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당/『현장에서 미래를』60(2000.11)

우리는 무엇을, 왜 '닥쳐'야 하는가?*

박 정 미(연구원)

    "사내하청 노동형제들의 투쟁은 거대한 들불로 번질 것입니다."1)

    "환영합니다. 노동자 형님들과 함께 투쟁하겠습니다."2)

    "말들은 "마치 적들처럼 서로 싸우는" "무기, 폭약, 혹은 진통제이며 독약"이기 때문이다."3)

언어는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장이다. 지배계급은 언어를 장악함으로써 개인을 특정한 주체로 호명하고, 순응과 배제를 생산한다. 현재의 적대를 은폐하는 시민, 서민, 의회 정치, 자유민주주의 등과 같은 '몰계급적'인 말에서부터 근로자, 국가경쟁력, 노동력 유연화, 좌익용공세력 등 '노골적인 계급정치'를 수행하는 언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기술은 화려하고 정교하다.

언어가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장이라는 사실은 지배계급에 대항한 반체제운동의 끈질긴 노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반체제 운동은 '근로자', '대중'을 '노동자', '민중'으로 재개념화함으로써, 순응하고 억눌리는 개인을 모순에 대항하여 싸우는 주체로 호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었는지는 주지의 사실이다.

억압과 모순에 맞서는 운동이 그 운동을 담지하는 주체를 생산하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와 상징 체계를 구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과정이다. 이러한 실천은 언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소비에트의 깃발에 망치와 낫을 그려넣고, 권영길 대표가 텔레비전 프로에 나올 때 작업복을 입는 것은 따라서 고도의 정치적 실천이다.

문제는 그러한 저항적 주체를 생산하는데 사용하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가부장적이며, 남성들만의 형제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운동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언어적, 상징적 '폭력'은 '몰성적(sex-blind)'인 수준에도 한참은 못 미치는, '노골적인 남성정치'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1997년 국민승리 21의 두 번째 대선 포스터와 1999년 민주노총 메이데이 기념 포스터를 들 수 있다. 후자에 대해서는 온라인 상에서 반대운동이 조직되어 많은 논쟁이 이루어진 반면, 전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는 듯하다.

민족주의적 감성에 기대어 커다란 태극기를 펄럭이고, 노동자 후보 운동을 희화화한 "일어나라 코리아" 이후에, 국민승리 21은 '나름대로 계급적인' 포스터를 만들어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머리띠를 맨 전투적인 두 명의 남성 노동자가 그려진 그 포스터의 제목은 "하늘같은 당신, 노동자"였고 "온 가족의 밥줄이 걸려있는"이 그 위에 씌어 있었다. 배경 그림과 말투로 보아 여성임이 분명한 이 포스터의 화자는 밥줄 뿐 아니라 자신의 해방의 전망까지 '당신'에게 일방적으로 목매달고 있는 피부양자로 묘사된다.

이는 남성만이 생계 부양자이기 때문에 반찬값이나 버는 여성은 남성의 절반이 조금 넘는 임금만 받으면 된다는, 자본의 '가족임금' 이데올로기와 궤를 같이한다. '천만 노동자 단결의 구심'인 민주노총의 포스터가, 노동자들을 성별로 분열시키고 여성으로부터 더 많은 잉여가치를 수탈하고자 하는 자본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여성들은, 남성들만의 전투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응원하는 '마지막 승부'의 다슬이가 아니다.

위에서 인용한 '노동형제'와 '노동자 형님' 등의 표현 역시 노동자 혹은 억압에 맞서 저항하는 자를 남성으로 성별화함으로써, 여성의 존재를 볼 수 없도록 한다. 그것은 애초의 의도야 어찌됐든, 인류가 등장한 이래 줄곧 노동해왔던, 전 세계 식량의 50%를 생산하고 전체 노동시간의 60%를 차지하는 여성, 곧 단 한 번도 노동자가 아닌 적이 없었던 여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수많은 혁명과 식량 폭동, 가까이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그리고 현재도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여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운동이 암흑가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똘마니들이나 쓸 법한 표현을 빌려쓴다는 사실을 용납하기 어렵다.

이 외에도 노동자와 저항하는 주체를 남성으로 배타적으로 재현하는(represent) 장치들은 무수히 많다. 포스터와 사진, 벽화 등이 그렇고, 운동가요가 그렇다.

부르디외는 '전제적 권력에 의한 문화적 전횡의 강요'를 상징적 폭력으로 개념화했다.4) 부르주아의 언어와 교양을 배타적으로 일반화하고 강요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어린이들의 열등함을 암묵적으로 자연화하는 학교 교육이 대표적 예이다.

나는 현재 운동 사회에서 사용되는 가부장적 언어와 상징 역시 여성들에게 심대한 폭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성을 수동적 존재로 고착시키고, 그리하여 '억압에 맞서서 싸우는 여성'을 형용 모순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난 9월 30일 홍익대에서 열린 비정규직 문화제에서 북부총련 의장인 덕성여대 총학생회장의 발언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자 형님들, 반갑습니다!"라는 그녀의 발언은 안타까웠지만 용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문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힘겹게 올라온 경북 C.C. 소속 노동자들을 비롯한 여성 노동자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쉽게 용서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은, 자신의 성별조차 분간할 수 없는 백치 상태로 그녀를 몰아넣은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운동 사회 가부장적 구조의 일방적 희생자라고 할 수는 없다. 많은 여성들이 그녀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을 '명예남성'으로 표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구조에 공모했고, 그럼으로써 여성 노동자를 부정하는 폭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활동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그녀의 선택의 폭이 제한적이었을 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되는 바이다. 출범식에서 대표자로 승인받기 위해 남자 두루마기를 걸쳤다는 모 여대 총학생회장처럼, 그녀 역시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주체'로 자신을 표명하기 위해서 자신이 깨달았든 그렇지 않든 고착화된 남성성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한 구조를 아무런 성찰 없이 받아들인 그녀에게 큰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제한된 선택의 상황 역시 분명 비극적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다.

사실 "언어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이라는 명제는 일상생활에서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분노와 절망을 담아내기에는 추상적이고 건조하다. "딸들아 일어나라, 밥해라"(딸들아, 일어나라), "경영자는 딸 없냐, 니 딸도 당해봐라"(롯데 호텔 시위 때 쓰였던 피켓), "사나이 한 평생 살아간다, 우리는 진짜 노동자"(진짜 노동자 Ⅲ), "또 한 명의 우리 누이가 세상을 떴습니다."(서울대 동아리연합회 스티커)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리고 자신이 여성임을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많은 여성 활동가들은 이러한 남성 중심적인 구호와 표현, 그리고 바탕을 이루는 형제애의 틈 속에서 질식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은 "딸들은 각성을 해봤자(일어나 봤자) 밥이나 잘 하면 되는 존재이며", "경영자의 딸 역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적의 딸이므로 당해도 싸며", "사나이가 아니면 자본주의에 대항해 싸우는 진짜 노동자가 되기 어려우며", "운동의 담지자는 언제나 남성으로 상정되므로 '미국놈'에 의해 쓰러져간 여성은 결코 '언니'가 될 수 없다는 사실"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며, 따라서 무척이나 폭력적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표현을 쓴 많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여성들을 비하하기 위해서, 혹은 노골적인 남성정치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또한 처음 선배들에게 "딸들아, 일어나라"를 배울 때, 그들을 따라 "깨어라" 대신 "밥해라"라고 따라 불렀으며, 모욕을 느끼기는커녕 참 기발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폭력은 곤봉과 페퍼포그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 한 마디 속에도 도사리고 있다. "공순이, 공돌이", "병신" 등의 말이 생산과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들과 장애우들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고, 스스로를 자조토록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전 진보넷에 둥지를 튼 "운동사회의 언어 폭력 근절을 위한 '닥쳐' 캠페인 게시판(actwo.jinbo.net)은 이러한 틈과 틈이 모여 폭력적인 일상에 균열을 내고, 진정한 대안적 운동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작은 시작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실천이 너무나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여 예민하게 반응하는 피해망상적 행동은 아닌지, 또 은연중에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남성(그리고 간혹 여성) 활동가에게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지 우려와 회의를 표명한다. 이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싶다.

첫째, 현재를 남성 지배적인 가부장적 사회라고 받아들일 때, 간혹 다른 권위에 의해서 상황이 전도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여성은 사회적 약자, 혹은 피해자이며 따라서 그들이 피해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우리는 왜 노동자의 '피해의식'은 '계급의식'이라고 부르면서 여성들의 피해의식은 히스테리컬한 망상으로 취급해왔는지를 곰곰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둘째, 가부장적, 자본주의적 구조에 의해 제약을 받는 존재로서 개인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것을 가혹하다고 여기는 것은 잘 이해하기 어렵다. 결코 모든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한 잘못들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으며, 특히 그 잘못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나 비하일 경우 그것을 투명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가혹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오히려 그러한 일을 저지른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이라고 여기며, 비판을 통해서 인간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은 이제 몇몇 여성 활동가들, 혹은 "성을 두자 쓰는 사람들" 앞에서는 입도 뻥긋하기 어렵겠다고 불평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렇게 무섭게 나오지 말고 좋게 말하기를, 혹은 '동지적 애정'으로 감싸주기를 요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화와 화합의 논리에서 나는 가끔 위험한 공기를 느낀다.

지배계급은 세상이 우리가 별다른 불평 없이 제대로만 한다면 충분히 조화롭고 살만하다는 것을 설득하며 착취와 억압을 은폐해 왔다. 다소 위험한 생각일 수 있지만, 나는 남한 운동에서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마지막에는 언제나 '통큰 단결'을 외치는 것을 보고 가끔 지배계급의 논리를 떠올릴 때가 있다. 언제나 세력이 강하고 다수인 사람들, 한 마디로 별로 '꿀릴 게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논리에 반대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소수고 세력이 약한 이들에게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고 딴지를 거냐, 우리와 함께 하면 된다"를 설득시키려 해왔던 것이다.

자본주의가 품고 있는 수많은 적대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가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지양하고 새로운 체제를 꿈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도, 쉽게 생각해도 될 일도 아니다. 그러한 노력이 하나의 운동으로 대의를 구성하고, 많은 사람들의 의식적 실천으로 내면화되기 전까지 우리가 긴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가부장적 의식,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편견과 적대, 장애우들에 대한 비하의식이 언제 고개를 쳐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많은 이들이 불편해하는 '일종의 도발'을 감행하는 것은, 우리의 해방의 전망이 지연되고, 특정한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맡겨지는 현실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다.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자신을 속이는 너그러운 웃음이 아니라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그에 따르는 싸움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대안을 일궈낼 수 있을 것이다.

< 미 주>

* 이 글은 전국학생연대회의 기관지 3호에 실린 것을 수정 보완한 원고입니다.

1) 전국학생연대회의, "성명서 : 대우조선 사내하청 노동자", 2000, 9, 16

2) 민족사학 단결홍익 조통위원회, 2000년 9월 30일 비정규직 문화제 때 걸린 플랭카드

3) Althusser, Positions, Editions sociales, 1976 : 에티엔 발리바르, "알튀세르여, 계속 침묵하십시오!", 『루이 알튀세르, 1918∼1990』, 민맥, 1991, p. 93에서 재인용.

4) Bourdieu, La Reproduction, p. 19 : 피에르 앙사르, {현대 프랑스 사회학}, 문학과 지성사, 1994, p. 266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