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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번 : [106호/컬럼] 보편성과 네그리튀르를 넘어서
글쓴이: 민새얼 등록: 2005-02-20 00:00:00 조회: 4030

보편성과 네그리튀르를 넘어서


-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과
ꡔ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ꡕ** 프란츠 파농.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 이석호 역. 서울: 인간사랑, 1998.
프란츠 파농. ꡔ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ꡕ. 남경태 역. 서울: 그린비, 2004.
서평


민 새 얼
한노정연 연구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프랑스 식민지인 마르티니크 섬 출신으로서 1925년에 태어나서 1961년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프랑스에 유학할 수 있었던, 식민지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서 리용에서 의학을 전공하였다. 그의 관심은 철학과 문학에도 있어서 장 라크루아와 메를로 뽕티의 강의를 들었으며 키에르케고르, 니체, 헤겔, 맑스, 레닌, 훗설, 하이데거, 싸르트르 등의 영향이 그의 저서에서 나타난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그의 관심은 신경정신병과 신경외과학에 집중되어서 리용에 있을 동안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로 이주해온 흑인들의 생활상태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파농은 알제리 주재 총독의 권유로 블리다 쥬엥빌에 있는 병원에 부임하게 된다. 이 시기는 마침 알제리 민중의 독립 투쟁이 시작되려던 무렵이었고 그 속에서 파농의 정치의식은 성숙되어갔다. 이 시기에 나온 파농의 첫 저서가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Black Skin, White Mask)이다. 이 저서에서는 흑백 관계로 인해 벌어지는 흑인들의 심리적 상처에 주목을 한다. 흑인과 백인간의 왜곡된 인간관계, 백인의 흑인에 대한 편견, 흑인의 열등감 등이 사회적 배경을 전제로 서술되고 있다.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의 제1장「흑인과 언어」에서는 앙틸레스의 흑인들이 불어 구사 능력에 의해 백인 됨을 평가받고 있음이 이야기된다. 식민지인은 자신의 흑인성 혹은 원시성의 폐기를 통해 백인화 되어 가는 존재이다. 그의 백인화를 증명하려는 도구는 언어이다. 식민지 상황에서는 유럽어의 압도적인 영향 속에 원주민어가 사멸되고 그 과정 속에서 원주민어의 통사 구조에 백인어의 단어가 결합된 중간어(interlanguage)인 피진과 크레올이 나타난다. 이 피진이 원주민이 사용하는 언어가 된다. 피진을 버리고 완전한 불어를 사용하는 것은 곧 백인이 되는 것이다. 언어가 사회적 지위를 가르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 장에서 그것을 예증하는 에피소드로 어떤 백인 의사의 경우 흑인과 이야기 할 때만 피진을 사용하는 것이 제시된다. 이는 두 가지 상황에서 작용하고 있는데 첫째는 의사와 환자라는 지위의 차이이고 둘째는 백인과 흑인이라는 차이이다. 파농이 주목 하는 것은 후자이다. 백인은 피부 색깔이 이미 그가 표준에 가까운 불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해준다. 반면에 흑인은 오직 정확한 불어만이 조금이라도 그를 백인과 가까운 위치에 놓게 해준다. 그런데 백인이 먼저 흑인에게 피진을 사용하는 것은 흑인이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미리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 가정에서는 자녀에게 피진 사용을 금하고 어떤 흑인은 불어 발음을 과도하게 흉내 내어서 오히려 우스꽝스러워지는 경우도 생긴다. 위에서 언급된 상황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영어 학습자가 가장 신경을쓰는 것은 정확한 발음이다. 이는 정확함(accuracy)보다 유창함(fluency)을 강조하는 현대 외국어 교육의 추세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 영어학습자도 영어 발음 중에서 한국어와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아서 어떨 때는 영미인들도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곤 한다. 정확한 발음의 문제를 심리 언어학적으로 규명하는 일은 이 글의 몫이 아니다. 그러나 발음이 신분 구별의 척도가 되었던 예는 영국 영어의 왕실 영어(King‘s English)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음은 문법이나 구문보다는 초기에 습득되는 것으로서 본인의 노력으로는 쉽게 극복되기가 어렵다. 그래서 정확한 발음은 그가 타고난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영국과 미국보다 국제사회에서 더 낮은 지위를 갖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영어 학습자들에게 있어서 표준 발음은 그들 나라 사람들이 되려는 환상에 조금이나마 근접시켜주는 매개체이다. 이는 외국에 나가있는 한국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한국계 미국작가 이창래(Changlae Lee)의 ꡔ네이티브 스피커ꡕ(Native Speaker)의 주인공에게 가장 큰 강박 관념으로 다가오는 것이 발음의 문제였다.

발음을 고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게 해서건 극복했다고 치자. 그래도 외관상 구별되는 검은 피부는 흑인을 타자의 지위로 몰아넣는다. 이 피부색에 대한 문제가 제2장, 3장의 논의의 출발점이다. 이 장들은 각각 유색인 여성과 유색인 남성이 백인 남성과 백인 여성을 사랑하게 될 때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해 논한다. 그들이 백인을 사랑하게 되는 동기는 이성간의 사랑의 감정보다는 자신의 흑인성을 벗어 던지려는 몸부림이다.
제4장 「식민지 민중의 의존 콤플렉스」는 흑인의 콤플렉스를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마노니(M. Mannoni)의 ꡔ프로스페로와 칼리반ꡕ에 대한 비판적 읽기이다. 이 장에서 파농은 인종과 계급, 나아가서는 경제라는 토대가 상호 배타적으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사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는 인종이라는 개념을 경제적 토대라는 개념과 분리하여 변별적으로 사유하려는 태도는 백인 프롤레타리아의 심리적 추락을 방지하기 위한 전술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마노니의 입장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경제적 배타성은 그 무엇보다 경쟁에 대한 공포와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백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호, 그리고 그들이 현재의 생활수준 이하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 욕망으로부터 추동한 것”이라는 점이다.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113)
즉 땅도 없고 돈도 없는 백인들이 그들의 사회를 대상으로 행사할 잠재적 폭력을 그들보다 계급적으로 열등한 흑인이나 유태인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 폭력의 수행 주체가 익명화될 뿐만 아니라 백인 프롤레타리아의 심리적 안정감도 되찾게 한다는 것이다. 폭력이 흑인이라는 희생양을 통해서 지배 체제의 모순을 은폐하고 권력 지배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 저작에서는 정신분석학 이론을 방법론으로 차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 정신분석학에 내재된 인종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민족주의를 효과적인 지배 기제로 운영하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수행된 감정 고착이 타자에 대한 “낯설게 하기(Ungeimlich)”이다. 그것은 프로이트를 거쳐서 융의 집단 무의식으로 접목되는데, 융은 개인의 자아 속에는 어둠과 야만이 원형으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파농은 집단 무의식은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융의 심리학, 즉 낯선 모든 것을 원형적인 악으로 수용하려는 태도는 프로이트 고전 심리학의 잘못 전승된 유산이라고 비판한다.
백인의 문명이 흑인의 세계, 그리고 그곳에 사는 야만인들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동의했다. 흑인들은 모든 악의 원천이라는 사실에. 융은 줄기차게 이방인을 어두컴컴한, 다시 말해 악의 상징과 일치시켰다. 그는 전적으로 옳았다. 이러한 투사방식 혹은 전이는 고전적인 정신분석가들이 묘사해온 방식이다.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 225)
김종철은 「식민주의의 극복과 민중」에서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의 근본적인 약점은 이 책이 정치적인 현실이 아닌 심리적인 현실에 압도적으로 쏠려있다는 점에 있다고 비판한다 (138). 파농도 「서론」에서 자신의 분석을 지극히 심리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흑인이 자신의 소외를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적, 경제적 리얼리티에 대한 즉각적인 이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흑인의 열등 콤플렉스는 우선 경제적인 절차의 소산이고 다름은 그것이 가져오는 열등감의 내재화 혹은 육화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한 바가 있다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 15-16). 또한 심리적 현실에 중점을 둔다는 것은 결코 약점일 수는 없다. 식민지 문제를 다루는 저서가 무조건 정치적이나 경제적 문제만을 다룰 필요는 없다. 식민주의의 폐해는 개인의 심리, 가족, 문화 등 여러 영역에 미칠 수가 있는 것이고 또 그것들의 정치적 투쟁을 가로막기도 한다. 다음의 대화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흑인: 난 못 해요, 엄마.
리지: 왜 못 해?
흑인: 내가 백인들에게 어떻게 총질을 해요?
리지: 그래? 그네들을 괴롭힐 다른 방도가 없잖아, 안 그래?
흑인: 상대는 백인들이라구요, 엄마.
리지: 그래서? 그네들은 그네들이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를 돼지 잡듯 도살해도
괜찮단 말이냐?
흑인: 그래도 저들은 백인이잖아요.(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 174)
김종철의 비판은 오히려 그가 앞의 것보다는 덜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 저서가 파농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하여 식민지 민중들의 뒤틀린 심리를 그려내고 있지만 의미의 모호함, 현학적인 태도, 시적인 수사의 남용, 서양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과도한 인용으로 뒤틀려 있다고 하는 부분이 더 적절해 보인다. 때로는 굳이 다른 사상가의 견해를 인용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구절도 곳곳에 존재한다. 이 저서의 현학성은 제1장 「흑인과 언어」에서 묘사된 불어발음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흑인 청년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결국 이 저서는 파농 자신의 흑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과 서구 문명을 동경하고 거기에서 보편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혼재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1956년 파농은 병원을 떠나서 튀니지에 망명 중이던 알제리 혁명군 지도부 FLN에 가담하여 기관지 발간, 정치적 방향 결정, 그리고 의료 활동에 임하게 된다. 혁명운동에의 참가에서 나온 교훈들이 그로 하여금 죽기 직전인 1961년 ꡔ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ꡕ(The Wretched of the Earth)의 집필을 하게 만들었다.
ꡔ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ꡕ은 첫째 장에서 폭력에 대해 논하고 있다. 여기서는 탈식민지화(decolonization)는 항상 폭력적인 현상이고, 이는 특정 종류의 인간을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교체하는 것으로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여기서 교체의 의미는 먼저 식민지를 지배하는 계층의 교체이다. 서구 지배자에서 식민지 민중으로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서는 기존의 맑스주의 혁명 이론과는 좀 다른 양상을 띤다. 맑스주의 혁명의 일반적 모델(정확히 말하면 볼셰비키 모델)은 소수의 각성된 엘리트에 의해 지도되는 노동자 계급의 의식적인 혁명이지만 파농의 이론에서는 계급보다는 민족이 중요시된다. 왜냐하면 식민지 상황의 독특성은 경제적 현실, 생활양식의 차이보다는 인종의 차이가 더 부각되기 때문이다. 백인이기 때문에 부유하고 부유하기 때문에 백인인 것이다. 식민지에서 지식층은 그들의 룸펜적 성격으로 인해 혁명운동의 주도세력이 되지 못하며 도시인, 노동자들도 혜택 받은 존재이다. 식민지의 경제적 구조는 농민을 가장 가혹하게 수탈하여 그들로 하여금 혁명의 주도 세력이 되게 한다. 이때 폭력 투쟁이 지역별로 분화되고 다른 계층에 비해 전 근대적인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는 농민들을 스스로 각성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파농의 주장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 폭력 투쟁이 특정 종류의 인간을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교체한다는 말은 개인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들을 혁명의 주체인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뜻도 가지게 된다.
두 번째 장인 「자발성의 강점과 약점」은 먼저 장에서 논의 된 것의 연장이다. 이 장의 서두에서는 파농이 다루고 있는 알제리 사회의 특징이 약간 언급된다. 알제리는 대다수가 농민이었고 도시 노동자 계급, 숙련 노동자, 공무원 등은 국민의 1%도 안 되었다. 따라서 파농의 정치적 전략은 이러한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농민이 대다수인 사회에 노동자 계급의 전위정당을 혁명의 중심 세력으로 사고하려는 것이 불합리한 것처럼 파농의 저서도 모든 식민지 상황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장에서는 농촌에서의 봉기의 가능성과 함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중심으로 하는 봉기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장에서는 무장투쟁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에 그러한 투쟁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서도 언급이 된다. 자연발생적 무장투쟁은 격렬한 만큼 자기 부정적이 될 수도 있다. 훨씬 우세한 식민주의자들의 화력 앞에서 자발적인 투쟁은 실패하곤 한다. 그래서 명확한 목표와 방법을 가지고 투쟁은 지도되어야 한다. 또 일반 민중의 의식 수준을 향상시키려들어야 한다고 파농은 말한다.
다음 장 「민족의식의 함정」은 독립이 이룩되거나 혹은 독립이 가까워 올 무렵의 원주민 부르주아지에 대한 것이다. 민족의식은 전체 민중의 가장 깊은 포괄적인 결정도 아니고, 대중 동원은 직접적이고 가장 명백한 결과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서는 단지 빈 껍질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고 파농은 말한다. 이 말은 앞에서 민족 모순이 식민지에서 가장 결정적인 모순이라고 말한 바와는 언뜻 어긋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세계 질서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투쟁이 나아가지 못할 경우에는 민족주의가 어떤 식으로 변질 가능한지를 경고해주려고 나온 말이다. 파농이 경고한대로 현재 신생 독립국의 사람들은 쉽게 민족에서 종족으로, 국가에서 부족으로 이행해버렸다. 파농은 그 이유를 식민지 지배에 의한 민중의 불구화의 결과이고 민족 부르주아지의 지적 타성, 정신적 빈곤과 지나친 세계주의적 정신형성의 결과라고 진단 내린다. 그러나 여기서 파농의 진단은 추상적이고 그것만으로 민족의식이 지니는 한계를 모두 설명하려는 시도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민족주의 그 자체에 한계가 있다고 보는 점이 옳지 않을까? 민족주의는 본래 19세기 유럽에서 각국의 부르주아의 성장에 따라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국민국가를 세우려는 노력에서 나왔다. 또한 중앙집권 권력을 수립해서 국내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외국 상품과 자본의 유입을 억제하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그 태생부터 자기 민족(더 정확히는 민족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서 외국의 이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식민지 상황에서 적용될 때에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이념으로서 피지배자 계층을 묶어세울 수는 있지만 독립이 된 후에는 오히려 국내에서 억압적인 정치 체제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제3세계 개발독재 정권에서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 또한 과학적으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민족 개념은 현실에서는 부족 혹은 지역으로 쉽게 분해가 되어버린다. 민족주의가 본래 부르주아지의 이해에서 나온 것을 간과한 채 민족의식의 함정의 원인에 대해 순진하게 내린 파농의 해석은 한계가 있다.
이후 「민족의식의 함정」장은 민족 부르주아지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개발국의 민족 부르주아지는 그 취약한 기반으로 말미암아 쉽게 국내 문제에 등을 돌리고 구 식민지 본국과 외국 자본가들과 손을 잡는다. 그리고 외국 자본의 이익을 위해 민중을 탄압하게 된다.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는 과거 독립전쟁의 결과로 도덕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대중들의 독립, 정치적 자유, 민족적 존엄성에의 열망을 구현하고 있었다지만, 독립 이후 쉽게 민중을 배반하고 착취자의 편으로 넘어간다.
최근 탈식민주의 이론에 있어서 「민족문화에 대해」장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민족 해방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식민지 이전의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은 증대되어 간다. 이는 유럽인들의 손으로 연구되어온 성과물에서 영향을 받는다. 고대 인도 문명, 이집트, 아즈텍 문명 등은 모두 유럽인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에서 나온 관심들은 때때로 과거를 신비화하고 현실에서의 고통을 망각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천에 있어서 민족 문화의 요구는 식민주의자들의 협박, 즉 자신들이 떠나면 식민지는 야만의 상태로 떨어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한다. 자기 민족의 정당성을 방어하고 그 정당성을 지지하는 증거를 제시하기 위한 무기로서의 민족 문화는 중요하다. 또한 이것은 과거의 역사가 암흑과 치욕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을 밝혀준다. 민족 문화는 민중이 자신을 창조하고 그 자체를 보존하려는 행동을 기술하고 정당화하고 찬미하기 위한, 사고의 영역에서 민중이 행하는 노력의 총체이다. 그리고 민족 문화를 위한 투쟁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그리고 문화의 건설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토대의 해방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고 민중적 투쟁과 분리되어서 존재하지 않는다.
파농의 민족 문화에 대한 논의의 단초는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파농은 제5장 「흑인성이라는 사실」에서 한 개별적 흑인을 종족의 대표성을 띤 흑인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흑인의 경우 백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과 흑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몸부림 사이를 오가는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그는 검은 피부색 때문에 백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고 검둥이로서 특정한 행동 양식을 강제 받는다. 게다가 타고난 콤플렉스에서 탈출할 가능성도 없으며 타인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관념의 노예에서 흑인 자신의 노예, 외모의 노예 상태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그의 해결책은 흑인으로서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인 세계의 합리성 신화에서 벗어나 비합리성이라고 매도되어온 흑인 문화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그는 네그리튀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주체적으로 받아들였다기 보다는 외부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가 없어서, 자신만을 즉 흑인인 자신만을 절대적인 시작이라고 규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파농이 네그리튀르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보편성에의 욕구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의 제6장 「흑인과 정신병리」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흑인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한다. 지금까지 악의 상징으로서 흑인의 피부색을 문제삼아오는 시선에 대해 차라리 그들에게 그것을 문제삼아달라고 강요하는 대안이 제시된다. 그리고 피부색으로 야기된 흑인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의 인류라는 인식 하에 보편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무의 밑동을 하얗게 칠하는 것,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씌우는 것처럼 흑인성을 외면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흑인도 인류 사회의 하나의 주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나온다. 이 책의 제목인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미국의 흑인 가수 마이클 잭슨이다. 그는 여러 번의 성형 수술을 통해서 백인보다도 흰 피부, 백인의 얼굴 모양을 가지게 되었다. 사상 초유의 인기를 얻었지만 그에겐 수술 후 심각한 부작용이 남게 되었다. 흑인성을 부정하고 백인이 되려고 한 예와 그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아닌 듯싶다. 물론 이 책은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기 훨씬 전에 나왔다.

보편성과 네그리튀르는 아프리카 문학에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보편성의 개념은 아프리카 문학을 비판하는데 첨병의 역할을 담당한다. 네그리튀르는 빠리의 유학생이던 애미 세자르(Aime Cesaire)와 레오폴드 세뇨르(Senghor)에 의해서 주창되었다. 그것은 유럽의 팽창 과정에서 상실된 아프리카 고유의 전통을 복원하려는 미학적 투쟁이었다. 아프리카 전동의 복원 과정에서 네그리튀르의 주창자들은 전통의 낭만화 혹은 심미화라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식민지화에 의해서 현실 규정력을 상실한 전통을 부활시키는 방법은 현실의 논리를 초월한 무의식의 세계 즉 초현실세계의 구축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원형적 전통만을 미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아프리카의 고유한 동식물계, 우주관, 종교관 등 그들 글쓰기의 유일한 소재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소잉카는 네그리튀르의 이러한 전통주의를 “신타잔주의”라고 비판한다. (Chinweizu 235). 그는 아프리카에도 타자기, 석유화학공장, 과학시설 등과 같은 현대성이 상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통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문명에 대한 아프리카인의 왜소함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꼴 밖에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기차를 강철 뱀으로 비행기를 철새로 착각하는 아프리카인의 우스꽝스러운 시대착오적 이미지를 상업주의적으로 조작하는 할리우드의 왜곡된 이미지에 말려들게 될 뿐이라고 경고한다. 즉 소잉카의 주장은 아프리카인들은 더 이상 부시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의 문명사회와는 다른 아프리카의 전근대성, 정신성, 주술성 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실천적 효과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친웨이쥬, 제미, 마두부이크는 소잉카의 위와 같은 주장을 비판한다. 네그리튀르가 약점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유럽의 문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아프리카 특유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아프리카 현대 문학에 아프리카 전통적인 이야기 양식인 오레이쳐를 접목하여 아프리카의 고전적 가치를 부활시키는 혁명적인 역할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Chinweizu 256-67). 따라서 그들은 소잉카의 신타잔주의라는 비판이 유럽 중심주의적 상상력의 한 단면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그것이 소잉카의 아프리카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연유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에서의 파농의 위치는 양 진영에서 중간쯤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보편성을 추구하다가 자신의 흑인성을 깨달으며 절망하고, 그러면서 정체성의 획득을 통해 새로운 보편성에 이르는 과정을 제시한다. 이는 파농의 배경이던 주체 중심의 개인주의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나는 사물의 질서를 찾고자 하는 의지에 고무되어 이 세상에 나왔다. 내 정신은 세계의 기원에 도달하려는 욕망으로 가득차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목적의 중심임을 안다.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 139)
보편성과 네그리튀르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후자를 통한 전자의 추구로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이 끝난 데 비해서 ꡔ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ꡕ은 즉 네그리튀르와 유럽적 보편성 양자를 넘어서고 있다. 그는 이 저작에서 민족문화를 분석하면서 네그리튀르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파농은 식민지 독립 운동과 분리된 채 역사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흑인성을 만들어 내는 네그리튀르의 주창자에 대해 비판을 한다.
아프리카 흑인 문화가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은 노래, 시, 민속에서가 아니라 민중의 투쟁에 연관되는 경우다. . . . 아프리카 흑인 문화와 아프리카의 문화적 통합은 무엇보다도 자유를 위한 민중의 투쟁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얻어진다. (ꡔ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ꡕ 266)
현실과 접촉이 없는 문화는 노래나 시 혹은 민속의 수준에 머물게 되고 결국 과거 회고조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네그리튀르에의 집착은 미개한 아프리카 개념을 체계화시켜주는 또 하나의 식민지적 정형화(stereotyp
e)에 기여하게 된다. 파농에 따르면 “독립을 추구하는 억압받은 자들의 연대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모두가 다 민족문화의 탄생과 관계된다” (자하르 96). 위 인용문은 유럽중심의 보편성을 넘어서서 아프리카의 해방이라는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편협한 아프리카 중심주의라고 매도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파농은 아프리카인이 잔인하다고 하는 것은 식민지 체제의 빈곤과 억압의 산물이라고 한다. 억압된 상황은 도덕적 가치를 체현하거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런 상황에서는 인간의 존엄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아프리카의 해방은 아프리카 문화의 존재 조건이고 아프리카인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재를 하는 첫 단계가 된다.
파농의 민족 문화론은 식민지 시대에서 저항 예술의 방향을 밝히는 데는 유효하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이 독립한 이후에도 계속 바람직한 방향으로 남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예술의 당위성을 설정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일단 가정하자. 예술 자체만을 위한 예술이라는 것이 예술의 전부는 아니고, 예술은 작가 또는 그가 속한 집단의 세계관의 투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야기꾼들이 민족적 전형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추구해 나간다는 지점이다. 하나의 전형이라는 것을 설정해 놓으면 그 전형과 그것이 아닌 것 사이를 가르게 된다. 그러면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을 배제하고 나아가서는 배척하게 된다. 파농이 고답파, 상징주의자,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를 식민지로부터 나온 문학이라고 쉽게 단정 짓는 것이 그 결과이다. 식민지 본국의 압도적인 문화적 우위 속에서는 피지배자의 문학은 어떤 식으로건 그것의 영향을 받게 된다. “민족적 전형”이라는 것도 유럽 리얼리즘의 영향을 빼놓고서는 생각 할 수가 없는 개념이다. 문제는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을 배척하는 데에 있다. 식민지 현실은 전근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때로는 본국에서 온 근대적인 것 이상이 그 사회의 구조를 이루게 된다. 이런 현실에서 가능한 문학은 리얼리즘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1930년대 문학이 모더니즘의 경향을 일부 띠었던 것을 지식인의 나약함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 모더니즘 문학이 수용되고 퍼져나간 기반이 된 모더니티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한 민족적 전형이라는 것이 나중에 해방 이후에 국가의 이념으로 굳어지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우리나라의 관변 문학(소위 “새마을 문학”)이 그 실례이다. 둘 다 전형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파농의 주장에는 몇 가지 한계점들이 존재하고 또 각 나라나 시대별에 따라서 적용될 수 없는 점들도 많다. 그리고 그것이 도그마로 굳어졌을 때에는 파농이 비판한 독립 이후의 부르주아지의 행보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의 가능성은 소외와 그것의 극복에 있다. 파농의 소외 개념은 맑스의 ꡔ경제학-철학 초고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맑스는 인간은 노동에서 소외를 느끼는데 노동자는 생산이라는 활동 자체에서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노동자는 그의 일을 그의 진짜 자신의 삶의 일부로 여기지 못함으로 인해서 편안함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 인간은 ‘유(類)적 존재(species-being)’로서의 조화로운 노동이 배제된 상태의 노동에서 그의 ‘유적 생명’ 그의 사회적 본질을 박탈당한다고 하였다. 파농의 업적은 흑인이 자기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존재 자체의 정당성을 위협받는 것으로서 소외를 식민지의 상황에서 재 위치시켰다. 인간의 소외는 심리적인 과정을 동반함으로 식민지인의 소외도 심리적인 분석이 필수적이게 된다. 그럼으로 인해 탈식민주의 이론에게 인간의 정신 구조를 분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당시까지 흑인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되었던 편견을 깨고 흑인의 정신 이상이 사실은 백인의 지배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주었다.
소외가 존재하면 그것의 극복이 필요하다. 파농은 맑스와 마찬가지로 탈소외를 사물이 그 자체의 고유한 위치를 회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식민지 운동에서 소외의 극복 개념을 도입함으로서 식민지 해방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며, 편협한 민족주의라는 비판을 극복하고 인간 자존의 길임을 명확히 하였다. 이제까지의 보편성은 백인만을 위한 보편성이었지 흑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유럽은 서구의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들의 죄를 정당화하고인류의 4/5를 노예로 만들었다. 만일 제3세계의 투쟁이 유럽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던 문제를 해결한다면, 즉 유럽 체제를 지탱해주는 기반인 식민지 통치를 끝냄으로서 거기에 충격을 가하여 유럽인들을 포함한 인간의 내적 기능을 갈라놓고 정신을 황폐화시킨 유럽의 범죄를 막아내고 되돌린다면, 파농의 말처럼 제3세계의 투쟁은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으로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ꡔ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ꡕ 357). 한/노/정/연


[ 참고문헌 ]
김종철. 「식민주의의 극복과 민중」 한마당 편집실 133-62.
자하르, 레나테. ꡔ식민주의와 소외ꡕ 최정섭 역. 한마당 편집실 9-132.
파농, 프란츠. ꡔ검은 피부, 하얀 가면ꡕ 이석호 역. 서울: 인간사랑, 1998.
_____. ꡔ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ꡕ 남경태 역. 서울: 그린비, 2004.
한마당 편집실 편. ꡔ프란츠 파농 연구ꡕ 서울: 한마당, 1981.
Chinweizu, Jemie Madubuike.Toward the Decolonization of African Literature.
London: Routledge,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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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DVADrEDYWJCeDjJrX YhQpT / 2014-06-01 
3. Jopa Xyu / 2010-08-21 
2. George Bush Bill Cl / 201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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