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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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정연에 대한 기억들

현장에서 미래를  제종간특별호
남구현

한노정연에 대한 기억들


한노정연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2004년도 초여름 중국 용정에서 열린 토론회를 마치고 가진 자리에서의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함께 갔던 김혜란 동지는 술기운을 빌어 동석하였던 나와 이해영 선생에게 약간의 항의성 발언을 하였다.
“한노정연에 청춘을 바치고, 한노정연이 나의 인생이다시피 되었는데, 선생님들이 어떻게 책임져주실 거예요.”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답답하여 잠시 침묵하였으며, 일종의 면피성 반문으로 책임 추궁을 피하였다.
“한노정연이 동지에게 그렇듯이 나의 인생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보았는지요.”
그렇다. 한노정연에서 활동하였던 여러 동지들에게 그러하였듯이 한노정연은 나 자신에게도 인생을 돌이켜 볼 때 무엇보다도 비중이 있는 ‘특별한 어떤 것’이었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걸쳐 연남동에서 봉천동으로 또 사당동으로 이어지는 지난 시기에 연구소의 연구위원장, 부소장, ‘현장에서 미래를’의 편집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연구소는 나의 주된 활동 무대가 되었다. 연구소에서의 활동은 개인적으로는 시간과 돈 그리고 정력을 요구하면서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으나, 거꾸로 자칫하면 책상물림이 될 수도 있었을 나의 이론적 작업에 현장 모순의 피가 튀는 생동감을 불어 넣어 주었고, 지칠 때마다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의 역동성으로 힘을 주었다. 한노정연을 매개로 역사는 나의 개인사가 되었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매월 발행되는 ‘현장에서 미래를’의 초대 편집위원장으로서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기억이 난다. 편집위원회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따로 별다른 연락을 하지 않아도 전원 출석으로 성립되었다. 편집위원들이 모여 두서없이 일종의 ‘자유 연상법’의 방식에 따라 정세 보고 및 토론을 하면 그것이 그대로 정리되어 편집이 끝났다. 회의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다. ‘현장에서 미래를’의 나름대로의 권위(?)는 대단해서 그 권위에 걸맞게 쓰려고 약간씩 미루는 경우는 있었어도, 원고 청탁이 거부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90년대 초반 이래 사상과 운동성을 담은 사회과학 도서의 퇴조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발행 부수도 늘어나 천오백부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운동이 직면한 현안들에 대해 다양한 입장들이 개진되고 전체 노동자 민중운동의 방향성을 잡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판단된다.

연구소의 활동은 90년대 중후반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무엇보다도 96/97 노동자 총파업 시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96년도 노동법 개정을 둘러싸고 정리해고제, 파견제, 변형시간 근로제 등 소위 3제의 도입으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 도입 반대인가 정치활동 금지, 3자 개입금지, 복수노조 금지 등 소위 3금을 중심으로 한 반민주적 악법 조항 철폐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연구소 내에서의 치열한 논쟁 결과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정리했고,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96/97 노동자 민중 투쟁에 임하였다. 연구소는 팜플렛을 별도로 발간하는 등 당시 투쟁의 방향을 잡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명성은 해외로까지 알려져 2000년대 초 해외여행 시 만났던 유럽의 좌파 활동가들이 “킬스프, 킬스프”하면서 논쟁하길래 무엇인지 물어보았더니 한노정연의 영어 약자인 KILSP를 지칭하는 것을 알고 놀랐던 경험이 있었다.

잘 나갈 때 그만두라는 정치인들의 얄팍한 계산법을 예로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노정연의 마지막 몇 년은 90년대에 쌓았던 명성을 까먹는 밑지는 장사였던 것 같다. 운동 전체에 대한 영향력은 고사하고 좌파 내부에서도 점차 잊혀져 갔으며, ‘현장에서 미래를’은 읽지 않고 쌓아 두는 책이 되었다. ‘하나의’ 입장은 토론 없이 마치 연구소 전체의 의견인 양 외화되었다. 연구소에는 일종의 연구소‘주의’가 생겨서, 다른 장의 운동과 충돌하였으며, 연구소 내부의 이견은 정리되지 못하고 결국은 파열되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연구소가 재편되어야할 시기에 도약을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실책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00년도를 넘어서면서 연구소 운동의 재편, 연구소의 아카데미 형태로의 전환이 논의되었는데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였다. 1) 노동자 대중조직 및 정치조직이 건설되면서 연구소가 해왔던 활동 가운데 대중 교육, 정치 활동, 정책 차원의 연구가 조직적으로 담보되기 시작하였고, 연구소에 고유한 연구 기능이 특화될 필요가 생겼다. 2) 다른 한편에서는 운동에서의 요구가 정치 강령 수준에서의 논의로 높아졌고, 철학, 정치 이론의 연구 수준이 시대적 조건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차원으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 요구되었다. 3) 연구자들 스스로도 업그레이드 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러한 요구는 그러나 ‘이론주의’, ‘몰계급적’인 입장으로 몰리면서 연구소는 유지되었고, 그 결과 지금 모양 없이 마치 가진 재산 다 까먹고 분가한 후 소진하여 재편하는 양상으로까지 오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라고 매사에 있어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아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오죽하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격언까지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해산하는 과정이 왜 그리 오래 걸렸지 하면서 툴툴 털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난 시기에 해결 못한 과제가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채 모양을 달리 하며 남아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낡은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 가벼운 날개 짓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연구회 형태로의 전환에 다시금 희망을 걸어 본다.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2007-01-18 19: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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