미사일 금지 협약(ABM)에 대한 미국의 수정 시도에 제동을 걸며 미사일 기술 억제를 다시금 제안했다. 이바노프 장관은 미국이 제안하는 어떠한 ABM 수정안에도 반대하며 그 이유는 국가 단위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 개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러시아는 ABM이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에만 전략적 공격 무기의 향후 감축 문제를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바노프 장관은 ‘현재의 군축 협약들은 대단히 복잡하고 불안정한 상황’이라고 전제하고 ‘핵심 협약 중 어느 하나라도 취약해질 경우 전체 구조가 파괴되고 말 것’이라면서 ‘따라서 ABM 조약의 수정은 지난 30년간 유지되어 온 군축 협약들 전체를 뒤흔드는 행위’라고 말했다.


5년마다 한 차례씩 열리는 NPT회의는 1970년 187개 국가가 조인한 이 조약의 재검토를 위한 것이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의 5대 핵 강국은 다른 가입국들이 핵탄두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군축을 실시할 의무를 지고 있다.

또한 이바노프 장관은 또한 러시아가 미국 및 다른 국가들과 ‘광범위한 협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 특히 러시아가 지난 3월에 제안한 세계 미사일 및 미사일 기술 비확산 통제 시스템을 통해 국가들이 함부로 미사일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자고 제안한 점을 상기시켰다. 이번 회의에서 핵무기 감축 협약이 느리게 이행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국가들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 또다시 잘못된 군비 경쟁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러시아의 NPT비준의 정치적 목적에 일정정도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클린턴 대통령은 금년 여름에 방어 시스템 개발의 계속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며 미-러 정상회담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또한 브라질, 멕시코, 스웨덴, 이집트, 남아프리카, 뉴질랜드 등은 ‘새로운 아젠다 연합’을 결성하고 대다수 국가들이 지지할 수 있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고 있다. 결과적으로 START-Ⅱ 및 NPT협약 비준을 통해 러시아가 의도한 국제 사회에서의 반향은 일단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20)

그러나 푸틴정부하의 러시아의 대외정책의 진로는 순탄할 것으로 전망하기에는 극복해야할 많은 어려운 장애물이 존재한다. 1999년 이후로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 재편과 단극체제 형성에 대한 저항, 그리고 유라시아에서의 사활적인 이해관계 확보 및 러시아 연방의 영토적완결성 수호라는 대외전략상의 기본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돌파구로 UN과 OSCE의 실질적인 역할강화 및 새로운 전략적 파트너쉽 유지, 그리고 CIS지역국가와의 동맹강화를 기본전제로 설정하였으나 후자의 경우 벨라루시와의 통합이 순조롭게 진행21)되고 중앙아시아의 중심국가인 카자흐스탄과의 관계가 긴밀하게 진전되는 등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반면에, 전자의 경우 체첸문제에 대한 해결방식에 있어서 러시아에 대한 압력22)이 금년 들어 특히 강해지고 있는 추세를 볼 때 러시아가 돌파해야할 난관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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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ns.ru, 11/04, 2000.

http://www.nns.ru, 26/04, 2000.



옐친정부와 푸틴정부의 연속과 단절이 중심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큰 틀로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의 노선을 가지고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시절이 1917년부터면 거의 100년 가량이나 되는 오랜 기간에 있어서 의회에서는 공산당이 1당이고 그 장기간에 막강한 세력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데 국내 공산당을 지지하는 세력과 옐친 지지세력 간의 갈등이 대외정책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등에 미친 이념적 영향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토에 대해 부정적인 것들이 그렇게 간단히 언급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념적 공백이라고 언급하신 부분은 서구 자본주의에서 보면 이태리, 프랑스에서 여전히 좌파정당들이 존재하고 이럴 때는 이념적 공백이라고 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지배하는 사람들 사고에 그러한 것들이 없다고 이념적 공백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먼저 보면 18세기이래 현재까지 러시아 외교의 연속성이란 것은 지정학적인 것과 이념인데 이 둘은 항상 공존해왔다는 것, 그리고 지정학적인 것은 상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선 순위였고 거기서 이념이라는 것은 형태를 달리 해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가 영토적 모양을 갖게 된 것이 18세기고 남으로는 중동, 동으로는 중국 일본, 북으로는 해상통로 등 이런 것을 놓고 대외정책을 짜게 되었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내에도 그러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초기 1991년, 92년 때 의회와 행정부 등은 우리의 이념적 공백을 메꾸어 줄 것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는 것, 즉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소련 붕괴 이후 이념적인 것은 서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시장체제를 수입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94년까지 유지되었고 반대편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즉 현정부가 이념적 공백상태에서 집권하고 있다고 한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항정책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95년 이후 양상이 변하는데 좌우를 막론하고 유라시아주의 혹은 러시아의 국익과 국가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신자유주의를 부정하고 유라시아주의 혹은 러시아의 입장이란 것을 가지고 대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도 대외정책에 많이 반영되었는데 그것도 슬라브주의가 되는 겁니까? 고르바쵸프의 외교는 서구주의로 분류되어야 할텐데 여기 옐친과 푸틴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구분을 하면 될 것 같은데 일국사회주의 문제에 있어서 옐친과 고르바초프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이 분류가 되면 결과적으로 공산당은 슬라브주의로 분류될 수 있는데 그것은 좀 무리가 있는 분류인 것 같습니다.


18세기이래 현재까지 러시아 외교에서 변하는 요소와 변하지 않는 요소가 무엇인가 하면 지금 각 학자들의 내용을 보면 매크로한 것과 마이크로 한 것이 섞여있는데 그러한 것 모두 요구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거시적으로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그 틀을 보충할 수 있는 미시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보려고 합니다. 하나의 축으로는 설명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슬라브주의냐 서구주의냐라고 하면 분명히 하나가 비어버리게 되고 종횡으로 엮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한 축이 빠져있습니다.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 경향은 분명히 있지만 종으로 엮을 수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일국사회주의도 한 지역에서 사회주의 굳히기로 보기보다는 현실주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혁명수출보다는 버퍼존이라는 것으로 동유럽을 상정했다는 것과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비판하는 부분에서 스탈린은 슬라브주의로 분류되지만 거기에는 고립주의 내지는 현실주의라는 것이 부가되어야 하고 흐루시초프 경우 이상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탕트를 이루어내는 부분 역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에 대한 같은 슬라브주의라고 하지만 서로 다릅니다. 여기에는 빠져있는데 앞으로 공부해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사회의 압력,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용어들이 나오는데 여기서 시민사회라는 부분이 러시아에서는 어떤 부분인지 그것을 좀 설명 주시기 바랍니다.


광의의 시민사회 개념과 정치사회와 접점인 시민사회 개념이 있는데 중첩되는 협의의 시민사회를 말했을 때에는 시민사회 이슈를 담지하는 단체들이 존재하는데 그러한 단체들이  실질적으로 압력을 넣고 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단체가 50여개가 되는데 그중 의회에 진출한 것이 러시아 공산당이고 나머지 시민사회 영역에 남아있는 단체들은 정당에 압력을 넣고 의회에 압력을 넣는다는 것이고 중도에 있는 환경이나 여성 같은 시민 단체들, 예를 들어 체첸전에서 체첸전사병어머니회 등과 언론부분도 그렇습니다. 여전히 언론기관 주변에 있는 단체들이 언론을 통해 압력을 넣고 자본주의의 시민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98, 99년 들어서면서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옐친의 실패에 대해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러시아에는 노조가 이제 어느 정도 독자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자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데 그것을 모두 시민사회로 뭉뚱그려 말씀하시는데 입장차이가 불분명한 것 같습니다. 자본측은 초기에는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를 것 아닙니까?


초기에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이해관계가 첨예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융자본의 경우 전면적인 개방을 주장하였으나 산업자본은 국영기업 사유화에서 불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국영기업의 노동자나 관리자에게 불하가 되었는데 개방이 되면 첫 번째는 바우처 주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비에트의 화폐라는 것은 교환성이지 축장의 의미가 아니었고, 바우처 매집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과 불하시스템은 좋았는데 그것이 특정의 금융기관 에이전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국영기업 사장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영향력이 관철되기를 원하였는데 자신들이 매집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고 그것이 사유화되었을 때 금융자본이 역지배하게 되고 여기에 마피아자본이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대립하는 지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업자본측은 신자유주의자로 이루어진 소수의 옐친 측근의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산업자본측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총리로 임명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신자유주의에서 금융자본의 힘이 극명하게 나타났었고 지금은 이미 판도가 나뉘어져서 그러한 대립은 없는 형편입니다. 노조의 예를 들면 현재 실질적으로 좌파가 공산계 노조를 장악한 상태가 아닙니다. 노조는 공산당 산하였는데 소비에트 해체 후 노조가 사회주의에 대한 반발을 표현하며 사유화를 지지했고 그후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시되고 불이익을 당하면서 근본적인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생각을 갖게되면서 노조가 재편되었습니다. 일부 노조 중심으로 탄광이나 금속 등이 일차적으로 단결해서 반정부적인 입장을 갖게되었지만 다른 대부분 노조들의 세력은 미미한 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책은 스탈린 식의 사회주의와 다르다고 하는 정도로 노조나 사회주의자들은 스탈린식의 사회주의는 곧 억압이라는 식으로 아직 인식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노조가 거래를 하는 어용노조들이 많고 노조가 노조원들의 지지도란 측면에서는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정리하면 지금은 자본의 입장이 두개로 나뉘어져있다고 했는데 자본이 구체적인 압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는 건가요?


지금도 현재 자본이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3~95년동안 자본이 요구한 것은 대외정책에서도 신자유주의를 지속하라는 것이어서 96년 타협점이 유라시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타협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보면 새로운 자본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으로 옐친 때 성장을 하고 영향을 미친 자본들을 정리하겠다면서, 세무조사에 들어가는 등 강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 상당한 변화입니다. 옐친은 신자유주의를 놓지 않고 있었지만 푸틴은 그것이 러시아 현실에 맞지 않다고 말하고 있고, 점진적으로 우리식으로 개혁하겠다고 말하면서 자본가세력을 재편하겠다고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외교적으로 보자면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의 대립은 슬라브주의로의 회귀이지만 정치경제학적으로 보자면 과격 신자유주의에서 국내를 추스리고 국가를 강력하게 하고 가는 정리된 새로운 신자유주의 공고화 단계로 가겠다는 것 아닌가요? 또한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식의 문제라고 생각되는데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건한 자유주의라고 할 때 그것에 대해 다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판단하는 온건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의 포기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떤 것인지 드러나지는 않고 있고, 세력관계가 바뀌면 신자유주의로 회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구주의, 슬라브주의, 대서양주의와 유라시아주의를 등치해서 종종 쓰고 있는데 이것은 좀 구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단계를 서구 슬라브주의로 보는 관점은 스탈린이 오히려 고립주의 현실주의에 가깝다는 생각에서 슬라브주의는 팽창주의의 입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맑스의 저작을 보면 러시아를 유럽의 반동국가로 보면서 그때 슬라브주의라고 하면 러시아의 국기가 쌍두독수리인데 한쪽은 유럽을, 한쪽은 아시아를 향하는 상당히 팽창주의적인 것이었습니다. 1945년 체제 이후 소련이 망했는데 지금 러시아가 취하고 있는 정책은 오히려 유라시아 주의라고 보는 것이 현실주의적 관점에 맞는다고 할 수 있는데 등치해서 쓰면 혼란을 줄 것 같습니다. 한가지 더 추가하면 러시아가 보이는 국제 정치적인 변화가 남북한이나 한반도에 영향을 줄 것인데 그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서구주의노선을 보이는 사람을 현재 대서양주의라고 보는 것이고, 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 내에서 논의되었던 부분이고 완전하게 등치 시키는 것은 아니고 연관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슬라브주의를 팽창주의로 보지는 않습니다. 표트르 1세의 노선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에카테리나 여제는 서구주의를 표방하지만 팽창주의를 추구했었습니다. 슬라브주의는 지정학적인 개념이지만 또한 이념적인 것도 포함하고 있고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다르게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구를 통해서만 러시아가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슬라브주의도 마찬가지로 19세기는 대부분 알렉산드르 2세가 삼국간섭에 들어갔던 제국의 팽창이 아니고 유럽과 러시아의 기독교적인 전통의 질서를 지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폴레옹군을 물리치고 파리입성을 하면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은 슬라브주의의 위대성 같은 것을 비롯한 그들이 가진 슬라브주의에 대한 해석이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주의나 슬라브주의나 정치적인 측면에 맞춰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19세기 이후를 얘기해야 맞지 않을까요? 18세기에 기반한 19세기의 논쟁이 21세기에 맞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그것이 중첩되어 얘기되고 있다


연속성이라는 문제의식이 등장하고 그것은 두 개의 차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제정러시아와 소련 옐친, 푸틴의 연속성이 그리고 두 번째는 옐친과 푸틴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데 양쪽 다 연속성을 기본으로 보고 단절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고 있는 대외외교정책과는 대단한 시각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문제가 되는 개념이 뭐든지 간에 저는 그렇게 본다면 어떻게 보든 연속성이 주가 되고 단절이 부가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외교를 지정학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외교는 그 지역 주민들의 계급투쟁의 연장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옐친과 푸틴의 사이는 분명하게 단절이 주요측면이라는 것과 두 번째로 여기서는 문제를 90년 11월 옐친의 발언으로 실마리를 잡고 있는데 이 발언이 옐친과 푸틴정부의 외교간에 긴밀한 관계가 있냐는 것, 그 긴밀한 관계는 러시아의 패권을 유지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 발언은 당시 옐친이 구 소련을 해체하고자 하는 의도와 소련과 이후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옐친 전기와 후기에 정책의 차이가 있고  푸틴과의 차이가 있는 것이고, 옐친 초기는 구소련적인 계급 소유관계를 해체하고 부분에 대한 자본의 공격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대중적인 환상과 결합해 힘을 발휘하다가 장애에 부딪혀 수정하는 과정이고 자본이 가진 이니셔티브를 이용하고 민족주의적인 조류와 결합하고 의회의 다수파로 되어있는 연방공산당의 부분과 타협해 가는 과정 아니냐, 이렇게 보는 것이 훨씬 유용하지 않습니까?


옐친의 얘기는 실제로 현재 푸틴의 발언과 대비를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내용이 소련 해체를 극명하게 표현하는 것 아닌 것인가 하면 두 가지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여기에 대한 대상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르바쵸프에 대한 것, 소련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그렇기 때문에 서구에 대해서는 러시아를 지원해달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옐친이 강조한 부분 두 가지 다 되는 것이죠. 그리고 미국과 정책이 충돌한 적이 없었다는데 있어서는 대외정책에서 지정학적인 것만이 아닌 계급투쟁의 문제인데 이 글이 계급투쟁의 문제에 많은 부분을 해명하고 있지 못합니다. 여기는 상층정책에 주안점을 두고 있고 그 대외적 변수는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 압박이라는 것이 계급투쟁관계라는 것이고 옐친 이전 여러 가지 시민사회영역이 너무 조용했다는 것과 93년 이후 그러한 지점이 선거로 나타나는데 국내정책에 실패한 옐친은 의회에서의 집권당이라는 것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우처방식을 통한 국유기업의 사유화문제를 말씀하셨는데 그것과 외교정책 변화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있다고 하셨는데 사실 국영기업의 관리자와 그들은 자본가와는 성격이 다르죠. 현실사회주의의 관료였지만 노동자들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성립되는 관리자였죠. 그런데 바우처를 통한 소유로 받아들였던 것이 매집되고 증권화되면서 아니다라고 되었던 것인데 소유에 대한 갈등관계가 러시아의 정치상황을 긴장되게 만든 것 아닌가요?


강한 국가를 대외적으로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안보면에서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의 안전도 얘기하거든요. 그것은 대외정책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푸틴이 선언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연금 올려준 것이 어떤 형태로든지 조정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그런 부분들이 우리 나라에서 말하고 있지 않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우처방식은 폴란드, 체코 등에서도 실시되었는데 바우처방식은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한 방식이었다고 말해져야 합니다. 국민기업도 그러한 기만적인 것이고 자본의 수탈방식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러시아 계급관계에 대해 말하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축적된 자료도 없고 우리식으로 말하기도 어려운 부분이 존재합니다.


체첸 문제의 배경 같은 것도 언급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좌파는 체첸 문제를 용납을 못합니다. 동티모르 문제도 인도네시아 민주파들이 동티모르 독립을 반대했듯이 주가노프 계열이든 어디든 체첸 독립을 반대합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외부 좌파들은 인권문제 등을 들고 독립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체첸 문제는 미국의 석유자본에 의해 부추겨지고 있는 부분이 있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러시아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고 명확한 입장을 말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체첸을 러시아 내부문제화 하는 것과는 달리 여전히 제국주의적 위협이 존재하고 있고 얼마든지 개입해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고 중동, 중앙아시아 부분은 석유문제를 빼놓고는 문제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노/정/연


1) Z. 브레진스키 지음, 김명섭 옮김,『거대한 체스판-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삼인, 2000.


2) Тимерман, “Внешняя Политика России :поиска новой иденчиности”, МЭ и МО, No.2, 1994.


3) А. Арбатов, "Россия: безопосность в 90-е годы", МЭ и МО, No.7/8/9, 1994.


4) 스티브 보일러드 지음, 김형기등 옮김, 『러시아, 21세기를 향한 도전』(한울 아카데미,1999)


5) Z. 브레진스키 , 앞의 책 참고.


6) Независимая Газета, 08/07, 1992. Alexander Rahr, “Atlantists versus Eurasians in Russian Foreign Policy”, RFE/RL Research Report, 29/5, 1992.


7) Suzanne Crow, “Why has Russian Foreign Policy changed?” RFE/RL Research Report, Vol. 3, N. 18 (May 1994) P.6. А.Загорский, А.Злобин, С.Солодовник, М.Хрусталев, “Россия в новом мире” Международнаяжизнь, 7월호, 1992. pp.5-7


8) С. Стнкевич, “Россия занимает свое место в мире”, Российские Вести, 27/02, 1993; “Трансформированная Россия в новом мире”, Международная Жизнь, 4/5월호, 1992 참고.


9) 1993년 6-7월에 전러시아여론조사센터에서 시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가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세계공동체에 통합되어야 한다는데에 응답자의 약 52% 찬성하였고 러시아의 군사적인 초강대국 유지에 찬성한 비율은 불과 4%였으며 응답자의 90% 이상이 서구 선진국들과의 긴밀한 연관관계유지에 찬성하였다. Н. Попов, “Внешняя Политика России :Анализ политиков и экспертов”, МЭ и МО, No.3, 1994, p.58.


10) 당시 신생 러시아 연방 공화국은 구소련의 연방헌법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개혁노선을 추진하는 데 많은 모순과 장애가 속출하였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의 정부의 개혁 정책과 헌법간의 충돌이 빈번하였는데 이는 러시아 연방의 신헌법이 아직 채택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혁노선을 추진해야 하는 당위성에 입각하여 대통령과 행정각 부처에 의한 법령 및 시행 규칙이 자의적이고 임시 방편적으로 남발되어 헌법과 하위법령간의 충돌 및 모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헌법 채택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개혁의 범위 및 속도 문제 그리고 권력구조 문제를 놓고 의회와 대통령간의 입장이대립되어 각자의 헌법 초안이 발의되는 비타협적 상황이 연출되고 급기야는 10월 무력유혈 사태로 귀결되었다.


11) В. Михее, “Гамбит анти-НАТО”; Политика России на Дальем Востокe, Проблемы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5월호, 1997. pp.31-32.


12) Известия, 10/02, 1997 참조.


13) В. Михеев, op. cit. pp. 33-35.


14) Ibid.  pp. 36 - 38


15) Независимая Газта, 13/01, 2000, 참조.


16) 자세한 내용은 Независимая Газета, 23/04, 2000; Russia National News Service, 22/04, 2000(http://www.nns.ru) 참고.


17) 코소보 사태에 대한 NATO의 무력 개입이후 미국은 국제문제에 있어서의 ‘인도적차원의 개입’의 정당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으며 체첸문제도 예외일 수 없다는 가정 하에 유럽의회 등을 통해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으며 이것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국내문제에 대한 미국의 간섭이자 개입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따라서 NATO뿐 아니라 유럽의회조차 미국의 영향력아래 종속되고 있으며 국내문제로까지 미국의 압박이 확대되고 있다는 판단은 러시아로 하여금 심각한 자구책을 구상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러시아의 국내정치경제상황의 변화 또한 주목할 만 것인 데 1999년 가을 총리로 임명된 푸틴이 주도하는 신생정당 ‘단결당’이 12월 총선에서 전례없는 지지를 받으며 기존의 다수당인 공산당과 1-2%대의 근소한 차이로 제2당을 차지하여 푸틴의 정책수행에서 중요한 지지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1998년 8월의 경제위기의 여파가 정점을 지나 회복국면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18) Независимая Газета, 16/04, 1999, 참고.


19) 올해 메이데이에서 예전처럼 시위를 주도한 공산계열 중 러시아 공산당이 끄레믈린을 겨냥하여 강경한 비판을 하지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써 이것은 푸틴정부에 대한 시민사회 및 정치사회의 지지에 대한 암묵적인 표현- 특히, 대외정책분야-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20) http://www.russiatoday.com, 26/04, 2000. 참조.


21) 금년 4월, 벨라루시의 알렉산드르 루카쉔코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의 푸틴대통령은 NATO로 부터의 영토수호를 위한 방안으로 러시아-벨라루시간의 ‘최정예양국혼합부대’(약 30만 규모)를 창설하여 NATO와의 접경지대에 배치할 것을 결정할 것을 논의하였다. http://www.nns.ru, 11/04, 2000.


22) 유럽 연합 의회에 이어 UN도 체첸 문제를 들고 나왔다. UN 인권 위원회는 다수결로 러시아가 즉각 체첸의 인권 유린 상황 조사에 나서야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문에는 불균형하고 지나친 병력 투입 문제도 거론되었다. http://www.nns.ru, 26/04, 2000.


2000-11-19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9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