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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시민운동의 진실과 거짓

현장에서 미래를  제60호
정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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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종 권/사회진보연대 정책기획국장
정치적 시민운동의 진실과 거짓






1. 독백 하나, 좌파란 무엇인가?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좌익, 좌파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자문을 가끔 던지곤 한다. 좌파라는 것이 스스로를 운동 주류의 흐름과 구분시켜주는 언어적 상징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패배적인 것일까? 좌파가 사회주의운동의 한국적 언어에 다름 아니라면, 현재 좌파의 존재양식은 대중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분파이어야 한다 ― ‘분파이다’라는 사실이 아니라 ‘분파이어야 한다’는 지향 ― 는 주장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내일 좌파가 가야할 지향점이 아니라 오늘 좌파의 자화상은 어떤 것일까? 90년대 초반 격동과 혼란의 시대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자화상을 찢어버리고 스스로를 부정하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여기서 좌파의 과거와 현재의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계급적’이라는 수식어로 이에 대해 대답을 하곤 한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 한다. ‘계급적’이라는 수식어의 진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지난 시절 우리는 그것을 노동자운동 이 글에서는 노동자운동, 노동조합운동, 노동운동이라는 표현들을 혼재해서 사용하고 있다. 개념적으로 구분해본다면 노동자운동은 운동의 주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성격과 조직형식과 활동내용을 불문하고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전개되는 운동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운동의 한 형식으로서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형식을 통해 발현되는 노동자운동을 지칭하는 것이며, 노동운동은 ‘노동’이라는 담론과 의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활동과 행동을 총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과의 결합에서 찾았다. 아니 노동자운동이 바로 계급성을 담보해주는 표상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수많은 좌파들이 정치적 전선운동과 지역운동, 통일운동이 아니라 노동현장으로 투신하고 노동자운동과 결합하려는 정치써클을 만들었던 역사적 동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파는 전민련과 전국연합, 통일운동으로 하나의 세력이 응집하였다면, 좌파는 노동운동으로 응집하고 집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전노협’은 좌파에게 하나의 신화이자 정신적 고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급적 노동운동’이 아니라 ‘노동운동이 바로 계급적’이라는 집단적 공감대가 좌파의 과거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좌파운동이 기반해야 할 대중적 기반으로서 노동자 계급과 노동자운동을 고민하고 그 결합을 모색하는 것과 노동자운동이 좌파운동을 보증해준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며, 후자의 인식틀은 90년대 이후의 현실에 의해 기각되었다는 것이 개인적 판단이다. 물론 이것이 노동자운동에 대한 폄하와 가치절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의미한다. 노동자운동이 좌파와 우파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변혁을 둘러싼 상이한 전망들이 각축하고 대립 갈등하는 공간으로 전환한 동시에, 노동자운동 내부가 계급적 통일성을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과 영세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성과 남성이라는 횡단축에 의해 분열되어 있고, 이것이 역으로 노동자운동의 이념적 지향들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노동자운동의 현실인 것이다.

좌파가 노동자운동을 강조하고, 그 운동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와 맺는 논리적․구조적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분출하고 계급대중의 활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좌파의 이념적 지향과 노동운동의 사회적 의미가 일치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좌파운동이라는 이념적 전망에 기반한 운동은 필연적으로 전계급적, 전국적 시야와 실천을 위한 계획을 가져야 하며, 또한 동시에 좌파운동이 탈자본주의적 전망을 가지는 것이라면 그것의 물질적 조직적 기반인 노동자운동에 대해 다른 부문운동에 비해 ‘일차적’ 의미(특권적 지위!)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운동의 일차적 위상’이 협소하게 이해되었을 때 ― 나는 이러한 혐의를 나 자신과 좌파운동에게 두고 있다 ― 그것은 기타 사회운동과 독립된 무균질의 밀폐된 공간으로 노동자운동을 사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노동자운동 내부의 이념적 분화와 계급적 분화 과정은 노동운동 내부의 밀폐된 공간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좌파와 우파의 이념적 분열과 대립, 이러한 이념적 전망의 물질적 기반으로서 노동자운동을 재정립하려는 흐름들, 그리고 비(非)노동운동적 조직 기반을 형성하고 대중화시키려는 움직임들이 상호 쟁투하는 것이 우리 운동의 현실인 것이다. 즉 좌파의 노동운동에 대한 고민은 순노동운동적 고민으로는 풀릴 수가 없는 것이다. ‘시민운동론’과 ‘시민운동 비판’의 함의는 이런 맥락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좌파가 이러한 현실적 흐름을 선도하거나 주도하지 못하고 추수하고 끌려간 것이 아닌가라는 평가를 잠정적으로 내리고 있다. 여전히 계급운동의 표상으로서 노동자운동에 대한 강조에서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시민운동론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효과와 정치지형에서의 의미(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를 자기방어적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시민운동 비판의 현실적 함의는 민중운동을 시민운동과 구분시키고, 차단의 장벽을 설치하는 것일 수 없다. 그 의미는 사회변혁의 전망을 둘러싼 좌우파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노동자운동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대중운동을 재규정하고 변형시키려는 물리적 힘에 대한 비판이며, 시민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좌익적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문제로 사고되어야 한다. 시민운동에게 ‘개량주의, 기회주의’의 레테르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비(非)시민운동적 사회운동의 전망을 확립하고, 그 조직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계급운동의 표상이 아닌 실체로서 노동자운동의 전망과 노선을 정립하고 계급운동으로 재정립하는 것과 한 궤를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란 담론의 함의도 이러한 문제의식과 유사할 것이라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좌파가 좁은 의미의 노동자운동의 밀폐된 공간을 극복하지 못할 때, 시민운동에 대한 대안 없는 비판을 뛰어넘지 못할 때, 급진적 사회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은 하나의 관념적 지향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2. 시민운동, 정치적인가 탈정치적인가?
시민운동의 정치성을 둘러싼 논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비(非)정치적 중립성을 지향해야 하는 시민운동이 지나치게 정치화되어 있고, 이것이 시민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우파의 비판. 정치적, 계급적으로 분화되어 있는 객관적인 사회현실을 부인하면서 스스로를 중립적 공익의 논리로 포장하면서, 현실을 정당화시키거나 사회구조의 모순을 완화시키고 절충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좌파의 비판. 이에 대한 시민운동의 자기방어 논리는 시민운동은 특정 계층, 집단의 이해관계를 넘어 대다수 선량한 시민을 대변하는 공익적 활동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단순 분류해보면, 시민운동진영과 우파는 시민운동의 성격이 중립적, 공익적,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지향점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현실의 시민운동이 이러한 지향을 올바르게 실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에서는 상이한 판단을 하고 있다. 또한 현실적으로 시민운동이 정치지향적이라는 평가에서는 좌파나 우파가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방향에 대해서는 우파는 시민운동이 반자본, 반시장, 친정부, 친노동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경계하고 있으며, 좌파는 시민운동이 체제옹호적이고 친자본적 운동으로 귀결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계급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정치적 중립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정치적 중립과 공익성을 조직활동의 근거와 무기로 사용할 수는 있다. 더군다나 계급적으로 대립 갈등하는 사회에서 조정자와 중재자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중립과 공익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집단의 경우 그것은 효율적인 조직활동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시민운동을 중립성과 공익성을 무기로 정치적인 활동을 전개하며, 그 정치적 지향은 체제 합리화와 계급대립의 완충, 순화에 있다고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정치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정치적’ 활동이 바로 시민운동의 내용인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정치 활동의 내용이 무엇이며, 누구의, 어떤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가에 있다.

최근 조선일보는 10월 12일 열린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의 정책포럼 ‘시민운동, 이대로 좋은가?’에 대해 소개를 하면서 발제 내용 몇부분을 인용하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첫 주제발표자인 정수복 사회운동연구소장은 “한국 시민운동은 스스로 정치세력화함으로써 비영리, 비정부, 비당파의 원칙이 흔들리고 있고, 조직이 정당과 마찬가지로 중앙조직 중심으로 활동, 지역주민의 삶의 현장과 연관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였으며, 마지막 주제 발표자인 유석춘 연세대 교수는 “시민운동은 시민단체의 자율성과 순수성, 공익성을 얼마나 지켜 시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유지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철저히 우익 당파성에 입각한 조선일보라는 매체의 기사이기에 보도내용이 토론의 맥락과 발표의 취지와 무관하게 재편집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십분 고려하더라도, 이 기사가 진실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치는 누구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은 정치적 과정에 다름 아니다. 노동, 농민, 빈민과 같은 기층 민중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환경, 여성, 문화, 인권의 문제에서 비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기에 비정치, 탈정치를 요구하는 것은 여러 가지 현안과 갈등들이 ‘사회구조적’ 문제로 나아가지 않고, ‘개별 정책과 인물의 문제, 의식의 문제’로 국한되기를 바라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우파의 논리이며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의 논리이며 친정부적 논리이다.
그리고 공익성의 논리는 조정과 중재의 논리이다. 공익성의 형식적 담지체는 바로 국가와 정부이다. 즉 국가와 정부의 형식적인 존립근거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 법과 제도로서 이를 보장하며, 개별 정책으로 실현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민운동이 정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공익성의 논리는 정부 정책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의 대립과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하여 올바르게(?) 정부 정책에 반영 수렴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결국 비정치와 탈정치, 공익성이라는 논리의 실천적 귀결은 갈등과 모순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고민과 의식화로 나아가는 것을 차단하는, 좋게(?) 해석하면 현 자본주의 체제를 합리적으로 개혁하고 보완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시민운동이 소수 인텔리와 지도급 인사들의 몇몇 담론과 발언으로 국한될 수 없으며, 그 속에서는 민중들의 염원과 기원과 희망의 몸짓들이 기저에 깔려있고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시민운동을 비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과연 그러한 시민운동의 자본주의적 개혁노선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민중운동의 올바른 방향일까? 나의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3. 시민운동을 둘러싼 최근의 몇가지 사건
가) 10월 24일 주요 일간지에는 시민단체와 재계가 협력적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처음으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만났다는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한국시민단체협의회(시민협)가 10월 24일 전경련 회관에서 ‘기업과 시민단체간 협력 촉진을 위한 과제’ 세미나를 열고 서로 의견을 교류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이근식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장은 정치인과 관료가 아닌 기업과 시민단체가 개혁을 주도해야 하며, 한국의 기업들은 잘못된 경영관행을 개혁하여 자유로운 기업문화와 책임경영 및 정직한 기업풍토가 확립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민병균 자유기업원 원장은 시민단체 활동이 경제논리에 맞춰 추진되어야 하며, 시민운동이 경제에 바탕을 두지 않을 경우 정부 규제가 심화되고 경제 효율성이 떨어져 사회적 손실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날 세미나의 백미는 서경석 시민협 사무총장의 발언인데, 그는 “기업의 공익활동이 증가하고, 시민단체도 기업의 경영마인드를 도입하는 등 서로 상대를 닮아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시민운동의 독립성을 해치지 않는다면 기업의 재정지원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한술 더 떠 그는 시민운동의 활성화와 기업 이미지 개선을 위해 시민운동을 지원하는 ‘(가칭)시민운동지원기금’ 창설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한 한겨레신문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 하지만 이날 만남의 자리에는 그동안 가장 강력히 기업 개혁을 요구해 온 참여연대 관계자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치 이날의 만남이 시민운동 전체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기자의 바램이 진하게 묻어나는 기사였다.
언제부터인가 언론과 각종 매체에서는 ‘구조조정’이라는 표현이 ‘구조개혁’으로 바뀌어서 사용되고 있다. ‘개혁’이라는 언어가 가지는 긍정적 함의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리라. 그러나 구조조정이 구조개혁으로 달리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함의가 한국 자본주의의 기본줄기와 구조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는 것이며, 결국 착취율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다. 개혁의 주체와 목적과 내용이 자본의 이윤율과 착취율을 증가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본에게 개혁일 수 있지만 민중에게는 반동이자 파괴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면 전경련이라는 자본의 핵심집단과 교류 협력할 수 있는 시민운동의 내용이 무엇이며, 서로 닮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며, 시민운동지원기금으로 활성화되는 시민운동이 무엇을 하는 누구의 운동일 것인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시민사회론과 시민운동의 운동논리에서는 ‘자본’과 ‘구조적 체제적 모순’이라는 문제의식이 누락되어 있다. 이번 전경련과의 만남은 그 본질적 모습이 드러난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얼마전 제3차 아셈(ASEM)회의가 끝났다. 이번 아셈회의는 자본과 민중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자본과 김대중 정권은, 25개 국가의 정상들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국제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기회였으며, 아셈을 계기로 한국의 국제적 신인도와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가평하고 있다. 민중들에게는 이번 아셈회의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중요한 추진기구로 인식되면서, 이에 대해 99년 시애틀 투쟁과 2000년 프라하 투쟁을 이어가는 전세계 민중들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을 한국 민중운동이 강력하게 전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거는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이번 한국의 아셈반대 투쟁은 몇가지 미묘한 문제가 복합되고, 투쟁의 전망과 원칙문제가 불분명해지면서 국제 민중운동의 기대에 못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아셈2000 한국민간단체포럼(민간포럼)이 제기하는 ‘사회포럼’의 문제이다. 민간포럼은 아셈이 아펙(APEC)이나 WTO, IMF와는 달리 시민사회와 교감할 수 있는 개방적 공간이며, 아셈의 성격이 이러하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창구로서 (가칭)‘사회포럼’을 아셈 공식회의 기구에 설치하도록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백여개의 시민운동이 참여한 민간포럼의 공식 입장이었다. 아셈에 대한 민중운동의 ‘전면반대와 비판’의 기조가 아니라 ‘비판적 개입’을 활동기조로 설정하였던 민간포럼의 입장이 집약된 것이 바로 ‘사회포럼’ 요구였다.
그러나 개입이라는 말이 가지는 핵심은 결국 시민사회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공식적 통로를 확보한다는 의미였다. 한국에서 정부 산하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하는 시민운동의 논리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는 논리와 몹시 닮아 있다. 시민운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고, ‘아셈의 기조에 비판적’ 입장을 갖는다고 하지만, 그 말의 실질적 의미는 정치적 제스쳐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대규모 군중집회도 결국 사회포럼 설치와 시민운동의 교섭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압력행위로 사고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로비 전략으로 보완되는 방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전경련과의 대화와 사회포럼 제안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둘은 시민운동의 기조에 녹아 있는 동질적인 것이다.

다) 조선일보는 시민운동의 친(親)정부성과 정치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비중을 불문하고 반드시 기사로 싣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의 단순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자신의 초우익적 당파성에 입각하여 재해석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조선일보는 최근 국정감사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정치폭로를 수행하였는데, 경실련이 주동적으로 이끌고 있는 ‘의료개혁시민연합’이라는 시민운동 연대기구가 정부로부터 거액의 지원금을 받은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사건은 지난 10월 23일 보건복지부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박시균 의원이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의료개혁시민연합’이라는 단체에 자금을 불법 지원했다”며 “이들은 법인단체가 아니므로 예산은 녹색소비자연대 법인계좌로 입금됐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박 의원에 따르면, 보건산업진흥원이 지난 5월 이들에게 4억900만원을 지원하기로 계약을 맺고 현재까지 3억2000여만원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 사실에 대해 시민연합측은 ”받은 돈은 의약분업 홍보와 의약분업 시행과정을 모니터 하는데 썼다“고 밝혔다.
이번 의료개혁시민연합 정부지원금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가 있는데, 돈을 지원받음으로써 시민단체의 도덕성이 훼손되었다는 한 측면과, 시민단체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의 전위부대로 역할하고 있다는 세간의 의혹이 현실로 드러났다는 점이 다른 한 측면이다. 결국 후자의 의미는 의사와 같은 기득권집단의 위상과 권한을 조정하고 재편하면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구조개편에서 시민운동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논점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그래도 의사집단에 비해 시민운동이 개혁적이지 않느냐는 문제제기는 코드가 왕창 빗나간 것이다.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은 한 요소로서 재벌과 같은 기존 기득권 집단을 해체하고 재편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개혁성과 진보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시민운동이 의사들에 비해, 재벌에 비해 진보적이지 않느냐는 단순논리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지원․엄호하는 시민운동의 역할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번 의료개혁시민연합 사건의 본질인 것이다.

시민운동과 정권, 자본과의 유착 여부가 주는 핵심적 교훈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조직적 독립성을 지탱할 수 있는 재정 자립을 이루어내는 내부 메카니즘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개입과 참여의 논리하에 진행되는 각종 제도적 장치와 기구에 참여하고 협의하는 활동방식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재정 지원과 참여를 배제하는 극단 논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시민사회의 입장에서도 변혁(변화)의 대상인 자본과 권력에 대해서는 재정적, 조직적, 논리적 자주성을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끈질기게 물고 넘어지고 폭로하려는 것도 이 지점이다. 물론 이것과는 별개로 시민운동이 한국 사회를 변혁(변화)시키기 위해 채택하고 있는 활동노선과 이념적 지향도 평가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운동진영 좌우파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는 것이다.

라) 최근 초국적자본과 외국기업들의 ‘NGO 지원’이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GM코리아는 지난달 환경운동 시민단체인 ‘내셔널트러스트운동’에 1억원이 넘는 캐딜락드빌승용차를 기증하였다. 미국계 정보통신업체인 한국EMC는 지역 시민단체인 ‘청주시민회’와 후원 조인식을 갖고 각종 활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는 국내 정보통신분야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와 환경단체를 온라인 네트워크로 묶는 작업에 자금과 기술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 P&G는 사회복지단체인 ‘사랑의 친구들’이 주최하는 결식아동돕기에 물품을 지원하고 있으며, 참여연대에서 발행하는 ꡔ참여사회ꡕ에 정기적으로 광고를 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살펴보면 NGO의 사회개혁 전략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초국적자본의 대(對)NGO 전략과 태도의 의미를 분석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미상공회의소 회장은 “NGO그룹과의 협력관계는 기업(자본)이 지역사회에 정착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우회적으로 그 의미를 표현하였다. NGO운동이 자본의 이윤추구와 충돌하지 않고, 그런 점에서 이들의 개혁운동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오히려 자본의 정당성과 친근감을 강화시키면서 노자간의 격한 투쟁을 순화시키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전략적 판단인 것이다.


4. 결론에 대신하여 : ‘시민운동 비판’의 함의
참여연대 조희연 교수는 언젠가 시민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의 출발을 자기고백적으로 밝히면서, “전투적인 민중투쟁으로도 타도되지 않는 권력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어떠한 실천을 해야 하는가?”는 고민에서 출발하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것의 함의는 ‘불의한 권력의 타도’와 ‘권력 민주화를 위한 일상적 활동’을 이중적으로 병행하는 전략이 시민운동론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서서히 전자의 문제의식이 기각되고, 후자가 과잉대표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는 결국 체제와 권력에 대한 원칙적 태도가 확고하지 못할 때, 일상적 민주화운동과 개혁투쟁과 민주적 정책대안 운동은 결국 방향성을 상실하면서 개량과 개선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역으로 원칙의 밀폐된 공간으로 스스로를 제한시킬 때 현실에서는 무능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시기 ‘시민운동 비판’이 갖는 의미는 두 가지에 있다. 노동자주의 비판과 협조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노동자주의와 협조주의의 동질성은 노동 의제와 비(非)노동 의제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민운동 비판’의 조직적 실천은 노동자운동 내부의 계급적 복원과 단결을 지향하면서, 노동운동적 의제와 비(非)노동운동적 의제를 단일한 실천과제로 하는 급진적 사회운동 블럭을 구축하는 데에 있다. 노동운동을 탈자본주의와 계급적 체제대안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하나로서 위치지우고, 다양한 급진적 사회운동과 연대하면서 노동운동과 비(非)노동운동의 장벽과 괴리를 해체시켜가는 하나의 블럭이어야 한다. 노동운동과 비(非)노동운동적 의제의 구분과 괴리가 바로 시민운동이 확대 재생산되는 토대로 되고 있으며, 노동운동이 시민운동과 협력․지원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고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한/노/정/연

2000-11-19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9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