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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번 : [106호/연재-기획] 전라도 답사기(4) 비단에 피가 적시듯 금강은 역사를 안고 흐른다
글쓴이: 정혁기 등록: 2005-02-20 00:00:00 조회: 3527

전라도 답사기(4)
-비단에 피가 적시듯 금강은 역사를 안고 흐른다

정 혁 기
자유기고가
se oul_blues @ naver.com


기•행•문•




금강유역도
호남에는 강이 많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섬진강. 호남 5대강이라 부를 수 있다. 이 강들은 각자 독자적인 수계를 이룬다. 물길이 모이지 않고 각자 사방으로 흐른다.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이를 ‘산발사하(散髮四下)’라 설명했다. 반면에 한강은 중부지방을 대표하며 물은 한강으로 모인다. 낙동강, 대동강도 이와 유사하다.
호남을 대표하는 강은 금강(錦江)이다. 길이와 유역면적에서 단연 앞선다. 길이가 407.5km로 천리가 넘고, 유역면적은 1만여 평방미터에 이른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흐름을 시작하여 진안 - 금산 - 영동옥천을 거쳐 천원연기 - 공주- 부여 서천 -익산을 지나 장항과 군산 앞바다로 활처럼 굽어 흐른다. 유역이 넓은 만큼 20여 개의 지천이 합류한다. 이름도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해서 적등강, 적벽강, 천내강, 웅진강, 곰강, 백마강, 강경강, 진강 등으로 불려왔다.

금강 발원지 신무산(897m)에서 이어지는 상류는 이름 그대로 산을 휘돌아가며 결 고운비단같이 펼쳐진다. 굽이치는 곳엔 아름다운 풍광이 반기고, 멈추는 곳에는 들과 역사가 답사자를 붙잡는다. 중. 하류는 어떠한가. 곰강, 백마강이라 불리는 부여, 공주의 강 주변에는 유서 깊은 역사유적지대를 이루어 놓았으며, 강경을 거쳐 서해바다에 이르는 하류는 갯내음이 물씬 나는 짭짤한 젓갈시장 같은 생활의 분주함이 있고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황포돛배의 여유가 흐른다.


‘조선조의 광주사태’ 기축옥사

죽도와 금강
동쪽의 백두대간과 서쪽의 금남정맥에서 흘러오는 물을 합하며 진안, 무주, 금산, 영동군 지역을 굽이굽이 도는 금강 상류 답사는 흐름을 따라가며 강이 변해가는 모습만 봐도 발걸음이 즐겁다. 더욱이 강변 곳곳에는 사연이 담긴 마을과 사찰, 서원, 정자, 비석 등이 길을 풍성하게 해준다. 게다가 조선중기의 역사를 뒤돌아 볼 수 있는 답사지가 있어 일조이조의 수확을 거둘 수 있다. 그 답사지는 바로 진안 죽도(竹島)와 금산의 칠백의총(七百義塚)이다.
칠백의총
죽도는 유원지로 알려져 있지만 왕권 변란을 모의한 역모자로 몰려 죽은 정여립(鄭汝立, 1544~1589)의 비운이 배어있는 역사 유적지다. 그는 전북 전주태생으로 조선시대의 동서 분당기에 동인에 속해있던 인물로 역모로 몰리자 죽도로 피신해 그를 따르던 사람과 함께 자결했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옥쇄한 중봉 조헌(趙憲, 1544~1592)을 비롯한 칠백 의병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유적지다.
이 두 유적지는 비슷한 시기, 즉 16세기 조선시대 선조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두 사건은 시기적으로도 불과 3년 사이여서 16세기 조선 중후기 시대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관련 중심인물은 죽도는 1589년의 기축옥사(己丑獄事), 소위 ꡐ정여립 모반사건ꡑ의 중심인물이었던 정여립이고, 칠백의총은 조헌을 비롯한 의병이다.

16세기는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년) 등 4대 사화(士禍)를 비롯하여 훈구파와 사림파간 피를 부르는 정쟁이 끊이지 않았다. 밖으로는 왜적의 침탈과 약탈이 극심했다. 왕권은 허약했고 중앙귀족과 사대부들은 권력싸움과 치부에 눈이 충혈 되어 있었으며 부패했다. 자연히 민중생활은 착취와 탐학의 대상이 되어 하루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살 길을 잃은 농민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랑했고 과중한 역을 피해 도망했다. 각지에서는 도적과 화적패가 들끓었고 일부는 지배층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연산군에서 명종에 이르는 시기는 소위 ‘적란(賊亂)의 시대’ 라고 말할 정도로 임꺽정의 난(1559- 1562년)을 비롯해 크고 작은 도적집단의 활동과 농민저항이 빈발하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도 중앙귀족과 유학자들은 권력다툼에 골몰했다. 그리고 선조대(1567-1608)에 이르러서는 오랫동안 권력으로부터 배제되고 피해를 받아오던 사림파가 재야에서 제도권으로 진입해 중앙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성리학을 추종하며 훈구파를 부패세력으로 공격하며 비판했던 사림파는 중앙권력을 장악하자 마찬가지로 부패해 간다. 권력에 앉으려는 자는 많았으나 자리가 제한되어 있어 권력의 자리를 두고 치열한 내부 갈등이 일어났다. 그들은 재야에 있을 땐 개혁을 외쳤으나 조야의 자리를 차지하자 같은 행태로 변질했다. 그리고 나뉘어 졌다. 분열의 직접적인 발단은 1575년 이조전랑직(吏曹銓郞職)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으로 일어났다. 이조전랑직은 정5품으로 직위는 낮으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직책으로써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여 논의를 거쳐 선출하였기 때문에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어왔다. 결국 사림파는 이를 기화로 동서로 분열되었다. 이후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 대립은 1589년(선조22년)의 기축옥사, 소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폭발한다.

그러나 ‘정여립 모반사건’은 의문투성이다. 역모로 몰려 죽은 자의 뒤가 그렇듯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기록은 말살되거나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집터는 그가 태어난 곳이라는 이유로 숯불 지짐을 당한 것으로 모자라 파헤쳐져 못으로 변했다. 승자가 남긴 기록들에 의존해 행간을 읽을 수밖에 없다.
특히 정여립의 생애 중 1585년 선조와 결별하고 전주로 낙향하여 1589년 10월 죽기 전까지의 4년간의 행적은 집중적인 조명이 필요한 시기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죽도에 서실을 세워 활동을 넓혀갔으며 승려들과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대동계는 당시로서는 유교적인 틀을 뛰어넘어 사농공상의 직업이나 양반 상놈 신분차별을 하지 않았으며 모두 하나로 같다는 대동사상의 뿌리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계원들은 자주 회합하여 글을 읽히는 한편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했다. 경학과 시문에도 두루 통달했던 정여립의 영향력은 대동계와 함께 급속히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이 합류하며 세력이 커져갔다. 대동계의 실상은 1587년 왜적이 전라도 해안에 침입했으나 관군이 수습하지 못하자, 전주부윤 남언경의 협조요청을 받은 정여립이 대동계 무사를 동원해 왜구를 물리친 데에서 그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정여립의 사상은 어디까지 이르렀을까. 그가 꿈꾼 대동세상을 실현할 방도로 대동계를 조직하여 문무를 익히고 세력을 확장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 정확한 목적과 실태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천하가 공물인데 따로 주인이 있겠느냐(天下公物說)’고 주장하는 한편 ‘인민에 해 되는 임금은 죽여도 되며, 인의가 부족한 지아비는 버려도 된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펴고 주자를 신봉하는 성리학을 비판했다. 당시로는 혁명적인 사상이다. 백성의 마음은 곧 천명이니, 백성을 괴롭히는 군주는 갈아 치워야 한다는 맹자의 정치사상과 일맥상통한 점이 발견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의 일단은 주위 동지에게는 동조를 받았겠지만 지배계급을 이루고 있는 중앙귀족과 성리학을 추앙하는 사대부, 선비들에겐 경계심을 넘어 위험천만하게 보였을 것이다.
마침내 그에게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1589년 10월 2일(선조22년) 정여립이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고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했다는 역모 고변이 황해감사 한준으로부터 선조에게 전해졌다.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그 소식은 정여립에게도 날아들었다. 그는 전주에서 동지 변숭복 등과 함께 서실이 있던 죽도로 몸을 피했다. 그를 생포하기 위해 관군이 들이닥쳤다. 양측은 부귀산과 죽도에서 대치했으나 변숭복은 우리가 잡혀 심한 고문을 받고 동지들의 이름을 고하는 날이면 많은 사람에게 화가 미칠 것이니 차라리 여기서 죽자며 정여립에게 목을 내밀었다. 정여립은 그의 목을 베고 자결했다. 고변이 들어간 지 불과 16일이 지난 10월 18일이었다. 정여립과 변숭복의 시체는 서울로 보내져 고관대작과 장안 백성이 둘러보는 가운데 머리가 잘리고 사지를 토막 내는 능지처참형에 처해졌고 토막난 시체는 팔도에 돌려졌다.
그러나 사건은 정여립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속해 있던 동인에 대한 서인의 무차별적인 무고가 잇따르며 피의 옥사로 이어졌다. 정여립이 조선왕조를 개변할 음모를 세워 실제 반역을 행하려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동인은 서인세력에 의해 무자비하고 전율적인 참살을 당했다. 학살당하거나 사옥을 치른 이가 무려 1천여 명이었다. 특히 호남지방은 집중적인 피해를 받았다. 정여립이 전주 태생이었고 그와 교분을 가진 호남인이 많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여립과 교분이 있다는 이유로 호남의 유생과 관련자들은 중앙정치의 놀음에 휘말려 무고한 생명을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고문, 형벌 등으로 죽은 이로 이발, 정개청, 백유양, 최영경, 정언신 등 이름을 들자면 이루 셀 수가 없다. 죽은 정여립의 시신을 염해준 자마저 귀양길에 올랐다. 동인의 거두였던 남평 출신 이발은 최대의 피해자였다. 그는 역모로 몰려 온몸의 살이 온전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고문 끝에 숨졌다고 전해진다. 그의 어머니부터 형제, 어린아이까지 형을 받고 집안이 멸문의 지경에 이르렀다. 혹자는 이를 ‘조선조의 광주사태’라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정치적 충격이 컸고 피해자가 많았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이 사건으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의 이름을 얻어 등용길이 막혀 오랫동안 중앙 정치무대로부터 소외와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죽도 옆에는 천반산(647m)이 서 있다. 대동계원들이 병마를 훈련하는 장소였다고 전해지는 산이다. 산 높이도 적당하고 경사가 제법 가파르긴 하지만 굽이굽이 산을 끼고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는 맛이 일품이다. 정상에 서면 사면팔방이 트여있어 일대의 산과 이어지는 능선이 가슴 가득 안겨온다. 천반산에서 바라본 능선

죽도 일대는 2001년 건설된 용담댐의 영향으로 지금은 옛 모습을 잃고 이름 그대로 섬이 되어버렸다. 물에 잠긴 섬처럼 정여립에 관한 사실도 물에 잠겨있다. 장수에서 흘러내려오는 금강과 무주 덕유산의 물을 모아 내려온 구양천이 만나는 죽도와 천반산 일대는,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자취와 흔적이 없다. 역모의 주동자에게 바칠 기념물은 무상한 세월이다. 금강이 천반산을 감돌며 말없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죽도를 떠나 금산으로 가는 길은 13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길 중간에는 금강의 첫번째 댐인 용담댐을 만난다. 2001년에 건설된 다목적댐으로 전주․익산․군산․김제, 장항 등 서해안 지역 주민과 공장․농지의 물 공급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댐이다. 댐 높이는 70m, 길이는 498m이다. 총저수량은 8억 1500만t, 수몰 면적은 950만 평이다.
용담댐에서 금산은 북쪽방향이다. 그러나 금강 상류를 답사하려는 일정을 잡는다면 용담면사무소가 있는 13번 국도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금강을 따라가는 길을 추천한다. 무주군 부남면을 지나 남대천을 모으고 금산군 부리면으로 흐르는 이 구간은 금강의 감춰진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길의 중간에 위치한 무주에는 덕유산 국립공원, 적성산성, 남대천 반딧불이 서식지, 구천동, 한풍루 등 볼만한 곳이 적지 않다. 하룻밤 묵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무주는 산과 계곡이 깊고 수려해 무진장의 원조라 불러 손색이 없다. 읍은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주는 가로등이 인상적이다. 가로등이 반딧불을 형상화한 정겨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저녁에는 마치 반딧불이 불을 켜듯 가로등이 불을 밝힌다. 해진 저녁에 친구나 연인과 함께 반딧불 가로등 아래를 걸으며 한풍루, 남대천을 돌아보는 것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호서・호남을 지키다

정여립과 조헌은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면서 가는 길이 달라졌지만 처음에는 이이의 문하로 동문관계였고 나중에 정여립이 서인을 떠나 동인으로 옮기면서 회복할 수 없는 갈등관계에 서게 된다. 조헌과 정여립은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선봉에 서 있었다. 조헌은 정여립이 역모를 꾀할 것이라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으며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 해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풀려나기도 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금산전투에서 왜적의 칼을 맞고 죽는다.
조헌의 사상적 경향은 성리학에 기초한 왕도정치를 신봉한 문인으로 직언을 서슴지 않고 비타협적인 강직한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는 1591년 도요테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전국을 통일하고 조정에 사신을 보내 명으로 가는 길을 비키라는 요구를 하자, 지부상소(持斧上訴)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지부상소란 도끼를 메고 상소를 올리는 것으로 도끼로 왜국 사신의 목을 치라는 요구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궁궐 주춧돌에 이마를 부딪쳐 유혈이 낭자했다고 전한다. 그는 왜군의 침입을 예견했던 것일까. 그는 결국 내년 봄 너희들이 산골로 도망칠 때에는 나의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 한탄하며 옥천으로 내려왔다. 그의 말대로 1592년 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1592년 1월 6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동령으로 시작된 임진 왜란은 4월 13일 왜병선봉이 부산 영도에 상륙하여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언양, 김해, 영천, 성주, 충주성을 차례로 점령하며 부산상륙 불과 3주만인 5월 3일에는 서울이, 6월 15일에는 평양성이 떨어졌다. 파죽지세였다. 한강을 넘어온 왜군은 “조선국에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된다. 험한 고개에도, 긴 강도 수비하지 않는다”고 조롱했다. 임진강의 방어선도 무너졌다. 조정에서는 선조의 피난처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신하들이 명나라 망명을 주장하고 일부는 임금의 가마가 한 걸음이라도 우리 땅을 떠나면 조선은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다며 만류했다. 선조는 “백방으로 생각해봐도, 내가 가는 곳은 적도 갈 수 있으므로 본국에는 발 붙일 곳이 없다”며 피신을 서둘렀고, “명나라가 허락하지 않더라도 나는 비빈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널 것이니, 경들은 세자와 함께 함경도로 가서 명의 원군을 기다리라”고 명나라 행을 재촉했다. 왜군이 추격해 오고 있었지만 왕을 지킬 근왕병을 모집해도 누구도 응모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결국 선조는 여차하면 명나라로 망명하기로 하고 의주로 도망쳤다. 마치 이승만이 6.25한국전쟁 때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서울을 빠져나갔을 때처럼. 그러나 이 길에도 몇몇 신하가 따라 갔을 뿐 길을 인도해야 할 파주목사와 장단부사는 도망했고 경기감사는 누운 채 묵묵부답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선조가 도망 길에 오른 것을 안 민중들은 분노에 떨며 대궐과 노비문서가 보관된 정예원 등을 불살랐다.

왜군 1.2.3군에 이어 4.5.6군 등 후속부대가 이어 상륙했다. 이중 제6군 고바야가와다께가게(小早川隆景)와 승장 안고쿠지에케이(安國寺惠瓊)는 1만 5천여 군사를 이끌고 추풍령을 넘어 영동을 거쳐 금산을 점령해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들의 목적은 곡창 호남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 1차 목적지는 ‘호남 제1’ 전주성. 왜군은 남북군 두 부대로 나눠 전주성을 협공할 채비를 갖추었다. 왜군이 전라도로 공격해 들어올 것을 안 의병도 이를 격퇴코자 금산으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조선군과 왜군 사이에 6월부터 8월까지 2달여에 걸쳐 금산일대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다. 전주로 나가려는 왜군과 이를 막으려는 조선군 사이의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
금산에서 전주로 가는 길은 두 방향이 있다. 하나는 서쪽 길로 배티재(이치)를 넘는 현재 17번 국도를 따라 완주군을 거쳐 들어가는 길이다. 또 하나는 남쪽 길로 진안을 거쳐 곰티재(웅치)를 넘어 들어가는 길이다. 왜병 북군은 배티로, 남군은 곰티로 향했다. 7월 8일 곰티에서, 7월 9일 배티에서 양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곰티에는 안고쿠지 에케이가 지휘하는 왜군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전진 배치된 의병장 황박이 1진 선봉에 서고 나주판관 이복남이 2진에, 김제군수 정담과 해남현감 변응정이 3진에 배치되어 양일 간에 걸쳐 격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았지만 역부족으로 백병전 끝에 대부분 전사했다. 일본군은 곰티를 넘어 전주성 밖까지 진출했다.
배티에서는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의 군대가 고바야가와 다께가게의 왜군을 저지하기 위해 동복현감 황진과 더불어 1천5백여 군사를 이끌고 방어시설을 갖추어 왜병을 기다렸다. 왜병은 7월 8일 새벽에 압도하는 병력과 조총 등 신무기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양군은 저녁까지 일진일퇴의 혈전을 거듭한 끝에 왜군은 이치를 넘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치, 배티 싸움 외에도 금산에서는 전라도로 공격해 들어가려는 왜적의 길을 막기 위해 눈벌 싸움, 연곤평 싸움, 황당촌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들은 왜군에 막대한 전력손실을 입혀 끝내 전주성을 공격하지 못했고 호남・호서 진출을 포기했다. 그들은 결국 무주에 주둔한 군사들과 함께 영남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금산이 호서・호남을 지킨 것이다. (끝부분 자료 참고)




무명용사의 위패와 다시 일으켜 세운 파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조헌은 관직으로부터 물러나 옥천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곧 격문을 돌려 의병 모집에 나섰다. 그는 충청우도에서 1천 6백여 명의 군사와 식량을 모집하고 승군 장군인 영규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고 선조가 있는 북으로 가기 위해 온양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그는 금산의 왜적을 토벌하는 쪽으로 방향 전환한다. 금산의 왜병을 소탕하여 후방을 교란할 적군을 없애고 북으로 올라가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 때 조헌의 의병은 관군과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순찰사는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조헌의 부하로 들어가서 활약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부모와 처자를 잡아가두고 조헌 의병군에게는 지원을 못하게 했다고 순의비에 적혀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의병이 흩어졌지만 남은 7백여 의병군은 금산으로 향했다. 원래 관군과 협공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전투를 늦추자는 호남순찰사 권율의 편지를 받지 못한 조헌 의병군은 온양, 유성을 거쳐 8월 18일 금산성 10리 밖까지 진주해 왜군과 마주쳤다. 왜군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기회를 노리고 새벽부터 3대로 나누어 공격해 왔다. 왜군은 수차 의병의 공격에 패해 물러섰으나 지원이 끊겨있는 의병군은 화살조차 떨어진 상황에서 싸움을 해야 했다. 진중에서는 불리한 싸움을 깨닫고 일시 후퇴할 것을 논의했으나 조헌은 “남자가 죽을 지 언정 구차하게 살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며 죽음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왜란 당시 많은 수령방백들과 유학자들이 평소에는 큰소리를 치다가도 전쟁이 일어나자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고 도망하거나 위험을 피해갔지만 적에게 길을 내줄 수 없다는 각오였다. 결국 의병은 세 번이나 왜적을 격퇴시켰으나 혈전 끝에 전원이 옥쇄하고 말았다.
묘역에는 신위를 안치한 종용사를 비롯하여 칠백의총, 순의비, 비각, 순의탑, 기념관 등이 배치돼 있다. 의총은 경내의 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의총은 당시 싸움이 끝난 후 4일 후 조헌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 등이 시신을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 칠백의사총이라 부른 데에서 연유했다. 일제강점기에 분묘는 사당, 비석과 함께 파헤쳐지고 헐리어 비바람 속에 버린 곳이 되기도 했다. 이른 아침 이어 칠백의총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정갈히 다듬어 놓은 묘지에 적막이 흐른다. 하지만 지하에 묻혀있을 조헌은 외롭지 않아 보인다. 사람이 죽으면 한줌의 흙더미로 홀로 묻히지만, 그는 7백여 의병과 ‘함께 묻혀있어서’ 일어나는 감정일 것이다. 의총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터였을 금산 들을 바라보고 있다.
종용사
종용사(從容祠)는 칠백 의병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 사당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싸움이 일어난 음력 8월 18일에 해당하는 9월 23일에 제향을 올린다. 1647년 호서・호남 유림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일제강점기에 헐렸으나 1952년 다시 복원됐다. 사당 앞에는 마침 한 관리여직원이 향로에 아침 향을 피우고 있다. 들어올 땐 아무도 없던 경내에 출근한 관리 직원들이 움직이면서 경내가 초겨울 아침 안개 속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종용사에는 21기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 의병장 조헌, 승장 영규, 의병장 고경명, 황당촌 싸움의 변응정 등 각 의군의 장수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막좌 및 사졸의 위패가 차례로 서있다. 하나하나 위패를 지나 마지막에 이르니 무명용사의 위패다. 관직과 가문이 밝혀진 희생자는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할 테지만, 어지럽고 부패한 시대를 만나 산화해간 대부분의 민초는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조선왕조는 5백 여년 동안 존속했지만 대부분의 기간에 걸쳐 무명용사와 같은 민중의 희생 위에 간신히 지탱했다. 특히 중후기의 조선왕조는 중앙귀족에 휘둘려 무능했으며 사대부와 양반계급은 농민을 착취하고 권력싸움에 눈이 멀었다. 그런 상황으로도 임란 후 3백여 년을 더 지탱해 나간 나라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료의 가렴주구와 농민반란으로 점철된 17-18세기를 지나 결국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20세기 초에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의 역사로 종결되는 조선왕조를 생각하니 무명용사의 위패 앞에서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민초의 원혼들은 피눈물을 삼켜왔을 것이다.
이곳저곳 깨지고 이어붙인 순의비
종용사 앞뜰에는 순의비(殉義碑)가 서 있다. 그런데 형체가 처참하다. 여기저기 깨지고 금이 가고 땜질 자국이 선명하다. 그래서 파비(破碑)라 불린다. 순의비는 1603년 칠백의총 옆에 건립됐는데, 일제시대에 항일유적 말살정책으로 금산경찰서장 이시까와 미찌오(石川道夫)에 의하여 폭파된 내력을 지닌 비다. 나라를 빼앗기니 비석까지 수난을 받았다. 산산조각이 난 비석을 몰래 땅속에 묻어 보관해 오다가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보았고, 이 때 깨어진 빗돌 조각들을 이어 붙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묘역을 나와 금산시내를 벗어나니 다시 금강이 반긴다. 금강 상류는 볼수록 비단 같은 강이다. 강물 속으로 비단에 피가 배듯, 피로 물들여진 땅의 역사도 함께 흐르고 있다. *


[ 참고 ]
‘눈벌싸움‘은 고경명이 광주에서 모집한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가던 중 왜적이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진로를 바꾸어 7월 9일 이치와 금산 사이의 눈벌에서 일어난 전투다. 고경명은 이 싸움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금산전투의 마지막 전투라 할 수 있는 ‘황당촌싸움‘은 곰티전투에 참여해 중상을 입고 살아난 해남현감 변응정이 금산 연곤평 싸움에 조헌과의 합류를 약속했으나 연락이 잘못되어 이를 지키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다 조헌의 순절소식을 듣고 8월 27일 수십기 의병으로 금산성에 돌격하여 순절한 전투다. ‘연곤평 싸움‘은 의병장 조헌이 승장 영규(靈奎)와 함께 관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7백여 명의 의병과 함께 싸우다 전원이 전사한 전투다. 이때 전사한 이들의 유골을 안치한 무덤이 금산 칠백의총이다. 묘역은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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