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역특례 해고노동자의 군문제 해결을 바라는 고인의 편지 |
현장에서 미래를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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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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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료
이 글은 고 조수원 동지가 병역특례 해고노동자의 군문제 해결을
바라는 내용으로 국회의원들에게 보낸 편지글입니다.
의원님께 올립니다.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노력하시며 바쁘신
국회 일정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시는 의원님과 같은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한걸음씩 앞으로 발전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의원님을 한번도 뵌 적이 없는 스물아홉살의
해고노동자이며 이름은 조수원이라고 합니다. 저는 부산의
대우정밀에서 병역특례 노동자로 근무하다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하여 병역특례 만기 5년 중 6개월 정도를 남겨두고 해고되어
5년째 수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의원님께서 바쁘신 경황임이
충분히 예상됩니다만 제가 드리는 이 편지를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하는 절실한 바램을 안고 저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강원도 태백의 탄광촌에서 광산 선탄부 일을 하시던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어린 시절을 탄광촌에서 보내며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께서 어린시절 집안이 몰락하여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어려서부터
남의 집 농사일이나 나무 등을 하며 근근히 목구멍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으며, 이런 생활이 너무도 지루하고 빨리 돈을 벌어
지겨운 가난을 떨쳐 버리고자 가출을 결심하고 열다섯 정도의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무조건 강원도로 갔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선 그곳에서 오징어 배도 잠시 타시다 안정을 찾지
못하고 결국 탄광으로 가셔서 그곳에 터전을 잡게 되었으며,
그것이 평생에 걸친 직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워낙 선한 분이어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모든
부모님이 다 그러하시겠지만 자신이 자식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에 아까워하시기를 꺼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편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아무런 허물없이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국민학교 1학년까지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서 줄곧 생활하다 아버지의 고향 근처에 탄광이 새로
생겼다는 소문에 따라 저희 집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강원도
태백에서 충남 보령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가족 모두가 행복함을 느끼며 하루하루의
삶을 소중함을 안고 즐겁게 살아가던 저희 집안에 어느 날부터
조금씩 불행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충남 부여군에
소재한 외산이란 곳에서 중학교 2학년을 다니던 시기인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30여년 가까이 탄광 생활을 하시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건강이 악화되어 갔으며 결국 그 원인이
진폐증이란 직업병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병이 발견되기 전에
아버지께서는 탄광을 다른 곳으로 옮기셨고 이로 인해 원래
근무하던 회사에서 산재보상을 제대로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건강하시던 아버지의 진폐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음에도 저희
가족 누구도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리란 것을 전혀 예상치도
못했기에 이로 인한 충격은 저희 집안에 가득찼던 행복의 기운을
모두 앗아가버렸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1년여의 시간동안 동료들과 산재보상문제로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느라 바쁘셨고 그동안 집안살림은
어머니께서 꾸려 나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선 그동안 조금씩 모아
놓으셨던 돈을 농사철 현금이 딸리던 집에 빌려주고 그 이자로
생계를 이어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평소 절친하게
지내시며 동네에서 슈퍼마켓을 제법 크게 하시던 분한테
빌려주셨다가 그 집이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이들과 야밤
도주하는 바람에 한푼도 건지지 못하고 몽땅 날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한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밤마다 한숨만 내쉬었고 틈만 나면
그분들을 찾아 다니셨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부모님께서는 점점 그 사건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생계 때문에 틈만 나면 한약재를 캐러 산에
다니셨고 어머니께서는 취로사업이나 여름철에는 모내기
작업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기에 바쁘셨습니다.
이 때가 제가 중3때의 일이라 생각됩니다. 부모님께서는
십수년동안 저희 형제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려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돈을 제법 모으셨던가 봅니다. 그러나 당장 제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는 부모님의 십수년 동안의
고생은 두분의 이마에 맺힌 주름살로만 나타났을 뿐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촌학교에서였지만 그래도
전교 석차가 상위권에 있었기에 원하는 학교는 어느 곳이나
들어갈 수 있었으며, 저희 집 사정을 아시는 담임 선생님께서
인문계 고등학교 장학생으로 추천해 줄테니 공부 열심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때부터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고민과 방황은 몇 주일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선생님께서 추천하신 인문계 고등학교 장학생의
자리를 양보하고 기계공고로 진로를 확정지었습니다. 그때 저의
이러한 결단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시던 분은 저희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편안하게 공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선 하루가 다르게 하시는 일을 힘에 부쳐
하셨으며, 어머니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형편이 나아지면
공부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던 것입니다.
저는 기계공고에 입학한 후 주위의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1학년 2학기에 접어들어 전공을 밀링직종으로
선택하고 곧바로 자격증 시험 공부에 들어갔고 9월말 경에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실기시험을 보려면 실습을 통해
실력을 연마해야 하는데 1학년이라선지 제가 실습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학년에 올라가서야
실습을 제대로 할 수 있었으며 3월말 경에 학교내에서 제일 먼저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이러한 실력을 보신
선생님께서 저를 불러 기능훈련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해
왔으며 저는 기능훈련를 하던 선배 형님들에 대해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에 한번 도전해 보기로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기능훈련을 시작하면서 저의 생활은 예전보다 훨씬
바빠졌습니다. 오전 수업만 하고 곧바로 실습장으로 달려가
기능습득에 열중하고 틈나는대로 선배들의 심부름과 지도를 받고
나면 밤 12시를 항상 넘어섰으며, 실습을 끝내고 학교 기숙사로
달려가면 새벽 1시쯤 시간이 흘러버리곤 했습니다. 그리곤
곧바로 잠자리에 들 수도 없었습니다. 미처 받지 못한 수업을
보충하느라 친구들의 노트와 참고서를 받아들고 도서실로 가서
새벽 3시 가까이 공부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비록
기능훈련을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기에 공부는 항상
별도로 하고 그것이 부족하면 토요일 저녁이나 쉬는 일요일에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생활하며 어느 덧
3학년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매년 4월경에면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할 지방대표를 뽑는
‘지방기능경기대회’를 대전에서 개최하는데 저는 이때
학교대표로 참가하여 금메달을 따내 충남대표의 자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가을에 전주와 이리에서 개최된
‘전국기능경기대회’는 저에게 더 이상의 행운을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전국에서 모인 걸출한 실력자들과 함께 실력을
견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개인적인 영광이기도
했지만 1년 이상 피땀을 흘리며 열심히 노력한 결실이
‘실패’라는 단어로 귀결되는 것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등하교 3년을 거의 보내고 저는 취업과 장래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졸업하면 곧바로 입영영장이
발부될 것을 예상했기에 취업을 한다고 하여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대로 입영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방위산업체외에는
군대가는 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985년도 당시는
심각한 불황으로 취업이 잘되지 않아 취업을 담당하시던
선생님들의 애로가 엄청났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저는 취업을
포기하고 제대로 받지 못한 공부를 보충하며 내일을 기약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운명은 저를 저버리지 않았는지 부산의
대우정밀이란 방위산업체에서 취업문의가 들어왔다고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며 저를 비롯하여 같은 반의 급우들을 함께
추천해 주셨습니다. 부산까지 내려가 면접까지 마치고 나서
합격통보를 받고 난 이후 저의 부모님께서는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86년 1월 22일자로 저는 대우정밀의
정규사원으로 당당하게 발령받아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입사 이후 저는 다른 동료나 선배들보다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근무시간 중 잡담이나 다른 곳에
신경을 전혀 쓰지도 않았으며 오직 회사에서 맡은 임무만 열심히
했습니다. 저의 이러한 모습에 옆직장의 상사께서 호감을
가지셨는지 저를 그쪽 팀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마음놓고 일만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열심히 일만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문제는 정작 다른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입사해서 3개월간의 수습기간을 마치고 나서 4개월이 지나
한달동안 잔업, 특근, 철야 등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슴에도
불구하고 제가 받은 월급은 20만원을 넘지 못했습니다. 정말
암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약도 사드려야 하고 동생들
학비와 생계비, 방세 등등 제가 한달간 노력한 결실은 너무도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었지만 그것은 당장 저에게 처해진 상황을
극복하는 데는 너무나 막막하기 짝이 없었으며 앞이 깜깜했고
‘미래, 희망’이란 단어를 무색케 했습니다. 임금문제는 좀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는 자위감으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사내에서 발생하는 분위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상사가 하급 사원을 폭행하는 일이 예사였으며
상사들의 잘못을 하급 사원이 뒤집어쓰기도 하고 대신 시말서를
작성하여 부장실에 불려가 욕을 얻어먹는 일도 예사로
일어났습니다. 정말 마음놓고 숨조차 쉴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만 아니면 차라리 군대를 갔으면 하는 심정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생겨나곤 했습니다. 저의 얼굴에 간직된 미소는 점점
암울함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여름휴가를 얼마 앞둔 시점에서 저는
집안사정 때문에 미처하지 못했던 공부를 새롭게 조금씩
시작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휴가를 맞아 대전에 계신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을 찿아뵙고 저의 계획을
말씀드렸고 선생님께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휴가가 끝나고 직장으로 돌아온 첫날로
기억됩니다. 저는 8시간 동안 열심히 회사일을 마치고 곧바로
퇴근하기 위해 탈의장으로 가려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누군가가 저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저의 퇴근을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같은 팀의 조장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퇴근하지 말고 일하라고 강요하였으며, 저는 공부하기
위해 독서실 회원권을 이미 끊어 놓았으며 제가 회사에서의
근무시간인 8시간을 마쳤기에 그 이상의 근무는 자유의 시간이
아니냐고 말했더니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으면 계속 일을
하던가 아니면 당장 사직서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죄송하다는 말만을 남긴 채 인사를 마치고 곧바로
퇴근했습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출근하고 난 뒤
팀의 조장은 저를 불러 잘못했다는 내용의 시말서외 각서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저는 회사일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할테니 제발 8시간 근무 이후의 시간은 용납해 달라며 이해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러한 바램은 여지없이 뭉개졌으며
그날 이후 날마다 신경전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결국 저는
버티기가 너무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러한 고충을
적어 회사내 ‘고충처리함’에 넣었습니다. 다음날 출근하니
직장분위기는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노사협의회 위원 한사람이
저를 찾아와 저에게 요구가 무엇이냐고 묻기에 다른 팀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노사협의회 위원이 다녀간 후 저는
부장실, 과장실 등에 불려가 심문을 받아야 했으며 이후 저의
생활은 더욱 고달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의
얼굴만이 눈앞에서 아른거릴 뿐 아무 것도 생각하기가
싫어졌습니다. 어렵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저는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장에 회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회사내에 노동조합이 설립되었으며, 저희 회사내
모든 구성원들은 그 노동조합을 정말로 자신의 몸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남다른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난 뒤 임금 뿐만 아니라 과거와
같은 부당한 처우나 강요가 없어지고 자율과 신명이 깃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회사도 갈수록 예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사원들을 대하기 시작했고 노동조합에 대한 태도도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회사일에 애정과
열정을 지니고 무척이나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으며, 정말
회사에 대한 자긍심을 지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신명나고 회사일이 즐겁고 자랑스러웠던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시련의 손짓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현실로 너무 일찍
다가왔습니다. 1991년 초부터 회사의 태도는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한 상습적인 고소․고발과
압수수색, 연이은 구속 등으로 회사내 분위기는 위기감과
공포감에 휩싸이며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으로 사람들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같은 불안감에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출근길에 사람들이 잡혀 구속되기도 하고 저녁에 야간 근무하다
구속되기도 하고 집에 들어가다가 구속되는 등 더 이상 우리에게
선택이나 대화마저 용납하지 않는 험악한 분위기로 갑자기
바뀌었으며 전조합원들은 자동적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듯
기계를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거대한 공장의 기계들은
숨소리를 죽이고 곳곳이 어둠에 갇히게 되었으며 우리의 정든
일터는 최루탄과 군화발로 짓밟히고 온통 무장한 전경들에
포위되어 버렸습니다.
앞에서 일하던 수십명의 동료들이 차가운 철창에 갇히게
되었으며, 저를 비롯하여 150여명에 달하는 동료들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습니다. 그후 시간이 흘러 저는 회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동료들 얼굴이
아른거려 밤마다 슬픔의 눈물 속에 술로써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4일이 지날 무렵 같은
부서의 부장님이 저를 찾아 와 한가지의 제안을 하였습니다.
“너희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가지 밖에 없다”며 저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면 병역특례 제대후에 사직서를 처리하는 것으로
해고조처를 취하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구속되어
있는 친구와 선배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으로서
신의를 지킨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병역특례기간 만료 5년 중 6개월 정도를 앞두고
해고되어 이제 5년째 수배생활의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는 기나긴 수배생활로 인해 극도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으며,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형편은 그야말로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로 피폐해져 있고 5년동안 부모님을 제대로 찾아 뵐
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얼마나 제가 보고 싶으셨으면
부산의 옛직장 선배 집으로 직접 찾아오셔서 저와 어렵게 연락을
통해 몇년만에야 얼굴을 뵐 수 있었으며, 그날 밤 어머니께서는
밤새도록 얼마나 눈물을 흘리셨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퉁퉁
부어 버렸습니다. 가끔식 드리는 전화인사는 그때마다 저의
가슴을 슬픔과 아픔으로 짓누르며 부모자식간 전화선을 통해
전해지는 혈육의 정은 이제 한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의원님!
저의 이러한 불행도 이젠 대우그룹과의 복직합의 후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특수선사업부로 인사발령이 난 상태이기 때문에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서른고개로 접어드는 나이에
군문제는 저와 부모님, 그리고 주변의 동료들에게 또 다른
아픔과 절망으로 다가서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가 5년째 집안의
생계를 돌보지 못하는 동안 아버지께서는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날마다 공사판 일을 전전긍긍하시며 저녁만 되면 온갖 신음과
기침소리로 고통 속에 생계를 이어나가신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선 전화만 하면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곤
하십니다. 어머니께서도 조그만 공장에 다니시며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시지만 건강만 해치실 뿐 생활은 별로 나아지는 것이
없음은 뻔한 사실입니다.
의원님!
저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이 저외에 11명 정도 됩니다.
이들의 고통은 거의 한결같으며 어떤 경우에는 저보다도 훨씬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이도 있습니다. 저희들에게 다가온
시련은 너무나 힘들고 가슴아픈 상처였으며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개인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부모형제를 비롯한
주변의 사람 모두에게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저희들의 이러한
가슴 아픈 사연을 하도 호소할 길이 없어서 지난 93년에는
38일간 단식을 통해 사회각계에 호소해 보기도 했으나 아직도
군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행스런 일은 저희의 사정을 들으신 사회 각계 다양한 분야에
계신 저명인사들의 관심과 도움을 얻어 이 철, 정대철 의원님을
소개의원으로 한 시행령 개정에 관한 청원서를 지난 4월에
제출해 놓은 상황입니다. 이에 의원님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으로 저희들이 직장으로 돌아가고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이렇게 미약한 서면으로나마
간절하고 절실히 요청드립니다. 저도 이제 부모님의 곁으로
돌아가 불편하신 어머니는 집에서 요양하시고 아버지도
산재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만
하는 처지입니다. 부디 외면하지 마시고 끝까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직접 찾아뵙고 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인 줄로 사료되나 제가 수배중인 몸이라서 이렇게
전해드리게 됨을 무엇보다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이에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끝까지 읽어주심에 감사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바쁘신 의정활동 속에서도 무엇보다 차가운 가을날씨에 건강
유의하셨으면 하는 염원을 전해 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1995년 10월 2일
수배중인 대우정밀의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조수원 올림
(02-784-6037~8)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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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2-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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