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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번 : [106호/컬럼] “미안하다, 웰빙해라”
글쓴이: 보건의료학생들 숨 등록: 2005-02-20 00:00:00 조회: 3407

“미안하다, 웰빙해라”
- 웰빙 담론과 민중건강권 -
열•린•마•당•2•


보건의료학생들 ‘숨’** 보건의료학생들 ‘숨’은 말 그대로 보건의료계열 학생들의 모임으로, 건강이라는 ‘정치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사회적 건강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을 함께 하려고 2003년에 만들어졌다. 얼마 전 진행되었던 2005 보건의료학생 겨울 캠프에서 웰빙을 주제로 분임 토론을 진행하기 위해 “웰빙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라는 ‘숨’ 내 소모임을 급조하기도 했다. 이 글은 웰찬사 멤버 셋이 같이 쓴 글이며, 이 글을 쓸 때에는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웰빙 담론 세미나(비타 500팀)’의 세미나 자료와 내용들을 많이 참고하였다.

무영, 성진, 윤영


어떻게 사냐건 “웰빙이라며 웃지요”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김씨의 하루는 새벽 5시 집 근처 국선도장에서 시작된다. 요가를 배워볼까 생각했지만, 자신의 개성을 살리고 싶어 요가 대신 국선도를 선택했다. 힘찬 구령에 맞춰 스트레칭을 하고 단전호흡으로 기운을 돌리다 보면 시계는 어느덧 6시15분을 가리킨다. 아침 식사는 8가지 곡물로 만든 생식에다 껍질째 먹는 과일로 가볍게 한다. 김씨의 업무시간은 하루 10시간으로 상당히 긴 편이다. 그래서 그는 근무환경이라도 웰빙형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사무실 곳곳에 큰 화분 3개와 작은 화분 5개를 올려놓았다. 뭔가 음이온이 나와서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과음 과식은 웰빙의 최대 적이다. 그는 부서회식이나 소모임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앞장서 예약을 도맡는다. 소주보다는 와인을 권유하는 음식점을 찾아 주인과 입을 맞춰 놓는다. 그 날은 꼭 와인에 삼겹살을 먹고 기분 좋게 집으로 향한다. 김씨는 오는 11월 중순 결혼을 앞두고 있다. 가끔 주말에는 예비신부와 함께 온천이 있는 지역으로 차를 몰고 가 3시간 정도 트레킹을 하고 온천물에 몸을 푼다. 요즘 김씨의 고민은 지은 지 2년이 채 안 되는 신혼살림을 차릴 아파트에 어떻게 새집증후군을 예방할 수 있을까 이다.”
웰빙이라는 단어가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삶에 대한 추구’의 이미지를 지니고서 신문지상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여름이다. 9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요가와 채식에 흥미를 갖는 동양적․자연주의적 라이프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organic’과 ‘well-being’은 2004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팔리는 마케팅 기호가 되었다. 어느새 슈퍼와 편의점은 녹차와 녹색 식용색소를 함유한 초록색 슈렉 과자들과 검은콩․검은깨를 함유한 음료수들로 넘쳐나게 되었고, 온 국민의 피로회복제는 박카스에서 비타500으로 바뀔 추세다. 더불어 이전에 맛있는 색깔로 상징되었던 흰색과 빨간색이 건강하지 못한 색(표백, 살찌는, 패스트푸드 등)의 이미지를 띄게 되었고, 반대로 식욕을 떨어뜨리는 녹색과 검은색이 건강한 음식을 대표하는 색깔로 자리 잡았다. 유기농 식품 매장은 불황 중에서도 경기를 타지 않고, 요가원이 한 동네에 하나씩 들어섰다. 웰빙은 이렇게 다가왔다. 패턴화된 라이프스타일의 추구, 혹은 특정한 상품들의 소비.
물론 웰빙이라는 말이 등장한 시기와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웰빙이라는 단어 자체는 ‘잘 먹고 잘 사는 법 서구식 식문화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꼼꼼히 얘기하며 채식의 중요성을 역설한 다큐멘터리. 채식 열풍을 일으켰다.
’이나 ‘환경의 역습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는 아이들의 문제를 다른 다큐멘터리.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는 아이들의 부모 세대가 가공식품과 서구식 식문화를 본격적으로 익히며 성장한 첫 세대라는 점을 주목하며, 부모의 체내에 축적된 각종 식품첨가물이 아기의 몸에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중요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심각하게 오염된 환경이 아토피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 등의 다큐멘터리가 절찬리에 방영되던 무렵, 2000년대부터 시작된 채식과 요가, 자연주의적 삶이 유행의 열꽃을 설명하고 그것을 트렌드화시키기 위해 들여온 말일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웰빙이 아니고서는 이 장기적 불황을 탈출할 어떤 키워드도 찾지 못하고 있는 판국이라고 하니, 웰빙이 이렇게 ‘웰빙’하고 있는 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궁금한 것은 여전히 따로 있다. 어쩐 일로 ‘웰빙’이라는 라이프스타일이 이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삶 각각에까지 이다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웰빙 담론이 어떠한 장애물과 반발도 없이 21세기를 대표할 이데올로기로 확고하게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일까.


라이프스타일로서의 웰빙, 다섯 가지 함의

1) 사회 구제에서 개인 구제로
웰빙(Well-being)은 말 그대로 ‘잘 살아 보세’이다. 고급 브랜드화를 통해 호사스런 분위기를 한껏 풍기고 있는 웰빙의 함의가 고작 60-7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새마을노래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너무 자존심 상할까. 그러나 염려마시라, 숨겨진 의미는 좀 더 험악하니까.
90년대 말 2000년대 초, 갑작스레 잘 살아보자고 바둥거리기 시작하고 인생 대박 로또가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이유는 뭘까. 적어도 80년대는 ‘지금 만족스럽게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앞으로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은 있었다. 내 집 마련의 꿈, 취직의 꿈, 사회 개혁의 꿈, 수많은 꿈들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열심히 일하면, 열심히 사회 운동을 하면, 내 삶은 혹은 사회는 달라질 수 있을 거야. 즉 얼마 전까지는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말을 거치면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믿음이 깨어져나갔다. 그러면서 배경 음악 흘러나온다.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새롭게 업그레이드되어 등장한 이 ‘잘 살아 보세’는 60-70년대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 때가 무수한 성공 신화들과 성공 이데올로기들을 통해 (그것이 날조된 것이라 할지라도) 사회구성원들에게 꿈과 환상을 제공하던 ‘잘 살아 보세’였다면, 지금은 그런 꿈과 희망이 좌절된 후에 나타난 ‘잘 살아 보세’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열심히만 일한다면 그 누구처럼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꾸지 않는다. 창업 자본을 마련하기도 전에 정리해고 당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보건의료계열 학과들의 입시 경쟁률과 커트라인이 몇 년 사이 가파르게 상승한 것도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신분은 점점 고착화되고 있고, 개인의 노력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한계란 점점 명확해진다.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역시 “로또”다! IMF 경제위기 이후 사람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비정규직화되더니, 이제는 돈 버는 방법조차 너무나 비정규적이다.

노동 시간이 늘어나고 인간적 가치는 상실되는 등 전혀 안녕(Well-bein
g)하지 못한 요즘의 사회 구조에서, 정작 구성원인 우리는 매순간 웰빙을 만나고 강요받는다. 사회가 맡아야 할 몫을 다하지 않으면 그 만큼의 몫은 개인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즉, 지금의 웰빙은 사회 구제가 아닌 철저히 개인 구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국가가 구성원의 복지 수준을 끌어올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또한 대단히 불건강한 사회구조를 은폐하면서 교묘하게 개인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인 것이다.
IMF 이후, 세계화의 흐름이라며 무조건적으로 신자유주의 질서를 받아 안은 한국 사회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조차 냉정한 시장의 규칙에 맡기고,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추진해 사람들의 미래를 점점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노동시간과 직업에 대한 불안감, 실업이 늘어나는 이 때에, 아파도 참고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노동자들은 개인의 ‘건강’과 ‘몸뚱이’를 본인이 직접 챙겨야 할 절박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웰빙 열풍은 엄청난 속도로 우리 삶을 잠식하고 있다. 사회 전체의 비정규직화와 동시에 민중의 생활이 개인의 책임으로 축소된 것과 반비례하는 정도로 웰빙 담론은 확산되었다.

노동 계급에게 웰빙이 위와 같이 몸뚱이를 지키기 위해 강요된 선택이었다면,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자발적으로 웰빙의 라이프스타일이 선택되어 적극적으로 향유되는 측면이 있다. 이미 80년대의 사회 개혁의 꿈에서 스스로를 분리시키며 보수화의 길을 걸어온 이른바 386세대들에게 웰빙은 아등바등 돈 벌어서 살 바에야 인생 느긋하게 즐기면서 살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혹은 스스로는 보수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수구 세력들 혹은 사치스러운 상류 계층들과 자신들을 일치시킬 수는 없었던 이들이 사회 개혁을 대신할 새로운 명분과 가치로서의 웰빙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 (정준영) 책세상
웰빙의 가치는 ‘건강’과 ‘생명’이므로, 그것이 비록 개인적으로 꽤나 많은 돈을 들여 추구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웰빙을 선택하는가 혹은 웰빙이 강요되는가에 따라 각 계층별로 웰빙 담론을 받아들이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웰빙 열풍은 사회 구제에서 개인 구제로, 사회 개혁에서 개인의 육체의 완성으로 그 방향이 전환되었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2) 원초적인 공포에의 호소를 통한 개인 책임화
“영화 ‘21그램’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심장 이식 수술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은 폴 리버스가 집에서 몰래 담배를 피다가 아내에게 들킨다. 아내는 “담배 피는 거 들켜서 대기자 명단에서 제외되면 어쩌냐”며 담배를 뺏으려고 한다. 음, 담배를 피우면 대기자 명단에서 제외되는 수도 있구나. 대기자 명단에서 제외되지 않으려면, 병원에서 요구하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감 있는 행위’라는 걸 보여주어야 하는구나.”
개인의 불건강에 대하여 어느 선까지 그 개인에게 책임을 물릴 것인가. 하루에 담배를 한 갑 피우는 사람이 폐암에 걸렸을 때와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는 사람이 폐암에 걸렸을 때, 의료보험 회사는 어떤 판단을 할 것인가. 당신은 폐암의 위험성을 경고 받고도 계속 담배를 피웠으니, 당신이 폐암에 걸린 데는 당신의 흡연이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소. 자신의 건강을 지켜야 할 사람이 오히려 스스로 건강을 망쳤으니, 우리는 당신에게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소. 혹은 당신은 아직 폐암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으므로 앞으로 폐암에 걸릴 확률이 몇 배 이상 높다고 할 수 있소. 우리는 당신이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당신에게서 더 많은 보험료를 받아야겠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이다.
당신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유방암에 걸린 것을 볼 때, 당신은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얼마 이상 높다고 할 수 있소. 그러니 우리는 당신에게서 보험료를 더 받아야겠소(단물 빨기). 혹은 당신의 이번 유전자 검사 결과를 보니 당신은 대장암에 반드시 걸리겠소. 우리는 당신을 우리 보험 회사의 고객으로 받아들일 수 없소(역선택). 이것도 역시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홈쇼핑에 유전자 검사권이 등장해, 치매, 우울, 알콜 중독, 비만 관련 유전자들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광고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어떤 유전자가 암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암 발병에 이르기까지의 개인 책임이 강조되고 있는 지금의 현상!
개인의 건강 혹은 불건강에 대해, 그 개인에게 책임지울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라이프스타일, 유전자, 생활 환경, 노동 조건, 사회적 신분? 어쨌든 ‘건강에 대한 개인의 책임’은 이 시대의 화두이다. 왜 요즘에서야 이런 물음들이 갑자기 많이 쏟아져 나오는가? 답은 간단하다. 건강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지워야 하는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우려고 보니, 얼마만큼 책임지울 수 있을 것인가가 새삼 ‘문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비타민’ 등 건강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매주 TV에서는 엄청난 공포 정치가 벌어지고 있다. 무얼 어떻게 먹을지, 어떻게 앉아야 하는지, 어디서 자야 하는지 등 무지막지한 분량의 정보들이 제공되고 있고, 이들의 토대에는 ‘우리가 건강에 대한 이렇게 유용하고 소중한 정보들을 제공하니, 이걸 활용하여 각자가 자신의 건강을 책임시지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한편으로는 구원의 메시지, 반대로는 공포의 메시지.
담배를 피우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먼지가 날리는 작업장, 갱도, 화학물질 가득한 공장에서 일하며 2시간에 한번씩 쉬게 되는 노동자들에게 담배는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기 힘들다. 이미 가지고 태어나는 유전자야 더더욱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러나 문제는 메시지가 그저 메시지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충분히 있을 법한 민간의료보험 회사들의 예들이 곧 우리나라에서도 현실화될지 모른다.
인천 송도 의료시장의 개방과 맞물려 우리나라에서도 대체형․병렬형 민간의료보험의 등장이 예고되고 있다. 개인들이 보험에 가입하는 이유는 위험의 분산이고, 건강보험 등의 공적의료보험의 위험 분산 방식은 횡적이다. 수입이 많은 사람이 좀 많이 내고 수입이 적은 사람이 좀 적게 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득의 재분배를 꾀하면서 위험을 동시대적으로, 즉 횡적으로 분산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의료보험의 위험 분산 방식은 종적이다. 가입자의 일생에 대하여 내가 앞으로 걸릴지도 모를 질병과 장애에 대한 위험을 분산시켜 놓는 것이다. 돈 많은 사람은 보험료를 많이 내지만 보장도 많이 받고, 돈이 없는 사람은 보험료를 낼 수 없으니 보장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민간의료보험의 기본적인 컨셉이다. 즉, 자신의 건강에 관한 한, 그/녀의 사회경제적/계급적 지위가 어떻든지 간에 온전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떤 공포보다 무서운 공포, 몸에 직접 작동하는 공포이다. 관리하지 않으면, 건강하지 못할 수도, 죽을 수도 있다! 이렇게 공포가 조장된 위에, 구원의 메시지를 안고 웰빙 메시아 강림하셨다! “나를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오래 오래 행복하게 잘 살리라.”

3) 소비 자본주의의 모순이 해결되는 지점
우리는 공포와 구원이라는, 웰빙 담론이 작동하는 두 가지 핵심 키워드 속에서 소비 자본주의의 딜레마가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볼 수 있다. 소비 자본주의는 소비자들에게 무조건적인 소비를 강요하지 않는다. 얼핏 무분별하게 욕망을 생산할 것처럼 보이는 선진 자본주의는 의외로 계산적인 소비를 요구한다. 소비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자’로서 즉각적인 만족을 바라는 욕망을 승화하고 연기하고 억압해야 한다. 즉 근면하고 성실한 (금욕적인) 노동자의 태도를 몸에 익혀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소비자’로서의 우리는 욕망을 생산하고, 욕망을 충족시키고, 충동에 빠질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과시해야 한다. 즉 지속적이고 즉각적인 만족을 열망해야 하는 것이다. 금욕적인 생산자와 욕망하는 소비자, 이런 두 가지 모순되는 역할들이 개인들에게 동시에 요구되는 것이 소비 자본주의이며, 따라서 욕망의 규제와 충족의 딜레마는 언제나 문제적이다.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 (수전 보르도) 또 하나의 문화

이런 소비 자본주의에서 웰빙은 얼마나 훌륭한 아이템인가! 욕망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통제해야 하지만, 또한 무한하게 소비해야만 하는 이 사회에서! 건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건강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이렇게 공포와 구원의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많이 먹고 싶은 욕망, 많이 자고 싶은 욕망, 운동하기 싫은 무분별한 욕망들(이 욕망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갖추지 말아야 할 욕망들이다)을 개인들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하게 만듦과 동시에, 오래 살고 싶은 욕망,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부추겨진다. 그러면서 건강관리 상품들,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식품들이 소비된다. 웰빙 상품들은 소비함으로써 개인의 육체를 건강하게 만든다고 광고된다. 즉 소비로써 건강한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욕망의 규제는 공포의 메시지로써, 어떤 욕망의 자극은 구원의 메시지로써, 적절하게 조율되고, 시장은 유지된다.
웰빙이 보여주는 이상적인 육체의 이미지도 관리되고 있는 육체의 이미지이다. 그런 육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다이어트 식품들, 다이어트 기구들, 헬스 용품들을 소비해야 하지만, 그 이미지 자체는 무차별적인 소비와 관계없어 보인다. 오히려 적당하게 근육이 잡힌 잘 관리된 몸은 욕망이 합리적으로 조절되고 있는 이미지인 것이다.

4) 새로운 주체의 형성 : 몸짱 열풍
“2003년 11월, 인터넷에 뜬 단 한 장의 사진이 세상을 흔들어 놓고 있다. 39세 두 아이의 엄마인 정다연씨가 5년간의 운동으로 달라진 자신의 몸을 공개하면서 불기 시작한 몸짱 열풍. 헬스클럽마다 신규회원이 늘어나고 신문과 방송은 몸짱 열풍을 재생산해내기에 바쁜 모습이다. 급기야 평범한 주부였던 정다연 씨는 CF모델, TV 출연 등으로 또 하나의 스타가 되었고, ‘몸짱’이란 단어는 2004년 벽두 최고의 유행어가 되었다.”
웰빙과 함께 본격적인 몸짱의 시대가 도래했다. 웰빙 시대의 다이어트는 단순히 날씬한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날씬한 몸을 선호하는 원래의 사회의 기준에, 웰빙 사회에서 항상 권장되는 ‘운동(sports)’이라는 요소가 결합됨으로써 맹목적인 금식위주의 다이어트와는 다른 ‘건강한’ 이미지를 획득했다. ‘몸짱 아줌마’가 시대의 화두가 된 것은, 그녀가 날씬한 여성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사회적 기준과 맞아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이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야말로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가 웰빙 담론을 통해서 새로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바람직한 주체’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헬스장에서 탄탄하게 단련된 몸. 겉보기에 도덕적 우월성을 손상할 정도로 사치스럽지는 않으나, 분명히 운동할 시간과 공간이 있는 중산층 이상임을 과시하고 구별 짓는 몸.
살은 그저 있는, 노력이 투입되지 않아 가치 없이 늘어진 것인 반면, 근육은 의지와 실천적 노동의 산물로 사고된다. 다이어트 중독 상태가 ‘정상’이 된 세상에서 ‘살’만큼 끔찍스러운 존재는 없으며, 살은 의지의 상실, 무능력, 불건강과 추함을 대표하게 되었다. 반대로 근육은 합리적이고 적절한 자기 관리, 아름다움과 건강, 심지어 권력(타인에 대한, 혹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까지 상징하며 지금의 사회가 원하는 구성원의 자질을 표현할 수 있다. 다이어트의 속성인 엄격한 규율에 따른 자기검열, 욕망의 절제로 만들어진 강인함(그냥 굶어서 뺀 몸이 감히 비교되지 않는)은 이 시대에 요구되는 주체들의 덕목인 것이다. 생명, 모성, 웰빙 :“자본주의적 자연”의 재생산 (비타500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콜로키움 2005년 1월 발제문
불안정한 사회에서 불만을 터뜨리지 않은 채 참고 견디는 ‘미덕’과 규모 있는 소비를 할 수 있는 절제능력,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의 틀을 수용하는 사람들. 기존의 외모지상주의에 따른 아름다운 몸매뿐만 아니라 다이어트 그 자체의 ‘건강한’ 효과를 원하는 자본과 권력의 합작이다. 더불어 그 행위하는 주체들의 ‘아름답고 건강해지고 싶다’는 욕망까지 버무려진.
‘웰빙’ 산업이란 생명 파괴의 위협과 건강, 여유로운 삶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몸 자체 혹은 몸에 대한 가능성을 사고 파는 속성을 지녔다. 실상 이것은 개개인 각자, 그 자신의 신체에 대한 상해나 죽음의 공포에만 호소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도 직접 접하지 못한 어딘가에 존재하는, 혹은 도처에 이미 존재하는 (환상적인) 몸 이미지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 모성, 웰빙 :“자본주의적 자연”의 재생산 (비타500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콜로키움 2005년 1월 발제문
웰빙은 바로 이러한 몸의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그 담론을 향유하고 체화할 주체들을 형성한다.
이러한 비정치적이게 보이는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권력에는 순응적인 주체들이 탄생한다. 그래서 사회구성원들의 건강과 복지에 대한 책임을 사회적으로 물으려고 하기보다는 개인차원에서 ‘자발적으로’ 흐름에 편승하며, ‘웰빙’의 이름을 단 소비생활을 향유함으로써 진정 안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개개인으로 하여금 자기만족과 건강이라는 명분 하에 ‘스스로의 선택’으로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것으로 믿게 한다. 미셸 푸코의 생체권력 개념으로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의 권력은 직접적이고 신체적․물리적인 억압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 행하는 자기 검열과 자기 감시, 규범에 의한 ‘자기교정’을 토대로 작동하며, 이러한 권력을 통해 개인들은 순응적인 육체로 재탄생한다는 것이다. 다이어트의 성정치 (한서설아) 책세상

웰빙 담론에서 몸 이미지를 분석해야 하는 유효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보르도가 말하듯이 “몸의 크기와 모양은 점점 더 영혼의 상태를 상징하는 개인적 내부질서(또는 무질서)의 표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 (수전 보르도) 또 하나의 문화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몸은 쾌락뿐만 아니라 행복과 성공을 표현하는 장소가 된다. 몸의 외관은 내적인 자아를 나타내는 것이다. 몸의 관리와 보건교육을 다루는 대중매체는 흔히 ‘라이프스타일의 장점을 유도할 뿐 아니라 신체적 건강과 외관을 항상 스스로 감시하도록’ 촉구한다. 자신의 몸매를 다듬는 것은 자아의 확대에 도달하는 길이며, 건강한 몸은 효율적인 마음을 키울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능력, 자기 통제, 극기의 표시이다.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 (사라 네틀턴) 한울 아카데미
즉 날씬한 몸은 ‘잘 관리된 자아’라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상을 코드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짱들의 시대에,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패스트푸트를 많이 먹는 등의 이유로 이런 강요된 웰빙의 흐름을 좇지 못한 ‘몸꽝’들이 ‘개인적인 의지와 노력’이 결여된 인간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5) 웰빙과 강요된 가족 판타지
사회적 안전망이 붕괴된 사회에서 가족이 뜨고 웰빙이 뜨는 것과 마찬가지로, 웰빙 담론은 ‘가족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가족 단위가 국가에 의해 강화되는 시기는 전쟁 이후와 같이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혼란한 때이다. 삶이 비정규직화되고 사회적 안전망이 붕괴되고 사회 복지 시스템이 약화되면서 개인 구제 성격의 웰빙 담론이 확산, 이제 ‘내 쉴 곳은 가족 뿐’이라는 인식이 덩달아 팽배하다. 그리고 현재의 자본과 국가는 ‘따뜻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가족의 이미지를 부추기면서 여기에 기생한다. 앞서 보았던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적 흐름에서 사회의 책임을 은폐하면서 스스로 몸을 챙기기 힘든 ‘무사회적 고립자’들의 유일한 위안으로서의 가족이 새로이 기획된다. 그 안에서 구성원들은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가족만은’ 불변의 가치를 지녀 지켜야 할 ‘무언가’인 양, 신성불가침의 공동체로 여긴다.
이렇듯 개인에게 강요된 웰빙은 가족이라는 공간(서로 다른 성별로 이루어진 부모와 아이들이 같이 사는 모습으로 정형화한 ‘정상가족’ 이미지)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을 불러온다. 유기농 채소와 항생제를 쓰지 않은 육류, 그리고 신선한 제철 과일로 식단이 짜여지고 엄마가 기꺼이 가족의 웰빙을 위해 부가적인 노력을 하는 공간, 따뜻한 ‘정상 가족’의 테두리 내에 있는 가족 구성원의 무한한 사랑이 끊임없이 광고를 통해 보여진다. 사회와 국가가 개개인에 대해 기본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회에서, 가족의 사랑은 인위적으로 더욱 강조되고, 우리의 웰빙에 대한 욕망은 ‘사회에서 가족으로 역류한다.’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이득재) 소나무
‘사회’가 부재함으로써 가족이 원래 사회적으로 이루어졌어야 할 여러 가지 역할들까지 함께 떠맡게 되었으며, 가족 안에서 웰빙을 위한 부가적인 노동 부담은 으레 그랬듯 ‘엄마와 아내’에게 전가된다.
특히, 웰빙 상품, 식품에의 욕구가 커지면서, 실제적으로 조달할 재원이 불충분한 가난한 가구에서는 살림예산을 집행하는 동시에 가족의 건강 지킴이 역할까지 해야 하는 주부의 과제는 훨씬 복잡해졌다. 라이프스타일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가족들에게 허락된 시간, 여력과 수입이 특정한 라이프스타일의 선택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건강을 위한 선택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건강을 위한 ‘타협’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으며, 이런 타협의 과제는 대부분 주부들의 몫이다.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 (사라 네틀턴) 한울 아카데미
주부들은 건강의 자원(웰빙 상품, 식품 등)은 삭감하면서도 건강의 요구는 유지할 수 있는 방안으로, 즉 자신의 노동을 늘리는 식으로 해결한다. 자연히 그녀의 노동량과 가족의 건강한 생활을 위한 정신적 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유기농 채소를 사지 못하면 더 여러 번 씻어야 하고, 몸에 좋은 식품을 가족에게 먹일 수 없다면 그만큼의 ‘정성’을 담은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을 먹이는 것은 가족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다. 음이온이 나오는 내의를 입히지 못한다면 빨래가 잦아지고 진드기를 쫓는 이불이 아니면 자주 털고 햇빛에 내놓아야 한다. 각종 건강 정보를 담고 있는 매체들에서는 연일 ‘아토피를 예방하자면’, ‘새집증후군을 극복하자면’, ‘아이들에게 패스트푸트를 먹이면 안돼’, ‘집먼지 진드기를 없애려면 진공청소기 대신 물걸레를 들어라’ 등을 설파하고 있다.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늘어난 엄청난 가사노동에 대한 ‘엄마’들의 희생은 미화되고 (엄마의 정성이 아이의 미래를 바꿉니다!) 엄마들은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엄마이고자 그 부가적인 노동들을 행하고 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엄마들의 좌절된 꿈에 대한 보상인지도 모른다, 내 아이만큼은 건강하고 똑똑하게 키우는 것!
이처럼 노동시장에서 망가진 개인들을 사회 구조 자체의 변화로 ‘안녕할’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가족틀 안에서 (특히 가사 노동의 증대를 통해)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재생산되도록 장려하는 지금의 웰빙 열풍. 웰빙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 못한 개인은 도태될 뿐이고, 그들을 치료하여 사회로 재복귀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사랑의 힘’밖에 없는 것이니, 그와 비례하여 늘어만 가는 가사 노동은 어쩌란 말인가. 엄마들이여, 그대들은 이 시대 웰빙의 수호신이시니, 온 몸으로 웰빙을 수호하소서!


“웰빙”의 대표브랜드 ‘풀무원’, 우린 정말 건강할 수 있을까

자, 여기까지 과히 폭풍에 맞먹는 웰빙 열풍에 대해 나름대로 끈적끈적하게 따라붙으며 비판하려고 노력했다. 워낙에 일상과 연관된 일이라 지금까지의 글도 예를 많이 들면서 서술해 왔지만, 이번에 얘기할 예는, 그야말로 이 시대 웰빙 담론이 담고 있는 함의들을 총체적으로, 그야말로 완벽에 가깝게 구현하고 있는 한 기업의 이야기, 바로 풀무원의 이야기이다. 풀무원의 문제들과 같은, 즉 웰빙 폭풍 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이런 문제들을 읽어내는 것은, 사실 “황토로 만든 내의를 입고 옥돌 침대에서 일어나 대두단백으로 만든 우유와 유기농 야채로 아침을 시작하며 퇴근 후엔 요가센터를 찾아 하루의 스트레스를 푼 후 친환경 홈네트워킹 아파트에서 아로마향이 물씬 풍기는 욕실에서 반신욕을 즐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것은 진정하고 완전한 안녕 상태(well-being)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할 것이다.

‘환경 친화 기업’과 ‘청정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앞세운 풀무원은 1981년 조그만 농산물 직판장으로 시작했으며 오늘날 17개의 자회사를 포함한 20개의 관계회사를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또한 자기자본 1,323억을 가지고 있으며 연간 약 200억 가량의 당기순이익을 올리고 있는 초우량 기업이 되었다. 이는 그동안 풀무원이 만들어온 청정기업의 이미지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웰빙 열풍이 어우러져서 이루어낸 결과일 것이다. 그리하여 풀무원은 스스로를 일컬어 ‘자연을 담는 큰 그릇’이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자연을 담는 큰 그릇’에는 커다란 구멍이 여럿 뚫려 있으며, 그 구멍을 웰빙 열풍 속에서 건강 식품, 유기농 식품이라는 선전으로 은폐하고 소비자를 기만하고 있다.

1) 풀무원과 찬마루, “돈도 없으면서 웰빙을 하겠다고?”
현재 풀무원이 판매하고 있는 두부는 100% 수입콩을 사용하는 ‘찬마루 두부’(1400원), 100% 수입산 콩으로 만든 ‘찬마루’(2400원), 최근 유기농 바람이 불면서 중국 만주에서 수입해 만든 ‘풀무원 유기농 두부’(2700원) 등 3가지 브랜드다. 또한 그 가격은 찬마루 두부, 풀무원 두부, 풀무원 유기농 두부 순으로 가격이 비싸지며 가격 차이는 약 1.5배에서 2배까지 이르며 그나마 가장 싸다고 하는 찬마루 두부마저 일반 두부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풀무원은 제품에서 수입콩에서만 검출이 가능한 유전자 변형성분(GM)이 발견되면서 한창 논란을 빚은 후, 재료인 국산콩과 수입콩에 따라 브랜드를 분리시켰다. 문제는 결국 경제적 부의 여부가 안전하다고 하는 국산콩 두부를 먹느냐, 어떤 위해 요인이 있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100% 수입산콩 두부를 먹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온 나라가 ‘웰빙으로 건강하자‘는 외침으로 떠들썩한데, 결국 2500원이 넘는 두부를 사먹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불건강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찬마루 두부조차 돈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나마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실제로 지금의 웰빙은 사회적, 정신적 웰빙을 포함한 내용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농산물을 먹고 어떤 상품을 사용하느냐로 채워지는 웰빙이다. 상업적인 상품과 물질주의가 거대한 웰빙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결국 경제적 부의 수준이 곧 웰빙의 수준을 결정하고 마는 것이며, 이는 단순히 돈이 더 있는 사람이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는 사람은 질병과 온갖 위해 요인에 노출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웰빙 속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눈물
따지고 보면 웰빙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게 바로 웰빙이다. 그토록 평범한 삶이 이리도 강조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모두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청정 식품만을 만들어 낸다는 ‘생명을 하늘처럼’ 여긴다는 풀무원은 당장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을 철저히 무시해왔다.
풀무원 노동조합의 발표에 따르면 풀무원은 1999년 27억원, 2000년 51억원, 2001년 110억원, 2002년 205억원, 2003년 19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이러한 거대 기업인 풀무원에선 노동자들이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며 신음하고 있다.
“2003년 기준 풀무원 여성 노동자 기본급 초임은 57만원, 10년 넘게 일한 기술 1급 남성노동자는 88만원이다. 워낙에 낮은 기본급이다 보니 노동자들은 일요일 휴무를 마다하고 끊임없이 특근과 잔업을 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이로 인해 근골격계 질환 발생률이 80.6%에 이른다. 지난해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현장조사 결과 춘천공장의 94명 중 여성 조합원 40명이 전원 100% 근골격계 질환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36명의 남성 조합원 역시 근골격계 유소견자로 나타나 근골격계 질환 유소견자는 전체 조합원의 80.6%에 이른다...
노조는 생활임금 보장을 위한 임금인상 12.5%를 요구한 상태고 사측은 6%대의 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노조는 근골격계 질환 등 직업병 예방을 위해 1년에 한번 종합검진희망자에게 25만원비용 중 70%에 대한 지원비를 요구하고 있다. 사측은 기존에 있던 회식비, 체육대회비 등 복지비용을 줄여 8만원을 지원하겠다고 하고 있다. 노조는 “순이익 190억 중 1억 2천 만원만 투자하면 될 것을 기존의 복지비를 삭감해서 그것도 8%만 지원하겠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며 반발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2004년 7월 29일)”
이런 열악한 현실에서 풀무원 노조가 춘천과 의령, 두 공장에서 파업을 벌이자 이 두 공장 외에도 공장을 일곱 개나 더 가지고 있는 풀무원 회사는 교섭에도 응하지 않고 작업 물량을 외주업체로 빼돌리고 직장폐쇄를 선언했으며 파업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면서 장기파업사태를 악화시켰다. 또한 풀무원 춘천공장의 경우 국수나 두부를 서서 포장하거나, 국수의 경우 몇 번을 꼬아서 포장해야 하는 작업, 그리고 쉴새 없이 돌아가는 국수가 나오는 라인에서 장시간 서서 같은 손가락만 사용하는 공정 때문에 집단적으로 근골격계 질환이 발생했으나 산재승인을 요청한 90여명 중 10여명만이 승인되었고 회사는 직업병으로 인정하지 않아 문제를 더욱 악화시켜왔다.
풀무원이라는 기업에는 ‘환경보전원칙’이 있다. 그 중에 ‘우리는 쾌적한 근무환경을 조성하여 건강과 안전을 지켜나간다’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어깨와 허리에 통증을 느끼고 뼈가 휘고 근육이 파열되어 1년 이상 수술과 요양을 반복해야 한다. 풀무원 기업의 환경보전 원칙대로라면 노동자들은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해야 하지만 풀무원은 환경보전원칙을 풀무원의 허울뿐인 기업 이미지로만 사용하고 있고, 실제로 여성노동자의 100%, 남성노동자의 63.8%가 근골격계 직업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생산현장을 외면한 채, 자본의 이윤창출에만 매달려온 것이다.
이웃사랑, 생명존중 등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가 붙은 웰빙 시대 대표 기업의 내부에는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아가며 자신의 몸이 망가지도록 두부와 국수를 만들어온 노동자들에 대한 매몰차고도 비도덕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분명히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웰빙 시대, 오염과 질병은 어디로 가시나이까!

웰빙이라는 라이프스타일, 흔히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사회 생활의 여러 양상을 지칭하며, 따라서 건강이나 흡연 등과 같은 소비 양상의 개인차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상 이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건 상당한 정도로 사회적으로 배태되어 있고 구조화되어 있다. 따라서 웰빙이라는 라이프스타일도 현대 정치와의 연관성 하에서, 지금의 정치경제적 토대 하에서 분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웰빙은 이미 주류 이데올로기로 행세하고 있다. 현대 정치의 키워드인 위험성과 불안, 공포를 등에 업고.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불안한 현대 사회에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각 개인의 신체, 바로 그 몸에 작동함으로써.
담론 상에서 이미 주류로 자리 잡은 웰빙은, 그것의 명품 소비적인 측면만이 문제로 제기될 뿐 근본적인 비판에 직면하지는 않고 있다. 어쨌든 좋은 것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데! 웰빙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겪게 되는 계급적․성별적 차이들에 대해서도 ‘누구나가 웰빙할 수 있으면 더욱 좋지’라는 말로 대답한다. 즉 웰빙이라는 지상 목표를 최대로 실현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누구도 웰빙 자체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고. 그나마 한 발짝 더 나간 사람들만이 웰빙할 수 없는 사람들의 조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뿐!
물론 우리는 웰빙이 판치는 시대에 웰빙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의 웰빙할 수 없는 조건들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해야 한다. 유기농을 직접 생산하되 자신은 비싼 유기농 상품들을 사 먹을 수 없는 농민들, 하나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가는 노동 시간들 속에서 이제는 운동을 통해 각자의 건강까지 책임질 것을 요구받는 노동자들, 건강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착취되는 여성들, 건강한 몸의 정상적 이미지 뒤에 존재 자체가 은폐되는 장애인들, 자신의 몸 이미지에 대한 환상과 현실 속에서 늘 정체성의 동요를 겪는 거식증․폭식증 환자들/다이어트 중독자들, 기본적인 사회보장 시스템의 붕괴로 인해 내몰려지는 사람들. 과연 웰빙이 단순한 ‘선택’, 즉 선택하면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웰빙 담론이 생산하는 몸의 이미지, 건강의 이미지부터가 사실은 대단히 정치적인 영역의 문제인 것이다. 서두에 ‘환경의 역습’이라는 다큐멘터리 얘기를 꺼냈다.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은 아이들의 문제를 현대의 환경 오염과 연관시켜, 인간이 망친 자연이 인간에게 보복하고 있다는 상징을 차용하였다. 즉 자연이 더 이상 위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망친 자연’이 위험한 것이다. 이런 위험성이 웰빙 담론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아나운서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이번 사고는 ‘인재’였습니다. 설마 이번 쓰나미에 대해서까지도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몰디브는 산호를 잘 보존함으로써 무서운 쓰나미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거대한 쓰나미, 자연 재해조차도 인간의 “실패” 환경의 “역습”이 되었다. 그리하여 웰빙 시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속삭인다. 지금의 불안과 위기감을 자연적인 것에 대한 향수, 순수한 인간성에 대한 믿음,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 일치감을 통해 극복해보자는 심산인가 보다. 그러기에 몸에 그토록 집중하는 것일까. 만성적인 위험의 시대에는 몸이야말로 통제 가능한 유일한 장소가 되며, 몸 관리를 추구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유일하게 안정되고 확고한 영역을 나타낸다고 보여지므로. 그리고 몸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자연’이라고 여겨지므로!
그러나 이 자연, 혹은 자연스러움 자체에 대한 강조는 왠지 불편하다. “아무런 인위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때에야 건강할 수 있다?” 그래서 아토피 어린이에게 유기농 식사를 먹여야 하고, 그것을 위해 간식도 어머니들이 손수 만들어서 먹어야 하고. (인스턴트 음식이나 통조림 등은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한가!”)
이 사회는 우리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건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라고 요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연스럽게’ 건강할 것을 요구한다. 아름답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아름답기를 기대한다. (자연미인, 건강미인) 혹은 건강함으로써 자연스러우라고, 자연스럽게 건강함으로써 아름다우라고 요구한다. 이런 모순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성의 노동이 비공식화되고 있고, ‘자연스러운 모성애’가 강조되고 있다는 건, 이미 아이러니하지도 않다. ‘자연스러운 건강’과 ‘자연스러운 몸’의 신화는, 몸 자체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자연’ 그 자체란 없으며 재발명된 ‘자연스러운 자연’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게 한다. 그리고 결코 닿지 않을, 환상을 향해 줄곧 달리게 만든다. 어쩌면 이 웰빙 담론도, 그 환상의 자연스러움 혹은 정상성에 다가가기 위한 끝없는 싸움일 수도 있으니, 단지 생명과 건강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순진한 일인가.한/노/정/연


[ 참고 문헌]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이득재) 소나무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 (사라 네틀턴) 한울 아카데미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김상환) 창작과 비평사
다이어트의 성정치 (한서설아) 책세상
생명, 모성, 웰빙 :“자본주의적 자연”의 재생산 (비타500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콜로키움 발제문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 (정준영) 책세상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 (수전 보르도) 또 하나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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