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현장에서 미래를] 1997년 8월호

참관기
 
새롭게 자리매김돼야 할 6월 민주항쟁
 
 
최경희 / 노동과 정치연구팀·한국외대 정치학 박사과정
 
 

본 글은 지난 5월 진보적 학술단체들의 연합체인 [학술운동단체협의회]가 '6월 민주항쟁, 그이후 10년'이라는 주제로 주최한 학술행사의 참관기이다.
 
 

6월 민주항쟁에 대한 역사적·적극적 해석

올해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10주년의 해이다. 크고 작은 각계각층의 사회운동단체에서는 그때의 일을 기념하기 위해 6월 항쟁에 대한 평가를 한다거나, 6월 항쟁 기념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마라톤', '문화공연'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였다. 온 민중이 '호헌철폐·직선제 개헌'을 외침으로써 민중투쟁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6월 항쟁을 기념하기 위한 사업이 힘을 갖는 것은 96∼97년의 노동자총파업이라는 또 하나의 민중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87년 6월 민주항쟁 그 이후 10년이 지난 97년 노동자총파업투쟁의 역사속에서 다양한 논의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쉽게 논의지형이 사그라드는 맥빠진 현실도 접할 수 있다.

우리가 6월 민주항쟁을 10년이 지난 지금 기억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92년 '문민정부' 창출은 왜 민주적 개혁도 성공하지 못하고 '역행하는' 민주화, '퇴행적' 민주화라는 역사의 후퇴를 경험하고 있는가?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과 96∼97년 노동자총파업투쟁은 어떤 연관성과 차별성이 있는가? 그리고 87년, 92년 대선을 경험한 이후 세 번째 대선이라는 정치 '실험'장을 맞이하고 있는 이즈음에 또다시 무엇을 구축해야 하는가?

6월 민주항쟁, 그 이후 10년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회상 및 역사적 진단이라는 소극적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 동학을 통해서 전략의 한계와 의미'를 분석하고 민중운동사의 내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석의 원칙은 6월 민주항쟁을 '개별적 사건'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과정으로서, 그 '맥락적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87년 이후 96∼97년 노동자총파업을 의미지울 수 있을 것이다.

6월 항쟁의 성격 - 시민항쟁, 민족민주운동, 민주변혁운동

이틀간의 학술행사는 한국사회의 진보적 학술활동을 책임지고 있는 단체에서 주최한 대토론이었기 때문에 그 담론의 분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6월 민주항쟁, 그 이후 10년'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고자 모여 열띤 토론을 하였다. 학계는 물론 노동운동단체, 정치적 운동단체, 시민운동단체 등 운동가들도 참석하여 '민주화의 과제와 전망'을 토론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행사 전반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보다 몇 가지 쟁점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1980년대 운동의 성격과 6월 항쟁의 성격은 무엇이며 어떤 연관을 갖는가에 관한 논쟁을 보고자 한다. 보통 80년대의 운동을 '민주변혁', '총체적 민주변혁', '민족민주운동', '민중민주운동' 등으로 부른다. 일단 6월 민주항쟁에 대한 성격분석부터 보자. 6월 민주항쟁을 '시민항쟁'적 수준에서 파악하는 경우와 '민족민주운동'적 수준에서 파악하는 경우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갖는다. 김동춘 씨는 전자로 파악한다. 즉, 4·19 이후 6월 항쟁에 이르는 기간 한국의 운동세력이 얻은 것을 '시민적 민주주의 질서의 수립'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4·19는 '한국적' 시민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이었고, 그 마무리 시점이 6월 항쟁 기간이었다는 것이다. 이 부르주아 혁명의 주체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학생, 지식인, 노동자 등의 연합세력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한국 사회운동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그의 입장으로서, 그는 제3모델론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시말해 우리나라의 사회운동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제1모델과도 다르며, 급진적 노동운동이 지식인 주도의 혁명적 전위정당과 결합하여 혁명운동으로 나갔던 러시아식의 제2모델과도 상이하다는 것이다. 즉 6월 항쟁은 4·19에서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는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적 전통과 80년말 이후 87년 초에 이르는 민주화운동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며 과거운동의 유형을 새로운 양상으로 반복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80년대의 제반 저항과 투쟁들을 '민주변혁운동'이라고 지칭한다.

통상 이 시기의 운동을 '민족민주운동'이라고 개념화하는 데 대해 김동춘 씨는 약간 다른 견해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민족민주'라 하면 정치적인 민주화와 사회민주화를 포함하는 민주주의 확립과 외세로부터의 자주성을 견지하는 민족운동의 성격을 결합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김동춘 씨가 '민주변혁'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통일·반외세 구호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실질적인 대중동원을 수반한 운동은 주로 5공 정권의 전복에 집중되었다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견해로, 조현연 씨는 이전 시기의 정치변동과 80년대를 비교해 볼 때 특징적인 것은 조직화된 민중운동에 의해 정치변동이 주도되었다는 사실과, 이들이 제기한 이슈가 단순히 절차적 차원의 민주화만이 아니라 분단, 종속, 계급 등 한국사회의 지배적 사회균열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80년대 한국사회의 시대적 특징은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이자 체제변혁의 모색기, 즉 총체적인 민주변혁의 시기라는 것이다. 87년 6월 민주항쟁은 바로 그 절정이었다고 한다. 80년대의 운동은 '민주'라는 개념을 잘 사용하였지만 그것은 정말 단순한 의미의 '절차적' 민주화 차원만으로 한계지워지는 것은 아니고, 분단, 종속, 계급이라는 실질적 민주화의 의미를 고민했던 주체와 역사가 존재함을 지적하는 것이 김동춘 씨의 견해와 틀린 점이다.

이러한 견해차이는 90년대 이후 학계의 일반적 경향에서부터 배태된다. '변혁의 80년대'가 지나가고 90년대 들어서면서 민주주의는 한국사회의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로 인해 90년대의 이론적 경향이 80년대 '구체적 현실의 무게'를 사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80년대의 세계적인 '민주화' 추세와 관련하여 민주주의는 세계 사회과학계, 특히 정치학계의 중심적인 화두로 자리잡게 되는데 그 계기는 역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주의적 정의'라는 이름 아래 민주주의의 내용을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사소화시키는 유례없는 '민주주의 사소화' 내지 '민주주의 평가절하'와 함께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에 한국의 정치학계도 발목을 붙잡혀 80년대 운동이 군화발에 짓눌린 엄혹한 시절의 투쟁이었고, '분단모순', '계급모순', '민족모순'이 중첩된 사회에서의 해방적 투쟁을 의미하는 '종속파시즘적 군부독재' 종식, '반파쇼민주화 투쟁'이라는 의미가 '절차적 민주주의'의 형성이라는 민주주의의 최소주의로 의미지워지게 된다.

중산층주도론과 민중주도론

6월 민주항쟁을 '주체'라는 측면에서 분석할 때, 조현연 씨는 6월 민주항쟁에서 어떤 계급·계층이 주도했는가와 지도했는가를 분리해서 파악한다. 논쟁지점은 '중산층주도론'과 '민중주도론'이다. 조현연 씨는 '민중주도론'의 입장이고, 김동춘, 윤상철 씨는 '중산층주도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조현연 씨는 '민중주도론' 입장에서 '중산층' 주도론으로 해석하는 시각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중산층주도론의 입장에는 6월 민주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왜소화하면서 민중들의 주도성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려는 이데올로기적 혐의가 짙게 배어 있다. 둘째, 역사적 사실의 측면에서도 중산층주도론의 허구성은 항쟁지도부의 차원과 참여대중의 차원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항쟁지도부 차원에서는 6월 민주항쟁의 정치적 지도구심인 국민운동본부의 상층지도부가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됨으로써 그 목표지향성이 직선제 개헌을 통한 민간민선정부의 수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중산층 또는 중간계급의 주도성을 내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민중운동 전체의 구성과 관련하여 자유주의 지향세력과 변혁지향세력 간의 질적 차이를 간과한다는 점, 그리고 민중의 이해에 복무하고자 한 변혁지향세력의 실천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다음으로 참여대중 차원의 문제인데 이것은 '넥타이 부대'에 대한 평가와 관련되어 있다. '중산층주도론'의 입장에서는 '넥타이 부대'라고 불렸던 화이트칼라 또는 사무직 노동자들을 노동계급과는 다른 범주로서의 중간계급으로 규정함으로써, 이들을 당시 언론보도 등과 동일하게 중산층 또는 중간계급으로 호명할 것인가 아니면 민중으로 호명할 것인가라는 실천주체의 성격규정 또는 역사적 국면 속에서의 호명의 문제를 동시에 제기한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주체'에 대한 성격분석의 문제는 당시 6월 항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90∼92년 시기, '민자당'으로 3당 통합되어 보수대연합과 대치전선을 치고 있던 민중투쟁의 역사가 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정권'이 창출되자 논의지형은 갑자기 우회한다. 이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경향, '노동자 내부의 계층분화를 끊임없이 운동의 질곡'으로 제시하려는 경향,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대당을 '영역'이 아닌 '주체'의 구분으로서 파악하려는 경향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 창출된 이른바 신사회운동은, 외형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시민운동의 양태는 아니며, 자본주의 제모순속에 위치지워지고 있는 사회운동의 발전과 괘를 함께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92년 이후, 시민운동의 독자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에 경도되어 아직도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변증법적 관계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를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구분해내려는 경향은 '노동운동의 주체형성'을 구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파악하는 것에서 배태된다. 즉, 혁명성을 담보한 블루칼라 노동자와 개량성을 본질적인 특징으로 갖고 있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로부터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혁명성'의 특징을 갖은 '생산직 노동자'도 '초기 노동운동'의 투쟁이라는 구체적 역사과정에서 생성된 것이고, 90년대 후반 서유럽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도 투쟁이라는 과정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연대'는 바로 이러한 과정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넥타이 부대'를 무엇으로 호명하는가는 중대한 인식론적·실천적 차이를 갖고 있다.

보수야당 지도론과 민중운동 지도론

또다른 측면에서 '주체'의 문제는 어떤 정치세력이 6월 민주항쟁을 지도했는가이다. '국민운동본부'라는 틀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보수야당지도론'이 '민중운동지도론'보다 우세한 입장을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 조현연 씨는 현실적으로 국민운동본부는 민중운동세력과 보수야당이 연대한 기구로 출발했지만, 그 결성은 기본적으로 민중운동세력, 특히 민통련의 주도로 추진되었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제도권 야당과 온건개혁세력이 주도하여 결성된' 국본이라는 견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국본의 결성과정에서 제도권 야당이 주도한 측면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운동주체 내부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분석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볼 수 있다. 조현연 씨는 80년대 운동의 이념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분석한다. 하나는 '자유민주주의 길'과 다른 하나는 '민족적·민중적 민주주의 길'이다.

전자의 흐름은 자유민주주의가 파시즘적 군부독재에 대한 하나의 저항의 이념으로서 어느정도 자체논리를 갖추게 됨으로써 그 지형의 변화를 나타내게 된다. 이런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정치적 민주주의=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관점이 80년대 자유주의 세력의 내면에 깊게 자리잡게 되었다.

후자는 80년대 진보적 민중운동 내부논쟁의 근저에 놓여 있는 이념적 지향성을 총칭하는 것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해결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구조적 모순과 균열을 변혁적 실천을 통해 지양하고자 하는 이념이라고 한다. 당시 운동의 현실속에 다수파로서 '자유민주주의'와 '민족민중주의 우파'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군부독재 타도에 대한 범민중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혁명적' 상황속에서, 왜 국본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보수야당과 지배블럭의 타협인 6·29선언을 수용하게 되었는가? 군부위기론, 주체역량의 한계 때문에 6·29선언을 수용하는 것이 불가피 했다고 파악하는 일반적인 주장과는 달리 조현연 씨는 '국본' 상층지도부의 전략이 그 원인이라고 파악한다. 즉, 국본 상층지도부가 6·29선언을 수용한 이유는 다름 아닌 '선거혁명론' 그 환상 때문이라고 한다. 선거혁명론이라 하면 "선거가 있게 해야 하고 선거만 있다면 우리의 승리는 불을 보듯 훤한 것이므로 선거가 끝나면 다 해결될 문제를 가지고 불필요하게 상황을 복잡하고 어렵게 끌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론회에서 주요쟁점 중에 하나가 되었던 이 '선거혁명론'에 대한 입장차이는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역시 재확인되고 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선거를 통해서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87년 당시 선거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던 민중운동주체의 서투름을 그 실패 요인으로 파악하는 운동진영이 현실에서 확고한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는 '선거'라는 정치일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요하다. 운동의 주체적 측면에서 동원과 지도라는 면을 보았을 때도, 당시의 지도는 외부로부터 주입된, 그것도 계급의 동질성보단 계급의 이질성을 전제하여 당면투쟁의 '정치적 이슈'로 지도부를 상정했던 것이 운동의 현실이자 한계였다. '소부르주아를 대변했던 야당', 이제는 '대부르주아를 대변하길 자처하는 야당'은 더이상 민중운동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부대라고 할 수 없다. 민중운동의 동원과 지도도, 내부로부터 형성되지 못할 때, 다시말해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수행해 내지 못했을 때는 야당의 지도론과 연합론이 그 의의와 힘을 발휘하기에는 충분하다. 우리는 87년의 경험이후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문제설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거때만 되면 이러한 문제설정은 '선거'를 통한 '의회'진출이라는 담론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노동자 정치'를 구성해야 하는 구체적 의미는 축소되게 된다. 하지만 역사의 또 다른 측면은 87년 이후 10년이란 세월 속에서 그것을 실천할 일정한 주체역량을 확보했다는 긍정적인 결과가 있음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87년, 92년의 경험을 거울 삼아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하여 97년의 대선을 '정치실험장'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다음의 쟁점은 '민주화' 이행의 계기로서 6월 항쟁을 '타협에 의한 정치'라는 일반적 결론으로 도출해 내는 '패러다임'을 둘러싼 문제이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6월 민주화투쟁 상층부가 6.29선언을 수용한 것을 '타협에 의한 국면의 해결'로 해석한다. 또한 그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조차 배제하려고 하는 경향이 이 이론틀 내부에 있다.

윤상철 씨는 6월 민주항쟁을 권위주의체제에서 민주주의체제로 이행하는 과정내의 특수한 정치국면으로서, 제1이행을 위한 경기규칙을 합의하게 된 계기로서 파악한다. 여기서 제1이행은 정치적 개방, 도전연합의 형성, 새로운 경기규칙의 타협, 새로운 민주정부 수립 등의 정치국면들로 이루어진다. 그에 의하면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원인은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최대도전엽합'을 형성·동원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최대 도전연합'의 구성주체는 누구이며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윤상철 씨는 4·13호헌조치로부터 국민운동본부가 출범하여 6.10 국민대회가 열리기까지의 과정을 개관해 볼 때, 지배블럭의 비타협성에 의해 정치체로부터 축출된 정치사회의 '야당세력'이 시민사회를 동원하게 되었고, 시민사회 역시 야당세력이 스스로의 권력경쟁을 위해 제기한 전략을 수용한 때문이었다고 본다. 즉, 야당세력이 시민운동세력을 동원하여 '직선제 개헌'이라는 전략에 합의함으로써 '최대연합'이 형성되었고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6월 항쟁은 1987년 이전까지의 시행착오를 거쳐 도전연합의 형성에 성공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어느 세력에 의해 제시되었는가와 상관없이 군부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정치적 대안과 조직적 대안이 제시되고, 그러한 대안에 대한 합의에 기초하여 도전연합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6월 민주항쟁이 '민주화 제1단계로서의 이행' 즉, 자유화에 성공했다는 것에 너무 강조점을 둔 나머지 '타협에 의한 정치'의 한계를 지적할 수가 없다는 데 가장 큰 한계가 있다. 바로 타협을 가능케 했던 그 조건이 이후 '민주화'를 역행시키는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다. 92년 문민정부 수립이후 '민주적인 구조개혁'을 시행하려고 했던 정권의 의지조차 보수·수구 세력들이 이행기 동안에 축소, 축출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분을 여전히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은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개혁의 구조적 한계는 바로 6월 민주화 이행기가 상층에 의한 '타협'에 의해 봉합되었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래서 여전히 한국의 정치현실은 '보수정치 일색'인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전략선택이론'이라 한다. 이는 한국 정치학계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설명하는 이론틀 가운데 가장 주류적 패러다임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법을 손호철 씨는 일찍이 비판한 바 있다. 다시 상기하자면 첫째, 전략선택이론은 사회과학의 오랜 쟁점인 '구조와 행위'라는 딜렘머를 '구조와 전략'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즉, 맑스주의 계급투쟁 분석이 아래로부터의 압력의 강도와 계급투쟁의 역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온 반면 전략적 선택이라는 측면을 상대적으로 간과했다는 비판하에서, 전략선택론은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전략적 선택론이 취한 민주화론의 '게임이론화'이다. 전략선택이론은 민주화를 기본적으로 '권력블럭'과 '반대세력'의 내부동학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즉 권력블럭이 응집되어 있느냐, 분열되어 있느냐, 분열되어 있다면 개방파 내지 개혁파가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 하는 '전략적 선택'과 반대세력이 단결되어 있느냐, 분열되어 있느냐, 분열되어 있다면 이중 온건파가 어떠한 '전략적 선택'을 하느냐의 게임이론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민주화를 설명하는 것이다. 결국 전략적 민주화이론은 '현실주의'라는 이름아래 '타협에 의한 민주화'만이 사실상 유일한 민주화의 길인 것처럼 주장하는 엄청난 '보수성'을 은폐, 내장하고 있다. 둘째, 전략선택이론은 기본적으로 각 행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가능성을 형식적으로 나열하여 상호교차시켜 시나리오를 만드는 '게임나무'를 기본틀로 한다. 단순히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과 현실적 결과 사이에 1대 1 조응관계를 설정하는 주의주의적 편향과 형식주의의 필연적 결과이다. 즉 이 모형에서는 이들 행위자들 간의 구체적인 역관계, '사회세력들 사이의 힘의 역관계'가 빠져 있다. 결국 선택의 의도와 의도하지 않은 결과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간과되고 있다.

조현연 씨는 '최대도전연합론', '타협의 정치', '전략선택론'으로 보는 입장과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다. 일단은 87년의 종결과정과 그에 따른 구도의 변화속에서 이후 한국정치의 흐름이 지배블럭의 주도하에 '권위주의와 병존하는 느린 민주화' 또는 '제한된 민주화'로 나아가 선별적 억압과 제한적인 포섭 등으로 인해 변혁을 포함한 민주화의 진전 요구가 억눌려지고 길들여지는 과정속에서, 민중정치·계급정치·진보정치 또한 초보적인 수준에서조차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무력화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결과를 남긴 것이 바로 87년 민주화 이행의 유형적 특징이 남긴 필연적인 부정적 유산이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조현연 씨는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방법 중에서 80년대 운동의 양대 이념 중 '자유민주주의'와 '민족민중적민주주의' 다수파에 의한 운동의 주도로 보는 것이 6월 항쟁의 주체적 조건 측면의 일반적 특징을 내포한다고 본다. 더욱이 그의 분석은 '전략과 주체'에 대한 설명을 달리하고 있다. '타협의 정치'라는 전략이 불가피 했다는 입장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세력 역관계'를 통한 전략의 도달로서 분석한다는 데에 조현연 씨의 분석이 갖는 의의가 있다.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과의 관계

그러한 의미에서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과의 관계설정 및 현재적 의미가 도출될 수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 투쟁에 대한 주체와 내용, 전략에 대한 상이한 이해의 차원과 역사인식에 대한 입장차이로부터 견해 차이를 갖고 온다.

첫째, '시기설정'의 문제이다. 왜 보통 6월 민주항쟁을 6·29 선언으로 종결된 '정치적 타협'의 시기로 국한하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는 6월 10일 대규모 민중투쟁의 시작 이전과 다시 7월로 이어지는 노동자투쟁까지를 파악하고자 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실 6·29 선언은 반전 및 역전의 계기이자 중간층이 보수화되는 정권의 노림수였음을 확인해줄 뿐이다. 87년의 6월 민주항쟁은 7∼9월 노동자대투쟁까지 이어지는 전 기간의 동학으로 파악했을 때만이 그 의미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다.

둘째,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관계에 대해 시민 대 노동자라는 이분법적 사고속에서 그 단절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거나, 반대로 연속성을 '직관적'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전자에 의하면 노동자대투쟁을 '6월 민주화항쟁이 열어준 정치적 공간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로 민주화와 무관하게 규정한다. 그리고 더나아가 노동자대투쟁은 순조로운 민주화를 가로막은 방해요인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한편 후자의 경우에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계급의 변혁에의 열정'이나 '계급적 직관'을 그속에 내포한 6월 항쟁도 '본질상 노동자계급에 의한 민주화 운동'이라고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양편향 속에서 노중기 씨는 노동자대투쟁의 성격을 낮은 수준의 노동자대투쟁이자, 동시에 작업장 단위로 이루어진 노동자계급 대중의 민주화투쟁으로 규정한다. 이는 양투쟁의 이질성 못지않게 동질성을 강조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즉 '작업장내 민주화투쟁'이라는 개념을 통해 노동운동으로서의 성격규정과 민주화투쟁으로서의 성격을 중첩하여 가로지른다고 본다.

그런데, 물론 6월 민주화 투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이 '민주화'라는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 민주화의 내용을 '작업장 민주주의'로 국한해서 해석하는 것은 한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순수한 정치적 행위의 의미 안에서만 한계 지우는 것이 아니라 87년 6월에서 7∼9월 노동자투쟁을 하나의 사회적 축적구조의 붕괴에 따른 정치적 변동으로 파악하는 정성진 씨의 분석이 더 의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대외 의존적이고 종속적인 세계자본주의체제의 국가·자본·노동의 관계에서 자본을 보호·엄호하는 국가, 저임금·장시간 생산방식과 배제 또는 억압적 노동통제양식을 축으로 하는 축적구조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면서 '노동진영'이 반격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를 둔다. 즉, 작업장내 민주주의라는 틀내에 국한된 '민주주의 투쟁'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축적구조에 대한 문제, 그리고 투쟁의 지형이 '공장'과 '공장을 넘어' '국가정치'적 수준으로 파급되는 계기였음이 지적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연속선상에서 92년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 구조조정'에 따른 97년 노동진영의 총파업투쟁의 의미도 도출해 낼 수 있다. 즉, 정치적 절차의 민주주의적 '제도화'라는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민주주의의 의미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지향을 함께 내포할 수 있다는 적극적 의미를 해석해 내야 한다.

셋째, 민주화 이행과정이란 측면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위치에 대한 분석 문제가 있다. 일반적으로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3세계 민주화 사례에서 노동운동은 자유화시기에 활성화되어 첫 단계 민주화 이행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때, 한국의 사례는 그러하지 못하였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예외적 사례 또는 '민주화' 역행이라는 측면까지 강조하는 보수적인 인식 스펙트럼까지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수성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의 객관적 조건과 국가의 억압적 아니 유혈적·병영적 노동통제는 노동자계급이 '시민권'도 확보하지 못한 채 존재하게 했던 그 원인으로부터 나온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자기조직화를 할 수 있는 '노동조합의 조직화'와 '정치세력화'라는 두 가지 무기 모두를 원천봉쇄 당해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특징이 80년대 '반파쇼 민주화투쟁'의 전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총화되어 87년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으로 분출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괘를 따로하고 있던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이 '접합'해서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고, 노동운동이 다른 민주화 운동을 선도하게 되어 '분화'되고 더욱 발전되어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다. 즉, 6월 항쟁은 70년대 이후 서서히 시작된 '노동운동'과 '독재타도'를 외쳤던 '민족민주운동'이 접합되어 나타난 역사이고, 이후 '노동운동'이 독자적 운동으로 분화·발전하여 나타난 것이 7∼9월 노동자대투쟁이다. 그 이후 10여년 동안 각기 운동은 발전하여 이제는 '노동운동'이 제 '민주화 운동'을 추동해 내는 결과를 낳게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96년 12월 말 '노동자총파업투쟁'은 '날치기 통과'로 격분한 '의회민주주의의 파괴'라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화의 훼손에 대한 반기라는 소극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진행중인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구조조정'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이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실질적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적 투쟁을 수행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운동의 한계는 여전히 노정되어 있다.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라는 과제, 좀더 광범위한 노동자의 조직화, 통일성과 민주집중성의 강화 등을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가 투쟁의 객관적인 파고에도 불구하고 산적해 있다. 현재 이러한 문제는 우리 운동발전의 전제이자 출발이다. 물론 이것은 다양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겠지만 현재 노동자, 진보적 지식인 및 활동가, 연구단체, 정치활동단체 등이 적극적으로 논의해야할 지점이다. 6월 민주화 투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 때 발생한 투쟁의 이슈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러한 민중투쟁의 정신속에 다시 민중운동의 역사를 일궈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87년 그 후 5년, 92년 그 후 5년, 또 97년 대선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운동의 시련으로 기록될지, 실험의 장을 통해 과거의 질곡을 극복하게 될지는 '민중운동'을 책임지는 주체, 다시말해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다. 아직도 6월 민주항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민주'라는 말의 내포적, 실질적, 참된 의미를 담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조직의 자기 고민과정이 너무나도 중요한 시기이다. 노동운동은 타계급과의 관계 및 계급내부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사고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과제가 많은 것은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한/노/정/연